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33장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33:1

파수꾼 (에스겔 33:1-9)

에스겔 예언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맹백한 명령을 받았고, 유대인들에게 예언하는 일을 마쳤다. 바로 그때 예루살렘이 침략되었고, 포위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왔었다(24:27). 그러나 2년 후, 이제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예언자는 다시금 그들에게 말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즉 여기서 그의 사명은 갱신된다. 만일 하나님이 그들을 완전히 저버렸다면, 예언을 그들에게 보내시지 않았을 것이다. 또 그들을 위해 자비를 예비해 두지 않으셨다면, "그들에게 이같은 일을 보이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대문에서는 이런 것을 볼 수 있다.

Ⅰ. 파수꾼의 직능이 나온다. 그에게 부과된 신임, 임무, 그와 그를 채용한 자들 간에 있어야 할 조건 등이 나와 있다(2,6절).

1. 파수꾼을 지명하는 이유는 공적인 위험을 예상하기 때문이다. - "하나님이 칼을 한 땅에 임하게 하는" 그런 때이다(2절). 전쟁의 칼은 어느 땅에 임하든 하나님께로부터 내리는 것이다. 그것은 "여호와의 칼," 그의 정의의 칼이다. 물론 사람이야 그것을 부당하게 휘두르겠지만 그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그런 때, 곧 한 나라가 외국의 침입을 받을 위기에 놓여 있을 때는, 적국의 모든 행동을 주시하여, 막상 공격이 닥쳐왔을 때도 놀라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래서 그 같은 정보를 미리 알아서 대처하기 위해서, 또 적당한 경보를 발하게 하기 위해서, "해변에 사람을 세운다." 즉 변방에 사람을 세운다. 적의 침입이 예상되는 곳에 사람을 배치하여, 동태를 파악하게 한다. 즉 "파수꾼" 을 둔다. 이처럼 "이 세상의 자녀들은 지혜롭다."

한 사람이 나라 전체를 위해 공적인 봉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주목하자. 방백과 정치인들은 그 나라의 파수꾼이다. 나라는 언제나 그런 자들을 고용한다. 그래서 유사시에는 공적 안전을 위해서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는 자들이 필요한 것이다.

2. 그 파수꾼이 공적 신임을 받으며 파수꾼은 그들의 신임에 따라서 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그의 임무란 이런 것이다.

(1) 적의 접근을 파악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눈을 감거나 졸아서는 안 된다. 그때는 "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2) 발견했으면, 나팔이나 총소리를 통해서 그것을 즉각 알려야 한다. 그를 파수꾼으로 임명한 자들은 그를 신임하며, 그가 이 두 가지 일을 성실히 수행하리라고 믿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생명을 그의 신실성에 건다.

[1] 그러므로 그가 임무를 행하면, 즉 온갖 위험을 적시에 파악해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면, 그는 맡은 임무를 다한 것이다. "자기의 영혼을 구원" 할 뿐만 아니라 보수도 받게 된다.

사람들이 경고를 받지 않으면, 즉 그들이 주어진 통고를 믿지 않아서 불원간 위기가 닥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면, 그것은 자신들의 잘못이다. 그들이 방심하고 있을 때 적이 닥쳐오더라도 그 칙임은 파수군이지지 아니한다. 그들의 죄는 그들의 머리에 돌아갈 것이다. 사람들이 나팔 소리를 듣고도 건방지게 불 속에 뛰어 들었다면, "칼이 임하여" 어리석은 "그를 앗아갈" 것이다. 그것은 "자살" 행위이다. 어리석은 자, 그는 "자신을 파멸시킨다."



[2] 그러나 파수꾼이 그의 역할을 다하지 아니했다면, 즉 위기를 볼 수 있었는데도 자다가 보지 못했거나 다른 데로 눈을 팔다가 몰랐다면, 또 "위험을 보기" 는 했으나 곧 방심에 빠져서 "사람들을 경고하는" "나팔을 불지 아니했다면," 어떤 사람은 "자기들의 죄악 때문에" (6절) 엉겁결에 죽음을 당하며, "주여 자비를!" 하고 말할 겨를도 못가지게 되리라. 회개하여 하나님과 화해할 시간도 못가지게 되리라. 그러나 그럴 때는 그의 죄를 "파수꾼의 손에서 "찾게 될 것이다. 파수꾼이 그의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가 "위험을 경고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수꾼이 할 일을 다했다면, 그리고 사람들도 자기들 할 일을 다했다면, 만사는 잘 될 것이다. 경고를 준 자도, 그 경고를 받아들인 자들도, 모두 자기들의 목숨을 구할 것이다.

Ⅱ. 이 사실을 예언자에게 적용해 본다(7,9절).

1. 그는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 이다. 그는 종종 열방에게 경고를 내려 왔었다. 그러나 직책상 그는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이다. 이스라엘 족속은 "예언자들의 자녀요 계약의 자녀들" 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땅의 사람들처럼 "그를 파수꾼으로 삼지" 않았다(2절). 이스라엘 족속은 그 본토인들이 자기들의 세속적 이권을 보호하는 데 지혜로웠던 것과 비교해 볼 때, 자기들의 영혼을 구하는 일에 그리 현명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조처하셨다. 즉 그들에게 한 파수꾼을 지명하셨다.

2. 예언자의 일은 파수꾼처럼 죄인들이 비극과 죄 때문에 당하는 위험을 경고해 주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입에서 들" 은 이 말을 "그늘에게 해야" 한다.

(1) 하나님께서 "악인은 정녕 죽으리라" 하셨다. 악인은 비참해진다. 회개하지 않는 한, 악인은 하나님과 일체의 위로, 그리고 희망에서 단절되며, 모든 복을 잃게 된다. 그는 영원히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으리라. 즉 하나님의 은총이 영혼의 생명이듯이, 이것은 영혼의 죽음이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일단 말하신 것을 변개치 아니하신다. 세상의 그 누구도 그 말을훼방할 수 없다. "죄의 삯은 사명이다." "죄가 다 차면 사망을 가져 오리라."

하나님의 진노는 하늘에서 알려질 것이다. 그것은 악한 제 민족들에게 멸망을 선포할 뿐만 아니라, 악한 개인들에게도 그 개인의 죽음, 곧 영원한 죽음을 선포해 준다.



(2) 하나님의 뜻은 악인들이 이런 경고를 받는 것이다. "내 경고를 들으라." 이것은 멸망을 막을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을 경고해 준다는 것은 농담에 불과한 일이 된다. 또 하나님은 멸망이 방지되기를 바란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죄인들은 다가오는 진노에 대해 경고를 받아 "그것을 피하라" (마 3:7).

(3) 악인에게 경고를 주는 것이 사역자의 임무이다. 악인에게 "그것이 결국 당신에게 해로울 것이라" 고 일러주어야 한다(사 3:11). 하나님은 일반적인 말로 말씀하셨다. "죄 지은 영혼은 죽는다." 그러므로 사역자의 임무는 이것을 특정 개인에게 적용하여, "오 악인이여, 정녕 죽으리라. 죄악을 계속하면, 그것 때문에 불가불 죽으리라. 오 행음자여, 강도여! 주정꾼이여! 거짓 맹세꾼이여! 안식일 파괴자여! 너는 정녕 죽으리라."

또 그는 죄인들에게 화를 돋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동정심을 가지고, "그의 길에서 돌이키라고 경고하며," "돌이키면 살 것이다 "라고 말해야 한다. 이것은 희중에게 말씀을 성실히 전함으로써, 또 죄악을 밝혀내어 거기에 적용시킴으로써 이루어질 일이다.

3. 만일 예언자가 임무를 다 못했기 때문에 사람이 죽는다면, 그는 책임을 져야 한다. "예언자가 악인에게 멸망을 경고하지 아니했다면, 악인은 제길로 계속 가다가 결국 "자기의 죄악에 의해서 죽으리라." 예언자가 할 일을 다 못했어도, 기록된 말씀에서 죄인들은 경고를 받고, 또 양심과 타인이 받은 심판을 통해서 경고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경우라도 악인의 파멸로 인하여 하나님은 정당화되리라. 저 마지막 날에는, 죄인들은 자기들의 파수꾼이 자기들에게 경고를 해 주지 않았다고, 그들이 부주의하고 불성실했다고 하는 것이 이유가 될 수 없음을 기억하자. 설사 파수꾼들이 그러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를 증언하는 증인을 두셨다" 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 그러나, 그런 경우에 죄인들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파수꾼도 심판을 받는다." "그의 죄를 내가 네 손에서 구하리라" 고 했다. 눈먼 인도자는 눈 먼 추종자와 함께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하나님이 죄인들의 구원을 얼마나 바라시는가 보라. 하나님은 죄인들이 능히 파멸을 예방할 수 있었는데도 그리하지 못했을 때 대단히 노하신다. 죄인들에게 죄를 지적하지 아니했으며, 그들에게 아부하며 그들이 죄의 길을 계속하게 만들고 결코 그들에게 심판이 오지 않으리라고 자만하게 만든 사역자들이 얼마나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는가도 보라.

4. 예언자가 자기 일을 다하면, 그는 비록 그 일의 실효는 못보더라도, 거기에 대한 위로를 받는다. "네가 악인에게 그 길을 경고해 주면" (9절), 즉 "그에게 죄의 결말을 분명히 말해 주고, 거기서 돌아서" 라고 확실히 말 해 주었으나, 그가 돌아서지 않고 악행을 계속했다면, "그는 자기 죄로 인해서 죽으리라." 또 그에게 주어진 그 정당한 경고가 그의 죄를 그만큼 무겁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너는 네 영혼을 구하리라." 사역자들은 비록 자기의 말을 듣는 많은 사람들의 구원을 바랐으나 그들의 구원을 이루는 일에 소용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은총에 의해서 자신을 구한다는 사실에서 위로를 받는다.

 

33:2 없음.

 

33:3 없음.

 

33:4 없음.

 

33:5 없음.

 

33:6 없음.

 

33:7 없음.

 

33:8 없음.

 

33:9 없음.

 

33:10

백성들의 트집과 그 응답 (에스겔 33:10-20)

이 대문은 이미 앞에서 본 내용이다(18:20 이하). 이것은 하나님과 그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처지를 밝혀 설명해 주는 것이다. 마치 앞 대문에 사역자가 처한 위치를 설명해 주었던 것과 같다. 그 내용을 이내 보았는데도 다시 나왔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Ⅰ.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그 백성이 내뱉은 트집을 보자. 하나님은 섭리 중에 그들과 싸우고 계셨다. 그런데도 마음에 할례받지 못한 자들은 아직도 겸손해지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비난하면서 자기들의 입장을 계속 정당화하려 애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두 가지를 주장했는데, 그것은 모두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이요, 죄에 죄를, 벌에 비극을 더하는 것이었다.

1. 하나님의 약속과 은총은 좋은 것도 아니요 신실한 것도 아니라고 대들었다(10절). 하나님은 "그들 앞에 생명을 놓았다." 그러나 그들은 탄원하기를 생명은 자기들의 손이 미칠 수 없는 곳에 있으며, 따라서 자기들은 그런 말로 인해서 조롱을 당했다고 했다.

예언자는 얼마 전에(24:23) "너희는 죄악 중에 쇠퇴하리라" 고 했다. 예언자는 이 말로 예루살렘과 유대에 대한 심판 경고를 끝냈었다. 그런데 그들은 이 말 때문에 그 예언자를 비난한다. 그 말은 절대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자기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조건부로 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기 위한 말이었다. 이렇듯 싸우기를 좋아하는 자들의 썩은 심보 때문에 하나님의 사역자들의 말은 종종 역전되고 만다. 사역자는 생명과 행복에 대한 희망으로 말을 한다. 그런데 이들은 그의 말을 뒤바꾸려 하다. 그들은 이런 말을 한다. "네가 옛부터 우리에 말했듯이, 우리의 범과와 우리의 죄가 우리의 위에 있다면," 또 네가 말하듯이 우리는 죄악 중에 쇠패할 것이고, 무익한 회개에 사로잡힌 불쌍한 포로 같다면, 어떻게 우리가 살게 되랴?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라면, 구제책이 없다. 우리는 죽는다. 망한다. 우리는 모두 망한다."

죄에 대한 경고를 받았을 때 계속 위선을 부리며 죄악으로 굳어져가던 자들이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말을 들으면, 자기들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절망에 빠져들어가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다.

2. 그들은 하나님의 위협과 심만이 불공정하기라도 한 듯이 불평을 해냈다. 이런 말을 했다. "여호와의 길은 공평하지 않도다" (17:20). 이것은 하나님의 처신이 편파적이라는 뜻이요, 사람을 외모로 판단했으며, 필요 이상으로 죄에 대해 가혹하다는 뜻이다.

Ⅱ. 이 같은 두 가지 트집에 대해서 만족할 만한 응답이 나왔다.

1. 하나님에게서는 자비를 발견할 수 없다고 하던 자들은, 하나님은 자비를 내리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계시다는 엄숙한 선언을 듣게 된다(11절). 그들이 "우리는 죄악 중에 쇠패합니다" 고 말하던 때에, 하나님은 전속력으로 그들에게 예언자를 파송하여, 그들의 형편이 비록 처참하기는 하나 절망할 것은 없다고, "이스라엘에게는 희망" 이 아직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

(1) 하나님은 결코 죄인들의 패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죄인들이 스스로 패망함으로써, 하나님이 거기서 영광을 받기는 하지만, 그 패망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돌이켜, 살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실상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는 것이 그의 최대의 자랑이며, 최대의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분명 이렇게 말씀하셨고, 맹세까지 하셨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이것이야말로 큰 위로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과 맹세가 있다. 하나님은 "맹세를 걸 어떤 위대한 이가 없기 때문에, 자기의 삶을 가리켜 맹세한다."

그들은 회개하고 개심했는데도, 과연 자기들이 "살" 것인가를 의심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기를, 참된 회개자는 살리라 하셨다. "그들의 생명이 하나님에게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대한 회개의 요청은 성실하고 정직하다. "돌아서라. 돌아서라. 네 죄에서 돌아서라." 회개란 죄악에서 돌아섬이다. 하나님은 죄인들에게서 바로 이것을 요구하신다. 또 이렇게 간곡히 반복하신다. "돌아서라. 돌아서라!" 그것은 저들이 돌아서게 되고, 지체없이 속히 돌아서게 되기를 바라서이다. 저들이 "여호와에게로 돌아서기 위해서 자기들의 행실을 고치려고만" 한다면(호 5:4),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게 너희에게 성령을 쏟아부으리라" 고 말씀하신 것이다(잠 1:23). 그리고 이리하여 하나님은 그들을 수용하실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일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간청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3) 죄인이 죄악 중에 망한다 해도, 그것은 자기들 탓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저들이 죽고 싶어서 죽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볼 때 저들은 어처구니없이 부조리하게 행동한다. "이스라엘 족속아! 왜 죽으려 하느냐?" 하나님은 그들의 말을 들으려 하는데,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려 하지 않는다.

2. 하나님에게서 정의를 찾는데 실망한 자들에게 심판의 법칙이 엄숙히 선고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생들을 대하실 때 의거하는 법칙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 심판의 공정성이 입증되어 있다. 달려가는 사람들도 그 정의성을 능히 간파할 수 있다. 한 민족으로서의 유대 민족은 이제 "죽어" 있다. 어떤 의도에도 소용없게 되었다. 따라서 이 예언자는 개개인을 상대해야 하고, 그들에 관한 심판의 법칙은 역시 민족에 대한 것과 매우 유사하다(렘 18:7-10). 하나님은 나라를 세우기도 하시고 섬기도 하실 것을 말씀했는데, 나라는 악을 행했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비를 거두시고, 그들을 멸망으로 내버려 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에게 뽑기도 하시고 파괴하기도 하시겠다고 말했을 때, 회개했다면 하나님은 선고를 취소하시고 그들을 구하셨을 것이다. 그 같은 법칙이 여기서는 그대로이다. 즉 아무리 입으로 그럴 듯한 고백을 한다 해도, 하나님을 배반한 자들은 그 배반 때문에 영원히 멸할 것이 확실하다. 또 아무리 악명 높은 죄인이라도 회개하면 하나님께로 되돌아와 영원히 평화를 주릴 것도 확실하다. 이것이 여기에 재삼재사 조되어 있다. 이유는 그 점을 다시금 숙고해야 하고, 반복해서 마음에 새겨야 하기 때문이다.

이같이 어리석고 무사려한 사람들에겐 그렇게 반복해 주어야 한다. 그들은 "여호와의 길을 공평치 않다" 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심판의 법칙은 너무나도 분명하여, 단지 그 법칙을 되풀이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1) 신앙을 큰 소리로 공언한 자들이 그 신앙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선한 일을 떠나 점점 악해지고, 세속적으로 되면, 그들이 했던 고백도, 그들이 자기들의 신앙을 위해서 오랫동안 거행했던 일체의 의식도 그들을 보호해 주지 못한다. 그들은 확실히 그들 자신의 죄악 속에서 멸망할 것이다(12,13,18절).

[1] 하나님은 "의인들" 에게는 "정녕 살리라" 고 하셨다(13절). 하나님은 말씀으로, 자기의 종들을 통해서 일러 주셨었다. 법대로 사는 자, 양심의 소리를 듣는 자, 이웃이 인정해 주는 자, 그는 살리라. 분명 그런 사람은 행복할 수밖에 없다.

또 분명하다. 만일 그가 그의 의를 계속 준명한다면, 또 그러기 위해서 성실하고 정직하다면, 또 겉보기처럼 그대로 선하다면, 그는 살리라. 그는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에 거하고, 그 사랑 때문에 영원히 행복해지리라.



[2] 의로운 자들, 곧 자신들에게 대해서 선한 희망을 가지고 있으면, 남들도 선하게 생각해 주는 자들이라도 자기들의 의를 믿는 나기지 불의에 빠질 염려가 있다. 여기에 나온 경우가 그것이다. "자고의 의를 믿고 불의를 범하면" 이라 했다. 사실 의인은 이런 처지에 들기 쉽다. 그것은 그가 자기 자신의 의를 믿었기 때문이다. 많은 훌륭한 신앙인들이 자기를 믿고 자기의 의를 과신한 나머지 패망하고 말았다. 그런 자는 자신의 의를 믿어서, 하나님은 자기에게 큰 빛을 지게 되었으므로, 잘못을 저질러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상쇄할 만한 많은 선을 창고에 쌓아두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런 망상을 한다. 이후에 그가 어떤 잘못을 행하더라도, 많은 선을 비축해 두었기 때문에 악에 말려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는 자신의 의의 공로를 신뢰한다. 이제 자기는 공로의 길을 굳건히 걸어왔으므로, 어떤 시험에 처해도 괜찮다고 믿으며, 자기의 능력을 과신하여 불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죄의 울타리에 용감히 뛰어드는 자는 결국 지옥 밑바닥에 떨어지고 만다. 바리새인들이 이래서 망한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의를 신뢰했다. "긴 기도, 주 2회의 금식이 과부를 늑탈하는 행위에 보상이 되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3] 의인이 "불의에 돌아가서" 다시 자기의 의를 회복하지 못하면, 그도 자기의 죄악 때문에 분명 죽는다. 이전에 행한 일체의 의, 기도, 연보 따위는 잊혀지고 만다. 그들의 선행에 대해 말 한마디 하지 않게 되고,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전혀 의인이 아니었던 것처럼 잊혀지고 만다. "의인의 의" 가 하나님의 진노에서 "그를 구하지 못할 것이다." 또 "그의 범과의 날에" 율법의 저주에서 그를 구해내지 못할 것이다. 의인이라도 탈취자, 배신자, 폭동자가 되면, 옛날에는 충신이었으며, 그 나라를 위해 좋은 사업을 많이 했다고 탄원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법이다.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는 살 수 없다. "옛날의 의를 기억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에도, "그가 범죄한 날" 그의 양심에도 아무 보상이 못된다. 오히려 하나님의 정의와 양심을 위해서 그의 어리석은 배교는 더 무거운 죄가 될 따름이다. 그러므로 "그가 범한 불의 때문에 그는 죽으리라" (13절). "그는 그것으로 인해서 죽으리라" (18절에 다시 나온다). 그것은 자기 자신 탓이다.

(2) 악한 생활을 했던 자가 돌이키고 개심하며, 악행을 버리고 신앙을 가지면, 그의 죄는 용서된다. 계속 새 생활을 한다면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

[1] 하나님은 "악인들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정녕 죽으리라." "지금 네가 걷고 있는 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죄의 삯은 죽음이다. 네 죄는 곧 너의 패망의 보루가 되리라." 의인에게는 "너는 정녕 살리라" 했었다. 그것은 의인의 의를 지속하라는 격려였다. 그러나 의인이 그 말을 악용하여, 범죄할 구실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데 악인에게는 "너는 정녕 죽으리라" 했다. 악행을 지속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런데 그는 이 말을 선용하여, 하나님과 의무의 길로 되돌아왔다. 그리하여 위협과 경고의 말씀도 어떤 자에게는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는 향기가 된다. 반면에 약속의 말씀도 어떤 자에게는 자기들의 타락으로 인해서 죽음에서 죽음으로 가는 향기가 된다. 하나님이 악인에게는 "너는 정녕 죽으리라." 영원히 죽으리라고 하셨지만, 그것은 그를 겁주어 바보가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황급히 떠나게 하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2] 과거에는 자기의 패망을 향해 줄달음치던 죄인이 이제는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를 힘 입어, 회개하고 새로이 거룩한 삶을 사는 자도 많이 있다. 그는 "자기 죄에서 떠나" (14절) 더 이상 그런 생활을 하지 않기로 결심을 했다. 그리고 잘못을 회개한 표지로 "전당물을 도로 준다" (15절). 그 전당물은 가난한 자에게서 무자비하게 가로챈 것이었다. 또 "겁탈물돌려 준다." 부자들에게서 부당하게 빼앗은 것을 돌려준다. 그는 "악을 그칠" 뿐 아니라, "선행을 배운다." 그는 "합법적이고 옳은 것을 행한다.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의무를 인식한다. 얼마 전만 해도 그는 하나님을 겁내지 않고 사람을 무시했다. 얼마나 큰 변화인가! 그러나 이런 놀라운 많은 변화, 복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된 일이다. 전에는 사망의 길을 가던 파멸자가 이제는 그 중간에 (잠 12:28). 그 끝에(마 19:17) 생명이 있는 하나님의 명령의 길, 곧 "삶의 법도" 를 걷는다. 그리고 이 선한 길에서 그는 "불의를 범치 않고" 살아간다. 물론 여전히 약함이 남아 있지만 불의의 권세에 시달리지는 않는다. 그는 자기가 회개한 것을 후회하지 않으며, 예전에는 좋아했던 그 많은 죄악을 다시는 좋아하지 않는다.

[3] 그렇게 회개하고 개심한 자는 지금까지 달려가고 있던 그 패망을 피하며, 그가 지은 이전의 죄도 하나님을 수용하는데 방해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자는 자기의 죄악 중에서 쇠패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죄를 고백하고 버리기 때문에, 자비를 얻는 까닭이다. 그는 "정녕 살리라." "죽지 않으리라" (15절). 16절에 다시, "그는 정녕 살리라" 고 했다. 또 19절에도 "법과 의대로 행하는" 자는 "그로 인하여 살리라" 했다. 그러나 그의 사악함이 기억되어 그를 고발하지 않을 것인가? 안한다. 그는 그 죄악 때문에 벌받지 않을 것이다(12절). 비록 매우 혐오스러운 일일지라도, "악인이 그 악에서 떠나면, 그의 악이 그를 덮치지 못한다." 그것은 그의 근심은 되었지만, 패망의 원인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제 그와 죄 사이에는 분리의 막이 생겼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 사이에는 분리의 담이 없다. 아니 그는 그가 지은 죄로 인하여 비난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가 이전에 범한 모든 죄는 "죄사함의 방해거리로나 용서에서 오는 위로의 경감제, 또는 그를 위해 예비되어 있는 영광의 감소제로써 "기억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16절).

이제 이 모든 점을 총괄해 보자. 그리고 나서 과연 "여호와의 길은 공정치 못한가," 죄인의 파멸에서 하나님은 의롭게 되고 죄인의 회개에서 하나님이 영광받는 일이 잘못인가를 판단하자. 이 문제의 결론은 이렇다(20절). "오, 너희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지금 일반적 재난을 당하고 있으나, 영적 상태와 영원한 상태에 있어서는 각자에게 구별이 있게 될 것이다. 나는 너희를 각자의 행실대로 판단하리라." 좋은 고기든 나쁜 고기든 같은 그물에 걸려 무더기로 포로가 되지만, 귀한 것과 천한 것이 구별될 때가 오는 법이며, "각자 그 행실에 따라" 되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길은 공정하고 예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자녀들" 에 대해서는, 모세에게 그리하였듯이, 예언자들에게 맡긴다(출 2:7). "그들은 네 백성이다. 따라서 내 백성이다 말하기 어렵도다." 그들로 말하면, "그 행실이 공정하지 못하다." 그들이 하나님과 그의 예언자들에게 대해서 불공정하다고 트집을 잡는 것은 부조리하고 당치 않는 일이다. 하나님과 피조물 간의 모든 불화에서, 결국은 하나님이 옳다는 것이 판명될 것이다.

 

33:11 없음.

 

33:12 없음.

 

33:13 없음.

 

33:14 없음.

 

33:15 없음.

 

33:16 없음.

 

33:17 없음.

 

33:18 없음.

 

33:19 없음.

 

33:20 없음.

 

33:21

유다 거민에게 주는 메시지 (에스겔 33:21-29)

Ⅰ. 갈대아인들을 통해서 예루살렘 방화소식을 에스겔이 들었다. 그 도성은 포로 후 제 11년 5월에 소화되었다(렘 52:12, 13). 그 소식이 포로기 제 12년 10월에 한 목격자에 의해서 이 예언자에게 전해진 것이다(21절). 이 일은 그 사건이 있는 지 거의 1년 5개월 후이다. 예루살렘과 바벨론 간에는 당시 그 어느 때보다 빈번한 왕래가 있었을 것이다. 그는 오래 전에 이미 그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피난 해 온 자의 입으로 듣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을 것이고, 그의 진술은 자세하고 감동적이었을 것이다. 또 그가 왔다는 것은 앞으로도 간신히 불을 피해 도망쳐 오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전조였다. "그 날에 도망치는 자가 네게 올 것이니," "너의 귀에 그것을 들려 주며," 이전보다 더 자세히 말해 줄 것이다(24:26). 그는 Quaeque ipse miserrima vidi - 즉 이런 비극상을 내가 보았다고 말할 것이다.

Ⅱ. 그가 받은 거룩한 인상과 영향력은 이 비극적 소식을 듣고 견딜 준비를 해 주었다. "그가 오기 전에,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내 입을 열어" (22절)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게 했다. 그 내용이 바로 본장의 전반부에서 우리가 본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는 더 이상 잠잠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자유로이, 담대히 예언했다. 그 사건이 오히려 그가 진짜 예언자임을 입증해 주었기 때문이다. 24장에서부터 본 33장 까지의 모든 예언은 열방들과 관계를 지니고 있던 것이다. 아마 예언자는 이 말씀들을 여호와께로부터 받아 말로 전하지 않고 글로 전했던 것 같다. 그가 "암몬 족속에게, 두로에게, 바로에게 말한다" 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당자들에게 서한을 보냈을 것이다. 마치 말을 할 수 없었을 당시의 스가랴가 글로 뜻을 전했던 것과 같다. 이로써도 그는 예언자의 직능을 여전히 잘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말을 하지 아니하는 사역자들이라도 글을 쓴다거나 방문을 함으로써 많은 선한 일을 해낼 수 있음을 기억하자.

그러나 지금은 예언자가 "입을 열었다." "자기 백성에게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아마 에스겔은 지난 3년 동안 친구처럼 그들에게 계속 말을 했고, 이전에 말했던 것을 다시 상기시켜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감받은 예언자로서 말한 것은 "여호와의 손이 그에게 임한" 지금이 처음인 것 같다. 여호와의 손이 임함으로써 그의 사명은 갱신되었다. 새로운 지시가 주어졌다. 그래서 "입을 열었다." "그가 해야 할 말" 을 더욱 담대히 전할 수 있었다.

Ⅲ. 그가 받은 메시지는 아직 "이스라엘 땅" 에 남아 있던 자들, "그 황폐한" 땅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에게 대한 것이었다(24절). 죄가 무슨 일을 하는지 보라. 이스라엘의 "도성들" 이 이제는 폐허가 되었다. 모두 황폐했기 때문이다. 칼과 포로의 운명을 간신히 피한 약간의 사람들이 계속 남아서 재정착을 꿈꾸고 있었다. 이것은 예루살렘과 파괴 후 상당히 오랜 일이었다. 이 일이 있기 조금 전에 그달랴(겸손한 사람이었다)와 그의 친구들이 살해되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아마 당시 요하난과 그에게 가담한 "오만한 사람들" 은 기고만장이었던 것 같다(렘 43:2). 그리고 그들이 애굽으로 갈 작정을 하기 전에, 예레미야가 그들을 비난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서 그대로 살겠다고 버티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시 여기서 에스겔이 그런 자들을 비난한다. 그리고 아마 그에게 예루살렘 소식을 가져 온 자를 통해서 이 메시지를 전했을 것이다.

아니면 여기에 나온 예언의 대상자들은 본토에 남아 있던 다른 유대인들, 즉 요하난과 그의 일당이 애굽으로 간 다음 거기서 뿌리를 박고 그 땅을 독점할 마음을 먹은 자들일 것이다.

1. "이스라엘의 황무한 땅" 에 사는 이 남은 자들의 교만에 대한 설명을 보자.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는 지금까지 대단히 어려운 것이었고, 여전히 어려움이 경고되고 있는 터였지만, 저들은 거만한 태도와 방심한 마음을 가지고서, 자기들의 평화를 믿고 있었다. 예루살렘이 침략받았다는 소식을 예언자에게 전한 자는 아마 이들이 하던 말을 말해 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친히 예언자에게 얘기해 주셨다. "그들은 말하기를, 이 땅은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어진 것이로다(24절). 우리의 선조가 갔으니, 지금은 남은 우리들의 것이로다. 게다가 상속할 자들이 없으니 자연히 우리 것이 되었도다. 이제 대지의 중심에 홀로 거하면서, 모두를 차지하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자들이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었다. 이기심과 폐쇄된 마음의 소유자들이었다. 저들은 패망 속에서도, 거기에서 어떤 이유를 발견할 수 있는 한은 마냥 즐거워하고 있었다. "모든 땅이 황폐" 해진다 해도 걱정하지 않을 듯했다. 그래 봤자 소유권은 자기들만의 것이니까. - 교만에 가득찬 자들의 가련한 유산이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경우와 자기들의 사정을 비교하면서 이렇게 자랑했다.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이런 식의 말이다. "아브람은 한 사람, 곧 한 가족이었다. 그리고 그가 이 땅을 물려받았다. 그리고는 거기서 여러 해를 조용히 지냈다. 그런데 우리는 수가 많다. 여러 가족이다. 때문에 그 땅은 우리의 유산이다."



(1) 저들은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자기들도 그 땅의 권리를 주장할 보장은 하나님께서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이 이 땅을 자기를 경배하던 한 사람에게, 그 예배에 대한 보상으로 주었었다면, 우리에게야 더욱 주시지 않겠는가? 우리는 여럿이서 그를 경배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엄청난 과신이었다. 자기들의 공덕을 자랑함이요, 자기들이 그 조상 아브라함보다 훌륭하다는 식의 말이다. 사실은 아브라함도 그 행위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2) 아브라함이 그 경쟁자들에게 대해 했듯이, 그들은 자기들도 갈대아인들이나 그밖의 침입자들에 대해 그 땅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한 사람뿐이었던 아브라함이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었다면, 엄청나게 많은 우리들, 그의 훈련된 하인 300명 보다 많은 우리들도 차지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자기들의 힘에 대한 과신이다.

2. 이 교만에 쐐기가 가해진다. 하나님의 섭리가 그들을 겸손하게도 두렵게도 못했으므로, 다시금 능히 그렇게 할 만한 소식을 보낸다.

(1) 그들은 겸손케 하기 위해서, 에스겔은 그들이 지금껏 계속해 오던 악을 얘기해 준다. 그 악은 이 땅에 대한 소유권의 주장 자격을 완전히 박탈해 버렸다. 따라서 하나님이 그 땅을 주리란 기대는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잇따른 심판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은총의 기회로 이용하지 못했다. 아직도 개심되지 않았다. 어떻게 "그들이 이 땅을 차지하리라" 기대할 수 있는가? "너희가 이 땅을 차지한다고? 도대체 너희같이 사악한 자들이 어찌 그럴 수 있으리요? 어떻게 내가 너희를 자녀들 중에 두며, 너희에게 이 좋은 땅을 주랴?" (렘 3:19) "분명히 너희는 스스로를 반성할 줄 모른다. 그러했더라면 이 땅을 차지할 생각보다는 목숨인들 부지할까 하고 걱정했을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얼마나 악한지 아는가?"

[1] "너희는 금단의 과실을 게의치 않았도다. 즉 너희는 피 있는 고기를 먹었다." 이것은 하나님이 노아와 그의 자손에게 땅을 주면서 말해 주었던 계율에 정면으로 대립되는 것이다(창 9:4).

[2] "우상 숭배, 계약을 파괴하는 죄, 곧 하나님이 특별히 노여워하시사 너희 땅을 황폐케 해 버린 그 죄다. 아직도 너희가 즐겨 범하는 죄이며, 지금도 그 죄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가득하다. 너희는 우상들에게로 눈을 든다. 즉 과거처럼 우상에게 그렇게 심히 무릎을 꿇치는 않더라도, 우상에 대해 사모의 정만은 그대로이다."

[3] "너희는 강포하고, 잔인하고, 야만적이다. 너희는 피 곧 무죄한 피를 흘린다."

[4] "너희는 자신들의 힘, 자신들의 팔, 자신의 힘을 믿으면서 하나님과 그의 섭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너희는 너희의 칼을 믿었다(26절). 너희는 너희 앞에 닥치는 모든 것을 너희 군대의 힘으로 물리치고 정복하리라 생각한다." 이스마엘의 심보를 가진 자들, "모든 사람을 치는 손" 을 가진 자(창 16:12), 또 에서처럼 "칼로 살겠다" 고 결심하는 자(창 27:40)가 어떻게 이삭의 유산을 기대하리요? 우리는 이런 자들을 만나보았다(32:27). 즉 자기들이 목 밑에 칼을 지니지 않는 한 땅 밑에서도 편히 지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여기서는, 살아 있으면서 자기들의 발 밑에 칼을 두지 않는 한 땅 위에 제대로 서 있을수도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본다. 그들은 마치 칼을 가장 푹신한 베게나 튼튼한 기둥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칼을 먼저 쓰는 것은 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능과 약속을 굳건히 믿으며,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머리를 묻으며, "자기 자기의 칼을 신뢰하지 아니하는" (시 44:3) 자들도 세상에는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하나님께 찬미를 돌리자.

[5] "너희는 온갖 종류의 가증한 일을 저질렀다. 특히 너희 이웃의 아내를 더렵혔다. 이것은 가장 추잡한 것이다. 그러고도 땅을 차지하겠는가? 도대체 너희 같은 불한당들이?"

주 여호와를 거역하며 사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거나" 금생과 내세에 참된 행복을 기대할 수 없음을 명시해 두자.



(2) 그들이 두려워 떨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예비해 두신 심판을 이야기해 준다. 그 심판은 그들을 완전히 멸절시켜 그 땅을 차지하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 땅을 치는 적을 대적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그들이 말하는가? 하나님은 맹세코 그들이 차지하지 못할 것이라 말씀하신다.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하나님은 자기가 죄인의 죽음을 결코 기뻐하지 않는다 하셨지만, 회개치 아니하고 불신앙을 고집하는 자들은 "결단코 안식을 누리지 못할 것이라" 고 맹세하신다.

[1] 여기서 "황무" 하다고 말하는 그 도성들에 거하는 자들은 "칼에 넘어질" 것이니, 그달랴 살해에 대한 복수를 갚기 위해 오는 갈대아인의 칼이나 내란을 일으키는 동족의 칼에 쓰러질 것이다.

[2] 평야에 사는 자들은 "들짐승들에게 잡아 먹히리라." 사람이 살지 않게 되면 시골에는 짐승들이 들끓게 된다. 짐승들을 지키거나 다스릴 자가 없기 때문이다(출 23:29). 적군이 시골에서 떠났다 해서, 안심할 수 없는 법이다. "들짐승들" 은 가혹한 4심판의 하나였다(14:15).

[3] "산성과 굴" 에 있는 자들, 자기들은 천연 요새나 인공 속에 있어서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자들 - 그들은 사람들이 찾아내지 못할꺼라고 믿었다 - 이라도 하나님의 화살을 찾아낼 것이다. 그들은 "온역으로 죽을" 것이다.

[4] 비록 이스라엘의 땅, 가장 영광스런 땅이었지만, 그 땅 전체가 "지극히 황무하게" 되리라(28절). 그 땅은 "황무지와 놀라움이 되리라." "이스라엘의 산," 유명했던 산들, 예기치 않았던 그 거룩한 시온 산도 "황무지가 되리라." 아무도 살 수 없는 곳이 되며, "아무도 자라나지 않게 될 것이다. "미리 예고된 대로(신 28:62) "너희는 소수만 남으리라."

[5] 이전에는 그토록 의지하고 자랑하던 "그 전능의 교만" 이 그치리라.

[6] 이 모든 경과는 참혹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그들이 범한 가증한 일로 "인한 것이었다. 나라로 황무지가 되게 하는 장본인은 바로 죄이다. 따라서 우리는 죄를 "가증한 일" 이라 칭한다.

[7] 그러나 이 모든 것의 결과는 대단히 좋았다. "그때 그들이 내가 여호와인 줄 알게 되리라." 곧 자기들의 여호와임을 알고, 다시 충성을 바치리라. "곧 내가 그 땅을 황무지로 만든 그때" 이니라. 모든 세상 위로가 끝나고 황무지가 되었는데도, 하나님을 의지할 때가 왔다는 것을 모르는 자들은 구제할 도리가 없다.

 

33:22 없음.

 

33:23 없음.

 

33:24 없음.

 

33:25 없음.

 

33:26 없음.

 

33:27 없음.

 

33:28 없음.

 

33:29 없음.

 

33:30

포로들에게 주는 교훈 (에스겔 33:30-33)

앞에서는 이스라엘 땅에 남아서 자비의 기념비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아니했던 유대인들에 대한 책망이 있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채찍을 맞아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자들을 책망하는 얘기가 나온다. 그들도 여전히 개심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은 남아 있는 자들처럼 그런 큰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약간의 신앙심은 발휘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아직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지 못했다.

그들이 책망받고 있는 것은 "여호와의 사자들을 조롱" 한다는 것 때문이다. 이것은 저들에게 이같은 폐망을 초래했고, 그들의 그릇을 마지막 채우는 그런 죄였으나 아직껏 고쳐지지 아니한 것이었다. 그들은 두 가지로 예언자 에스겔을 조롱했다.

Ⅰ. 그들은 에스겔을 근거 없이 헐뜯었다. 사사로이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멸시하려 했다. 예언자는 그것을 몰랐다. 그는 오히려 자기를 면전에서 칭찬하는 자들은 존경심이 가득한 줄로 생각하여, 등 뒤에서는 자기를 비난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실을 말해 주셨다. "인자야 네 민족의 자녀들이 네 얘기를 한다" (30절). 즉 헐뜯은 말을 했다는 것이다. 공직에 있는 자는 세인들의 말거리가 된다. 모든 사람들이 제멋대로 그들 얘기를 한다. 신실한 사역자들은 남들이 매일같이 얼마나 자기들을 비판하는지 모른다. 모르는 것이 다행이다. 그것을 안다면, 일을 계속할 용기가 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종들을 모함해서 하는 모든 말을 기억하고 있다. 그들을 헐뜯는 말뿐 아니라 그들을 비난하는 줄, 공적인 비평뿐 아니라 밀실에서, 아침저녁 지껄이는 얘기까지, "담벽에서나 문간에서" 하는 모든 얘기를 주목하신다. 말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해서, 주의 종들을 모해하면,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종들이 늘 주정꾼의 노래가 되는 것을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예언자의 직책을 방해하지 않았지만, 함부로 입을 놀려 예언자를 조롱했기 때문이다. "자 오라 여기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이 나오는지 들어보자." "어쩌면 새롭고 재미있는 말, 얘기거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는 식의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위대한 특권을 누리던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희롱하는 엄청난 불경죄를 저지른다. 신성한 일을 신성한 마음씨로 말해야 한다.

Ⅱ. 그들은 에스겔의 집전에 협조하는 척하면서 그를 속인 것이다. 위선자들은 하나님과 그 종들을 조롱한다.

1. 이들은 그럴 듯한 고백을 했다. "입과 입술로는 하나님께 가깝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마음은 그에게서 먼 자들" (마 15:18)과 같다. 그들은 은총의 방편(예배)에 열심히 침례한다. "그들도 내 백성처럼 네 앞에 나아온다."

바벨론에서 성전이나 회당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언자의 집으로 모였다(8:1). 그런데 이 위선자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하는대로," 열성껏 모여들었다. 그들은 공적인 집회에 부지런히, 그리고 점잖게 참여했다. 또 전파하는 말씀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예언자에게 큰 친절과 존경을 보이는 척했다. 등뒤에서는 그럴 수 없었으나, 면전에서는 그에게 "그들은 많은 사랑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크게 즐거워했다. 그들에게는 에스겔이 "즐거운 음성을 지닌 자" 중의 하나였고, 노래를 잘하는 자였으며, "악기를 잘 타는 "자였다. 사람들은 말씀을 통해서 자기들의 공상을 즐길 수 있으나, 양심에는 기별도 안 가며, 마음은 그대로 있고, 귀는 즐거우나 부패한 심성을 그대로 있는 경우가 있다.

2. 이들의 위선을 보자. 그들은 "많은 사랑을 보이나," 오직 "입으로만" 이요. "마음은 이욕을 좇는다." 그들은 과거처럼 여전히 세상에만 관심을 쏟는다. 그들은 "네 말을 들으나," 들을 뿐이지 "준행하지 아니한다" (31절)

3. 이러한 자들의 결국을 보자. "그들의 불신앙" 과 부주의가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 소용없게 할 것인가?" 절대로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은 자기의 종의 말을 실천시킬 것이다. 그들이 그 말을 업신여겨도 소용없다(33절). 그 말이 응하는 날에는, "그들이 알 것이다." "그들 중에 한 예언자가 살았었다" 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막대한 희생을 치른 다음이다. 그때 그들은 이전처럼 그가 "즐거운 음성" 을 낸다고 생각지 못할 것이다.

자기들 중에 있는 예언자를 중히 여기지 않으며, 예언자들이 방문을 계속해 주는 동안을 선용하지 아니하는 자들은 "자기들에게 평화를 주는 길이 자기들 눈에는 숨겨졌었다" 는 사실을 깨달을 날이 오리라. 그들에게 책망을 하던 에스겔이 가고 나면, "다시는 예언자가 없으리라." 자비의 가치를 그 자비를 선용함으로써 깨닫지 못하던 자들은, 그 자비가 끊어진 다음에야 그 가치를 알게 될 것이다.

 

33:31 없음.

 

33:32 없음.

 

33:33 없음.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