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죄악(1) (에스겔 22:1-16)
이 대목에서 하늘의 위임을 받는 예언자가 재판석에 재판관으로서 앉는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법정에 선 죄수처럼 그의 손을 결박당하게 된다. 하나님이 열방에도 선지자들을 세웠다면, 자기 백성에 대해서는 더하지 않겠는가! (렘 1:10) 이 선지자는 피흘리는 성읍, 즉 피의 성읍을 재판할 권위를 갖게 된다. 예루살렘이 그렇게 불리우는 것은 저들이 특별히 피흘리는 죄를 지었을 뿐 아니라 대체로 그 죄가 잔악했기 때문이다(7:23). 그래서 예루살렘은 그 피로 더럽혀졌고, 따라서 피를 마시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이제 악인을 심판할 이 심판자의 직임은 그들의 범죄를 깨우쳐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판결을 내리는 것이다. 이 두가지가 에스겔이 여기에서 행할 일이다.
Ⅰ. 그는 예루살렘이 많은 극악무도한 범죄들에 대한 죄책이 있음을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에 여기서 긴 기소장에 설명된다. 그것은 billa vera - 즉 진실이 소장이다. 그래서 그는 거기에다 사실에 따라서 누구의 재판인지를 알 수 있도록 명기한다. 그는 "모든 가증한 일을 예루살렘에게 알게 해야" 한다(2절).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그들에게 임하게 한 모든 황폐한 일들을 통해서 의로우심을 인정받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예루살렘의 비난받게 되는 모든 죄들을 생각해 보자. 그것들은 모두가 극도로 죄악스럽다.
1. 살인. 그 성읍은 피를 흘린다. 이방인들이 사는 교외에서 뿐만 아니라, "그 한복판에서도" 그러했다. 거기에는 행정관들이 지키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거기에서도 사람들이 살해되었으니, 결투에서 혹은 전쟁에 의해서, 독살에 의해서, 혹은 법의 기치 아래서 법정에서 그리되었다. 그리고 법에 따라 살인자들을 발견하여 처벌하려고 하는 어떠한 조처도 없었으며(창 9:6), 혐의만 받고 있는 불확실한 살인자를 용서하기 위한 아무런 의식도 사용되지 않았다(신 21:1). 그러므로 죄악과 불결이 여전히 그 성읍에 있었다. 그래서 "네가 흘린 피로 인하여 죄가 있게 되었다" 고 했다(4절). 이 범죄가 어떤 죄보다도 더욱 예루살렘의 범죄 분량을 가득 채움이 강력히 주장되고 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으시는 죄이다(왕하 24:4).(1) "이스라엘의 방백들," 그들은 권리의 침해를 받은 무흠한 자들의 보호자들이어야만 했으나, 모든 자들이 그들의 권력을 피흘리는 데에 사용했다(6절). 피를, 그것을 갈망했고, 그리고 그것을 즐거워했다. 그리고 그들의 손아귀에 든 사람치고 온전한 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2) "피흘리려고 이간을 붙이는 자들" 이 있었다(9절). 그들은 방백들에게 사람들을 무고함으로써 그들에게 대하여 노하게 했다. 그들은 그것이 방백들을 기쁘게 하는 줄 알았다. 혹은 그들의 사사로운 대화 가운데서 나온 말을 폭로하여 그들로 불화하게 하고, 서로 물고 먹으며 근심케 하여 죽음에까지 이르게 했다. 불쾌한 말을 함으로써 형제 사이에 불화를 뿌리는 자들은 그 뒤에 오는 모든 해악의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즉 불을 지른 자가 그것이 일으키는 모든 해(害)에 대해서 책임이 있는 것과 같다.
(3) "피를 흘리려고 뇌물을 받는" 자들도 있었다(12절). 즉 그들은 돈을 받고 고용이 되어 생명을 취하기로 맹서하는 자들이거나 혹은 만일 그들이 해를 당케 된다면 부죄한 자를 혐의받게 하도록 뇌물을 받는 자들이다. 이러한 야만적인 살인이 예루살렘에서 너무나 많이 자행되었으므로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릴 수 있다.
[1] 즉 인간의 양심은 비참하게 부패되어 마비되었으며 그들의 마음은 완악하여졌다. 왜냐하면 이런 것을 망설이지 않는 자들은 무슨 악이든 망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 조용하고, 해를 끼치지 않고 선한 많은 사람들은 도망치고 말아서, 그 성읍의 죄악이 증가하여 심판이 왔을 때에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기 위하여 중재에 나설 만한 사람들이 없어졌다.
2. 우상 숭배. "그녀는 우상을 만들어 스스로 파멸한다" (3절). 그리고 다시 "너희는 너희가 만든 우상으로 스스로를 더럽혔다" (4절)고 했다. 스스로를 위하여 우사을 만드는 자들은 스스로를 더럽게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상 숭배자들은 스스로를 속이며, 스스로 파멸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것으로 인하여, 그들이 스스로를 더럽히는 것 이외에도 의로우시며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미움을 산다. 심지어는 "그들의 양심이 더럽혀져," 그들에게는 "순결한 것이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된다."
직접 우상을 만들지 않는 자들은 또한 "그 산들에서 혹은 산당에서 제물을 먹는" 혐의가 있음이 발견되어(9절), 결과적으로 우상을 섬기며 우상 숭배자들과 교제한 사실이 드러난다.
3. 부모들에 대한 불순종(7절). "너희 자녀들은 그 부모를 업신여기며, 그들을 조롱하며 그들을 저주하며," 순종하기를 경홀히 여겼다. 그것은 자녀의 태도는 물론이요 성품이 보통 이상으로 타락했음의 증거이다. 그리고 온갖 무질서한 태도에로 향하는 성향의 표지이다. (사 3:5). 자기 부모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은 온갖 악으로 질주하고 있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부모의 권위를 받들어 주는 많은 율법들을 주셨지만, 전혀 실천되지 아니했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바리새인들은 당시에 자녀들을 가르치기를, 고르반(Corban)을 구실로 하여 그들의 부모를 업신여기에 하며, 부모 부양하기를 거절하게 했다(마 15:5).4. 압제와 착취. 그들은 부유하게 되기 위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부당하게 행했다(7절). "그들은 외인을 압제와 속임으로 거래하였다." 즉 외국인의 궁핍과 이스라엘 나라의 법률과 관습에 대한 무지를 이용했던 것이다. 또 피압박자들에게 피난처가 되어야 했던 예루살렘에서까지도 부당한 요구들과 심문들 혹은 성가신 소송으로 "고아와 과부들은 괴로움을 당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부정의가 편만하고 있었다. "너희는 변전과 이식을 취했다(12절). 즉 너희 안에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너희도 그것을 행하였다." 그것은 그 성읍의 혹은 그 공동체 전체의 행위였다. 즉 공공자선에 사용되어야 할 공금이 착취와 함께 변전으로 쓰였다. "너희가 너희 이웃들에게서 폭력과 비행으로 욕심스럽게 이익을 취했다." 이웃들이 정당한 개래와 방법으로 서로 이익을 얻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利)에 급급한 자들" 은 공평의 법칙을 지키지 못한다.
5. 안식일과 그밖의 성물(聖物)들의 모독. 이것은 그들이 여기에서 기소받는 다른 죄들과 함께 범한 것이다(8절). "너희가 나의 거룩한 것들을 업신여셨다." 즉 거룩한 신탁들과 거룩한 의식들을 업신여겼다. 하나님께서 지시한 의식들은 너무 평범하고 너무 일상적인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들을 업신여겼으며, 결국 이교도의 풍습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부도덕과 부정직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종교의 경멸과 함께 오게 된다는 점을 주시하자.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더럽혔다." 사람들은 거룩한 성읍 예루살렘에서조차 기대했던 바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알식일을 범하는 것은 불의한 일이며, 모든 불의에 이르는 입구가 된다. 무엇보다도 많은 자들의 경우 바로 이 불의를 행함으로써 파멸을 재촉했다.
6. 부정결함, 그리고 제7계명을 어긴 모든 죄악. 즉 하나님이 의로운 심판을 내리신다. 그들의 우상 숭배와 성물들의 모독에 대한 벌로써 그들을 제멋대로 버려둠으로써 온 악한 영향들의 열매들이다. 예루살렘은 그 순결함으로 유명했으나 이제 "너희 가운데 음행하는도다" (19절). 가장 불명예스런 것임에도 불구하고 뻔뻔스런 음행이 자행된다. 자기 아비의 아내를 취하는 일과 같은 짓이다. 이것은 "그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드러내는 것이며" (10절) 극도의 혐오가 없이는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죄악이다(고전 5:1). 그리고 그것은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사형에 처할 범죄이다(레 20:11). "품에 안는 것을 삼갈" 때가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전 3:6). 월경하는 부정한 여인에게도 구합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웃의 아내와 며느리와 혹은 누이와 음행을 행했으니(11절) "하나님께서 이 일들로 징벌하지 않겠는가?"
7. 하나님께 대한 무관심이 이 모든 악의 밑바닥에 있었다(12절). "너희가 나를 잊어버렸도다. 그렇지 않았다면 너희가 그렇게 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죄인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을 격노케 하는 일을 행한다. 그들은 그로부터 받을 그들의 상속을 잊어버리고, 그에 대한 의존, 그에 대한 의무를 망각했다. 즉 그들은 그의 은혜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잊고서, 스스로 그것에 합당치 못하게 행하며, 그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잊어버리고 스스로 하나님께 불쾌하게끔 행한다.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을 망각한 자들은 자기들의 길을 그르친다" (렘 3:21).
Ⅱ. 그는 이 범죄 때문에 예루살렘에 심판을 내려야 한다.
1. 예루살렘에게 이제 그 불의의 분량이 가득 차서, 그 죄들이 지체 없이 신속한 보응을 부르짖고 있음을 알려야 한다. 예루살렘은 "자기의 때가 오게 했고" (3절), "자기의 날들이 가까이 오게" 했다. 그리고 그가 징벌을 받을 횟수가 찼다. 마치 "성년이 되어," 유산을 물려 받을 준비가 된 자식과 같았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더 오래 참으려 했지만, 그들의 죄가 무분별한 극에 달했으므로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의 날들을 허락할 수 없었다. 남용된 인내는 마침내 한계에 부닥친다는 것을 기억해 두자. 그리고 솔로몬이 말하는 바와 같이 죄인들이 "지나치게 악하여지면" "제 때가 되기 전에 죽게 되며" (전 7:17), 그들의 유예 기간이 단축되고 만다.2. 예루살렘에게 그들은 모든 이웃들의 경멸과 모욕을 받게끔 되었으며,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그렇게 드러내신 것은 옳았음을 알려야 한다(4절). "내가 너희를 이교도들에게 비난거리가 되게 하였다." 그들은 모두 예루살렘의 배교와 타락의 목격자들로서 "가까이 있는 자들" 이며, 또 멀리 있지만 그것을 알 만한 자격이 있는 "멀리 있는 자들" 이었다(5절). 그들이 모두 "너희를 조롱할 것이다." 예루살렘이 하나님께 의지했으므로 그의 이웃들에게 비난거리가 되었을 때는 오히려 그것이 그들의 명예가 되었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비난을 제거시켜 주실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하나님을 반역하므로 조소를 받으니, 그들은 마땅히 수치를 당해야 하며,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시다" 고 말해야 한다. 그들이 지금 자행하는 예루살렘의 죄들이 매우 악명 높기 때문이다. 즉 예루살렘은 악명이 높았고 이름이 더럽혀졌으며 명성을 완전히 상실했다. 또 징벌이 매우 극심했기 때문이었다. 즉 예루살렘은 그 당하는 고통으로 인하여 한없이 괴로워했으며 침식되었다.
3. 예루살렘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죄악을 기뻐하지 않으시며, 극도로 싫어하시며, 거기에 거슬로 행하시며, 거슬로 증거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라(13절). "나는 네가 부정직한 소득을 얻는 것을 인하여 손뼉을 쳤다." 즉 하나님은 그의 예언자들과 그의 섭리를 통해서 그들의 불겨이기건함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진노를 나타내셨다. 또한 그는 그들이 범죄한 압제와 그들의 살인죄들(" 네 가운데 피 흘린 일")과 그밖의 모든 다른 죄들에 대해서도 진노를 나타내셨다. 하나님은 그가 자기 백성의 악행에 대해서 얼마나 분노하는가를 충분히 밝혀 주셨었다. 또 그들은 정당한 경고도 받았던 터였다. 즉 그가 죄인에게 "그의 손을 내리치기" 전에 먼저 죄에 대해 "그의 손뼉을 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정한 소득" 즉 압제로부터 얻은 소득을 경멸해야 하며, 뇌물을 취하는 일에서 손을 떨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하나님이 "그의 손을 치시는" 죄이기 때문이다. (사 33:15).
4. 예루살렘에게 그가 아무리 자만하고 확신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의 적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도록 하여야 한다(14절).
(1)그는 파멸을 당하리라. "나 여호와의 그것을 말하였으며 그것을 행할 것임" 을 확신하게 되리라. 약속에 참된 자는 또한 경고에도 참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한 번 말한 것을 변개하는 사람 따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2) 예루살렘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기가 하나님과 다를 수 있으며, 그의 심판에 굴하지 않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날을 무시했다(사 5:19).
(3) 그러나 예루살렘은 자기의 입장을 하나님에게 밝힐 능력이 전혀 없음을 확신하게 되리라. "내가 네게 보응하는 날에 네 마음이 견디겠느냐? 네 손이 힘이 있겠느냐? 너는 생각하기를 네 자신과 같은 사람들과 관계하리라 하지만 너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 안에 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다음을 관찰하라.
[1]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보응하실" 날이 다가 오고 있으니, 곧 천벌의 날이다. 그는 징벌로써 어떤 이들은 회개하도록 하신다. 그리고 그가 징벌하실 때는 그 심판을 저항할 수가 없다. 그는 또 어떤 자들은 멸망에 이르도록 행하신다. 그는 죄인들을 현생에서도 다스리신다. 그 때 그는 그들에게 쓰라린 심판을 가져온다. 그러나 영원한 날은 특히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스리는 날이다.
[2]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다스리게 될 때는,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참을 수 없고, 저항할 수 없는 것임이 나타날 것이다. 그것을 견뎌낼 만큼 억센 심장은 없다. 저주받은 죄인들은 그들의 고통을 잊을 수도 없으며 업신여길 수도 없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고통 중에 자신들을 지탱할 어떤 힘도 갖지 못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매를 막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으며, 진노의 날에 결박되는 사슬을 부수어 버릴 만한 강한 손을 지니고 있지도 못하다. "누가 하나님의 진노의 힘을 아는가?"
5. 예루살렘으로 하여금 그가 이교도의 길로 갔고, 그리고 그들의 행위를 배웠으므로 그것에 상당하는 대가를 받으리라는 것을 알게 하라(15절). "내가 너희를 너희 본토에서 쫓아내고 열국으로 보낼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그들 가운데 흩으며, 여러 나라들 가운데 헤쳐, 그들로 학대를 받게 하며 모욕을 당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시려고 취하셨던 모든 조처에도 불구하고 그의 "더러움" 과 "불의" 가 계속되었기에(그들이 "정결케 되기를 원치 않았다." 렘 13:27), 하나님은 심판에 의해서 "그에게서 더러운 것을 소멸하실 것이다." 즉 불치의 악을 가진 자들은 파멸시킬 것이며, 선하게 되려는 자들은 개심시키실 것이다.
6. 예루살렘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를 포기하시고 내어버리실 것을 알게 하라. 하나님은 그의 유산이며 몫이었다(16절). 그러나 이제는 "네가 너의 유업으로 수치를 당할 것이며, 스스로 바꾸리라. 그리고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이를 얻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더 이상 너를 위하여 보증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의 육정에 의해 지배되도록 자기를 내던지는 자들은 육정에 의해 운명이 좌우되도록 버림받는 것이 당연하다. 자신을 자기의 주인으로 삼는 자들은 자신의 손들이 제공할 수 있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위로와 행복을 기대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것의 결국으로 비참한 운명을 기대해야 한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느니 그들은 이미 자기 상을 받았느니라. 너희의 생전에 너희가 좋아하는 것들을 받았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말이다. 즉 "네가 자기 까닭으로 수치를 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야, 열국의 목전에서 수치를 당하게 됨으로써 때늦은 뒤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며, 나만으로도 내 백성을 위한 충분한 몫이 됨을 알리라."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상실한 자들은 그것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의 죄악(2) (에스겔 22:17-22)
동일한 우울한 선율이 여전히 울리고 있다. 그리고 다양한 변조들에 거기에 주어진다. 그래서 이것은 애처롭게 되었고,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게 되었다. 예언자는 여기에서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찌끼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찌꺼기처럼 불타버릴 것임을 나타내야 한다. 다윗이 세상의 약한 자들에 관하여 했던 말이 여기에서는 교회의 악한 자들에 관하여 말하여진다. 이는 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했기 때문이다(시 119:119). "주께서 세상의 모든 악인을 찌끼같이 버리시나이다."
Ⅰ. 여기에서 이스라엘의 집의 타락한 자들이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지를 보자.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에 그 나라는 "황금 머리" 를 지닌 번영기였다. 그 왕국이 분할되었을 때는 은으로 된 팔들과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1. 그것은 보다 못한 금속으로 즉 그것은 이전의 모습과 비교할 때 아무 가치도 없는 것으로 타락되었다. "그들은 모두 놋이나 상납이나 철이나 납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 중에 다양한 종류의 죄인들이 있음을 의미하게 된다. 그들이 놋이라는 것은 죄악 가운데 있는 어떤 자들의 거만함을 의미한다. 즉 그들은 철면피한 자들이다. 그리고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그들의 신발이 "철과 놋" 있었다(신 33:25). 그러나 지금은 그들의 이마가 그러하다(사 48:4). 그들이 상납과 같다는 것은 그들의 불의를 덮는 경건의 거짓된 고백이 그들에게 많이 있음을 의미한다. 즉 그들은 허울 좋은 외모를 가졌으나 전혀 실질적인 내면의 가치를 지니지 못했다. 그들이 철과 같다는 것은 철의 시대의 특징과 같이 전쟁을 즐기는 일, 그리고 어떤 잔인한 성향을 의미한다. 그들이 납과 같다는 것은 그들의 둔감함, 주정뱅이와 같음, 그리고 어리석음을 의미한다. 즉 악에 대해서는 부드럽고 고분고분하지만 선에 대해서는 완강하고 움직일 줄 모르는 자들을 일컫는다. "어떻게 금이 찌꺼기가 되었는고! 어떻게 가장 훌륭한 정금이 이렇게 변했는고!" 그래서 예루살렘의 타락을 슬퍼하게 된다(애 4:1). 그러나 이것이 최악의 사정은 아니다. 이 금속들은 보다 못한 가치에 속하기는 하지만 아직은 좋은 용도에 소용될 수 있다.2. 그러나 "이스라엘의 집은 나에게 찌꺼기가 되었다." 이스라엘이 자신의 생각에, 그리고 그의 이웃들의 생각에는 어떻든지 간에 하나님의 생각으로는 그러했다. 그들은 은이지만, 지금은 은의 찌끼에 불과하다. 즉 그 말은 더럽고 쓰레기 같고, 무가치한 온갖 물질들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찌끼는 씻어내고, 정련할 때에야, 그 은에서 분리된다.
죄인들과 특별히 타락한 신앙 고백자들은 하나님의 생각으로는 찌끼와 같고, 변변치 않으며, 경멸적인 것이며, 고려할 가치도 없는 존재들임을 명심하자. 그것은 "먹을 수 없는 악한 무화과" 와 같다. 그들이 너무나 악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익하며, 아무 것에도 적합하지 않다. 인간에게도 쓸모가 없다.
Ⅱ. 이 타락한 이스라엘의 족속의 무서운 파멸은 어떻게 예고되는가 보자. 그들은 모두 예루살렘에 모인다. 백성들은 그 나라 곳곳에서 예루살렘을 도피성으로 생각하고 도망쳐 왔다. 그 이유는 그 성읍이 견고했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거룩한 성읍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안전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모여드는 것은 마치 여러 가지 금속들을 녹여서 찌끼를 분리해내려고 도가니나 용광로 속에 모으는 것과 같다고 하신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한복판에 있어서 원수의 세력들에 둘러싸이게 되고 그래서 포위된다.
1. 하나님의 진노의 불이 이 용광로에 지펴지고, 바람이 불어서 맹렬하고 강하게 타게 된다(20, 21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의 격렬한 분노 속으로 모은다. 불꽃은 큰 소리를 내는데, 예루살렘에 내리신 하나님의 심판이 마치 그와 같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도발하는 백성들에게 자신의 영광과 어떤 표본을 보여 주기 위해서 심판을 내리실 작정을 하게 되면, 죄와 죄인들에 대한 그의 분노의 불을 붙여서 "그 용광로를 7배나 더 뜨겁게 하신다" 고 했다.2. 그 안에 모아진 여러 종류의 금속들은 녹을 것이다. 그들의 구성 요소는 복잡한 심판을 거치는 동안 분해되며 이전의 모습과 힘을 모두 상실하게 된다. 불 같은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도무지 설 수 없을 것이다. 다양한 종류의 죄인들이 함께 녹여지고, 공동의 멸망 속에 참여케 될 것이다. 이것은 마치 나무를 불태울 때 단으로 묶는 것과 같다. 그들은 보호의 장소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 모여 들었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거기에 모으신 것은 처형의 장소로 삼기 위해서였다.
3. 하나님은 그들을 용광로 속에 버리실 것이다(20절). "내가 너희를 용광로 속에 모으고, 너희를 거기에다 남겨 두리라."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그 용광로에 가져오시고는, 그들 곁에 앉아 계신다. 마치 정련자가 그의 곁에 앉아 있는 것과도 같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적절하고 필요한 것 이상으로 거기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도록 하신다. 그러나 그는 그 백성들을 용광로 속으로 데려 갈 것이다. 그것은 마치 사람들이 찌끼를 용광로 속에 던져서, 그들이 의도하는 것이 불에 타 없어지도록 그대로 내버려 두고, 그것에 대하여 아무 염려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것을 "내가 움켜갈지라. 내가 탈취하여 갈지라" (호 5:14)는 말씀과 비교해 보라.
4. 여기에서 그 찌끼가 완전히 분리된다. 좋은 금속은 정화되고, 회개치 않는 자들은 멸망받으며, 회개하는 자들은 고침을 받고 구원에 합당하게 된다. "은에서 찌끼를 제하라. 그리하면 장색의 쓸만한 그릇이 나올 것이다" (잠 25:4). 이 심판은 이스라엘의 집에서 시행되리라. 다른 방법들이 지금까지 시험되었으므로 그들에게 이런 일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버려진 은이라고 불리워지지는 않을 것이다(렘 6:30).
예언자들과 선지자들에 대한 책망 (에스겔 22:23-31)
Ⅰ. 여기에 이스라엘의 땅에 대해서 말한 일반적인 사실이 있다. 그 땅은 파멸시키려고 다가 오는 심판을 받기에 아주 적합하다. 그것을 정련하기 위하여는 이같은 심판이 얼마나 필요로 했던가를 잘 말해 준다. 예언자여 이스라엘에게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말하라. '너희는 깨끗케 되지 않은 땅이다. 마치 금속이 정련되지 않았으므로 다시 용광로에 넣어질 필요가 있는 것과 같다. 개작의 수단과 방법들이 무효하게 되었다. 너는 진노의 날에 비를 얻지 못하는 땅이로다. 이것이 하나님이 진노의 날에 그들에게 내린 심판 중의 하나이다. 즉 "그는 그들에게서 비를 거두셨다" (렘 14:4). 혹은 "너희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있을 때, 분노의 날에 너희에게는 비가 내리지 않게 되리라. 너희는 예언자들의 교훈을 받지 않으리라. 비처럼 내리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리라" 는 뜻이다. 혹은 "너희는 징계받아도 깨끗케 되지 않는다. 너희의 더러움은 길에서 쓸어내리는 비에 의해서는 제거되지 않는다."
Ⅱ. 그들 가운데 있는 여러 중직에 있는 자들에 대한 구체적 비난이 나와있다. 이것은 그들이 그 민족의 죄악 분량을 채우는데 도왔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면서 아무도 그 그릇을 비우는 방향의 어떤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두 같았다.
1. 그들은 모두 "자기 길을 부패케" 한 자들이며, 가장 덕스러운 밝은 모범자들이 되어야 했을 자들이 불의의 괴수가 되고 악의 보범자들이 되었다.(1) 하나님의 마음이 자기들에게 알려진 것처럼 꾸민 "예언자들" 은 "기만자들" 일 뿐 아니라 "탐욕자" 들이었다(25절).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설교에 의해서, 그리고 그들의 생활에 의해서 죄악 가운데서 완악해져 갔다. 말씀에 의해서 그들에게는 벌이 없을 것과 번영을 약속했다. 또 생활도 어떤이들 못지 않게 나빴다. 하나님과 종교, 즉 참된 예언자들과 모든 선한 사람들을 대적하는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음모가 있다. "그들은 흠께 공모하여, 일치 단결한 가운데 그 죄된 길에 평화가 있다고 민중을 확신시키려고 온갖 짓을 다했으니, 마치 아합의 예언자들과 같았다. 무오성을 사칭하는 위선자들 가운데서 발견되는 일치 단결성,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그 단결성은 진리에 거스르는 하나의 은밀된 공모의 결과에 불과한 것이다. 사탄은 "자신을 거스리려고 나누어지지 않는다." 그 예언자들은 살인자들과 압제자들과 공모하여 그들의 죄악을 보호하며 후원한다. 그리고 만일 악인들이 그 이익을 배분해 준다면 거짓 예언자들은 그들의 비행을 정당화해 준다. 그들은 먹이를 약탈하려고 으르렁거리는 사자와 같다. 그들은 멸망시키려고 목적하는 자들에 대해 위협을 가하며, 겁나게 하거나, 일반인들에게서 미움을 사게 한다.
[1] 그래서 자기들이 그들의 생명의 주인이 된다. 그들은 "영혼을 삼켰으며," 많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일에 종범자가 되었으며, 많은 행복한 여인들로 하여금 슬픈 과부들이 되게 했다. 그들은 그들의 예언에 대한 위선에 반대하는 증언을 하는 자들은 사형에 처한다. 그들은 거짓 임무가 발각되기를 원치 않는다.
혹은 그들은 죄인들을 부추겨서 거짓된 평화와 헛된 희망에로 이끌어 영혼을 삼켰으며, 영원한 멸망인 죄의 길로 그들을 유혹했다. 인간들을 죄악으로 이끌며, 그들을 압제하여 죄악에 들어가게 하는 자들은 바로 그들의 영혼을 삿키는 자들이며, 살인자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2] 그들의 재물에 대하여 주인이 되었다. 나봇이 살해되자 그들은 그의 포도원을 소유했다. 즉 "그들은 그 보물과 값진 것들을 차지했다. "그것은 그들이 몰수한 것이었다. 그들은 "과부의 집을 삼키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썼으며," 마치 바리새인들과 같았다(마 23:14). 혹은 그들은 이 보물과 모든 값진 물건들을 거짓되고 아첨하는 예언의 보수로써 취했다. "그들의 입에 무엇을 넣어 주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그들이 전쟁을 준비했기" 때문이다(미 3:5). 이것은 그러한 자들이 예언자로 통용될 때의 예루살렘에 대해 한 말이다.
(2) 공직상 교사이며 신성한 것들을 보호했고, 그리고 거짓 예언자들을 책망해야 했던 제사장들도 그들 만큼 나쁜 자들이었다(26절).
[1] 제사장들도 하나님의 율법을 범했다. 그러나 실은 그들은 그 율법을 지켜야 했으며, 또한 남들에게도 그것을 지키도록 가르쳤어야만 했다. 그들은 제사장직에 관한 율법을 의식하지 않았고, 그것을 공공연히 범했다. 그리고 홉니와 비느하스와 같이 그것을 경멸하기도 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특별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 자신의 것에 스스로 모순되게 살면서 어떻게 그들이 민중에게 그들의 의무를 가르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이 봉사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속되게 하는 일을 금해야 할 "하나님의 성물들을 스스로 속되게 했다." 그들은 율법에 따르면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성물들을 먹게 했다. 여호와의 상(진설병 상)이 그들에게 멸시를 받았다. 그렇게 불경한 손으로 성물들을 취급함으로써 그들 자신이 성물들을 속되게 만들었다.
[2] 그들은 율법의 구분과 지시에 따라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 그리고 정결한 것과 불결한 것을 어떻게 구별할지" 를 민중들에게 알려 주지 않았으며, 그들 자신도 구별하지 않았다. 그들은 율법에 의하면 배제된 자들을 하나님의 집회에 제외시키지 않았으며, 민중들로 하여금 율법이 정하는 정결한 음식과 불결한 것, 그리고 거룩한 때와 장소와 천박한 때와 장소를 구별하여 지키도록 가르치지 않았다. 그들은 대개 자신들이 그렇게 살아갔을 뿐 아니라 민중들을 격려해서 그렇게 하도록 했다.
[3] 그들은 "눈을 가려 안식일을 보지 않았다." 즉 그들은 안식일에 관심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안식일이 보이지 않았다. 즉 그들은 안식일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안식일을 지키든 안지키든, 그것이 관심사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안식일을 준수하는 자들을 장려하지도 않았으며, 그것을 속되게 하는 자들을 제재하지도 않았으며, 그들 자신이 그것에 관심을 나타내거나 혹은 그것에 존경심을 나타내지도 않았다. 그들은 안식일에 천한 일을 행하는 자들에게 눈길을 돌렸고, 안식일에는 그 백성이 하는 행위를 감독해야 했지만 그들은 딴전을 부렸다. 하나님의 안식일은 존경을 요구하는 신성한 명령에 의하여 가해진 미(美)와 영광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에 "눈을 감았고," 그것에서 그 탁월함을 보려 하지 않았다.
[4] 이 모든 것에 의하여 하나님까지도 "그들에게 모독되었다." 그의 권위가 하찮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선하심이 경시되었으며,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의 경멸과 모욕이 그의 거룩함에 미쳤다. 성소와 안식일들과 성물들의 명예에 대한 모독은 하나님 자신의 명예에 대한 모독임을 기억해 두자. 이는 하나님 자신이 그것들과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3) 이러한 불평들을 바로 잡기 위해 자기들의 권위를 개입시켰어야 했을 방백들은 오히려 어떤 사람 못지 않게 율법의 대담한 위법자들이었다(27절). "그들은 먹이를 약탈하는 늑대들과 같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을 다스릴 수 있는 정의와 선이 없는 권력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모든 사업은 다음의 것들을 조장하는 것이었다.
[1] 그들 자신의 자부심과 야심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독단적으로 만들며 만만치 않은 존재로 만든다.
[2] 그들 자신의 악의와 복수이다. 이것은 피를 흘리며, 영혼을 멸망시키며, 자기들의 길을 방해하거나 어떤 일에서 자기들을 노하게 하는 모든 자들을 자기들의 잔학성의 희생물로 삼는 것을 통해서다.
[3] 또 그들의 탐욕을 조장했다. 그들이목적하는 모든 것은 "부정한 소득을 취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부하들을 죽이거나 압제함으로써 행한다. Lucri bonus estodor ex re qualibet. Rem rem, quocanque modo rem - 즉 소독의 냄새는 달콤하다. 모든 재물에는 향기가 나온다. - 돈, 돈, 공정이든 사기에 의해서든지 돈을 벌어라.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억압적인 방법으로 그것들을 계속할 세력을 지켜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명예와 그들의 양심을 어떻게 달랬는가? 예언자들은 그들에게 "반죽되지 않은 회반죽을 발랐으며" (28절),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이것이야말로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 그들이 행한 것에는 아무런 해가 없으므로 그들이 백성들의 재산과 생명을 마음대로 처리한다 해도 전혀 잘못이 아니며, 그들이 말한 그러한 사람을 박해하는 것을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해 주썼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의 양심의 입을 막았다. 그들은 그들이 행한 것을 정당화했다. 아니 그것은 마치 전적으로 민중의 선을 위한 처사인 것처럼 과장했다. 이리하여 그들의 명성을 보존했으며, 억압받는 민중들의 불평을 막았다. 서투른 (회반죽을 바르는) 예언자들은 약탈하는 제왕들의 위대한 후손자들이었으나, 마침내 그들은 위대한 기만자들임에 불과함이 드러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래 가지 못할 반죽되지 않은 회반죽으로 칠하므로, 그것으로 세워진 벽은 오래 서 있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선견자들인 체했으나 공허한 것을 보았다. 그들은 예언자들인 체했으나 거룩한 거짓말쟁이 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말하는 것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온 보증인 체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속임수이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그러한 것를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4) 자기들 손에 어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그 권력을 남용하는 법을 그들의 방백들에게서 배웠다(29절). 민중의 압제에 대하여 탄원하고 침해를 입은 자들을 위하여 권리 신원을 하며, 보호해야 할 자들이 오히려 민중의 침해자들이 되었다. "그 땅의 백성들은 압제를 행했고, 약탈을 감행했다." 부자가 가난한 자를 압제하고 주인이 그 종들을 압제하며, 지주들이 소작인들을 그리고 심지어 부모가 자기 자녀들을 압제한다. 아니 파는 자와 사는 자는 서로 압제할 어떤 방법을 궁리하게 된다. 이것은 민족적인 일로 번지면 하나의 민족적 심판을 초래해야 할 그러한 죄이며, 또 그러한 것이라고 경고받고 있다. "그 백성이 모두 자기 이웃에 의하여 압제될 것이다" (사 3:5). 그들이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을 괴롭혔다는 사실이 바로 그 죄를 가중시킨다. 그러나 실상은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을 구제했어야 했다. 또 그들은 이방인을 압제하고, 그들에게서 권리를 박탈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공정해야 할 뿐 아니라 친절해야 했다. 이리하여 배교가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고, 그 질병은 전국에 유행되었다.
2. 그들을 위하여 중재자로 나설 자가 아무도 없다(30절). "내가 그 사이에 서야 할 자를 그들 중에서 찾았으나 아무도 없었도다." 다음 사실을 유의하자.
(1) 죄란 선한 것들이 흘러 나오는 자들, 그리고 악한 것들이 쏟아져 내리는 사람들 주위에 있는 보호의 울타리에 간격을 만든다. 간격이란 하나님이 그들을 멸망시키려고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2) 그 간격 중간에 서는 방법,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깨뜨리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회개, 기도, 그리고 개심에 의하여서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서 하나님의 진노를 제거하려고 중재할 때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간격에 섰었다(시 106:23).
(3) 하나님이 죄악된 백성을 멸망시키려 나타나실 때는, 그는 어떤 사람이 그들을 위하여 중재할 것을 기대하며, 또 중재할 자가 있는지를 물으신다. 그만큼 자비를 나타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원하는 바요, 또한 기쁨이다. 만일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하여 행한 것처럼 그 간격에 설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하나님은 그를 발견하시고 그로 인하여 기뻐하실 것이다.
(4) 심판이 그들에게 갑자기 나타난다면, 그것은 비참한 징조이다. 그들에게 한 마디 좋은 말을 해 줄 사람이 "하나도 없다."
(5) 사정이 그럴 때에야 완전 파멸 이외에 무엇이 기대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나의 노를 그들에게 쏟았다" (31절). 즉 분노를 완전히 내렸으므로 그것이 그들에게 창일한 강물처럼 다가온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가 사람들에게 끼친 해가 무섯이든 간에, 거기에서 "그들의 머리에 보상되는" 것은 바로 "그들 자신의 길(행실)" 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불의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보다 더 나쁘게 벌하지 아니하시며, 오히려 그보다 훨씬 더 가볍게 처리하신다.
Previous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