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된 심판(에스겔 21:1-7)
예언자는 전장의 끝에서 그가 책임진 진언을, 그가 받은 바대로, 감히 자기의 의사를 부가함 없이, 신실하게 전했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가 비유를 말한다고 하여 그를 비방했고, 그래서 이것을 하나님께 불평했을 때,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에스겔에게 임한다. 그 상징적 말씀에 대한 열쇠를 주어서, 그것으로써 백성이 그 뜻을 깨닫게 하고, 저 반대를 침묵시키도록 하려 함이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핑계치 못하게 될 것이며, 모든 입이 다물어 지리라.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라" (고전 14:13)는 말을 주목하라. 우리가 사람들에게 그들의 영혼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는, 우리는 평이하게 말하는 법을 배워서, 우리의 뜻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그 제자들에게 모든 비유를 해석하셨다" (막 4:34).
1. 예언자는 여기에서 이 예언의 화살을 평균하여, 더 알기 쉽게 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그는 "성소를 향하여" (2절), 곧 가나안 성지를 향하여, 거룩한 성읍 예루살렘, 거룩한 집 성전을 향하여 "소리내어 예언해야" 했다. 이곳은 다른 장소들 위에 뛰어나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들을 더럽혔을 때, 거룩한 장소에서 예언되던 저 말씀이 이제는 그것들을 치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땅을 쳐서 예안하라." 이스라엘에게 예언자와 예언이 있다는 것은, 그들의 명예가 되었었다. 그러나 그들에 의해 예언자와 예언이 멸시되었으므로, 이제는 그들에 대하여 등을 돌렸다. 시온이 이제 그들을 지켜 주던 그들 자신의 병기로 크게 당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그 병기는 시온의 대적에게 사용되곤 했던 것인데, 시온이 그 가치를 몰랐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2. 에스겔은 남방의 삼림을 불사르라는 경고에서 나온 그 불의 의미를 백성에게 가르치라는 지시를 받게 된다. 그것은 뺀 칼, 그 땅을 황무케 할 전쟁의 칼을 뜻했다(3절). "보라, 내가 너를 대적하리라. 이스라엘 땅아!"
하나님을 자기들에게 대적시키는 것보다 더 백성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마치 그가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여도 겁낼 필요가 없듯이, 만일 그가 우리를 공격하면 우리에겐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고백하는 백성이 그에게 반역하는 것은, 곧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던 분을 그들에게 적대하시도록 만드는 일이다. 거기에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불이 있었는가? 여기에는 그가 준비하시고 위임하신 그의 칼이 있다. 잠잠히, 어떤 해도 생각지 않고 있던 "칼집으로부터" 그 칼을 "뽑을" 이는 바로 그분이시다. 칼이 아직 열방 중에서 뽑히지 않았을 때에, 하나님의 손을 주목하고 깨달아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그 불이 "모든 푸른 나무와 모든 마른 나무" 를 삼켰던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 칼은 "의인과 악인은 끊을지라." 선인과 악인이 그 민족 공동의 환난에 참여되었다. 의인은 비록 그들 중 일부나 또는 아무도 산 자의 땅에서는 단절되지 않았으나, 바벨론에 포로되어 보내졌을 때, "이스라엘 땅에서 단절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스라엘 땅에 위협적 조짐으로, 그 환난의 시초에 다니엘과 그의 추종자들, 그리고 에스겔 같은 귀인이 그 땅으로부터 단절되어 바벨론으로 호송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록 그 칼이 "의인과 악인을 단절시키지만" (왜냐하면 그것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죽이기" 때문이다. 삼하 11:25), "의인이 악인과 같다" 는 생각을 가지라는 것은 전혀 아니다(창 18:25).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는 그의 섭리가 작용하지 않는 것 같을 때에도 큰 차이를 이루신다. "좋은 무화과는 좋게 되어" 바벨론으로 보내졌다(렘 24:5, 6). "의인과 악인에게 임하는 것이 일반이라" 는 것은 외부적 양태에 불과하다(전 9:2). 그러나 이 구절은 이스라엘 땅에 대한 하나님의 노하심이 크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의 눈이 아끼지 않으리라." 그 눈이 그 속에서 "의인" 을 아끼지 않으리라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그 땅을 구원할 만한 의인, 하나님의 공의를 더 뚜렷이 드러낼 자가 없으므로, 남아 있는 소수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은 다른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그들에게 보상해 주시리라.
그 불이 "남에서 북까지 모든 얼굴을 그을렀던가?" 그 칼이 "남에서 북까지 모든 혈기 있는 자에 대해 발동하리라." 또 하나님의 칼로서, 논의의 여지가 없는 위임 아래, 저항할수 없는 힘을 가지고 나아가리라. 모든 혈기 있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 불을 일으키신 줄을 알게 되었는가? 그들은 그가 "칼을 빼어낸" 줄을 알게 되리라(5절).
그리고, 끝으로, "일으켜진 불이 꺼지지 않겠는가?" 그처럼 이 여호와의 칼이 유다와 예루살렘을 대적하여 뽑힐 때는, 칼집이 던져지고 다시는 꽃히지 않을 것이다. 완전히 끝나기 전까지 "다시 꽃혀지지 아니하리라."
3. 예언자는 그 자신의 슬픔과 닥쳐오는 환난에 대한 그 자신의 걱정을 표현함으로써, 그 백성에게도 그와 같은 인상을 주라고 하는 명령을 받는다. 그가 그의 사신을 전했을 때 그는 "탄식해야" 했고(6절), "허리가 끊어지는 듯이" 깊이 탄식해야 했다. 그는 마치 가슴이 터지는 듯이, "슬피 탄식해야" 하며, 그것도 공공연히 또 그가 앞서 메시지를 전달했던 자들의 "목전에서" 해야 한다. 그래서 이것이 그들의 귀에 뿐만 아니라 그들의 눈에도 설교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양자가 그들에게 제대로 역사한다면 좋았을 것이다. 예언자는 비록 그것이 자신에게 고통스럽고 가슴을 쓰라리게 했고, 백성들 중에 불경스런 자들이 그것으로 인해 그를 조롱하고, 불평하면서, 그를 위선적 설교가라고 부르더라도, 그는 탄식해야만 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미치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해서로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악한 것이라면, 우리는 더욱 더 그렇게 되리라."사역자들이 말로 남들에게 영향을 주려 한다면, 먼저 그들 자신이 그 말에 감화를 받았음을 성실히 보여 주어야 하며, 그것이 자신들에게 불안을 줄지라도 거기에 순복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그들의 사역의 목적을 촉진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언자가 그처럼 크게 탄식하나 그래야 할 분명한 이유를 모르므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질문하리라. "네가 어찌하여 탄식하느냐? 이 탄식은 뭔가 신비스런 의미를 가진가보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 보자." 그러면 그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7절). "소문을 인함이라. 큰 소문이로다. 이를 우리가 곧 듣게 될 것이로다. 소문이 (혹 재앙이) 오나니(심판에 그 소문과 함께 온다), 곧 오며, 그 때 너희는 모두 탄식하게 되리라. 아니, 그것으로 충분치 않고 각 마음이 녹으며 각 영이 쇠하리라. 너의 용기는 모두 사라지고 네 자신을 부지할 힘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마음과 영이 쇠하면 그에 따라 모든 손이 약하여져서, 싸울 수 없게 되고, 모든 무릎이 물과 같이 약해져서 도망치거나 그들의 땅을 지탱하지도 못하리라."
하나님이 위해 주시는 자들은, 육체와 마음이 쇠할 때에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의 힘" 이 되이 주리라. 그러나 하나님과 대적하는 자들은 쇠한 영을 위한 활력제를 얻지못하고, 벨사살이 "그 생각이 번민할" 때 처했던 것과 같이 된다(단 5:6).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해를 당하기보다는 공포로 더욱 겁에 질린다. 여기서의 경우는 그런 것 같지 않으며, 사태는 생각한 것보다 더 나아질 것인가? 그렇지 않다. "보라. 재앙이 오나니 정녕 이루어지리라."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헛된 공포(이유 없는)가 아니라, "분노에 따른" 공포로 그러하나니, 겁내고 있는 것 이상으로 쓰라린 것이다.
살륙의 칼(에스겔 21:8-17)
여기에 또 하나의 칼에 대한 예언이 있다. 이것은 매우 애절한 문체로 진술되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표현들은 다소 난해하고, 해석자들을 당황케 한다. 칼은 이미 앞 대목에서 뽑혀졌었다. 여기서는 집행하기에 합당하게 되는데, 예언자는 그것을 보고 비통해 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다음을 주목하라.
Ⅰ. 칼을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가?
1. 그것은 자르고 상처를 내기 위해 "날카롭게" 갈아졌다. "살륙을 위하여" 준비되었다. 하나님의 진노는 칼에 날을 세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 심판을 시행하시는 데 어떤 도구를 사용하려 하든, 그는 힘과 용기를 그 도구에 채울 것이며, 그것들이 할 일에 따라서 알맞게 하시리라.그리스도의 입에서도 "날센 검" 이 나온다(계 19:15).
2. 그것은 "마광되어" "번개같이" 되었다. 상대방들에게 공포가 되었다. 그것은 일종의 "불타는 칼" 이 되리라. 만일 그 칼이 사용되지 않아서 칼 집 속에 녹슬아 있다면, 갈아서 빛나게 하리라. 왜냐하면 비록 그의 인내의 날, 그의 심판이 연기되는 동안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의 영광이 잠시 사라진 것같이 보일지라도, 다시 빛나서 번개같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3. 그것은 승리의 칼이다. 아무 것도 그 앞에 서지 못한다(10절). "그것이 모든 나무처럼 내 아들의 막대기를 업신여기는도다" (10절, 우리 성경과 다소 다름). 한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나의 아들, 첫 소생이라" 고 하셨다. 그리고 그 백성의 정부는 "막대기 곧 강한 나무" 라고 불렀다. 우리는 그들이 "홀로서 취해진 강한 막대기들" 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볼 수 있다(19:11).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의 칼이 뽑혀지면, 그것은 "이 막대기(홀)를 멸시하며," 하찮게 여긴다. 비록 그것이 "강한 막대기" 이며, "그의 아들의 막대기" 일지라도 "다른 나무" 와 다른 바 없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그로부터 배반하여 그에게 대적하여 모반을 일으키면, 그의 칼이 그들을 "멸시한다." 그에게 있어서는 그들이 다른 백성과 다른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난의 주(註)를 읽으면 이 칼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내 아들의 막대기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을 알고 있다(시 2:7). 즉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그리고 9절에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드린다" 고 했다. 이 칼은 "모든 나무를 업신여기며," 정복할 "철장" 이다. 혹은, 이 칼은 "내 아들의 막대기" 이니, 징계하는 막대기로서, 하나님의 백성의 범죄를 징책하기 위한 것이지(삼하 7:14), 그들로 백성이 되지 못하도록 끊으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칼이지만, 아들에게는 막대기다.
Ⅱ. 그 칼은 박해자의 손에 들려진다. 그것은 "내 아들의 막대기" 며, 하나님은 "손에 쥐고 잘 다룰 수 있도록 그것을 주었다" (11절). 그 칼을 뽑은 소임을 다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손에 붙여졌다." 검투사의 손에 검투용으로서가 아니라. "살륙하는 자의 손에" 살륙을 집행케 하기 위하여 주어졌다. 내 아들은 전쟁의 칼을 공의의 칼처럼 사용하며, 그에게는 "모든 심판이 위임되어 있다." 그것은 "번개같이 되었고" (15절), "싸여져" 안전하게 보전되었으며, "살륙을 위하여" 깨끗하고 날카롭게 되었다. 골리앗의 칼처럼 기념으로 "보자기에 싸 둔" 것이 아니다(삼상 21:9).
Ⅲ. 칼은 상대자들을 향하여 방향을 잡는다. "이것이 내 백성에게 임하리라" (12절). 그래서 그들은 그 칼에 의하여 쓰러지리라. 거의 믿지 못할 일이지만 다시 반복되어 있다. 이방인의 "칼" 이 하나님의 친 백성 위에 임하리라. 아니, 칼이 "이스라엘 모든 방백 위에 임하리라." 방백으로서의 그들의 위엄과 권세는 이스라엘인이라는 공언이 소용없듯이 방백들의 안전을 보증해 주지 못한다. 그러나, 만일 그 칼이 어떤 때이든 하나님의 백성 위에 임한다면, 그들은 공포스러운 모든 것을 충분히 막아 줄 평안을 갖지 않겠느냐? 그렇다. 그들은 평안을 가지리니, 그들이 스스로 그의 백성으로 되기에 합당하게 행위하는 한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행해지지 않았다. 따라서 "그 칼에 의해 공포가"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 이라고 부르는 자들 위에 임하리라. 선한자는 재앙 뿐만 아니라 재앙에 따르는 공포로부터 안전한 반면, 악한 자는 칼 뿐만 아니라 칼에 따르는 공포를 인하여 혼란되는 법이다. 그것은 그들 자신의 죄책에서 기인되는 것이다.
이 칼은 특히 "지위 높은자를 향하여" 있다. 그것은 그들이 사람들 중에서 가장 큰 죄인들이었음이다. 그들은 "그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었다" (렘 5:5). 따라서 특별한 의미에서 그들은 하나님과 논쟁하고 있었다. 이들은 반란자의 두목들이었다. "학살된 자의 칼" 은 "살해된 지위 높은 자들의 칼이다" (14절). 비록 그들이 후퇴할 장소, 숨을 장소, 그들이 안전하리라는 희망으로 스스로를 안위하던 곳을 준비했으나 그 칼이 "밀실에 들어와서" 그들을 거기서 찾아 내리니, 마치 "개구리들" 이 애굽의 재앙 중 하나였을 때, "그들의 왕의 침실로" 들어갔던 것과 같으리라. 그 칼, 즉 "칼끝" 은 "그들의 성문, 즉 모든 성문을 향하여" (15절) 있다. 그들이 칼을 물리치고 자기들을 강건하게 해 주리라고 기대했던 모든 것들에게도 칼이 향한다. 가장 강한 성문들, 비록 "놋 성문" 이거나, 아무리 잘 빗장을 지르고, 아무리 잘 방비되었더라도, 하나님의 심판의 칼끝을 막지는 못한다. 그러나 칼끝이 죄인들에게로 돌려졌을 때,
1. 그들은 최악의 사태를 겁내게 된다. "그들은 낙담하여"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게 된다.2. 최악의 사태가 임한다. 그들이 아무리 저항하여도 소용없다. 그들을 파멸되고 "많은 자가 엎드러진다." 그러나 전반적인 사명을 띠고 칼이 올 때, 구태여 칼의 끝이 어디로 향해 있는가를 알 필요가 있을까?(16절) "칼이 모이라. 우향하라. 항오를 차리라. 좌향하라. 향한 대로 가라. 너는 역거운 자들을 발견할 뿐이리니, 죄로부터 깨끗한 자가 없음이라. 또 너는 그들에 대해 권위를 가지니, 벌로부터 면죄된 자가 없음이라. 또 따라서, 향한 대로 나아가되, 요나단의 칼처럼 죽은 자의 피에서, 용사의 기름에서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삼하 1:22). 악한 사람이 가득하여, 하나님의 심판은 나아가는 길마다 할 일을 발견할 것이요, 행해야 할 사건을 발견할 것이다. 저 불길이 이 땅 위에서 타나갈 때, 그 연료 부족을 당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죄인을 대하시는 다양한 방법이 있으므로, 그의 공의의 칼이 아직도 처음에 그것이 그룹들의 손에서 탈 때처럼 맹렬하다. 그것은 "사방으로 빙빙돈다" (창 3:24).
Ⅳ. 이 칼의 성격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목적과 제한 점은 무엇인가?(13절) 그것은 징계이다. 그것은 그들을 바로잡을 목적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칼이 그들에게는 (징계의) 막대기이다. 이것은 비록 다소 희마하게 표현되어 있으나, 이 공포의 말 속에서 오는 위로의 말이다.
1. 하나님의 백성은 "그 칼이 막대기까지 업신여기지" 않을가 하여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즉 칼이 맹렬하게 전진하여, 단지 막대기 역할만 해야 되는 사명을 무시하고, 한계를 잊고, 하나님의 친 백성에게까지도 진실로 칼과 같은 역할을 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막대기인 갈대아인의 칼이 막대기라고 불리우는 것을 멸시하고, "찍는 사람에게 자기를 자랑하는 도끼" 나, "나무가 아니라 사람을 들려 하는 막대기처럼" 될 것을 두려워한다(사 10:15). 혹은, "칼이 막대기를 업신여기면 어찌할꼬? 즉 이 칼이 산혜립의 칼처럼 이전의 막대기들을 아무 소용없는 것으로 멸시하면 어찌할꼬? 이것이 징계하는 막대기가 아니라, 우리의 교회와 민족을 완전히 멸절시키는 멸망의 칼이 되면 어찌할꼬 하고 겁을 낸다. 이것은 생각은 깊이 하나 겁이 많은 소수의 사람이 느끼는 바이다. 위협의 심판이 밖에 있을 때, 그 심판의 결과가 될 최악의 사태를 상정해 보는 일과, 그렇게 하여 그에 따라 준비하는 일은 적당한 조치라는 점을 명심하자."그 칼이 그 족속이나 홀을 업신여기면 어찌할꼬?" 즉 유다와 다윗 족 속의 홀(어떤 이는 원문의 shebet이 의미하는 바가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을 업신여기면 어찌할꼬? 그것이 우리 정부의 파멸을 목표하면 어찌할꼬? 비록 그리하여도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로우실 것이다." 그러나,
2. 이 공포는 그 칼이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진정된다. 그 칼은 스스로를 잊거나 그것이 위임받은 사명을 망각하지는 않으리라. "그것은 시험이며," "시험에 불과하다." 그것을 보내시는 이는 자기가 원하시는 바대로 그 용도와 한계를 정하신다. 여기에서 그것의 오만한 파도가 머무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멀리 있고 그들이 막 그 심판 때문에 두려워할 때, 그 심판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떤 것이든 간에, 그들에게는 시험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위로가 되는 일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그리고, "그들이 연단되면, 금과 같이 되어 나올 것이며" 그들의 믿음의 연단이 믿음의 발전이 될 것이다.Ⅴ. 에스겔 예언자와 백성은 경고된 이 심판으로 자신들이 감화를 받았음을 보여야 한다.
1. 예언자는 이 심판을 공포함에 있어서 매우 신중해야 한다. 그는 "칼이여 ! 칼이여 !" 라고 해야 한다(9절). 그로 하여금 까다로운 문귀를 연구하며, 기묘한 표현을 쓰지 못하도록 하라. 마을이 불탈 때, 사람들은 그것에 그런 이상한 말로 알리지 않는다. 단지 공포와 통곡의 목소리로 "불이야 ! 불이야 ! "하고 외친다. 그처럼 예언자도 "칼이다 ! 칼이다 !" 하고 외쳐야 한다. 그리고 너는 말씀선포로써 "칼을 세 번 거듭 씌우게 하라" 고 하라(14절). 하나님은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이나 말씀하신다. 사람이 결국에 그것을 감지하고 주의한다면 좋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있어서 "세번 거듭되리라." 예루살렘을 "완전히 끝장낸" 것이 예루살렘에 대한 느부갓네살의 세 번째 침략기 때문이다. 파멸은 점점 오지만, 마침내 실질적으로 참람된 백성에게 임하도다.그러나 이것이 모두가 아니다. 예언자는 무장하고 전쟁을 선포하는 고지자로서, "칼이다 ! 칼이다 !" 하고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외칠뿐 아니라, 그 일과 밀접하게 관련된 사람으로서 "부르짖어 슬피 울며" (12절), 그 칼이 행할 황폐를 애곡해야 한다. 즉 그 자신도 고통받는 자들과 한 마음을 품을 뿐 아니라, 그 고통을 체감하는 자처럼 해야 한다. 또 다시 나온다(14절). "예언하며 손뼉을 치며" 그 황폐를 애곡하여 "네 손" 을 흔들거나 손뼉을 쳐라. 마치 네 예언에 의하여 그것을 할 도구인 사람들을 흥분시키며 격려하거나, 그 심판의 급작성과 혹심함에 놀라고 있는 것처럼 하라. 예언자는 "손뼉을 쳐야" 한다. 이는(하나님께서 말씀하시되) "나도 내 손뼉을 치리라" 고 하심 때문이라(17절). 하나님께서는 이 선고를 그들 위에 선포하시는 데 있어서 신실하시다. 따라서 예언자도 그것을 공포함에 있어서 신실함을 보여 주어야 한다. 예언자가 치듯이 하나님께서도 "자기 손뼉을 치는" 것은, 그들의 악함에 대한 거룩한 분노의 징표이다. 진실로 매우 경악한 일이다. 발락이 발람에 대하여 분노의 불이 타올랐을 때, "손뼉을 쳤다" (민 24:10). 하나님과 그의 사역자들은 구원받을 수 있는 데도 오히려 멸망되려고 하는 자들에게 진노함이 마땅하다는 점을 명심하자.
어떤 이들은 이것을 승리와 환호의 표현으로 보아, "내가 내 원수로부터 내 마음을 편케하리라" (사 1:24)는 말과 또 "내가 그들의 재앙을 웃을 것이라" (잠 1:26)는 말과 부합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뒤에 "내 분을 다하리로다" 라는 말이 나오며, 그것을 완전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되는 것을 즐거워하리라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이 선언이 매우 엄숙하고 권위 있게 확인되고 있음을 주목하자. "나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내 한 말을 실행할 수 있으며 또 실행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말했으며, 결코 그것을 취소하지 않으리라. 내가 그것을 말했으니, 누가 반대할 수 있겠는가?"
2. 백성은 이 심판을 전망하고 매우 신중해야 한다. 이에 대한 암시가 삽입구처럼 언급된다(10절). "우리가 즐거워하겠느냐?" 하나님께서 칼을 뽑으셨고, 예언자가 한숨짓고 부르짖는 것을 보고, "우리가 즐거워하겠느냐?"예언자는 이를 그가 한숨짓는 이유로서 제시하는 것 같다(느 2:3 처럼)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되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색이 없사오리이까?" 우리가 즐거움에 탐닉하기 전에, 우리는 즐거워해야 할지 안해야 할지를 고려해야 한다. 칼을 선고받은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치려고 퍼졌고, 하나님의 심판이 땅에 편만하고, 그 심판에 의 해 그가 "통곡하며 애호하라고 부르시는" 때에" 이방사람처럼 기뻐 뛰놀겠는가? 우리가 행음하여 우리 하나님을 떠나겠는가?(호 9:1)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치려고 퍼졌고, 하나님의 심판이 땅에 편만하고, 그 심판에 의해 그가 "통곡하며 애호하라고 부르시는" 때에, 즐거워할 수 있겠는가?(사 22:11, 13) 교회가 지금 혼난 중에 놓여 있고(에 3:15),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 근심해야" 하는 이 때(암 6:6), 왕과 하만처럼 즐거워 하겠는가?
죄악의 종말(에스겔 21:18-27)
예언자는 앞에서 그들에게 다가오는 칼을 보여 주었다. 여기서는 그들에게 그 칼이 그들을 치려고 다가오므로, 어떤 수단을 써서든 반대 방향으로 칼의 진로를 바꿀 생각은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Ⅰ. 에스겔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오고 있고, 또 그렇게 하도록 지극히 높은 권세가 결정한 갈대아 군대를 스스로 보고, 또 보여 주어야 한다. 예언자는 "두 길을 그려야" 하리니, 즉 종이 위에다 지도에서 흔히 하듯이, 두 길을 그려야 한다(19절). 그리고 그는 바벨론 왕의 군대를 길이 갈라지는 곳으로 이끌어야 한다. 거기서는 그들이 정지할 것이다. 두 길은 모두 "같은 땅에서 나온다." 그러나 하나는 암몬인의 수도인 랍바로 이르고, 또 한 길은 예루살렘에 이른다. 거기에 도달할 때, 그는 멈춘다. 왜냐하면, 비록 그가 이 둘의 멸망을 결단했지만, 어느 것을 먼저 공격할지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의 정책과 정치가들이 그를 당황시킨다. 그 칼은 랍바나 "예루살렘의 유다" 로 가야 한다. 유다의 거주민 중 대다수가 이제 예루살렘에 안식처를 잡았고, 그 땅의 모든 이익이 그 성읍의 안전에 달려 있었으며, 그에 따라 그것은 "견고한 성 예루살렘에 있는 유다" 라고 불리운다. 그 성은 강하게 방비되었다. 천연적으로 또 인공적으로 그리되었으며, 그래서 그것은 난공불락으로 생각되었다(애 4:12). 예언자는 바벨론 왕이 문 앞에 있다는 이 딜렘머를 서술해야 한다(21절). "바벨론 왕은 갈랫길 곧 두 길 머리에서" 있었다(즉 그는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를 고려하며 서 있으리라). 비록 그가 위대한 전망과 위대한 결단력을 가지고 있는 제후였으나, 그는 그 자신의 이익이나 그 자신의 마음도 몰랐던 것 같다. 그러므로 현인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지혜를 영화롭게 하거나, 힘센 자로 하여금 그의 절대적인 힘을 영광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라. 이는 자신의 의지대로 행하는 자들조차 최선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다음을 살펴자.
1. 그가 결단에 이르려고 택한 방법을 보자. 그는 보다 더 높고 보이지 않는 힘에 적용되며, 아마도 제비에 의한 섭리의 결정에 적용되는 "점을 쳤다." 그는 제비를 대신하여 "화살을 뽑았다" (한글 과 다름-역주). 그것은 그 의식을 엄숙하게 하기 위에서다. 아마 한 화살에는 "예루살렘" 이라 씌어 있었고, 다른 화살에는 "랍바" 라 씌어 있었을 것이며, 전통에서처럼 뽑힌 화살로 첫 공격이 결정되었을 것이다. 아니면 그는 거짓된 신탁에 의존했을 것이다. 그는 "우상, 곧 데라빔에게 물어," 그들로부터 대답을 듣기를 기대하였다. 혹은 점장이가 희생 제물의 각을 뜬 것을 보고 정했을 것이다. "그는 희생제물의 간을 살펴서," 그것으로써 어느 방향이 행운인지를 보았다. 어려운 경우에 있어서 그들은 방향을 위해 하늘의 법정에 호소하기를 기뻐해왔다는 것은 지상의 현자의 자부심에 모욕이 된다는 점을 주목하자.2. 그가 이렇게 하여 내린 결단을 보자. 이 죄악된 관습에 의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고, 그를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하셨다(22절). "예루살렘으로 갈 점괘는" 우연히 "오른손에 놓였다." 그래서 점괘의 규칙에 따라 그를 "그 길" 로 가도록 결정하였다. 비록 본인들은 인식하지 못해도,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생각하신 자들을 인도하여 자기의 뜻을 이루심을 명심하자. 여하튼, 목표로 예루살렘이 확정된 후, 저 중대한 장소의 포위와 함께 즉시 전투가 전개된다. "대장들" 이 포위에 기용된 군대의 지휘를 위해 지정되는데, 그는 "입을 벌리고 살륙해야" 하며, 군사들에게 할 일을 지시하고 그들의 사기를 붇돋아 주는 말을 해야 한다. 포위를 힘차게 수행하는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라는 명령이 내려진다. "공성퇴를" 준비해야 하며 "운제를 세워야" 한다. 오 ! 서로 멸망시키는 데 얼마나 큰 수고와 댓가가 인간에게 요구되는지 !
Ⅱ. 그는 백성과 방백에게 그들이 스스로의 죄에 의해 이 파멸을 자초했음을 알려 주어야 한다.
1. 백성이 그리하였다(23, 24절). 그들은 다가오는 심판이 주어졌으나 그것에 대한 주목을 경감한다. 에스겔의 예언은 그들에게 "잘못된 점괘" (헛점; 개역 성서)로 여겨진다. 그들은 그것에 의해 감동되거나 회개에로 각성되지 않는다. 그들은 느부갓네살이 그의 점괘에 의하여 예루살렘을 향했고, 그 사업(전쟁)에 있어서의 승리를 확신한다고 들었을 때, 그것을 비웃고 "헛된 점괘" 라고 부르며 "안전하다" 고 계속 생각할 것이다. 이는 "그들이 맹약했기 때문이다." 즉 애굽인과 엄숙한 연맹을 맺었고, 그들이 "포위를 풀어" 주리라는 약속, 혹은 거짓 선지자들이 포위가 풀어지리라고 말한 확언을 믿었기 때문이다. 혹은 그것은 그들이 바벨론 왕에게 맹약하였으나 파기했던 충성의 맹세를 지칭할 수 있는 바, 그들의 이러한 반역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판단의 맹점에 버려 두사 그들에게 주어진 최상의 경고들이 헛된 점으로 여겨져서 경홀시되었다. 가장 신성한 맹세를 무시해 버리는 자들이 가장 신성한 신탁도 그와 같이 무시해 버리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타락한 마음이 어디서 멈출것인가? 그러나 그들의 불신앙은 하나님의 충고를 무효화할 것인가? 그들이 방심한다고 해서 안전할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경고에 가한 경멸은 그들의 다른 죄들을 기억하게 하는 죄며, 다른 죄들도 기억된다면 그것은 자기들 탓인줄 알아야 한다.(1) 그들의 현재적 사악이 드러난다. 이제 그들이 그처럼 빗나가고 강퍅함을 하나님께서 국문하시니, 그들이 변호책으로 무엇을 제시하든지간에 그것은 단지 그들의 죄과를 더할 뿐이다. 그들이 지금까지 그처럼 악하게 행동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회개와 개심을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해 소리치게 된다. "너희 모든 행위의 죄가 나타났도다. 네가 원하는 길을 돌이키라. 그래도 너는 간악한 면을 보이는도다." 이것은 우리 중 모두에게도 역시 사실이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사람 중 죄짓지 않는 자가 없으며, 선을 행하고 범죄치 않는 의인이 지상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최선의 봉사에도 약점, 어리석음, 불완전이 가미되며, 우리가 "선을 행하려" 할 때조차 많은 "악이 우리와 함께 하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행동에 있어서," 또 우리는 모든 말에 있어서 불행히도 "우리의 죄가 드러난다" 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율법 아래 있었다면, 우리는 망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2) 이것은 그들의 이전의 악함을 상기시킨다. "너희의 악이 기억을 일으켰으니, 너희 스스로 회개하여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가 그것을 계산하기 위함이었다. 네 자신의 죄악들은 너를 거슬러 너의 열조의 죄악들을 기억하게 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너는 결코 벌을 받지 않았으리라." 하나님께서는 현재의 죄악이 회개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되는 자들에게만 이전의 허물을 기억하신다는 점을 명심하자.
(3) 그들은 모두 함께 고통을 당하며 파멸자에게 붙잡히게 된다(23절). "너희가 그 손에 잡히리니, 하나님께서 너를 잡으시고 취하여, 네가 그로부터 도망하지 못하도록 지정하신 손에 잡히리라." 사람들이 하나님의 정의의 수행자로 사용될 때는, 그들은 "하나님의 손" 이라고 말하게 된다(시 17:14).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붙잡지 않으려는 자들은 마침내 그의 진노의 손에 붙잡히리라는 점을 명심하자.
2. 방백도 이와 같이 멸망을 자초한다. 시드기야는 여기 예언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고지하는 바대로 "이스라엘의 왕" 이다. 그리고, 만일 에스겔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았다면, 그처럼 대담하고 솔직하게 말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왕에게, '네가 악하다'고 말하는 것이 합당하냐?"
(1) 에스겔은 그에게 그의 평판을 제시한다(25절). 너 "극악하여 경망스런 이스라엘 왕아!" 그는 그의 선왕들 중 몇몇처럼 악하지는 않았으나, 그런 말을 들을 만큼은 충분히 악했다. 그는 불경하여, 미덕에 관계되는 거룩한 모든 것을 잃었다. 또 그는 악했고, 그의 백성에게 죄를 조장했다. 그 자신이 범죄했으며, "이스라엘로 범죄케 하였다." 불경과 사악함은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도 나쁜 것이지만, 한 왕, 즉 이스라엘인으로서 스스로를 더 잘 인식하고, 왕으로서 더 나은 모범을 세우고 그 주위의 사람들에게 더 나은 영향을 주었어야 했을 이스라엘의 왕으로서는 가장 악한 일이다.
(2) 에스겔은 그의 운명을 읽어 준다. 그의 허물은 "끝났다." 그 때가 찼고, 따라서 그의 심판의 날, 하나님의 복수의 날, 곧 "그의 날이 이르렀도다." 비록 사악하고 불경한 자가 잠시 번창하는 것 같아도, "그들의 날이 오면" 망하리라. 여기 선고된 내용은,
[1] 시드기야가 폐하여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의 왕관을 상실하였다. 더 이상 그것을 쓰지 못하리라. 그는 자신의 불경으로 자기 왕관을 더렵혔다. 그것은 "땅에 던져" 지리라(26절). "관을 제하라." 왕관(면류관)과 관등은 잃어버릴 수 있는 것들이다. 사라지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과 "움직일 수 없는 왕국" 이 있는 것은 저 세상에서뿐이다.
갈대아 의역판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대제사장 스가랴로부터 관을 취하라. 또 내가 왕 시드기야로부터 면류관을 취하리라. 이것이나 저것이나 그의 처소에 있지 못할 것이며, 제거될 것이다. 이는 동일하지 않을 것이니," 그가 지금까지 처했던 것과 같지 않으리라. "이는 이것이 아니다" (이것이 문자적 의미이다). 아마 그는 과거처럼 불경하고 악하지만, 과거처럼 이스라엘의 왕은 못되리라.
사람들은 허물로 인해 자기들의 관작을 상실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그들의 불경과 사악은 그들의 관을 제거하고, 면류관을 빼앗아 가며, 그들의 이전 상태로부터 뒤바꾸어 놓는다.
[2] 큰 혼난과 무질서가 그 나라에 뒤따라 임할 것이다. 모든 것이 뒤집어엎어지리라. 정복자가 "낮은 자를 놓이고, 높은 자를 낮추며," 어떤 이를 호선하고 다른 이를 격하하는 데 자만심을 가질 것이니, 그의 좋을 대로, 권리나 공로를 전혀 개의치 않고 그리하리라.
[3] 정부를 다시 세우려는 시도들은 결딴나고 백지화되리니, 그달리아의 경우가 특히 그러하고, "왕가에 속한" 이스라엘 (갈대아의 의역판은 이를 지칭하고 있다)의 경우도 그러하다. 그들중 아무도 그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없으리라. "내가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려니와," 첫째 한 모사를 그리고 다른 모사를 그리하리라. 하나님께서 넘어뜨린 것을 누가 세울 수 있으리요?
[4] 이 군주국은 메시야의 손에 의해 영원히 확정되기까지는 결코 회복되지 않으리라. 그리스도가 오기 전까지는 시드기야를 이어 다윗 집에서 "더 이상" 왕이 나오지 않으리라. "그리스도의 권리에 그 왕국이 있고," 그는 그 속에서 약속이 완성될 다윗의 씨니, "내가 그에게 주리라." 그는 "그 조상 다윗의 위를" 가지리라(눅 1:32). 그리스도의 강림 직전까지는 예언의 영이 사라졌듯이, 왕가의 위엄도 오랫동안 실추되었다. 그것은 때가 차서 나타나는 왕과 예언자로서의 메시야의 빛이 더욱 뛰어나게 하기 위해서다. 그리스도는 교회와 세상의 양자에 있어서의 통치요, 영토를 차지한 다는 점을 명심하자. 그 나라는 그의 권한이다. 그리고, 권한을 가졌으므로, 때가 오면 그는 나라를 소유할 것이다. "내가 그것을 그에게 주리라." 또 그가 그의 권리를 잃기보다는 일반적인 전복이 있는 것이 쉬울 것이다. 그의 앞 길에 서 있는 모든 반대는 그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전복될 것이다. 이것이 여기에 언급된 것은, 다윗에게서 된 약속이 계속 이루어지지 않음을 두려워하던 자들에게 위안을 주기 위한 것이다.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그 약속은 참되니, 메시야의 왕국이 영원히 계속되리라" 고 하셨음이라.
암몬 족속의 멸망(에스겔 21:28-32)
예루살렘 멸망 후 오년쯤에 느부갓네살에 의해 이루어진 암몬 족속의 멸망에 대한 이 예언은 바벨론 왕이 랍바에 대해 세웠던 계획을 돌이키는 기회에 즈음하여 나온 것 같다.
그때 그는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이에 따라 암몬 족속은 매우 건방지게 되었고, 예루살렘에 대해 승리자연하였다. 그러나 예언자는 그들로 하여금 인내는 면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해야 한다. 집행유예가 용서는 아니다. 그들의 날도 역시 가까웠다. 그들의 차례가 다음에 올 것이며, 그들이 마지막으로 삼켜지리라는 것, 즉 마지막으로 집행되리라는 것은 그들에게 단지 보잘 것 없는 만족에 불과할 것이다.
Ⅰ. 암몬 족속의 죄가 여기에 드러난다. 이것은 "그들의 능욕" 이다(28절).
1. 그들이 스스로에게 씌운 능욕은 그들이 주위에 있는 나라들에게 임한 황폐 중에서 그들의 영속적인 안전을 예언했던 거짓 예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였을 때에(거짓 예언자들은 유대인들에게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도 있었던 듯하다)행해졌다. "그들은" 네게 대하여 허무한 것을 보며, 네게 대하여 거짓 복술을 한다(29절). 그들은 평화의 약속으로 너를 농락하며, 너는 어리석게도 스스로를 그들 손아귀에 놓이게 하며, 거기서 그들을 신뢰함으로 그들을 장려하는도다." 번영의 날에 자기 기만으로 스스로를 만족케 하는 자는 환난의 날에 있을 자기들의 능욕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2. 그들이 이스라엘의 환난에서 개선가를 부른 것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능욕을 퍼붓는 것이다. 이로 인해 그들에게는 환난이 첨가되었다. 하나님께 대한그들의 능욕은 매우 야만스럽고 비인간적이었다. 그들이 이스라엘보다 나온 국민이라는 기만에 휩싸였다. 이스라엘에는 복술이 끊어졌을 때에도 복술이 남아 있었고, 자기들의 번영은 항상 계속하리라는 확신으로 가득했다. 그들은 이처럼 매우 건방지고 불손하게 되어, "중상을, 그것도 악한 갈대아인에 의해 중상을 당한 이스라엘의 목을 밟게까지" 되었다. 그들의 "죄악이 끝났을 때," 즉 그 때가 찼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 대한심판을 집행하신다. 이것이 다시 나온다(25:3 등에서). 슬픔 중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짓밟는 자들은 불행으로 내리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하는" 때는 누구나 두려워해야 한다.
Ⅱ. 암몬 족속의 완전한 파멸이 경고된다. 이는 그의 이웃들에 의해 교회에 뎐져진 능욕이 그들 자신에게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시 79:12). 그 경고가 얼마나 무시무시하며, 그 파멸도 그러하다는 것을 알자.
1.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임하리라.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행하여진 굴욕과 상해를 한탄하신다(3절). "내가 내 분노를 네게 쏟으리라." 불과 유황을 소나기처럼 쏟으리라.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 의 가장 작은 부스러기라도 "악을 행하는 인간의 영혼" 에 "환난과 번민" 을 조성하기에는 충분하리라. 그렇다면 분노와 진노의 홍수라면 무엇을 못하겠는가? "내 진노의 불을 네게 불게 하리라. 즉, 내가 너를 치려고 내 진노의 불을 불어넣으리라. 그것은 아주 맹렬하게 불타리라." "네가 불에 섶(연료)같이 될 것이다" (32절). 악인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진노의 불에 대해 연료로 삼는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들은 그것에 의해 연소되고, 그것은 그들에 의해 불탄다.2. 그것은 전쟁의 칼에 의해 발효될 것이다. 에스겔은 이전에 이스라엘 앞에서 했듯이, 그들에게 부르짖어야 한다. 그들이 이스라엘의 전복을 기뻐했기 때문이다. "칼이 뽑히도다. 칼이 뽑히도다" (28절을 9, 10절과 비교하라). 그 칼은 쓰기에 적당하게 되려고, "멸절하며, 번개같이 되기 위하여" 뽑혔다. 하나님의 집행은 그의 준비하심에 대한 대답일 것이다. 이 칼은 일단 뽑히면, 그것이 뽑힌 소임을 끝내가 전에는 "그 집에 꽃히지 않을 것이다" (30절). 그 칼은 일단 뽑히면, "하나님께서 되돌아가 꽃히게 하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는다. "그가 한 마음을 품고 있으니, 누가 그를 돌리킬 수 있으랴?" 누가 그의 의도를 바꿀 수 있는가?
3. 그것에 기용된 사람들은 "짐승같은 자, 곧 멸하기에 익숙한 자이다." 이와 같은 나쁜 성격을 가지고, 맹수의 일을 하는 재주를 가진 사람은 - 그들을 노련하게 만드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나, 그들을 단지 멸하기에 익숙하게 만드는 것은 인간의 감정이 없음이다 - 비록 인류의 거침돌이나, 때때로 하나님의 의도에 봉사하는 데 사용된다. 하나님께서는 "암몬 족속을 그와 같은 자의 손에 붙이시며," 그들 스스로가 짐승 같고,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것을 즐거워하였으므로 그 일에 적당하였다. 우리는 바울이 기도로 간절히 바랐듯이,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 즉 재난을 일으키는 떼 쓰여지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도록" (살후 3:2) 기도해야 한다.
4. 이와 같이 그들을 심판할 처소는 어딘가 ! "내가 너를 네가 지음을 받은 곳에서 심판하리니, 네가 처음 한 백성으로 형성되었던 곳, 그리고 네가 그후로 정주하여 뿌리를 내렸던 곳에서 그리하리라. 너의 성장한 곳이 네 멸망의 땅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장 방심하여 안전하다고 여기던 곳에서조차 우리에게 파멸을 가져오실 수 있고, 우리가 논의할 여지없는 권리와 변동될 수 없는 소유권을 가졌다고 생각했던 땅으로부터도 우리를 돌이키실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자. "네 피가" 네 경계 안에서뿐만 아니라 "열방 가운데도 있으리라."
끝으로, 그것은 고칠 수 없는 멸망이 될 것이다. "비록 네가 스스로 회복할 생각을 할 수 있으나, 그 생각도 헛되도다. 너는 어떻게 해도 다시 기억되지 못할 것이다(시 9:6). 이스라엘의 이름을 영원히 잃게 한 자들의 이름은 박멸되는 것은 당연하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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