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0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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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기 위한 준비(에스겔 9:1-4)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알 수 있다.

Ⅰ. 예루살렘을 파괴할 자들에게 앞으로 나아와 대령하라는 소환장이 내린다. 예언자에게 나타나서(8:2), 그를 예루살렘으로 데려가, 그곳에서 행해진 죄악을 보여 주었던 그 하나님이 "외쳐 가라사대, 이 성읍을 관할하는 자들은 앞으로 나아오라 했다" (1절). 그러나 이 구절을 보다 원문에 더 가깝게 잘 읽어보면, "이 성읍을 관할하는 자들이 나오고 있다" 란 말이 된다. 하나님은 "내가 분노로써 갚으리라" (8:18)고 말했었다. 그러나 이제 다시금 하나님을 에스겔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 진노의 도구로 고용된 자들을 보리라고 하신다. "이 성읍의 징벌(곧 징벌자들)이 가까이 있다." 이 성읍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징벌의 날을 알려 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다음을 관찰해보자.

1. 이것이 어떻게 예언자에게 알려졌는가? "하나님은 내 귀에 큰소리로 말씀하셨다" 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격렬성을 나타낸다. 사람들은 화가 매우 나서, 상대방을 위협할 때에는 큰 소리로 말한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부드러운 권고를 듣지 않을 때에는 위협적인 말을 듣게 될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서 떨게 될 것이다.

이것은 또한 이 같은 심판이 공포되는 것을 예언자는 원하지 아니 한다는 점을 암시해 주기도 한다. 에스겔은 이런 사실을 듣지 않으려고 귀머거리가 되었지만, 어쩔 수 없었으며, 그들의 죄악은 용서받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에 대한 심판은 연기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그것을 내 귀에 큰 소리로 외쳐 말했다. 하나님이 나로 그것을 듣게 만들었으며, 나는 슬픈 마음으로 그것을 들었다."

2. 에스겔에게 알려진 사실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 성읍을 관할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그것을 파괴할 것이다. 그들은 갈대아 군대가 아니다. 그들은 참으로 이 일에 고용된 자들이다. 그들은 징벌자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종들이며, 도구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천사들은, 그들이 오랫동안 보호하고 지켜왔던 이 성읍을 이제는 황폐케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파괴하는 천사들로서, 진노의 사역자들로서 가까이에 있다. 왜냐하면, 천사가 타오르는 검으로 생명 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듯, 저들 "각 사람이 그들의 손에 살륙하는 무기를 가졌기" 때문이다. 죄악을 행하여 하나님과 적이 된 사람들은 역시 선한 천사들과도 적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런 징벌자들에게 "나아오라" 는 소환령이 내렸다. 하나님에게는 항상 보이지 않는 능력으로써 명령하고 소환하면 즉시 대답할 수 있는 진노의 사역자(종)들이 있다.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서 그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신다.

에스겔 예언자는 환상 중에 이런 사실들을 알게 되었으며, 이것으로 인해서 그보다 큰 확신으로써 이 심판을 전파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은 큰 소리로써 에스겔에게 이런 사실을 말했으며, "강한 손으로 그에게 그것을 가르쳤다" (사 8:11). 이것은 에스겔에게 보다 깊은 감명을 주고, 그도 역시 그토록 크고 분명하게 백성들의 귀에다 그것을 선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Ⅱ. 이런 호출에 따라 저들이 등장한다. 즉시 "여섯 사람이 나왔다(2절). 그런데 이 여섯 사람은 예루살렘성의 주요한 문의 숫자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소돔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보내졌던 천사들의 수는 두 사람이었지만, 예루살렘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여섯 명의 천사들이 보내졌다. 그것은 예루살렘에 내릴 하나님의 심판이 소돔보다도 3배나 무겁기 때문이다. 여섯 명의 천사는 사방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오고, 예루살렘을 파괴하며, 어느 누구도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시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성의 모든 성문(6절)을 지키고 있다. 앗수르인들의 진영과 에집트인들의 장자를 살륙하고 멸망시키기 위해서는 한 천사가 필요했지만, 여기에서는 여섯 천사가 필요되고 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의 진노의 대접을 땅에 쏟고 있는" 일곱 천사가 있다(계 16:1).

이들은 "각자 손에 살륙 무기를" 가지고 왔다. 바벨론 왕의 군대는 여러 민족 (혹자는 6민족이라 한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령관이 6명(렘 39:3) 있었다. 이들은 보고 천서의 손에 들려 있는 "살륙 무기" 라 할 수 있으리라. 천사들은 각자의 임무를 완성하기 위해서 철저한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1. 천사들은 "북향문 윗문 길에서 쫓아 나왔다" (2절). 이것은 갈대아인의 군대가 북쪽에서 왔기 때문이거나(렘 1:14,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리라"), 혹은 투기의 우상이 "안뜰로 들어가는 북향한 문에"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리라(8:3, 5). 파괴의 임무를 맡은 천사들이 이 성전의 북향 문에 들어섰는데, 이것은 그들에게 닥친 것이 무인가를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죄악이 깃들어 있는 길에 심판이 임하리라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2. 그들은 어디에 자리잡았는가? 천사들은 성전 문 안에 자리 잡았다. "그들은 들어와서 놋제단 옆에 서 있었다." 이 제단 위에는 속죄의 희생 제물이 항상 바쳐져 있었다. 천사들이 파멸자로 활동할 때는 희생시키는 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어떤 개인적인 복수심에나 악한 마음으로 행하지 않고, 순수하고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한다. 왜냐하면 천사들이 살해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정의를 위한 희생 재물로 바쳐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제단 옆에 서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그 제단을 보호하고 옹호하며, 그 제단의 공의로운 대의를 진술하고, 제단에 대한 모독을 복수하기 위해서이다. 천사들은 제단에서 살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것은 엘리의 집안의 죄악과 같이 예루살렘의 죄악이 "희생 제물로 정결케 될 수" 없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Ⅲ. 파괴하는 천사들 중 한 천사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사람들과 그렇지 못할 자들을 구별하라는 지시가 내린다. 이 천사는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살륙하는 임무를 맡은 저 여섯 천사 가운데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하리라. 그는 단지 "그들 중에" 있을 뿐이다(우리 성경과는 다른 해석임).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는 자비가 혼합되어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2절). 이 "천사" 는 제사장들이 입던 "가는 베옷을 입었으며," 고대의 변호사나 법률가들의 서기관들이 가졌었던, "서기관의 먹 그릇" 을 "그의 허리" 에 찼다. 이 천사는 다른 천사들이 저들의 "살륙하는 무기" 를 사용하듯이 자기의 먹 그릇을 사용했다. 여기에서 보면 붓의 명예가 검의 명예를 능가한다. 저들은 검을 몸에 지닌 천사들이지만, 그는 "서기관의 먹 그릇" 을 사용하는 천사들의 주(主)이시다. 왜냐하면 아주 뛰어난 주석자들의 일치된 견해를 따르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정의의 화염검으로부터 그 백성들을 구원하는 중재자로서의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는 거룩함으로써 옷입은 우리의 "대제사장" 이시다.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가 그것을 상징한다(계 19:8). 또 그는 예언자로서 "서기관의 먹그릇" 을 가졌다. 생명 책은 어린양의 책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써 주신 율법과 복음의 위대한 뜻은 그의 저작품이다. 왜냐하면 성서의 기자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증거하는 분은 그리스도의 영이시며,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이기 때문이다.

온 땅을 휩쓰는 파멸 한 가운데에 우리의 중재자이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가 계시다고 하는 사실은 모든 선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다행스런 일이다. 그리스도는 하늘에 관계하고 있으며, 모든 땅위의 성도들은 이 그리스도에게 관계하기에, 그는 진정 하늘과 땅의 중재인이며,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

Ⅳ.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이 그룹에서 떠난다. 혹자는, 여기에 나오는 영광은 지성소 안, 속죄소 위에 세워져 있는 그룹(천사상)들 사이에 평상시 있던 것인데, 이제 거기를 떠난 것이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음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제2성전에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예언자가 환상 중에 보았던 바 그룹 위에 있던 영광의 현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후자의 생각이 더 사실에 가까운 말이다. 왜냐하면 이 영광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 이라 불리어졌고(8:4), 에스겔이 지금 눈으로 보는 것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광이 "전의 문지방으로" 갔다. 마치 문밖에 대기하고 있던 종들을 불러, 각자의 임무를 주어, 파견하라는 듯했다.

이런 하나님의 영광의 이동은,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떠나고, 그들의 초소를 황폐케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사라지면, 온갖 선(善)이 사라진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을 축출하지 않는 이상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떠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 자신이 인간에게서 떠나는 것을 몹시 싫어하신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다시금 기회를 주고, 하나님이 다시 돌아올 수 있기 위해서 그들로 하나님을 청하도록 권면하며,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머물기 위해서, 처음에는 "문지방" 이상 더 멀리 가지 않으셨다.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의 떠나심은 점진전인 것이기에, 은혜를 입은 영혼들은 하나님이 떠나기 위해서 내딛는 첫 걸음을 곧 알아챌 수 있다.

에스겔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그룹으로부터 떠났다" 는 사실을 즉시 깨달았다. 하나님이 떠났는데, 천사들의 환상이 무슨 의미를 주는가?

Ⅴ. "가는 배옷을 입은 사람" 에게 이 전반적인 파괴에서 경건한 남은 자들을 보호하라고 하는 임무가 주어진다. 우리는 이 구원주가 파괴자들처럼 소환령을 받은 후 파견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한다. 왜냐하면 구원주는 항상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마에 구원의 표를 받은 사람들의 안전을 도모하는데 있어서 가장 적절한 사람이며, 또 그 책임을 위탁받았기 때문이다(4절).

이제 다음을 살펴보자.

1. 구원을 받은 남은 자들과 다른 사람이 구별되는 특징은 무엇인가? 이 남은 자들은 마치 환난과 슬픔 중에 있는 사람처럼 "탄식하며 울고," 자신을 슬퍼했다. 또 정직한 사람처럼 하나님에게 기도로써 부르짖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행해진 "모든 가증스런 죄악" 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대해 가증스런 죄악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한 우상 숭배의 죄악뿐만 아니라, 그들의 그밖의 모든 죄악을 포함해서 말하는 것이다. 이런 경건한 소수의 사람들은 이런 가증스런 죄악을 목격하고는,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악행을 금하는 일을 했었다. 그러나 이런 죄악의 습성을 개혁하려고 시도했던 그들의 노력은 실효가 없었다. 그러자 그들은 주저앉아서 "탄식하며 울었고," 백성들의 사악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고, 나아가 그것으로 인해 패망이 그들의 교회와 민족에게 임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께 호소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죄악을 기뻐하지 않으며, 그들의 행위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치가 못하다. 우리는 행악자들을 항상 마음에 두고, 그들을 위해서 탄식해야 한다. 우리는, 그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죄악을 미워함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서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슬퍼해야 하며, 다윗처럼(시 119:136), 그리고 이웃들의 사악한 생활로 "그의 의로운 영혼을 괴롭혔던" 롯처럼 우리의 이웃의 영혼을 위해서 도와 주지 못함을 애통히 여겨야 한다.

예루살렘에서 행해졌던 가증스러운 죄악은 특별히 애도되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백성들이 유별나게 하나님을 모독했기 때문이다.

2. 남은 자를 보호하는 독특한 방법을 보자. 이런 경건한 사람들을 찾아 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내렸다. "이런 남은 자들을 찾으러 성읍 가운데로 나아가라. 비록 그들이 널리 흩어져 있고, 그들이 박해자들의 광포로부터 은밀히 숨어 있을지라도, 너는 그들을 찾아서, 그들의 이마 위에 표를 하라." 남은 자들의 이마에 표를 하는 것은 다음 사실을 의미한다.

(1) 하나님은 이들을 그 자신의 백성으로 여기며, 그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신다. 사람의 영혼 가운데서 작용하는 은총이 하나님께는 "이마 위에 있는 표시" 이다. 하나님은 이 표를 자기의 표지로 여길 것이며, 이 표지로써 "그들이 자기 백성임" 을 아신다.

(2) 하나님은 이마에 이런 표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의 사랑의 보증을 주기 위해서, 그들 스스로 그 표를 깨닫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 표의 의미를 앎으로써 얻는 위안은 이 같은 재난의 시기에는 원기를 돋구는 가장 강력한 원조가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런 표에 의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왜 우리는 이런 속세의 삶 때문에 자신을 괴롭히겠는가?

(3) 이 표지는, 문설주 위에 발라진 피처럼, 이스라엘인들의 집과 장자에게는 살륙하지 말고 그냥 지나가려고 하는 하나님의 지시와 같은 것이다. 이 지시는 파괴자들에게 내려졌다. 죄악이 만연한 시대에 자기 자신을 준수하게 지키는 사람들은, (전반적인 재앙의 시기에) 하나님이 안전하게 지켜 주실 것이다.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는 사람은 어려운 때에 구별받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죄악을 위해서 애통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재난을 위해서 애통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재앙에서 구원을 받거나, 혹은 그런 재앙 가운데서도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애통하는 자들 위에 표를 새길 것이며, 그들의 한숨을 책으로 만든 것이며, 그들의 눈물을 병에 담을 것이다. "이마 위에 하나님의 종의 인장을 받은 사람들은" 요한계시록 7장 3절에 언급된 대로, 하나님이 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여겨서 보호하시리라는 증거가 여기에 나타나 있다. 이것은 파멸과 죄악된 타락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주는 보증서와 같은 것이다.

 

9:2 없음.

 

9:3 없음.

 

9:4 없음.

 

9:5

형 집행의 시작(에스겔 9:5-11)

이 대목에서는 다음 사실을 알 수 있다.

Ⅰ. 파괴자들에게는 그들의 임무를 실행하라는 명령이 내린다. "그들은," 명령을 기다리면서, "놋 제단 곁에 서 있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명령은 예루살렘의 가증스런 죄악과 그에 따른 모든 부속적인 죄악을 범한 사람들, 그리고 가증한 죄악과 행악자들을 위해서 "탄식하며 울지" 않는 사람들을 멸망시키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그의 알곡을 곡간에 모을 때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못한다. "쭉정이는 불에 태운다" (마 3:12).

1. 그들은 모든 것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1) 그 명령은 예외 없이 모조리 파괴하라는 것이다. 그들은 "성읍에 나아가 멸망시켜야" 했다. 그들은 행악자들에게 죽음의 고통을 주고, 모든 것을 파괴하기 위해서 "다 죽어야" 했다. 그들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두를 살해해야 했다. 또한 그들은 아름다운 처녀들과 순진한 어린아이까지도 남겨놓지 않고 살해해야 했다. 그런데 이것은 기근과 온역에 의해서, 그리고 특히 갈대아인의 군대의 칼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음으로써 성취되었다. 때때로 그런 피의 역사는 예루살렘의 살륙처럼 하나님의 역사(役事)이기도 하다. 그러나 죄란 얼마나 참혹한 것인가? 그것은 무한한 자비를 지니신 하나님을 그렇게 가혹하게 만든다.

(2) 어떤 동정심도 가져서는 안 된다. "아끼지도 말며, 긍휼을 베풀지도 말라(5절). 너는 사울이 아각과 아말렉 사람들에게 행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멸망시키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아무도 살려 두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행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렘 48:10). 어느 누구도 하나님보다 더 자비스럽게 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앞에서도 말하기를(8:18), "내 눈이 아끼지 않을 것이며, 어떤 긍휼도 베풀지 아니하리라" 고 하셨다. 개심하기를 싫어하며, 죄악 가운데서 사는 사람들은 죄악 가운데서 멸망할 것이며, 긍휼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쉽게 그 멸망을 막아 보려고 하지만, 그렇게 하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2. 그 파괴하는 천사들은 이마에 구원의 표를 받은 사람은 해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 그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놀라게 하거나 위협하지 말라. 그들에게는 어떤 재앙도 가까이 하지 못하리라는 약속이 있다. 그러므로 너는 그들을 멀리해야 한다.

바벨론 왕은 예레미야를 보호하라는 특별한 명령을 내렸다. 바룩과 에벳멜렉도 안전한 생활을 했으며, 예레미야의 안전을 위해서, 그의 다른 친구들도 보호를 받았다. 하나님은 "그의 남은 자들은 안전하게 지내며, 좋은 대우를 받게 하리라" 고 약속하셨다(렘 15:11). 애통하며 간구하는 남은 자들 중 어느 누구도 갈대아 사람들의 칼에 살해당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 모두를 보호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책을 마련해 놓았으며, 로마 사람에 의한 예루살렘의 마지막 멸망 때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벨라라고 불리우는 성읍에서 보호를 받았고,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불신앙의 유대인들과 같이 죽지 않았다.

하나님이 생명과 구원의 표를 해 준 사람들은 어느 한 사람도 생명을 잃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기초가 확고하게 서 있기 때문이다.

3. "성소에서 시작하라" 는 지시가 내렸다(6절). 그런데 앞 장에서 보면, 성소는 끔찍하게도 모독된 곳이었다. 파괴의 천사들은 그 성소에서부터 살륙을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시작된 죄로 하나님이 진노하셨고, 그래서 이런 심판이 내렸기 때문이다. 제사장들의 방탕은 독물이 나오는 샘과 같으니, 모든 타락의 물줄기가 그곳에서 발원하고 있다. 성소를 모독하고 더럽히는 죄악은 하나님께 가장 모욕적인 죄악이다. 그러므로 그곳에서 살륙이 시작되었다. "백성들이 그들의 제사장들 위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을 교훈삼아, 회개하고 변화되게 하기 위해서, 성소에서 시작하라. 모든 세상 사람들이,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며, 그가 가장 사랑하며, 그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의 죄악은 더욱 더 미워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보도록, 성소에서 시작하라."

하나님의 심판이 곳곳에 임할 때는, 대게 "여호와의 집에서 시작된다" (벧전 4:17).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서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암 3:2).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한 곳이며, 회개한 죄인들을 보호하는 피난처이다. 그러나 "여전히 죄악을 행하는" 자를 위한 그런 곳은 아니다. 행악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지성소도, 그들의 높은 지위의 명예도 안전을 보장하지 못할 것이다.

파괴자들이 성전에서 사람들을 살해해서 그곳에 시체를 버려두는 것은 매우 기이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전을 더럽히고, 시체로 만든 모든 뜰을 채우라" 하셨으며(7절), 천사들이 이런 일을 주저하지 않도록 지시하신다. 사람은(율법에 지시된 대로, 출 21:14), "제단에서 끌려내려 가지" 않으려 할 것이며, 요압처럼, 그 제단의 "뿔을 붙잡음으로써"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하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요압처럼 그들을 "그곳에서 죽여라" (왕상 2:30, 31). 하나님의 예언자들 중의 한 사람이 그곳에서 피를 흘렸으므로(마 23:35), 행악자들의 피도 그곳에서 흘리게 하라. 만약에 하나님의 성전의 종들이 우상 숭배를 행하여 그 성전을 더럽힌다면, 하나님은 이방인들이 폭력으로 그 성전을 더럽히는 것을 묵인할 것이다(시 79:1). 그러나 정의에 의한 이런 필연적 행위는 사실상 성소를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정화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 행위는 "그들 가운데서 재앙을 물리치는" 것이다.

4. 천사들은 "성읍 가운데로 나아가라" 는 지시를 받는다(6, 7절). 죄악이 어느 곳으로 가든, 심판이 그 뒤를 쫓을 것이다. 비록 "심판의 시작을 하나님의 성소에서" 할지라도, 그곳에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이 죄를 범한 제사장들에게 보호 지역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이 사악한 백성들에게 더 이상 안전을 보장해 주지 못할 것이다.

Ⅱ. 살륙하는 천사들이 그들의 임무대로 행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한다.

1. "천사들은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 곧 장로들부터 "살륙을 시작했다." 이들은 먼저 비밀스러운 방에서 우상들에게 경배했던 70장로들과(8:12), 여호와의 "성전 앞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태양을 숭배했던" 25인의 사람들을 살해했다. 주모자가 먼저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하게 된다는 사실은 명심해야 한다. 공적인 지위의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죄악은 가장 모범적인 징벌을 요한다.

2. 살륙하는 천사들은 일반 사람들을 살륙하기 위해서 나아갔다. "그들이 나아가 성읍 가운데서 살륙했다" 고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포고령은 일단 공포되면, 지연시킬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시작하시면, 끝을 내고야 만다.

Ⅲ. 예언자 에스겔은 하나님의 심판을 경감하기 위해서 중재하려고 한다(8절). "그들이 백성들을 살륙할 때, 내가 홀로 있는지라, 엎드리어 부르짖었다" 고 했다. 여기서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에스겔은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살륙당할 때에도 자기의 생명을 지켜 주신 데 대하여 하나님의 자비를 깊이 깨달을 수 있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그에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오직 그는 목도하리니 악인의 보응이 그에게 보이리로다" (시 91:7, 8). 에스겔은 그 재앙을 간신히 피한 사람처럼 말하며, 그가 그 재앙을 피한 것을 자신의 공적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자비로 돌렸다. 경건한 성도들은 저들을 죽이지 말라고 한 하나님의 자비를 깨달아야 한다. 패망시키는 하나님의 심판이 널리 퍼지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의해서 엎드러질때에, "노획물처럼 우리에게 우리의 생명이 주어졌다" 면, 그 큰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 깊이 간직해야 하며,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의 큰 자비의 탓으로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멸망받아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2. 에스겔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이런 사랑을 어떻게 활용했는가? 에스겔은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를 보고 생각했다. 그가 홀로 남아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기 위해서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 서게 하려 함이라고, 우리도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를 보면, 그것은 우리로 우리의 위치에서 선을 행하며, 우리의 기도로써 선을 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에스겔은 하나님이 행한 살륙을 멈추게 할 수가 없었으며, 다만 그의 "육체는," 다윗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떨고 있었다" (시 119:120). 에스겔은 "엎드리어 부르짖었" 는데, 그것은 그 자신을 위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에스겔은 이마에 표를 받은 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동포들에게 대한 연민에서였다. 죄인들의 죄악으로 인해서 탄식하며 우는 자들은 그 죄인들의 불행에 대한 이런 모든 관심이 완전히 사라지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 날이 임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날이 오면, 지금 "엎드리어, 오호라 ! 주 여호와여" 하고 "부르짖는" 사람들은 머리를 높이 들고 "할렐루야" 를 외치며 노래할 것이다(계 19:1, 3).

이 예언자는 겸손하게 하나님에게 간청한다. "여호와여, 주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두 멸하려 하시나이까? 그러면 이마에 표를 받은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 누가 살아 남겠읍니까?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멸망될 것입니까? 전적으로 멸망될 것입니까? 소수의 남을 자를 제외하고 모두 멸망시키면, 누가 다음 세대의 자손이 될 수 있겠읍니까? 만약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면, 이스라엘의 하나님 당신은 스스로 이스라엘의 파괴자가 되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주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고 하시면, 누가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구원하겠읍니까? 주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분노를 쏟으시니, 이 성읍을 완전히 멸망시킴으로써, 이 나라 전체를 파멸하시려 하나이까? 오 ! 여호와여 그렇게 하지 마옵소서 !" 비록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그에게 탄원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렘 12:1).

Ⅳ. 하나님의 심판의 경감을 위한 예언자의 탄원을 거절당한다(9, 10절).

1. 이런 경감의 죄악을 위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예언자가 원했던 것처럼 하나님도 자비를 보여 주기를 원했다. 하나님은 항상 그렇게 하신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는 하나님의 자비를 허락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자비는 정의를 왜곡하지 않는 이상 허락될 수 없다. 하나님의 한 속성이 다른 속성을 희생시키면서 영광 받아야 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하나님이 멸망시켜야 하는 것 특히 그가 이스라엘을 멸망시켜야 한다는 것이 전능자에게 어떤 기쁨이 될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의 죄악이 심히 악하기 때문에 그들(죄인들)에 대해서 징벌을 경감시키는 것은 실상 죄악을 묵인하는 것이 될 것이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죄악이 심히 중하다. 그 백성들이 이런 비율로 죄악을 계속해서 자행하기에 용서할 어떤 근거도 찾을 수 없도다. 그 땅은 죄없는 사람들의 피로 가득 찼으니, 피해를 입은 결백 사람을 보호해 달라고 성읍 뜰들이 호소하니, 어떤 대책도 쓸모가 없도다. 왜냐하면 그 성읍에 불법이 가득 찼고, 또 판단이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백성들이 이런 죄악을 계속하는 것은 우상 숭배를 즐기는 것(8:12)과 같을 것이며, 정의를 모독하고 더럽히는 무신론적인 행위이다. 그래서 여호와는 이 땅(세상)을 버리셨다. 곧 우리를 우리의 의지대로 행하도록 버려두셨다. 하나님은 이 땅의 사정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이땅에서 어떤 죄악을 행하든지, 하나님은 보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 일을 알지 못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정의를 무시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다. 범죄자도 계속 죄를 범하면, 변호인의 탄원도 소용없다. 그런 자는 용서를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2. 하나님의 판결(정의)을 경감시키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다(10절). "네가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든지, 나의 눈은 아끼지 않을 것이며, 긍휼을 베풀지 않을 것이다. 그런 뻔뻔스런 죄인들에 대해서 나는 참을 만큼 참아 주었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내가 그들의 행위를 그들 머리 위에 보답할 것이다." 죄인들은 그들 자신의 죄악의 짐을 감당하지 못하며, 그 죄악의 짐 때문에 멸망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 자신 위에 "보답되어지는" 것은 그들 자신의 행위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길을 외면하여, 고의로 선택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완강하게 경멸했던 것이다. 중한 죄악은 혹독한 환난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정당화시켜 준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은, 여기에서 그가 예언자에게 행하는 것처럼, 그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준비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심판할 때 분명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Ⅴ. 또 시온에서 통애하는 자들의 안전을 위하여 포고되었던 보호령에 대한 회답이 나와 있다(11절). "가는 베옷을 입은 사람이 복명했다" 고 한다. 즉 그가 수행한 임무를 설명한 것이다. 그는 그땅의 죄인들을 위해서 은밀히 애곡했으며, 공식적인 증언으로써 그 죄인들에 반대해서 절규했던, 모든 사람을 찾아냈으며, 그들 모두의 이마 위에 표를 했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준행하였나이다."

파괴하라는 임무를 받은 자들이 파괴를 했다는 보고는 나와있지 않다. 단지 보호할 임무를 받은 자가 그의 행한 일을 보고하는 것만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멸망당한 사람들에 대한 것보다 구원받은 자들에 대한 소식을 듣는 것이 하나님과 예언자, 모두에게 더욱 더 기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보고는 그 일이 모두 수행된 다음에 행해졌다. 그러나 파괴는 시간이 걸리는 일이요, 그 일이 완결되었을 때에만 보고가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를 신뢰하는 자들에게 얼마나 신실한가! 선택된 남은 자에 대해서는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라는 명령을 그가 받았는가? 그는 명령을 준행했다. "주께서 내게 준 모든 사람들 중에서 어느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9:6 없음.

 

9:7 없음.

 

9:8 없음.

 

9:9 없음.

 

9:10 없음.

 

9:11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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