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0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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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다가오는 종말(에스겔 7:1-15)

여기서는 이제 신속하게 다가오고 있는 이스라엘 땅의 멸망에 대한 명백한 경고를 본다. 하나님은 예언자를 통해서 멸망에 대한 경고를 보낼 뿐만 아니라, 그 경고는 확실한 것이며 임박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 동일한 표현으로 그 경고를 되풀이할 것을 강권한다. 예언자 자신도 그 경고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도 역시 그렇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우둔하고, 귀가 먹었고, 그것에 감동할 줄 모른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마을이 불에 휩싸이면, 사람들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길 주변에 서서 "불이야 ! 불이야 !" 하고 애통하는 목소리로 크게 외친다. 마찬가지로 예언자는 여기에서 "끝났도다 ! 끝났도다 ! 종말이 왔다. 보라, 종말이 왔다. 들을 귀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고 선포한다.

Ⅰ. "끝났도다(끝이 왔도다), 끝났도다" (2절). 그리고 다시 "이제는 네게 끝이 이르렀다" 고 했다(3, 6절). 그런데 이 종말은 그들의 온갖 사악함이 지향해 나아가고 있던 그런 종말이며, 하나님이 그의 예언자들을 통해서 "이 결국(끝, 종말)이 어찌 되겠느뇨?" 라고 그들에게 물으면서 마침내 오리라고 종종 말했던 바로 그 종말이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모든 심판은 바로 이 종말을 초래하는 한 방편이었다. 또 "그 종말" 은 그들의 국가의 종국을 의미하며, "모든 육체의 종말을 가져온" 대홍수처럼(창 6:13), 그들 민족의 종국적인 멸망을 의미한다. 그들은 그들의 고통의 "종말을 곧 보게 되리라" 는 희망으로 그들 자신을 달랬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렇다. 그 종말은 왔다. 그러나 바라던 종말이 아니라 비극적 종말이니라." "바라던 종말" 은 경건한 남을 자들에게 약속되어 있다(렘 29:11). "이 종말은 너희들이 때때로 경고받았던 바이며, 모세가 너희에게 생각하기를 원했던 저 최후의 옹말이다(신 32:29). 그런데 예루살렘은 기억하지 아니했으니, 놀랍게도 멸시당하리라" (애 1:9).

이 종말은 오랫동안 지연되었으나, "이제 왔다." 죄인들에게 멸망이 비록 서서히 올지라도 마침내 온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끝이 왔다. 그것이 너희를 지켜보고 있으며 너희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어쩌면 이 종말은 이스라엘 민족이 로마 사람들에 의해서 마지막으로 당한 민족 최후의 멸망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갈대아 사람들에 의한 멸망은 그 멸망의 한 전조였던 것이리라. 또 나아가 이 불신앙 세상의 마지막 멸망을 의미할 수도 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 예루살렘의 최후의 멸망은 "세상의 종말" 의 한 모형이었다(마 24:3). 오 ! 세계 역사의 종말은 매우 가까이 있도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일생의 종말은 더욱 더 가까우며, 우리가 생각하기를 매우 안전하고 행복하다고 하는 많은 "날들의 종말" (단 12:13)도 매우 가깝다. 이 "종말이 땅의 사방에 임할 것이다." 그 파멸은 최후적인 것이듯, 또한 총체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이 땅의 어느 지역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가장 먼 거리에 있는 나라조차도 결코 피하지 못한다. 세상의 파멸이 그러하리라. 만물이 용해될 것이다. 죄인들의 멸망이 그러할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것을 피할 수 없다. "종말" 이 오기 전에, "저 사악한 자의 악한 행위" 가 끝났으면 !

Ⅱ. "보라, 재앙이로다. 오직 비상한 재앙이다" (5절). 죄는 "재앙" 이다. 즉 "비상한(오직) 재앙" 이다. 거기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것은 가장 악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재앙(악)은 고난이라는 재앙이다. 그것은 "하나의 재앙" (영문에는 an evil-역주)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완전한 멸망을 위해서 충분한 하나의 재앙이다.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하나의 재앙이 "완전한 종말을 이룬다."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나 1:9). 그것은 전무후무한 "재앙" 이다. 그것은 회개치 않은 자들에게 내릴 "하나의 재앙," "비상한 재앙" 이다. 그것은 죄를 범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며, 그들의 타락을 촉진시킨다. 이에 반하여,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로써 그 재앙이 성화(聖化)되며, 축복의 수단으로 변한다. 그런 자들은 "그들의 축복을 위해서 바벨론으로 보내어졌다" (렘 24:5).

동일한 재난이 우리의 행실 여하에 따라서 절반의 "재앙" 이 되기도 하고 "비상한 하나의 재앙" 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악한 세상에 "종말이 왔을" 때, 그때에 비로소 "재앙, 곧 비상한 재앙" 이 임한다. 일시적인 심판에는 그 속에 고통을 가볍게 하는 완화제가 들어 있지만, 이것은 마지막 심판의 "재앙이며, 비상한 재앙이다."

Ⅲ. "그 날이로다." 이 "비상한 재앙" 을 내리기로 작정한 때가 왔도다. 끝장을 낼 때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일에는 모두가 정해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적절한 때가 이르면, 하나님의 일은 실현될 것이다. 구체적으로 지적하면, 악한 사람을 보응하는 때, 그들의 행실을 판가름하는 때,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나타나는 날" 은 정해져 있다. 또 우리가 알든 모르든, "하나님은 그의 날이 오고 있음을 아신다." 이런 사실이 되풀이되어 있다(10절). "보라, 그렇게 오랫동안 지연되었던 그 날이 드디어 임했다." "보라, 그 날이 임박했다. 때가 이르렀고, 날이 가까웠으니, 요란한 날이 임박했도다" (7, 12절). 경고된 심판이 비록 오랫동안 지연되긴 하지만, 취소되지는 않을 것이다. 심판을 실행할 때는 꼭 올 것이다. 하나님의 인내가 심판을 연기할 수는 있지만, 인간의 참된 회개와 회심 외에는 아무 것도 심판을 피하게 할 수 없다.

"아침(한글에는 "정한 재앙")이 네게 임하였다" (7절). 그리고 다시금 10절에서, "아침이 이르렀으니" 라고 했다. 즉 고통의 새벽, 파괴의 낮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아침" 은 숨겨진 것을 드러낸다. 그들은 자기들의 은맬한 죄악이 결코 밝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이 빛 앞에 서게 되었다. 그들은 아침에도 범행을 자행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심판과 그 심판을 집행할 아침이 다가오고 있다. 즉 죄인들에게 "요란한" (곤고한)날 "징벌의 해(年)" 가 다가오고 있다. 파괴의 날이 이미 시작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해서 깨닫지 못한 이 백성들은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보라. 그러므로 계속해서 그것에 대한 말을 들어야 한다. "곤고한" (요란한), 진실로 곤고한 "날" 이 "가까이" 있으니, 그것은 "산에서 즐거이 부르는 소리(한글-날)가 아니로다." 그것은 고난에 대한 단순한 메아리나 소문이 아니었다. 저들은 헛 소문이라고 생각하려했다. 마치 "그들에게 나아온 사람들" 은 "산(山) 그림자" 에 불과하듯이(스불이 가알에게 말했던 것처럼, 삿 9:36), 또 저들이 들은 정보는 산에서 울려온 "빈 소리" 에 불과하다는 듯이 생각했다. 그러나 그 곤고는 공상이 아니니, 곧 알게 될 것이다.

Ⅳ. 이런 모든 것은 하나님의 진노에서 나오며, 이전처럼 자비가 혼합되어 있지 아니할 것이다. 이것은 우물이니, 여기서부터 모든 재앙이 흘러나오리라. 이것은 "쓴 쑥이요 쓸개" 다. 이것이 재난을 더욱 비참하게 한다. "내가 진노를 네게 발하리라" (3절).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여호와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할 때 외에는 발생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지휘하고 명령을 내리는 데로만 간다.

이런 재앙에 대한 표현은 더욱 심각해진다(8절). "이제 나는 속히" 가득 채워져 있는 "내 진노를 너에게 쏟을 것이며," "나의 진노" 는 모든 목적을 "너희에게서 이루리라." 이런 진노는 여기에서 한 번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본을 보이기 위해서 이곳 저곳에서 나타난다. 재앙이 "모든 무리에게 임하리라" 는 것이다(12, 14절). 온 민족이 "진노의 그릇" 이 되었으므로, "멸망당하기에 아주 적합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때때로 "진노 중에도 자비를 기억하지만," 이제 "내 눈은 너희를 아끼지 않을 것이며, 자비를 베풀지 않으리라" 고 거듭해서 말씀하신다(4, 9절). 자비가 주어졌는데도 그것을 경시하던 자들에게는 "자비없는 심판이" 있을 것이다.

Ⅴ. 이런 모든 것은 그들의 죄에 대한 징벌이며, 그들 자신의 어리석음에 의해서 초래되는 재난이다. 또 하나님은 이렇게 하심으로써 그들로 하나님을 옳다고 시인케 하려 하신다는 것이 강조되어 있다. 오직 지혜와 정의를 통해서만 진노를 발하신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 행위에 따라서 너희를 문책하리라" (3절)는 말씀이 뒤따라온다. "나는 너희가 지금까지 행했던 행위를 심문할 것이며, 그것을 율법과 비교하고 그 공적에 따라서 너희를 취급하여,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4절).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아무리 중한 벌을 가하더라도, 하나님은 오직 "그들의 행위대로 보응" 하실 뿐임을 기억하자. 그들은 그들이 만든 막대기로 맞는다. 하나님이 죄많은 백성들과 셈을 하러 오시면, 그는 모든 죄악을 헤아릴 것이다. "나는 너희 모든 가증한 일을 보응하리라" (3절). 이제 "그들의 죄악이 드러나 미움을 받으리라" (시 36:2). "그리고 너희의 가증이 너희 중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4절). 즉, "은밀한 죄악이 이제 빛 아래 놓이게 되며 전에는 밝혀지지 않은 채로 너희가 행해 왔던 모든 것이 이제 나타나리라. 너희 죄는 이제 너희 자신에게 가증한 것이 될 것이다." "황폐의 가중한 것" 이 나타나게 될 때, 죄의 가증함도 밝혀지리라(마 24:15).

또는 "너희의 가증(즉 "징벌)이 너희 중에 있게 되리라." 그리고 그것은 "너희 가슴에까지" 미치리라(렘 4:18 참조).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은 아끼지 않을 것이며, 긍휼을 베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의 행위대로" 그들에게 "보응하더라도" "그들은 고통 중에서 계속 더 범죄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가증함" 이 여전히 "그들 중에" 있으며, 그들의 마음 가운데에 잠자고 있다. 8, 9절에서 이것이 되풀이된다. "나는 너를 문책하리라." "나는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이런 심판을 가져오도록 하나님을 진토케 한 두 가지 죄악이 열거되어 있는데, 그것은 교만과 학정이다.

1. 하나님은 그의 심판으로써 그들을 낮추리라(겸손케 하리라)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 높아졌기 때문이다. 재난의 "몽둥이에 꽃이 피었다." 그러나 "싹이 난" 것은 "교만" 이다(10절). 죄 가운데서 싹 난 것은 심판 안에서 꽃이 필 것이다. 봄에는 나무에 싹이 돋아나듯,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에게 교만이 생겼다.

2. 그들의 적들이 그들을 혹독하게 대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서로를 혹독하게 다루였기 때문이다. "포학이 일어나서, 죄악의 몽둥이가 되었다" (11절). 즉, 서로에 대한 그들의 중상모략이 치리자의 권력에 의해서 비호되었다. 정치의 몽둥이가 "죄악의 몽둥이" 가 되어, "포학(폭력)이" 엄청나게 쇄도했다. 재판정에 악이 있음을 보았노라" (전 3:16; 사 5:7). 하나님의 심판의 열매가 무엇이든, 우리이 죄악이 그 심판의 근원이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Ⅵ. 이런 심판을 막을 방책이 없으니, 그 심판이 사방에 임하고, 그 심판 앞에서는 모든 것이 굴복당하며, 어떤 구제책도 없기 때문이다.

1. 죽음이 도시와 농촌에서, 성읍 안에서와 성읍 밖에서 여러 모양으로 활개를 칠 것이다(15절). 어디에서도 사람은 안전을 얻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들에 있는 자는 칼에 의해서 죽을 것이며" (모든 들은 싸움터가 될 것이다), "성읍 안에 있는 자는" 비록 그것이 거룩한 도성일지라도 안정을 보장받지 못하리니, "기근과 온역에게 삼켜지리라." "트로이 사람들과 그리이스 사람들이 똑 같이 죄를 범하듯" (침입한 것같이), 죄가 도성과 농촌 어디나 범람했다. 그러므로 성읍과 농촌 어디나 재앙이 범람했다. 그러므로 성읍과 농촌이 모두 황폐해졌다.

2. 죽음의 인을 받은 사람들은 아무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 중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악의 몽둥이" 로 불쌍한 이웃에게 학정을 가했던 교만한 압제자들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모두 다가오고 있는 황폐에 의해서 모두 전멸당할 것이다(11절). "그 무리들", 곧 피해를 입히고, 저들이 하는 일을 후원하여 "십자가에 못박으라 ! 못박으라!" 고 소리치게 하기 위해 모였던 폭도들은, 저들이 파멸당할 때, "아무도 달아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가족들도 모두 멸망당할 것이며, 뿌리든 가지든 남지 아니하리라. 이런 무리들, 폭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보복이 특별한 방식으로 가해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그 모든 무리들에게 미쳤으며" (12, 14절), "묵시(환상)가 그 무리들 전부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13절).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은 그 무리들을 일괄하여 제거할 것이며, 그들과 그들의 주모자들도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심판이 일단 시행되면, 많은 무리들조차도 그것을 물리칠 수 없다. "손에 손을 잡고" 서로 굳게 "결합할지라도," "악한 자들이 징벌을 피할 수는 없으리라."

3. 멸망당한 사람들에 대해 슬퍼하지도 않으리라. "그곳에는 그들을 위한 통곡도 없으리라" (11절, 우리 성경과 다름). 왜냐하면 그들을 위해서 애통할 사람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으며, 모든 것이 그들을 따라서 곧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때가 너무 참혹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런 황폐함을 보지 않고, 재앙을 겪지 않고 죽은 친구들의 죽음을 슬퍼하기보다는 오히려 축하할 것이다(렘 16:4, 5).

4. 그들은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으리라. 포고령은 이미 공포되었으며, 그들에 관한 "묵시" (환상)는 "돌이킬 수 없으리라" (13절). 하나님은 그것을 결코 취소하지 않을 것이며, 사람들이 그것을 무효화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포고령은 "일을 이루기 전에는 결코 돌이킬 수 없었으니, "반드시 그 보내진 뜻을 이룰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실행될 것이니, 그때에는



(1) 어떤 사람들도 하나님을 거스리지 못할 것이다. 어느 누구도 "자기의 악한 생활로 자신을 강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죄인들은 항상 그랬지만, 이제 하나님과 그의 심판에 도전하는 것은 그들에게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거슬러 마음을 강퍅게 하고서 잘 되지는 못한다." 죄악으로 자신을 강하게 한 사람들은 오히려 그것이 그들 자신을 약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패망에 이르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시 52:7).

(2) "무리들" 도 이런 심판의 급류에 저항할 수 없으며, 막아낼 수가 없다(14절). "그들이," 군대를 모으고, 그 모인 사람들에게 활력을 주고 격려하기 위해서, "나팔을 불며," "모든 것이 예비되었다" 고 할지라도, 그 모든 군대와 예비한 것이 헛되게 될 것이다. 징병에 응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으며, 적과 싸울 만한 용기를 가진 자도 없으리라.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를 대적한다면, 아무도 우리를 도울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5. 그들이 역경에 처할 경우 자기들을 부양하리라고 마음먹었던 재물에도 희망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다. "물건을 사는 자는 "그의 재산이 증가되고, 구매자가 되었음을 "기뻐하지 말라." 또는 "파는 자도" 그의 재산이 감소되고 파산자가 되었다고 "근심하지 말라" (12절). 이 세상 것들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알라. 고통의 때가 되어서, 우리가 그것들을 가장 필요로 할 때, 우리는 그것을 가장 하찮은 것으로 여길 것이다. 물건을 팔아 버린 사람들은 잃은 것이 적기 때문에 거의 근심하지 않으며, 그 물건을 산 사람들에게 오히려 근심과 두려움이 더욱 증가된다. 그러므로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라." 왜냐하면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가며," 그들의 재산을 빼앗길 날이 얼마나 가까운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고전 7:29-31). 그러므로 이런 말이 첨가되어 있다. "판 자가 희년이 올 때까지 칼과 온역을 피해서 살아있을지라도, 희년이 되어 다시 돌아가 율법에 따라서 판 것을 다시 얻지는 못하리라. 어떤 재산도 70년이 차기까지는 향유할 수 없으며, 그 후에야 사람들이 자기들의 소유물로 돌아가, 권리를 주장하고, 다시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무렵, 이런 신념으로, 예레미야는 "그의 삼촌의 밭을 샀다." 그러나 그는 그 권리로 인해서 기뻐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불평했다(렘 32:25).

6. 하나님은 모든 것 중에서 영광을 받을 것이다. "너희는 내가 여호와이며(4절), 나 여호와가 치는 줄을 알리라(9절). 너희는 너희를 쳐서 멸망시키는 자가 느부갓네살 왕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느부갓네살 왕은 단지 하나님의 막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너희는 알게 되리라. 너희를 쳐서 멸하는 것은 하나님의 손이다. 누가 하나님의 손의 위력을 알 수 있겠는가?" "그들에게 선(善)을 행했던 자가" "여호와" 임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은 그들을 "치는 자가 여호와임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선을 행하는 것도, 혹은 징벌하는 것도 모두 다 하나님의 소관이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든 인간은 하나님을 시인하게 되고야 만다.

 

7:2 없음.

 

7:3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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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5 없음.

 

7:16

성전 파멸 예고(에스겔 7:16-22)

우리는 지금까지 멸망당한 사람들의 비운에 관심을 기울여 왔었다. 그러나 이제는 위험을 피하는 기회를 가졌던 사람들의 도주에 관심하려 한다. 그들 중 몇몇의 사람들은 "피할 것이다" (16절). 그러나 그렇다고 더 나을 것이 무엇이겠는가? 한 번 죽는 것이, 비참하게 살면서 천 번 죽는 것, 그리고 살았으나 가인처럼 만나는 자마다 자기를 죽이지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도망자와 방랑자" 가 되기 보다는 더 낫다.

Ⅰ. 도피자들도 그들의 마음에 어떤 안락함이나 만족감을 갖지 못하며, 항상 염려와 공포 가운데서 살게 되리라. 왜냐하면, 그들은 어디에 가든 죄의식이 그들을 따라오며, 그 죄의식이 그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기 때문이다.

1. 그들은 항상 고독하게 될 것이며, 우울증에 사로 잡히게 될 것이다. 그들은 무리들이 운집한 곳이나 성읍 안에서는 살지 못하며, 홀로 "산 위에서" 살아갈 것이다. 또한 그들은 사회를 위해서 봉사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이 열등한 민족에게 굴복당한 일을 부끄러워하듯 그 사회를 부끄러워할 것이다.

2. 그들은 항상 슬픔에 잠길 것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의 표지 아래 놓여 있어야 할 이유가 있다. 그렇게 행복하게 지내왔던 그들도 하나님을 슬프게 만들 수 있다. 그들은 한때 자기들은 산에 있는 사자처럼 그렇게 담대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골짜기의 비둘기" 처럼, "추적하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갈" 채비를 하며,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에도 무서워 떠는, 그렇게 겁이 많아졌고, 낙담케 되었다. 그들 모두는 다 "각기 자기 죄악" 으로 인해서 슬퍼한다(이 슬픔은 "경건한 슬픔" 이 아니고 "죽음을 낳는" "세상의 슬픔" 이다). 즉, 그들은 이제 그들의 죄악이 가져온 재난을 알게 된다. 그 죄악은 그 땅의 죄악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의 죄악이었다. 그때에 비로소 그들은 각자가 민족적인 죄악에 동참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조만간 죄악은 어떤 형태의 것이든 슬픔을 가져올 것이다. 죄악을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은 곧 죄악을 한탄하게 될 것이다. 죄가 하나님을 모욕한 것임을 알고 죄악을 슬퍼하지(회개) 않던 사람들은 곧 그 죄악이 자기 자신들을 부끄럽게 하고 멸망시켰다는 생각 때문에 그 죄악을 한탄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에 이르러, 곧 너희 몸과 너희 육체가 쇠패할 때에, 너희가 한탄하여 말하기를, '내가 어찌하여 훈계를 싫어하였던고 !' 하리라" (잠 5:11, 12).

3. 그들은 몸과 마음의 모든 힘을 빼앗기리라(17절). "모든 손이 피곤해서" 그들은 싸울 수도 없게 될 것이며, 자기 자신을 가눌 수도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무릎은 물과 같이 약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땅 위에 서지도 못하고, 도망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들은 커다란 공포를 느낄 것이다. 그들의 무릎이 "물처럼 흐를 것이며" (" 물과 같이 약해질 것이며"), 그래서 쓰러질 것이다. "용사라 하여 자기 힘을 자랑함은" 어리석은 행위이다. 하나님은 그 힘을 곧 약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그들은 일체의 희망을 박탈당할 것이며, 절망 가운데에 빠지게 될 것이다(18절). 그들은 자기들의 정신을 지탱할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형세가 앞으로 더욱 험악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일찍이 그들이 착용해왔던 좋은 옷을 기대할 수가 없으므로, "굵은 베로 허리를 묶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그들을 덮을 것이요," "수치" 를 당하고 "대머리" 가 될 것이다(사 17:11). 이것은 모두 절망적인 슬픔을 말해 준다. 두려움과 수치심을 가지고 죄에서 떠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죄로 인해서 두려움과 수치를 당할 것임을 기억하자. 그런 혼란 가운데서 죄악은 끝날 것이다.

Ⅱ. 그들은 재물과 부로부터 어떤 유익도 얻지 못할 것이며, 오히려 그것들을 지겹게 생각할 것이다(19절). "은" 과, "금," 돈과 보석, 그밖의 가치 있는 물품들을 풍부하게 소유하고 있었던 사람들도 재앙이 시작되면 그것에서 큰 유익을 얻지 못하고, 이런 재난에 굴복당하리라. 그들은, 그들의 재물이 "강한 성읍" (요새)이 되어 주며, 그 재물로 적들은 매수하고 친구를 살 수 있으며, 그 재물이 생명의 속전(贖錢)이 되고, 그들이 돈을 가지고 있는 한 결코 양식이 떨어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면서 "돈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줄 것이다." 고 믿었다. 그러나 그 결과를 보라!

1. "그들의 번영이나 날" 에는 그들의 재물이 그들에게 큰 시험이 되었었다. 그들은 그 재물을 사랑했으며, 그 재물에다 신념을 두었다. 재물에 대한 열광적인 추구로 인해서 그들은 죄악에 빠지게 되었으며, 재물에 대한 많은 즐거움으로 인해서 죄악 가운데서 완고해졌다. 이와 같이 그 재물은 그들을 죄악 가운데에 빠지게 했었다. 재물이 그들을 죄 가운데 빠지도록 했으며,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을 차단했다. 재물로 인해서 실패하고 패망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재물은 실패와 패망의 원인이다. 세상을 얻는 자들도 그들의 영혼을 잃는다. 재물은 그들을 교만하게 하고, 방심하게 하며, 욕심을 내게 하고, 압제하며, 방탕하게 한다. 재물은 잘 사용하면 그들의 경건심을 신장시키는 하인이 될 것이나, 남용하게 되면 그 재물은 그들을 죄악 가운데에 빠지게 할 것이다.

2. 재물은 재앙의 날에는 그들에게 아무런 위안도 줄 수 없다. 왜냐하면,

(1) 그들의 "금과 은" 이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그들을 막아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금과 은은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그들을 구할 수가 없으리라." 그 재물들은 하나님의 정의를 보상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못 주며,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게 할 수가 없고, 하나님의 재물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심판을 가져올 때 그 심판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줄 수가 없다. 진노하는 날에는 "재물도 무익하다" (잠 11:4). 재물을 그들을 하나님의 심판이 미치지 못하는 높은 곳으로 올려 놓을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을 엄습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강력하게 해 줄 수도 없다. 인간들의 재물이 그들을 전적으로 구할 수 없으며, 그들에게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는 사실이 명백하게 나타나는 때, 곧 진노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영혼이 떠나가게 되는 때에 부자의 곳간을 가득 채움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지옥에서 "그의 혀를 적셔 줄" 한 방울의 물도 얻을 수 없을 때라면, 부자의 "자주색" 과 "진홍색" 의 의복과 "화려한 음식물" 의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돈은 죽음을 저지시키는 데 있어서 어떤 방어물도 되지 못하며, 파멸시키는 재앙을 조금도 경감시키기 못한다.

(2) 재앙이 닥치면 "금과 은" 도 그들에게 아무런 만족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1]재물이 그들의 창자를 채워 주지 못한다. 성읍 안에 식량이 떨어지면, 돈이나 사랑은 아무 쓸모없으며, 그들의 은이나 금도 그들의 굶주림을 만족시켜 줄 수 없다. 그것들은 그들에게 한끼의 음식도 공급해 주지 못한다. 곡물이 나는 들판이 없기 보다는 금광산이 없는 쪽이 살기가 좋다. 우리가 땅의 표면으로부터 쉽게 얻을 수 있는 땅의 소산물들은, 땅 속에서 어려움과 위험을 무릅쓰고 채굴하는 금은 보석들보다 인간에게 더 큰 축복이 된다. 우리가 금과 은을 소유할 수 없을지라도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매일매일의 음식을 준다면,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불평해서는 안 된다.

[2]더욱이 재물이 사람의 영혼을 만족시켜 주거나 내면의 위안을 주는 일은 더욱 못한다. 이 세상의 재물에는 영혼의 욕구를 해결해 줄 만한 것이 들어 있지 않으며, 환난의 날 영혼에게 아무런 만족감도 주지 못한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그 은으로 만족을 얻지 못할 것이며," 은을 잃은 자는 더욱 더 그러하리라.

(3) 그들의 "금과 은은" 적들의 손에 의해서 "거리에 던져지거나" 못쓰게 되거나 혹은 적들이 가져갈 것이기 때문이다(그들에게는 은이 소중히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 은을 거리에 던질" 것이다. 그러나 더욱 가치가 있는 "금" 은 바벨론으로 가져갈 것이다).

적군이 금과 은을 길가에 던지거나 바벨론으로 가져가지 않을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금과 은" 을 거리에 "던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 금과 은은 그들에게 귀찮은 것이 되고 그들의 도주를 지체시키며, 그들의 돈 때문에 적에게 그들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고, 적의 유혹물이 되며, 그 재물에 탐나서 자기들의 목을 자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모든 근심과 고통까지 견디며 그들이 그 재물을 긁어모아 저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재물이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며, 오히려 그들에게 화를 자초하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도 지나가고 정욕도 지나가리라" (요일 2:17). 세속적인 사람들이 재물과 영합하고 나자 즉시 그 재물에 싫증을 느끼게 되는 때, 또 거의 가지지 아니한 것이 가장 좋은 그런 때가 올 것이다.

Ⅲ. 하나님의 성전도 그들에게 아무런 도음을 주지 못할 것이다(20-22절). 그들은 이 성전에 대해 긍지를 가져왔었으며, 이 성전으로부터 그들 자신의 안전을 약속받았었다(렘 7:4; 미 3:11). 그러나 성전에 대한 이런 신념은 그들을 실망시킬 것이다.

1.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 그의 성전을 두심으로 그 백성들을 크게 영예롭게 하셨다(20절). "그들과 그들의 열조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던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 의(사 64:11) "화려한 장식물로 인해서" 라고 했다. -그 전은 거룩하기 때문에 아름다우며, 그래서 "거룩한 아름다움" 이라 불리워졌다. 거룩함이 성전을 장식하는 아름다움이다. 또 그 성전은 금과 예물로써 장식되었다 - 이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그의 성전을 존귀하게 하셨다." 그 성전을 장엄하게 꾸미기 위해서 온갖 것이 다 고안되었다. 그 성전의 장엄함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열방 중에서 더욱 뛰어나게 만드는데 도움이 되었다. "하나님은 그의 성소를 산의 높음같이 지으셨다" (시 78:69). 그 성조는 "영화로우신 높은 보좌이며, 태초로부터 있었다" (렘 17:12). 그러나,

3. 여기에는 그들이 하나님의 성소를 모독함으로써 하나님에게 준 큰 치욕이 나와 있다. 그들은 가짜 "형상을 만들었다." 본문은 그것들을 "가증하고 미운 것들" 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에게 행하듯 그 우상들에게 행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우상들을 하나님과 경쟁시키기 위해서 세웠으며, 이 우상들을 하나님의 성전 안에 둠으로써 하나님을 크게 모욕했다. 그러므로,

4. 그들은 여기에서 성전을 빼앗기리라는 경고를 받는다. 그리고 또한 그 성전이 그들에게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리라는 경고를 아울러 받았다. "그러므로 내가 그것(성전)을 그들에게서 멀리있게 하리라" (한글과 다소 다름 - 역주). 즉 우상들을 그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으로 보냈다. 그래서 그 성전은 우상들의 예배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게 되었으며, 그것들은 그 성전의 영향이 미치는 범위 밖에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포고령과 종교적인 공언에 대한 특권은 그것을 경멸하고 모독하는 자에게는 상실될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성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살게 될 뿐만 아니라, 그 성전 자체도 이런 전반적인 파멸 가운데서 파괴될 것이다(21절).

갈대아 사람들을 "왜인들" 이기 때문에 성전에 대한 어떤 존경심도 갖지 않을 것이며, 그들은 또한 "세계의 악인들" 이기 때문에 그 성전에 대해서 혐오감을 가지며, "그 성전을 노략질하고 못쓰게 하리라." 그 성전의 모든 장식물과 보물들은 - 성전의 장식물 및 보물들과 다른 약탈물 사이의 차이점을 알지 못하는 - 갈대아인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시온에 있는 성도들에게는 이것이 큰 슬픔 거리가 되었다. 왜냐하면 "적들이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면에 "열방들" 에 의해서 성전이 모독당하며, 하나님이 그들과 그들의 범죄를 보지 못한 듯이 "악을 행했던 그들로부터 그의 얼굴을 돌이키며,"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과 그들의 기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겠다는 듯이 그 성전을 비난했던 자들로부터 그의 얼굴을 돌이키는 것은, "이방신들" 을 통해서 성전을 모독하여 하나님을 진노케 했던 시온에 있는 죄인들에게는 하나의 징벌이 되었다. 하나님은 군인들에게 그들이 행하고자 했던 대로 행하게 했다. 그들을 강도처럼 "은밀한 곳," 지성소로 "들어가게" 했다. 그들에게 성전의 장식품들을 탈취케 하며, 그 성전을 더럽히게 했다. 이제 성전을 방어하고 보호하려는 노력은 멈추어졌으며, 성전의 모든 영광도 사라졌다. 경건의 능력에 지배되려 하지 않는 자들은 경건의 모양을 지니는 영예를 누리기에도 부적합하다는 것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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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적인 파멸(에스겔 7:23-27)

Ⅰ. 여기에 심문을 받는 죄수가 있다. 하나님의 정의의 법정에 죄수를 세우고, 그 법정에서 죄수에게 채울 "쇠사슬을 만들어라." 죄수에게(악평이 자자한 범죄자처럼) 족쇄를 채워서 세우라. 그리고 그에게 내릴 판결을 받도록 결박해서 세우라. 하나님의 율법의 띠를 "부수고, 던져버리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쇠사슬에 얽매이게 됨을 깨달을 것이다. 그런데 그 쇠사슬은 그들이 부술 수도 없고 차 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

이 쇠사슬은 예루살렘이 포위당했음을 의미하거나, 혹은 포로로 끌려가는 사람들의 종살이를 의미하며, 또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던져져, "쇠사슬에 매임" 을 의미했다.

Ⅱ. 죄수에 대한 고발장이 작성되었다. "그 땅에는 피흘리는 죄가 가득하며," "피의 심판" (문자적 의미는 그렇다)이 가득하다. 이것은 그들이 엄숙한 재판을 하여 율법의 형식으로, 그리고 정의의 구실 아래 행한 피흘림의 죄책을 의미한다. 므낫세가 "피의 심판" 에 의해서 흘렸던 무고한 피가 예루살렘의 죄악의 분량을 채웠다(왕하 24:4).

또 그 땅은 율법에 의하면 "피의 심판" 인 사형을 선고받아야 될 그런 범죄로 가득하다. 즉 우상 숭배와 신에 대한 모독죄, 그리고 남색하는 죄와 같은 죄악이다. 이러한 죄를 범한 죄인들은 사형을 당했다. 그러므로 그러한 죄악이 민족적인 죄악으로 되었을 때는 어떠한 구제책도 없으며, 다만 멸망받아야 할 뿐이다. 피흘리는 죄악은 피흘리는 심판으로 처벌될 것임을 명심하자.

정의의 한 모범, 정의의 수호자, 그리고 악에 대한 징벌자가 되었어야 했을 거룩한 도성, 즉 다윗의 "성읍" 이 "이제 폭력(강포)로 가득차게 되었다." 남보다 큰 권력과 명성을 가지고 있었던 그 성읍의 지배자들은 다른 성읍의 지배자들보다도 더 지독한 압제자들이다. 이것은 슬피 통애되어야 할 일이었다. "신실한 성읍이 어찌 음녀가 되었는고" !

Ⅲ. 이 고발에 대한 심판을 보자. 하나님은 그들이 그의 성전을 목독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정의(사법권)를 악용한 사실에 대해 셈을 하실 것이다. 왜나햐면, "하나님의 성소가 거룩한" 것처럼, "의로우신 여호와는 의를 사랑하며" 불의를 미워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심판은 다음과 같다.

1. 그들은 이교도의 길을 걸어왔으며, 이교도들보다 더 악하게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극히 악한 이방인들을 그들에게 데려올 것이다." 또 그들을 황폐하기 위해서 인간에 대해 아무런 동정심도 갖고 있지 않으며, 유대인들이 가장 꺼려하는, 가장 야만적이며 난폭한 자들을 그들에게 데려올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징벌하기 위해서 때때로 이방인들 중에서도 가장 악한 사람들을 선발하신다.

2. 그들이 불의하게 모은 재물로써 자기들의 집을 채우며 그들의 권력과 교만을 약한 자들을 압제하는데 사용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의 집과 모든 가구들을 이방인들에게 줄 것이며, "악한자의 교만을 그치게" 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허세로 우둔한 자들의 눈을 현혹시키지도 못하며, 예전처럼 저들의 권력으로 의로운 자를 압제하지도 못하게 되리라.

3. 우상 숭배로써 "거룩한 성소를 더렵혔기" 때문에, 하나님은 심판으로써 그들을 더럽게 하시리라. 또 그들이 다른 신들의 형상을 성소에 세웠기 때문에, 하나님은 성소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중거를 제거하리라. 성소가 그들의 하나님께 버림받으면, 그 성소는 곧 그들의 적들에 의해서 더렵혀질 것이다.

4. 그들이 죄에 죄를 거듭행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심판에 심판을 더해서 그들을 추적하리라. "패망이 이르리라. 전적인 패망이(25절) 이르리라. 너를 패망시키기 위해서 환난에 환난을 더할 것이요, 너를 놀라게 하기 위해서 소문에 소문을 더하며, 폭풍우 때의 파도처럼 너를 덮치리라." 패망의 낙인이 찍힌 죄인들에게는 패망이 곧 수행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가 심판할 때 모든 것을 이길 것이기 때문이다.

5. 그들이 하나님의 기대를 실망시켰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에 대한 그들의 기대를 실망시키리라. 왜냐하면,

(1) 그들은 그들이 기대하던 바 "그들의 고통으로부터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평화를 구할" 것이다. 그들은 평화를 원하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할 것이다. 그들은 평화를 겨냥하며 그것을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그들이 구하는 평화가 "없을 것이다." 적과 정복자들을 설득하려는 기획도 헛될 것이며, 그들의 고통은 더욱 더 악화될 것이다.

(2) 고통을 당했을 때 기대하는 하나님의 지시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통 중에서 행복을 보장받고, 도움을 얻기 위해서, "예언자에게 묵시를 구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죄를 견책하고 그들에게 위험을 더하는 그런 묵시를 원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에게 구원을 약속하는 그런 묵시만 원할 것이다. 그들은 그런 메시지 듣기를 매우 갈망했다. 그러나 "제사장에게는 율법이 없어질 것이다." 그에게는 그들에게 말해 줄 어떤 조언이나 위로의 말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유죄판결을 선언한 것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그들에게 용기를 줄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장로에게는 모략이 없어질 것이다." 이런 어려운 위기를 당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를 충고해 주었었던 백성들의 장로들도 당황할 것이며, 기지를 잃게 될 것이다. 백성들의 상담자들이었던 사람들이 백성들에게 조언해 줄 방법도 알지 못하며, 그들 안에 일어난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서로서로 어떻게 의논할 것인가를 알지 못하는 것은 백성들에게 더욱 불리한 일이었다.

6. 그들이 서로서로를 격려해서 죄악을 더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 모두를 낙담시킬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 위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머리를 들을 수가 없으리라. 백성들의 모든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무거운 짐을 지게 될 것이다(27절). 백성들에게 삶을 고무시켰던 "왕" 은 "애통할 것이며," 적을 공격하기 위해서 그들을 전쟁터로 이끌었던 "방백들" 은 "황폐를 옷입듯할 것이다." 그들의 두뇌는 현명함을 상실할 것이요, 그들의 가슴은 낙담될 것이다. 그때 그들을 위해서 싸워 주었던 "땅의 거민들의 손이 떨리게" 된다고 해서 기이하게 여기지 말라. 힘있는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손의" 힘을 "깨닫지" 못하리라. 하나님이 떠나시고 대적한다면, 사람들이 그들 자신들을 위해서 무엇을 행하고 무엇을 고안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그들의 행위에 따라서 그들을 국문할" 때, 모든 사람들은 "애곡하고" 두려워 "떨" 뿐이다. 그러한즉 그들에게 그들의 죄악에 대한 대가를 알게 하고, 그 행위에 "따라서 보답하는 분" 이 여호와임을 알게 되리라.

 

7:24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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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7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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