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0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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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예루살렘 공격의 상징(에스겔 4:1-8)

여기에서 예언자는, "예루살렘의 포위" 를 자신과 남들에게 상징으로 표현하라는 명령을 받는데, 그 같은 수법은 신기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안성마춤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예언이었다.

Ⅰ. 에스겔은 흑벽돌 위에다 예루살렘을 그리라는 명령을 받았다(1절). 예루살렘이 그의 순결을 지키고 있을 때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그의 손바닥에 새겼다" 는 사실이 예루살렘의 명예였다(사 49:6). 그리고 12지파의 이름이 대제사장의 흉패 위의 보석에 새겨졌었다. 그러나 이제 "신실한 성읍이 매춘부가 되었으며," 무가치한 박석 곧 벽돌 위에 "그 모습이 새겨져야" 마땅하다고 생각되었다. 예언자가 이것을 자기 눈 앞에 두어야 했던 것은, 눈이 마음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Ⅱ. 에스겔은 예루살렘의 둘레에 조그만 성채를 건설하고, 공성퇴를 둘러 세우라는 명령을 받았다(2절). 에스겔은 포위된 도시와 포위자인 자기 자신 사이에 "석쇠(전철)" 로 된 "철성벽" 을 쌓았다(3절). 이것은 양편의 단호한 결의를 나타냈다. 즉 갈대아인은 어떤 댓가를 치를지라도 그 도성을 정복하려고 하며, 그 도성을 정복하게까지는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을 결의한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결코 항복하지 않고 최후까지 싸울 결심을 한다.

Ⅲ. 에스겔은 그 성읍 그림 앞에 옆으로 누우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그것은 말하자면 그 성을 둘러싸는 격이다. 이것은 갈대아인의 군대가 그 도성 앞에 진을 치고 식량 수송을 막는 것을 상징한다. 그는 좌편으로 "390일" (5절)를 누워 있어야 했다. 이것은 약 13개월에 해당하는 날이다. 그런데 예루살렘 포위 기간은 18개월로 추정된다(렘 52:4-6).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18개월에서 5개월 곧 바로의 군대의 당도로 인하여 포위국이 철회했던 기간(렘 37:15-8)을 뺀다면 포위된 날짜의 가장 가까운 근사치는 390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역시 이것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예언자들의 어법에 따르면, 390일은 390년을 의미한다. 이 예언자가 그렇게 많은 날을 누워 있는 동안, 그는 390년을 지내온 10 부족으로 되어 있는 "이스라엘 족속" 의 죄책을 담당한 것이다. 여로보암 지휘 하의 첫번째 변절로부터 예루살렘의 멸망까지를 계산하면 390년이 된다. 그런 후에 에스겔은 "우편으로" 40일을 누워 있었으며, 그것은 2 부족의 왕국인 "유다 족 속의 죄악" 을 담당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백성들에게서 측정된 죄악은 그들이 포로로 되기 이전의 40년 동안의 죄악이었으며, 곧 요시아 왕의 통치 13년 이후부터의 기간이다(혹자는 그것을 요시아 왕의 통치 18년 이후라고도 한다). 예레미야가 예언하기 시작했던 때는 바로 요시아 왕의 통치 13년이었으며, 이때에 성전에서 율법책이 발견되어서 백성들이 하나님과 맺은 그들의 계약을 새롭게 했었다. 그들이 불경건과 우상 숭배를 계속하던 중 그러한 예언자와 왕을 가졌으며, 그런 계약의 결속을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왜 어떤 구제책도 없이 멸망하고야 말았는가? 개혁을 위한 그런 도움과 이점을 가졌던 유다는 이스라엘에 비하면 훨씬 더 짧은 기간 안에 그들의 죄악의 분량을 가득 채웠다.

그런데 밤낮으로, 끊임없이 예언자가 누워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으며, 매일 매일 일정한 시간을 누워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때에 에스겔의 친구가 방문을 했고, 그들에 의해서 그가 예루살렘의 조감도 앞에서 "좌편으로 390일을," "우편으로 40일을 누워 있었다" 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모든 일은 그 도성이 포위당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으며, 백성들은 그 도성을 보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말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들은 호기심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양심 때문에, 지정된 시간에 매일매일 모여들었을 것이다. 마치 "그가 줄에 동여매여 있는 것" 처럼(사실은 하나님의 명령이 그를 줄로 묶고 있었다). 한쪽으로 누워 있었고, "에워싸는 날이 끝날 때까지는 다른 쪽으로 바꿔누울" 수 없었다는 사실은 갈대아인들이 저들의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는, 즉 날짜의 수가 차기까지는 예루살렘을 끊임없이 포위하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표현해 준다.

Ⅳ. 에스겔은 힘있게 예루살렘을 둘러싸라는 명령을 받았다(7절). "너는" 오직 전심으로 그리고 굳은 결심을 하고서 "에워싼 예루살렘을 향하여 너의 얼굴을 두어라."

갈대아인들도 그러했다. 그들은 뇌물을 받고나 어쩔 수 없는 형편이 되어 포위를 철수하지는 않는다. 동맹 조약을 깨뜨린 시드기야 왕의 배반에 대한 느부가넷살 왕의 분개는 매우 격렬해서, 이 같은 포위 공세를 했으며, 불신앙의 왕과 백성들의 오만함을 징벌했다. 그리고 느부갓네살 왕의 군대는 이 호화로운 성읍의 풍부한 전리품을 탐내었다. 그리하여 양편은 단단히 대치하였다. 그들은 활동적이고, 근면했으며, 모든 포위 작전을 진행시키는 데 있어서 만전을 기했다. 그런데 이 포위 직전은 예언자가 "그의 팔을 걷어올림" 으로써, "뻗침" 으로써 상징되었다. 하나님이 어떤 큰 일을 행하려 할 때는, "그의 팔을 걷어올리신다" (사 52:10)고 했다. 간단히 말해서 갈대아 사람들은 목적을 관철시키기로 결심한 사람처럼, 그들의 업무를 행했을 것이다.

1. 이것은 "이스라엘 족속에 대한 징조" 로 삼기 위한 것이다(3절). 바벨론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예언자가 행한 일을 눈으로 직접 본 자들, 곧 포로들에게나, 고국에 남아 있어서 역시 그 일에 대한 소식을 들어서 아는 자들에게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예언자는 "벙어리" 가 되었으며, "말할 수가 없었다" (3:26). 그러나 그의 침묵이 하나의 음성이었고, 백성들의 귀먹음을 책망했듯이 하나님은 "자신에 대한 아무런 증인도 두지 않으시는 일이 없다." 그래서 스가랴가 벙어리였을 때 행했던 것같이, 또 벙어리가 된 사람들이 익숙하게 행했던 것처럼, 에스겔에게 징조를 보여 주라고 했다. 하나님은 그것으로써 "자기의 마음을 백성들에게 알리려 했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백성들은 그들의 무감각과 우둔함 때문에 책망받았다. 백성들에게는 지각 있는 사람들처럼 말로 교육받을 능력이 없었으므로, 어린아이들처럼 그림으로 배우거나 혹은 귀머거리처럼 시늉으로 배워야 했다.

아니면 아마도 이로써 예언자에 대한 악감정에 대해 책망받았을 것이다. 에스겔은 이런 몸짓이 의미하는 것을 상세히 말로 설명했더라도, 백성들은 에스겔이 이야기하는 것을 방해했을 것이며 배신적인 말을 하도록끔 그를 교사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람들을 말로 트집잡아 범죄자로 만드는" 방법과(사 29:21), 에스겔이 명령받은 징조를 피하는 방법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는 이 예언자는 그리스도가 사용했던 비유, 즉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게 함이라" (마 13:14, 15)고 한 것과 같은 이유에서 이같은 징조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들은 명백한 것도 깨달으려 하지 아니했다. 그러기에 어려운 것으로서는 그들을 가르칠 수 없었다. 이런 점에서 주께서 의로우셨다.

2. 이와 같이 예언자는 "예루살렘을 쳐서 예언한다" (7절). 그 예언을 잘 이해할 뿐 아니라, 그런 식으로 제시되기 때문에 보다 큰 감동을 받는 자들도 있다. 흔히 눈으로 보는 것이 말보다는 더 깊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성례전도 거룩한 일을 표현하기 위해서 제정되었으니, 그것은 우리로 이런 것들을 눈으로 보고 믿으며, 눈으로 보고 감명을 받게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것은 저들에게 유익이 되고, 한 축복이 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본문의 예언자처럼) 그 같은 징조들은 하나님이 분명히 지정하신 것이므로, 우리에게도 가장 적합한 것이라고 판단해야 한다. 올바르게 사용되고 이성과 신앙의 지도와 수정을 받으면, 인간의 상상력도 여기에 있는 에스겔이나 그의 친구처럼, 매우 경건하고 열심있는 신앙으로 활용될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3. 이런 모든 사정을 핑계로 하면 모두 예언자는 그것을 반대하고 거부할 수도 있었겠으나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여 그의 직무를 실행했음을 보여 준다.

(1) 에스겔이 한 일은 매우 유치하고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그래서 에스겔은 조롱한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에스겔은 다른 경우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천해 보일 일이었지만 하나님이 명령하셨다는 사실 자체가 그같이 행함을 명예롭게 해 준다는 것을 알았다.

(2) 에스겔이 행했던 것같이 행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짜증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안락함과 명예는 의무를 행하는데 희생되어야 하며, 어떤 경우에든지 하나님의 사업을 어려운 일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3) 거룩한 도성이며, 자신도 친밀히 여기는 하나님의 성읍 예루살렘을 이와 같이 원수처럼 둘러싸는 행위는 그의 성미에 맞지 않으며, 매우 꺼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예언자이기에 그의 감정에 사로잡힐 수 없고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야만 했다. 에스겔이 비록 예루살렘의 번영을 간절히 원하고 기원한다 할지라도, 이 죄 많은 도시의 멸망을 분명하게 선포해야 했다.

4. 예언자가 그의 백성의 자손들에게 보여 준 모든 것은 예루살렘의 파멸에 관한 것이며, 그들에게 그들의 죄를 보여 주고, 한때 번창했던 성읍이 파멸되는 원인은 죄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함으로써, 그들을 죄에서 돌이키게 하기 위함이었다. 백성들로 죄를 미워하고 그 죄에서 돌이키게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에스겔이 그 자신에게도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주는 재앙을 이처럼 생생하게 서술하는 동안, 그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악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에스겔은 말한다. "여기를 보라. 죄악이 어떤 일을 초래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이며, 악마적 행위인가를 ! 이런 일들은 죄악, 즉 너희의 죄 그리고 너희의 조상들의 죄악에서 기인된다. 그러므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너희는 매일매일 슬픔과 수치를 나날의 일과로 삼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하나님과 화평케 되며, 하나님이 돌이키사 너희에게 자비를 베풀 것이니라."

그러나 죄의 일 년이 징벌의 하루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내가 네게 정한 것은 일 년이 일 일이니라" (한글 성경과는 반대임-역주). 포위가 390일의 재앙이며, 이 이간을 하나님은 죄를 지은 390년 간의 기간으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죄악보다 형벌을 경하게 하셨다" (스 9:13)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뉘우치지 않는 죄인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도 그들에게 오랜 고통을 주시지만, 저 세상에서도 영원한 형벌을 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예언자를 줄로 동여맨 것은, 그들은 "그들 자신들의 죄악의 줄에 메이리라" 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애 1:4). 그러므로 그들은 당시 "고통의 사슬에 얽매여"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사역자들에게 행하신 것처럼(고전 9:16, "내가 복음을 전함은 부득불한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리로다"), 하나님이 에스겔을 의무의 줄로 동여매었다고 에스겔의 처지를 동정심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이 좋으리라. 이미 사람들은 에스겔을 억제의 줄로 동여매었었다(3:25). 그러나 의무의 줄로든 억제의 줄로든, 그렇게 되는 것은 결국 지상에 있을 하나님 나라의 권세에 보탬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족하리라.

 

4:2 없음.

 

4:3 없음.

 

4:4 없음.

 

4:5 없음.

 

4:6 없음.

 

4:7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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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근의 예고(에스겔 4:9-17)

예루살렘의 파멸에 대한 에스겔의 예언의 이 부분의 가장 적절한 해석은 예루살렘에 대한 예레미야의 애가이다(애 4:3, 4; 5:10). 거기에서 예레미야는 포위 기간 동안 예루살렘에 있었던 무서운 기근을 애처롭게 묘사했다.

Ⅰ. 백성들에게 다가올 기근의 조짐에 대하여. 에스겔은 여기에서 390일 동안 거치른 음식물과 부족한 식량과 볼품없는 의복으로서 그 자신을 금욕해야 했다. 왜냐하면 백성들에게 음식물과 연료가 모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1. 에스겔이 먹는 음식은, 그 질에 있어서, 밀과 보리와 콩과 팥과 조와 귀리로 만든 아주 나쁜 빵이었다. 마치 우리가 말에게 먹이거나 돼지를 살찌게 할 때 먹이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마치 밀가루나 혹은 거지들의 깡통에 있는 것과 같이 여러 집을 다니면서 거둔 것을 가져다가 접시에 담아 혼합한 것이었다. 이 예언자가 누워서 고역을 치루는 동안 먹어야 할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었고, 그의 몸을 부지하기에도 부족한 것이었다(9절). 맛있고 향기로운 진미를 너무 좋아하지 않는 것이 지혜롭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기 전에 어떤 거친 음식물이라도 우리의 분수에는 넘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음식물을 멸시하여(비록 그 음식물이 볼품없고 맛이 없다고 할지라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2. 양에 있어서도, 에스겔이 먹었던 음식물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이었다. 이것은 그 포위 공격이 "성읍의 모든 음식이 고갈될 때까지(렘 37:21)" 계속될 것임을 상징한다. 그는 하루에 오직 20 세겔 무게의 음식만을 먹어야 했다(10절). 그런데 이 분량은 약 10 온스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는 "물도 1/6힌씩" 만 마셔야 했다. 이것은 8온스에 해당하는 반 파인트였다(11절). 보통 식사 정량은 14 온스의 음식과 16온스의 음료수이다. 바벨론에 있는 이 예언자는 충분한 음식을 먹고, 또 저장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풍부한 양의 물이 있는 강가에 살았었다. 그러나 에스겔은 그의 예언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스라엘 족속에게 징조를 보이기 위해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와 같이 궁핍한 생활을 하게 했으며, 에스겔은 거기에 복종했다.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바지하는 경우라면, 그들의 신앙의 신실성을 증거하고 고통중에 있는 그들의 형제에 대한 동정심을 표현하기 위해서, 어려움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다. 또 그들 자신의 정당한 즐거움조차도 거부해야 한다. 몸을 "복종시켜야 한다." 스스로 선택하여 절약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만약에 우리가 할 수 없어서 절약해야 될 때 더 잘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환난과 재앙을 만난 시기에,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요셉의 환난을 위해서는 근심치 아니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암 6:4-6).

3. 그 음식을 조리할 때는 "인분으로 구워야" 했다(12절). 그 인분은 건조된 것이었을 것이며, 그의 솥을 위한 연료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생각만 해도 사람의 속을 뒤틀리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구워진 조잡한 음식을 에스겔은 마치 항상 먹던 음식처럼, 그리고(보리떡을 만들어서 먹어야 했다) "보리떡처럼 먹어야 했다." 에스겔은 이런 지겨운 요리를 "백성들의 면전에서" 공공연하게 먹는 훈련을 해야 했으며, 백성들은 이런 것이 의미하는 재앙이 다가오고 있음을 더욱 더 절감했을 것이다. 그런 극단적인 기근 중에서는 맛있는 음식물은 고사하고 청결한 음식물조차도 얻을 수 없게 된다. 그들은 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섭취해야만 했다. "굶주린 영혼에게는 쓴 것도 달다."

이 징후의 주변사정, 에스겔이 인분으로 떡을 굽는 것 따위는 이 예언자가 겸손하게 복종하는 마음으로 제거되기를 바라던 바이었다(14절). 거기에는 의식법상의 불결한 요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규례에는 사람의 인분은 "흙으로 덮어야 한다" 는 법이 있었으며, 하나님은 "그들의 처소에서 더러운 것을 일체 보지 않으시는 분" 이기 때문이다(신 23:13, 14). 그러면 에스겔은 가서 그렇게 불쾌한 것을 모아서 백성들의 면전에서 요리를 만드는데 사용해야 하는가? "오호라 ! 주 여호와여, 나의 영혼은 더러워진 일이 없나이다. 이런 행위로 말미암아 내 영혼이 더럽혀 질까 두려워하나이다" 라고 에스겔은 말한다. 죄에 의해서 영혼이 더럽혀지는 것은 선한 사람들로서는 어떤 것보다도 더욱 두려워하는 바이다. 그러나 예민한 양심은 때때로 이유없이 자기의 양심이 더럽혀질까 두려워진다. 또한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 1:11)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하는, 본문의 예언자 같은 자들은 정당한 일에 대해서도 망설이고 양심을 당황하게 한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에스겔이 다음과 같이 호소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여호와여, 어려서부터 나는 깨끗하고 싱싱한 것 외에는 어느 것도 먹지 않았고, 그런 것을 세밀하게 교육받아 왔나이다" (그렇게 교육받은 사람들 중에는 예루살렘 포위 기간 중에 거름더미에 앉았던 자들이 있다. 애 4, 5). 그는 오히려 이렇게 호소한 것이다. 즉 자기는 양심적인 교육을 받아왔고, "저절로 죽은" 것이나 "짐승에 찢겨 죽은" 것, 곧 율법이 금하는 것은 먹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이제 나에게 이런 일을 행하지 마소서" 라고 에스겔은 말한다. 베드로도 이와 같이 탄원했다(행 10:14). "주여, 나는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은 어느 것도 먹지 아니 했었습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만약에 우리의 마음이 우리는 항상 조그만 죄악도 범하지 않았으며, "악한 행위" 를 삼가해 왔었다는 사실을 우리 자신에게 증거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매우 다행스런 일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선한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만약에 악하다고 생각하던 일을 당하게 되면, 이런 생각을 하면서 거기에 저항해야 한다. 즉 지금까지는 우리의 정결을 지켜왔다. 그런데 이제 그것을 잃어야 하는가? 에스겔은 때묻지 않은 양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양심의 가책을 표명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 그러한 일을 제거해 달라고 했던 것이다. 권력을 잡고 있는 자들은 그들에 대해서 불만족하는 사람들에게 명령을 혹독하게 내려서는 안 된다. 나아가 비록 그들의 불만족이 근거없는 것이고, 교육과 오랫동안의 관습으로 인해서 생겨난 것이라 할지라도, 약자를 괴롭히거나 그들 앞에 장애물을 놓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로부터 물러나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보인 겸양의 본을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권위는 저항할 수 없고, 그의 명령은 모두 지혜롭고 선하지만, 그는 양보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인분" 대신에 "쇠똥" 을 사용할 것을 허락하셨다(15절). 이것은 죄로 말미암아 더렵혀진 인간은 어떤 다른 창조물보다도 더욱 협오스럽고 추한 것이라는 사실을 암암리에 반영해 준다. "인간은 얼마나 더 추하고 더러운 것인가!" (욥 15:16).

Ⅱ. 이 징조가 여기에서 자세하게 설명된다. 그것은 다음 사실을 상징해 준다.

1.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필요한 음식도 구하지 못하는 극단적인 재앙에 허덕이게 된다. 모든 공급물은 포위자들에 의해서 차단되며, 성읍은 시골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곧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왕도 들의 소산을 먹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예루살렘에는 양식이 끊어진다" (16절). "백성들이 먹어도 배부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 (레 26:26), 하나님은 떡의 영양분을 제거시켰을 뿐만 아니라, 양식 자체를 제하여 버린다(사 3:1). 그래서 무엇이든 남아 있는 작은 분량도 여러 날 같은 양, 매 사람이 같은 양을 먹으려고 "무게를 달아서 먹으며," 가능한 한 오랫동안 견디어 보려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최후까지 견딜 수 없고, 포위자들의 면전에서 포로된 자들이 완전히 지치고 말 것이니,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백성들은 식량이 거의 떨어지는 것을 보며, 원군에 대한 희망이 전혀 없음을 알고는 "놀라서," "걱정스럽게" 먹고 마시며 되도록 오래 버티려할 것이다. 그들은 "피차에 놀라게 될" (민답할)것이다. 재난 중에 서로가 유무상통하는 것은 그 재난을 다소 경감시키는 일이 될 것이며, 고통을 덜 불평하게 해 줄 것이다. 그러나 재앙이 모두에게 미쳐 있고, 서로가 서로에게 불평하는 것은 오직 그들 모두를 더욱 괴롭게 만들며, "경악심" 을 증가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모든 사건은 두려워하는 것만큼 더 악화된다. "그들이 그들의 죄악 중에서 쇠패한다" 는 것 이상으로 딱한 일은 없다. 백성들 중 다수의 사람들이 기근으로 말미암아 죽었을 것이며, 그 죽음은 오랫동안 질질 끄는 죽음이었으며, "검" 에 의한 죽음보다 더 나 쁜 것이었다.(애 4:9). 그들은 "그들 자신이 죽어가는 것을 느끼면서" 죽었을 것이다.

이런 모든 재앙이 그들에게 임한 것은 죄악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쇠패하리라." 그들은 계속해서 완고했을 것이고, 그래서 그들의 죄악 가운데서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죽음은 거름더미 위에서 죽는 것보다 더욱 비참한 것이었다.



(1) 우리는 여기에서, 죄악이 백성들에게 크게 비참한 일을 만들었으며, 그 안에는 하나님의 정의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시기는 "예루살렘이 아름다운 밀로 가득 차 있었던" 때이다(시 147:14). 그러나 이제는 아무리 거친 음식이라도 기뻐하게 되리라. 그런데 그것도 구할 수가 없다. "식물의 풍족함" 은 예루살렘이 받는 자비의 하나였듯이, 그것이 또한 예루살렘의 죄악의 원인의 하나가 되기도 했다(16:49). 풍요를 지나치게 낭비했기 때문에, 이와 같이 기근으로 징벌을 받았다. 우리가 우리의 욕망의 연료로 이용한 즐거움을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빼앗는 것은 의로운 일이다.

(2) 우리는 여기에서 땅의 풍성한 소산뿐 아니라 장사를 할 수 있는 자유를 인해서도 찬양해야 할 이유를 알 수 있다. 즉 농부는 식량으로 돈을 얻을 수 있으며, 상인은 돈으로 식량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식량은 들에 풍성하며 돈은 시장에 풍성하다는 사실, 또 도시와 큰 성읍에 살고 있는 상인들은 비록 그들이 "씨를 뿌리지도 않고 수확하지도 않을지라도" 매일 매일의 식량을 공급받는 사실로 인해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2. 포로로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은 "이방인들 중에서 부정한 떡을 먹어야" 될 수밖에 없게 됨을 상징해 준다(13절). 즉 유대 교회의 법에 따라서가 아니라 이방인의 손으로 달리 만들어진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 것은 항상 "부정하다" 고 부르도록 배웠던 것이다. 또한 인분으로 요리된 음식을 먹는 사람에게 대하듯, 그들이 늘 혐오하던 음식이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그들에게 할당된 "왕의 진미를 먹기" 보다는 오히려 "콩과 물" 만을 먹으려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왕의 음식이 그들을 더럽힐 것이라 우려했기 때문이다(단 1:8).

혹은 압제자들이 사로잡힌 자들을 노예로 취급하므로, 전에는 손을 대기도 경멸했었던 그러한 불결한 음식을 먹도록 강요받을 것이다. 모든 것이 풍족할 때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기" 에 하나님은 그들을 모든 것이 부족된 환경에서 그들의 원수들을 섬기게 할 것이다.

 

4:10 없음.

 

4:11 없음.

 

4:12 없음.

 

4:13 없음.

 

4:14 없음.

 

4:15 없음.

 

4:16 없음.

 

4:17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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