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마리를 먹는 선지자(에스겔 3:1-15)
이 대목은 앞 장과 같은 내용으로서 그리고 같은 환상의 계속으로서, 어떤 번역자(translators)에 의해서 앞 장과 적절히 결합되어 있다.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해야만 했던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며,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대해 알려 준 지식은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은 것이었다. 지금 여기에서 선지자에게 가르쳐지는 것은 다음과 같다.
Ⅰ. 에스겔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방법(1절). "인자야 이 두루마리를 먹으라" 고 그리스도(에스겔이 보았던 "보좌위에 앉으신 이" 1:26)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 말의 의미는, 이성(이해)안에 이 계시를 수용하며, 이 계시의 의미를 이해하며, 이 계시를 올바르게 파악하며, 마음에 이것을 간직하며, 이 계시를 적용하며, 이 계시에 감동되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리스도는 말씀하시기를 "너의 마음속에 이 계시를 새기며, 이 계시를 새김질하라" 고 하신다. "너는 이 계시가 온전한 것같이 완전히 이 계시를 취하며, 이 계시와 다른 것을 만들지 말라. 아니, 네가 음식을 먹는 것처럼 그렇게 이 계시 안에 있는 즐거움을 맛보라. 그리고 너의 영혼이 이 계시에 의하여 힘과 영양분을 얻게 하고, 네가 음식을 필요로 하는 것같이 이 계시를 먹고 마시게 하라. 또한 네가 음식물로써 너를 채우듯이 이 계시가 너의 영혼에 풍성하게 하라" 고 그리스도는 에스겔에게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자들은 사람들에게 설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명상해야 한다. "내가 주의 말씀을 얻었기에 그것을 먹었나이다" (렘 15:16).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것을 잘 알아야 하며, 그것에 감동되어야 한다. 또한 그들은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의 풍성하신 빛과 열로써 사람들에게 명확하고 열렬하게 말해야 한다.
1. 이 명령이 가르쳐진 방법. 앞 장에서는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고 되어 있으나, 여기에서는 "네가 받은 것을 먹으라" (1절)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손에 의해서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온 것이며, 우리는 그 말씀을 아무런 이의없이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성서 안에 있는 것이 우리 앞에 놓여져서 우리가 그것을 받을 때, 우리는 그것을 먹어야만 한다. 그리고 다시 3절에서도,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고 한다. "너는 그것을 지겨운 것으로 생각해서 먹지 않고 다시 토해서는 안 되며, 감사하는 마음과 영양이 된다는 생각으로 그것을 먹고. 배 속에 그것을 보유해야 한다. 너는 엘리후처럼 말이 가득하게 될 때까지 이 환상을 즐리라(욥 32:18). "말씀이 네 안에 거하게 하며, 너의 가장 깊은 곳을 차지하게 하라."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당연히 받게 하고 그 말씀을 즐기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 마음과 더불어 수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 우리 마음의 모든 기능이 하나님의 말씀을 적당히 소화시키기 위하여 제 구실을 다하게 되며 그 말씀은 in succumet sanguinem - 즉 우리 피와 정신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세상적인 것들을 비워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창자에 이 두루마리를 채울 수 있다."2. 이 명령은 어떻게 설명되고 있는가?(10절) "내가 네게 일러 사람들에게 들려 줄 모든 말을 너는 귀로 듣는 것같이 너의 마음으로 받으며, 그 말씀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받으라. 이 말을 너의 귀에 담아 두라" (눅 9:44). 그리스도는 이제 자기가 말씀하시는 것 뿐만 아니라, 장차 어느 때든 자기가 하실 말씀에도 선지자의 주의를 요구하신다. "너의 온 마음으로 이 말씀을 받으며, 이 말씀을 명상하고 너의 자신을 전적으로 이 말씀에 의탁하라" (딤전 4:15).
3. 환상 속에서 이 명령이 준수된 방법. 그리스도는 "에스겔의 입을 여시고 그 두루마리를 먹이셨다" (2절). 만약에 우리가 진정으로 그 말씀을 우리 마음 가운데에 받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는 성령에 의해서 그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가져오며 그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하게 거하도록" 하실 것이다. 만약에 "두루마리" 를 펴신 그리스도께서 계시의 영된 자기 영으로서 그 말씀(두루마리)를 우리 앞에 펼쳐 놓기만 하고, "지혜의 영" 된 그의 영으로서, "우리의 총명을 열지" 않으며, 우리에게 그 말씀의 지식을 주지 않고 우리에게 그 말씀을 먹지 못하게 하신다면, 우리는 영원히 그 말씀에 낯선 자가 될 것이다. 선지자는 그 두루마리가 먹기에 매우 불쾌하고 초라한 음식물이라는 생각에서 그것을 꺼려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두루마리는 그의 "입에서 달콤한 꿀맛" 같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만약 우리가 극히 어려운 명령일지라도 기꺼이 복종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 가운데서 위안을 얻을 것이며, 그것은 우리가 의무를 행하느라 겪는 모든 어려움에 대해 풍성한 보상을 해 줄 것이다. "그 두루마리가 비록 애가와 애곡과 재앙으로 가득 차 있을지라도," 선지자에게는 "달기가 꿀" 같았다. 은혜로운 영혼들은 큰 기쁨으로 이런 하나님의 진리를 받을 수 있지만, 이런 하나님의 진리는 동시에 사악한 사람들에게는 공포의 말씀이 된다. 성 요한이 이 같은 징조(sign)에 의해 계시의 일부분에 참여했던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계 10:9, 10). 요한은 "천사들의 손에서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그의 입에서는 꿀같이 다나 배에서는 쓰게 되었다." 우리는 에스겔이 먹었던 그 두루마리도 역시 이와 같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14절에서 선지자(에스겔)는 "근심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Ⅱ. 에스겔은 그가 받은 하나님의 계시를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1절) "이 두루마리를 먹고," 그리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에스겔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 때까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해서는 안 되었다. 사명을 띠지 않고는 가게 하지 말며, 또 그 사명을 절반만 이행하는 일도 없도록 하자. 그러나 에스겔 자신이 그 말씀을 완전히 이해했을 때는, 다른 사람들의 선을 위해서 부지런히 또, 열심히 그것을 전해야만 했다. "거룩한 자의 말씀을 감추어서는" 안 된다(욥 6:10). 왜냐하면 그것은 장사하라고 준 달란트를 땅에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스겔은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해야" 만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이스라엘 족속에게 알리는 것이 예언자들의 대권이기 때문이다. "율법(살아있는 신탁)의 주심" 이 그러하듯, 예언도 "그들에게 속해 있다." 에스겔은 갈대아 사람들의 죄를 꾸짖기 위해서 파송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인들의 죄를 책망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족속에게" 파송되었다. 왜냐하면 아버지들은 잘못이 있다면 남의 자식이 아니라 자기 자식을 견책하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대해 에스겔에게 내린 지시는 앞 장의 내용과 매우 흡사하다.(1) 에스겔은 하나님이 그에게 말했던 것만을 그리고 그것 모두를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해야 한다. 하나님은 앞에서도(2:7) 말했다. 즉 "너는 내 말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할지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하나님은 말하기를(4절), "너는 내 말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고 하신다. 에스겔은 내용 면에 있어서는 물론이요, 사용하는 단어나 표현법에 있어서도 가급적이면 그가 직접들은 것과 같게 말해야 했다. 축복받은 바울은 매우 훌륭한 창조력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성령이 가르쳐 주는 말씀으로" 이야기했다(고전 2:13). 성서의 진리들은 성서의 언어로 나타났을 때, 즉 그들의 본래의 옷을 입었을 때 제일 아름답게 보인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잘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2)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자기가 가는 곳이 "이스라엘 족속" 이요, 하나님의 족속이요, 또한 자기 자신의 족속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했다. 그러므로 에스겔은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했으며, 그들을 충실하고 온화하게 다루어야 했다. 이스라엘인들은, 에스겔 자신이 친밀감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며, 같은 나라 사람이고, 시련 가운데 함께 있는 동료였다. 그들과 에스겔은 함께 고난받는 동료이었으며, 후에는 유다에서 바벨론에 이르는, 매우 슬픈 환경 가운데서 함께 길을 간 동료 여행자들이 되었고, 때때로 그들과 함께 울어 주었으며, 서로가 사로를 아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들에게는 그들을 동정하는 방법을 체험을 통해서 알고 있으며, 자신들의 결점에 같이 아파할 수밖에 없는 그런 예언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에스겔에게는 자기 동족의 일에 관여하게 되었다는 것이 다행한 일이었다. 그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자들에게 파송된 것이 아니라, 에스겔 자신의 민족의 사람들에게 보내진 것이었다. 통하지 않는 언어는 길고 무겁게 보인다. "너는, 네가 그들에게 말할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으며, 이해할 수도 없고, 네 자신의 뜻을 그들에게 이해시킬 수도 없는 그런 열국으로 보내진 것이 아니니라."
사도들은 실제로 "방언(언어)이 다른 열국으로" 보내졌다. 만약에 사도들이 "방언의 은사를" 갖지 않았더라면 열국 백성들에게 아무런 선도 행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에스겔은, 그가 잘 알고 있으며, 그들로부터 인정받기를 희망했던 소수의 사람들이며 같은 민족인 자기 나라 사람들에게만 보내졌다.
(3) 에스겔은 하나님이 이미 말해 준 바 이스라엘 백성들의 악한 성격을 기억하고 있어야 했으며, 만약에 에스겔이 그들 안에 있는 절망을 보더라도, 마음이 변해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기에" (7절), 어떤 죄책도 그들을 부끄럽게 하지 못하며, 어떤 진노한 경고도 그들을 떨게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것은 그들의 완악함을 가중시킬 뿐이었다.
[1]만약 예언자가 열방에게 갔더라면, 그들이 이스라엘만큼 완악하지는 아니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를 다른 민족에게 보냈다면, 비록 "언어가 다르지만, 그들은 예언자의 말을 들었을 것이다." 열방들은 적어도 예언자의 말을 참을성있게 들으려 했으며, 동족에게서 얻을 수 없었던 존경심을 예언자에게 보여 주려 했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예언자있었던 이스라엘 족속은 불순하고 변화되지 않았던 때에도,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에 움직였다. 이런 것들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은혜의 방편들이 그것을 통해서 자신들을 개선시켰을 사람들에게는 보류되고 자신들을 개선시키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사실 말이다. 우리는 이런 것을 하나님의 주권으로 설명해야 하며, "여호와여, 당신의 판단은 크고도 깊나이다" 라고 말해야 한다.
[2]이스라엘 족속은 하나님 자신께 대해서 완고했다. "이스라엘 족속이 네 말을 듣지 아니하리니, 이상히 여기지 말라. 그것은 그들이 나의 말을 듣지 아니하려는 때문이니라." 그들은 예언자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막대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막대기를 통해서 "여호와의 목소리가 성읍에 울려퍼진다." 만약에 그들이 예언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직접 "하늘의 소리" 로써 그들에게 말했다 할지라도 믿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언자의 말을 거부한다. 즉 그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그들의 "육적인 마음에 원수가" 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족속은 하나님의 법에 대해서 나쁜 편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실행하는 직무를 맡고 있는 예언자들에게 귀를 막아버린다.
(4) 에스겔은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를 강철같이 강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8, 9절). 에스겔은 어느 것으로도 감동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사자를 모욕하고, 그의 메시지를 거부하는 일로 자부심을 갖는, 그런 "패역하고 마음이 강퍅한 사람" 들 에게도 보내졌다. 이렇게 강퍅한 사람들을 다루는 방법을 아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일 것이다. 그러나
[1]하나님은 이런 일을 수행하게 하기 위해서 에스겔의 얼굴을 강하게 할 것이다. "내가 그들의 얼굴을 대하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다." 너에게 이런 경우에 요청되는 굳건함과 담대함을 부여했다."
아마 에스겔은 천성적으로 수줍어하고 겁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만약에 그가 그 일을 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하나님이 은혜로써 그를 적절하게 만들어서 난관을 이기게 하셨을 것이다. 사악한 자들이 종교를 반대하는 일에 강퍅하면 할수록, 종교를 변호하고 보호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더욱 더 단호하고 공개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무죄한 자들로 사곡한 자들을 대항해서 분을 내게 하라" (욥 17:8). 악한 자가 대담해질 때는 덕있는 자가 비겁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 해야 할 일이 생길 때는, 그 일을 위하여 사람들을 부르시어, 그들에게 때에 맞는 힘을 주실 것이다. 또 필요한 경우라면,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사 충실한 사역자들의 "이마" 를 "금강석" 같이 단단하게 하실 수 있으며, 또 하실 것이다. 어떤 위협적인 힘도 그들의 안색을 바꾸어 놓지 못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도다" (사 50:7).
[2]따라서 에스겔은 그의 사명을 완수할 용기를 가져야 하며, 거룩한 안심을 지니고 일을 진행하며, 그의 적들의 어떤 비난이나 위협도 대수롭지 않게 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의 얼굴을 두려워 말며, 무서워 말라. 그들의 무력한 적의의 위협이 너의 의기를 저하시키지 못하게 하며, 너의 앞길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라." 담대한 죄인들에게는 용감한 책망자가 있어야 된다. "악한 짐승들은" 엄하게 "꾸짖어야" 하며(딛 1:12, 13), "두려움으로써 구원받아야" 한다(유 23). 하나님을 친밀하게 섬기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될 것이며, 사악한 자들의 교만한 모습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험담하는 혀를 몰아내는 화난 얼굴로 하여금 책망하는 혀를 제지하지 못하게 하자.
(5) 성공의 여부는 어떻든 간에, 에스겔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도를 계속해야 했다(11절). 에스겔은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가야" 했다. 그들은 환난 가운데 있었으므로,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들이리라고 희망했던 것이다. 에스겔은 그가 친밀한 연분을 맺고 있는 이스라엘 족속을 "하나님의 백성들의 자녀들로" 여겨야 했으며, 바울이 그의 동족을 위해서 했던 것같이, 에스겔도 그들을 위해서 깊은 사랑을 가져야 했다(롬 9:3).
에스겔은 여호와가 그에게 말했던 것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해야" 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을 말해야 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해야 했다. 에스겔이 말한 것은 하나님의 권위가 후원해 주었다.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하다 하라."
우리의 사역의 성패가 우리에게 무관심할 수는 없겠지만, 어떻든 우리는 우리의 일을 계속해야 하며, 하나님에게 그 결과를 위임해야 한다. "여기에는 아주 선한 사람들만 있기 때문에 말할 필요가 없다" 거나, 혹은 "여기에는 매우 악한 사람들만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말해야 아무 소용도 없다" 고 말해서는 안 된다.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충실하게 "전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하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전하라." 그들이 그 말씀을 거부할 때는 그들에게 위험이 초래된다는 사실을 알게 하라.
2. 이와 같이 예언자에게 주어진 임무에 따라서 세밀한 지시가내림을 본다. 여기서는 다음 사실들을 알게 된다.(1) 에스겔의 이런 선교는 거룩한 천사들도 크게 기뻐하였다. 천사들은 본성으로는 자기들만 못한 자이지만 그가 그렇게 명예스런 임무에 종사하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한다.
에스겔은 "크게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12절). 그것은 마치 천사들의 무리들이 예언자의 취임식을 보기 위하여 모여들 때 나는 그런 소리와도 같았다. 왜냐하면 천사들에게는 "하나님의 각종 지혜가 교회로 말미암아 알려졌기(즉, 교회로부터 반영되어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엡 3:10). 천사들은 이런 위대한 광경에 가능한 한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는 듯이 보였다.
에스겔은 "그들의 날개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를 들었다." 문자대로는 "서로 입 맞추는" 소리를 들은 것인데, 이것은 천사들의 상호간의 애정과 협력을 의미한다. 그는 또한 천사들과 어울려 천사들 "바로 맞은 편" 으로 나아가고 있는 섭리자의 "바퀴들의 소리" 를 들었다. 이런 모든 것은 에스겔의 주의를 끌기 위한 것이었으며, 시중을 드는 영광스런 수행원들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이 그에게 충분한 조력을 해 줄 것임을 에스겔에게 확신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소리는 찬송으로 끝난다. 에스겔은, 천사들이 "여호와의 처소에서 나는 영광을 찬송할지어다" 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1]위에 있는 하나님의 처소인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이 이제 환상 중에 하강했다. 아니면 그곳으로 다시 되돌아 가고 있었다. 모든 천사들이여, 이 환상을 보고 "여호와의 영광을 찬양하고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시 148:1, 2)고 말하는 동료 천사들과 함께 찬양을 드려라. "찬양하라. 그의 모든 천사들이여."
[2]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처소인 성전으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이 이제 떠나고 있다. 천사들은 영광의 떠남을 슬퍼하지만, 그일로 인한 하나님의 공의는 찬양한다. 어쨌든 하나님은 항상 찬송을 받고 영광을 받으며, 앞으로도 세세토록 그러할 것이다.
예언자 이사야가 사명을 받을 때도, 하나님이 이와 같은 찬송을 받으시는 것을 그가 들었다(사 6:3).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는 많은 수치를 당하는 때에도, 저 세상에서는 하나님이 많은 존경을 받고 영광스럽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는 일은 하나님께 신실한 모든 자들에게 위로가 된다. "여호와의 영광" 이 우리가 사는 지상에서는 많은 멸시를 당하지만, "하나님이 계시는 천상에서는" 많은 "찬송을 받으신다."
(2) 이 예언자 자신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있는 무장으로 그의 직책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주어진 은혜는 헛되지 아니했다." 왜냐하면
[1]하나님의 영이 강한 손으로 에스겔을 인도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갈 것을 명령했지만, "하나님의 영이 그를 들어 올릴 때" 까지는 그가 움직이지 않았다. "바퀴 가운데" 있던 "생물들의 영" 이 이제 이 예언자에게도 임하여, "그를 들어 올리었으니," 처음에는 천사들의 환호성을 아주 분명하게 듣게 하기 위해서였으나(12절), 여기서는 (14절) "에스겔을 들어올려," 그의 일을 하게 하기 위하여 "데리고 갔다." 재난을 자기 백성에게 가져가고 또 그것을 예고하는 것은 그 자신이 매우 꺼려했기 때문이다. 에스겔은 기꺼이 변명을 하려 했지만, 예레미야가 당했던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렘 20:7). "주는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읍니다." 에스겔은 그가 보고 들었든 모든 것을 자기만이 알고 있으려 했지만, "그러나 여호와의 손이 그를 강권하여" 압도해 버렸다. 예언자적 충동이 에스겔 자신의 성향을 극복했다. 그래서 사도들같이 "그가 보고 들었던 것을" 말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행 4:20). 하나님이 사역자로 부르신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 직무를 행할 머리와 마음을 주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2]에스겔은 슬픈 마음으로 따라갔다. "주의 신이 나를 데리고 가사," "내가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했다" 고 했다. 에스겔은,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예언자로 활동할 때 겪었던 어려움과 고통과 방해와 학대를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예레미야와 같은 흔적을 가져야만 할까?" 라고 에스겔은 생각했다. 포로 생활은 매우 어려웠다. 그런데 포로 생활 속의 예언자의 생활은 어떠했겠는가? 이러한 것 때문에 에스겔은 고뇌와 불안 가운데서 갔다. 은혜의 역사가 명백하게 나타난 곳일지라도 어떤 경우에는 잘못된 생각에서 나오는 큰 망설임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요나처럼, 나는 나의 임무를 피해서, 하늘의 환상에 불순종하여서가 아니라, 기뻐하지 않으면서, 괴로운 마음으로 갔노라." 에스겔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을 때는, 그 계시가 그에게 "꿀처럼 달았다" (3절). 에스겔은 그 말씀(계시)을 명상하는 가운데 충만한 기쁨으로 그의 온 생애를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에스겔이 그의 동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려고 했을 때는, 그들이 그 말씀에 무관심하고 그 말씀에 화를 내고, 죄악을 더욱 가중시키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그래서 에스겔은 "괴로운 마음으로" 갔다. 그것은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에게는 매우 큰 슬픔이다. 백성들이 개혁되기를 매우 꺼린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종들이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그들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은 신실한 사역자들에게는 여간 큰 고통이 아니다. 에스겔은 실망을 경험했기 때문에 "분한 마음(뜨거운 마음)로 갔다." 그러나 "여호와의 손이 에스겔을 힘있게 감동했다." 즉 에스겔에게 그의 임무 이행을 강요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임무를 하기에 적절하게 하고, 그에게 그 임무를 관찰시키도록 했으며, 에스겔이 경험했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힘을 주었다. 그가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그 임무를 더 잘 수행했으며, 그 임무에 자신을 몰두시켰다. "그때에 그가 사로잡힌 백성에게로 왔다" 고 했다(15절). 그곳은 저들이 모여와서 "앉아 있는" 곳이었다. 그는 "칠일 동안 그들 가운데서 거하면서" 그들과 같이 일하고, 이야기하고, 독서를 하면서, 그들의 행실을 주시했다. 그러면서 에스겔은 자기에게 임할 "여호와의 말씀" 을 기다렸다.
백성들에게 그들의 영혼에 대해서 적절하게 말하려고 하는 사역자들은 에스겔이 여기서 그러했던 것처럼, 그 백성들과 친해야 하고, 그 백성들의 상황을 잘 알아야 한다. 즉 "백성들과 함께 거하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친절하게 전해 주어야 하며, 그 백성들이 "바벨론 강가에 앉아 있다" 할지라도, 그들에게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에스겔은 "그곳에서 크게 놀랐으며" (한글개역-" 悶沓히") 그의 백성들의 죄와 불행 때문에 매우 슬퍼했고, 그가 보았던 환상의 화려함에 의해서 압도되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에스겔은 "그곳에서 매우 고독했다" (혹자는 이렇게 해석한다). 하나님은 그에게 어떤 환상도 보여 주지 않았으며, 사람들 중 아무도 그를 방문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여호와의 말씀" 이 그에게 임하기 전에는) 에스겔은 슬픔을 머금은 채로 지냈으며 좋은 인내심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이 높이 세워서 크게 쓰시려 하는 사람들은 먼저 낮아져야 하며, 얼마 동안은 고생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파수꾼으로서의 에스겔(에스겔 3:16-21)
"칠 일의 끝에" (개역-" 7일 후에"), 하나님은 이 예언자에게 계속해서 지시 사항을 말씀하셨다. 즉 에스겔이 환상을 본 후 제7일째 날이었다. 아마 에스겔이 환상을 보았던 날과 이 지시를 받았던 날은 모두 안식일이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족속" 은 비록 사로잡혀 있었을지라도, 그러한 처지에서 가능한 최선을 다해 안식일을 준수했다. 이스라엘 백성의 정복자들과 지배자들이 애굽의 십장(공사감독)들이 옛날에 했던 것과 같이, 일정한 업무 분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묶어 놓았다는 사실을 여기에서는 발견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스라엘 족속은 자기들이 이방인들과의 구별됨을 표시하기 위해서 안식일 휴식을 준수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에게는 안식일날의 업무를 위한 성전이나 회당이 없었다. 단지 사도행전 16장 13절에서처럼, "기도처로 모이는 강변의 한 장소" 가 있었던 것같이 보인다. 안식일이면 그들은 거기에 모였다. 또한 거기에서 그들의 적들은 그들에게 "시온의 노래" 로 조롱했다(시 139:1, 3). 그곳에서 에스겔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났으며, 그때 그곳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다." 일주일 내내 하나님의 말씀을 명상해 왔던 에스겔은 안식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씀하기에 적합했다. 또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준비를 잘한 셈이었다. 이 안식일에는 에스겔이 먼저 번 안식일에처럼 하나님의 영광스런 환상을 보는 영광을 누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에스겔을 아주 쉬운 비유로써 자기의 의무를 명백하게 말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때로는 특수한 경우에 축제의 기쁨을 갖지만, 기쁨의 환희와 희열이 그들의 매일의 양식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가 비록 때때로처럼 항상 가시적인 방식으로 하나님과 사귀지는 못하지만, 역시 하나님과 진실로 교제하고 있다는(요일 1:3)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하늘의 왕국의 신비와, 때로는 눈에 보이지만, 보통으로는 분명한 설교로 나타나며, 이것이 사람을 교화시키는 데는 제일 좋은 방식이다.
하나님이 여기에서 예언자에게 이전의 그의 직책과 그 직책의 의무에 대해서 말한다. 에스겔에게 주어졌던 이런 직책과 의무는 생각컨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여, 백성들이 에스겔의 말을 경청하고 그것을 실행케 하는 것이었다. 예언자들이 백성들에 대해서 주는 책임을 알고 중히 여기며, 그 책임을 요약해서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백성들을 위해서 좋은 일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제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Ⅰ. 예언자가 다시금 소명받은 직능은 무엇인가?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 속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17절). 에스겔이 보았던 환상을 그를 놀라게 했다. 에스겔은 그것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처럼 명백한 비유를 사용하시어, 에스겔이 자기의 임무를 보다 잘 깨닫고 이행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에스겔은 사로잡힌 자 중에 거했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에게 임해서 본인이 원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에게 말해 주신다. 에스겔은 "파수꾼" 이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할 말이 있다. 그는 도성을 지키는 "파수꾼" 으로 임명받았으며, 평화를 깨뜨리는 자와 도적과 화재를 감시해야 한다. 또한 양떼를 지키는 "파수꾼" 으로서, 도적들과 맹수들을 감시한다. 그러나 그는 특히 진영이나 침범당한 나라 또는 포위된 마을 가운데 있는 "파수꾼" 으로서 적들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적이 접근하거나 위험이 초래되려할 때는 경종을 울려야 한다.
이런 사실은 "이스라엘 족속" 이 전투 상태에 있음을 나타내 주며, 음흉하고 끊임없이 공격하려 하는 적들에게 그들이 노출되어 있음을 알려 준다. 그렇다. 이스라엘 족속의 각자가 위험에 처해 있으며 파수꾼의 위치에 있다. 사역자들은 "교회의 성벽 위에 서 있는 파수꾼들" 이며(사 62:6), "성읍을 순회하는 파수꾼" 이다(아 3:3)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것은 고생스러운 직책이다. 파수꾼들은 항상 깨어 있어야 하기에 잠을 충분히 잘 수 없으며, 적국을 감시해야 하므로 (긴장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들은 어떤 날씨에도 "망대 위에" 서 있어야 한다(창 31:40; 사 21:8). 그것은 매우 위험스런 직책이다. 때때로 그들이 그들의 위치를 지키지 못하고 적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적은 파수꾼을 죽이지 않고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그들의 위치를 떠날 수 없으며, 그들이 위치를 떠날 때는 상관으로부터 오는 죽음에 처하게 된다. 이런 딜레머가 교회의 파수꾼들에게 있다. 만약에 파수꾼들이 그들의 임무를 성실히 행할 때면 사람들이 그들을 저주할 것이며, 그들이 거짓되게 행할 때면 하나님이 그들을 저주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필요한 직책이다. "이스라엘 족속은" 파수꾼들 없이는 안전할 수가 없었으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여 있음이 허사이다" (시 127:1, 2).
Ⅱ. 이 직능의 의무는 무엇인가? 파수꾼의 임무는 살피고 알리는 일이다.
1. 파수꾼으로서의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관하여 하나님이 말했던 것과, 예레미야나 다른 예언자들의 예언이 공통적으로 언급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체의 일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개개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에스겔은 다른 파수꾼처럼 위험을 탐지하거나 정보를 얻기 위하여 사방을 두리번거려서는 안 된다. 그는 하나님을 주시해야 한다. 그 외의 것을 살필 필요가 없다. "내 입의 말을 들으리라" (17절). 전하려 하는 사람은 먼저 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먼저 배우지 않고 서는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2. 예언자는 그가 들었던 것을 알려야 한다. 파수꾼은 눈을 가지듯, 예언자는 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만약에 예언자가 벙어리가 된다면, 그것은 파수꾼이 장님이 되는 것처럼 나쁘다(사 66:10).
너는 "나를 대신해서 그들을 깨우치고," "거룩한 산" 에서 경보를 울려라. 에스겔 자신의 이름으로나 그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나온 경보이다. 사역자들은 인생에 대해서 하나님의 입이다. 성서는 우리를 훈계하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다. "성서로 인하여 주의 종이 훈계를 받나이다" (시 19:11). 그러나 viva voce-즉 살아있는 목소리로 전해진 말씀이 더 깊은 감명을 주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기록된 말씀의 훈계를 우리에게 전달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이제 말씀을 전함으로써 에스겔 예언자는 악한 자와 의로운 자를 구분해야 하며, 말씀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각자에게 그의 몫을 알맞게 주어야 한다. 만약에 그가 이와 같이 행한다면(그 일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는 그 일로 인해 위로를 받을 것이며, 만약에 이와 같이 행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것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1) 에스겔이 대해야 하는 사람 중 더러는 사악한 사람들이므로, 그들에게 그 악한 행위를 계속하지 말고 죄악에서 떠나라고 경고해야만 한다(18, 19절). 여기서 이런 점을 엿볼 수 있다.
[1]만약에 사악한 자가 여전히 죄악 가운데서 거하면, 그는 "정령 죽을 것이다" 라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과거에도 말씀하셨고 현재도 말씀하신다. "그의 죄악" 이 분명히 그를 파멸시킬 것이다. 죄악은 파멸로 항하며, 파멸 가운데서 끝날 것이다. "악인은 죽겠고," 비참한 죽음으로 "죽을 것이며," 영원히 "죽겠고," 결코 시체가 되지 않고 죽음을 항상 죽을 것이다. "사악한 자는 그 죄악 중에서 죽을 것이며," 죄악 아래에서 "죽겠고," 그 죄악의 지배 아래에서 "죽을 것이다."
[2]만약에 "악한 자가 그의 악과 악한 길을 떠나면, 그는 살 것이며," 파멸이 그를 위협할지라도 그는 보호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악을 행하면, 경고받은 위험에 빠질 것이다. 그가 악을 계속하면 "죽을 것이요," 회개하면 "살 것이다." 악인은 "그의 사악함" 과 "그의 사악한 길을 "떠나야 한다는 점을 주시하자. 사람이 "자기의 사악한 길을 떠나려" 한다면, 피상적인 회개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피상적인 회개는 그가 죄를 떠났다기보다 죄의 영향이 그를 떠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사악함을 떠나야" 하며, 마음 깊은 곳의 중생으로써 죄악에 대한 사랑과 경향성으로부터도 돌이켜야 한다. 만약에 그가 "그의 죄악의 길에서" 돌이키지 않는 다면, 그가 "그의 죄악으로부터" 돌이킬 희망이란 거의 없다.
[3]죄인들에게 죄악의 위험을 경고하고 회개의 이로움을 확신시켜 주는 것이 사역자의 임무이다. 그들이 계속해서 죄악 가운데서 행하면 얼마나 큰 불행이 닥칠 것인가를, 그리고 만약에 그들이 죄를 회개하고 거듭나면 얼마나 많은 행복이 그들 앞에 놓이게 되는가를 그들에게 확신시키는 일이 그것이다. 말씀을 전하는 사자들은 "생사의" 문제에 관계하며 "축복과 저주" 에 관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저주를 피하고 축복을 받을 수가 있다.
[4]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사악한 자들에게 닥칠 불행과 위험을 경고해 주지 않을지라도, 죄악을 계속하는 자들은 변명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파수꾼이 "그들에게 경고하지" 않더라도, 그들 자신의 양심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그들에게 이미 충분한 경고가 주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죄악 중에서 죽을 것이기" 때문이요, 만약에 죄인들이 그 경고를 받아들이면 그의 임무를 행한다면 그들은 저들의" 생명을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5]만약에 사역자들이 그들의 임무에 충실하지 않고, 죄인들에 대해서 죄의 숙명적인 결과를 깨우쳐 주지 않고, 그들을 책망하지 않고, 방임해 둔다면, 사역자들의 무관심 때문에 멸망한 사람들의 "피 값은 사역자들의 손에서 찾게 될 것이다." 또한 심판날에는 각각 귀중한 영혼들이 죄 가운데서 죽은 책임이 사역자들과 그들의 불성실에 있음을 추궁당할 것이다. 사역자들이 죄인들을 깨우쳤었다면, 죄인들이 "다가오는 진노를" 피할 수 있었을지 누가 알랴! 죽을 몸을 살인하는 것을 방조한 것도 흉악한 죄이거늘, 불멸의 영혼을 파멸시키는 일에 대한 방조죄야 오죽하랴?
[6]만약에 사역자들이 죄인들을 깨우치는 의무를 다하면, 비록 죄인들이 그 깨우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사역자들은 죄인들의 "피 값에는 깨끗하고," "자기들의 생명은 구한다" 는 만족을 얻을 수 있다. 신실한 사역자들은 비록 그들의 일이 성공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보상을 얻을 것이다.
(2) 에스겔이 대해야 할 사람들 중 일부는 "의로운" 자들이며, 적어도 자비로운 심판에서 볼 때는 그러하다고 생각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에스겔은 이들에게 신앙을 저버리거나 "그들의 의에서 돌이키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고해야 했다(20, 21절). 여기서 다음 사실을 알아 볼 수 있다.
[1]세상에 있는 의로운 사람들에게도 배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가 필요하며, 그들도 배교할 위험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종들에게도 맡은 임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께 대한 봉사를 중지해서도 안 된다는 경계를 할 필요가 있다(시 19:11). 타락을 막아 주는 한 선한 수단은 항상 타락에 대해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는 일이다(히 4:1). "그러므로 두려움을 가지자." 그리고 "믿음으로 선 자들" 일지라도 "교만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되며," "두려워해야 한다" (롬 11:20). 그러므로 의로운 자도 경계를 받아야 한다.
[2]사람이 "돌리켜 설" 여지가 있는 "의," 외관상의 "의" 가 있다. 만약에 사람들이 이러한 의를 떠난다면, 그 의가 설혹 통용(通用)되고 그럴 듯한 것일지라도, 그 의는 결국 거짓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우리에게 속하였다면, 그들은 우리와 함께 거하였을 것이기" (요일 2:19)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영으로 시작했다가 육으로 마치며," 그들의 얼굴은 하늘을 향하지만 마음은 세상을 향하며, 처음에는 사랑을 가지지만 후에는 그것을 잃으며 "거룩한 계명에서 돌아선다."
[3]사람들은 "그들의 의에서 돌아서면" 곧 죄악을 범하는 법을 배운다.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경배의 의무를 태만히 하거나 소홀히 할 때, 악마의 유혹에 희생되기 쉽다. 태만은 범죄에 이르는 길이다.
[4]" 사람들이 그들의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하나님이 "그들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며," 그들은 멸망에로 다가 갈때까지 더욱 더 악하게 될 것이다. 바로가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할 때,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더욱 강퍅하게 했다. 죄인들이 하나님에게서 그들의 등을 돌리고, 하나님 섬김의 의무를 버리고, 그 의무를 비난할 때, 하나님은 의로운 심판을 행하사 구속의 은혜를 거두어 들이고, 그들을 그들 자신의 마음의 욕망에 버려둘 뿐만 아니라, 그의 섭리에 의하여 그들을 파멸을 재촉하는 그런 상황에로 이르게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 (벧전 2:8)이다.
[5]사람들이 포기하는 의는 그들의 명예에나 위안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할 것이다. 배교자들은 그들이 쌓아올린 모든 것을 잃는다. 그들의 봉사와 고난이 헛된 것이 되며 계속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도움(이익)도 가져올 수 없다. Factum non dicitur quod non persevernt -즉 오직 끝까지 행한 것만이 참된 행위이다(갈 3:3, 4)는 것이 율법의 원칙이다.
[6]만약에 사역자들이 아무리 선한 사람들이라도 잘못을 범하고 타락하기 쉬운 경향성과 또한 저들이 처해 있는 구체적 유혹과 배교의 치명적인 결과에 대해서 깨우쳐 주지 아니하면, 배교한 자들의 멸망이 문간에 쌓이리니, 사역자들이 이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깨우침을 받아 "그들의 의에서 돌이키지 않는" 자들은 그러하지 않다. 여기에는 악한 자에 관계되는 그런 경우가 나와 있지 않다. 반대로 깨우침을 받은 "의로운 자" 는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죄를 행하지 않는다" (21절). "현명한 사람에게 교훈을 주면, 그는 더욱 더 현명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악한 자에게 아부해서도 안 되지만, 이 세상에서는 완전한 자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아부해서는 안 된다.
[7]만약에 사역자들이 사람들을 깨우치고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그것은 양자를 위해서 좋은 일이다. "복종하는 귀에 대한 현명한 책망자" 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전자는 "그가 깨우침을 받았기 때문에 살 것이며," 후자도 "그의 영혼을 구원할 것이다." 선한 사역자라면 "그 자신을 구원하는 일과 그의 말을 듣는 자들을 구원하는 것" 밖에 더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딤전 4:16)
다시 나타난 여호와의 영광(에스겔 3:22-27)
하나님은 예언자에게 친히 자세하고도 중대한 사실을 보여 주었으며, 많은 사명을 띠고 가는 그 일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해서 많은 지시를 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에스겔의 이스라엘의 큰 회중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게 되리라는 기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사정이 아주 다르게 나타남을 발견한다. 그의 일은 우선 그의 소명의 화려함에 비해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Ⅰ. 여기서 에스겔은 더욱 자세한 지시를 받기 위해 물러난다. 에스겔이 마지못해서 가는 것을 보면,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겨 주신 일에 대한 자신의 실력에 대해서 철저한 신념을 갖지 못했던 것같이 보인다. 그러므로 에스겔이 예견하고 있던 어려움에 대해 용기를 북돋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에게 하나님의 영광의 새로운 환상을 은총으로 보여 주심으로써 그에게 생기와 활력을 더해 주시려 하신다. 이러한 일을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에스겔을 "들로" 불렀다(22절).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은 "에스겔과 함께" 어떤 "이야기를" 하려 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초라한 포로요, "인자" (人子)에 불과한 사람과 함께, 아니 죄를 지은 사람에게 이와 같이 친밀하게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겸양을 보며, 이러한 사실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더욱이 그 사람은 하나님이 보낼 때에, "분한 마음으로 갔고," 이번에는 그는 그의 일을 행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는 그런 자였던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 하늘과 땅 사이의 이런 축복받은 교제는 그리스도의 중재에 힘입고 있음을 시인하자.
여기에서는 홀로 있음의 유익을 보게 된다. 또 그것이 묵상하는 데 큰 도움이 됨을 볼 수 있다. 하나님과만 함께 있기 위하여 세상을 물러나는 것, 하나님과 함께 이야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에게 말하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것이다. 선한 사람은 에스겔의 경우처럼 홀로 있다고 말할 것이다. 에스겔은 "사로잡힌 자들" 에게로(15절) 나아가기보다는 자발적으로 "들로 나아갔다." 왜냐하면 들로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갖는 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이 세상과의 어떤 교제보다도 이런 일을 우선 적으로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에스겔은 "들로 나아갔으며," 거기에서 그는, 그가 "그발 강가에서 보았었던 것과 동일한 환상을 보았다." 하나님은 장소에 구애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할 것이다.
하나님은 "에스겔과 이야기하기 위하여" 들로 그를 불렀으나, 하나님은 그 이상의 것을 에스겔에게 베풀었다. 즉,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자기의 "영광" 을 보여 주었다(23절). 지금은 그런 환상을 기대할 수 없지만, 우리가 믿음에 의해서 "주의 영광을 보고," "주의 성령에 의해서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에스겔이 보았던 환상에 못지 않는 은혜가 있음을 고백해야 한다. "모든 성도들은" 이런 "명예를 가진다." "너는 주를 찬양하라" (고후 3:18).
Ⅱ. 에스겔은 여기에서 당분간 가르침을 계속하지 말라는 제재를 받는다. 에스겔이 "여호와의 영광" 을 보고서 "엎드렸을 때," 그는 하나님의 장엄함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을 경험했다. 그러나 "여호와의 영" 이 에스겔을 일으키기 위하여 그에게 "임했을 때" 에스겔은 제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여호와의 영이 매우 놀라운 사실을 속삭이는 것을 들었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에스겔을 당장 중요한 광장으로 보낼 것이며, 그의 동족에게 사랑을 받게 하며 에스겔과 그의 메시지를 그의 동족들이 받아들이게 하며, 에스겔은 자기 앞에 열려진 행운의 넓은 문을 가지며, 하나님은 에스겔의 입을 대담하게 열게 하기 위해서 말씀의 문을 열어 줄 것으로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에스겔에게 말해진 것은 이런 기대와는 전혀 반대되는 것이다.
1. 에스겔을 공중 집회에 보내는 대신,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집안에 틀어박혀 있으라고 지시한다. "가서, 네 집에 들어가 문을 닫으라" (24절). 에스겔은 공적인 집회에 나타나서는 안 되며, 설사 에스겔이 이런 공적인 집회에 나타난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에게 주목하지 않을 것이며, 그가 당연히 받아야 할 존경도 보여 주지 않을 것이다. 또 그것은 에스겔과 그의 형제들 모두에 대한 책망을 면치 못할 것이다. 에스겔은 그가 자기 형제들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이요, 그의 형제들은 그에게 냉담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공적인 집회에 나가는 것을 금했다. 우리가 선택한 일이 때때로 우리에게 심판(징벌)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선생들이나 그들의 백성들이 혹은 양편이 모두 엄숙한 집회(예배)에 무심하게 될 때, 하나님이 선생들을 외딴 곳으로 물러나게 하는 것은 의로운 일이다. 에스겔은 자신을 폐쇄해야 했다. 그것은 마치 에스겔이 그의 집에 갇힌 것같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갇히게 되며, 에스겔이 다음 장(章)에서 말하는 예루살렘의 포위의 징후를 보이기 위해서이다. 에스겔은 "그의 집안에 감금되었으며," 하나님의 마음의 더 깊은 뜻을 발견할 것이며, 그가 밖에 나갔을 때 사람들에게 말해야 할 여러 가지 것을 습득했을 것이다.
우리는 "유다 장로들이" 그를 방문하여, 때로는 "그의 집안," "그의 앞에 앉아서" (8:1) 그의 무아경지의 증인이 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에스겔이 "사로잡힌 자들에게 여호와께서 그에게 보이셨던 모든 일을 말한" 것은 11장 25절에 가서야 비로소 있었던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소명을 받은 사람들은 연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며, 그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해야 하며, 때때로 그들의 집에 틀어박혀서 독서와 명상에 열중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 그들은 모든 자들에게 유익함을 줄 것이다.
2. 하나님은 에스겔을 보내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리라고 보증해 주는 대신에, "이스라엘인들이 너를 줄로 동여맬 것" 이라는(25절) 사실을 말해 준다. 그것은 다음의 어느 한 뜻이리라.(1) 그들이 에스겔을 범인으로 취급한다. "이스라엘인들은 그가" 평화를 어지럽히는 사람이라고 취급해서 형벌을 주기 위해서 "동여맬 것이다." 그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했기 때문에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바벨론에서도 여전히 예언자들을 박해한다.
(2) 정신나간 사람으로 취급한다. "그들은" 에스겔이 정신을 잃고 있을 때 "그를 동여매려" 할 것이다. 그들은 에스겔의 광폭한 행동을 그가 미친 탓으로 돌리기 위해서이다. 군대 장관들은 예후에게 말하기를 "무슨 까닭에 이 미친 사람들이 너에게 왔느냐?" 하고 물었다. 총독 베스도는 "너는 네 정신이 아니구나" 하고 바울에게 말했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우리의 구주인 예수에게도 그와 같이 말했다(막 3:21). 아마도 이것이 에스겔이 자신을 집안에 은폐시켜야 되는 이유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에스겔이 미쳤다는 구실로 그를 동여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스겔은 "그들 가운데로" 나오지 않았다. 예언자들은 저들을 학대할 것 같은 사람들에게 나가는 것을 금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3.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에스겔의 입을 여는 대신에, 하나님은 그를 침묵하게 했으며 그의 "혀를 입 천장에 붙게"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에스겔은 상당한 기간 동안 벙어리가 되었다(26절). 바벨론에 사로잡혀온 경건한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즉 "만약에 우리가 예루살렘을 잊는다면, 우리의 혀가 입 천장에 붙을지로다" (시 137:6). 에스겔은 누구 보다도 더 예루살렘을 기억한다. 그러나 아직 그의 "혀는 그의 입 천장에 붙어 있다." 그리고 말하는 것이 완전히 금지되어 있다. 그 이유는 에스겔이 파송된 "백성들은 패역한 족속" 이며, 그렇기에 그들은 "책망자" 를 둘 가치조차 없기 때문이다. 에스겔은 그들에게 교훈과 훈계를 주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 충고나 훈계를 저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는 에스겔이 그들에게 대담하게 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매우 패역했기" (2:7)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이 드러나자, 에스겔이 이제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침묵을 지켰으니, 그들에게 전혀 말하지 않았다. 뉘우치기를 싫어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뉘우치게 하는 방편을 빼앗긴다. 만약에, 오랜 시련 후에, 책망자가 귀먹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왜 책망자는 벙어리가 될 수 없겠는가? 만약에 에브라임이 "우상에 연합되었다면," "그를 외롭게(alone)할 것이다."
"너는 벙어리가 되고, 책망자가 되지 말지니라" 는 말씀은 만약에 에스겔이 벙어리가 아니었다면, 책망했을 것이다라는 말을 의미한다. 만약에 에스겔이 적어도 말할 수 있었다면, 그는 악한 자의 악을 고발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와 함께 "말할 때에," 그리고 에스겔을 통해서 말하려고 계획했을 때는, 그가 "입을 열 것이다" (27절). 하나님의 예언자들이 비록 잠시 동안은 침묵할지라도, 하나님의 때가 오면 입을 다시 열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이 그의 사역자들에게 말할 때는, 자기가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 하기 위해서 사역자들의 귀를 열 뿐만 아니라, 거기에 응답하게 하기 위해서 그들의 입도 열어 주신다. 모세가 그의 백성들에게 내려올 때 그의 얼굴에 너울을 썼었지만, 그가 하나님을 향해서 올라갈 때는 그 너울을 벗었다(출 34:34).
4. 때가 되어서 그가 다시 사람들에게 말하게 될 때 그에게 성공을 보중해 주는 대신, 하나님은 여기에서 그 문제를 불확실한 채로 남겨두었다. 에스겔은 그 문제에 대해서 당황해서는 안 되며, 그 문제가 앞으로 어떻게 되든지 그대로 되게 버려 두어야 한다. "들을 자는 들을 것이다." 그는 그 말씀을 들음에 의해서 위로를 얻을 것이다. 그 말씀을 "듣는 자는," "그의 영혼이 살 것이며," 그 말씀 "듣기를 꺼려해서 듣지 않는 자" 는 영혼의 위험을 초래할 것이다. "만약에 네가" 그 말씀을 "비웃으면," "너는 홀로 그것에 대해 고통을 당할 것이다." 하나님이나 그의 예언자가 이것으로 인해서 손실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는 죄인을 견책하는 그의 임무를 충실히 행할 때 보상을 받을 것이며, 하나님은 죄인을 견책하는 임무를 행하지 않는 예언자를 책망함으로써 그의 정의를 빛나게 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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