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의 환상 (에스겔 1:1-3)
에스겔이 보았던 환상의 분위기가 여기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부각되며, 에스겔은 환상 가운데서 그의 임무와 교훈을 받았다. 이것은 환상에 대한 해설이 공상적이 아니고 진정으로 나타나 보이게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에게 독특한 방법으로 자신을 나타내기를 기뻐하신 장소와 때를 기록한다는 것은 유용한 일이다. 처음 단을 쌓던 날과 장소로 돌아가면(창 13:4)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즐겁고 은혜로운 은총을 상기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내 영혼아! 네가 모모한 때에 모모한 장소에서 어떤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을 받았는지를 잊지 말고 기억하라. 하나님이 너를 위해 행하신 것을 남들에게 고하라."
Ⅰ. 에스겔이 이 환상을 본 시기가 기록되고 있다. 그 시기는 "제30년" 이었다(1절). 혹자는 이 30년을 예언자가 될 나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즉 그가 제사장이 되어 제사장의 업무를 완전히 실행하기 시작할 때의 나이가 30세였다는 것이다. 그의 제사장직 이행은 그 시대의 불의와 재난 때문에 금지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때 성전도 제단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에 하나님은 에스겔을 예언자로서 불러 세웠다. 혹자는 그것은 느부갓네살의 아버지인 나보폴라살(Nabopolassar)이 통치를 시작한 해로부터 삼십 년이라고 한다. 갈대아인들은 새로운 시간 계산법을 썼다. 그들은 123년전 나보나살 때부터 이런 계산은 했으니 나보폴라살은 19년간 통치했고 이 때는 그의 아들 통치 11년이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통치 기간을 합하면 30년이 된다. 바벨론에 있던 에스겔이 그곳 계산법에 따른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우리도 외국에 가면 새로운 날짜 계산법을 사용하게 마련이다. 에스겔은 그 다음(2절)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자신의 나라의 슬픈 역력(年曆)을 사용했다. 그때는 "여호야긴왕이 사로잡힌 지 5년" 되던 때이다(2절). 그러나 갈대아 주석은 다른 연대(era)를 고수해서 말하기를 이것은 "제사장 힐기야가 요시야 왕의 통치 때에 달이 지고 캄캄한 한밤중에 성소에서 율법책을 발견한 지" 삼십 년 되는 때라고 한다. 그런데 이 때가(30년) 율법서를 발견한 지 꼭 30년 되는 때라는 것은 사실이다. 율법서를 발견한 것은 그렇게 기술될 만한 하나의 사건이었다(그것이 유대국가를 하나의 새로운 시련대에 올려 놓았듯이). 그것은 계산 년이 되기에 적당한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그 사건과 갈대아인의 계산법을 의식하면서(우연히 일치했지만) 그냥 30년이라고 한다. 에스겔은 이 환상을 "4월(우리의 연력으로는 6월에 속함) 5일" 에 보았다(2절). 그런데 이날은 안식일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3장 16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7일 후에" (아마도 우리는 그날이 다음 안식일이라고 생각할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금 에스겔에게 임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요한도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되었는데, 그때 그는 "전능자의 환상을 보았던 것이다" (계 1:10). 하나님은 이로써 그의 안식일을 명예롭게 하시고자 하셨다. 그런데 "대적들은 그들을 비웃었다" (애 1:7). 하나님은 이와 같이 어떤 안식일에 자기를 비상히 나타내심으로써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매 안식일마다 선지자들의 사역에 꼭 참예하도록 격려하신다.
Ⅱ . 에스겔이 우울한 형편에 놓여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 환상으로써 그를 명예롭게 하셨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백성에게 은총을 베푸셨다. "에스겔은 갈대아인의 땅인 그발 강가에서 사로잡힌 자 중에 있었다. 그런데 그때는 여호야긴왕이 사로잡힌지 오년째 되던 때였다."
1. 하나님의 백성 중 일부는 "갈대아인의 땅에 사로잡혀 있었다." 유대 민족의 다수는 아직 고국에 남아 있었고 이들은 포로의 첫 열매인 자들이었다. 그 중 일부는 가장 우수한 사람들이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의 환상에서 보면, 이들은 "좋은 무화과" 였고 하나님은 이들을 좋은 무화과 같이 보아 좋게 하기 위하여 갈대아인의 땅에 보내셨기(렘 24:5) 때문이다. 하나님을 그들에게 유익하게 하시기 위해 그들을 징벌하시기 위해 그들을 징벌하시는 때에 선지자를 세워 율법으로 교훈하게 하셨다(시 94:12). 우리가 환난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은 하나님의 큰 자비이고, 우리가 그 말씀을 열심히 경청하는 것은 우리의 큰 의무라는 것을 유의하자. 교훈의 말씀과 징계의 막대기는 서로 협동하고 협력하는 가운데(말씀은 막대기를 설명해 주고, 막대기는 말씀을 시행케 하는)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다 지혜를 준다. 만약 인간이 "귀를 열어 교훈을 들으려고" 하는데(욥 36:10) "일천 천사 가운데" 그 하나가 그 해석자로 함께 있다면 (욥 33:23) 비록 병상의 고통에 있다고 해도 그는 행복하다. 하나님의 유대인들을 사로잡히게 하셨을 때, 하나님이 유대인들과 쟁론하신 것 중 하나는 그들이 "하나님의 사자를 비웃고 하나님의 선지자를" 욕했다는 것이었다(대하 36:16). 유대인들이 이런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은 그들이 이미 상실한 자비를 다시금 은총으로써 베푸신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가 어리석게도 억지로 밀어낸 이런 은혜와 구원이 수단을 우리에게 억지로 제공하지 않으신다면 우리에게는 여간 불행한 일이 아니다. 포로 기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영혼을 위한 평상적 보조수단도 소유하지 못했으므로 하나님은 이런 비상한 수단을 그들에게 허락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은 자기 자녀가 어느 한 방법으로 교육을 받는데 방해를 받았다면 다른 방법으로써 그것을 보충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스겔이 그들 중에서 일으킴을 받은 것은 "사로잡힌 지 5년 되는 때" 이었지 그 전이 아니였다는 것은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토록 오랫동안 그들에게 선지자를 두지 않으셨다. 그들이 여호와를 사모하기 시작하고(삼상 7:2) 표적을 보지 못하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말해 줄 자도 없다(시 74:9) 고 불평할 때까지 무선지자의 상황에 두신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그들은 선지자의 귀중함을 알기 시작했고 예언자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혼쾌히 받아들이려고 한 것이다. 유대 땅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예레미야가 함께했고,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은 에스겔이 함께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 자녀가 어디로 흩어지든지 간에 그들의 교사를 찾아 내실 것이기 때문이다.2. 예언자 자신도 "그발 강가에 자리잡고 있던 포로 중에 있었다." 그들이 앉은 곳은 바벨론의 여러 강가였으며, 그들이 수금을 걸었던 곳은 그 강가의 버드나무 위였다(시 137:1, 2). 아메리카의 경작자들은 강변을 따라서 경작한다. 아마 이 포로들은 원주민들이 전쟁에 고용됨으로 해서 강변 유역의 이 경작지를 활용하도록 하기 위해 투입되었을 것이다. 또는 정복자들은 포로들을 제조업에 부려먹었으므로 이들을 강변에 정착시켜서 물자 수송을 더 용이하게 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해석자들은 그발 강이 어떤 강이냐 하는 데는 일치하지 않지만 에스겔이 그발 강가에 있던 포로 중에 있었으며 그 자신도 포로였다는 데는 일치한다.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극히 선한 자들과 하나님께 극히 소중한 자들도 왕왕 이 세상의 공동 재난에 동참할 뿐만 아니라 죄 때문에 내려지는 공공의 범국가적 심판에도 참여한다. 국민적 범죄에 전혀 가담하지 않은 자들이 죄책감과 가책을 느낀다는 데 주목하자. 이로써 보건대 선인과 악인간의 차이는 그들로서 일어나는 사건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당한 그들의 심적 자세에서 나타난다. 의인들뿐만 아니라 선지자도 현재적 징벌에서 가장 악한 자와 운명을 같이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그들에서 장차받을 보상이 예비되어 있다는 것을 추리할 수 있으며 믿을 수 있다.
(2) 환난 중에 있는 자들에게는 같이 고통당하고 있는 자들의 확신의 말과 권고 및 위로의 말이 가장 잘 먹혀들어간다. 포로들에게는 그들과 같이 사로 잡혀있으며, 그들의 슬픔을 실제로 경험에 의해 알고 있는 에스겔의 훈계가 가장 효과적이었다.
(3) 예언의 영은 이스라엘 땅에 국한되지 않았다. 가장 훌륭한 신적 계시의 일부는 갈대아 땅에 나타났다. 이것은 교회의 이동의 복된 조짐이었으며 하나님의 계시는 교회가 세워지는 곳에 나타났다. 그후, 복음의 왕국이 창설되었을 때, 유대인들의 이산(離散)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유포에 공헌했다.
(4) 우리는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과의 친교를 유지할 수 있다. Undique ad coelos tantundem est vioe─즉 땅끝에서도 우리는 하늘을 향해 열린 길을 발견할 수 있다.
(5) 하나님의 사역자가 속박당할 때도 주의 말씀은 속박되지 않는다. (딤후 2:9). 성 바울이 죄수로 갇혔을 때도 복음은 자유롭게 왕래하였다. 성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었을 때도 그리스도는 그곳으로 요한을 찾아 주셨다. 아니, 하나님의 고난받는 종들은 대체로 총애받는 자로 취급되었고 고난이 넘칠 때 그들의 위로도 또한 더욱 넘쳤다(고후 1:5).
Ⅲ. 에스겔이 이와 같이 포로된 상황에 있을 때 하나님은 기꺼이 선지자에게 자기를 계시하셨으며 선지자를 통해 자기 백성들과 소통하기를 기뻐하셨다. 그는 여기에서 우리에게 자기가 보고 듣고 느꼈던 것을 말한다.
1. 에스겔은 "하나님의 이상을 보았다" (1절).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보고 살지는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상을 보고 그들에게 교훈을 주고 영향을 미치는 신적 영광의 현현을 본 자는 많다. 하나님이 자신을 어떤 예언자에게 처음으로 나타내실 때는 보통 비상한 환상에 의거하셨다. 이사야(사 6장)나 예레미야(1장)나 아브라함(행 7:2)의 경우가 그랬다. 이것은 교통과 교제의 만족할 만한 방법이었다. 그러므로 나중에는 모든 계시마다 이상를 보이실 필요가 없었다. 에스겔는 백성의 마음을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게 하는 일에 고용된 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 자신이 하나님의 이상을 보아야만 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숙지하는 일과 하나님께 대한 지식으로 감동을 받는 일에 관심를 가져야 하며 그들의 본분는 타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사랑을 소유하도록 인도하는 데 있다. 에스겔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상을 보도록 하기 위해 하늘이 열렸다. 그의 시야를 가리던 흑암과 간격(공간적)은 극복되었고 그는 마치 하늘이 그에게 열린 것처럼 그렇게 가깝고 선명하게 보이는, 상계의 영광의 빛 속으로 들어갔다.2. 에스겔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3절). "주의 말씀이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했다." 그가 본 것은 장차 들을 것에 대해 준비시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 표현은 강조 형태를 띤다. Essendo fuit verbum Dei─즉 주의 말씀은 그에게 실제로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 말씀 안에는 어떤 잘못도 없었다. 말씀은 빛과 권능의 충만 가운데, 그리고 성령의 증거와 증명 안에서 에스겔에게 임했다. 말씀은 그에게 밀접히 임했다. 아니, 그것은 그의 속으로 임해서 그를 사로잡았으며, 그 안에서 풍요하게 거주했다. 말씀은 "특별히" 혹은 정확히 그에게 "임했다" 에스겔에게 임해서 그를 심부름 보낸 말씀은 본질이 되는 말씀이며, 말씀하신 그분이다.
3. 에스겔은 자기 눈을 열어 이상을 보게 하며 그의 귀를 열어 음성을 듣게 하며 그의 마음을 열어 이 두 가지를 받아들이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느꼈다. 여호와의 권능(또는 손)이 그 위에 있었다. 여호와의 손은 여호와의 말씀과 동행하며 그래서 주의 말씀을 유효하게 한다는 것을 주목하자. 사람들은 다만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다고 전하는 것을 이해하고 믿을 따름이다(사 53:1; 요 12:38). 하나님의 손이 에스겔 위에 있는 것은 모세의 경우와 같이 그가 환상의 뇌살시키는 광채에 자지러지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출 33:22 참조). 하나님의 권능이 에스겔 위에 있은 것은 성 요한의 경우처럼 (계 1:17) 그를 소생시키고 지탱시키시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의 권능으로써 그는 이런 이상에 기절하지 않고 정신을 차릴 수 있었으며 풍부한 계시를 받고서도 의기양양해지거나 의기 소침해지지 않을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충만하였고 그 표시로 하나님의 권능이 그 위에 있었다.
네 생물의 환상(에스겔 1:4-14)
Ⅰ. 에스겔이 본 하나님의 이상은 매우 영화로웠고 다른 예언자들이 본 이상보다 더 특이하다. 이 환상의 범위와 의도는 다음과 같다.
1. 선지자에게 올바른 신관(神觀)을 심어 주기 위해. 에스겔에게 사명을 부여하고 그를 고용하시는 하나님은 극히 크시고 높으시고 존귀한 분이시라는 생각을 선지자에게 넣어 주려는 데 이 환상의 목적이 있다. 그가 본 것은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었고(28절) 이로써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영예로운 일이라고 추론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은 천사들이 섬기는 분이기 때문이다. 에스겔은 마음 놓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에스겔이 자기 일을 할 수 있도록 끝까지 지원할 만큼 충분한 능력을 소유하신 때문이다. 에스겔이 하나님께 대한 봉사에서 후퇴한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위험한 모험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요나의 경우에서처럼 에스겔은 추격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신 때문이다. 하나님은 위대한 분이시기 때문에 "경외와 두려움으로" 섬겨야만 한다. 에스겔은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예언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자기 말을 이행하실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2. 죄인들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해서. 시온에 남아있던 죄인들 그리고 이미 바벨론에 와 있던 죄인들은 그 마음이 태평하여 예루살렘 파멸에 대한 경고를 깡그리 무시했다. 이 점은 예레미야의 예언에도 나타났고 여기서도 나타나며 많은 자들이 그러했다. "우리가 우리의 사악한 행위를 계속할지라도 평강할 것이라고 말한 자들은 우리 하나님이 소멸하는 불이시며 그들은 그 앞에 능히 설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환상이 예루살렘 멸망을 가리킨다는 것은 43장 3절로 보아 분명한 것 같다. 거기에서 그는 그 성읍을 멸하러 올 때 즉 그 성읍의 멸망을 예언하러 왔을 때 본 환상이 이 이상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3.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의 말씀에 떨며, 그의 능력의 손아래에서 스스로 겸손해지는 자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그들이 바벨론에 사로잡혀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그들 가까이에 계시며, 그들이 영화롭고 높은 보좌인 성소를 소유하고 있지 못할지라도 성소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하라." 라이트푸트 박사는 "이제 교회가 오랫동안 다른 나라에 세워질 것이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 중에 영광을 나타내신다. 하나님은 처음에 광야 교회를 세우실 때도 그러하셨다. 광야에서 구름과 불가운데서 나타내셨듯 여기서도 하나님은 자기를 나타내신다. 그룹 사이에서 명령을 내리셨듯 여기서는 생물 사이에서 명령을 내리신다" 고 말한다. 이런 사실은 이스라엘인들을 명예스럽게 했으며 갈대아인들이 그들을 모욕할 때도 이로써 그들은 자신들을 귀중하게 여길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때가 되면 해방될 수 있다고 하는 희망을 고무시켰을 것이다.
이제 이런 목적에 부응하기 위해 여기에는 이상의 첫 번째 부분이 나온다. 이 부분은 무수한 천사의 시중을 받는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다. 천사들을 모두가 하나님의 사자이며 사역자로서 그의 명령을 행하고 그의 말씀의 소리에 청종한다. 어마어마한 수행원을 거느리고 무수한 군대를 장악하는 것이 세상 임금을 위엄있게 만들며 그 동맹들에게 신뢰감을 불러일으키고 그 대적에게는 두려움을 자아내듯 이것은 하나님의 장엄하심을 나타낸다.
Ⅱ. 천사들의 이상에 대한 소개는 매우 현란하며 우리를 각성시킨다(4절). 에스겔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는 중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보여 주시려는 것을 직접 목도하기 위해 쳐다보았다. 하늘이 열릴 때 우리는 눈을 떠야 한다는 데 유의하자. 그는 북방에서부터 폭풍이 오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길을 소제하고 하계의 거추장스런 안개를 몰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청명한 날씨도 "북방에서부터 오며", 또 "비를 몰아내는 바람" 도 거기에서부터 온다(잠 25:23, 흠정역). 하나님은 폭풍으로 하늘과 공기를 깨끗게 할 수 있으며, 하늘과의 교제에 필요한 마음의 평정을 만드실 수 있다. 게다가 이 폭풍은 "큰 구름" 을 몰고 온다. 우리가 이 땅에서 일어나는 구름이 걷혔다고 생각할 때, 그래서 그 구름 너머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할 때도 구름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 구름은 위에서 오는 구름이며 하늘의 일들을 둘러싸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흑암을 보고" 하늘 일에 대해 말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구름을 타고 승천하셨듯이, 여기에서는 구름을 타고 내려 오셨다. 혹자는 이 폭풍과 구름을 갈대아 군대로 해석한다. 갈대아 군대는 폭풍처럼 자기 앞에 있는 모든 것을 휩쓸면서 유다 땅을 향해 북방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레미야의 첫 번째 환상이 나타내는 것과 일치한다(렘 1:14).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이것을 설교에 대한 도입부라기보다 환상에 대한 도입으로 이해하고 싶다. 이 폭풍은(엘리야에게 임했던 것처럼, 왕상 19:11)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그리고 주의(注意)를 요하기 위해 그에게 왔다. 볼 눈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보고 들을지어다.
Ⅲ. 이상의 내용. "큰 구름" 은 이 환상을 실어오는 수레이며, 이 구름 가운데서 환상은 예언자에게 전달되었다.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과 하나님이 타는 마차는 "흑암과 빽빽한 구름" 이다(시 18:11; 104:3).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의 보좌의 눈부신 빛과 광채에 우리가 압도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구름을 그 위에 덮음으로써") 그의 보좌의 얼굴을 감추신다.
1. 그 구름은 "불" 을 동반한다(마치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빽빽한 구름" 가운데 거주했던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의 광경은 맹렬한 불 같았다" (출 24:16, 17). 그리고 모세에게 나타났던 하나님의 모습은 수풀 속에 있는 불꽃 같았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기 때문이다(신 4:23; 9:3). 이것은 속에서 번쩍번쩍하는 불(스스로 감싸는 불 신:흠정역) 또는 불수레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 이유와 자기의 지배와 자기의 목적이 되시므로 불처럼 존재하신다면 그는 자신을 감싸는 불이나(혹자의 해석처럼) 스스로 타는 불과 같이 존재하신다. 하나님의 영광의 불은 앞을 비추지만 재빨리 자신을 감싼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 길 중 일부분만 우리에게 알리시는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불은 쏟아지지만 재빨리 스스로 감싼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내는 자기 분노의 전부를 일으키지 않도록 참으시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이 이와 같이 진노의 불을 스스로 감싸지 않으신다면 오, "주여 누가 설 수 있사오리이까?"2. 그분은 영광으로 둘러 싸인다. 빛이 사면에 비치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했음에도 그 불은 자신에 대한 어떤 것을 발견하게 했다. 우리가 불속를 볼 수 없고, 그 속에 계신 하나님을 완전하게 발견할 수 없을지라도, 불 주위에 있는 빛을 볼 수 있으며 빽빽한 구름 속에서 나오는 이 불의 반사를 볼 수 있다. 모세는 하나님의 뒷모습은 볼 수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우리는 불 주위에 퍼져 있는 구름 때문에 불 속을 통찰하는 식견을 가질 수 없을지라도, 불을 둘러싸고 있는 빛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본성에 관계된 약간의 빛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단정하는 것보다 더 쉬운 것은 없으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기술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없다. 하나님이 그의 분노를 불로써 나타내실 때에도 그 주위에는 번쩍거림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은 죄와 죄인의 징벌에서도 매우 혁혁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심지어 삼키는 불에도 번쩍거림이 있으며 영광받은 성도들은 이를 영원히 상찬할 것이다.
3. 이 불에서는 호박 빛이(성경에는 놋쇠의 빛으로 표현됨) 비췬다(흠정역). 우리는 이 호박 색을 발한 것이 누구이며 무엇인지 아무런 언급을 받지 못한다. 그러기에 나는 그것을 "불과 빛 가운데서부터" 에스겔의 시야 속으로 들어 온 이상의 전체적 틀로 생각한다. 에스겔이 세부적인 것을 보기 전에 그가 주목한 첫 번째 것은 그것이 "호박색" 또는 "호박눈" 이라는 것이었다. 즉 그것은 호박같이 보였고 밝게 타오르는 화염 같았으며 피운 숯불 색깔이었다. 에스겔이 불 가운데서부터 보았던 그 "생물" 은 스랍 즉 태우는 자들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바람(또는 영)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기" 때문이다(시 104:4; 히 1:7).
4. 불 가운데서 나온 것을 분명히 관찰했을 때 그것은 "네 생물" 의 형상이었다. 그것은 (천사들은 영적 존재이어서 볼 수 없으므로) "생물들" 자체가 아니라 생물의 형상이었다. 하나님은 이런 상징적 표현을 사용하여 천사의 세계를 알리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그것은 순전히 신적 계시의 문제였다). 천사들을 수행원으로 거느리는 하나님의 크심과 천사들을 명하여 자기 백성들을 수종드는 자로 삼으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 두려운 감정을 갖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던 때문이다. 이 생물의 형상은 불 속에서 나타났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하나님께로부터 그들의 존재와 능력을 얻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천사로서 존재하며,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만 존재한다. 그러기에 천사들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다. 선지자는 이 이상을 직접 설명하여(10:20) "그 생물들이 그룹들인 줄을 내가 아니라" 라고 한다. 이것은 성서에서 알려진 천사들의 이름 중 하나이다. 다니엘에게는 그 천사들의 숫자가 "만만" 이라고 알려졌다(단 7:10). 그러나 그 천사들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그들은 하나이며, 이런 사실이 여기에서 에스겔에게 알려지고 있다. 천사들은 수 천으로 구성된 군대들이 일단의 사람(몸이란 말과 동일함:역주)이라고 불려지는 것같이 그들의 본성과 작용에 있어서 하나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알 수 있다.
(1) 천사들의 본성. 그들은 생물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손으로 만들어진 피조물이다. 그들의 존재는 하나님께로부터 유래한다. 그들의 생명은 자신 안에 있지 않고 자신에게 속해 있지 않다. 그들은 다만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삶을 받을 뿐이다. 이 하계의 동물들이 지상의 장식물인 식물들을 능가하는 것같이, 상계의 생물인 천사들은 천상의 장식물인 태양과 달과, 별들을 능가한다. 태양은 "번쩍번쩍 빛나는" 불꽃이다. 그러나 태양은 천사들이 불꽃으로서 존재하는 것 같은 그런 생물은 아니다. 천사들은 생물들이며 힘찬 불꽃과 같이 살아 있는 존재들이다. 땅위의 인간은 죽어가는 피조물이며, 매일매일 죽어가는 있다. "삶 가운데서 우리는 죽음에로 존재한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천사들은 생물들이다. 그들은 참으로 살아 있으며 선한 목적을 위해서 살아간다. 그리고 성도들은 "천사들과 같이" 될 때, "더 이상 죽지" 않게 된다(눅 20:36).
(2) 천사들의 수효. 그들은 넷이다. 천사는 셀 수 없을만큼 무수할지라도 여기에서는 그렇게 나타난다. 이것은 혹자가 즐겨 생각했듯 미가엘, 가브리엘, 라파엘, 우리엘처럼 다른 천사들 위에 특별히 네 명의 천사들을 세웠다는 것이 아니라 네 얼굴들을 가졌다는 것을 나타내며 하늘의 사방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것을 시사한다(마 24:31). 스가랴는 천사들이 동서남북으로 가는 데 대의 수레를 보았다(슥 6:1). 하나님은 그의 사자들을 이와 같이 모든 방면으로 보낸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왕국은 우주적이며, 세상의 전지역에 뻗쳐 있기 때문이다.
(3) 천사들의 자격. 그들은 그들의 창조주와 그들의 주인을 섬기는데 아주 적당한 특질을 갖고 있다. 이 특질은 직유와 비유로 나타난다. 이것은 환상에서 적합한 표현법이다. 환상은 눈으로 보는 비유인 때문이다. 천사의 묘사는 여기에서 그렇게 표현되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공상이나 연필로써 그들의 정확한 상을 그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다 그려진 상은 천사들을 경배하게 하는 유혹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임무에 대한 천사들의 적합성의 여러 본보기들은 이 이상에서 많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피조물이 피조의 목적에 부응할 만한 기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그 피조물의 최대 영예이다. 우리가 모든 선한 일에 대해 준비를 많이 갖추면 갖출수록 우리는 천사의 존귀함에 더욱 더 가까와진다. 이 생물들이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지 관찰하자.
[1]천사들의 일반적인 겉모습. 그 "모습은 사람의 형상이었다." 그들은 대체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첫째, 이것은 이들 생물이 이성적 피조물과 이지적 존재임을 의미한다. 그들은 여호와의 등불되는 인간의 영혼을 가졌다(잠 20:27).
둘째, 이것은 인간을 명예롭게 한다. 인간은 천사보다 못하게 지음을 받았지만 조금 못할 뿐이며 천사 바로 밑의 등급에 있다. 상계의 불가시적 지능이 스스로를 가시적으로 나타내려고 할 때 그것은 사람의 형상을 한다.
셋째, 이것은 그들의 주인처럼 그들의 즐거움이 인자들에게 있었으며 그들은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사람들은 믿음과 소망과 거룩한 사랑으로 그들과 영적 교제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넷째, 하나님의 천사들은 인간과 유사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때가 차면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바로 인간의 본성을 가지시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사들은 인간에게 이런 사랑을 보여 준다.
[2]천사들의 얼굴. 모든 천사들은 각각 사방을 볼 수 있도록 네 개의 얼굴을 가졌다. 이것과 유사성을 갖는 사도 요한의 환상에서는 네 생물이 각각 얼굴들의 하나를 가지고 있다고 언급한다(계 4:7). 여기서는 각자가 모두 네 얼굴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모두 동일한 봉사 자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교회의 사자처럼 하늘의 천사들도 그 중 일부는 어떤 한 가지 은사가 빼어나고 또 다른 천사들은 다른 은사가 뛰어나지만 모두가 다 공동 봉사를 위해 존재한다.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듯 우리도 그같이 행하기 위해서는 천사들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될 때까지 그들의 얼굴을 응시해야 한다. 그 얼굴들의 모양은 사람의 얼굴이었다(왜냐하면 천사들은 인간과 유사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5절). 이것 외에도 천사들은 "사자의 얼굴과, 황소의 얼굴과, 독수리의 얼굴" 을 갖는다. 그런데 그들은 야생 짐승들 중의 "사자," 길들인 짐승들 중의 "황소," 새들 중의 "독수리" 와 같이 그들 각자의 위치(種)에 있어서는 훌륭한 것들이었다(10절). 하나님은 그의 적들에게 심판을 이행하기 위해서 천사들을 사용하는가? 천사들은 그들의 먹이를 찢는데 있어서 사자와 독수리같이 사나우며 강하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 천사들은 사용하시는가? 천사들은 "일하는 데 있어서 황소같이" 강하며 섬기기를 좋아한다. 이 두 가지(봉사와 심판)에서 천사들은 "인간의 총명을 갖는다. 땅에 있는 생물들의 완전성은 분산되어 있는데 이것은 하늘의 천사들에게서 만난다. 천사들은 인간의 유사함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동물보다 못한 점도 있기에 천사들은 여기서 동물로 비유된다. 천사들은 인간의 총명을 가지며 그보다 훨씬 뛰어난다. 천사들은 또 자비심과 인도적인 면에서 인간과 유사하다." 그러나,
첫째, 사자는 힘과 대담성에 있어서 인간을 능가하며 인간보다 더 무서운 동물이다. 그러기에 천사들은 이 점에서는 사자와 유사하기에 사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
둘째, 황소는 부지런하고, 인내하고, 수고하고, 그가 해야 할 일을 끈기있게 수행하는 점에 있어서는 인간을 능가한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봉사에 종사하는 천사들은 "황소의 얼굴" 을 갖는다.
셋째, 독수리는 민첩함과, 날카로운 통찰력과, 높이 솟아오르는 점에서는 인간을 능가한다. 그러므로 위의 것을 구하며 신의 깊은 신비를 보는 천사들은 "날으는 독수리의 얼굴" 을 갖는다.
[3]천사들의 날개. 모든 천사는 각각 네 날개가 있었다(6절). 그렇지만 이사야가 보았던 천사들은 여섯 날개가 달려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네 개의 날개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천사들이 보좌 위에 나타날 때 때때로 그들의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 두 개의 날개를 더 갖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심부름을 신속히 수행하는 데 알맞도록 네 날개를 갖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일을 맡길 때 신속히 그 길을 수행해야 한다. 신앙과 소망은 영혼의 날개이며, 그 날개로 영혼은 위로 솟아오르게 된다. 경건하며 헌신적인 사랑도 역시 영혼의 날개이며, 그것 위에서 영혼은 활력과 민첩함으로 앞으로 나간다. 선지자는 여기에서 천사들의 날개와 관계된 것을 관찰한다.
첫째, 그 날개들은 "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 (9, 11절). 천사들은 일부 조류와는 달리 싸움을 위해서 날개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천사들 사이에는 어떠한 다툼도 없다. 하나님은 평강을 만드시며 그의 높은 처소에서는 완전한 평화를 이룩하고 계신다. 천사들의 날개는 그들의 완전한 일치와 합의의 증거로써 결합되었으며, 그들 가운데 존재하는 우주적인 조화를 상징한다.
둘째, "그 날개들" 은 접어져 있거나 늘어져 있지 않고 항상 날수 있도록 "들어 펼쳐져 있다." 한 천사가 하나님의 뜻에 대해 조그마한 암시라도 받게 되면 그는 달리 찾을 필요가 없이 즉시 난다. 우리들의 천박하고 우둔한 영혼은 그 자신을 위로 들어 올리기가 매우 어려운 타조와 같다.
셋째, 천사들의 날개들 중에서 두 개는 그들의 영적인 몸을 가리는 데 사용된다. 우리가 몸을 가리기 위해 입는 옷은 일하는 데 방해가 된다. 천사들은 그들의 추진력이 되는 날개 외에 어떤 다른 덮개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천사들은 우리에게서 자신의 몸을 감추며 자기들에게 대한 불필요한 질문을 허락하지 않는다. 천사들에게 묻지 말라. 그들은 기묘하기 때문이다(삿 13:18). 천사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가린다. 그리고 천사는 우리가 하나님께 접근하려고 할 때 "우리의 벌거벗은 부끄러움이 나타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의로 옷입으라고 가르쳐 준다.
[4]천사들의 발(허벅다리와 정강이를 포함한). 찬사들은 곧은 발을 가지고 있다(7절). 그러므로 천사들은 곧고 꾸준하고 견고하게 섰다. 어떤 봉사의 집도 그들의 다리를 굽히지 못했다. 신부는 자기의 사랑하는 자의 다리를 묘사하여 "정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 기둥 같다" (마 5:15)고 하는데 천사들의 다리야말로 그렇다. "천사들의 발바닥" 은 송아지 발바닥 같다. 즉 송아지 발바닥은 굽이 갈라져서 깨끗하다. 말하자면 둥근발의 발바닥 같다(갈대아 역이 표현하듯). 그들의 발바닥은 어느 쪽으로도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다(70인 역). 그들은 너무나 신속하여 마치 나는 것 같다. 그들의 발은 마광한 구리같이 빛났다.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는 자는 얼굴뿐만 아니라 발도 아름답다(사 52:7). 천사들이 걷는 모든 발걸음은 영광스럽다. 요한이 그리스도께 대한 환상에서는 발이 풀무에 단력한 빛난 주석 같다(계 1:15)고 했다.
[5]천사들의 손(8절). "그들의 사면 날개 밑에는 각각 사람의 손이 있다." 각 날개 밑에는 팔과 손이 있었다. 천사들은 움직이기 위한 날개뿐만 아니라 행동하기 위한 손도 가졌다. 신속하기는 한데 행동적이지 못한 사람이 많다. 그들은 무척 서두르지만 목적있는 일을 하지 못하고 아무 일도 성취시키지 못한다. 이런 자는 날개는 가지고 있으나 손은 갖지 못한 자이다. 이에 반해 하나님의 종들인 천사들은 하나님이 보낼 때 가며 하나님이 부를 때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도 행한다. 천사들은 사람의 손이다. 그 손들은 훌륭하게 만들어졌으며 봉사에 적당하게 만들어졌다. 또한 그 손들은 이성과 총명에 의해 인도된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모든 일을 이성적으로 행하며 판단력을 가지고 행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송아지의 발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의 행동의 민첩함을 나타내 준다(레바논의 백향목들이 "송아지 같이 뛰었다" 고 한 것처럼. 시 29:6). 그러나 천사들은 인간의 손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마치 하늘을 하나님의 손의 산물이라고 말하듯 천사들의 임무수행의 훌륭함과 정밀함을 나타낸다. 천사들의 손은 "그 날개 밑에" 있다. 그 날개는 그 몸의 나머지 부분과 마찬가지로 손도 덮어 주었다. 천사들의 임무는 비밀스런 것이며 그들의 작업은 볼 수 없는 방법으로 수행된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하나님의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우리는 게으른 자처럼 "우리의 손을 가슴속에 숨겨서" 는 안 되며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알지 못하도록" 겸손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날개가 그들의 손이며 손이 날개 아래 있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그들의 날개가 그들을 어디로 데려가든지 간에 손도 그들과 함께 가서 적당한 일을 행하며 그 장소가 요구하는 의무적 일을 행한다.
(4) 천사들의 움직임(motion). 생물들은 움직인다. 천사들은 활동적인 존재들이다. 조용히 앉아 있거나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천사들의 행복이 될 수 없으며, 항상 섬기는 일을 그치지 않는 것이 그들의 행복이다. 우리가 선을 행할 때는 천사들이 하듯 최선을 다해서 행해야 한다.
[1]천사들이 어떤 봉사를 행할 때 "그들은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했다" (9, 12절). 이런 사실은 다음 사실을 암시한다.
첫째, 천사들을 그들이 행하는 모든 행위에 있어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지향하며, 순전한 눈을 가지고 있다. 천사들이 "앞으로 곧게" 행했다는 것은 곧장 앞만 바라보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들이 행동하는데 있어서 결코 사악한 의도를 갖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눈이 성하면(순전하면:흠정역) 온몸이 밝을 것이다" (마 6:22). 순전한 눈은 진정한 마음을 갖게 한다.
둘째, 천사들은 그들이 종사하는 일에 전심 전력으로 열중했다. 그들은 자기 일과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천사들은 그들의 손이 발견한 일을 전력으로 하며 게으름으로 그 일을 하지 않는다.
셋째, 천사들은 그 일에 일치한다. "그들은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각자 자신의 일에만 전념한다. 천사들은 서로 상대방을 방해하거나 떠밀지 않으며, 상대방을 막거나 가로채지 않는다.
넷째, 천사들은 그들의 업무를 완전히 이해하며 철저하게 그것을 안다. 그러므로 그들은 조용히 서 있거나, 그들의 행동을 멈추거나 주저하지 않고 마치 그들이 무슨 일을 해야 하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그 일을 신속하게 수행한다.
다섯째, 천사들은 그들의 일을 확고하고도 끊임없이 수행한다. 그들은 동요하지 않으며 싫증내지 않고 변경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자기 일과 혼연 일치가 되어 있다. 천사들은 지시된 길로 곧게 움직인다. 그들은 어떠한 시간도 낭비하지 않고 그들의 일만을 위해서 전심전력을 기울인다. 우리는 곧게 나아갈 때 앞만을 향해서 가야 한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한 마음으로 섬길 때, 우리는 이유없이 그 일을 끝마칠 수 있다.
[2]" 천사들은 앞으로 나아갈 때 돌이키지 않는다" (9, 12절).
첫째, 천사들은 수정하기 위하여 돌이켜야 할 실책이나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 그들의 작업은 수정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러기에 반복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둘째, 천사들은 어떤 전환(diversions)도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들은 들이키지 않는 것처럼, 옆을 돌아보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들의 업무에 낯선 어떤 것도 경시해 버린다.
[3]" 천사들은 신이 어느 편으로 가든지 그대로 갔다" (12절).
첫째, 천사들은 그들 자신의 "영이 어느쪽으로 가려고 하든지" 그쪽으로 갔다. 또한 그들은 우리처럼 방해하는 몸을 갖고 있지 않다. 마음(원의:신, 영)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우리가 행하고 싶은 선을 행치 못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불행이며 나날이 지는 짐이다. 그러나 천사들과 영광받은 성도들은 그런 무능력 상태에서 고통받지 않는다. 이들은 자기들이 하려고 하는 어떤 일이든지 행한다. 이들은 결코 그 일을 그르치지 않는다.
둘째, 하나님의 신이 천사들을 어느 곳으로 가게 하든지, 그들은 그곳으로 갔다. 천사들은 자기 지혜가 많지만 움직이거나 행동할 때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의 안내와 관리(goverment)에 복종한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섭리가 가는 곳으로 가며, 그 섭리의 의도를 섬기고 그 명령을 수행한다. 그린힐 선생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영(신)은 천사들에게 일하게 하는 큰 발동자(agent)이며, 천사들이 하나님의 신에 인도받고 쉽게 인도하는 것은 곧 그들의 명예라고 한다. 이 고귀한 피조물이 얼마나 유순하며 순종을 잘 하는지 주목하자. 신(spirt) 이 어느 곳으로 가든지 천사들은 그곳으로 즉시, 가능한 한 신속하게 간다. "영(spirt, 신)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천사들처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이다.
[4]천사들은 "번개같이 왕래한다" (14절). 이것은 다음 사실을 의미한다.
첫째, 천사들은 신속하다. 그들은 움직임에 있어서 번개처럼 빠르다. 천사들은 그들의 어떠한 업무도 순간적으로, 즉 눈 깜짝할 사이에 해치운다. 천사들은 거룩한 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 그들의 움직임을 제지하는 어떠한 몸도 가지지 않았기에 행복하다. 우리가 영적인 일을 위해서 영적인 몸을 가질 때, 우리도 행복하게 될 것이다. 사탄은 그들 자신의 파멸 속으로 "번개같이 떨어진다" (눅 10:18). 천사들은 그들의 주인의 업무를 위해 번개같이 난다. 천사 가브리엘은 신속히 날았다.
둘째, 천사들은 급히 돌아왔다. 그들은 "왕래했다" (ran and returned). 천사들은 달려가서 자기들의 일과 명령을 수행하고는 돌아와서 그들이 행한 일을 설명하고 행해야 할 새로운 지령을 받는다. 천사들은 이 세상에서 되어져야 할 일을 행하기 위하여 이 세상으로 온다. 그러나 그 일을 마칠 때, 그들은 저 세상으로 돌아간다. 하나님의 복된 모습을 뵙고 싶은 염원을 참지 못해 일이 끝나자마자 번개같이 돌아간다. 이와 같이 우리도 이 세상 일에 있어서도 그래야 한다. 우리가 세상사에 뛰어 들더라도 거기에 빠져 쉬고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 영혼은 휴식처와 중심되신 하나님께로 번개같이 돌아가야 한다.
5. 여기에는 빛의 설명이 나오는데 선지자는 이 빛으로 생물들을 보았다. 아니면 그것은 선지자가 생물들을 그 안에서 본 거울의 설명일 것이다(13절).(1) 에스겔은 생물 자신들의 빛에 의해서 그들을 보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모양은 타는 숯불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랍들 즉 태우는 자들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열정과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의 열렬한 열심을 나타내며, 그들의 근사함과 찬란함, 하나님의 적들에 대한 그들의 공포를 나타낸다. 하나님이 그들을 전쟁에 고용하셔서 싸우게 하실 때 그들은 번개가 그들을 패주시키듯 대적을 삼키는 숯불과 같다(시 18:12).
(2) 에스겔은 생물 가운데서 "오르락 내리락하는" "횃불" 의 빛에 의하여 그들을 보았다. 그런데 이 횃불은 "광채" 가 있다. 사탄의 일은 어두움(흑암)의 일이다. 사탄은 "이 세상의 흑암의 지배자" 이다. 그러나 빛의 천사들은 빛 안에만 존재한다. 천사들이 그들의 일을 감출지라도 그것은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것은 빛을 비추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천사들과 그들의 업무를 오직 그들 사이에서 "오르락 내리락하는" "등불" 의 희미한 빛과 촛불에 의해서만 볼 수 있다. "날이 밝고 그림자가 사라지게" 될 때 우리는 그들을 명백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불로부터 분출하는 번개와 타는 숯불" 의 모습은, 유다와 예루살렘이 그들의 죄로 인해서 지금 받고 있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의미한다고 한다. 천사들은 이일을 위해서 고용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나중에 숯불을 그 성읍 위에 흩어져 소멸시키라고 하는 말을 읽게 되는데 그 숯불은 "그룹 사이로부터 가져 온 것이다(10:2). 그러나 우리는 횃불 모양이란 것을 의당 고통의 흑암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비치는 위로의 빛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천사들의 직분이 하나님의 적들을 불로 태워버리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기쁨의 빛이 될 것이다. 이런 기쁨의 "빛이 비치" 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것은 회복과 소생의 불이 된다. 그러나 이 "불로부터" 는 번개가 나와서 하나님의 대적들을 멸망시킨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모시느냐에 따라 천사들은 우리 친구가 되든지 아니면 원수가 되든지 한다.
수레의 이상 (에스겔 1:15-25)
예언자는 이 환상에 대한 관찰과 그 기록을 매우 정확하게 하고 있다.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알 수 있다.
Ⅰ. 선지자는 수레를 주목하고 있다(5-21절). 하나님의 영광은 천상에 있는 수행원들의 장엄함 가운데서 나타날 뿐만 아니라 이 지상에 있는 그의 확고한 통치 가운데서도 나타난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 뜻을 따라 천군들에게 어떻게 행하시는지를 보았는데 이제는 지상 거주민들에게 하나님께서 자기 뜻을 어떻게 이루시는지 보게 된다. 왜냐하면 선지자는 땅 위에서 바퀴를 보았기 때문이다(15절). 그가 생물을 보며 그 영광을 응시하면서 교훈을 받고 있을 때 이런 다른 이상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하나님께 대한 발견을 선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은 더욱 더 깊은 발견을 기대할 수 있는 영광을 가진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있는 자는 받아 더 풍족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우리는 천상에 있는 것 외에는 영화로운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의 눈으로써 천상 왕국의 다스림 속에 빛나고 있는 섭리의 선과 능력과 지혜와 아름다움을 식별할 수 있다. 우리는 "진실로 그분은" 땅에서 판단하시며 그답게 행동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볼 수도 있고 말할 수도 있다(시 58:11). 이 환상에는 우리에게 신의 섭리에 의해 빛을 던져 주는 많은 것이 있다.
1. 하나님의 섭리의 통치는 "바퀴" 에 비유된다. 그런데 이것은 정복자가 승리해서 타는 병거의 바퀴일 수도 있고, 기계의 규칙적 움직임에 함께 기여하는 시계의 바퀴일 수도 있다. 우리는 야고보서에서 "생의 바퀴" (the course or wheel of nature. 약 3:6)라는 말을 읽는데 여기서는 그 바퀴가 생의 하나님의 지시 하에 있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바퀴" 는 "생물들" 처럼 그들 자신에 의해서 움직이지 않지만, 움직일 수 있게 만들어졌으며 끊임없이 행동한다. 이들 "바퀴" 로 표현된 하나님의 섭리는 변화를 일으킨다. 하늘에 있는 전체의 운동처럼 자축위의 바퀴의 운동은 매우 규칙적이고 꾸준하다. 바퀴의 운동은 순환적이다. 사물은 하나님의 섭리를 회전에 의하여 이전과 꼭 같은 형태와 정도로 돌아온다. 왜냐하면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해 아래는 새 것이 없기" 때문이다(전 1:9, 10).2. 바퀴는 "생물들" 곁에 있다. 그 생물들은 바퀴의 움직임을 지시한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하나님의 섭리의 사역자로 고용되었으며, 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인간의 행동을 지시하는 데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게 참여하기 때문이다. 이 "생물들" 과 바퀴 간의 관련성은 너무나 밀접하여 그들은 함께 움직이고 함께 휴식한다. 천사들은 바쁘게 일한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비록 자신은 모르지만 천사들의 손에서 자비나 심판의 도구로 분주히 일하게 된다. 또한 인간들은 자기들의 계획을 달성하기 위하여 활동적인가? 천사들도 동시에 인간들을 조정하고 지배하기 위해 활동한다. 이것이 여기에서 많이 강조되고 있다(19절). 즉 "생물들이 어떠한 일을 하기 위하여 행할 때" "바퀴들도 그 곁에서 행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의 사역을 통해 하실 일이 있을 때 제 2 원인 즉 인간들은 모두 그 일에 협조을 하게 되거나 기꺼이 협력하게 된다. 그리고 "저들이 그칠 때 이들도 그쳤다" (21절). 천사들이 그들의 일을 마칠 때 인간들도 그들의 일을 끝마쳤다. 생물이 땅에서 들려 자연의 일반 경로나 보통 노정을 벗어나는 일을 맡게 되면(즉 하수를 나눈다든지 태양을 정지시키는 따위의 기적의 행사를 말한다) 바퀴는 땅을 향하는 자신의 본래적 성향과는 반대로 생물들과 제휴하여 움직이며 그들도 들린다. 이것은 세 번 언급되고 있다(19-21절). 모든 열등한 피조물들은 창조주께서 천사를 통해 지시하고 영향을 주시는 대로 존재하고 움직이고 행동한다. 보이는 결과들은 보이지 않는 원인들에 의해 조종되고 지배된다. 이런 것에 대해 본문이 제시하는 이유는 "생물의 신이 바퀴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천사와 그들의 모든 행위를 인도하고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바로 그 뜻과 계획 또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거룩함이 천사들을 통해 하계 피조물의 모든 움직임과 사건과 결과를 지시하시고 처분하신다. 하나님은 세계의 영혼(soul)이시며, 아래 있는 것과 위에 있는 것 전부에게 활기를 주신다. 그러므로 그들은 인체의 아래 윗 부분이 그렇듯 완전한 조화 가운데서 움직이게 된다. 그래서 어디든지 신이 하면 (하나님이 무슨 일을 의도하시고 이루려고 하시든지) 그들의 신도 그리로 간다. 즉 천사들은 알면서 의도적으로 그 일이 일어나도록 착수한다. "그들(생물들)의 영은 그들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바퀴들도 들린다. 즉 자연의 힘과 인간의 의지는 모두 그 의도를 이루는 데 봉사하게 된다. 비록 그런 의도나 생각은 마음에 없다고 해도(사 10:9; 미 4:11, 12) 그들은 틀림없이 그리고 불가항력으로 그렇게 하게 된다. 이와 같이 비록 하나님의 교훈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그의 목적과 계획의 뜻은 이루어지며 또 이루어질 것이다.
3. 바퀴는 네 "얼굴" 을 가졌다고 하는데 그것은 사면을 바라보고 있다(15절). 이 사실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상의 모든 부분인, 동쪽과, 서쪽과, 북쪽과 남쪽에 작용하며 세상의 가장 먼 구석에까지 뻗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어느 쪽을 보든지 섭리의 바퀴가 눈에 뛴다. 그 얼굴은 우리를 향하고 있으며, 그것의 모습은 감탄할 만큼 아름다운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섭리의 말을 쾌히 들으려고 하기만 한다면 섭리는 기꺼이 말해 주려는 듯이 우리에게 그 얼굴을 돌려 바라본다. 그것은 마치 잘 그려진 그림처럼 자기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에게 시선을 보낸다. 바퀴는 네 얼굴이 있어 그 안에 네 바퀴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사방으로 행한다" (17절). 처음에 에스겔은 그것을 "하나의 바퀴" (15절) 즉 하나의 구로 보았다. 그러나 후에 그는 그것이 네 바퀴임을 알았다. 그 "네 바퀴은 한결 같았다" (16절). 그들은 서로 같았을 뿐 아니라 마치 하나 같았다. 이것은 다음 사실을 암시한다.
(1) 섭리의 한 사건은 다른 사건과 같다. 즉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모든 인간들에게 공통적인 것이며," 우리가 기이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들이다.
(2) 다양한 사건들은 동일한 결과로 흐르려는 한 가지의 경향을 가지며 일치하여 동일한 의도에 부응하려 한다.
4. "바퀴들의 형상과 구조는 황옥빛(한글 개역 성서:황옥) 같다" 고 한다(16절). 그것은 다르쉬스색 즉 바다색이다. 황옥(beryl)은 연한 푸른 바다색이다. 우리는 그것을 푸른 ?튠(바다의 신 :역주)이라 부른다. 이 세상 사물들의 본성은 바다의 것과 같다. 그런데 이 바다는 계속되는 흐름(flux) 가운데 있으며, 그 가운데에는 끊임없는 결합과 각 부분의 이어짐이 있다. 그곳에는 항상 이런 저런 방법으로 끌어당기는 사건들의 사슬이 있다. 바다는 흘러가고 흘러 들어온다. 하나님의 섭리도 세상사의 처리에서 그와 같지만 항상 정해진 시간과 방법으로 행한다. 바다는 하늘처럼 푸르게 보이는데 이것은 우리의 빈약한 시력과 부족한 시야 때문이다. 우리 눈은 단지 조금밖에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섭리의 형상과 구조가 황옥 빛에 비유된 것은 적절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전 3:11). 우리는 하나님의 행사를 일부만 보며(욥 26:14) 그 외의 모든 것은 푸르게 보이며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이해치 못하게 한다. 모든 초월적인 것(all beyond)은 푸르게 보이며, 그것은 그것과 관련된 어떠한 깨달음도 우리에게 주지 않으며 실제로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의 시야로부터 멀리 위에 있다.
5. "바퀴의 형상과 구조는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과 같았다." 여기에서 다시 관찰해 보면, 그들의 "형상" 은 "그들의 구조" 가 실제로 어떤 것인지 예언자에게 설명하기 위하여 고안된 것이었다. 인간들의 형상과 구조는 때때로 다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의 형상과 구조는 일치한다. 만약에 그들이 다르게 보였다면 그것은 우리가 무지하고 잘못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이들은 "바퀴 안에 있는 바퀴로서 존재하며," 보다적은 바퀴는 큰 바퀴에 의해서 움직여진다. 우리는 그것에 대한 수리적인 묘사(mathematical description)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 의미는, 하나님의 섭리의 처분이 우리에게는 난해하고 복잡하고 헤아릴 수 없게 보이지만 결국에는 최선의 것이 되게끔 지혜롭게 배치됐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요 13:7).
6. 이 바퀴들의 움직임은 생물의 움직임과 마찬가지로 견실하고 정규적이고 불변적이다. "그들은 행할 때에 들이키지 않는다" (17절). 왜냐하면 그들은 결코 어긋나게 행하지 않으며, 그들이 당연히 해야 하는 것 이상의 어떤 것도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섭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은 그 앞에서 그의 일을 행하며 그 일을 진전시키실 것이다. 그 일이 우리에게는 퇴보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계속 진전한다(" 그들은"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행하기" 때문에 결코 "돌이키지 않는다). 우리는 돌이켜야 할 경우를 가져서는 안 된다. 만약에 우리가(그 일을) 어긋나게 행했다면 회개함으로써 그것을 원상태로 돌려야 하며, "성령의 인도" 와 그의 명령을 따름으로써 그 일을 완수해야한다. 생명의 신(그렇게 읽는 이도 있다)이 "바퀴들 안에 존재했으며," 용이하고 평탄하게 그 바퀴들을 움직였다. 그래서 "그들은 돌이키지 않고 행했다."
7. "바퀴들의 둘레는 높고 무섭다" (18절). 그들의 둘레는 매우 광대하고 크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의 몸을 일으켜서 움직이려고 할 때, 선지자는 보기조차 무서워했다. 하나님의 사고는 광활하고 그의 의도는 매우 넓기 때문에 참으로 놀라운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의 범위를 기술하려고 할 때 놀라움이 우리를 압도하며 둘러쌀 것이다. 오, 하나님의 뜻의 높고 깊음이여 ! 그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8. "그 둘레에는 눈이 가득하다." 환상의 이러한 분위기는 무엇보다도 가장 놀라운 것이며 매우 중요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움직임의 무한한 지혜로써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나타내 준다. 사물들의 결말은 맹목적 행운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고, 땅을 이리저리 운행하시고 선한 자와 악한 자를 보시면서 모든 곳에 존재하는 여호와의 이런 눈들(eyes)에 의해서 결정된다. 우리가 비록 사건들의 근원과 경향을 설명할 수 없을 지라도 그것들이 전부다 전지하시고 모든 것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인식과 지시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만족이 되며 또 우리는 그것에 만족해야 마땅하다.
Ⅱ. 에스겔은 "생물들의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을 지켜보았다. 그는 "생물들" 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 곁에 있는 "바퀴들" 도 보았었다(15절).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섭리의 다양한 움직임들을 관찰할 때와 마찬가지이다. 선지자는 위로 쳐다보면서 "생물들의 머리 위에 펴 있는 궁창" 을 주목하였다(22절). 땅 위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성서가 말씀하듯) 하늘 아래서 즉 하늘의 감시와 영향력 아래서 행해진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그는 무엇을 보았는가? "수정 같은 궁창은 보기에 심히 두려웠다." 그것은 참으로 영광스러웠으나 두려우리만치 영화로웠다. 궁창의 거대함과 광채는 선지자를 경악 속으로 몰아 넣으며, 그에게 두려운 존경심을 갖게 했다. 그것은 희게 얼어버린 "무서운 얼음" 이나 "서리" 같았으며, 북해의 빙산처럼 매우 무서운 것이었다. 대담한 죄인들은 "하나님이 흑암 중에서 어찌 심판하실 수 있느냐?" (욥 22:13)고 묻는다. 그러나 우리가 흑암이라고 칭하는 것도 하나님께는 수정같이 투명한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거하는 곳에서 이 흑암을 통해 세상의 모든 거민을 하감하신다" (시 33:14). 에스겔은 "궁창 밑에 생물들의 날개가 똑바로 서 있는 것" 을 보았다(23절). 생물들은 원하는 대로 날개를 사용했거나(나는 일이든 몸을 가리는 일이든)아니면 나는 데 두 날개, 몸을 가리는 데 두 날개를 사용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높이 "궁창 위에" 계신다. 그러나 천사들은 "궁창 아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천사들의 복종을 의미한다. 또 이것은 하늘의 열린 궁창에서 하나님의 심부름으로 즉시 날려는 천사들의 준비성과 만장일치로 하나님께 봉사하려는 자진성을 나타낸다.2. 선지자는 무엇을 들었던가?
(1) 에스겔은 "천사들의 날개 소리" 를 들었다(24절). 벌과 다른 곤충들은 그들의 날개를 진동시킴으로써 큰 소리를 낸다. 마찬가지로 천사들이 여기서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궁창에서 말씀하시려는 것에 선지자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서였다. (25절). 그들이 종사하는 섭리에 의하여 인간이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경종을 울려 주며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도록 그들을 일깨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문에서 부르며 지혜자가 듣고 깨닫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천사들의 날개의 소리는" 크고 두려워서 많은 물 소리(바다의 노호나 광음처럼)와도 같고 "군대의 소리" 즉 전쟁의 떠드는 소리와도 같았다. 그러나 그 소리는 매우 분명했으며 이해할 수 있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불확실한 소리를 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소리는 "음성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 소리는 "전능자의 음성과도 같았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알아듣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섭리로써 "한번 말씀하시고 또 다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욥 33:14). "여호와께서는 외쳐 부르신다" (미 6:9).
(2) 에스겔은 "궁창에서부터 음성" 을 들었으며, 보좌 위에 앉으신 이로부터 음성을 들었다(25절). 천사들이 움직일 때, 그들은 "날개 소리를 내었고 그 날개 소리로 무심한 세상을 일깨우자 날개를 드리우고" 조용히 서 있었다. 이는 깊은 정적이 감돌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보다 잘 들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섭리의 음성은 말씀의 음성을 향해 인간의 귀를 열고 정리(廷吏)의 직분을 행하는 데 목적이 있다. 정리는 재판관이 판결을 내리는 동안 조용하라고 큰 소리로 부르짖는다. "들을 귀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땅 위의 시끄러운 소리는 "궁창에서부터 나는 음성" 에로 우리의 주위를 환기시킨다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고개를 돌린다 할지라도,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어떻게 피할 수 있으리이까!
하나님의 보좌의 이상(에스겔 1:26-28)
이 환상의 모든 다른 부분들은 이 부분에 대한 서론과 소개밖에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그 자신을 천사들의 주로써,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일의 절대적인 지배자임을 알려 주셨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이 예언자들을 통해서 약속하신 것이나 혹은 경고하신 것을 쉽게 추론할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이 그것을 완수하실 수 있다는 사실도 쉽게 알 수 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종들이며 인간들은 하나님의 도구들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계시는 예언자에게 주어졌으며, 그를 통해 교회에도 주어졌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생물들이나 바퀴들 보다 더 높은 것을 바라보아야 하며 영원하신 말씀으로부터 그것을 기대해야 하고 우리는 이 대목에서 그 영원하신 말씀에 대한 설명을 얻을 수 있다. 에스겔은 궁창으로부터 한 음성을 듣고 사도 요한처럼 그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쳐다보았는데 거기서 그는 인자 같은 이를 보았다(계 1:12, 13). 제 2위이신 성자께서는 영원히 그리고 모든 자를 위해 인성(人性)을 입기 전 때때로 사람의 모양을 입으셨다. 예언의 영은 그리스도의 영(벧전 1:11)과 예수의 증거(계 19:10)라고 불리운다.
1. 선지자가 본 그리스도의 이런 영광은 생물들의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있었다" (26절). 천사들의 머리는 주 예수의 발 아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천사들의 머리 위에 있는 궁창은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천사들과 능력들이 그(예수)에게 복종한다" (벧전 3:22).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전에 가지고 있던 구원자의 위엄과 주권은 그가 "천사들보다 조금 못하게 되었을" 때(즉 육신을 입으셨을 때), 그의 성육신 가운데서 그의 겸양을 확대시킨다(히 2:9).2. 선지자가 본 첫번째 것은 "보좌" 였다. 왜냐하면 신적 계시는 제왕적 권위로써 후원되고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좌위에 있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대해 신앙의 눈을 가져야 한다. 요한이 그의 환상 가운데서 발견했던 첫번째 것은 "하늘에 놓여 있는 보좌" 이었다(계 4:2). 그런데 그 보좌는 존경과 복족을 명령한다. 그것은 영광의 보좌요, 은혜의 보좌요, 승리의 보좌요, 통치의 보좌요, 심판의 보좌이다. "여호와는 그의 보좌를 하늘에 준비했으며," 또한 그의 아들(예수)을 "시온의 거룩한 산의 왕" 로 삼기 원하며 하늘에 베푸셨다.
3. 에스겔은 보좌 위에 있는 "인간의 형상" 을 보았다. 이것은 인간의 아들들에게 좋은 소식(good news)이며, 궁창 위에 있는 보좌는, 비록 그것이 거룩한 보좌일지라도,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로 가득 차 있었다. 다니엘은 환상중에서 왕국과 주권이 "인자(Son of man)와 같은" 자에게 주어지는 것을 보았으며, "그의 인자됨을(그가 인자이기 때문에) 인하여 심판을 수행할 권세가 주어졌다" (요 5:27)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이 환상에서도 이와 같은 사실이 나타난다.
4. 에스겔은 그(인자)를 보좌 위에 있는 왕과 심판자로서 보았다. 그는 비록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긴 했지만 인간의 영광 이상으로 나타났다(27절).
(1) 하나님은 번쩍이는 빛이신가? 그렇다. 선지자가 그를 보았을 때, 그것은 "호박 색" (한글 개역 성서:단쇠)로 보였고 사면으로 나는 광채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빛 가운데 거주하며 의복으로서 몸을 가리듯 빛으로써 그 자신을 가리시기 때문이다. 인자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그의 영광을 그의 인간성의 베일(veil)로써 가리울 때, 그 구원자는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얼마나 낮게 굴복(겸양)시켰나!
(2) 하나님은 "소멸시키는 불" 이신가? 그렇다. 그의 허리를 중심으로 해서 위쪽으로나, 아래쪽으로나, 모두 "불 같았다." 허리위에(이상의) 있는 불은 "단 쇠(호박 색)의 속과 주위" 에 있었다. 그것(불)은 안 쪽에 있었으며 감싸져 있었다. 허리 아래(이하)에 있는 불은 밖에 있었으며 열려져 있었다. 또한 그 불은 "사면으로 광채" 가 났다. 혹자는 전자의 것이 그리스도의 신적인 본성, 즉 "호박색" (단쇠) 안에 감추어진 것의 영광과 덕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것은 어느 사람도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것이며 볼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본성이라고 생각하는 후자의 것은 그들이 보았던 것의 영광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 영광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 1:14). 그의 광명은 햇빛 같고 광선이 그 손에서 나오니 그 권능이 그 손에 감취었도다(합 3:4). 인자(人子)가 여기에서 나타났던 그 불은, 유다와 예루살렘 위에 집행(실행)되어지기 위하여 준비되었으며, 적들을 삼키는 전능자의 불 같은 분노로부터 오는 심판을 의미하고 있다. 대담한 죄인들에게 있어서 "보좌 위에 앉으신 이의 저주와," "어린양(Lamb)의 진노" 보다 더 무서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계 6:16). 주 예수가 타오르는 불 가운데에서 나타나실 심판의 날이 오고 있다(살후 1:7, 8).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노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아들에게 입맞추는 것은 우리에게 관계된 일이다.
5. 보좌는 무지개로 둘려 쌓여 있다(28절). 그런데 이것은 성요한의 환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계 4:3). 보좌의 광채는 다양한 색깔이었으며, "비 오는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았다." 또한 그것은 위엄의 과시 같았으며, 매우 위대하게 보인 것처럼 그러한 자비의 표시였으며 매우 상냥하게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다시는 홍수로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며, "내가 무지개를 보고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창 9:16)고 말했던 은혜스런 약속의 확증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음의 사실을 의미한다. 즉 "보좌 위에 앉으신" 이는 "영원한 언약의 중보자" 이며, 그의 주권(지배)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 파괴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또한 그는 우리와, 우리의 죄로 인해서 받는 심판 사이를 중재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에게 있어서는 긍정이요 아멘이다. 이제 하나님의 진노의 불은 예루살렘을 파괴시켰으나 완전히 파괴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런 경우에 그가(레위기26장 42절에서)약속했던 것처럼 "무지개를 보고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환상의 결론을 생각해 보자.
1. 예언자는 이 환상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이것은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었다." 여기에서 에스겔은, 하나님의 초월적이며 순수한 본성을 떨어뜨리는 하나님에 대한 모든 천한 육신적인 생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 에스겔은 이것이 "여호와이다" 고 말하지 않고(왜냐하면 여호와는 볼 수 없는 분이기에), "여호와의 영광이었다" 고 말한다. 하나님(여호와)은 이 영광 가운데서 기꺼이 그 자신을 영광스런 존재로 나타낸다. 그러나 아직도 이것은 "여호와의 영광" 이 아니고,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 이며, 그 영광과 희미하게 유사한 것이다. 이것은 여호와의 영광과 꼭 같은 것이 아니고,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 이며, 여호와의 영광의 그림자이다. 그것은 "참 형상" 이 아니다(히 10:1, 2).2. 예언자는 그것(여호와의 영광)에서 어떤 감동(impressions)을 받았나? "내가 그것을 보고 곧 엎드렸다."
(1) 에스겔은 그것에(여호와의 영광) 압도당했다. 그것의 눈부신 광채는 그를 정복했으며, 그를 엎드리게 했다. 왜냐하면 "누구도(누가 감히 이 거룩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설 수 있겠는가?) 이런 거룩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설 수 없기 때문이다.
(2) 에스겔은 그 자신의 무가치한 명예에 대한 비천한 감정 가운데서 엎드렸으며, 그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무한한 거리를 깨달았다. 에스겔은, 그의 마음이 가득 채워져 있으며, 사로잡혀 있는,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두려움과 존경심이 증거로써 엎드렸다. 하나님이 기꺼이 그 자신을 우리에게 알릴 때, 우리는 그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위엄을 경배하고, 그의 자비를 간청하고, 자기 백성들의 자녀를 멸망시키려고 하는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게 하기 위하여 "엎드렸다."
3. 에스겔은 그 환상에서 어떤 교훈(지시)을 받았다. 에스겔이 보았던 모든 것은 그가 듣게 하기 위하여 그를 준비시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신앙은 듣는 데서 오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에스겔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문자(hieroglyphics)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말씀(words)으로써 가르침을 받기 때문이다. 에스겔이 말씀을 받기 위하여 "엎드렸을 때,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비천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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