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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예레미야의 고난 (예레미야 애가 3:1-20)

시편 103편의 표제는 본장의 앞에 매우 적당하게 덧붙여질 수 있다. "곤고한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하는 기도" 왜냐하면, 여기에서 쏟아지고 있는 불평은 매우 감동적이고 유창하기 때문이다. 그것에 관하여 상세하게 관찰하여 보자. 그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불평한다.

1. 하나님은 진노하신다. 이것은 공통의 원인이 되고 그 고통을 맛보게 한다(1절). "내로다." 유달리 고통을 당한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의 매로 인하여 고통을 민감하게 느끼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때때로 그의 백성들에게 진노하시는데, 그것은 잘라내는 칼로서가 아니라, 바로 잡기 위한 채찍으로서 불평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주의하자. 그것은 그들에게 현재는 슬픈 것일지라도 그 목적에 있어서 유익한 시련으로서 "진노의 매" 인 것이다. 이 매로 인하여 우리는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을 예기해야 한다. 우리가 이 채찍으로 인하여 보통 고난보다 더한 고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불평하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진노가 정당하고 고난은 온순하며 자비를 동반하는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2. 그는 당황하고 있고, 캄캄한 어둠 속에 처해 있다. 어둠은 괴로워하게 하고 당혹하게 한다. 위로와 방향 지시를 갈망하게 한다. 이 불평하는 자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2절). 하나님은 그의 섭리로 말미암아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건들의 연속으로 말미암아 "나를 이끌어 흑암에 행하고, 광명에 행치 않게 하셨으며," 내가 두려워하는 어둠에 행하게 하고, 내가 바라는 "광명에 행치" 않게 하셨다. 그리고(6절) "나를 흑암에 거하게 하시니, 흑암은 죽은 지 오랜 자의" 무덤과 같다. 그 곳은 아무도 그가 누구였는지, 무엇을 하였는지 알지 못하고 아주 망각된 곳이다.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 속한 이스라엘은 빛의 자녀라 할지라도 때때로 흑암에 행한다는 것이다.

3. 하나님은 그에게 대하여 적으로서, 공공연한 적으로서 나타난다. 하나님은 그의 편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깨달을 수 있을 때까지 "자주 자주 나를 치신다" (3절). "종일토록 손을 돌이켜 자주 자주 나를 치시도다. 나는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시 73:14). 하나님의 손이 돌이켜 우리를 계속하여 치실 때에 우리는 그의 마음도 또한 우리를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시험에 빠진다. 어느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호 5:14) "내가......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다" 고 하셨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말을 진실되게 하신다. "저는 내게 대하여 엎드려 기다리는 곰과 같으시며, 그의 심판으로 나를 놀라게 하며 은밀한 곳의 사자와 같으시다. 그러므로 내가 간 길이 어느 길이라 할지라도 나는 생명의 위험을 느꼈고, 나의 안전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적들을 향하여 쏘는가? 그러나 그는 교회를 핍박하는 자들을 쏘도록 정하여져 있는 활을 당겨서 이스라엘의 아들을 향하게 한다(12절). "나로 과녁을 삼으심이여." 나를 겨냥하고 나를 맞추려고 한다. "전통의 살로 내 허리를 맞추셨도다." 그 살은 치명상을 즉 내적인 상처를 준다(13절). 하나님은 그의 전통에 많은 화살을 갖고 계시며, 그 살은 빠르게 날아서 깊이 박힌다는 것을 주의하자.

4. 예루살렘은 몸, 마음 둘 다 심하게 고통받는 사람과 같다. 이 유대인의 상태는 지금 나이 많아 쪼그러든 사람과 적합하게 비교된다. 거기에는 약이 없다(4절).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살과 가죽은 쇠약하고 마른다. 나는 곧 무덤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나의 뼈를 꺾으셨고, 그러므로 나는 나를 구원할 수가 없다(15절). 나를 쓴 것으로 배불리시니, 이 재앙의 맛은 쓴 것이다." 하나님은 영혼에 접근할 수 있고, 쓰게 하실 수 있으므로 그 영혼의 모든 즐거움을 쓰게 하시는 것이다. 위(胃)가 불결할 때는 그 안에 있는 먹은 모든 것이 불결한 것과 같다. "쑥으로 취케 하셨으며," 나의 고통의 맛으로 나를 취하게 하셨으므로 나는 말하고 행동할 줄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이 나의 빵에 "조약돌" 을 섞으셔서 그로 인하여 "내 이가 꺾어진다" (16절). 그러므로 내가 먹는 것이 즐겁지 않고 살로 가지도 않는다. "재로 나를 덮으셨도다." 이것은 슬퍼하는 자들이 행동하는 것과 같다(어떤 것은 다음과 같이 읽혀진다). "하나님은 재로 나를 양육하셨다. 나는 재를 양식같이 먹으며" (시 102:9).

5. 예루살렘은 도망가거나, 구원받을 길을 분간할 수가 없다(5절). "나를 에우셨으며, 요새와 포열(砲列)이 포위된 성읍을 향하여 세워졌다. 열려진 한 길마저도 완전히 봉하여졌다. 담즙과 수고로 모든 면에서 나를 에우셨다. 나는 초조하고 안달이 나고, 피곤하여 도망할 길을 찾으려 하나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다" (7절). 나를 둘러싸서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포위되어졌을 때,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었다" 고 말하여졌다(눅 19:43). "나는 사슬에 매여졌다. 이름난 범죄자는 이중 족쇄(足鎖)로 채우고 또한 쇠를 짊어지우듯이 여호와는 나의 사슬을 무겁게 하셨으며, 또한(9절) 다듬은 돌을 쌓아 내 길을 막으셨다. 내 길을 가시로(호 2:6) 두를 뿐만 아니라, 관통할 수 없는 돌벽으로 길을 끊었으므로 나의 길이 굽게 하셨다. 나는 앞 뒤와 왼쪽, 오른쪽으로 나아갈려고 노력해보나 여전히 되돌아 오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가로 질러서 굽은 길로 행하게 하신 이는 바로 하나님이시고, 그들의 설계를 가로 지르고, 그들의 수단을 깨뜨리고서 고난의 굽고 좁은 길로 걷게 하시는 이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11절) "나의 길로 치우치게 하시며" 그는 나의 모든 협의를 분쇄하시고, 나의 계획들을 깨뜨려 버리셨다. 그러므로 나는 파멸이 강요되어졌다. "내 몸을 찢으시며" 그는 찢고 그리고 탈취하여 가셨다(호 5:14). 그리고 "나로 적막하게 하셨다." 모든 사회로부터 나를 탈취하고 내 영혼에서 위로를 빼앗으셨다.

6.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물리치신다(8절). "내가 진지하게 하나님으로 하여금 들으시게 하려고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나의 기도를 물리치시고,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귀는 그의 백성의 기도에 열려지고, 자비의 문이 그것을 노크하는 사람들에게 열려지는 것이 예사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들이 다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 에게까지도 닫혀졌다. 이렇게 하나님은 때때로 "그의 백성의 기도" 에게까지도 노하시는 것처럼 보인다(시 80:4). 그리고 그들의 상황이 응답하시는 유익뿐만 아니라 수리하시는 위로까지도 거절되었을 때는 참으로 통탄할 만하다.

7. 그의 이웃들은 그의 환난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14절). 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그들 중에 있는 모든 악한 자들에게 줄 공적인 심판과, 특히 예언자 예레미야의 슬픔을 가지고 그들 자신과 서로 서로를 즐겁게 한 악한 자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다." 나는 그들의 노래요, 그들이 연주하는 악기요, 그들의 침뱉는 통(욥 17:6)이요, 그들의 노리개이다. 마치, 로마는 불에 타고 있는데 네로는 거문고를 타는 것과 같다.

8. 그는 구원이나 구출에 대하여 절망하게 되어 있다. "주께서 나에게 평화를 빼앗으실 뿐 아니라 주께서 내 심령으로 평강을 멀리 떠나게 하신다" (17절). 그러므로 평강은 나의 힘이 닿는 곳에 있지 아니할 뿐 아니라 보이지도 아니한다. "내가 복을 잊어버렸음이여." 내가 복을 가졌던 때가 오래되고, 또 그것을 회복할 가망이 없으므로 나는 그 생각을 잊어버렸다. 나는 슬픔과 노예 상태에 익숙해 졌으므로 나는 기쁨과 자유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나는 사라져 버리고 결정나 버린 모든 것을 단념해 버리기까지 하였다.

"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나의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 (18절). 나는 하나님에게 내 자신을 더 이상 머무르게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심을 발견할 수 없고, 또한 나의 환난이 끝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나의 이익을 위하여 나타나심을 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내 상처는 고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며 하나님은 냉혹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의심없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의 의지가 연약한 것이다(시 77:10).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원한 힘" 이시고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든지 간에 하나님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 그 백성의 힘이시기 때문이다.

9. 슬픔이 고난의 기억으로 인하여 되살아나고 그 영향은 그가 번영하였던 것만큼이나 침울한 것이다(19,20절). "그는 불평을 잊기" 위하여 욥과 같이 애를 썼는가?(욥 9:27) 아! 그것은 소용없게 되어 있었다. "그는 고초와 재난, 쑥과 담즙," 모든 것을 기억한다. 그는 이렇게 그의 고난을 강조하여 말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고난에 대하여 그렇게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그의 고난을 회상할 때 그것은 무겁게 놓여 있었다. 재난은 그 자체가 고통이었었다. "나의 고통과 나의 범죄" 이것을 어떤 사람들은 나의 환난과 그 환난을 내게로 가지고 온 나의 죄라고 해석한다. 이것은 "고초와 재난" 속에 있는 "쑥과 담즙" 이었다. "고초의 잔으로 하여금 쓴 잔이 되게 한 것은 죄이다."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포위로 인한 모든 재난을 간직하고, 그들의 눈 앞에 아직도 불타는 예루살렘과 파멸이 어른거리어서 "시온을 기억하고 울었다." 아니 그들은 결코 "예루살렘을 잊을 수가 없었다" (시 137:1, 5).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니, 고난에 대한 감정으로 눌릴 뿐만 아니라 죄 때문에 쓰라려서 낙심이 된다. 우리의 고통과 재난에 대한 모든 기억 위에 있는 죄는 우리로 하여금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하고, 우리의 수치스러운 참회를 새롭게 하게 한다. 이렇게 우리는 과거를 바로 잡고, 미래를 예방하는 것으로 인하여 유익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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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게 주는 위로의 말 (예레미야 애가 3:21-36)

여기에서 구름은 흩어지고, 하늘은 개이기 시작한다. 앞 부분에서 불평은 대단히 침울하였으나 여기서는 기분이 변화되고 시온을 슬퍼하는 자들은 약간의 기쁨을 보기 시작한다. 그러나 희망에 있어서는 마음이 약해진다. 철저한 낙심으로부터 마음을 구출하기 위하여 여기에 회상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소망에 대한 근거를 주는 것으로(21절) 앞에 오는 것에 대하여 언급되고 지나간 것에 언급하고 있지 않다. 난외주에는 "심정에 회상한다" 고 되어 있다. 우리의 심정에 가진 것, 우리의 심정에 놓여 있는 것은 때때로 하나님이 그의 은혜로 그것을 사용할 기회가 준비되게 하기 위하여 우리의 심정에 그것을 떠오르게 하기까지 아주 잃어버리고, 잊어버려지는 것 같다.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으며 완전한 절망으로부터 구원된다." 다음에 그가 상기하는 것들을 보자.

Ⅰ. 그들이 당한 일들은 나쁜 것이지만 더욱 나쁘게 되지 아니한 것은 하나님의 자비 때문이라고 그들은 고백하고 있다. 우리는 "여호와의 노하신 매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나" 우리가 "멸절되지 아니한 것은 여호와의 자비이다" (22절). 우리가 재난 중에 있을 때 우리는 믿음과 소망을 고무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때리심과 동시에 또한 자비를 베푸시는 것을 관찰하여야 할 것이다. 당한 일들은 나쁘지만 그것은 사실은 더욱 나쁘게 되었어야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더욱 좋아질 수 있는 희망이 있다. 여기에서 보여지는 것은

1. 자비의 시내가 고백되었다. "우리가 멸절되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할 것은 하나님의 교회는 모세의 가시덤불이 타고 있으나 "멸절되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과거에 만난 곤경이나 현재 만날 수 있는 곤경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이 세상에서 시간의 종말까지 있을 것이다. 사람에게 "핍박" 을 받아도 하나님에게서 "버려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은과 같이 용광로 속에서 단련을 받으나 찌꺼기와 같이 "멸절되지 않는다."

2. 이 시내는 근원에까지 추적되었다. 그것은 "여호와의 자비들이다." 여기에 여러 가지와 풍성함을 의미하는 복수로서 자비들이 있다. 하나님은 다할 줄 모르는 무진장의 "자비의 샘" 이요, "자비들의 아버지" 이다. 우리는 모두 멸절되지 아니한 것은 하나님의 알뜰한 자비에 빚지고 있다는 것을 주의하자. 우리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멸절되었다. 그리고

Ⅱ. 그들은 그들의 깊은 고통 가운데서도 아직도 온유한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약 속의 진실하심을 경험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셨다고 몇 번이나 불평을 말한다(2:17, 21). 그러나 여기에서 그들은 그들 자신을 바로 잡고 다음 같이 고백한다.

1. 하나님의 긍휼은 다 없어지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의 온유하신 자비를 닫아버리신 것처럼 보이는 진노 중에서까지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다하지 않는다. 이 자비의 강은 넘쳐서 끊임없이 흐르고 결코 마르지 않는다. 아니 그것은 "아침마다 새롭다." 매일 아침 우리들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새로운 실례들을 경험한다. 그는 "아침마다 긍휼을 가지고 우리를 방문하신다" (욥 7:18). "아침마다 자기의 공의를 드러 내시며" (습 3:5), 우리의 위로가 끊어질 때에도 하나님의 긍휼은 끊이지 않는다.

2.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위대하다. 계약이 깨어진 것처럼 보인다 해도 아직도 계약의 충만한 힘은 계속 된다고 그들은 고백한다. 또한 예루살렘은 비록 파괴되어졌다 할지라도 "여호와의 성실" 하심은 "영원하시다." 우리가 아무리 힘든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어떤 불평하는 생각을 품어서는 아니되고 그래도 그는 동정적이고 성실하시다고 고백할 준비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에 주의하자.

Ⅲ.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충분한 행복이시며 또한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택하였고 다음과 같이 그에게 의존하였다. 즉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것은

1. "내가 세상에서 가진 모든 것, 자유나 생활이나 거의 생명 그 자체를 잃어버릴 때에도 나는 하나님께 대한 나의 관심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는 것이다. 땅 위에 있는 기업은 멸절할 것이지만 하나님은 영원한 기업이시다.

2. "내가 하나님께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한 나는 그것으로 족하다. 나는 내 모든 고통과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채워서 균형을 잡기에 충분한 것을 소유한다." 우리의 기업으로부터 무엇을 빼앗긴다 할지라도 안심이다.

3. 이것이 내가 의지하는 것이고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 나를 지탱시키는 모든 것들과 고무시켜 주는 것들이 내게서 없어질 때에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 영혼의 기업이 되게 하고, 우리의 기업으로서 그분을 이용하고 우리의 슬픔 중에서 그분으로부터 위로를 얻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라는 것에 주의하자.

Ⅳ. 하나님과 관계하는 이들은 그를 신뢰하는 것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왜냐하면

1. 그는 그를 신뢰하는 자에게 선하시기 때문이다(25절). 그는 모든 이에게 선하시다. "그의 온유한 자비는 그의 지으신 모든 것 위에 넘친다." 모든 그의 피조물은 그의 선하심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는 독특한 방식 속에 계신다.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도다." 재난이 길고 구원이 늦어질 때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을 기다리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롭게 돌아오시기를 기다려야 할 것에 유의하자. 우리가 믿음으로 그를 기다리는 동안 기도로서, 그를 찾아야 한다. 우리의 "영혼" 은 그가 발견되기까지 그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구함은 우리의 기다림이 계속되도록 도울 것이다. 이렇게 기다리고,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로우실 것이다. 그는 그의 놀라운 인애(仁愛)를 그들에게 보이실 것이다.

2. 그렇게 하는 자들은 그것이(참고 기다림) 그들에게 좋다고 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26절).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 좋다" (그것은 우리의 의무요, 또한 말할 수 없는 위로와 만족이 될 것이다). 바라는 길에 놓여 있는 곤란이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장차올 것을 바라는 것은 좋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불평없이 우리 자신을 불안하게 하지도 아니하고 하나님의 처분을 묵묵히 따르면서 고요히, 그리고 말없이 기다리는 동안, 오래 지체된다 할지라도 그것이 오기까지 기다리는 것은 좋다. "아버지여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만일 우리가 이 기도를 기억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이 결국에는 잘 성취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Ⅴ. 고통은 진실로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옳게 견디기만 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유익을 끼칠 것이다. 구원을 바라고 기다리는 것만이 좋은 것이 아니라, 잠시 동안 고통 아래 있는 것도 유익한 것이다(27절).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많은 청년들이 포로로 잡혀갔다. 그는 그 청년들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포로의 멍에를 짊어지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그들에게 말한다. 만일 그들이 그들의 상황에 자신들을 적응시키기만 하면 그리고 무거운 멍에가 그들 위에 놓여진 가운데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수고한다면 멍에를 메는 것이 그들에게 좋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명령의 멍에는 멜만 하다. 청년들이 젊었을 때 그 멍에를 메는 것이 좋다. 아무리 일찍 종교적이 된다 하더라도 너무 이를 수는 없다. 만일 우리가 젊었을 때에 멍에 아래에 종사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의무로 하여금 하나님께 열납되게 하는 일이고 우리 자신에게는 더 쉬운 일이 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멍에는 고통을 의미하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은 젊을 때에 이것을 짊어지는 것이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청년들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고, 진지하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멍에에 길들이지 아니한 황소와 같이" 거만하고 방종한 동안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떠나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참으로 젊을 때에 그것을 짊어지는 것이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어느 때 그 멍에를 짊어질 것인가? 예레미아 선지는 다음 구절에서 대답한다.

1. 우리가 고통 아래서 진지하고 조용할 때 우리가 "혼자 앉아서 잠잠하게 있을 때" 우리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의 처분에 불평하면서 또한 우리의 재앙을 불러오도록 자극하면서 불평하는 친구들 속으로 이리 저리 달리지 말자. 자기의 내면에로 돌아가서 혼자 앉아서 역경의 날을 생각하자. 그러면 극심한 시련 속에서도 평화로웠던 아론과 같이 우리의 입을 손으로 막고 불만스러운 모든 의심되는 생각들에 대하여 침묵하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우리 마음속에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고의적으로 멍에를 떨어내 버리지 말고, 하나님이 그것을 놓으실 때 참음으로 복종하면서 그것을 짊어진 사람들과 같이 멍에 아래서 조용하게 있어야 한다.

젊었을 때에 고통 중에서 자신들을 적응시키려는 사람들은 그들의 목을 멍에에 맞추고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하나님의 목적에 응답하고자 연구해야 한다. 그때 그들은 멍에를 메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연단한 자들에게는 의의 평화로운 열매를 맺을 것이기 때문이다."

2. 우리가 우리의 고통 아래서 겸손하고 인내할 때 고통 중에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는 표로서 "입에 그의 손을 놓을 뿐만" 아니라, 슬픔의 표로서 입을 티끌에 대는 사람, 죄을 기억함으로 부끄러워하고 자기를 혐오하는 사람, 완전히 자신을 삭제하고 개심한 자, 그리고 시편 72장 9절에서처럼 먼지를 핥기까지 패망한 자가 되어 끌려온 자는 멍에를 멤으로써 유익을 얻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희망에 대한 기대 속에서 대단히 겸손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을 얻기에 우리 자신은 철저하게 무가치한 것을 고백하면서 "혹시" 나 하는 마음으로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죄로 인하여 진실로 겸손하여진 사람들은 그들이 입을 티끌에 대기는 하지만 어쨌든 은혜를 통하여 좋은 희망을 얻어서 즐겁게 될 것이다.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게 행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그들이 그들의 입을 먼지에 댈 때 그들의 마음이 먼지에 가라앉지 않게 하는 어떤 용기를 얻는다면 그것을 자유로운 은혜의 탓으로 돌려야만 한다는 것에 유의하자.

3. 우리의 고통을 가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고 따뜻하며 용서하는 영혼이 될 때(30절) "그를 때리는 자에게 뺨을 대는 자," 되돌려 때림으로 갚기보다는 차라리 "다른 뺨을 돌려 대는" (마 5:39) 사람은 멍에로 말미암아 선한 것을 얻는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이러한 실례를 우리들에게 남겨 주셨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사 50:6) 경멸과 꾸지람을 견딜 수 있는 그 사람, 욕을 욕으로 갚지 아니하고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갚지 아니하는 그 사람, 그가 "수욕으로 배 불려질 때" 그것을 그 자신에게만 있게 하면서, 그것을 그에게 채운 사람들에게 되돌려 갚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쏟아내는 그 사람(시 123:4 의 2와 같이 그의 영혼은 교만한 자의 멸시로 넘치게 채워져 있었다)은 멍에를 견디는 것이 선하고 좋다고 하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멍에를 메는 것은 그에게 영적인 이익을 되돌려 줄 것이다. 결국 "시련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은 부끄럽지 아니하는 소망을 이루는 것이다."

Ⅵ.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괴롭힌 때를 따라서 시기에 적합한 위로를 가지고 그의 백성들에게 은혜롭게 돌아가실 것이다(31,32절). 그러므로 고난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심을 믿기 때문에 그같이 회개하고 인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는 복음적인 회개와 기독교적인 인내 둘 다에 크게 자극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 견딜 수가 있다.

1. 우리가 버려질 때에도 우리는 아주 인연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바로 잡는 것이 아들과 의절하는 것은 아니다.

2. 분별있는 위로가 끊겨지고 요구되는 구원이 주어지는 한동안 우리는 아주 버림을 당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말로 버려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영원토록 버리지 않을 것" 이기 때문이다. 우리와의 논쟁은 영구하지 않을 것이다.

3. 우리가 슬퍼하는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손길은 그 안에 있는 것이다. 슬픔을 초래하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것은 지혜롭고, 은혜롭게 명령된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그것은 잠간이다. 그것이 필요할 때 우리는 슬픔 속에 있는 것이다(벧전 1:6). 하나님은 슬픔을 주셨을지라도 세상은 우리를 구원하고 도울 것이라는 생각을 멀리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다. 슬픔을 주신 바로 그분이 은총을 갖고 오실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파멸한다. una eademque marus vulnus opemque tulit-즉 상처를 내신 그 같은 분이 그것을 치료하셨다. 그가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다(호 6:1).

4. 하나님께서 우리와 은혜롭게 관계하시기 위하여 돌아오시는 것은 우리의 공포를 따라서가 아니고 그의 자비를 따라서 오시는 것이다.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이다." 우리는 그만큼 무가치하기 때문에 풍부한 하나님의 자비밖에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로부터 기대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슬픔을 자아내게 하시는 것은 결코 이런 기대에 대한 실망이 될 수는 없다.

Ⅶ. 하나님이 우리를 슬프게 하신 것은 지혜롭고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하신 것이고, 그는 우리 재난을 기뻐하시는 것은 아니다(33절). 그는 진실로 "인생으로 하여금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신다." 그들의 모든 근심과 고통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원해서가 아니고, 본심으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이 뜻하는 것은,

1. 그는 우리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시도록 자극할 때에만 우리에게 고통을 주신다. 그는 은총을 내리시는 것같이 그의 불쾌하심을 분배하시지는 않으신다. exmero molu-즉 다만 그의 선하신 즐거움으로부터 만일 그가 우리에게 호의를 보이신다면 그것은 그것이 그에게 좋게 보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그가 우리에게 괴로운 일들을 나타내신다면 그것은 그 일들을 받기에 합당하고 또한 필요하기 때문이다.

2. 그는 괴로움을 주시기를 즐기지 않으신다. 그는 죄인의 죽음이나 성도의 환난을 기뻐하지 않으시며 마지못하여서 벌을 주신다. 그는 형벌하기 위하여서 그의 자리로부터 나오신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자비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피조물들의 고통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의 백성을 존중하시기 때문에 그들이 고통을 받을 때 그가 고통을 당하시고, 이스라엘이 고난을 당할 때 그의 영이 슬퍼하실 만큼 고난을 기뻐하는 것에서부터는 거리가 멀다.

3. 그는 그의 백성을 괴롭게 하시는 때라도 그의 백성에 대한 호의를 여전히 가지고 계시다. 만일 그가 "인생들이 근심하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실" 진대 더구나 그의 백성의 고난은 원치 않으신다. 그러하니 하나님은 그들에게 선하시다(시 73:1).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얼굴에서 분노와 그 손에 채찍을 보는 때에라도 그의 마음속에 사랑이 있는 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본다.

Ⅷ. 그는 그의 백성을 바로 잡기 위하여 그의 손으로 사용하시지마는 또는 사람을 그의 손에 들려진 기구로 사용하시기는 하지마는 그래도 그는 그들의 행함에 있어 그의 백성들에게 행하는 악과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34-36절). 행악자나 행악자들을 옳게 여기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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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7

환난당하는 자의 의무 (예레미야 애가 3:37-41)

앞 절에서 우리는 괴롭힘을 받는 자들에게 베풀어진 위로를 살펴보았었다. 그리고 위로의 단맛을 맛보았다. 여기에서는 괴로움을 받는 상태에서 우리가 위로를 기다리면서 행할 규정된 의무가 있다.

Ⅰ. 우리는 어느 때에라도 개인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우리에게 닥친 모든 재앙 중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고 깨달아야 한다(37,38절). 여기에는 우리가 고난 중에서 우리의 영혼을 조용하게 하고 거룩하도록 도울 위대한 진리가 놓여져 있다.

1. 사람의 행동은 무엇이나 그것들을 다스리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만일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하랴?" (어떤 일을 설계하고 성취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논을 따르지 아니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또한 위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면 어떤 권력이나 성공도 가질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은 그의 길을 궁리한다." 그는 계획하고 하려고 한다. 그는 말하기를 자기는 그렇게 할 것이라고 한다(약 4:13). 그러나 그가 계획한 것과는 다르게 "여호와께서 그의 걸음을 지도하신다." 그리고 그가 계획하고, 기대했던 것은 먼저 하나님의 손길과 그의 의도가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지 못하면 성취되지 않는다(시 16:9; 렘 10:23). 갈대아인은 말하기를 그들이 예루살렘을 파괴하리라 하였고, 그것은 이루어졌다. 이는 그들이 그것을 말한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것을 명하셨고, 그들에게 그것을 하도록 위임하셨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사람은 다만 위대하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기계일 뿐이고, 이 낮은 세계의 정부에서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일하며 하나님 없이는 그들의 어떤 계획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유의하자.

2. 사람의 기업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명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즉 높으신 자의 입으로부터 화와 복이 나오지 아니하느냐? 그렇다. 확실히 화와 복은 하나님께로서 나온다. 원문에 있어서는 더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 -즉 이 화와이 복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하느냐?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정하시고 명하신 것이 아닌가? 그렇다. 확실히 그러하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화해를 이루기 위하여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 보편적인 진리를 특별히 적용하여야 한다. "내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욥은 그 같이 주장하였다. 우리가 건강한가? 또는 병들었는가? 부요한가? 가난한가? 우리의 설계는 성공하고 있는가? 방해당하고 있는가?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다. "모든 사람의 판단은 그로부터 나온다. 주께서 주시고? 또한 거두신다." 그는 태초에 그가 하신 것처럼 빛도 짖고, 어둠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생각의 산물이라는 것에 주의하자. 되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손으로 하신 일은 그 입의 말씀과 일치한다. "그가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그렇게 쉽게 효과적으로 그의 모든 목적은 이루어진다.

Ⅱ. 우리는 어느 때에라도 우리 위에 놓여진 고통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불화하여서는 안 된다(39절). "살아 있는 사람이 어찌 원망하랴?" 여기서 예언자는 그가 앞 장에서 불평한 것으로 인하여 자기 자신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서 그는 하나님이 몰인정하고, 엄격하신 분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말한다. "나는 노하여지기를 잘하는가? 왜 나는 이렇게 안달이 나는가?" 급하게 하나님께 대하여 투덜대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꾸짖지 않으면 안 된다.

앞에 나온 구절에서 그가 주장한 하나님의 통치와 우주적인 섭리라는 교리로부터 그는 이 결론을 이끌어낸다. "살아 있는 사람이 어찌하여 원망하랴?"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에 대항하여 우리는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시 39:9). 그들의 고난을 비난하는 그들은 그것을 그들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을 질책한다. 포로에서 고난당하는 이들은 그들의 모든 고난에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의할 것은 우리의 불평(호소)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대항하여 불평을 내놓아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로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여기에서 강조된 이유는 매우 분명하게 알 수 있다.

1. 우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 자신을 사람으로 나타내 보자. 사람이 원망할까? 사람! 우리는 사람이다. 사람은 이성으로 행동하여야 한다. 사람은 위를 보고 앞을 보아야 한다. 이 두 방법은 우리의 불평을 잠잠하게 하기에 충분한 생각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우리는 사람이다. 그들을 손상시키는 모든 것들 때문에 울부짖는 아이가 아니다. 우리는 사람이고, 신이 아니다. 종속하는 자요, 주(主)가 아니다. 우리는 자신이 주인이 아니요, 자신을 만든 이가 아니다. 우리는 유한하다. 우리는 순종하고 복종하여야 한다. 우리는 사람이고 천사가 아니다. 그러므로 천사와 같이 고난으로부터 자유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슬픔이 없는 세상의 거민이 아니고, 슬픔 이외에 아무 것도 없는 이 세상의 거민이다. 우리는 사람이고, 마귀가 아니다. 우리는 마귀와 같이 비참하고, 도움이 없고, 소망이 없는 상태에 있지 아니하고, 그들이 갖지 아니한 우리 자신을 위로할 무엇을 가지고 있다.

2. 우리는 살아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날마다 죽기는 하지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통하여 아직도 우리는 살아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원망하리요?" 아니다. 인간은 삶의 어떤 재앙이나 무거운 짐으로 인한 불평보다도 삶을 인하여 감사할 많은 이유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목숨은 연약하고 몰수된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살아 있다. "살아 있는 자, 살아 있는 자, 그들은 찬양" 하고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사 38:19). 생명이 있는 한 거기에는 희망이 있다. 일들이 잘못 되었다고 해서 원망하는 대신 우리는 그것들이 더 좋아질 것이라고 하는 희망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고무할 것이다.

3. 우리는 죄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원망하는 것은 바로 우리 죄의 형벌이다. 아니 그것은 우리의 불의가 받아야 할 것 보다는 훨씬 적다. 우리는 우리의 고난에 대하여 원망할 이유를 거의 가지지 못한다. 하나님은 약하고 비이성적인 사람의 폭력을 사용하여 그 자신의 목적을 수행하시지마는 그의 압박받는 백성이 대대로 생각했던 것처럼 폭력을 장려하시지는 않는다(합 1:13).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나이까?"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의 적들에게 두 가지 방법으로 상처받고 압박받는다. 그리고 예언자는 그 둘 중 어느 하나도 하나님은 찬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증한다.

(1) 만일 사람이 군사력으로 그들을 해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찬성하지 않으신다. 그는 "세상에 모든 갇힌 자를 발로 밟지 않으시며" 갇힌 자의 부르짖음에 주목하시고, 또한 사람이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을 승인하지 아니하신다. 아니 그는 그것을 불쾌하게 여기신다. 눌린 자들을 짓밟는 것이나, 사로잡히고 곤경에 빠진 자들을 짓누루는 것은 야만스런 것이다.

(2) 만일 사람이 법이라는 미명을 붙여서 그들을 상해한다면, 법의 집행이라는 것으로 가장하고서 만일 그들이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여" 무엇이 그의 정의인지 알 수 없게 한다면 또는 정의에 이를 수 없다면 그들을 구제할 길이 없다. 만일 그들이 "사람의 송사를 억울케 하면," 그리고 잘못된 결정을 하고, 거짓 판단을 하면 그들로 하여금 다음 사실을 알게 하라. 그 하나는 하나님이 그들을 보신다는 것이다. "지극히 높으신 자의 얼굴 앞에서" (35절) 그것은 하나님의 통찰 안에 있고, 그의 눈 아래 있으며 하나님 을 대단히 불쾌하게 하는 것이다. 그들은 사실이 그러한 것을 알 수밖에 없으며, 그러므로 그들이 그것을(잘못된 재판)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도전인 것이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자이시다." 그들은 가장 높은자보다도 더 높으신 이가 감찰하신다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그들이 지배하는 자들에 대한 자기들의 권위를 남용함으로써 자기들을 다스리는 지극히 높으신 자의 권위를 경멸한다(전 5:8). 그 둘째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행하는 것을 승인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이는 표현된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암시한다. 재판을 굽게 하고 송사를 억울케 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중대한 모독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바로 잡기 위하여 그들을 사용하신다 할지라도 그는 곧바로이든지 나중에 이같이 행한 자들에게 엄격히 계산하실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는 이들이 잘 되는 것을 한동안 허락하고, 그리고 이들을 통하여 그의 목적을 수행하신다 할지라도 그는 이들의 악행을 승인하지 않으신 다는 것에 유의하자. 그러므로 의인은 주로부터 연단을 받기는 하지만, 세상과 함께 저주를 받지는 아니할 것이다.

Ⅲ. 우리는 우리에게 괴로움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도하심에 응답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이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고, 또한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려는 것이다. 고통이 우리 위에 놓여지는 것은 두 가지 뜻이 있다.

1. 우리 자신에 대한 심각한 성찰과 우리 과거의 삶에 대한 반성.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찾고, 시험해 본다==search and try)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 자신을 도피시키고, 숨겨서 변장하고 있는 범죄자를 찾아내고, 그 다음에 죄를 범했는지 아닌지를 시험해 본다. 양심으로 하여금 찾고, 시험하는 두 가지 일을 하게 하라. 그리고 양심으로 하여금 신실하게 다루고, 부지런히 찾아보게 하고 공평한 심판을 하도록 위임하라. 우리의 행위를 시험해 보자. 그것들로써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자신이 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감사할 수가 있다. 우리 자신의 사악이 우리를 징계한다(잠 19:3).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다투어야 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옳으시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의 통치자이다. 그는 불복종을 응징하여 그의 통치하시는 명예를 지속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고난을 받는가?" 그러할진대 원망하지 말자. 우리가 하여야 할 다른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불평하는 대신에 회개하여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화해되어진다는 증거로서 우리는 그의 거룩하신 뜻에 우리 자신을 조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벌을 받는가?" 그러므로 복종하는 것이 지혜요, 채찍에 입맞추는 것이 지혜다. 만일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께 반대하여 걸음을 걷는다면 그는 우리를 일곱 번도 더 벌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판단하실 때, 그가 이기실 것" 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그에게 우리 자신을 조화시키면 우리는 우리의 희미한 소원으로서가 아니고, 우리의 걸음걸이로 말미암아 한 특별한 걸음에 의해서가 아니고, 우리들의 방식들, 우리가 목적하는 것들, 우리가 나아가는 법칙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의 성질들을 판단하는 목적을 겨냥하고 찬성할 수 있으며, 그 목적들 또는 그 규칙들을 향한 우리의 삶의 기질들을 찬성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상태를 판단해야 한다. 우리의 상태를, 우리가 고통 중에 있을 때 우리의 행위를 생각하는 것은 시기에 적합한 일이다(학 1:5). 신통치 않은 것은 회개하고, 미래를 위하여 고치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고난의 목적에 응답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공적인 재앙의 시대에 우리의 할 일은 우리 자신의 행위를 찾고, 시험하는 일임에 반하여 다른 사람의 행위에 대하여 헐뜯고, 그들을 비난하기가 쉽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할 일이 얼마든지 있다. 우리 각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무엇을 하였는가? 나는 공적인 화염에 무엇을 기여하였는가?" 그러면 우리 각자는 하나를 고칠 수 있고, 그 후에는 모두가 고쳐질 수 있는 것이다.

2. 하나님께 대한 성실한 회개.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를 싫어하신 하나님께로 그리고 우리가 떠나가버렸던 그 분에게로, 우리를 소유한 분이요, 통치하시는 분인 하나님께로 회개와 개혁으로 말미암아 돌아가자. 우리는 그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를 저버린 이후 그는 결코 우리와 함께 잘 있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이제 그에게로 돌아가자." 이것은 앞의 부분을 수반하며 그의 결과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악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하여 "우리의 행위를 조사"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다윗이 취한 방법이었다(시 119:59). "내가 내 행위를 생각하고 주의 증거로 내 발을 돌이켰사오며."

Ⅳ.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헌신의 정염(情炎)으로 우리의 지극한 사랑과 봉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41절). 우리가 괴로움 중에 있을 때

1. 우리는 우리 위에 무한히 높으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쳐다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논의의 여지없이 우리 위에 주권을 가지신다. "하늘이 다스리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더불어는 다투게 되어 있지 않고, 복종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2. 우리는 그로부터 자비를 받을 것을 기대하고, 믿으면서 그에게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에게 "우리의 손을 들자" 속에 암시되어 있기 때문이다(기도할 때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몸짓, 때로는 이것 대신으로 시 141:2 을 사용하기도 한다. "나의 손드는 것이 저녁 제사같이 되게 하소서."). 그것은 그의 자비를 구하는 것과 그 자비를 받을 우리의 준비를 의미하는 것이다.

3.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기도와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말로서 우리의 정신을 쏟아내어야 할 때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들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그 속에서 그리고 다른 예배에서 보시는 것은 마음이다. 마음없이 드리는 희생이 무슨 유익이 있는가? 만일 내부적인 느낌이 외부적 표현에 다소라도 일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만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고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같이 하나님께 향하여 영혼을 드는 것이다(시 25:1). 그리고 하늘에서 영원히 하나님께 함께 있기를 원하는 영혼을 자극하는 헌신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그리로 가는 길을 배우고, 그 길에서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3:38 없음.

 

3:39 없음.

 

3:40 없음.

 

3:41 없음.

 

3:42

하나님께 호소함 (예레미야 애가 3:42-54)

불평없는 우리 자신을 꾸짖는 것보다도 불평으로 인하여 우리 자신을 꾸짖는 것이 더욱 쉽다. 예언자는 마치 그가 2장의 앞 부분에서 그의 불평(원망) 때문에 자신에 대하여 언급한 것처럼 살아 있는 사람은 원망을 해서는 안 된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비온 뒤에 구름이 다시 돌아오고, 상처에는 다시 피가 흐른다. 큰 고통이 고난받는 영혼에게 중용을 이루기 위하여 취하여지지 않으면 안 된다.

Ⅰ. 그들은 그들의 괴로움 중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고백한다(42절). "우리가 범죄하고 패역" 하였나이다. 우리가 고난에 처할 때는 우리가 죄를 범한 때문에 우리 위에 무거운 짐을 올려 놓으신 하나님을 정당하다고 시인하는 적합하다. 죄는 범죄를 부르고 범죄는 패역을 부르니 너는 그것을 잘못 부르지 말라. 이것은 그들이 그들의 행위를 찾고, 시험해 본 결과이다. 그들이 그들의 행위를 조사하면 할수록 그들이 더욱 그러한 것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Ⅱ. 그들은 그들이 눌리고 있는 고통에 대하여 불평한다. 그것에는 하나님께 대한 비난이 없지 아니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모방하여서는 안 되고, 날카로운 판단 아래서 항상 그분을 높게 친절하게 생각하고 말하여야 한다.

1. 그들은 하나님의 불쾌해 하심과 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불쾌하심의 표정에 대하여 불평한다. 그들은 회개하였다(42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는 사하지 아니하셨다." 그들은 죄 용서에 대한 보증과 위로를 갖지 못하였다. 죄로 인하여 그들에게 임한 심판은 옮겨지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이 잘못이었다. 이 잘못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혼이 버림을 당하고 불안해 있을 때 범하는 일반적인 잘못이다. 그들의 경우는 참으로 가련하였다. 그러나 "당신은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셨나이다(43절)" 하고 그들은 불평하는 것이다. 그들의 적들은 그들을 학대하고 살육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나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다만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기구일 따름이었다. "우리는 당신이 우리를 보호하고 구원해 주시기를 기대하였지만 당신은 우리를 군축하시고 살육하셨나이다." 그들은 그들과 하나님 사이에는 간막이 벽이 있다고 불평한다. 그리고 그것은

(1) 그들에게 내려오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운다. 그들에게 내려오는 하나님의 은혜의 광선은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이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진노로 스스로 가리우시고, 그래서 우리의 영광은 숨어 버리고 없어졌나이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노하시고,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이전에 생각되어졌던 것같이 빛나는 백성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또는 "당신은 우리를 매장된 사람이 덮여지고 잊어 버려지는 것처럼 가리우셨나이다."

(2) 그것은 그들의 기도가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것을 가리운다(44절). "주께서 구름으로 스스로 가리우니" 그것은 하나님이 성전을 점유하셨던 그 빛난 구름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배자들을 그에게로 가깝게 이끌게 하였던 구름이었다. 이 구름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강제로 멀리 서게 하였던 시내산에 내린 구름과 같은 것이다. "이 구름은 대단히 두껍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그 속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기도는 상달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들어주시는 분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주의할 것은 시련이 길어지면 기도하는 사람들에게까지도 때때로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계시는가 안계시는가 하고 의심하도록 시험이 들어온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은 계시고, 기도를 들으신다고 믿었던 것이다.

2. 그들은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이웃의 모욕과 꾸지람과 치욕에 대하여 불평한다(45절). "당신은 우리를 2층에서 쓰레기 더미에 내 던져진 진개와 폐물처럼 만드셨나이다." 사도 바울은 사도들의 고난에 대하여 설명하는 중에 이것을 언급한다(고전 4:13).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우리는 열방 가운데서 모든 사람에게 폐물 또는 찌꺼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 중 가장 천한 자로서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맛 잃은 소금과 같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우리의 적들이 우리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고(46절) 우리를 삼키기 위하여, 우리를 비난하기 위하여, 또는 그들은 우리의 희락이라고 비소하여 말하기 위하여 우는 사자와 같이 입을 크게 벌렸습니다." 이 불평들은 우리가 앞에서 해설한 것이다(2:15, 16). 저급하고, 심술궂은 사람들이 존귀한 사람들이 깊은 비탄에 빠졌을 때 계속 헐뜯고 지껄여대는 것은 보통 있는 일이라는 것에 유의하자. 그러나 그들은 죄로 인하여 이것을 자초하였다. 만일 그들이 그들 자신을 수치스럽게 만들지 아니했다면 그들의 적들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도 그들을 버려 사람들이 그들을 버림받은" 은(銀)이라고 불렀다.

3. 그들은 그들의 적들이 행한 비통스러운 파괴에 대하여 불평한다(47절). "두려움과 함정이 우리에게 임하였도다. 적들은 공포로 우리를 두렵게 할 뿐 아니라, 술책으로 우리를 이기고, 우리에게 대하여 복병을 놓아서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리고는 잔해와 멸망만이 있을 뿐이요, 나의 성읍의 모든 여자들(51절) 곧 내 백성의 딸의 파멸만 있을 따름이었도다" (48절). 그들의 얼마는 덫에 걸린 새처럼 적들의 먹이가 되어 추적을 받았다. 사람들이 "쫓았다" (52절). 숲에서 숲으로 쫓겨 기진맥진하여진 "새와 같이" 사울이 다윗을 "새와 같이" 사냥하듯이 "나의 대적이 된 자가 나를 심히 쫓도다." 이렇게 그들의 박해자들의 증오는 쉼이 없고, 또한 아무 이유도 없이 그렇게 하였다. 그들은 아무런 자극을 받지 아니하고도 "무고히" 그들을 박해하였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할지라도 그들은 의롭지 아니하였다. 다윗은 때때로 "무고히 그를 미워하는 자" 들로 인하여 불평한다. 또한 그리스도와 교회의 적들도 이러하다(요 15:25). 그들의 적들은 그들이 완전히 멸망하기까지 그들을 추적하였다(53절). "그들이 내 생명을 끊으려고 나를 구덩이에 넣고," 그들은 밀폐되고 어두운 감옥에 그들의 포로를 감금하였다. 그곳은 말하자면 그들이 산 자의 땅에서부터 베어짐을 당한 곳이요, 또는 나라와 왕국이 침몰되고, 그들의 생명과 존재가 사라진 곳이요, 말하자면 저들이 그들을 "구덩이" 와 무덤에 "던지고", "그 위에 돌을 던진 곳이라." 이와 같이 그들은 "무덤 문에 돌을 굴려" 막곤 했던 것이다. 그들은 유대민족을 죽여 매장되어 부활의 가능성이 없는 것의 상징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에스겔은 "죽고 마른 뼈들이 가득한 골짜기" 의 환상 가운데서 그것을 보았다. 그들의 파멸은 죽은 자의 매장에 비교될 뿐 아니라, 산 사람이 물 속에 침몰된 것에 비교되었다. 그는 물 속에서 산 사람이 되기를 바랄 수는 없는 것이다(54절). 고난의 "물이 내 머리에 넘치나이다." 대홍수가 그들을 완전히 이기고 압도하였다. 갈대아 군들이 "물의 쏟아짐" 같이 일시에 그들을 습격하고, 그 물은 그들의 "머리 위에" 넘칠 만큼 대단히 높이 솟아 올랐다. 그들은 걸어서 건널 수 없다. 헤엄칠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피할 수 없이 침몰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고난은 때로 그들이 믿음을 위한 발판을 발견할 수도 없고, 어떤 위로를 받을 만한 기대를 가지고 물 위에 그들의 머리를 내어밀 수도 없을 정도로 그들을 압도한다는 것이다.

4. 그러므로 그들은 과도한 그들의 슬픔과 공포에 대하여 불평한다.

(1) 고난받은 교회는 눈물 속에 빠지고 예언자는 그 교회 때문에 운다(48,49절). "내 눈에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그들은 그렇게 많이 울었다.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그들의 울음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들의 정신적 고통은 완화됨이 없었다. 극단적인 심신의 불안은 계속되고, 좀 더 나은 날이 없었다. 고통은 더 추가 되었으니(51절) 곧 "내 눈이 내 심령을 상하게 하는도다. 내 눈이 보는 것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는도다. 내가 성읍과 마을의 잔해를 보면 볼수록 나는 더욱 슬퍼지는도다. 내가 어느 방면을 본다 할지라도, 나의 성읍의 모든 여자를 인하여, 어미 성읍인 예루살렘에 비하면 딸들과 같았던 근처의 모든 성읍을 보는 것까지도 내 슬픔을 새롭게 할 뿐이로다."

오! 우는, "내 눈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도다." 슬픔을 토해내는 것이 평안케 해 주는 대신에 오히려 슬픔을 증가시키고, 더욱 격앙시킨다. "오, 내 눈이 내 영혼을 녹이도다." 내 영혼이 울며 세월을 보낸다. "내 눈이 슬픔으로 인하여 쇠약하여질 뿐 아니라 내 영혼과 내 생명이 슬픔으로 쇠잔하여진다" (시 31:9, 10). 크고 오랜 슬픔은 그 영혼(정신)을 지쳐 버리게 하여 많은 노인 뿐 아니라 많은 청년들까지도 무덤으로 내려가게 한다. 예언자는 "나는 나의 성읍이 모든 땅들보다도 더욱 운다(난외주에는 그렇게 표현하였다)고 했다." 그는 다정다감한 여성들보다도 더 슬퍼하였던 것이다.



(2) 교회는 슬픔뿐만 아니라 보다 더 지독한 공포에 압도된다. 그리고 모든 것은 멸절된 것으로 포기한다(53절). "내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제는 멸절되었다 하도다. 나는 파멸되었고, 복구할 희망이 보이지 않으며 나는 죽은 자와 같다." 일반적으로 버림받은 사람들은 그들이 아주 멸절된 것으로 스스로 생각하게 되는 시험에 빠진다는 것에 주의하자(시 31:22; 요 2:4).

5. 이 슬픈 불평의 호소 속에 여기 하나의 위로의 말이 있다. 이 말로 말미암아 그들의 경우는 그들이 불평했던 것처럼 모든 것이 그렇게 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나타난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시기까지 이렇게 계속 울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을 암시한다.

(1) 고통 가운데 있는 그들을 주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의 모든 불평을 시정하는데 효과적일 것이라고 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만일 우리의 고통에 무관심하던 것처럼 지금은 구름으로 자기를 가리우신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신다면 모든 것은 잘될 것이다. 만일 그가 우리를 살피시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시 80:19; 단 9:17). 이 경우와 같이 나쁜 사태도 하늘로부터 은혜로운 살피심이 있으면 모든 것이 바로될 것이다.

(2) 그들은 적어도 하나님이 그들을 은혜롭게 살피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대하였었다. 아니 그들은 그것을 그의 뜻이 승인하신 것으로 여기었다. "그가 다투시기는 하지만, 비록 우리가 그의 다투심을 받을 만하기는 하지만 영원히 다투지는 아니하실 것이다."

(3) 그들이 울기를 계속하고, 기다리기를 계속하는 동안 그들은 하나님 이외의 어떤 다른 손으로부터 경감되거나 구원받기를 기대하지도 아니하였고 또 그렇게 하지도 아니하였다. 은혜의 회복 이외의 다른 아무 것도 그들을 위로할 수 없을 것이고 그가 살피시기까지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 줄 자가 없을 것이다. 지금 시내같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들의 눈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기까지 그들의 주 하나님을 기다릴 것이다(시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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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자비를 발견함 (예레미야 애가 3:55-66)

우리는 이 전장을 통하여 예언자의 가슴속에서 감정과 믿음, 또 공포와 희망 사이의 투쟁을 관찰할 수 있다. 그는 불평을 하고 그리고 그 자신을 위로한다. 시편 42편과 같이 자신을 위로하고 그리고 다시 불평을 한다. 그러나 거기에서와 같이 여기서도 믿음은 최후의 말을 얻고 정복자로 실현된다. 이 구절에서 그는 어떤 위로를 가지고 결론을 맺는다. 여기에는 그가 자신을 위로하는 두 가지가 있다.

Ⅰ. 그는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한다. 이것은 공적인 고난에 대하여 그 자신을 고무한 예언자의 개인적인 경험에 돌릴 수도 있다. 특별한 성도를 적당한 시기에 구원하신 그는 일반적으로 교회를 구원하심에 실패하지 않으실 것이다. 또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헛되지 아니하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유대인 중에 있는 남은 선한 백성일 수도 있다. 예언자와 그의 경건한 친구들은 세 가지 일에 있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선하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1.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다. 진노의 구름으로 인하여 그들의 기도가 상달할 수 없는 것 같았음을 두려워하게 되어 있었지만(44절) 그들은 다른 방법으로 두 번째의 생각으로서 적어도 더 깊은 시련으로써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는 것을 발견하였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었다. "너희는 나를 헛되이 찾지 말라." 그들이 깊은 구덩이에 있을 때 마치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산 자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55절). 그들의 울음이 기도를 방해하지 않았다. 우리가 깊은 구덩이에 버려졌다 할지라도 우리는 거기서부터 지극히 높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게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다는 것을 유의하라. 고래 배속에서의 요나와 같이 "내가 깊은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시 130:1). 하나님은 깊은 함정에서 드리는 그들의 기도를 들으실 수 있었다. 그렇다. 사실 그러했다. "당신이 나의 음성을 들으셨사오니." 어떤 사람들은 다음 말을 깊은 감사함에 대한 고백으로 번역한다. "당신은 나의 호흡에" 나의 부르짖음에 "당신의 귀를 숨기지 아니하시고." 원본에는 그런 해석의 의미도 포함할 것이다. 우리는 거기 더하여 그것을 탄원으로서 읽는다. "당신의 귀를 숨기지 마옵소서." 깊은 구덩이에서라 할지라도 우리가 그에게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우리의 소리를 들으심은 그가 어떠한 때라도 그의 귀를 감추지 아니하실 것이라고 하는 희망을 우리에게 고무하는 것이다. 그가 호흡을 어떻게 기도라고 부르는가를 관찰하자.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께 향하여 호흡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를 쫓아서 기도한다. 기도는 탄원으로 자비한 공기를 빨아들이고, 찬양으로 그것을 되돌려 보내는 중생한 사람의 호흡이다. 그것은 영적 생활의 증거요 지속이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나의 숨을 헐떡거림으로 읽는다. "내가 숨을 거둘 것 같을 때, 그리고 나는 나의 마지막을 호흡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당신은 내 고통을 지각하셨습니다."

2. 하나님은 그들의 공포를 평안하게 하셨다(57절).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당신은 당신의 나타내심으로 나를 은혜롭게 안심시키고, 내 가까이 당신을 보게 하셨으나 나는 당신을 나로부터 멀리 계신 것으로 생각하였었나이다." 우리가 순종의 길로 하나님께 가까이할 때 그가 자비의 길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는 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볼 수 있을 것에 유의하자.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이것은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하나님의 예언자의 예언이다(사 41:10, 13, 14). 이것은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들을 예방하는 선지자의 예견의 언어이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을 조용하게 하고 그들을 순하게 하는 선지자의 언어이다. 그의 예언은(언어), 재난 중에 있으면서도 그래도 아직 하나님의 백성인 그 영혼들에게 대하여 선지자의 영의 증언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3. 그는 이미 그들에게 대하여 호소하기 시작하였다(58절). "주여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을 펴셨고" (이것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내 생명을 속하셨나이다. 내 생명을 취하여간 이들의 손에서부터 내 생명을 구원하셨나이다. 금방이라도 삼켜질 것 같은 때에 내 생명을 그들의 전략물로 주는 대신에 나에게 주셨나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에게 대하여 그는 그들을 위하여 아직도 더 호소할 것이라고 고무하는 것이다. "당신이 죽음에서부터 내 영혼을 구원하셨나이다. 그러므로 나의 발을 타락에서부터 건지실 것입니다. 당신이 내 생명의 원통을 펴셨습니다. 그러므로 내 다른 원통한 것들도 펴실 것입니다."

Ⅱ. 그는 하나님의 정의에 대하여(그 심판을) 그리고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대하여 호소함으로써 그 자신을 위로한다.

1. 그는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에 대하여 호소한다. 그의 적들은 사악하며 악독한가?(59절) "여호와여, 나의 억울을 감찰하셨사오니, 나는 전혀 잘못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많은 고난을 당하였음을 아시나이다." 모든 것을 아시는 그는 다음의 것들을 아셨다.

(1) 그들이 그에 대하여 가진 악의, "당신은 모든 그들의 복수를 보셨나이다. 그들이 마치 내가 그들에게 행한 어떤 큰 상해를 인하여 보복이나 하는 것처럼 나에게 해악을 행하기를 원하고 있음을 아시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것들을 유의하자.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대하여 마음속에 가진 모든 복수할 생각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의 포악과 조심하는 일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우리는 보복하려는 생각을 허락해서는 안 되며 그것이 머무르게 해서도 안 된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들이 이유없이 그들의 마음속에 우리에게 복수하려는 모든 생각을 가진 것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그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맡겨야 한다.

(2) 그들이 그에 대하여 해악을 행하려고 하는 음모와 궤계. "저희가 내게 보수하며 나를 모해함은 주께서 다 감찰하셨나이다(60절). 또 다시 저희가 나를 훼파하며 모해하는 것을 들으셨나이다(61절). 그들이 나를 해하려고 궁리하고 모해하는 것 이 두 가지가 다 말로나 행위로나 보이든지 안보이든지 간에 그것은 당신에게 알려져 있나이다. 아니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다 할지라도 그들이 나에게 대하여 종일 모해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파악되어지고 감찰되어지도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드러나고 벗겨진다. 교회의 적들이 가장 깊이 감춘 비밀한 계약이라도 교회의 하나님에게 완전하게 알려지고 그에게는 그들이 아무 것도 감출 수 없다는 것을 유의하자.

(3) 그들이 그에게 한 모욕과 비방. 그들이 그에게 대하여 업신여겨 말한 모든 것과 그들이 비난하여 말한 모든 것을 하나님은 아신다. "그들이 훼파하는 것을 들으셨나이다(61절). 그들이 나의 인격에 대하여 나쁘게 말한 모든 말들과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로 나를 공격하는데 사용한 모든 것들과 그들이 나를 가증하고 하찮게 만드는데 사용한 모든 방법들과 일어나 나를 치는 자의 입술(62절)을 하나님은 아신다. 그들이 나에 대하여 말하는 어느 때이든지 그들이 사용한 오만한 말들, 즉 그들이 앉고 일어설 때에, 그들이 밤에 누울 때와 아침에 일어날 때, 그들이 식사외 모임의 자리에 앉을 때와 일어날 때, 아직도 나는 그들의 노래이다. 그들은 불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조롱거리로 만든 것같이 나의 불행을 가지고 그들 자신과 서로 서로를 위한 즐거움을 삼았다." 예루살렘은 그들이 그 위에서 노는 평판(平板)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예루살렘의 멸망" 이라고 이름 붙인 어떤 음악이나 연극, 어떤 가극이나 막간의 희극을 연출했었을 것이다. 그것은 본래 비극이지만 거룩한 성읍이 불운하기를 원하는 그들에게는 대단히 환영받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에 대하여 그리고 그 백성들에 대하여 말한 모든 잔인한 말들을 계산하기 위하여 어느 날 죄인들을 부르실 것을 유의하자.

2. 그는 이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호소한다. "여호와여 나의 억울함을 감찰하셨사오니, 그것을 입증할 어떤 증거도 필요 없습니다. 또한 그 입증을 실행할 어떤 고발자도 필요 없습니다. 당신께서 그 진상을 보셨고, 지금 나는 그것을 당신에게 맡겼사오니, 나를 위하여 신원하옵소서. 그들을 처리하옵소서."

(1) 그들이 받아야 할 만한 대로(64절) "저의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하사 그들이 우리에게 행한 대로 그들에게 행하십시오. 그들의 손으로 우리에게 행한 것같이 당신의 손으로 그들에게 행하십시오. 그들이 우리를 많이 애타게 하였습니다. 이제 주께서 그 마음을 강퍅하게 하소서(65절). 그 마음을 당혹케 하소서(어떤 이들은 이와 같이 번역한다). 그들로 하여금 모든 면에서 협박하는 해악으로 둘러싸이게 하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나갈 길을 볼 수 없게 하십시오. 그들의 마음을 낙담케 하소서(다른 이들은 이것을 이와 같이 번역한다). 그들이 절망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그들 자신이 없어지도록 단념하게 하소서." 하나님은 분명하게 생각하는 그들의 두뇌를 혼란시킬 수가 있고, 굳세게 생각하는 그들의 마음을 낙심케 하실 수가 있다.

(2) "그들로 하여금 위협을 따라 취급되게 하십시오. 저주를 더하시며, 그것은 당신의 저주가 그들 위에 오게 하십시오. 당신 백성의 적들에 향하여 당신의 말로 발설한 모든 해악을 그들 위에 오게 하십시오(65절). 그들이 우리를 저주하였습니다. 그들이 저주하기를 좋아하는 것만큼 그것이 그들에게 임하게 하십시오. 당신의 저주는 진실로 그들을 불행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들의 저주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저주는 의롭고, 열매를 이룰 것입니다. 당신이 저주한 사람들은 실제로 저주를 받습니다. 당신의 저주가 실현되게 하십시오(66절). 그들이 분노로 우리를 군축하고, 파괴한 것같이 진노로 그들을 군축하고 멸하소서. 여호와의 천하에서 멸하소서. 그들로 하여금 빛의 유익이 없게 하시고, 하늘의 은혜가 없게 하십시오. 하늘에 앉아서 그들을 웃으시는(시 2:4) 전능하신 분에게 파멸을 당하였다고, 그리고 하늘이 통치한다고 모든 사람이 말할 수 있는 방법으로 멸하십시오." 우상에 대해서 말하여 진 것은(단 4:26) 여기서는 그 예배자들에게 대하여 말하여진다(예배자들은 또한 우상에게 되어진 것과 같이 될 것이다). 그들은 이 하늘 아래서 망할 것이다(렘 10:11).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늘 행복으로부터 제외될 뿐 아니라 이 보이는 하늘 위로를 받지 못할 것이다. 이 보이는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어늘" (시 115:6) 그를 거역하는 사람들은 보호를 받을 가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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