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참극 (예레미야 애가 1:1-11)
여기에 있는 애가는 너무나 애절하기 때문에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기질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 구절들을 읽어내려 가면서 흐르는 눈물을 금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Ⅰ. 예루살렘의 재난이 너무나 무겁고 많은 경우에 있어서 너무 심한 괴롭힘을 당한다고 불평을 한다. 이 재난들을 살펴보자.
1. 그들의 시민으로서의 지위에 관하여.(1) 본래는 거민이 많던 성읍이 적막해졌다(1절). 이것은 놀라움으로 말해진다. -이 일이 올 수 있으리라고 누가 생각했으랴! 또는 질문하는 방식으로 말한다. -무엇이 이 재난을 여기에 가져왔는가? 또는 탄식으로- "슬프다! 슬프다!(마치 계시록 18:10, 16, 19 처럼) 이 성이여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어찌 그리 적막히 앉았는고!" 그녀는 그녀 자신의 백성으로 가득 차서 그녀를 채웠고 그녀에게 자주 찾아오는 다른 나라 사람들로 만원을 이루었으며 그들과 더불어 유익한 무역과 즐거운 교제를 나누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녀의 백성은 포로로 끌려갔고 이방인들은 그녀의 비위를 맞추지 아니해 그녀는 "적막히 앉아있다. 지혜가 소리쳐 부르던 광장" 이었던(잠 1:20, 21) 성의 주요한 곳들에는 지금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그들이 쓸쓸한 채로 버려진 것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기에서 지혜의 외침을 청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을 주의해 보자.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증가했던 그들의 수를 금방 줄일 수 있으시다. "처녀 이스라엘이 어찌 그리 과부처럼 되었는고!" 그녀의 남편이었고 남편이었어야 했던 왕은 끊어지고 가버렸다. 그녀의 하나님은 그녀를 떠나갔으면 그녀에게 이혼 증서를 주었다. 그녀는 자녀들을 빼앗기고 과부와 같이 고독하고 슬픔에 차 있다. 어떤 가정이나 예루살렘 외의 어떤 나라나 아니 바벨론이라 할지라도 안심하거나 내가 "여왕처럼 앉으며 과부로 지내는 것을 결코 보지 않으리라" 하고 말하지 못하게 하라(사 47:8; 계시록 18:7).
(2) 주권을 가지고 있던 성읍이 지금은 종속되어 있다. 그녀는 "열국 중에 큰 자" 였으며 어떤 나라들에게는 매우 사랑받는 존재였고 다른 어떤 나라들에게는 매우 두려운 존재였다. 이러한 나라들로부터 주목을 받았고 그들은 모두 복종했었다. 어떤 나라들은 선물을 보내왔고 다른 어떤 나라들은 조공을 바쳤다. 그래서 그녀는 실로 "열국 중에 공주" 였고 모든 곡식단들은 그녀의 단에 절하였다. 심지어 열국의 왕자들도 그녀의 호의를 간청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상들은 뒤엎어졌고 그녀는 그녀의 친구들을 잃어버리고 적막히 "앉아 있을" 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의 자유마저 잃고 공물(貢物)처럼 앉아 있다. 그녀는 먼저는 애굽에게 다음에는 바벨론에게 공물을 바쳤다. 죄는 한 백성을 적막하게 만들 뿐 아니라 노예로 만든다는 것에 주의하자.
(3) 즐거움으로 충만하던 성읍은 침울함으로 변하고 모든 서술이 비통으로 가득차 있다. 예루살렘은 기쁨의 성읍이었었고 그 지파들은 주 앞에서 기뻐하기 위하여 올라갔었으나 이제는 시들어 버렸다. 그녀는 모든 땅의 기쁨이었으나 이제는 심하게 울고 있으며 그녀의 웃음은 애곡으로 변했고 그녀의 엄숙한 축제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진정 슬퍼하는 자가 몰래 남이 듣지 않게 혼자 울듯이 밤중에 운다. 다른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는 "밤중에" 그녀의 생각은 그녀의 아픔에 최고로 집중되고 그때 슬픔은 폭군을 연출한다. 그녀를 위해 울던 예언자의 머리를 그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으나 이제는 그 예언자의 머리가 그녀 자신의 머리가 되어 -" 물처럼" 그리고 눈은 눈물의 근원이 되어 "낮과 밤에" 운다(렘 9:1). 그녀의 눈물은 하염없이 뺨위를 흐른다. 눈물처럼 빨리 마르는 것이 없는 데도 새로이 북받쳐오는 슬픔들이 새눈물을 자아내므로 그녀의 뺨은 눈물이 떠날 날이 없다. "학대받는 자가 흘리는 눈물" 보다 더 널리 알려지는 것이 없고 학대받는 자와 함께 비 그친 뒤의 구름은 개인다(전 4:1)는 교훈에 주의하자.
(4) 열방 가운데서 구별되었던 자들이 지금은 "열방에 거하게" 되었고 독특한 백성이 이제는 혼합된 백성이 되었다(3절). 유다는 그녀의 땅으로부터 원수들의 땅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고 거기서 하나님과 계약을 알지 못하는 자들 가운데서 불안과 불만을 느끼며 안정을 얻을 수 없는 자들과 함께 살며, 승승장구하는 제국의 폭군의 뜻에 따라 이곳에서 저곳으로 계속 쫓겨다니는 삶을 그들 가운데서 영구히 체류하며 살아야 할 것만 같다. 그리고 다시(5절에서는) 그녀의 "어린 자녀들이 대적에게 사로 잡혔도다" 하고 탄식한다. 다음 세대를 이어갈 씨앗이 되어야 했던 그 자녀들이 끌려갔고 그래서 그 땅은 황폐해졌으며 또한 그 땅을 이어받을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땅은 계속 황폐한 채로 버려질 것이다. 자신들의 동족들 가운데서, 자신들의 땅에서 자유롭게 사는 자들은 타국으로 끌려가야만 하는 사람들의 비참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그들이 누리고 있는 행운에 대해 더욱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5) 전쟁에서 정복하던 자가 이제는 패하였고 정복당하였다. "그 모든 핍박하는 자가 저를 쫓아 협착한 곳에 미쳤도다" (3절). 그들은 그녀로부터 가능한 모든 재산들을 빼앗았으므로 그녀의 백성은 도망할 길이 없이 불가피하게 "대적의 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7절). 그들은 사방으로 둘러싸였고 그들이 어디로 도망치려고 해도 그들은 낭패만을 당할 뿐이었다.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으나 유린당하고 정복당할 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느 곳에서나 "저의 대적이 머리가 되고 저의 원수가 형통하게 되었다" (5절). 그들은 그들의 칼을 어디로 돌리든 더 좋은 것을 얻게 되었다. 그들이 자신들에게 초래한 협착한 곳은 죄로 인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가장 큰 대적과 원수인 죄로 하여금 우리를 지배하게 하고 우리의 머리가 되도록 허락한다면 분명코 다른 우리의 원수들이 우리를 지배하려고 애태워 괴로워할 것이다.
(6) 구별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예를 내려 주심. 위험을 갖추었고 모든 이웃들이 경의를 표하던 백성이었던 자들이 이제는 멸시를 받고 있다(8절). "전에 높이던 자가 업신여김이여" -전에 동맹을 간청해 오던 나라가 이제는 그럴 만한 가치가 없어졌다. 그녀가 화려하고 번성할 때에는 그녀를 애무하던 자들이 이제 그녀가 곤경에 처해 있을 때 그 "적신(赤身)을 보고 업신여긴다." 그녀의 원수들의 득세함을 보고 열방들은 그녀의 연약함을 지각(知覺)하고 그들이 생각해 오던 강한 나라가 아님을 알며 그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큼을 보고 그들은 이제 밝혀지고 또 어느 곳에서나 이야기되어지는 그녀의 사악함을 깨닫는다. 이제 그들이 얼마나 죄로 인하여 타락하였는가 드러난다. 그들에 대하여 "원수가 스스로 큰 체한다" (9절). 원수들은 그들을 짓밟고 모욕하니 원수들의 눈에는 그들이 미천하게 되었으며 비록 전에는 열방의 머리였으나 이제는 열방의 꼬리가 된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죄는 어떤 백성에게도 치욕을 가져온다는 사실에 주의하자.
(7) 비옥한 땅에 살던 자들이 멸망하게 되었고, 그들 중에 많은 자들이 먹지 못하여 죽었다(11절).
" 모든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낙담과 절망의 "한숨을 쉬었으며" 기절하게 되었고 그들의 영혼은 죽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한숨을 쉬었다. 왜냐하면 먹을 것을 찾으나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침내 "그 땅에 거하는 백성들에게 식물이 떨어지는" 극한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렘 7:6). 그리고 노예인 그들은 음식을 얻기 위하여 많은 수고를 해야 했다.
그들은 많은 즐거운 것들, 보석과 그림들, 그리고 옷장들과 장롱들과 같은 모든 가구들을 소유했었다. 또 그들은 그것들을 바라보며 즐거워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의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이것들을 팔았으며 그것들을 팔아 "목숨을 구하기 위해 먹을 음식을 사야 했다." 그들에게는 다른 어떤 강장제보다도 음식을 필요로 했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주고 생명을 사며 생명을 지탱해 주는 음식을 샀다. 즐거운 것들에 싸여 있는 자로 그것들을 자랑하지도 못하게 하고 그것들을 좋아하지도 못하게 하라. 필수적인 것들을 기꺼이 팔아야 할 때가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기 위해 충분한 양식을 가진 자들로 하여금 그것으로 만족하게 하자. 비록 그들이 즐거운 것들을 가지지 않았더라도 그 양식 때문에 감사하게 하라.
2. 우리는 여기에서 비참한 그들의 교회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의 성스러운 관심의 파멸은 그들에게 있어서 다른 어떤 세속적 관심보다 더 통탄할 노릇이었다.그들의 종교적 축제들은 더 이상 거행되지 않았고 더 이상 반복되지 않았다(4절). "시온의 길은 슬피운다." 그들은 침울하게 보였고 시들은 풀이나 잡초처럼 보였다. 성전에 이르는 대로를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가는 것을 보는 것은 즐거운 기분전환이 되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곳에 오랫동안 서 있을 수 있고 그렇게 해도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아무도 거룩한 절기에 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거룩한 도시가 파괴됨으로 그들에게는 완전한 종말이 왔다(사 33:20). 거룩한 절기는 무시되었고 모독되었다(사 1:11, 12). 그러므로 마땅히 그들에게는 끝이 온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시온의 길이 애곡하게 되었을 때 모든 시온의 아들들은 그 길과 함께 애곡할 뿐이었다.
선량한 사람에게 있어서 종교적 모임이 깨어지고 흩어지는 것을 보는 것은 그리고 기쁘게 모임에 참여하고 싶으나 금지당한 자들을 보는 것은 비통한 일이다. 그리고 시온의 길들이 애곡하듯이 신실한 예배자들이 만나는 곳이었던 "시온의 문도 황폐하였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만나는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었다. 주께서 모든 야곱의 거민들보다도 시온의 문들을 더 사랑하셨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문들을 잊으셨고 그 문들로부터 떠나가시도록 자극받으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성전을 포기하셨을 때 성전이 황폐했던 것처럼 그 문들이 그렇게 된 것은 마땅한 일이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지리라" (마 24:38).
(2) 그들의 예배를 맡은 사람들은 전혀 그들이 원하는 예배를 집행할 수 없었고 완전히 좌절해 있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은" 성전의 황폐함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그들의 노래들은 탄식으로 변했다. 그들은 아무런 할 일이 없으므로 탄식하고 그러므로 가졌어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들은 백성들처럼(11절) 먹을 것이 없어서 탄식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계였던 여호와의 제물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제사장들과 여호와의 대리자들은 탄식할 때이다. 노래와 춤으로 즐거이 그들이 거룩한 절기에 나아가던 "이스라엘의 처녀들" 역시 "무겁게 고통을 당한다." 시온이 번영할 때에 그들의 예배에 대한 연주를 했었으나(시 68:25, "그들 중 소고치는 동녀가 있었다") 이제는 그 파멸을 연주한다. "이스라엘의 처녀들은 고통을 당하므로 슬픔 가운데 빠져 있다." 즉 시온의 모든 거민들이 다 슬픔 가운데 있다. 그들의 특징은 거룩한 모임 때문에 슬퍼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 치욕이 무거운 짐이 되었다" (습 3:18).
(3) 그들의 종교적인 장소는 모독되었다(10절). "이방인이 성소에 들어가며" 성전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이 곳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고 이스라엘 사람도 제사장들 외에는 그들이 아무리 경건하고 헌신적이더라도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방인은 예배를 위해서라도 가까이 오면 죽으리라." 그런데 지금 이방인이 예배를 드리려는 게 아니라 노략질하기 위하여 난폭하게 몰려 들어온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은 회중에 들어가는 것조차도 해서는 안 되며" 유다 백성과 혼합되어서도 안 된다고 명령하셨었다(신 23:3). 그러나 이제 그들은 통제를 받지 않고 거룩한 곳에 들어간다. 주의할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참다운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율법을 모독하고 거룩한 것들을 경멸하는 것을 보는 것보다도 더 슬프고 비탄스러운 것은 없다는 것이다.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나이다" (시 74:3, 4)라고 그릇 호소한다.
(4) 그들의 거룩한 그릇들과 모든 훌륭한 것들은 성전을 장식하고 아름답게 하여서 예배에 사용되어 졌었던 것이었으나 이제는 적들에게 전리품이 되었다(10절). "대적이 손을 펴서 보물을 빼앗았나이다" (보물들이 무엇인가는 시 64:11 에서 배울 수 있다). 거기에서 성전이 불타는 것에 대한 불평에 추가해서 "우리의 즐거워하던 곳이 황무하였나이다" 고 한다. 그것들은 법궤와 제단과 하나님이 그들에게 현현하시는 모든 다른 표징들이다. 이것들은 다른 어느 것들보다 더 그들이 즐거워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것들은 깨어지고 멀리 옮겨졌다. 이렇게 처녀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갔다" (6절). 거룩한 아름다움은 시온의 딸의 아름다움이었다. 거룩하고 아름다운 집인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 그 아름다움은 사라졌다. 아름다움의 막대기를 잘랐으니 이는 계약의 서약과 그 인(印)을 취하려 함이다(슥 11:10).
(5) 그들의 거룩한 날들이 희롱을 받았다(7절). "대적들은 그를 보고 그의 안식일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7일 중의 한 날을 세속적인 일을 쉬고 구별하는 것 때문에 조롱을 받았다. 그 당시 이방인 시인인 쥬베얼은 시간의 7분의 1일을 잃어버린다고 하여 유대인을 조소하였다. Cui septima quaeque fuit lux Iguava et vitae Partem non attigitullam-즉 그들은 그들의 안식일을 지킴으로 손해를 본다. 왜냐하면 7일 중 한 날은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반면에 안식일은 마땅히 그러할 것으로서 거룩하게 지켜진다면 주간의 다른 모든 날보다도 더 좋은 평가를 받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의 명예를 위하여 안식일을 지켰다고 고백하였다. 반면에 대적들은 그들에게 묻기를 "너희는 그것을 지킴으로 무엇을 얻었는가? 너희의 하나님의 율령을 지킴으로써 무슨 이익을 얻었는가? 그는 지금 너희를 고난 가운데 버리지 않았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명령이 특히 안식일이 조롱받는 것을 듣는 것은 대단히 큰 고통이라는 것에 주의하자. 시온은 그날들을 "그의 안식일" 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안식일은 하나의 제도인 것이지만 또한 이스라엘의 특전인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시온의 아들들은 안식일에 대한 경멸을 곧 그들 자신에게 가해진 경멸로 생각하는 것이요, 따라서 그들의 심중에 놓여진 경멸로 취하는 것이다.
(6) 이 모든 불평들이 더 심하게 한 것은 현재의 그의 상태가 과거의 그의 상태에 비하여 정반대가 된 때문이다(7절). 환난과 궁핍을 당하는 날에, 모든 것이 어둡고 희미할 때 예루살렘은 "옛날의 모든 즐거운 일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 그가 과거에 그 일들로 기쁨이 가득하였던 그것들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를 더 잘 이해한다. 하나님은 때때로 자비의 결핍을 통하여 자비의 가치를 알게 하신다. 최고의 번영으로부터 역경에 떨어진 사람들에게 있어서 곤란은 극심하게 된다. 이것이 다윗이 하나님의 의식에서 추방되었을 때 다윗의 가슴을 에이던 슬픔이었다.
그는 "무리들과 함께 하나님의 집으로 갔을 때를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 42:4).
Ⅱ. 여기에서 예루살렘의 죄는 이 모든 재앙을 초래하고 도발하는 원인으로서 불평되어진다. 사람은 누구나 쓰여지는 기구이나니 고난을 만들어내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저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곤고케 하셨음이라" (5절).
예루살렘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은 올바른 심판으로서 그것을 행하신 것이다.
1. 그의 죄는 셀 수 없이 많다. 그의 고난이 많은가? 그의 죄는 더욱 많다. 그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괴롭게 하셨다" (렘 30:14). 한 백성의 죄가 증가될 때는 "그는 까닭없이 내 상처를 많게 하신다" (욥 9:17)고 욥이 그의 경우에 말한 것과 같이 말할 수는 없다.2. 그 성질로 말하면 극히 악질적이다(8절).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하므로 하는 말대로 그들은 모든 것 중에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가중스러운 범죄인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하였다.
그러한 고백을 하게 하고 그러한 특권을 누리는 예루살렘의 죄는 가장 통탄스러운 죄이다.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함으로(8절) "놀랍게 낮아졌다." 통탄할 죄는 놀라운 파멸을 초래하는 것을 기억하라. 불의를 행하는 자들에게는 이상한 벌이 따른다(욥 31:3). 그 죄들은 명백히 벌을 받을 죄이다.
(1) 그들은 심하게 압박받아 왔고, 그러므로 그들은 압박받는 자들이었다(3절). 유다는 환난과 수고로 인하여 사로잡혀 갔도다. 왜냐하면 그들 가운데 있는 부자들이 가난한 자를 괴롭히고 그들로 하여금 혹독하게 종노릇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갈대아 사람이 말하듯인 그들은 그들에게 맡겨진(렘 34:10) 히브리인들을 압박하였기 때문이다.
압박은 그들이 부르짖는 죄 중의 하나였는데(렘 6:7, 7) 지금은 그 죄가 큰 소리로 부르짖고 있다.
(2) 그들은 스스로가 자신을 천하게 만들었으므로 당연히 천대를 받는다. "불경한 자같이 되어 전에 높이던 모든 자가 그 적신을 보고 업신여김이여."
예루살렘이 그 거민을 죄의 구렁창에서 딩군 것이 그 옷에 묻어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더럽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우리의 영광을 더럽힐 수 없다.
(3) 그들은 매우 안전하였었다. 그러므로 이 파멸은 그들에게 당연히 놀라운 것이었다(9절). 결국을 생각지 아니함이여. 이스라엘은 그의 이후의 끝이 즉 그가 행한 그러한 악한 행위의 종말이 이러한 것이리라고 생각하도록 경고를 받았었으나 그것을 듣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놀랍게 낮아졌다. 그가 두려워 아니하던 것을 두려워하게 되는 놀라운 방법으로 "놀랍게 낮아졌다." 고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놀라운 재앙을 내리실 것이다.
Ⅲ. 여기서 예루살렘의 친구들은 거짓되고 나약하고 대단히 불친절한 자로서 불평되어진다. "친구도 다 배반하여" 그러므로 "그들은 원수가 되었다." 그 배신자들은 그의 파괴자들 만큼이나 그를 괴롭게 하였다. 우리 아래서 부러진 갈대지팡이는 "우리를 친 갈대지팡이" 만큼이나 많은 해악을 우리에게 행하였다(겔 29:6, 7). 그를 보호했어야 할 방백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적들에게 대항할 충분한 용기가 없었다. 그들은 "사슴과 같이" 우선 놀라서 도망하기에만 바빴고 싸우려 하지 않았다. 아니 그들은 꼴을 찾지 못하여 굶주린 "사슴과 같아서 쫓는 자 앞에서 힘없이 달림 같았다." 싸울 힘이 없이 곧 달려 내려가 먹이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의 이웃들은 이웃답지가 않았다. 왜냐하면,
1. 그를 돕는 자가 없었다(7절). 그들은 도울 수도 없었고 돕기를 원치도 않았다.2. 더욱이 그를 위로하는 자도 동정하는 자도 없었고 그의 슬픔을 경감시켜 줄 어떤 말을 해 주지도 않았다(7,9절). 욥의 친구들의 경우에서처럼 예루살렘의 슬픔이 너무 컸기 때문에 위로는 소용없는 것이었다. 이 경우에 그들은 위로자가 되기에는 너무나 초라하였다.
Ⅳ. 예루살렘의 하나님은 여기에서 모든 일에 관하여 관심을 갖도록 호소하신다. 그리고 모든 것은 그의 자비로우심을 말하고 있다(9절).
"여호와여 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 이것을 인정하소서(11절). 그리고 보시옵소서. 여호와여 권고하옵소서." 이것에 대하여 명령을 내려 우리가 우리의 짐에서 벗어나 편하게 하는 유일한 길은 그 짐을 먼저 하나님께 맡기고 그가 우리를 위하여 선하게 여기시는 대로 하시도록 맡겨두는 것이다.
환난 속에서 보는 하나님 (예레미야 애가 1:12-22)
여기에 있는 불평은 본질상 앞부분에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구절들에 있어서 예언하고 슬퍼하는 교회의 이름으로 이 재앙 가운데서 하나님의 섭리와 그 섭리의 의로우심을 특별히 인식한다.
Ⅰ. 여기에서 비탄 중에 있는 교회는 그의 고통을 증대시킨다. 그러나, 그의 고통은 그 원인 보다 더 큰 것은 아니다. 그의 신음은 그가 저지른 죄악보다 더욱 심하지 않다. 그는 모든 구경군들에게 호소한다. "내게 임한 근심 같은 근심이 있는가 볼지어다" (12절). 아마도 이것은 진실로 예루살렘의 슬픔을 말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고난 중에 있을 때 이것을 너무도 약삭빠르게 우리 자신에게 적응시키고, 또 고난의 원인에 합당한 이상으로 고통을 과장하여 말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확실히 우리의 근심과 같은 근심이 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과 같은 종류의 고통에 던져져서 우리가 동등하게 그 고통을 분배받고 몫을 같이 나누지만 우리의 짐을 심각히 느끼고 있으며 우리 자신이 그 고통을 마땅한 것으로 감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소리쳐 부르짖게 되는 것이다.
Ⅱ. 예루살렘은 여기에서 사용되는 도구 너머에 있는 고난의 저작자를 본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가 하나님께로부터 지시되어지고 결정되어지고 처분되어진 것으로 고백한다. "여호와께서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 그는 나에게 진노하셨기 때문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다. 그의 진노의 크기는 나의 재난의 크기에 의해서 측정될 수 있다. 이것은 그의 진노의 날에 되어진 것이다" (12절).
고통은 그것들이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온 것을 우리가 알 때에는 그것은 단지 슬픈 일만은 아니다. 교회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이 행한다.
1. 교회는 불 속에 있는 것과 같다. 이 불은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다.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즉 초자연적인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 내가 냉과리같이 탔나이다" (시 120:3). 아픔을 당하고 쇠약해지고 말라버렸다.2. 교회는(예루살렘) 그물 속에 있는 것과 같다. 그가 빠져나오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그 속에 휘말려 들어간다. 이 그물은 하나님이 쳐놓은 것이다.
" 하나님이 내 발 앞에 그물을 베풀지 아니" 하셨다면 적들의 전략은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3. 교회는 광야에 처한 것과 같다. 그는 길을 잃고 방황하며 고독하고 지쳐버렸다. "나로 물러가게 하였음이여." 그러므로 나는 나아갈 수가 없고, "그가 나를 고적하게 하셨으므로" 나는 의지할 것이 전혀 없으며 "다만 종일토록 곤비하도다."4. 교회는 멍에를 메고 있는 것과 같다. 일하기 위한 멍에가 아니고 목과 뒷꿈치를 함께 얽은 고행의 멍에이다(14절). "내 죄악의 멍에를 그 손으로 묶고 얽었도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범죄한 것 외에는 어떤 것에도 휘말려들지 않는다는 것을 관찰하자.
" 악인은 그 죄의 줄에 메이나니" (잠 5:22) 그리스도가 명하신 멍에는 "쉬운 명에" 이다(마 11:30). 그러나 우리가 범죄한 멍에는 무거운 멍에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를 공격하실 때 이 멍에를 묶으시고 우리의 죄가 받을 만한 내적 외적 고통 가운데로 우리를 몰아넣으신다.
양심이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행함으로써 우리를 묶는다. 그의 공의의 "손으로 멍에를 묶고" 나를 둘러싼다. 그러면 그의 용서하시는 자비의 손 이외에 아무 것도 그것을 풀 수가 없다.
5. 교회는 진흙 속에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분은 "모든 용사를 발아래 짓밟으시고" 일어설 수 없게 하시고 차례차례 심판으로 그들을 뒤집어 엎으셨다. 그리고 그들의 거만한 정복자들에게 짓밟히도록 그들을 버려두셨다(15절).아니 교회는 포도즙틀에 밟히는 것과 같다. 짓밟힐 뿐 아니라 여러 조각으로 찢어지고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통 안에 있는 포도와 같이 눌려서 몽개지고 피가 포도주 같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처녀 유다를" 짓밟으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6. 예루살렘은 적들의 손 안에 있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 그를 넘겨 준 것은 여호와이시다(14절). "내 힘을 피곤케 하였음이여."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당할 수 없도다." 아니 그들에게 대항하여 일어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다. 그래서 그들의 손에 나를 넘겨주시고 아니 나를 대항하여 "성회를 모으시고 내 소년들은 부수셨다." 그리고 이러한 성회가 반항한다는 생각은 실제로 쓸데없는 생각이다(17절). 다시 "여호와께서 야곱의 사면에 있는 자들을 명하여 야곱의 대적이 되게 하셨다." 여러 번 야곱을 위하여 구원을 명하신 그가 지금은 야곱에 대하여 침략할 것을 명하신다. 이는 야곱이 그의 율법의 계명을 불순종하였기 때문이다.Ⅲ. 예루살렘은 자연히 그의 비참을 구경하고 있는 자들에 대하여 긍휼과 동정을 베풀 것을 요구한다(12절).
" 지나가는 자여 무릇 너희에게는 관여가 없는가?" 너희는 무심히 나를 바라볼 수 있는가? 너희 심장은 얼마나 철석과 같으며 너희 눈은 얼마나 대리석과 같기에 너희는 내게 대하여 동정적인 생각을 가질 수도, 동정적으로 바라볼 수도, 동정적인 눈물을 흘릴수도 없단 말인가? 너희 또한 물을 가지고 있지 아니한가? 너희 이웃집이 불타고 있는데 너희에게는 무관한 일인가?
그들은 시온의 슬픔과 파괴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요셉의 고통으로 인하여 슬퍼하지" 않는다. 얼마나 가련하게 그가 동정을 애걸하고 있는가?(18절)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 말을 듣고 내 근심을 볼지어다." 나의 하소연을 들어라. 그리고 내가 근심하는 이유를 보라. 이것은 욥의 요구와 같다(욥 19:21).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우리의 친구들이 우리를 동정하여 우리와 함께 눈물을 흘려주면 우리의 근심은 가벼워진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비록 그들 가운데 있지마는 우리가 경멸받지 않는다는 긍지가 되기 때문이다. 고통 중의 경멸은 일반적으로 다른 어느 것만큼이나 두려운 것이다.
Ⅳ. 예루살렘은 이 재난으로 인한 그의 슬픔이 극한적이기는 하지만 그 자신의 슬픔을 정당화한다(16절).
"이를 인하여 내가 우니, 내가 밤새도록 애곡하니(2절) 아무도 보지 아니한 때 내 눈에 물같이 흐름이여."
이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눈물의 골짜기라는 것을 주의하라. 시온의 아들들은 때때로 시온의 애곡자가 된다. 요구하는 심정이라기보다도 절망의 표시로 시온은 두 손을 폈고(17절) 모든 희망이 사라진 행복의 표시로 그의 손을 내어 뻗었다. 그는 이 격렬한 슬픔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살펴보자.
1. 그의 하나님은 그에게서부터 떠나가셨다. 금 우상들만을 가지고 있었던 미가는 그것들을 도둑맞았을 때 울부짖었다. "내가 더 이상 가진 것이 무엇입니까? 당신이 나에게 말한 것은 무엇입니까? 웬일이십니까?" 여기에서 교회는 지나치게 슬퍼한다. 그는 말하기를 "나로 인하여 내 영을 소생시킬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라" 라고 한다. 하나님은 위로자이시다. 그는 과거에 위로하곤 했었다. 다만 그분만이 효과적인 위로를 베푸실 수 있다. 그의 말씀이 그들에게 위로를 말하였다. 우리에게 위로의 말을 하시는 이는 그의 성령이다. 그의 말씀은 영혼을 소생시킬 수 있고 영혼이 사라졌을 때 그것을 되돌릴 수가 있다. 우리 자신은 그것을 다시 살릴 수 없다. 그러나 이제 그는 불쾌하심으로 떠나셨다. 그는 "멀리 떠나셨음이로다. 멀리 떠나 있는" 나를 보라. 그들을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자인 하나님이 멀리 떠나 있을 때 성도들의 영혼이 쇠약하여 가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라는 것을 주의하라.2. 그의 자녀들은 그에게서부터 옮겨져 갔으며 그를 도울 능력이 없다. "라헬이 자식들을 위하여 우는 것같이 그는 자식들이 없으므로 울고 위로받기를 거절한다. 원수들이 이기며 내 자녀들이 외롭도다. 너의 양육한 모든 아들들 중에 그 손으로 너를 이끌 자가 없도다" (사 51:18). 그들은 그들 자신도 구할 수 없는데 하물며 어찌 그 어미를 구할 수 있으랴? 그의 기쁨이요, 희망이었던 처녀들과 청년들이 "다 사로잡혀 갔다" (18절). 갈대아인은 청년 남녀들은 여성이거나 꽃피는 나이거나 간에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였다고 말하고 있다(대하 36:17).
3. 그의 친구들은 그를 실망시켰다. 어떤 친구들은 그를 구원하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또 어떤 친구들은 그를 구원할 수가 없었다. 그는 구원을 구걸하여 "두 손을 폈으나 위로할 자가 없었다." 위로를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의 "사랑하는 자를 불렀으나" 그들은 그를 속였다(19절). 그들은 욥기 6장 15절에 있는 목마른 여행자에게 마른 시내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유의할 것은 우리가 피조물들에게 마음을 두고 기대를 건다고 하는 것은 흔히 속거나 실망한다는 것이다. 그의 사랑하는 자들은 그의 우상들이었다. 애굽과 앗수르는 그가 신뢰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속였다.
그가 번영할 때에 그에게 충성하던 그들은 그에게서 물러났고 역경 중에 있는 그를 멀리하였다. 하나님을 그의 친구로 삼고 그의 사랑 속에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를 친구삼는 자들을 속이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다.
4. 그를 인도하도록 되어 있었던 사람들은 그를 위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매사의 선두에 나서야 했던 "제사장들과 장로들" 은 굶주려 죽었다(19절).그들은 "식물을 구하다가 기절" 하거나 또는 곧 죽게 되어 있었다. 그들은 살기 위해서 빵을 구하러 갔었다. 그 땅에 기근이 극심하여 지혜로운 자도 식물이 없고 제사장들과 장로들도 굶주려 죽었다.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들의 위로자들이어야 했지만 그들 자신이 위로를 받지 못하는 데 어떻게 그들이 남을 위로할 수 있는가?
"저희가 나의 탄식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나를 돕기 위하여 그들을 소환하여야만하는 탄식이었다. 그러나 나를 위로하는 자가 없었다. 나의 사랑하는 자와 당신이 나에게서 멀리 있게 하였나이다."
5. 그의 적들은 그에 대하여 너무나 잔인했고 그를 모욕하였다. "원수들이 이기며(16절) 칼의 살육이 있고 집에는 모든 양식이 떨어졌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죽음 같은 것" 이 있었으며 그것은 기근이었다. 그것은 페스트(흑사병)와 같이 나쁜 것이었다. 아니 더 나쁘다-밖으로는 칼에, 방안에서는 놀람에(신 32:25) 재난의 도구로 사용된 적들로서 주위에 서 있던 자들, 즉 에돔과 암몬은 대단히 야만적이었고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악한 생각을 품었다. "그들이 나의 재앙을 들었으니 주께서 이렇게 행하심을 기뻐하나이다" (21절).그들은 재앙 그 자체를 기뻐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것을 행하심을 기뻐한다. 하나님과 그의 이스라엘이 불화한 것을 보는 것이 그들에게는 즐거웠다. 그들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대단히 냉냉하게 행동하였다. "예루살렘은 그들 중에 있는 불결한 여자와 같도다." 그러므로 그들은 접촉하기를 싫어하고 꺼려하였다(17절).
이 모든 설명에 있어서 그의 현재의 상태로 인하여 그의 탄식이 많은 것과 더욱이 장차 있을 것 같은 일들로 인하여 그의 "마음이 곤비한" 것은(22절) 이상할 것도 없고 비난받을 수도 없는 것이다.
Ⅴ. 예루살렘은 그가 당한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은 정당하다고 한다. 그의 죄는 이 격심한 시련을 받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도 무겁게 놓여 있는, 그리고 그렇게도 단단하게 묶여 있는 멍에는 "그의 죄악의 멍에이다" (14절). 우리가 묶여 있는 족쇄(足鎖)는 우리 자신이 만든 것이고 우리가 맞은 채찍은 우리 자신들의 몫이다. 교회가 하나님은 가혹하다고 생각하고 말했었다면 교회도 여호와는 의로우시다는(18절) 사실을 깨닫고 자신을 뉘우쳐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같이 취급하심으로써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행하심 속에 어떤 불의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사람은 아무리 불의하여도 "여호와는 의로우시다" 는 것과 하나님은 그 행하심이 그 율법에 반대가 된다 할지라도 의로우심이 드러나리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 고통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그 행하심이 "의로우시다" 는 것을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고백하지 아니한다면 우리는 하나님도 우리 자신도 이해할 수가 없게 된다.
예루살렘은 그 자신의 불의를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정당하심을 고백한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 (18절). 그리고 다시(20절) "나의 패역이 심히 큼이니이다" 고 한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충분히 나쁘게 말할 수가 없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하여 더 나쁘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되고, 우리는 그것을 "패역이라고, 심히 큰 패역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안 된다. 진심으로 참회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죄는 커다란 패역이다. 예루살렘이 눌려 있는 고통보다도 더 무겁게 그 위에 놓여 있는 것은 이 심히 큰 죄악이다. "마음이 괴롭고" 패역은 괴로운 바다와 같이 내 안에서 역사한다. "내 마음이 번뇌하오니," 내 마음이 안식이 없고 요동하니 이는 "나의 패역이 심히 크기" 때문이다. 죄에 대한 슬픔은 커다란 슬픔이어야 하고, 영혼으로부터 슬퍼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는 것을 유의하자.
Ⅵ. 예루살렘은 현재의 그가 당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 양면에 대하여 호소한다.
1. 예루살렘은 그가 하나님의 동정 대상이 되게 한 그의 슬픔에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도록 호소한다(20절)."여호와여 돌아보옵소서. 내가 환난 중에 있나이다. 나의 상황을 인지하소서. 그리고 당신이 원하시면 나의 구원을 명하소서." 우리의 영혼을 짓누르는 환난이 하나님의 눈 앞에 전개된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위로의 사실이 된다.
2. 예루살렘은 그의 적들이 그에게 행한 상해에 대해서 하나님의 정의에 호소한다(21,22절). "주께서 반포하신 날을 따르게 하시리니, 저희가 나와 같이 되겠나이다." 하나님의 뜻에서 확정되고 예언으로 발표된 그날에는 지금 나를 핍박하는 적들이 "나와 같이 될 것이다."그날에는 지금 나의 손에 놓여 있는 진노의 잔이 그들의 손에 놓여질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기도로 해석될 수 있다. "작정된 그날이 오게 하소서." "저희 모든 악을 주 앞에 나타내시고 그 악행이 기억되게 하시고 헤아려지게 하소서. 그들이 내게 행한 모든 악행을 그들에게 복수하소서(시 109:14, 15). 나의 모든 죄악으로 인하여 내게 행하신 것 같이 그들의 범죄로 인하여 그들에게 행하실 때가 빠르게 하소서." 이 기도는 그들의 원수들이 가진 모든 생각들에 대한 항거가 되고 그들의 파멸에 대한 예언자이기도 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서명하는 것이 된다.
주의할 것은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될 수 있고 일치되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날을 요구하게 되어 있고 다른 날을 요구하게 되어있지 않다.
비록 우리가 자비롭게 원수를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만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회개하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원수와 교회의 성취들에 대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성취되기를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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