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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1

느부갓네살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 (예레미야 52:1-11)

본문의 내용은 시드기야의 통치가 시작될 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시드기야 이전에 이미 두 번 유대인들이 사로잡혀간 사건이 있었다. 한 번은 여호야김 4년에 있었고 다른 한 번은 여고냐 통치 제1년에 일어났다. 그런데 본문은 시드기야와 함께 잡혀갔던 사람들 중의 한 사람에 의해 작성된 것 같다. 이것은 자기들은 형제들과 함께 사로잡혀 가지 않으리라고 생각해 온 사람들에 대한 조소의 글이다. 이런 희망에 살아온 자들이 있었다. 본문에서 우리는 아래와 같은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1. 하나님이 유다와 예루살렘의 지은 죄를 인하여 그들을 미워하심(3절). 그들에 대한 그의 분노는 "그들을 그 앞에서 쫓아내시기 까지에 이르렀다." 그는 아버지로서의 애정을 가지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었다. 그러나 그가 의무를 전혀 돌보지 않는 아들들에게 극도로 노하시게 되자, 그들을 자기 앞에서 나가라고 내쫓으신다. 그는 그들을 한량없는 은혜로 함께 하시겠다는 징표로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추방하셨다. 또한 은혜와 사랑의 계약의 징표로 그들에게 주신 거룩한 성과 성전에서 내쫓으셨다. 하나님의 법령으로부터 떠난 자들도 그의 목전에서 자기들이 추방된데 대하여 이유를 내세워 불평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범죄함으로써 스스로 그의 법령을 버린 자들 이외에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목전에서 추방당하는 경우는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원망해야 할 것은 죄의 열매인 것이다. 다윗처럼 우리도 "당신의 목전에서 나를 쫓아내지 마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하겠다(시 51:11).

2. 시드기야의 악행과 악정.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셨고 백성들을 미워하셨다. 뿐만 아니라 그를 싫어하셨으므로 그에게 벌을 내리셨다. 시드기야는 나아갈 때에 사리를 분간할 만한 나이에 이르러 있었다. 그는 "이 십 일 세" 였다(1절). 물론 그가 열왕들 중에 가장 악한 왕이었다고 할 만한 점은 없었다(그가 우상을 숭배하였다는 기사를 우리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그의 특징은 역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 는 점이었다. 마땅히 행하여야 할 선을 행하지 않는 것도 죄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나름대로 파멸을 재촉한 악행은 "그가 바벨론 왕을 배반하였다" 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의 죄의 소치이기도 하였고 또한 어리석음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에게도 파멸이 임하였다. 이 파멸은 지체없이 또한 많은 효과를 거두며 임해 왔다. 하나님은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을 모반한 사실을 대단히 좋지 않게 여기셨다(겔 17:15 등에도 하나님의 불쾌하심이 표현되고 있다). 이같이 하나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진노하셨기 때문에 어리석은 짓을 행하는 것이 시드기야와 그의 나라에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미치는가를 입증해 보이시기 위하여 시드기야를 자신의 뜻을 이행하는 도구 곧 바벨론 왕의 손에 붙이셨다.

3. 예루살렘을 포위한 18개월 후 갈대아들이 거기서 획득한 노략물. 갈대인들이 예루살렘 주변에 진을 치고 포위한 것은 시드기야 통치 제9년 10월이었다(4절). 그리고 성을 점령한 것은 "시드기야 11년 4월" 이었다(6절). 이스라엘의 멸망에 결정적이었던 이 두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들은 포로로 사로잡혀 있는 동안 그들은 "사월과 시월에 금식하였다" (슥 8:19). 스가랴서에 나오는 오월의 금식은 성전이 불탄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또 칠월이 금식은 그달랴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루살렘이 포위되었던 1년 6개월 동안이 그들에게는 얼마나 슬픈 때였는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얼마나 뼈아픈 고통을 당했는가는 당해 보지 않은 우리로서는 말하기 어려우리라. 그들에게 오는 모든 식료품의 공급이 수시로 적의 공격을 당하여야만 했었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까지 성을 사수할 결심이었으므로 이제 다만 심판의 순간만 두려움 속에서 기다려야 될 입장이었다. 그들로 성을 지킬 수 없게 한 것은 "성의 기근" 이었다(6절). 그렇다고 기근 때문에 항복할 수는 없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었다. "그 땅 백성의 식물이 진하여" 병사들도 굶주렸고 따라서 사명을 감당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들은 기진맥진하여 임무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니 "성벽이 부서진 것" 은 당연한 결과였다(7절). 사람이 지키지 않는 성벽이 어찌 오래 버티기겠는가? 이런 경우는 성벽없이 사람만으로 적을 막는 것보다 더 곤란하다고 하겠다. 더욱 중요한 것은 군사와 좋은 성이 있어도 하나님과 그의 지키심이 없이는 백성들의 안전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4. 왕과 그의 용사들의 불명예스러운 후퇴. 그들은 밤에 성을 빠져나와 서둘러 도주하였다. 나도 그들이 어디를 거쳐서 도망갔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그들 자신도 몰랐던 것 같다. 이렇게 도망했어도 왕은 "여리고 평야에서" 추격자들에 의하여 사로잡혔고 그의 경호병과 모든 그의 군대가 "그를 떠나 흩어졌다" (8절). 그의 공포는 원인이 없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죄를 지으면 위험에 직면하여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도망하였으나 그의 도주는 무익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날 길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죄인을 따라와 그를 취하였다. 도망하고 싶은대로 도망해 보아도 헛 것임을 그는 알았다(신 28:15). 또한 본문에서 특별히 집행된 심판이 일어나리라고 예고된 곳에서 이루어졌다(52, 53절 등).

5. 슬픈 최후가 바벨론 왕에 의하여 시드기야에게 임하였다. 시드기야는 즉시 처형되었다. 바벨론 왕은 그에게 모반죄를 적용하여 그를 심판하였다(9절). 다윗 왕가 출신으로 유다의 왕인 그가 이방 왕의 법정에서 죄인으로 처벌당하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는 선지자 "예레미야 앞에서 겸비하게 행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같이 낮추신 것이다. 거만한 정복자가 그에게 내린 형 선고에 의거하여 "시드기야의 아들들이 그의 목전에서 죽임을 당하였고 유다의 모든 방백도 같은 운명을 당하였다" (10절). 다음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혔고 사슬에 묶여" 승리한 적들의 환호성 속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다. 아마도 그들은 삼손의 눈을 뽑았을 때 블레셋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를 희롱하였던 것 같다. 여하간 그는 그의 남은 생명이 다할 때까지 옥에 구류되는 무기징역형을 언도받았다(나는 그가 수명을 얼마나 누리고 죽었는지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는 그 이후 어두움과 곤경 속에서 지내며 햇빛을 못보았으니 살았으나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옥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장례식 때에는 모종의 경의가 그에게 표시되었던 것 같다(34:5). 예레미야는 이미 그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자주 말했었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운명을 막을 수 있었을 그때 예레미야의 경고를 뒤담아 듣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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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인들의 약탈(1) (예레미야 52:12-23)

우리는 본문에서 갈대아 군대들이 행한 저주스러운 만행에 대한 설명을 대하게 된다. 이 만행은 성이 점령된 후 한 달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 약탈을 명한 자는 느부사라단이었는데, 그는 시위장이었고 이번 원정에서는 총지휘관으로 임명되어 있었다. 어떤 난외주에는 그를 "사형 집행인들의 우두머리" 라고 칭하고 있다. 실상 군인들이란 사형 집행인에 불과한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죄를 지은 백성을 처형하는 집행인으로 쓰신다. 느부사라단은 이들 병사들의 우두머리였다. 그가 형을 집행한 것은 좋았으나 한 가지 문제점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몰랐다는 점이다. 다만 그는 바벨론 왕에게 충성하였고 그의 계획대로 행하였다. 그런데 그가 살인자들의 대장으로 예루살렘 깊숙히 들어온 것이다. 그가 저지른 행위는 아래와 같은 것이었다.

1. 느부사라단은 먼저 성전에서 가치있는 것들은 다 약탈한 후 성전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는 "열조가 주로 찬송하던" 거룩하고 아름다운 집이었던 "여호와의 전을 불살랐다" (사 64:11).

2. 그는 왕궁을 불살랐다. 이 왕궁은 아마도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후 지은 그 왕궁인 것 같으며 그 이후 줄곧 "왕의 거처" 로 쓰여지게 되었다.

3. 그는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불살랐다. 다시 말해서 모든 귀인들의 집과 특권을 누리는 자들의 집을 불살랐다. 이 재화를 모면한 곳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그 땅의 빈민이 거하는 초라한 오두막일 뿐이었다.

4. 그는 "예루살렘 사면 벽을 헐었다." 이것은 그토록 오랫동안 그의 군대의 진로를 이 성벽이 가로막은데 대한 보복 조치였다. 이리하여 방비되어 왔던 성은 폐허가 되었다(사 25:2).

5. 그는 많은 무리를 포로로 잡아갔다(15절). 그는 성안에 거하는 "백성 중 빈한한 자들을" 잡아 옮겨가고 "빈천한 국민을 남겨두어" (시골의 가난한 사람들)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다." 또한 그는 "성 중에 남아 있는 백성" 곧 칼과 기근을 피한자들과 바벨론 왕에게 항복한 자들을 잡아 옮겨갔다. 아마도 느부사라단이 사로잡아갈 합당한 자를 선택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이 그들을 사로잡아가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기셨기 때문이라고 봄이 더 타당하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미 어떤 자들에게는 염병을, 어떤 자들에게는 칼을, 또 어떤 자에게는 기근을, 어떤 자들에게는 포로의 운명이 되게 할 것을 결정하고 계셨기 때문이다(15:2).

6. 그러나 본문에서 무엇보다 중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그들이 성전의 부장물을 취하여 갔다는 사실이다. 이미 상당한 가치를 지닌 것들 곧 "금 은 기명" 은 그들이 다 가져간 뒤였다. 그러나 몇 가지 남은 것들이 있었는데 이것마저 이번에 그들이 취하여 갔다(19절). 이번의 약탈된 대부분의 성전 용구들은 동(銅)제 용구들로 먼저 것보다 가치가 적은 것이었는데 이것들이 최후로 약탈되었다. 금이 없어지고나자 다음에는 동(銅)이 없어졌다. 이는 백성들이 예레미야의 예언을 따라서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성벽을 무너뜨린 다음 성전 기둥들도 뽑아 버렸다. 이 두 사건은 국가와 교회의 힘이요, 지탱자가 되시는 하나님이 그들로부터 떠나셨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시면 성벽도 성전 기둥도 버텨낼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성전 기둥들은 장식적인 또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었고 건물을 지탱하는 역할은 하지 않았다(왜냐하면 이 기둥에 의지하여 세워 올린 것은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기둥의 명칭은 "야긴과 보아스" 라고 하였는데 전자의 뜻은 "그가 세우시라" 는 뜻이요, 후자의 뜻은 "하나님께 능력이 있다" 는 뜻이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를 지닌 기둥들이 뽑히고 말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의 전을 지탱하시지도 않으시며 그 전의 능력이 되지도 않으시겠다는 의미를 지녔다. 본문에는 이 기둥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21-23절;왕상 7: 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임) 그 목적은 이 기둥들의 특별한 아름다움과 위용을 보여 줌으로 이들이 뽑히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를 나타내려는 데 있다. 이외에도 동(銅)으로 만든 제단에 속한 모든 기명들도 바벨론으로 옮겨졌다. 이것들이 약탈된 이유는 엘리 가문의 불법이 희생이나 제물에 의하여 정하게 될 수 없었던 것처럼 예루살렘의 불법도 정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삼상 3:14). 또한 본문에는 "이 모든 놋 중수를 헤아릴 수 없었더라" (20절)고 하였는데 이것들을 만들던 때에도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다(왕상 7:47). 즉 "그 놋 중수를 능히 측량할 수 없었더라" (대하 4:18)고 하였다. 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것들이 파괴되던 때도 헤아릴 수 없는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것들을 약탈한 자들은 고철상들이 하는 것처럼 무게를 측량하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무게가 얼마 나가든간에 이 모든 것은 그들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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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인들의 약탈(2) (예레미야 52:24-30)

우리는 본문에 매우 슬픈 사실이 설명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1. 립나에서 귀인 72명이 무참히 살해된 슬픈 사건이 기록되고 있다(이 수효는 이스라엘의 장로들의 수와 같은 것이었다. 민 11:24, 25). 열왕기 하 25장 18,19절에 보면 죽임을 당한 자의 수가 72명으로 계산되고 있다. 열왕기 하에 의하면 그들 중 다섯은 성전에 관련된 자들이요, 둘은 정치인들이요, 다른 다섯은 왕의 시종들이요, 나머지 60은 일반 국민들이었다. 한 가지 조항만을 제하고는 본문의 설명과 위의 내용은 일치한다. 열왕기 하에는 왕의 시종이 5명이라 하였고 본문에서는 7명이라고 한점이 차이가 있다. 라이트푸트 박사(Dr. Lightfoot)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느부사라단이 왕을 모신 사람들 중 7명을 잡았는데 그들 중에는 예레미야와 에벳멜렉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본다. 그런데 이 두 명은 우리가 전에 본 바와 같이 느부사라단이 방면하였다. 그러므로 죽은 사람은 실지로 7명 중 5명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본문의 74명에 2명을 제하니 72명이 되어 열왕기 하의 내용과 일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들 72명은 각기 나름대로 타락하여 있던 자들이었다. 이번에 죽은 사람들은 바벨론 왕에 대한 반역을 선동하는 일에 앞장 섰던 사람들로 시범을 보이기 위해 이들은 죽임을 당한 것 같다. 그 중 "대제사장 스라야" 가 첫 번째로 꼽히고 있는데 그가 거룩한 직책을 가졌다고 하여 이 죽음을 모면하지는 못하였다. 이미 그가 죄를 짐으로 거룩한 직책을 모독하였는데 어떻게 거룩한 직책이 그의 보호의 이유가 될 수 있겠는가? 방백 스라야는 너그러운 인품의 소유자였었다(51:59). 그러나 제사장 스라야는 그와는 달리 성급하고 불온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그는 바벨론 왕으로부터 처벌을 자초하게 된 것 같다. 유다 백성들의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이 시범적으로 하나님의 정의의 다스림을 받는다.

2. 나머지 포로들이 당한 운명. "유다가 사로잡혀 본토에서 떠나는" 광경은 참담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들 앞서 가나안 자손들이 쫓겨났듯이 그렇게 쫓겨났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만일 가나안 족속들의 추행을 반복하여 행하면 그들도 같은 운명을 만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었다(18:28). 포로로 잡혀간 구체적인 상황은 다음과 같다.

(1) 이전에 그들이 두 번 사로잡혀 갔던 일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하였었다. 한 번은 느부갓네살 통치 제7년에 있었고(28절 같은 사건을 왕하 24:12 에는 그의 통치 제8년에 일어났다고 전하고 있다) 다른 한 번은 그의 통치 제18년에 있었다(29절). 같은 사건이 12절에는 제19년에 일어났다고 전해 주고 있다. 그러나 잡혀간 포로의 수는 전자에 비해서(왕하 24:14) 본문에는 매우 적게 기록되고 있다. 열왕기 하에서는 18,000명이 사로잡혀 갔다고 한데 비하여 본문에서는 3,023명이 사로잡혀 갔다고 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사로잡혀 간 자들의 수효가 832명이라 하였는데 이것도 이치상 너무나 적은 수효이다. 왜냐하면 15절에 보면 남은 백성들 모두가 잡혀갔다고 하였는데 성에 거하는 사람들이 832명 이상이 되리라는 것은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라이트푸트 박사(Dr. Lightfoot)는 립나에서의 귀인들의 죽음과 이 잡혀간 사건을 관련시켜 본문에 사로잡혀 갔다고 기록된 자들은 실지로 반역도로 죽임을 당한 자들의 숫자를 말한 것이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2) 세 번째 포로로 잡혀간 사건. 이 사건은 앞에서도 언급되지 않았었다. 이 일은 느부갓네살 통치 제33년에 있었던 것으로서 예루살렘이 멸망된 뒤 4년 후의 일이었다(30절). 본문에 보면 "느부 사라단이 와서 사로 잡아간 자의 수효가 유다인이 745인이었다" 고 했다. 조치는 그달랴를 살해한데 대한 보복으로 취하여진 것 같다. 그달랴를 살해한 것은 바벨론 왕에 대한 다른하나의 반역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이번에 잡혀간 자들은 이 살해사건에서 이스마엘에게 동조하여 협력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사로잡혀간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이유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 같다. 그러나 이 사실은 확실하지가 않다. 이 모두가 사로잡혀간 자들의 총수효라고 한다면(30절에 "그 총수가 4,600인이었다" 고 하였다) 실질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에 비하여 이상하게도 잡혀간 자들의 수효는 적은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후에 그들이 나타날 때는 다시 무수하게 수효가 늘어나는 것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게 된다. 이유는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으리라. 애굽에 있을 때 그들의 고통당하는 땅에서 여호와께서 그들로 번식하여 창대케 하셨듯이 바벨론에서도 그렇게 번식시키셨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들은 압제를 당할수록 더욱 증가하였던 것이다. 진실로 이 백성이야말로 심판을 받는 일이나 자비를 얻는 일에서나 기적과 같은 존재들임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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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야긴이 에윌므로닥에게서 은총을 받음 (예레미야 52:31-34)

여호야긴 왕이 포로된 곳에서 다시 왕의 대우를 받는 본문의 내용은 열왕기 하 25장 27-30절에도 나와 있다. 다만 차이점은 앞에서는 에윌므로닥 즉위 원년 12월 27일이라고 하였고 본문에서는 25일이라고 한 점뿐이다. 그러나 이들의 오차란 실상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사소한 차이에 불과한 것이다. 아마도 그의 석방 명령은 25일에 내려졌던 것 같고 27일에 이르러서 비로소 왕의 위치로 대우받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 다음의 사실을 생각하여 보자.

1. 새로 등극한 왕은 법을 새로 제정한다는 점이다. 느부갓네살은 이 불행한 군주 여호야긴을 오래 옥에 감금하였었다. 그의 아들 에윌므로닥은 죄수 여호야긴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그의 부친으로부터 죄수를 위한 호의를 얻어낼 수는 없었다. 이는 마치 요나단이 다윗을 위하여 그의 부친을 설득할 수 없었던 것과 같다. 그러나 꽤 까다로웠던 노인이 죽자 그의 아들은 여호야긴을 면대하고 그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자녀들이 자기 대에 이르러 그들의 부친들이 이루어놓은 것을 시정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다. 그 시정 사항이 본문의 내용처럼 더 나은 것이라면 참으로 아름다운 행위라 하겠다.

2. 우리가 사는 세상은 늘 변하는 곳이라는 사실이다. 여호야긴은 인생을 시작하면서 왕좌에서 옥으로 전락하였었다. 그러나 본문에 보면 그는 다시 비록 권력을 쥔 자리는 아니더라도 보좌에 오르게 된 것을 보게 된다(32절). 전에 왕복이 수의로 바뀌었듯이 이제는 수의가 다시 왕복으로 바뀐다. 이것이 바로 세상사이다. 번영과 역경이 늘 엎치락거리는 것이 세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쁘지 않을 때도 기뻐할 수 있으며 슬프지 않을 때도 울 수 있는 생활 태도를 배워야 한다.

3. 역경의 밤이 아무리 길더라도 우리가 절망하지 말 것은 결국 동이 트고 만다는 점이다. 여호야긴은 18세 되던 이래 37년이나 옥고를 치루며 수모 속에서 지내왔었다. 우리는 그가 그동안 포로의 생활에 익숙하여 자유에 대한 매력은 잊어버렸을 것이라고 상상케 된다. 아니 오히려 오랜 옥고의 생활이 주어진 자유의 기쁨을 몇배 크게 맛보게 하였으리라. 고통의 시간이 예기한 것보다 더욱 길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게 하여 용기를 얻게 하자. 꿈을 지니고 살면 끝내는 좋은 날이 오고야 만다. 그러므로 그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러므로 옛말에 Dum spiro spero-즉 생명이 있는 곳에는 희망이 있다라 하였고 또 Non si male munc, et olin sic erit-즉 우리가 지금 괴로움을 겪는다고 늘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다라는 말도 있다.

4.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압제자들로부터 호의를 얻게 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는 압제자들의 마음을 이상하게 변화시키사 그의 백성에게 동정을 베풀게 하신다. 그러므로 시편에(시 106:46) "저희를 사로잡은 모든 자에게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도다" 라 하였다. 그는 거칠게 말하던 자들을 친절히 말하게 변화시키기도 하시며 그의 백성을 늑탈하던 자들로 그의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주게도 만드신다. 그러므로 압제를 당하고 있는 자들도 희망을 갖고 "여호와의 구원을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헛되지 않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같이 우리의 연한은 하나님의 장중에 있다. 또한 우리가 접촉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도 그에게 있다. 그러므로 그가 은혜를 베푸실 때 우리의 부족은 해결되고 만다.

5.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서의 예언과 역사를 비교해 보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배우게 된다.

(1) 아무리 높이 존경을 받는 교회나 개인도 타락하여 매우 사악해질 수 있다는 것이 이제만 있는 새로운 사실은 아니라는 점이다.

(2) 불의로운 생각을 품는 자는 결국 망하리라는 사실이다. 만일 불의를 회개하지도 또 내어 버리지도 않으면 파멸로 끝나는 것은 틀림없은 일이다.

(3) 외적으로 누리는 특권이나 외형적 직업은 죄를 용서받는다거나 파멸을 모면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죄와 파멸을 더욱 가중시킨다는 사실이다.

(4) 하나님의 말씀은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되어지는 일들은 어김없이 예언을 뒷바침해 준다. 인간의 불신이 하나님의 경고의 효력을 없애지 못하며 또한 그의 약속의 효력도 상실케 하지는 못한다.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가 본문에 피처럼 진하게 기록되고 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그의 경고를 조롱하는 모든 자들에게 당혹을 안겨 주겠고 어김없이 이루어지겠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로 "하나님을 조롱받으실 분으로 잘못 생각하지 못하게 하자" (갈 6:7)(공동 번역 참고).

 

52:32 없음.

 

52:33 없음.

 

52:34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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