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압에 대한 심판(1) (예레미야 48:1-13)
본문 내용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Ⅰ. 모압을 파멸한 본래의 인물에 대하여. 그는 모든 군대를 다스리시는 "만군의 여호와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시다(1절). 그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항상 괴롭히는 백성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간청을 들으시고 모압이 옛 이스라엘에게 행한 불의에 대하여 지금 처벌하고자 하신다. 원래 이스라엘은 모압과 상관도 말 것이 명령되었었다(신 2:9). 그러므로 모압의 파멸은 여호와의 일이라고 불리워진다. 왜냐하면 그는 이스라엘의 간구를 들어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말씀하신 대로 정확하게 그의 일을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이다(8절).
Ⅱ. 파멸에 사용될 도구에 대하여. "파멸하는 자가 이를 것인데" (8절) "그들을 추격하는" 칼을 가지고 올 것이라(2절)고 본문은 말해 주고 있다. 또 다른 곳에 이르기를 "내가 모압에게 방랑자들을 보낼 것이라" (12절)(한글 개역과 다소 틀림:역주). 그들은 집시처럼 멀리서 오며 또는 길을 잃어버린 자들처럼 너희를 찾아 올 것이다. 그러나 그들 이 "모압으로 유리하게 하리라" 고 하신다. 그들은 방랑자처럼 보이겠으나 모압 족속들로 하여금 참으로 방랑자가 되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모압인들의 일부는 도주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포로로 사로잡혀 갈 것이라고 하신다. 파괴하는 자들은 스스로 선동을 하여 모압인을 괴롭히려 한다. 그들은 모압의 중요한 성읍의 하나인 헤스본에서 모해한다. 그들이 목적하는 바는 바로 모압 나라의 파멸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이르기를 와서 그를 끊어서 나라를 이루지 못하게 하자고 한다. 침략자들을 돌이킬 아무런 수단도 없다. 그들이 온 것은 모압을 약탈하려는 것뿐 아니라 모압을 파멸하기 위하여서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침략자들에게 모압을 철저히 유린하도록 권고한다(10절). 그러므로 본문에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하였다. 곧 이 피를 흘리는 일, 파괴하는 일을 태만히 하는 자를 가리킴이다. 인간의 정으로 생각할 때 이 일은 썩 기분에 내키는 일이 아니지만 "여호와의 일" 이니 철저히 수행해야 한다는 말이다. 갈대아인들이 이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것은 은밀한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가테이커 씨(Mr. Gataker)는 말한다. 즉 그들은 모압 족속들을 파멸할 책임을 맡았고 그러므로 어리석은 동정을 베풀어 "칼을 금하여 피를 흘리지 않고" 자비를 베풀어서는 아니 되었다. 만일 그들이 모압에게 자비를 베풀면 사울이 아말렉 족속을 봐 줌으로 또한 아합이 벤하닷을 가게 함으로 저주를 자초하였듯이 그들도 칼을 불러들여 스스로 저주를 초래하는 결과를 빚어낼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다른 말씀에 이르기를 "너의 생명이 그의 생명을 대신하여 죽으리라" 고 하였다. 다음의 일반적인 원칙은 하나님을 위한 사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즉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거나 게을리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는 원칙이다. 다시 말하자면 여호와의 일을 하는 척하기만 하는 자들. 겉치레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척하나 자신의 개인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사람들, 여호와의 일을 하기는 하되 자가의 목적에 맞도록 적당히 하거나 하나님의 사업을 태만히 하는 사람들, 또한 마땅히 수고와 관심을 쏟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관심도 수고도 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저주가 내린다는 말씀은 오늘도 적용되는 원칙적인 말씀이다(말 1:14). 이와 같이 스스로 속이는 자가 되지 말도록 하자. 하나님은 이렇게 조롱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Ⅲ. 이 파멸의 무서운 사례와 그 결과에 대하여 성읍들은 황폐할 것이며 노략을 당할 것이며(1절), 끊어지고(2절), "황무하여질 것이다" (9절). 또한 "거하는 주민이 없어질 것이다." 거주할 집이 없을 것이며 또는 집은 있어도 살아야 할 사람이 없거나 또는 산다고 하여도 그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안전과 평안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성마다 노략질당할 것이며 그것을 피할 성이 없으리라" 고 하였다. 가장 강한 성도 적들의 세력 앞에서 스스로의 안전을 유지하지 못한다. 또한 아무리 훌륭한 성일지라도 적들의 자비나 은혜를 입지 못할 것이다. 촌락도 마찬가지로 폐허가 될 것이다. "골짜기는 훼파되며 평원은 파멸될 것이다" (8절). 평원을 덮으며 골짜기로 기쁨에 충만케 하던 곡식과 양떼들도 모두 파멸되고 먹히우며 짓밟히고 약탈될 것이다. 성직에 종사하는 자들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제사장들과 방백들이 함께 포로되어 갈 것이다." 그들이 섬기는 신, 그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 그들이 바라던 신 그모스도 그들과 같이 파멸할 것이다. 그의 신전들은 재가 될 것이며 그의 신상은 다른 전리품들과 함께 노략을 당할 것이다. 이 모든 파멸의 결과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1. 큰 수치와 혼란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본문에 "기랴다임이 혼란에 휘말리며" 미스갑도 그러하리라고 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성들에 대하여 때로 굉장히 자랑을 늘어놓은 것을 부끄러워할 것이다. "헤스본에 대한 모압의 청송이 없어졌다" (2절은 이렇게 읽어야 옳은 것이다). 그 성을 향하여 계획된 재앙이 닥치므로 그들은 더 이상 그 성의 강함을 자랑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들의 신들에 대하여서도 더 이상 자랑하지 못할 것이다(13절). 그들은 "그모스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인분만도 못한 신을 전적으로 믿고 그에게 간구를 한 사실 때문에 수치를 당할 것이다). "이스라엘 집이 벧엘을 의뢰하므로 수치를 당한 것 같을 것이라" 고 한다. 즉 이스라엘이 벧엘에 세운 금송아지 때문에 수치를 당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그들의 보호자로 믿었으나 기만당하였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금송아지가 그들을 앗수르인들의 손에서 구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모스도 갈대아인들로부터 모압족속들을 구해 내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하나님을 신뢰하지도 않고 우상의 어리석음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맛보고서야 믿으려 하고 우상을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즉 그들이 섬기던 신들이 그들을 위하여 전혀 아무런 봉사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때 수치를 느낄 것이라고 한다.2. 큰 슬픔이 있을 것이다. "부르짖는 소리가" 들릴 터인데(3절) 그 울부짖음은 약탈과 파멸 때문이다. 그들은 "슬프다 슬프다 모압이 망하였구나" (4절)라고 한다. 위정자들도 성읍에서 그들의 안전을 도모할 생각을 버린다. 그 영아들의 부르짖음이 들린다. 백성 중의 천한 무리들, 적은 어린이들, 순전하고 해를 입힐 줄 모르는 젖먹이들의 이러한 때의 울음은 가장 애처러운 것이다. 언덕을 올라가 보아도 골짜기로 내려가 보아도 어디나 울음바다이다(본문에는 "울고 울며" 라 표현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눈물에 젖어 있다. 눈물 없는 눈을 가진 자를 찾을래야 찾을 수 없다. 적들도 그 울음소리를 듣는다. 모압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울음 소리를 내서 적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일은 금물이었다. 그러나 곡성이 너무 크므로 그것을 숨길 수 없었던 것이다.
3. 큰 혼잡이 일어날 것이다. 그들은 서로 부르짖기를 "어서 서둘러 도망하여 네 생명을 구원하라(6절). 가능한 속력을 다 내 달려서 너의 안전을 도모하라. 비록 네가 광야의 떨기나무나 귀뚜라미 또는 말라빠진 관목처럼 맨발로 벗은체로 피하는 형편이라도 말이다. 네 소유물 중 어떤 것을 가지고 갈 생각일랑 말아라. 그러다가는 생명과 물건을 바꾸게 되리라(마 24:16-18). 그리고 불모의 광야일지라도 안식처로 여기라. 네가 생명 얻기를 노략물 얻은 것처럼 어렵게 얻으리라. 위험이 갑자기 신속하게 닥치리니 그러므로 모압에 날개를 주어 날아 피하게 하라. 그것이야말로 네가 그들에게 베풀 최대의 친절이 될 것이다. 오! 우리가 비둘기처럼 날개를 가졌으면" 이것이 그들의 요청하는 소리이리라. 그 이유는 그들에게 날개가 있어서 날 수 없는 한 도피할 길은 없기 때문이다.
Ⅳ. 하나님께서 열거하신 모압의 죄에 대하여. 이 죄야말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혹하게 처벌하신 정당한 이유이다.
1. 이는 그들이 지금까지 태평무사하여 그들의 부와 힘만을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본문에 의하면 "그들이 할 수 있다는 자신과 보물을 의뢰하였으므로" 라 하였다. 그들은 대단한 수고를 드려 그들의 성을 튼튼히 축조하였고 대역사를 이루어 놓았다. 또한 그들은 국고(國庫)를 가득 채웠고 개인의 금고도 돈으로 채워 놓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느 백성들과 같이 전쟁을 하여도 자신이 있다고 여겼으며 아무도 그들을 쳐들어오리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그들은 닥칠 수도 있는 위험을 무시하였다. 그들은 오직 그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제 악으로 스스로 든든케 하던 자들" 이었다(시 52:7). 그러나 이제 그들은 그들의 세상적인 신뢰가 얼마나 헛되며 어리석은 것인지를 실감있게 깨닫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역사(役事)를 정복하고 그들의 보물을 강탈해 갈 적을 보내시겠기 때문이다. 우리가 피조물로부터 얻은 위로를 강화시키고 또 신뢰하던 것을 변하여 오직 하나님만 신뢰해야 할 것임을 기억하자. 갈대에는 기대어 보아야 부러질 뿐이다.2. 이는 그들이 평화롭고 번영을 누리던 시기를 올바르게 이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1절).
(1) 그들은 오랫동안 침략당하지 않고 안정된 생활을 하였다. 그러므로 본문에 "모압은 어려서부터 평안을 누려왔도다" 라고 하였다. 모압은 이스라엘이 있기 전에 존재한 오래된 나라였고 또한 비록 작은 나라이고 강대한 나라들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오랫동안 태평 성대를 구가하며 지내왔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초년기서부터 간고를 겪었다(시 129:1, 2). 그러나 "모압은 초년기서부터 평안을 누렸다." 그는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기지 않음 같아서" 적은 변화에서도 맛보게 되는 고통을 겪지 못하였다. 마치 포도 알맹이와 함께 그대로 담가 둔 포도주 같아서 걸르지도 않고 따라 내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그것은 포도주의 아름다운 특성을 잃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모압은 동요된 적도 없었고 불편을 겪은 적도 없었다. 모압은 이스라엘이 자주 그랬던 것처럼 포로로 잡혀간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모압은 우상을 숭배하는 사악한 민족이요,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자를" 치려고 공모하는 자들 가운데 하나였다(시 83:2, 6). 뉘우침이 없이 불법에 빠져 생활하면서도 중단없는 번영을 누리는 자들도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2) 그들은 오랫동안 부패하여 왔고 돌이켜 본 적도 없었다. 모압은 "그 찌끼와 그대로 함께 그대로 보존된 포도주" 같았다. 그는 평안을 누리며 번영에 도취하였고 그 속에서 안주하였다. 그러면서 술이 그 찌끼에서 온갖 것을 다 뽑아내듯이 국가의 정신적인 힘과 생명적인 요소를 다 탕진하였다. 그렇지만 아직도 "그의 맛이 남아 있고 냄새가 변치 아니하였다." 즉 그는 과거에 악하였던 대로 여전히 악했다. 악인들이 여전히 악을 행하는데도 이 세상에서 행복을 누린다고 놀라지 말자. 그들의 평화와 번영이 쇠하는 법이 없으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그들의 마음과 생활에도 변화가 없는 것이다(시 55:19). 그러나 "태고부터 계신 하나님이 들으시고 변치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치 아니하는 자에게 보응하신다" 는 것을 기억하자.
모압에 대한 심판(2) (예레미야 48:14-47)
모압의 파멸이 본문에 보다 광범위하고 다양하게 또 여러 가지 표현을 통하여 애절하고도 감동스러운 필치로 예언되고 있다. 이 예언이 목적하는 것은 그들을 각성케 하여 거족적인 회개와 변혁을 일으켜 고통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또는 개인적인 회개와 변혁 운동이 시발점이 되어 민족적인 회개를 하도록 준비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이외에 우리에게 안겨 주는 것이 있다. 즉 하나님께서 패역한 백성과 겨루고자 오실 때 겪게 되는 인간 생활의 비참한 상태와 하나님의 진노의 힘, 그의 심판의 무서움을 깨닫게 하려는 데 있는 것이다. 이 긴 경고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이 두려움을 생각할 때 우리는 보다 실감 있게 말씀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본문에 사용되고 있는 생생한 상징과 비유를 비평적으로 따지게 되기보다는 하나님과 그의 진노에 대한 거룩한 외경을 지니게 된다.
Ⅰ. 본문에 경고되고 있는 파멸은 급작스럽고도 놀라운 것이었다. 그들은 안전하였고 또 아무리 강력한 적일지라도 싸워서 물리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였다(14절). 그럼에도 재난은 가까이 이르렀다. 그리고 모압은 그 재난을 격퇴할 수 없었으며 협상을 벌임으로 적을 지체하게 할 여유도 이미 없었다. 왜냐하면 "그 고난이 속히 임하였고" (16절), 곧 고비에 이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적이 "독수리처럼 날라올 것이다." 독수리가 먹이에게 달려들 듯이 빠르고 힘있게 적이 올 것이다(40절). 그리고 그가 "모압 위에 날개를 펼 것이다." 즉 싸우고자 진을 베푼다는 말이다. 그가 모압을 포위할 것이며 따라서 아무도 도망하지 못할 것이다. "모압의 요새들이 겁결에 점령되므로" (41절) 그 성의 위용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 모든 일들은 용사들의 마음까지 낙담하게 한다. 왜냐하면 용사들이 그들에게 격려가 될 사실들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당하므로 사기가 저하되었기 때문이다. 이 갑작스러운 두려움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기에는 일반적인 용기 이상이 필요하였던 것인데 그들은 비범한 용기로 자신들을 굳게 할 시간적 여유를 못가졌던 것이다.
Ⅱ. 이 파멸은 철저한 파멸이다. 그러므로 모압 전토가 황폐된다. 그러므로 본문에 "모압이 황폐되었도다" (15절). "모압이 패하여 수치를 당하였도다" (20절)라고 하였다. 그들이 잿더미가 되거나 적들에게 점령되었고 주민들은 강제로 성들을 떠나게 된다(15절). 심판이 임한 여러 성들의 이름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은 듯이 et cetera-즉 등등이란 말이 기록되었다. 재난이 "모압 땅 원근 모든 성" 에 전반적으로 임하는 것이라지만 선지자가 12-21절에서 그 중의 몇 성들을 특별히 언급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불법이 전반에 걸쳐 자행될 때 재난 역시 전반적으로 미치리라고 기대하는 자세가 올바르다. 이제 모압 나라는 그 위임과 권위를 상실하였다. 그러므로 본문에 "모압의 뿔이 찍혔다" 고 하였다. 즉 공격과 방어에 있어서 힘과 위력을 자랑하던 뿔이 꺾였다는 말이다(25절). "모압의 군대가 패하여" 다른 나라에 타격을 줄 수도, 자기에게 닥치는 타격을 막을 수도 없이 되었다. 모압 나라의 초기에 볼 수 있던 그 힘과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가? 이제는 "그 택한 청년들은 내려가서 살륙을 당한다" (15절). 그들은 전쟁에 내려가서 승리를 얻고 돌아오자고 서로 약속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내려가서 "살륙을 당하리라" 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책벌하는 사람들이 넘어지고 말 것은 확실한 일이다. 이들의 장래가 42절에 한 마디로 요약되기를 "모압이 멸망하고 다시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원수 노릇을 하는 자들은 곧 씨도 없이 멸하고 만다.
Ⅲ. 이 파멸이 통곡을 일으킨다. 이 파멸로 애곡이 일어나고 기쁨은 우울함으로 변모된다.
1. 파멸을 예언하는 선지자도 이 파멸 때문에 통곡한다. 그리고 파멸을 내다보며 슬퍼한다. 이는 선지자의 인류애에서 그리고 인간 본심에 대한 깊은 관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선지자 자신이 "모압을 위하여 울며 마음에 애통하리니" 라고 하였고(31절) 또 그가 "십마의 포도나무를 위하여 곡하며" (32절) "그의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피리같이 소리한다" 라고 하였다(36절). 모압이 파멸되므로 예레미야가 참 선지자임이 판명되겠지만 그렇다고 그는 그들의 파멸을 괴로움없이 대수로이 여길 수 없었다. 죄인들이 파멸을 당한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에게 기쁨이 될 리가 없다. 그러므로 그들의 멸망을 우리도 안타깝게 여겨야 한다. 그들의 파멸을 경고하는 자일지라도 이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본문의 말씀과 또 이 장(章)에 나오는 다른 말씀들도 이사야가 모압을 쳐서 예언한 것과 상당히 일치되고 있다(사 15:16). 이사야의 예언과 예레미야의 예언사이에는 시대적으로 상당한 격차가 있었지만 그것은 모두 한 분 같은 성령의 감동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성령은 하나님의 선지자들도 그들 앞서 활동한다. 선배들이 쓰던 용어로 말씀하게 하신다. 새로운 감동에 의하여 새로운 정황에 옛날의 말씀을 재현하는 것을 표절이라고 할 수는 없다.2. 모압 족속 자신이 파멸로 인하여 애곡한다. 이것은 그들에게 있을 수 있는 모든 수치 중에 최대의 수치였고 최대의 슬픔이었다. "영광 가운데" 부와 쾌락과 온갖 환락 가운데 앉았던 자들이 "메마른 데" 곧 물도 없고 위로도 없는 건조하고 메마른 땅에 앉을 것이라(18절) 한다. 이제는 그들이 "메마른 데 앉아서" 고난에 단련될 때가 이른 것이다. 왜냐하면 약탈자가 와서 모든 것을 벗기며 그들로 빈 손이 되게 하겠기 때문이다. 지방, 가장 외진곳에 있어서 위험에서 가장 멀리 있는 모압인들일지라도 사태가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어서, 전쟁의 상황이 어떤지를 알고 싶어서 도망치는 사람들에게" 일이 어찌 되었는가?" (19절) 물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것이 다 끝났으며 침략자들은 정복자 노릇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므로 통한에 잠겨 울며 부르짖을 것이다(20절). 그들은 한적한 곳에 털썩 주저 앉아 그들의 나라가 망한 것을 곡할 것이다. 그들은 쾌락으로 넘치곤 하던 성들을 떠나 바위 사이에 거하며 울음에 잠겨 지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노래하는 새는 아니다. 그들은 "비둘기처럼" (28절), "골짜기 비둘기처럼" (겔 7:16) 우는 새가 될 것이다. 쾌락에 잠긴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그들의 곡을 곧 슬픔의 곡으로 바꾸실 것이란 사실을 알게 하자. 그들의 슬픔이 극도에 이르러 스스로 "두발을 밀고 수염을 깎을 것이다" (37절). 이것은 절망적인 슬픔을 나타내는 행위이다. 유혹에 잠겨 있던 자들이 이제 스스로를 자학한다. 욥도 "그의 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의 생명을 끊지는 않았다. 격정이 거세게 몰아치면 지혜와 은혜는 결박당하고 그 밑으로 침전해 버리며 쾌락의 야성에 밀려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리하여 슬픔이 전 국토에 미칠 것이라고 한다(38절). 그러므로 본문에 "모압의 모든 지붕에서와 거리 각처에서 애곡함이 있으리라" 하였다. 그들은 "모든 지붕에서, 그들의 우상들에게 예배하였고 우상에게 그들의 사정을 애소하였었다." 그리고 "모든 거리는" 그들이 서로 담소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그 거리가 이제 슬픔과 두려움을 얘기하며 그러므로 슬픔과 두려움이 더욱 확대되는 곳이 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슬퍼하는 이유는 모든 것들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본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다. "내가 모압을 재미없는 그릇같이 깨뜨렸도다. 모압이 다시는 관심을 끌지 못하겠고 다시 결합되지 못하리라." 모압이 기뻐하던 것은 달콤한 과실들과 맛있고도 풍부한 포도주였다. 관능적인 기쁨이 그들의 기쁨의 전부였다. 그런데 이 모든 소산물들을 빼앗기고 그들의 정원과 포도원은 파괴를 당한 것이다. 또한 "그들의 모든 쾌락도 끝이 났다" (호 2:11, 12). 그들의 식물들은 이식된다. 즉 "바다를 넘어" 다른 나라로 옮겨져 거기에 심겨진 것이다. 이 때문에 큰 곡성이 울린다. 그러므로 본문에 "너의 여름 실과와 포도에 파멸하는 자가 이르렀도다" 하였고, 바로 이 때문에 "헤스본의 곡성이 엘르알레까지 당도한다" (34절). 또한 이르기를 "기쁨과 즐거움이 옥토와 모압 땅에서 빼앗겼도다" 하였다(33절). 또한 그들이 기뻐 외치며 밟곤 하던 "포도주 틀에 포도주가 없게 되므로" 그들의 모든 기쁨이 사라지고 만다. 기쁨의 외침도 빼앗겼으므로 그 땅에 더 이상 기쁨의 외침이 없을 것이라고 한다. 관능적인 기쁨으로 그들의 주된 기쁨을 삼는 자들은 이러한 것들은 쉽게 잃어버릴 수 있는 것들이므로 스스로를 최대의 슬픔이라는 폭군에게 예속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반면에 하나님으로 즐거움을 삼는 자들은 "비록 무화과나무에 꽃이 피지 않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더라도" 기쁨을 잃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 모압인들은 그들의 포도주만 잃었을 뿐 아니라 물까지 상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본문에 "니므림의 물도 말랐다" 고 하였고, 물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슬픔이 엄청나게 컸고 울음소리도 시끄럽게 울려 나갔던 것이다. 또한 그들의 통곡 소리는 "세 살 먹은 암소" 의 울음소리와 같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본문에 있는 표현 방법은 이사야 15장 5,6절에서 빌어온 것들이다.
3. 그들의 모든 인접국가들이 그들과 함께 애곡하며 파멸을 당한 그들을 조문할 것이 요청되고 있다(17절). 그러므로 본문에 "그의 사면에 있는 모든 자여 그를 위하여 탄식하라" 하였다. 모압의 슬픔을 위로하여서 인접국가들이 자기들을 동정하고 있음을 모압으로 알게 하라는 뜻의 말씀이다. 또한 원거리에 있어서 모압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명성에 대하여 다소 알고 있는 자들이 모압의 멸망을 알고, "어찌하여 강한 막대기가 부러졌는고" 하고 탄식하도록 하라는 말이다. 실상 모압의 힘은 주변 적들에게는 공포가 되었고 모압의 아름다움은 모압의 우방들에게는 자랑거리가 되었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지팡이" 라고 말씀되었다. 즉 국가들로 이 모든 사실을 앎으로 교훈을 삼게 하자는 것이다. 어떤 민족도 그 강함이나 아름다움을 자랑하거나 신뢰하지 말도록 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어떠한 안정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Ⅳ. 이 파멸은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모압으로 취하게 할지어다" (26절) 하였다. 취한 자는 악행을 저지른다. "취한 자가 그 토한 것에서 구른다." 그리고 이것은 꼴사나운 광경이요, 그러므로 마땅히 "조롱거리가 된다." 모압이 이같이 되리라는 말씀이다. 모압 족속들이 비틀거리다 쓰러질 때까지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워 취하게 하라. 그리하여 그들의 기지로 끝나게 하고 난폭한 자에 의하여 그들의 정열과 의도가 비웃음을 당하게 하라는 말씀이다. 또한 말씀하기를(39절), "모압이 그 사방 모든 자의 조롱거리와 두려움이 되리로다" 하였다. 즉 주변에 있는 자들이 모압의 그토록 자랑하던 위세가 실추되었으므로 웃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거만한 자들은 스스로 비난과 불명예를 자초하는 것임을 기억하자.
Ⅴ. 이 파멸은 모압인들이 사랑하는 모든 것들 위에 임하였다. 그들의 여름 실과와 포도뿐 아니라 그들의 재물도 소실되었다(36절). 그러므로 본문에(36절) "그 모았던 재물이 없어졌다" 고 하였다. 비록 모압이 재물을 안전하게 쌓아 두고 그것을 오랫동안 즐기며 살자고 했으나 그 재물들은 없어졌다. 금고에 저장된 돈도 뙤약볕에 따놓은 여름 실과처럼 없어지고 마는 것임을 기억하자. 재물이라는 것은 아무리 우리가 그것들을 주의 깊게 손아귀에 꼭 쥐고 있으려 해도 모르는 사이에 없어지며 먼지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재물이 더욱 나쁜 역할을 하는 것은 그것이 사이비 종교와 결탁될 때이다. 신앙이 잘못되고 거짓된 자들은 무엇보다도 재물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것과 헤어지지 않으려고 바둥댄다. 그러므로 재물은 본래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지만 이들에게는 위험물이 된다(35절). 그리하여 하나님은 "모압 산당에서 제사하며 그 신들에게 분향하는 자를 내가 그치게 하리라" 하신다. 제사를 드리던 언덕들이 파괴되겠고 제물을 소출해내는 밭들이 황폐하겠고 "그 신들에게 분향하는" 제사장들까지 살해당하거나 포로가 되어 잡혀갈 것이라고 한다(7절). 고통의 날에 우리로 견딜수 있게 하는 것은 참 신앙뿐이요, 참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것뿐임을 기억하자.
Ⅵ. 이 파멸은 마땅히 와야 될 정의로운 것이었다. 그들은 파멸을 받아 마땅하였으며 죄를 스스로 자초한 것이었다.
1. 그들의 가장 큰 죄, 바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계수하신 죄는 교만이었다. 이 사실이 6번이나 지적되고 있다(29절).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라 하였다. 모압 주변의 나라들도 이 사실을 알았다. 이스라엘이 그러했던 것처럼 모압에게도 이 사실이 그 얼굴에 씌어 있었다. "그는 극도로 교만하였고" 점점 더 악하여졌다. 본문에 있는 말씀 곧 "그 자고와 오만과 자긍과 그 마음의 거만" 이라 하여 여러 말로 같은 의미의 뜻을 나타내려 한 것은 무슨 의도였을까 생각해 보자. 이 말씀은 모압이 수없이 여러 번 교만을 부렸고 그 교만이 하나님에게나 사람에게 얼마나 거슬리는 것이었나 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다른 곳에도 이 사실이 문책되었다(사 6:6).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곳에서 보다 더욱 광범위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들은 자비로운 신의 섭리 아래 생활하면서도 겸손할 줄 몰랐다. 오히려 그들은 더욱 자고해지며 교만하여졌다. 실상 이러한 대대적인 파멸이 임한 첫 번째 이유는 교만이었다. 모압의 교만에 대한 두 가지 실례가 본문에 나오고 있다.(1) 모압은 하나님을 향하여 무례하게 행하였다. 모압이 "여호와를 거스려 자만하였기 때문에" 그가 부끄러움을 당함이 당연하였다(26절). 또한 같은 이유 때문에(42절), "멸망하고 다시 나라를 이루지 못하게 된 것이다." 모압 족속들은 여호와보다 그모스를 더 좋아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겨룰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무시하였다.
(2) 모압은 이스라엘을 경멸하는 행위를 하였다. 특별히 모압은 이스라엘이 고통을 당할 때 그리하였다. 그러므로 모압도 같은 곤경에 빠지며, 같은 수중에 떨어지며 조소거리가 될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모압이 "이스라엘을 조롱하였기 때문이다" (26,27절). 대부분의 모압인들은 그들의 이웃인 유다인들의 재난과 멸망을 듣고서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는 대신 그들이 당한 고통을 기뻐하였다. 그들은 유대인들을 도적질하다가 들킨 도적들로 취급하였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재난에 대해서 말할 때마다 기뻐 날뛰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들이 싫어하는 사람들이 망하는 것을 보면 은밀히 기뻐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내색하는 일은 야비한 짓이므로 지각있는 자들은 이를 은폐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모압 족속들은 그들의 기쁜 표시를 일삼아 선포하였다. 그리고 이스라엘과는 숙적임을 공언하였다. 그들은 곤경에 처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의기양양하여 그들을 비웃어 주었다. 이러한 짓은 같은 인간의 입장에서 또한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란 점에서 인간과 하나님에 대한 분별없고 불경하며 비정한 처사였다. 곤경을 당하는 다른 사람들을 조롱하는 자들은 의당히 또한 틀림없이 그들 자신 곤경을 당하게 되며 조롱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남의 재난을 보고 기뻐하는 자들 특히 하나님의 교회가 당하는 재난을 기뻐하는 자들은 처벌되지 않고 오래 지탱하는 법이 없다.
2. 이 죄 말고도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악행을 저지른 죄와 그들과의 거래에서 속이는 죄를 범하였다(30절). 그들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폐허를 조롱하였고, 조롱하면서 그것이 그들에게 위안거리요 즐거운 일인 양 행동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그 노함의 허탈함을 아노니 그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에 대한 또한 참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 대한 오랜 적의에서 비롯된 것이로다. 모압이 유다 민족이 당하는 재난으로 완전히 멸망할 줄로 여기고 있음을 내가 아노라. 또한 모압이 지금 갈대아인들에게 유대인들이 얼마나 나쁜 백성이며 그들이 자기들을 괴롭혔다고 말하였도다. 그러나 모압이 바라는대로 일이 진전되지 않으리니, 그가 거짓말하여도 아무 것도 성취치 못하였도다. 망했다고 그들이 기뻐하던 그 나라가 다시 일어날 것임이로다" 라고 하신다. 어떤 이는 본문을 "내가 그의 격분함을 아노니" 로 해석한다. 과연 일리가 있는 해석이다. 과연 모압이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미친 듯이 격분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거짓을 내가 아노니" 라고 하셨는데 과연 그들이 이스라엘을 속였던 것이다. 교회의 적들의 모든 발광과 거짓됨을 하나님은 완전히 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아무리 그들이 이 사실을 은폐하려 할지라도 그는 아신다(사 37:28).
Ⅶ. 파멸이 그들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닥쳤다. 즉 심판이 하나씩 하나씩 닥쳐와서 결국 그들로 끝장을 보게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한 가지 심판을 피하면 다른 심판에 닥쳐서 그것에 의하여 멸망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43절에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네게 임하나니" 라고 하였다. 두려움을 피하다가 함정에 빠지고 함정에 있는 그들에게 다시 올무가 씌워졌다. 그러므로 그들은 파멸에서 도망칠 수도 피신할 수도 없었다. 다른 곳에는 죄인이 당할 운명이 일반적으로 취급되었다(사 24:17, 18). 본문에서는 특별히 모압의 죄인들에 관하여 "두려움에서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떨어지겠고 함정에서 나오는 자는 올무에 걸리리라" (44절)고 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해를 "모압의 벌 받을 해로" 정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들의 날의 한계를 정하셨던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그가 집행하시는 심판에 의하여 자신이 알려지기를 원하신다." 그가 자신을 알리시는 이유는 그가 "그의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이시기 때문이다" (15절). 그는 심판하실 권한을 갖고 계실 뿐 아니라 결정하신 것은 무엇이고 할 수 있는 "만군의 여호와" 이시다. 44절에서 상징적으로 표현되던 것이 45절에서는 실질적으로 적용되어 설명되고 있다. 즉 적의 군대가 무서워서 마을을 벗어나 도주하던 자들이 이제는 안전하겠거니 하여 "헤스본 그늘 아래 선다." 오늘날을 보더라도 때때로 보병들이 후퇴하여 대포로 장비된 요새로 몸을 피하는 데 그곳이 보호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에 보면 그들은 헤스본에서도 낙담한다. 왜냐하면 "함정에서 나오는 자가 올무에서 걸리듯이" 그들이 안식처라고 여겼던 헤스본이 모세가 오래 전에 말했던 것처럼 그들을 삼켰다(민 21:28). 민수기에서 모세는 "헤스본에서 불이 나오며 시혼의 성에서 화염이 나와서" 모압 각처에서 나온 자들을 삼키리라고 하였다. 또한 그 불이 소란을 피우는 자들 또는 난봉군들과 잡류들의 우두머리를 좇으리라고 한다. 그렇다고 본문에서 말하는 자들이 거칠고 소란스러운 군중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호통치며 지휘하며 내노라 하는 지도자들의 당황하는 모습을 뜻하고 있다.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을 향하리라는 뜻이다. 이 모든 내용의 결론적인 말씀이 46절에 기록되고 있다. "모압이여 네게 화 있도다. 네가 불의를 행하였노라. 그러므로 그모스에게 예배하던 백성이 망하며 멸망되리라. 모압이여! 작별 인사를 나누자. 다가올 세대의 희망인 그대의 아들 딸들이 유대인들의 뒤를 따라 포로로 잡히어 가는구나! 그들이 유대의 재난을 기뻐하더니 이제는 그들이 그것을 겪게 되는구나."
Ⅷ. 그러나 이 파멸로 모든 것이 영구히 끝난 것은 아니다. 본장은 그들이 "말일에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리라는 짤막한 약속으로 결론이 주어지고 있다. 그들을 사로잡히어 가게 하신 하나님께서 "모압의 포로로 돌아오게 하리라" 신다(47절). 이같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 이상으로 모압 족속들을 부드럽게 다루신다. 비록 모압 족속일지라도 그가 "영원히 다투지 않으시며 항상 노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돌아왔을 때 모압도 돌아왔다. 아마도 본문의 예언은 모압 족속들까지도 구원에 동참한다는 사실을 나타내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희망을 갖도록 격려하려는데 그 주된 목적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말씀은 한걸음 더 나아가 복음의 시대를 내다보게 하여 준다. 유대인들 자신도 이 말씀은 메시야의 시대를 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때에는 죄와 사탄의 멍에 아래 포로가 된 이방인들도 신의 은총에 의하여 돌아올 것이요, 신의 은총이 그들을 자유롭게 하되 참으로 자유하게 하리라는 것이다. 모압에 관한 본장의 긴 예언이 여기서 끝을 맺는다. 그것은 위로로 끝난다. "모압을 심판하는 말씀이 이에 그쳤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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