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룩에게 주어진 예레미야의 구전 (예레미야 45:1-5)
바룩이 예레미야의 예언을 기록하고 낭독하는 일에 어떻게 해서 기용되었는가에 대해서는 36장에서 설명되고 있다. 이 일 때문에 그가 어떻게 왕의 위협을 당하였으며 그의 정당한 사유가 무시당하고 강제로 끌려 다녔으며 신의 보호 아래 어떻게 겨우 도주하게 되었는가가 거기 기록되었다. 그 앞의 내용에 본장은 연결되고 있다. 그러나 본 내용은 일개인에 대한 말씀이었으므로 이 책의 끝 부분인 이곳에 수록된 것이다. 마치 사도 바울의 빌레몬서가 그의 다른 서신들 맨 뒤에 위치하고 있듯이 말이다. 이제 내용을 자세히 고찰하여 보자.
Ⅰ. 왕의 사자들이 바룩을 찾으려 하므로 가련한 바룩이 도피처를 구하며 겪은 당혹함. 하나님께서 그의 당혹함을 기억하셨다. 바룩은 3절에서 "화로다 나여!" 라고 외쳤다. 그는 세상에 발들여 놓은 지 얼마 안 되는 젊은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하나님에게 속한 일에 열정을 느꼈고 그래서 기꺼이 하나님과 그의 선지자를 섬기고자 하였다. 그러나 막상 고난이 닥쳤을 때 그는 이 수고를 벗어나기를 바랐다. 재간꾸러기요 학자인 그에게는 출세의 길이 열려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궁지에 몰려 있었으며 감옥에 투옥되는 아니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모든 일들이 그를 실망시켰다. 그는 두루마리를 공개적으로 낭독하면서 이 낭독이 그의 명성을 높여 주기를 바랐고 그래서 그가 발탁되어 좋은 직책을 얻게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기대와는 달리 멸시를 당하고 수치를 겪게 되었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외쳤다. "이제는 마지막이로구나. 나는 추적자의 손에 잡히어 투옥되겠고 그 다음 죽음을 당하거나 추방되겠구나. 여호와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노라. 그리고 고통에 고통을 더하셨노라. 내 조국이 파멸하는 내용의 예언을 기록하고 낭독하는 슬픔을 맛보게 하시더니 이제는 그리하였고 범인 취급을 당하는 슬픔까지 겪는구나. 다른 이들은 이 일을 가벼이 여길지 몰라도 나는 이 슬픔을 참을 수 없구나. 이 슬픔은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겁노라. 나는 나의 탄식으로 피곤하며(나는 나의 한숨으로 피곤하며 그 한숨이 나를 죽이는도다) 평안치 못하도다. 나의 마음 가운데는 만족이 없구나. 내가 이 슬픔을 견디고자 하나 스스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으며 어떤 평화나 위로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구나" 라고 부르짖는다. 바룩은 좋은 사람이었으나 소심한 것이 그의 약점이었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초신자들은 신병(新兵)들과 같이 그들이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어 누구나 처음으로 직면하는 적은 어려움에 좌절하기 쉽다는 점이다. 그들은 보병들처럼 달리기만 할 뿐이지만 그 달리기에 그들은 지치고 만다. 그들은 환난의 날이 동트는 것을 보고 낙담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힘이 연약한 증거이다(잠 24:10). 또한 그들의 믿음이 약하다는 증거요, 조금만 상처를 입어도 조금만 놀랄 일이 있어도 보채는 어린아이에 불과하다는 증거이다.2. 하나님의 최상의, 가장 큰 신망을 받은 성도들이나 종들 가운데 몇몇 사람들도 폭풍우가 일어나는 것에 직면할 때 놀라며 사태가 최악의 지경에 이른 것으로 여겨 필요 이상으로 슬픔에 잠겨 평온을 잃기도 하였다는 점이다.
3.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초조하고 불만족해 하는 모습을 보실 때 그들을 불쾌히 여기신다는 점이다. 바룩은 이같이 선한 이유 때문에 또한 이같이 좋은 동료와 함께 고난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자신이 간주된데 대하여 기뻐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대신 초조해 하였고 운명을 저주하였으며 마치 그의 하나님이 그를 부당하게 취급하셨다는 듯이 불평한다. 그는 이 모든 말을 열이 나서 감정적으로 하였다. 하나님은 그가 모세에게 그리하였듯이 바룩에게도 노하시었다. 모세는 하나님의 노를 살 만한 일을 했었다. 모세는 화가 났을 때 "그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던 것이다" (시 106:33). 그러므로 하나님은 네가 여차여차하게 말하나 그 말이 합당치 못하다고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경솔히 말할 때 우리가 말한 것의 옳고 그름을 판별해 주신다.
Ⅱ. 바룩이 위와 같이 말한데 대하여 하나님이 그에게 답하신 말씀. 예레미야는 바룩이 이와 같이 고민하는 것을 보고 괴로워하였다. 또한 그에게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를 몰랐다. 예레미야는 바룩을 꾸짖기를 꺼려하였다. 그는 바룩이 그러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바룩을 위로하고 싶었으나 무엇이라고 말을 떼어놓을지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레미야가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을" 예레미야에게 하신다(4절). 예레미야는 바룩의 이러한 불평과 두려움의 밑바닥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듯이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드려다 보셨다. 이러한 불평과 두려움과 바룩의 속물적인 근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받은 상처는 가볍게 치료될 수 없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환부를 밝히신다. 그리고 바룩에게 그가 이 세상에 대한 기대가 너무 높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 바로 그것 때문에 그가 당하는 곤경과 고통에 대하여 슬퍼할 것이며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이었다. 만일 우리가 세상적인 즐거움, 위로에 대한 소망에 어리석게도 너무 탐닉하거나 그런 것들을 지나치게 탐내지 않는다면 세상이 우리에게 눈살을 찌푸린다고 하여 마음이 동요될 까닭이 없는 것이다. 현세의 좋은 것들에 대한 우리의 지나친 애착이 우리로 하여금 불행을 당할 때 견디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룩이 이런 특별한 난국에 처하여 이 세상에서의 풍족한 부와 영예를 바라고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요 그의 실수임을 보여 주신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배가 침몰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멸이 유다 나라에 임박해 있었다. 그것도 철저하고 전반적인 파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말씀하신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한 집으로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나 자신을 위한 포도원으로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이 온 땅 곧 유대교와 그 국가에게 그리하리라. 그런데 네가 너를 위하여 대사를 경영하느냐? 네가 부자가 되고 영예를 얻으며 무슨 인물이 되기를 바라는가?" 라고 하신다. 그러나 그 답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2. "이러한 시기에 네가 너의 오두막에 칠을 하여 가꾸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모든 것이 낮아지는 때에 어찌 너만 높아지기를 바라며 주변의 모든 것이 공허해지는 때에 너만 충족을 누리기를 바라겠는가?" 공동의 안녕보다 우리 자신을 더 위하는 것, 특별히 공적인 것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 자신은 큰 것만을 추구하는 것은 이스라엘 족속답지 않은 모습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이 세상에 그리고 세상 속에 처하여 있는 우리들에게 적용해 볼 수 있으리라. 하나님은 그의 섭리에 의해 부수기도 하시고 일으켜 세우기도 하신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일은 불확실하며 쇠퇴해간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항구적인 도성을 기대할 수는 없다. 모든 것이 보잘 것 없고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이 세상에서 자신을 위하여 대사를 경영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Ⅲ. 하나님께서 그를 격려하며 희망을 주심. 즉 그가 높아지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안전할 것이라고 하신다. "내가 모든 육체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인간들의 모든 국가들과 지배층과 사회 계층 위에 내리리라. 그러나 너의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를 생명 얻기를 노략물을 얻는 것 같게 하리라. 너는 이리저리로 끌려다닐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 네가 가는 곳에서 위험에 직면하리라. 그러나 너는 때로 극적으로 구원받으며 생명을 보존할 것인데 위험과 어려움이 많이 따르므로 네가 생명을 노략물 얻는 것같이 하리라. 네가 불가에서 구원받게 되리라" 하신다. 생명을 보존하고 지속한다는 것이 매우 큰 자비임을 기억하자. 우리는 이러한 자비들을 헤아려 알 의무가 있다. 이 자비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우리의 기회를 연장시키는 것이며 더 좋은 세상을 위한 준비를 하게 하시려고 허락하신 것이다. 특별히 죽음의 화살들이 우리 주변에 잔뜩 날아 올 때 생명을 얻는 일은 의미있는 은총으로 여겨야 하며 따라서 이에 대하여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우리가 생명을 얻었다면 우리가 바라던 바 대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불평해서는 안 된다. "생명이 음식보다 중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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