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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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1

예루살렘성의 함락 (예레미야 39:1-10)

전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날까지 시위대 뜰에 머물렀음" 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예언을 계속함으로 방백들을 더 이상 불안하게 하지 않았고 또 방백들도 그를 더 이상 박해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는 할 말을 다 했으므로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포위가 신속히 진행되면서 일어난 일들은 다음과 같았다.

Ⅰ. 성이 드디어 일격에 함락되었다. 하나님께서 성을 대적하여 싸우시는데 성이 어떻게 견뎌낼 수 있겠는가? 느부갓네살의 군대는 "시드기야 9년 10월" 곧 깊은 겨울에 성 앞에 당도하였다(1절). 느부갓네살 자신은 그후 곧 열락에 탐닉하느라 본국으로 돌아가고 장군들만 남아서 계속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한동안 진을 풀었으나 그러나 곧 다시 군대를 배가하여 무섭게 성을 공격하였다. 결국 "시드기야 제 11년 4월 9일" 곧 한여름쯤 성은 함락되었고 그들은 입성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군대는 기근에 의해 쇠약해진데다 이제는 식량도 모두 떨어져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였다(2절). 예루살렘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누구도 그 성문으로 적이 들어올 수 있으리라 믿은 사람이 없었다(애 4:12). 그러나 그들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은 진노하사 그의 보호를 거두시었다. 삼손이 모발을 짤렸을 때처럼 그 성은 다른 성들과 같이 약해졌다.

Ⅱ. 바벨론 왕의 방백들이 "중문" 을 점령하였다(3절). 어떤 이들은 이 문이 "제 2문" (습 1:10)라고 불리운 문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문은 성의 중간을 가로질러 세워진 벽 사이에 있는 문으로 생각되고 있다. 방백들은 여기서 일단 조심스럽게 멈추고는 감히 앞으로 진격하지를 못하였다.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생명을 아꼈다. 그리하여 성내를 샅샅이 수색하라는 지시를 하여 복병의 위협이 없음이 확인될 때까지 기다렸다. 그들은 "중문" 에 앉아서 성을 내려다보며 명령을 내린다. 방백들의 이름이 본문에 나온다. 그런데 그 이름들이 거칠고 상스럽게 여겨진다. 거기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과 관계있는 뜻을 지닌 "엘리야김, 힐기야" 란 이름을 지닌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방신들의 이름과 관계있는 뜻을 지닌 "네르갈레셀, 삼갈르보" 등의 이름을 지닌 자들이 앉는다. 죄가 얼마나 슬픈 결과를 초래하였는가! "랍사리스, 람마그" 등의 이름은 저명한 인물들의 이름은 아니고 직책을 뜻하는 이름이었다. "살스김" 은 "랍사리스" 는 환관장이란 뜻이다. 네르갈사레셀도 앞에 기록된 같은 이름을 지닌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기 위하여 "랍마그" 라 칭하였는데 랍마그란 뜻은 "막사장" 이란 뜻으로 징집대장 또는 막사 책임대장이라고 볼 수 있겠다(한글 개역에는 박사장이라 되어 있으나 본문에는 막사장으로 나온다. 역자 주). 이들과 또 다른 장군들이 문에 앉아 있었다. 이제 예레미야가 오랫동안 예언한 것, 즉 북쪽 왕국의 족속들이 몰려와 예루살렘 문 입구마다 버티고 앉아있으리라던 말씀이 성취되었다(1:15). 이방 신상들이 그렇게 자주 세워지던 곳을 이방의 방백들이 점령하였다는 것은 마땅한 결과이다.

Ⅲ. 시드기야는 성문마다 점령하여 지키고 있는 바벨론 왕의 방백들에게 들킬까보아 변장을 하고 그의 안전을 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시기를 틈타 죄책감과 두려움을 안고 "성을 벗어났다." 어두움뿐이지 그 외에 그를 보호할 아무 것도 없었다(4절). 그러나 어두움도 더 이상 그에게 도움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바벨론 군사가 그를 발견하여 추격해 왔고 그래서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최선의 길을 택하였지만 그것이 그에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그는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고 "여리고 평원에서" 추격자들의 손에 사로잡혔다(5절). 거기서 그는 포로로 립나에 잡혀갔고 거기서 바벨론 왕은 그를 반역자로 심판을 내렸다. 사형이 언도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내려진 벌은 누가 생각해도 그렇듯이 사형보다 더 못한 것이었다.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1. 바벨론 왕은 시드기야가 보는 눈앞에서 "그 아들들을 죽였다." 시드기야가 이제 불과 32세밖에 안 된 것으로 보아 자녀들은 모두 어렸을 것이고 그 중에는 갓난아기도 있었을 것이다. 이 귀여운 어린것들의 죽음은 시드기야 자신이 수십 번 죽는 것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이었다. 특히 그의 오만 때문이었음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였다. 그는 자신이 이 사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경고를 받았던 것이었다. "네 아내들과 자녀는 갈대아인에게로 끌어냄을 입을 것이라" (38:23).

2. 바벨론 왕은 유다의 모든 귀족들을 죽였다(6절). 이 막다른 골목에 몰리도록 그에게 간하였던 예루살렘의 방백들만 아니었고(오히려 이들이 제거되는 것을 보는 것이 시드기야에게 시원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일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지방의 유지들도 포함되었다.

3. 왕은 "시드기야의 눈을 빼게 하였다" (7절). 하나님의 말씀의 밝은 빛 앞에서 눈을 감았던 그에게 일생 어둡게 살라는 벌이 내린 것이다. 그는 "무지무각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는" 왕들 가운데 속해 있었다(시 82:5).

4. 바벨론 왕은 그를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기 위하여 "두 개의 구리 사슬로 그를 묶었다." (난외주에는 족쇄라고 하였다). 거기서 그는 남은 일생을 비참하게 보냈다. 이 모든 비극적인 이야기는 열왕기 하 25장 4절 이하에도 기록되어 있다.

Ⅳ. 얼마 안 있어 성은 불탔다. 성전 궁전 등 모든 것이 불타고 성벽은 무너졌다(8절).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보냄을 받은 자들을 돌로 친 성이여. 시드기야여 시드기야여, 네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때맞게 복종하기만 했던들 이 운명을 막을 수도 있었을 터인데" 라고 탄식하게 된다.

Ⅴ. 남은 백성들은 모두 "바벨론으로 잡혀갔다" (9절). 이제 그들은 그들의 조국 그 아름다운 땅과 그 안에 있는 그들의 소유와 마지막 작별을 하고 짐승들처럼 정복자들 앞에서 수백 마일을 끌려가야 했다. 정복자들은 그들의 포악한 주인이 되었고 낯선 땅에서 그들은 정복자들의 처분만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가혹하게 그들을 혹사할 자들의 종이 될 수밖에 없었다. 폭군(Tryrant)이란 단어는 본래 갈대아에서 유래한 것으로 군주란 단어 대신 갈대아 일상어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그들이 주인 노릇을 할 때는 다른 누구보다 난폭하리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가련한 유대인들이 그렇게 말할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소수의 무리가 남아 있었는데 그들은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는 그래서 저항할 필요도 없는 "가난한 백성들" 이었다. 그들은 자유로웠을 뿐만 아니라 고향에 남아있을 수도 있었다. 또한 "시위대장은 그들에게" 그들이 전에는 주인이 되리라 꿈도 못 꾸었던 "포도원과 밭을 주었다" (10절).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찰하여 보고 끝내자.

1. 변화막측한 하나님의 섭리. 즉 어떤 이들은 몰락하고 또 어떤 이들은 벼락부자가 되었다(삼상 11:15). 기록되기를 "배고픈 자는 맛있는 것으로 배불리 먹고 부자는 빈 손으로 돌아가리라" 함과 같다. 어떤 이들의 멸망은 다른 이들의 출세를 시사해 준다. 그러므로 풍성할 때는 "기뻐하되 기쁘지 않는 자처럼 하고" 곤경에 처해서 "눈물이 흐를 때도 울지 않는 자처럼 해야 한다."

2. 행위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섭리. 부자들은 거만한 압제자 노릇을 해왔었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의 불의에 대한 처벌이 내렸다. 반면 가난한 자들은 인내심 있는 고통을 겪은 자들이었다. 이제 그들의 인내로 인하여 가난한 자들은 후하게 보상을 받았다. 그 보상은 그들의 모든 지금까지의 억울함을 보상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진실로 하나님은 계셔서 세상을 심판하신다." 이 세상에서도 심판하시는데 저 세상에서는 한층더 하시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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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의 석방 (예레미야 39:11-18)

본장이 전반부에서는 심판을 노래하였으나 오히려 지금은 긍휼을 노래해야 한다. 그리고 심판하시며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했어야 한다. 다음 사실을 생각하여 보자.

Ⅰ. 예레미야에게 베풀어진 은혜로운 섭리. 예루살렘이 파멸되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을 때 예레미야는 그의 구속이 가까워옴을 보고 용기를 얻어 머리를 들었다. 예루살렘의 제2의 파멸이 가까웠을때 그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였다(눅 1:28). 느부갓네살은 예레미야를 보살펴 주라는 특별한 명령을 내렸다. 또한 그를 정중히 대하라고 명하였다(11:12). 느브사라단과 베벨론 왕의 모든 장관들이 이 명령을 엄수하여 그를 옥에서 풀어 주고 온갖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13,14절). 이 사실을 좀 더 고찰하자.

1. 느부갓네살의 관대한 처사에 대하여 그는 오만한 군주였지만 이 가련한 예언자는 알아 보았다. 틀림없이 그는 정탐군들로부터 예언자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였을 것이다. 즉 예언자가 왕과 백성들을 종용하여 자기에게 항복하라고 하였고 또 유다와 다른 나라들을 바벨론 왕이 쳐부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는 사실을 그는 들어서 알았다. 또한 그 이유 때문에 예언자가 대단한 곤경을 겪었음도 알았다. 이 모든 사실을 감안하여서(비록 그는 예언자가 바벨론도 결국은 망하리라고 예언하였다는 말을 들었지만)느부갓네살은 특별한 호의를 표시하였던 것이다. 가장 천한 자의 봉사와 고통도 볼 줄 아는 것이 위인의 인품이어야함을 기억하자. 성을 점령하기도 전에 왕이 이러한 명을 내린 것과 또 방백들은 치열한 전투 중에도 이 명을 준수하였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이것은 본받을 만한 사실이므로 본문에 기록되었다.

2. 시드기야와 이스라엘 방백들이 당한 치욕에 대해서. 그들은 예레미야를 옥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바벨론 왕과 그의 방백들이 그를 풀어 주었다. 하나님의 백성과 그의 사역자들이 자칭 거룩한 성에 속해 있다는 자들보다는 외방 사람들과 이교도들에게 더 공정하고 친절한 대접을 받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바울도 대제사장 아나냐보다는 아그립파 왕에게서 더 큰 은혜를 입고 공정한 심판을 받았다.

3. 예레미야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수행에 대하여. 하나님은 그의 수고를 보상하신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내가 진실로 네 대적으로 재앙과 환난의 때에 네게 간구하게 하리라" 약속하였다(렘 15:11). 예레미야는 예언자로서의 그의 사명에 충성하였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그리고 자신이 그에게 행하신 약속에 대해서 신실하심을 나타내신다. 이제 예레미야는 그가 고통을 당한 날 수만큼 위로를 받는다. 그리고 수천 명이 칼날에 쓸어지나 자신은 안전함을 경험한다. 거짓 선지자들은 그들이 결코 임하지 않으리라던 심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14:15). 그 거짓 예언이 그들의 비참함을 더 한층 가중시켰다. 참된 예언자는 그가 오리라고 말하였던 심판을 피하였다. 그리고 그 참된 예언은 그를 더욱 안전히 피할 수 있게 하여 주었다. 박해자들을 처벌하는 바로 그 도구가 박해받는 자들에게도 피신의 수단이 되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 왕의 손길이 닥쳐 온다해도 그의 석방에 큰 장애를 받으리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 사건들 속에서 더욱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보았다. 다음 장에서 이 사건이 보다 자세히 설명될 것이다.

Ⅱ. 에벳멜렉이 받은 보답. 그가 예레미야에게 친절을 베푼 보상을 받을 것이 보장된다. 이 메시지는 예레미야 자신에 의하여 보내졌다. 예레미야는 에벳멜렉이 자기에게 보인 친절에 감사하고 자기대신 하나님이 갚아 주실 것을 구했다. 에벳멜렉은 "예언자의 이름으로 예언자를 구하였으므로 예언자의 상을 받았다." 이 메시지는 에벳멜렉이 예언자에게 호의를 베푼 후 곧 그에게 보내진 것이었다. 그러나 성이 점령된 후에 본문에 메시지의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당시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에벳멜렉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푼 것도 예레미야 때문임을 알리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보여진 특별한 은혜의 징표였다. 그들은 어떠한 재난 속에서 그것에 그들이 말려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에벳멜렉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1. 하나님께서 그토록 오랫동안 또 자주 경고되었던 파멸이 예루살렘에 확실히 임한 것을 에벳멜렉에게 알게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예레미야에게 호의를 베푼 것을 만족스럽게 여기도록 그는 예레미야가 참된 예언자라는 많은 증거를 받았다(10절).

2. 하나님께서는 에벳멜렉이 닥쳐 올 심판에 대하여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게 하라고 지시하셨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용감하였다. 그래도 하나님의 채찍은 두려워하였다. "적들이 바로 그가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슬픔과 두려움을 어떻게 위로하실지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의 영혼의 곤경 중에 있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3. 에벳멜렉이 재난을 피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라고 지시하신다. 그러므로 본문에 "내가 너를 구원하리니" 또 "내가 단정코 너를 구원할 것인즉" 이란 말이 반복된다. 그는 하나님의 예언자를 구덩이에서 구출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께서 그를 구출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직접 간접적으로 그의 이름을 위하여 행한 어떤 봉사에 대해서도 뒷짐지고 관망하시는 분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예레미야의 생명을 구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네 생명이 노략물을 얻음같이 되리라" 하신다.

4. 하나님이 그를 위하여 예비해두신 특별한 은총을 내리시는 이유는 "네가 나를 신뢰함이니라고 여호와가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자기에 대한 섬김을 보상하심에 있어서 그들이 섬기는 태도를 주목하신다. 그리고 그들의 섬기는 입장에 따라 보상하신다. 실상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보다 우리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없으며 복종의 태도보다 더욱 하나님에게 귀하게 보이는 것은 없다. 에벳멜렉이 하나님을 신뢰하였으므로 그는 하나님을 소유할 수 있었고 그의 편에 서 있었으므로 그는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 착한 사람이 의무를 수행하는데 그랬듯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최악의 재난의 시기에 그들의 소망이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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