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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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1

예레미야가 구덩이에 갇힘 (예레미야 38:1-13)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예레미야는 그가 수없이 말하였던 것을 그의 설교에서 다시 명백히 주장하고 있다. "이 성이 반드시 바벨론 왕의 군대 손에 붙이리니 그가 취리라" (3절)고 계속 말한다. 그 시기가 지연된다고 하여도 끝내는 취하여질 것이라 한다. 이 성은 구하지 못하더라도 백성들을 어떻게 해서라도 구하고자 하였으므로 그는 이 환영받지도 못하는 메시지를 계속하여 전하곤 하였다. 즉 그의 충고를 듣고 항복하는 사람은 살리라고 한다(2절). "성을 지킬 욕심으로 성안에 머물러 있지 않도록 하라. 그것을 쓸데없는 짓이다. 갈대아인에게 가서 사태가 악화되기 전에 그들의 자비를 구하라. 그러면 살리라" 한다. 항복하는 자들을 갈대아인들이 칼로 죽이지 않을 것이요, 그들에게 숙소를 제공할 것이다(Satis est prostrasse leoni-즉 사자는 그의 적수의 굴복으로 만족히 여긴다는 말이 여기서도 통한다). 그러면 그는 기근과 역병을 피할 것이다. 그러나 성안에서는 기근과 역병으로 많은 무리가 죽게 되리라 한다. 하나님의 진노의 손길에 대항하는 것보다 참고 복종하는 것이 자신을 위하여 유익함을 기억하자. 자유를 얻을 수 없다면 생명을 얻는 것으로 족히 여기고 명예심 때문에 어리석게 생명을 내던지지 말자. 생명을 아껴서 좋은 시기를 기다려야 한다.

2. 방백들은 예레미야에 대한 악의를 버리지 않고 고집한다. 선지자로서 예레미야는 그의 조국에 충성하였고 그의 의무에 충실하였다. 오히려 그의 충심 때문에 여러 번 고난을 당하였다. 그는 지금 비록 왕의 덕분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입을 다물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적들은 그를 더욱 미워하여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서 거닐 수 있는 자유를 남용하고 있다고 불평하였다. 비록 설교하러 성전에 갈 수는 없었지만 그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과의 사담을 통하여 그는 하고 싶은 말을 하였다. 그러므로 방백들은 왕에게 예레미야를 위험 인물로 또 그가 사는 조국과 정부에 불충성한 자로 고하였다(4절). "이 사람이 백성의 평안을 구치 아니하고 해를 구한다" 고 그들은 말하였다. 그들은 그가 부당한 암시를 내뱉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실상 그보다 더 예루살렘의 유익을 위하여 자신을 바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그의 설교가 불순한 내용을 지녔다고 표현한다. 설교의 의도는 분명히 사람들을 회개케하여 하나님에게 돌아오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군대와 시민의 손을 강하게 하는 최상의 것이었다. 그러나 방백들은 그의 설교가 "모든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고" 그들을 낙심시킨다고 하였다. 만약 그의 설교가 그들을 낙심시켰다면 그것은 바로 그들 자신의 잘못 때문이었다. 악한 백성들은 하나님의 신실한 사역자들을 그들의 원수로 여기는 것이 상정임을 기억하자. 그들이 계속 완고히 지낼 때 자신들이 스스로에게 원수가 된다는 것을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보여 주기 때문이다.

3. 위의 이유로 이제 왕의 허락 하에 예레미야는 다시 토굴 속에 갇힌다. 이는 거기서 예레미야를 죽게 하려는 뜻에서였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가 하나님이 보내신 예언자임을 확신하였지만 그를 변호할 용기는 없었다. 그는 예언자를 미워하는 무리들의 극성에 굴복하였다(5절). 그러므로 그는 "예레미야가 너희 손에 있느리라" 고 말했을 뿐인데 이는 그가 직접 가혹한 형을 내릴 수 없어서였다. 여호야김이 통치할 때는 왕보다는 방백들이 예언자들에게 호감을 가졌던 사실을 우리는 고찰하였었다(36:25). 그러나 지금은 방백들이 더욱 예언자를 박해하였다. 이것은 파멸이 신속히 무르익고 있다는 징조였다. 왕이 만약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위한 일이 있었다면 방백들에게 그들이 원하든 아니하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왕의 위치라고 그가 설득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왕과 그의 선지자 때문이었으므로 그는 이 일에 대단히 냉담하였고 비열하게도 자기는 슬쩍 빠지고 방백들에게 맡겨버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왕은 조금도 너희를 거스릴 수 없느니라." 착한 사람들을 위하여 몰래는 호의를 베풀지만 정작 필요할 때 그들을 보호하지 못하고 그들에 대하여 계획된 음모를 저지할 수 있는데도 막지 않는다면 이런 무리들의 책임도 막중한 것임을 기억하자. 왕에게서 위임을 받게 되자 방백들은 가련한 "예레미야를 시위대 뜰에 있는 말기야의 굴에" 즉시 집어넣었다(6절). 예레미야를 "줄로" 달아내린 것으로 보아 상당히 깊은 굴임을 알 수 있고 "물이 없고 진흙뿐이라" 한 것으로 보아 불결한 굴임을 알 수 있다. 요세푸스는 "그가 목까지 차오르는 진흙 구덩이에 묻혔다" 고 전해 주고 있다. 여기다 그를 쳐넣은 자들의 의도는 그가 여기서 배고픔과 추위에 못 견뎌 죽게 되기를 바라서였다. 그를 공개적으로 죽이면 그가 하는 말에 백성들이 선동되어 자기들을 향하여 저항할까 염려하였으므로 아무도 모르게 참혹하게 죽이려 하였다. 수많은 하나님의 증인들이 이런 식으로 남모르게 사라져 옥같은데서 굶어 죽었다. 그리고 시체가 발각되는 날에야 사인이 밝혀지곤 하였다. 이러한 곤경을 당하여 예레미야가 어떻게 행동했는가에 대하여 본문에 전해 주는 바는 없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곳에서 자신의 모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애 3:55, 57).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하셨나이다."

4. 정직한 환관 에벳멜렉이 왕에게 청원을 한다. 그는 환관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가련한 수난자를 대변하였다. 방백들은 이 사건을 비밀리에 수행하려 하였지만 이 착한 사람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아마도 이 사람은 무언가 선을 행할 기회를 찾았던 사람 같다. 굴이 왕궁 안에 있었으니 어쩌면 그가 굴에서 나는 예레미야의 신음 소리를 듣고 이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도 모른다(7절). 에벳멜렉은 구스인으로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다" (엡 2:12). 그렇지만 그에게는 본토인인 이스라엘 자손들보다 더 아름다운 인도정신과 경외심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도 유대인들보다는 이방인들 가운데서 신앙있는 자들을 많이 발견하셨다. 에벳멜렉은 악한 정권 아래에서 살았고 또 매우 부패하고 타락한 시대에 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공평과 경건에 대한 깊은 인식력을 갖고 있었다. 하나님은 각처 각층마다 남은 자를 보존하시고 있다. 하다 못해 "가이사의 궁전에도 성도들은 있었다." 이제 왕은 송사를 해결하고 탄원과 호소를 듣기 위하여 또는 전쟁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하여 "베냐민 문에 앉아 있었다." 에벳멜렉은 즉시 그곳으로 그를 만나러 갔다. 왜냐하면 사태가 급박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왕에게 사적으로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으려고 우물거리거나 문제를 지연시키면 예언자가 죽겠기 때문이었다. 생명이 경각에 달렸을 때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된다. 생명이란 참으로 고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에벳멜렉은 예레미야가 부당한 처우를 받았음을 담대히 주장한다. 그는 왕에게 그렇게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비록 이 일을 추진시킨 자들이 방백들이었고 또 그들이 현재 궁전에 있으며 또 그들이 왕의 위임장을 받아 이 일을 행하였다 할지라도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특별히 압제가가 거물급 인사일 때 무죄한 피해자가 보호를 탄원할 곳은 왕좌밖에 더 있었겠는가? 에벳멜렉은 이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서 참으로 용감하였다. 그는 이 일을 주저하면서 처리하지 않았다. 그가 구전에서 높은 위치에 있었다 할지라도 그의 이러한 분명한 행위는 그의 지휘를 박탈당할 위험을 수반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왕에게 충언하여 왕으로 마음먹은 대로 결단을 내리도록 도왔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주 왕이여, 저 사람들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행한 모든 일은 악하니이다." 그들이 그를 부당하게 취급하였다. 그는 전혀 그런 처벌을 받을 만한 잘못이 없다. 그들이 그를 무자비하게 다루는데 이는 극악한 포행자에게도 가하지 않는 벌이었다. 그들로 그를 무참하게 죽이게 하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로 그가 있는 곳에 그대로 두도록 막지 않으면 그가 갖힌 시위대 뜰에서 "주려 죽으리이다. 성 중에 떡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의 몫으로 배급될 수 있는 빵을 저장한 창고가 비었다는 등의 내용을 왕에게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곤경 중에 있는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그들이 전혀 기대하지 않던 곳에서 조력자들을 일으키신다. 또한 그의 사역을 위하여 기대 이상의 능력있는 인물들을 일으키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5. 그를 석방하라는 명이 즉시로 내린다. 그리고 에벳멜렉은 이 명령이 사실대로 집행되는가를 주의하여 살펴본다. 방백들에 대하여는 속수무책이었던 왕이 갑자기 마음이 변하여 방백들을 무시하고서 예레미야를 석방할 결심을 한다. 그리하여 그는 놀랍게도 30명이나 되는 사람에게 명한다. 이는 방백들이 이 명령을 저지하고자 무리들을 선동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리하여 구덩이에서 예레미야를 구출해내는데 상당수의 호위병까지 동원되었다(10절). 이 사건은 우리로 하나님을 위한 일에 담대하도록 용기를 주고 있다. "왕들의 마음도 결국은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 는 것을 생각하면 생각했던 것보다는 안심하고 일을 성취하겠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에벳멜렉의 승리였다. 그래서 그는 곧 예레미야에게 이 좋은 소식을 전하였다. 에벳멜렉이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끄집어 낼 때에 얼마나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하나님은 불의치 아니하사 그의 백성과 그의 종들에게 베풀어진 "사랑의 수고와 행위를" 결코 어떠한 환경에서라도 잊지 않으신다, 히 6:10). 그의 세심한 배려가 본문에 나타나 있다. 그는 예레미야를 끌어올리다가 밧줄로 상하게 할까바 그의 팔목에 낡아서 부드럽게 된 헝겁을 대게 하였다. 아마도 그를 달아내릴 때 밧줄에 의하여 팔목이 상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한 그는 헝겁이 진흙투성이가 될까 보아 조심스레이 헝겁을 내려 주었다(11,12절). 곤경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안도감을 갖게 하되 여민과 또 아끼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모든 행동은 의아심을 품지 않게 설명해 주어야 하며 이로써 더욱 고마운 마음을 가게 하는 것이 된다. 또한 다해진 헝겁조각이 얼마나 유용하게 쓰이고 있는가를 생각하여 보자. 그러므로 이런 것일지라도 마구 버려서는 안 된다. 밥알 하나를 아끼듯이 이러한 것도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왕궁 곡간일지라도 가난한 자나 병자를 위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낡은 헝겁조각까지 정성스럽게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예레미야는 구덩이에서 구출되어 이제는 "시위대 뜰" 에 거하게 되었다(13절). 에벳멜렉은 왕의 마음이 움직여진 기회를 틈타서 예레미야를 방면해 주도록 요청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예레미야가 다른 곳에 있는 것보다 안전하다고 훌륭한 안식처가 되리라 생각하였다. 하나님께서는 하고자 하실 때 곤경과 위험 속에 처한 그의 백성을 위하여 감옥도 피난처로 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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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기야와 예레미야의 회견 (예레미야 38:14-28)

앞의 장에서 우리는 왕이 예레미야와 친밀히 상의하였던 사실을 고찰하였었다. 지금 왕은 예레미야를 예레미야의 적들의 손에 넘겨 주기는 하였지만 다시 본문에서 그와 회담하는 것을 보게 된다(5절). 이 가련한 왕의 마음은 선과 악의 심한 갈등을 느끼고 있었다.

Ⅰ. 시드기야가 예레미야에게 품은 존경심. 예레미야가 구덩이에서 구출되었을 때 왕은 은밀히 예레미야에게 조언을 요청하였다. 왕은 그 뜰 "여호와의 집 제 삼문" 에서 만났다(난외주에는 "제일 큰 문" 으로 되어 있다). 이 문은 여호와의 집 안에 있었는지 또는 그리로 들어가기 전에 있는 입구인지 성전에 붙어 있는 문인지 확실하지 않다(14절). 시드기야가 예언자와 회담 장소로 이곳을 정한 것은 아마 "하나님의 집" 에 대한 그의 존경심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던 것 같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간절히 바란 것으로 보아 이러한 가정은 충분히 근거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에게 한 일" 을 묻기를 원하였다. "나는 그대에게 한 예언의 말씀 곧 지혜와 위로의 말씀 여호와가 주시는 말씀을 듣고 싶소(37:17). 나를 위하여 무슨 말씀이든지 숨기지 마시오. 아무리 듣기 거북한 것이라도 말이요" 라고 말한다. 실상 그는 앞의 장에서 장차 있을 것에 대한 명백한 말씀을 들었었다. 그러나 왕은 발람과 같이 좀 더 마음에 드는 대답을 들을까 하여 다시 묻는다. 하나님은 "마음이 한결 같으신 분인데" 그는 하나님을 마치 그와 같이 변덕이 많은 분으로 생각하였다.

Ⅱ. 예레미야는 왕에게 조언을 하기 전에 먼저 약속을 받는다(15절). 그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제시하였다.

1. 자신의 안전이다. 즉 시드기야에게 그를 자신있게 대하여 달라고 하였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내가 답변하면 결단코 나를 죽이지 않으시겠습니까? 당신이 그럴까보아 나는 두렵습니다. 당신이 방백들의 하자는 대로 하면 도대체 내가 무엇을 의지하겠습니까?" 예레미야는 자기가 전하는 설교를 피로 물들게 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비록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도 그는 이를 피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모든 합법적인 수단을 다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사도들도 그러하였다.

2. 예레미야는 그의 조언이 수락되기를 바랐다. 그는 시드기야의 안녕 못지않게 자신의 안녕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시드기야에게 유익한 조언을 하게 된 것을 기쁘게 여겼다. 그리고 시드기야가 불친절하게도 그를 구덩이에 집어놓고 고통을 가한 데 대하여 책망하지도 않았다. 당신이 그렇게 귀히 여기는 방백들에게 가서 상의하라고 비꼬지도 않았다. 교역자들은 그들에게 반감을 품은 자일지라도 부드럽게 타일러야 하며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한다. 예레미야는 왕이 그의 권고와 지시를 받아들이게 되기를 바랐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묻는다. "그래 당신이 나의 권고를 이번에도 듣지 않으시렵니까? 이번에는 꼭 들으셔야 합니다. 나는 당신이 여러 방면으로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날에 당신의 평강을 위한 일들을 당신이 알게 된 것을 기뻐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라고 한다. 죄인들에게 희망이 있다면 그들이 유익한 권고를 기꺼이 들으려고 할 때뿐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어떤 이는 본문이 절망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라고 본다. "내가 왕을 권한다 할지라도 왕이 듣지 아니하시리이다. 내게는 당신이 듣지 않으리란 의혹을 품을 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 생각을 내 마음속에나 간직하고 있겠나이다." 교역자들은 언제나 자주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즐겨하지 않는다. 예레미야의 이 두 번째 의견 제시에 시드기야는 답변을 하지 않았고 또 그의 조언을 듣겠다고 약속하지도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를 바랐지만 그가 그 뜻을 알게 되면 그가 좋게 생각되는 대로 하고 싶었다. 그는 마치 유익한 권고에 의하여 그의 파멸을 막아 주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왕의 특권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언자의 안전에 관하여는 왕의 명예를 걸고 보장할 것을 약속한다. 그리고 그가 자기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그 때문에 그에게 불리한 처사가 안겨지지 않으리란 약속을 맹세함으로 확실하게 하였다. "내가 너를 죽이지도 아니하겠고 네 생명을 찾는 그 사람들의 손에 붙이지도 아니하리라" (16절). 그는 이만하면 굉장한 호의를 보인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느부갓네살과 벨사살은 다니엘이 그들의 운명을 예고하였을 때 다니엘을 보호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호의를 베풀며 상까지 내렸던 것이다(단 2:48; 5:29). 여하간 이 사건에 대한 시드기야의 맹세는 엄숙한 것으로 기억할 만한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맹세한다. "이 영혼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사시는도다. 그가 나와 너의 생명을 지으셨도다. 그러므로 생명의 주이신 그분에게 나의 생명이 다스려지리라는 것을 내가 알게 된다 하여도 부당하게 너의 생명을 거두는 일을 결단코 하지 않으리라" 고 한다. 하나님은 영혼들의 아버지이신 것을 기억하자. 영은 그의 솜씨로 지어진 것이다. 영은 신체보다 더욱 신비하고도 두렵게 지어졌다. 대왕의 마음이나 가장 가련한 죄수의 마음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는 그들의 마음을 손쉽게 비져내셨다. 하나님께 간청할 때, 자신 또는 남의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서 우리는 반드시 아래의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즉 "사신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지으셨다" 는 사실이다.

Ⅲ. 예레미야의 조언. 그는 왕이 어째서 그의 조언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상당한 이유를 덧붙여 제시한다. 즉 그의 조언은 자기 자신의 생각이나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만군의 하나님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라 한다. 정치가로서가 아니라 예언자로서 예레미야는 왕에게 "바벨론 왕의 방백들에게" 항복할 것을 권한다. 그러므로 예언자는 왕에게 "바벨론의 방백들에게 가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유리한 계약을 체결하라" 고 권한다(17절). 이것을 그가 백성들에게 한 충고이기도 하였다(2절 또 21:9 에서). 즉 하나님의 심판에 순복하여 바벨론 군대와 겨룰 것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해결책은 보잘 것없는 자에게나 아무리 위대한 자에게나 차별이 없이 한결 같으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들을 동등하게 취급하시기 때문이다. 왕을 설득시키기 위하여 예레미야는 왕의 앞에 선과 악, 생명과 죽음을 제시한다.

1. 만일 왕이 순순히 항복하면 그녀의 자녀들을 칼날에서 보호할 것이며 예루살렘을 화마(火魔)에서 구할 것이라 한다. 백기를 걸어야 한다. 왕이 하나님의 공의를 인정하기만 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긍휼을 얻으리라. 그리하여 "이 성이 불사름을 입지 아니하겠고 너와 네 가족이 살리라" 고 외친다.

2. 그러나 만일 그가 거만하게 버틴다면 그의 집과 예루살렘이 다 파멸하리라고 한다(18절). 왜냐하면 하나님이 심판하고자 하시면 꼭 하시고 말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선 죄인의 운명이다. 그러므로 죄인들은 하나님의 은총과 통치에 겸손히 순복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은 살 수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평화로울 수 있고 또 평화로울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계획을 거슬러서 마음을 강퍅하게 하면 그들이 파멸하는 것은 틀림없은 사실이다. 복종이냐 아니면 파멸이냐인 것이다.

Ⅳ. 시드기야가 예언자의 조언을 거부함(19절).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따라서 왕에게 말한다. 그러므로 만일 왕이 하나님의 권위와 지혜와 선하심에 대한 응분의 경외심을 가졌다면 그가 하나님의 심중이 어떠한가를 이해하는 순간에 그 뜻에 즉시 복종하고 군말 없이 그 뜻을 따르기로 결심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마치 그 지시가 예레미야 개인의 생각이었던 것처럼 그 견해에 반대하여 생각 끝에 자신의 의사를 제시한다. 인간의 지혜로 하나님의 뜻에 맞서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에 불과하다. 시드기야가 말하려고 하는 요지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내가 두려워하는 갈대아인들이 아니요, 그들의 방백들은 명예를 존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이미 갈대아인들에게 투항한 유대인들이요, 그들의 투항을 그토록 반대하던 내가 그들 뒤를 따라 투항하는 것을 보면 그들은 나를 비웃을 것이요, 그리고 나더러 너도 물처럼 연약하여졌단 말인가?(사 14:10)라고 할 것이요" 라고 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1. 갈대아인들이 시드기야가 항복한 것을 공포함으로 그가 멸시를 받고 이로 인하여 유대인들이 만족하도록 하거나 또는 그를 유대인들의 수중에 넘겨 줌으로 그들이 그를 능욕하도록 하지는 않을 것이란 점이다. 또한 유대인들도 자신들이 포로된 입장에 있으면서 그들의 왕이 비참하게 농락당하는 모습을 재미 있는 구경거리로 여기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우리는 자주 어리석음과 부주의성, 근거 없는 두려움 때문에 깜짝 놀라 의무를 멀리할 때가 있음을 기억하자. 그들은 다만 우리 자신의 환각과 상상력에 의한 창조물에 불과할 뿐이다.

2. 또한 만약 그가 유대인들에게 약간 조롱을 당한다 해도 그까짓 것쯤은 가볍게 무시해버릴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점이다. 그따위 조롱이 그에게 무슨 해가 되겠는가? 나약하고 안달맞은 정신의 소유자들은 조롱받는 것을 참지 못한다. 그것이 자신의 의무요 또한 자기를 위하는 길인데도 말이다.

3. 또한 설사 투항하는 행위가 그가 예상하던 대로 그의 일생 일대의 실수가 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에게 복종하여 또한 그의 가족과 성의 보존을 위하여 모든 굴욕을 감수해야 했었다. 그는 항복하는 것이 겁쟁이의 짓이라 여겨질까보아 염려하였다. 그러나 최상의 악을 기꺼이 피하는 것이 참된 용기인 것이다. 더 큰 악 즉 그의 가족과 나라의 파멸을 피하고 유대인의 조롱을 택하는 것이 참된 용기인 것이다.

Ⅴ. 예레미야는 왕에게 조언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끈덕지게 졸라댄다. 예레미야는 왕에게 그가 하나님의 뜻에 이제라도 따르기만 한다면 그가 두려워하는 일이 그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증한다(20절). 예레미야는 왕에게 "그 무리가 왕을 그들에게 붙이지 아니하리이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이 그를 그의 신분에 알맞게 대우하리라고 한다. 예레미야는 왕에게 지금까지 하던 어리석은 게임을 그치고 마지막 마무리를 현명하게 잘하라고 간청한다. 그러면 결국 왕 자신을 위하여 좋을 것이라 한다. "원하옵나니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소서. 내가 하는 말이 곧 그의 음성이므로 청종하면 복을 받으시리이다." 이렇게 말한 후 그는 왕에게 그가 불순종할 경우 그에게 주어질 결과가 무엇일지를 말해 주고 있다.

1. 왕이 그들에게 투항하면 지금 갈대아인들은 그의 친구가 될 것인데 투항하지 않으므로 자기 자신도 "그들의 수중에," 그들의 철천지 원수가 되어 사로잡힐 것이라 한다. 그는 사로잡히되 스스로 손쉽게 사로잡히는 길을 택하게 되리라 한다. "당신이 바라는대로 당신은 그들의 손을 벗어나지 못하리이다" (23절).

2. 왕 자신이 예루살렘 멸망의 책임을 지게 될 것이라 한다. 그는 이 성을 보존하는데 관심이 있는 것처럼 행동해 왔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이 성으로 불사름을 입게 하리라 하였나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조금만이라도 자기를 부정하고 복종하면 그것을 막을 수 있는데 그렇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라고 한다. 이와 같이 시민들은 가끔 그들의 통치자들의 거만과 고집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 통치자들은 실상 시민들의 보호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들을 멸망시키는 자노릇을 한다.

3. 왕은 지금 항복하면 공연히 비난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지만 항복하지 않을 때는 성을 방어하지 못한 것 때문에 당면한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며 그것도 여자들에게 비웃음을 당할 것이라 한다(22절). 여호야김과 여고냐가 사로잡혀 갔을 때 남겨진 궁중의 귀부인들이 결국 적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요, 그렇게 되면 여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라 한다. "평화를 보장해 주겠다는 사람들을 믿고 협상을 벌리더니 결과가 무엇인가? 당신에게 그들의 속국이 된다면 평화를 약속할테니 담대하고 용기있게 최후까지 싸우라고 그들은 선동하였다. 그러나 무슨 이득이 있었는가? 그들은 당신을 꾀어놓은 다음 곤란하니까 물러갔도다. 그러니 당신의 둘도 없는 친구라던 자들이 사실은 적들이었음이 드러나지 않았는가? 당신의 발이 진흙에 빠짐을 보고 또 당신이 당황하여 어쩔줄을 몰라 더 이상 빠져나갈 길이 없게 되자 그들은 물러갔도다" 라고 한다. 이같이 시드기야가 여인들에 의하여 희롱을 당할 때 그의 왕비들과 자녀들은 정복자들의 노리개가 될 것이라 한다(23절).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의 심판을 받는 것을 어찌 피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조소가 두려워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일을 기피하는 자들은 불복종의 길을 택함으로 더욱 큰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악인에게는 그의 두려워하는 것이 임한다" (잠 10:24).

Ⅵ. 이 회담을 비밀에 붙이려는 시드기야의 노력(24절). 그러므로 그는 "너는 이 말을 사람으로 알게 하지 말라" 고 예언자에게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를 의사가 전혀 없었다. 또한 그 약속에 대하여서도 전혀 안중에 없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너무나 거만했고 또한 제 마음대로 죄를 저질렀다. 그에게 훌륭한 책략이 주어졌으나 그는 고집스럽게 자기의 뜻대로 하였다. 그에게 예레미야의 조언에 반대할 만한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그는 그 충고를 따르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면서 말씀대로 행하려 하지는 않는다.

1. 왕과 예레미야 사이에 주고받은 말을 아무도 알게 하여서는 안 된다는 경고가 그에게 주어진다. 시드기야는 이 사실을 비밀에 붙이고자 하였다. 이는 예레미야의 안전을 위한 것이라기보다(왕은 방백들이 자기의 허가 없이는 예언자를 해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명성을 위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은 선뜻 선한 생활을 하지는 못하나 착한 사람들과 좋은 일들은 귀하게 여긴다는 것을 기억하자. 하나님의 예언자들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알게 된다(고후 5:16). 그러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것은 관심에 두지 않는다. 알리지 않는 것이 차라리 예언자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일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혹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칭찬보다는 사람의 칭찬을 사랑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2. 방백들이 이 사실에 관하여 예레미야를 심문할 때 그가 그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가 지시된다. 그는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자기를 돌려보내지 말 것을 왕에게 간청하였다고 말하는 지시를 받는다(25,26절). 그리고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왕의 말대로 답변하였다(27절). 또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왕의 호의를 이용할 절호의 기호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말은 거짓말도 아니요, 임기웅변적인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일어난 일의 일부일 뿐이었다. 예언자가 방백들에게 전체적인 사실을 말할 의무가 없는 한 이렇게 그들을 물리쳐 버리는 것도 합법적인 것이다. 우리가 비둘기같이 양순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전혀 의도적인 거짓을 말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동시에 우리는 뱀처럼 지혜로워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사실을 전부 말하여 스스로를 쓸데없는 위험에 노출시키지는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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