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포위 (예레미야 37:1-10)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예레미야의 설교가 무시당함(1,2절). 시드기야가 고니야(또는 여고냐라함)를 계승하여 왕위에 올랐다. 그는 그의 전임자들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치명적인 결과를 보았지만 그는 이 사실을 경고로 삼지 않고 앞서 간 다른 사람들과 다름없이 경고의 말씀을 무시하였다. 여호와의 말씀이 이미 이루어지기 시작했지만 "그와 그 신하와 그 땅 백성이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다." 불행히도 마음이 강퍅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함을 보고 또 자신에게도 그 심판이 임하는 것을 느끼면서도 겸비할 줄 모르고 그가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된 것이 바로 여호와의 말씀이란 충분한 증거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에게 순종하지 않았다.2. 시드기야가 예레미야의 기도를 요청함. 시드기야는 그에게 사자를 보내어 다음과 같이 청하였다. "너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라." 그는 전에도 그렇게 부탁한 적이 있었다(21:1, 2). 사자 중 한 사람인 스바냐는 그때와 지금에도 기용되고 있다. 시드기야는 기도를 부탁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이런 점으로 보아 그에게도 좋은 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가호의 필요성을 느꼈으며 또한 자기를 위하여 그의 가호를 요청하기에는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임도 알았다. 그리고 하늘에 기업을 둔 훌륭한 백성과 훌륭한 사역자의 존재 가치도 인정하였다. 우리에게 곤경이 닥쳤을 때 우리의 교역자들이나 같은 교인들에게 기도를 요청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이는 곧 기도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며 우리 형제를 존중하는 일이다. 군왕들은 자기 나라의 기도하는 백성들을 국가의 힘으로 여겨야 한다(슥 12:5, 10). 그러나 이러한 청은 예레미야로 시드기야 자신을 정죄하도록 기회를 준 결과밖에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생각하고 또 그의 기도가 자기와 백성들을 위하여 효력이 있음을 알았으면서도 자기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예레미야의 훌륭한 기도를 원했다. 그러나 그를 자신의 문제를 의논할 고문으로 삼지도 않았고 또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였음에도 그에게 지시를 받으려 하지도 않았다. 시드기야는 이러한 자기를 알았다.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 줄 것을 요청은 하면서 조언을 받으려 하지는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오히려 기도를 요청함으로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기도를 요청한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위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 주어도 듣지 않으면서 그들이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이 들으시리라 기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잘 될 때는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경멸하면서 그러다 어려운 일이라도 닥치면 기도해 주시기를 바라곤 한다. 이는 미련한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좀 나눠 달라" 고 청한 것처럼 염치없는 행위이다. 시드기야가 예언자에게 자기를 위하여 기도해 줄 것을 사람을 보내 부탁했을 때 차라리 예언자에게 자기와 함께 기도해 달라고 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머리를 숙여 겸손히 예배하지는 않으면서 어떻게 신앙의 위로를 기대할 수가 있겠는가?
3. 갈대아 군사들이 예루살렘 성에서 퇴진함으로 성은 온통 들떴다. 당시 예레미야는 자유의 몸이었다(4절). 그는 "백성 가운데 출입하였고" 그들에게 자유로히 말할 수 있었고 또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할 수 있었다. 또한 현재는 예루살렘도 자유가 주어져 있었다(5절). 시드기야는 바벨론 왕의 봉주였지만 애굽 왕 바로와 은밀히 동맹을 맺고 내통하고 있었다(겔 17:15). 바벨론 왕이 시드기야의 배신을 알고 쳐들어오자 애굽왕은 포위된 예루살렘을 구하기 위하여 군대를 파견하였다. 실상 바로는 여호야김 통치시에 느부갓네살에게 대패하고 재기불능의 상태에 있었다(왕하 24:7). 애굽군의 접근을 알고 갈대아군은 포위망을 풀었다. 아마도 이는 애굽군을 그들이 두려워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애굽군과 다른 먼 곳에서 싸우려는 작전 때문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유대의 군대가 애굽 군대와 합세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경위는 이러한 것이었는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이 안전해진 줄로 알고 힘을 얻었다. 그들은 이제 적의 수중에서 벗어났고 폭풍은 고요해진 것으로 믿었다. 죄인들은 심판이 잠시 중단되거나 심판이 서서히 진행됨으로써 오는 안정을 맛보고는 보통 마음이 완악해진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일깨움을 받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이 그의 경륜에 의해 그들을 잠재운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4. 예루살렘이 갈대아 군대의 재침을 받아 파괴당할 것이 경고되었다. 시드기야는 갈대아 군대가 재침하지 않도록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 줄 것을 사람을 예레미야에게 보내 요청하였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이 이미 결정되었으므로 이제 그들의 평화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뿐이라는 사실을 전달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쟁론을 시작하셨고 시작하신 이상 끝장을 보시겠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스스로 속여 말하지 말라" 고 하신다. 우리가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면 사탄이 대사기군이기는 하지만 그 자신이 우리를 속이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따라서 죄인들은 스스로 속이는 자가 되어 자신을 파괴하는 자들이 된다. 스스로 속이지 말 것이 여러 번 경고되었으나 주의하지 않았으므로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있었고 그 말씀의 대경륜은 그들을 깨우치는 것이었다. 예레미야는 의미가 뚜렷하지 않은 은유를 사용하지 않고 평이하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하였다.
(1) 애굽인들이 퇴각하여 "그들의 조국으로" 밀려날 것이라 하였다(겔 17:17). 이 사실은 이전에도 언급된 것으로(사 30:7) 본문에 다시 언급되고 있다(7절). 애굽인들의 도움은 허사일 것이다. 그들은 감히 갈대아 군대에 저항을 못하고 급격히 쫓겨날 것이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지 않으시면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하나님을 능가할 능력은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하나님 없이는 아무도 승리할 수 없고 그가 우리에게서 떠나므로 주어진 손실을 보상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2) 갈대아인들이 재침하여 다시 포위할 것이요, 전보다 더욱 무섭게 성을 공격하리라 한다. 본문은 이렇게 말한다. "갈대아인이 반드시 우리를 떠나리라 하지 말라(9절). 갈대아인이 다시 오리라" (8절). 그리고 이 성을 "치리라" 고 한다. 하나님은 만군의 절대적인 지휘자이심을 기억하자. 그를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그를 섬기지 않는 사람들도 다 그의 지휘 아래 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그의 목적에 기용되는 것이다. 그는 그들의 진격과 반격, 퇴각, 재침을 자기의 뜻을 따라 지시하신다. "폭풍" 과 같이 용맹한 군대도 일거수일투족 "그의 말씀을 성취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3) 예루살렘이 반드시 갈대아인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리라 한다. 그러므로 본문에 "갈대아인이 다시 와서 이 성을 쳐서 취하여 불사르리라" 경고된다(8절). 선고된 이상 형은 집행될 것이고 갈대아인들은 사형 집행인이 되리라 한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렇게 답변한다. "하지만 갈대아인들은 물러갔다. 그들은 이 전쟁이 가망이 없는 것으로 여겨 그만 둔 것이야" 라고 한다. 그 말에 예언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들이 물러간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가령 너희가 그들의 군대를 진멸시켰다 하자. 그래서 적은 많은 사람이 죽고 나머지는 모두 부상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 부상자들이 각기 장막에서 일어나 이 성을 불사르리라" 한다(10절). 이 사실은 예루살렘에 내려진 운명이 철회될 수 없음을 뜻하고 있다. 이제 그 성의 파괴는 피할 수 없이 되었다. 그 성은 폐허가 되고 만다. 그리고 갈대아인들은 성을 틀림없이 파괴할 임무를 수행한다. 그러니 그 침략을 피하려 하거나 성을 지키려 싸우는 것은 헛된 수고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 때문에 무엇을 도구로 쓰기로 결정하시든지 간에 그것이 자비이든 심판이든 계획된 대로 성취되고 만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이 계획이 아무리 실현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말이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또는 멸하시기로 결정을 내린 사람들은 그들이 구원자가 되든지 또는 파괴자가 되든지 할 것이다. 비록 그들이 모두 상처를 입었다 하여도 그들은 능히 파괴자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고자 하실 때는 어떤 도구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그것들이 실현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렇다. 또한 그가 그의 도구들을 선택하실 때는 그 도구로서는 뜻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같이 보일지라도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만다.
예레미야가 투옥됨 (예레미야 37:11-21)
본문에 예레미야의 생활의 일면이 소개되고 있다. 예레미야는 다른 어떤 예언자들보다 더 자신에 관한 내용을 말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의 생애와 고통의 역사는 그들의 설교나 저작못지 않게 교회에 감명을 준다.
Ⅰ. 기회가 생기자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을 빠져나와 시골로 도망치려고 한다(11,12절). "바로의 군대 때문에" 갈대아인의 군대가 예루살렘에서 떠났다." 갈대아 군대가 애굽 군대를 향하여 나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예레미야는 시골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 틈에 끼어서 예루살렘을 빠져나가려고 하였다. 포위망이 풀린 틈을 타서 지방에서 각자의 사업을 돌보려고 가는 백성들이 많았었다. 그래서 그는 무리 속에 끼어 빠져나가려 한 것이다. 그는 잘 알려진 인물이었지만 자신을 표면에 나타내지 않았다. 그는 손꼽을 만한 인물이었지만 군중 속에서 발견당하지 않고 벽촌 오막살이에 묻혀서 사는 것을 만족스럽게 여겼다. 그가 아나돗으로 가려했는지의 여부는 분명하지가 않다. 그는 그곳에 가고 싶었지만 그곳에 사는 친척들이 그를 배척할지 모를 일이었다(그들이 11:21 에서 보는 것과는 다르게 변화되었다면 그를 환영하였겠지만 말이다). 아니면 그는 그를 알지 못하는 곳이면 아무 데나 가서 숨어 살려는 작정이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어찌하면 내가 광야에서 유할 곳을 얻을꼬" (9:2) 탄식하며 바랐던 소원을 성취하고자 하였는지도 모른다. 예레미야는 자기가 예루살렘에서 소용이 없는 존재로 여겨지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그들을 위하여 헛수고만 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떠나려 작정한 것이다. 은퇴하는 것이 지혜로운 처사일 때도 있음을 기억하자. "밀실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숨으라" 고 (사 26:20) 권면되고 있다.
Ⅱ. 빠져나가던 도중 그는 배신자로 간주되어 체포되고 옥에 갇힌다(13-15절). 그는 "베냐민 문까지" 당도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탈출이 성공되기 일보직전이었던 것이다. 그때 아마도 그 문의 책임을 맡은 "문지기의 두목" 이 그를 발견하여 그를 체포하였다. 이 문지기 두목은 하나냐의 손자였는데 유대인들은 이 하나냐를 예레미야와 논쟁을 벌렸던 거짓 예언자 하나냐이라고 말한다(28:10). 그리고 이 젊은 두목은 전의 사건 때문에 예레미야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예레미야를 어떤 이유도 없이 체포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예레미야에게 "갈대아인들에게 항복을 하려 한다" 는 죄를 씌웠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왜냐하면 갈대아인들은 지금 떠나버렸으므로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갈 수 없었다. 또 그가 도망간다면 이제 뒤가 석연치 않아서 떠나는 군대에게 항복을 하려 했겠는가?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충분한 근거를 들어 또 무죄한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태연하고 부드러운 자세로 그 고발을 부정한다. 그리하여 그는 "망령되다,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지 아니하노라. 나는 합법적인 사적인 문제 때문에 가려 하노라" 고 말한다. 교회에 가장 절실한 친구인 사람들을 교회의 원수들에게 협조했다는 누명을 씌우는 일은 예전에도 있던 일이다. 이렇게 하여 가장 결백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을 음흉한 성격의 소유자로 몰아 붙인다. 우리가 사는 세계처럼 악의로 가득 찬 세상에서는 결백이 아무리 자체로서는 우수한 성질의 것이라 해도 비열하기 짝이 없는 중상을 막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도 언제든지 이렇게 부당하게 누명을 쓸 때는 과감히 고발 내용을 부정하고 바르게 심판할 수 있는 사람에게 우리의 입장을 밝혀야 한다. 실상 그는 예언자였고 하나님의 사람이요, 존귀한 자요, 성실한 사람이었다. 또 그는 제사장으로서의 그의 말은 허튼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결백에 대한 그의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만 그를 비밀 방백 회의에 끌어갔고 사실을 조사하여 그의 유죄성을 밝히지도 않고 문지기 두목의 비열하고 야만스러운 거짓 증언에 근거하여 그를 마구 취급하였다. 그들은 화가 나 있었다. 화가 나서 사리를 판단할 수 없게 된 자들에게 무슨 공의를 바랄 수 있었겠는가? 그리하여 그들은 그의 신분을 불문하고 매를 때려 옥에 집어넣었다. 이 감옥은 예루살렘에서 가장 무서운 곳으로 "서기관 요나단" 의 집에 있었다. 다음 같은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즉, 그 집이 요나단의 것이었으나 사용하기가 불편하여 쓰지를 않아서 옥으로 이용되었을 것이라는 것과 아니면 지금도 그는 그 집을 사용하고 있는 경우이다. 그가 집을 지금도 사용한다면 아마 그는 잔혹한 사람인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니까 자기 집을 그의 죄수들에게 잔인한 형벌을 주는 곳으로 이용하였을 것이다. 이 감옥 속에 예레미야는 내던져졌다. 그곳은 "토굴로서" 그곳에서도 가장 불편하고 건강에 해로운 곳으로 어둡고 춥고 습기차고 더러운 곳이었다. 이같이 예레미야는 "음실" 에 유폐되었다. 음실은 한결같이 추한 곳이었기 때문에 그 중에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거기서 예레미야는 여러 날을 거하였다." 나타난 바에 의하면 아무도 그에게 와서 그의 안부를 묻지 않은 것 같다. 얼마나 잘못된 세상인가! 악한 방백들은 궁궐 같은 집에서 편히 빈둥거리며 지내는데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한 예레미야는 비참한 토굴 속에서 고통을 당해야 했다니 말이다. 그러니 장차 올 세계가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Ⅲ. 드디어 시드기야는 그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를 이끌어 내는 호의를 보였다. 그러나 갈대아 군대들이 재침하여 성을 다시 포위하였을 때까지는 그를 그대로 옥에 가두어 놓았던 것 같다. 스스로 믿었던 헛된 소망이 모두 사라지자(실상 그들이 노예를 다시 잡아들인 것은 이 소망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34:11) 그들은 전보다 더욱 당황하였다. 아마 시드기야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여봐라 빨리 가서 예언자를 데리고 오라. 그와 급히 상의를 해야겠다." 갈대아인들이 퇴각할 때 그는 예언자에게 사람을 보내어 자기를 위하여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하였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이 다시 성을 공격하자 예언자와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사람을 보냈다. 고통이 이같이 닥치면 사람들은 정중해지는 법이다.
1. 왕은 하나님이 보낸 대사로서 예언자를 생각하고 그에게 은밀히 사정을 하려고 하였다. 그는 그의 신하들 틈에서 예언자를 접견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으므로 왕궁에서 그에게 비밀히 물었다. "여호와께로서 받은 말이 있느뇨?(17절) 무슨 위로될 만한 소식이 없는가? 갈대아인들이 다시 물러갈 조그마한 희망도 없는가?" 라고 물었다. 평안할 때 하나님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던 사람들도 반대로 역경에 부딪히면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 원하며 그의 종들이 그들에게 평강의 말을 전해 주기를 기대한다는 것을기억하자. 그러나 그들이 무슨 체면으로 위로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평화를 위하여 행한 일이 도대체 무엇이 있었는가? 지금 예레미야의 생명과 안위는 시드기야의 수중에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시드기야가 예레미야에게 오히려 호의를 보여 주기를 간청한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예레미야는 솔직하게 왕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왕과 왕의 백성을 위한 위로의 말씀은 없나이다. 왕이 바벨론 왕의 손에 붙임을 입으리이다" 라고 대답한다. 만약 예레미야가 혈육의 요구대로 하였다면 왕에게 그럴 듯하게 꾸며댔을 것이다. 거짓말이야 할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이런 최악의 경우에 듣기 좋은 말을 골라서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가 전에 왕에게 말하듯이 하면 그 대가가 어떠하리라는 것은 뻔하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신실하신 여호와의 자비를 얻고자 하였지" 하나님과 자신의 방백에게도 불성실한 인간의 자비를 얻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왕에게 참된 진실을 말한다. 묘안이 없을 때는 왕에게 그의 운명에 대하여 진실을 말해 주는 것이 오히려 친절을 베푸는 것이 될 것이다. 그를 놀라지 않게 함으로 그의 공포감을 덜어 주게 될 것이며 또 그로 하여금 재난에 최선으로 대비할 수 있게 하여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왕과 그의 백성들이 거짓 선지자들을 신임한 사실을 책망하였다. 이들 예언자들은 바벨론 왕이 절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고 또 바벨론 왕이 물러갔을 때는 그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었다(19절).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당신이 평화를 누릴 것이라고 당신께 말하였던 왕의 선지자들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라고 힐문한다. 근거도 없는 희망에 의지하여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들은 사건이 그들에게 사실이 되어 나타날 때 그들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책망받는 것이 마땅하다.
2. 예레미야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가련한 죄수로서의 입장에 처한 자신에 대한 탄원을 한다(18,20절). 하나님께서 시드기야에게 내린 선고는 예레미야의 힘으로 변경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방백들이 내린 형은 시드기야가 각하시킬 능력이 있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예언자로서 소청을 부탁받는 것은 합당하다고 생각했으나 자기가 중범으로 마구 취급을 당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겼다. 그는 왕에게 겸손히 다음과 같이 간하였다. "내가 왕에게나 왕의 신하에게나 이 백성에게 무슨 죄를 범하였나이까? 내가 어떤 법을 어겼습니까. 또 내가 국민의 안녕에 무슨 위해를 끼쳤습니까. 어찌하여 나를 옥에 가두었나이까?" 다루기 어려운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다루어 사정을 호전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진지하고도 애절하게 다음과 같이 구걸한다(20절). "나를 저 더러운 감옥 서기관 요나단의 집으로 돌려보내지 마옵소서. 내가 거기서 죽을까 두려워하나이다." 이 어조는 꾸밈이 없는 결백한 것으로 애조를 띠고 있었으며 자신의 안전을 열심히 구하는 것이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순교자로 죽는 것을 기피하고자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또 살 수 있는 정당한 기회가 주어지자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것을 포기하는 것은 자기자신이 살해자가 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할 때의 예레미야는 권위있는 자처럼 대담하게 말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문제를 간청할 때는 대단히 겸손하게 당국의 권위에 굴종하는 자로서 말하였다. "내 주 왕이여 이제 청컨대 나를 들으시며 나의 탄원을 받으사" 라고 그는 간청한다. 방백들이 그를 부당하게 취급하였다고 한 마디 불평하는 말을 본문에서 찾을 수 없다. 또 부당한 구금행위에 대하여도 방백들에 대하여 항의하지 않았다. 다만 한결같이 왕에게 정중하게 간청하였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하나님의 신실한 종으로서는 용감하게 행동해야 하나 반면 하나님께서 우리 위에 세워 주신 국가의 의무를 수행할 신하로서는 겸손히 또 정중하게 행동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하여서는 사자와 같다가도 자신을 위해서는 양처럼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로 왕의 은혜를 입게 하시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1) 왕은 예레미야의 요구를 수락했다. 그래서 그가 토굴에서 죽지 않도록 배려를 베풀었다. 그리하여 "시위대 뜰" 로 장소가 바뀌었는데 여기서는 그가 마음껏 거닐고 또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가 있었다.
(2) 왕은 예레미야의 요구한 것 이상으로 호의를 보였다. 그리하여 그가 굶어 죽지 않도록 배려를 베풀었다. 물샐 틈없이 포위망이 쳐 있어서 성안에서 자유로운 사람들도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는 처지였다. 왕은 "성 중에 떡이 다할 때까지" 군수품 가운데서 예레미야에게 "떡 한 덩이씩" 매일 주도록 명령하였다(군수품을 쉽게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시위대 뜰에 있었기 때문이리라). 실상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석방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를 자기의 고문으로 등용하고 싶었다. 요셉이 감옥에서 일약 왕국의 이인자로 발탁된 것같이 말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추진할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처사도 잘된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충성된 고통당하는 종들을 돌보신다는 실례를 본문에서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의 갇힌 장소도 그들에게 오히려 유익하게 하시며 또 감방의 뜰도 푸른 초장이 되게 하신다. 그리고 친구들을 일으키시사 "기근의 날에도 그들이 만족할 만큼" 그들을 위하여 먹을 것을 주신다. 그러므로 "파괴와 기근이 닥쳐도 네가 그것을 비웃으리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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