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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

바룩이 기록한 두루마리 책 (예레미야 36:1-8)

에스겔이 예언 활동을 시작하였을 때 그는 환상 중에 두루마리 책을 받는다. 그 책은 예언자를 위한 것으로 그로 하여금 앞으로 되어질 일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그 말씀을 받아서 먹는다(겔 2:9, 10; 3:1). 본문에서는 예레미야의 예언 활동이 끝날 무렵에 그는 진짜로 두루마리 책을 준비한다. 이것은 백성들을 위한 것으로 그들로 하여금 앞으로 되어질 일에 대하여 알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는 백성들이 그 말씀을 듣고 각성해야 했었다. 기록된 말씀이나 여러 신앙적인 책들은 교역자들이나 백성들에게 같이 유익하다.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Ⅰ.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하신 명령이 설교의 형태로 기록되었다. 예레미야는 그의 백성에게 책망이나 경고를 할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였다. 그가 처음 말씀을 전파하기 시작한 요시야 13년서부터 여호야김의 통치 4년째인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런 그의 태도는 변함없었다(2,3절). 말씀은 전파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기록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그 말씀을 다시 접할 수 있게 되며 또 널리 전파되는 동시에 오래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말씀을 전할 때는 문제가 광범위하게 취급된다. 또한 같은 내용이 자주 반복된다. 심지어는 같은 단어들이 반복되어 강조된다(이것은 이것대로 유익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이제는 이 말씀이 기록됨으로 말씀은 압축되고 범위가 축소된다. 이것은 이것대로 유익한데 그러므로 말씀의 여러 부분을 서로 비교할 수 있는 것이다. 한 번 들리어진 말씀은 요약되어 다시 들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잊혀진 것이 다시 기억될 수 있고 또 처음 들을 때는 그들에게 아무런 감명도 주지 않던 것이 두 번째 그 내용을 접하면서 그들을 감동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이미 기록되기는 하였으나 단편으로 출판된 것은 한 내용도 분실되지 않도록 한데 묶어서 출판해야만 하는 것이다. 성서가 기록된 것은 신의 명령에 의한 것임을 기억하자. 그리고 본문에는 두루마리 책을 기록해야만 했던 이유가 밝혀지고 있다(3절). 그것은 유다 족속에게 들려주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되어질 일에 대한 하나님의 예고에는 틀림이 있을 수 없다. 그의 말씀에는 개연성이란 것은 없다. 하나님은 "그들의 장래가 매우 참혹할 것을" 아셨으며 그것은 틀림이 없었다(사 48:8). 하나님은 바라는 바 목적을 성취함에 있어서 본문의 방법이 적절하다고 여기셨다. 그리고 이 방법이 실패되는 경우 그들의 입장은 더욱 용서받을 수 없게 될 것이 분명했다. 하나님은 그들이 그의 말을 청종치 않으리란 것을 미리 아셨다. 하지만 예언자에게 그렇게 되리라고 말씀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 방법이 한 번 사용해 볼 만한 것이라고 하셨다. 즉 그들이 청종할지도 모르리라는 뜻이다. 즉 그들이 들은 것을 마음에 아로새겨 믿음으로 화합할지도 모르겠다는 말씀이다. 이 방법으로도 안 된다면 비록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말씀을 전한다고 하여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다음 사실을 생각하여 보자.

1. 이 방법을 시도한 목적은 이렇게 하면 혹 그들이 순종할까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그들이 듣지 않을 때 그들에게 남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악에 따라서 보수하시는 길뿐이었다. 죄의 치명적인 결과를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은 우리로 하나님께 돌이키게 하는데 대단히 유익함을 기억하자.

2. 다른 한 가지 목적은 그들이 "듣고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킬까" 하는 바람이 있어서였다. 교역자들이 말씀을 전하는 목적은 이로써 죄인들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돌아오게 하는 것임을 기억하자. 이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말씀을 들어도 헛된 것일 뿐이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도 계속 하나님께 패역한다면 죄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리실 벌에 대하여 우리가 무엇 때문에 들을 필요가 있겠는가?

3. 그들이 말씀을 숙고하고 돌이킴으로 주어질 막대한 이득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을 사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타협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정의를 대하게 된다. 이 하나님의 정의 때문에 죄인들이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그의 죄의 용서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이 말씀은 반면에 변함이 없는 그의 자비를 표현하고 있다. 즉 그는 언제나 죄를 용서하실 준비를 갖추고 계시며 죄인의 사죄를 받을 만한 자격이 갖추어질 때만을 기다리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사하실 수 있기 위하여" 우리를 회개시킬 온갖 방법을 다 사용하시는 것이다.

Ⅱ. 예레미야가 서기관 바룩에게 명한 지시.

이 지시는 예레미야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에 의거한 것으로 두루마리 책은 이 지시에 의하여 기록된 것이다(4절). 하나님께서 쓰라고 명한 것은 예레미야였다. 그러나 그는 "필객의 소질" 이 없었던 모양이다. 즉 그는 빨리 쓸 줄도 몰랐고 또 아름답게 쓸 줄도 몰랐다. 그러나 바룩은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바룩을 그의 필생(筆生)으로 삼았다. 바울의 서신 가운데서도 바울이 진필로 쓴 것들은 몇 편되지 아니하였다(갈 6:11; 롬 16:22). 이같이 하나님께서는 각가지로 은사를 주신다. 어떤 이에게는 달변의 은사를 주시는가 하면 다른 이에게는 달필의 은사를 주신다. 그러므로 누구도 다른 사람들에게 "너는 필요없다"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고전 12:21). 이제 하나님의 성령이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고 예레미야는 바룩에게 전하였다. 예레미야는 밭을 구입할 때 바룩을 대리인으로 삼은 일도 있었고(32:12), 지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바룩을 서기관으로 삼음으로 자신의 예언자적인 사명을 대신 수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만일 바룩의 이름으로 된 외경을 신뢰할 수 있다면 그는 자신이 바벨론 포로 생활 시기에 예언자로 활동한 것이라 보아도 무방하리라. 밑에서부터 시작한 사람들은 높이 올라갈 가망이 있다. 또한 예언자가 되기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언자들의 슬하에서 교육을 받으며 그를 받들 수 있다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바룩은 예레미야가 부르는 대로 "두루마리 책" 에 기록하였다. 이 두루마리는 양피지나 우피지 조각을 길게 서로 연결하여서 이루어졌고, 대개 막대기에 감았던 것 같다.

Ⅲ. 예레미야가 바룩에게 그가 쓴 것을 백성들에게 낭독하라고 명함.

예레미야는 "감금을 당하였으므로 여호와의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5절). 26절에 그를 잡으라고 관리를 파견한 것을 보면 그가 감방에 갇힌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왕은 그가 성전에 출입하는 것을 통제하였다. 성전에 나아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선을 행하는 것을 그에게 금지한 것은 예레미야에게는 감옥에 그를 가둔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호야김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실한 예언자를 침묵시킴으로 파멸을 스스로 재촉하였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자신이 성전에 들어갈 수 없게 되자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백성들에게 대신 낭독할 사람을 보냈다. 이와 같이 사도 바울도 그가 감옥에 있으므로 방문할 수 없는 교회들에게 서신을 띄었다. 이 사실은 그가 여러 번 직접 말하였다. 설교되었던 내용을 기록하거나 반복하는 것은 설교의 궁극적인 목적을 성취하는 데 대단히 공이 크다. 우리가 듣고 깨달았던 것을 다시 들음으로 더욱 잘 깨닫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다. 같은 주제에 대하여 설교하고 또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안전하기도 하며 유리한 점이 많다. 반복한다는 것은 매우 필요하다(빌 3:1). 우리는 하나님의 좋은 말씀을 듣는 것을 기쁘게 여겨야 한다. 설사 그 말씀을 들었으므로 이번이 두 번째일 때가 있더라도 그렇다. 교역자나 평신도나 마찬가지로 그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을 때는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말씀한 내용을 기록한 두루마리를 낭독하라고 명하신 것은 "듣고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킬까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또 예레미야가 낭독을 명령한 것은 "그들이 여호와 앞에 기도를 드리며 각기 악한 길을 떠날까"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우리의 회심을 위해서 하나님께 은혜로서 우리를 회개케 하여 달라는 기도가 필요하다. 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하나님에게 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들은 그 은총에 의지하여 그에게 간구해야 한다. 그리고 죄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품으신 노가 클수록" 우리는 더욱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이제 이 명령에 따라서 바룩은 집회의 요청이 있을 때는 "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을 낭독하였다" (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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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룩의 두루마리 책 낭독 (예레미야 36:9-19)

바룩은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중대한 낭독이 있기 전에도 듣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자주 이 책의 내용을 낭독해 주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책의 내용을 낭독하라는 지시가 내려진 때가 여호야김 통치 제4년 될 때였는데 본문에서 낭독을 한 때는 제5년째 되는 해인 것을 보아서이다(9절).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 책을 기록하는 데 예상외로 시간이 소요되어 완성된 것이 제5년이었고 따라서 완성된 후에서 낭독되었던 때까지는 한 두 달을 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룩은 책의 기록을 제4년 말기에 착수하여서 제5년 초기에 완성하였을 것이라 한다. 왜냐하면 "9월" 이란 본문의 내용은 통치 연대에 준한 것이 아니고 통산 연도 계산에 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찰해 보자.

1. 신앙적인 의미를 지닌 금식일을 국가에서 선포함(9절). 그 이유는 갈대아 군사의 침입이나 또는 한발로 인한 곤경 때문이었다(14:1). "그들은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였다." 이 금식을 선포한 것이 왕인지 방백들인지 제사장들인지는 분명치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섭리를 보이심으로 그들로 금식하게끔 하셨다는 사실이다. 경건과 예배의 능력에 대하여 생소한 자들과 원수인 자들도 "경건의 모양" 에 불과한 것이기는 하나 경건한 예배의 대대적인 시위는 감행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러나 이러한 위선적인 예배가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죄에서의 회개와 변혁이 없이는 금식도 하나님의 심판을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요 3:10). 금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들 백성들과 쟁론을 멈추지 않으셨다.

2. 바룩이 금식일에 여호와의 집에서 예레미야의 설교를 공개적으로 대독했다. 그는 그마랴에게 속해 있는 방에 서서 창밖 또는 발코니를 통하여 뜰에 있는 사람들에게 낭독하였다(10절). 하나님에 대한 말씀이 전파될 때는 우리는 그 말씀에 기꺼이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그러므로 금식 기도일에는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듣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나를 들으라. 그리하여야 하나님이 너희를 들으시리라" (삿 9:7)하였다. 자비와 은혜를 구함에 있어서 먼저 우리의 죄와 행할 바 의무에 대하여 말씀을 듣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3. 이 사건이 참석하지 않았던 방백들에게 전해졌다. 그들은 본문에 "서기관의 방" 이라 불리우는 서기관 사무실에 함께 모여 있었다(12절). 방백들은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집에 모여 금식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들으라고 하고서 자신들이 거기에 참석하는 것은 탐탁히 여기지 않았다. 이 사실만 보아도 이 집회는 참된 예배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 아님을 입증해 준다. 다만 겉치레로서 그들은 이 금식을 선포하였다. 미가야가 바룩이 낭독한 내용을 방백들에게 전한 것이 악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선의에 의한 것이기를 우리는 바란다. 실상 그의 아버지 그마랴가 바룩에게 낭독하도록 방을 빌려 준 것을 보아 서로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미가야는 "서기관의 방에" 방백들이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들도 그와 함께 집회에 참석하여 성전에서 있었던 훌륭한 설교를 들었었으면 좋았으리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그들에게 대강의 내용을 전하였다. 우리에게 감화를 주고 교화에 도움이 되는 말씀을 우리가 들을 때 그 내용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교화를 위해서 그 내용을 소개해야만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 은 당연한 얘기다.

4. 바룩이 그들 앞에 소환됨. 그는 그들 앞에 앉아 그들에게 그 내용을 다시 낭독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것은 그가 바로 원하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공적 업무로 지쳐서 그들의 청을 사양하고 싶다고 불평하지 않았다. 또 그들이 성전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하여서 방백들을 비난하지도 않았다. 성전에 참석하였었다면 그들도 그가 거기서 읽는 것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자는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 이는 "어떻게 하여서든지 그들 중에 얼마를 얻을까 하여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자는 어느 환경에서도 그들의 요청에 응해야 한다. 이는 그렇게 함으로 복음의 본질을 깨닫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도 명망있는 사람들에게 사적으로 복음을 전하였다(갈 2:2).

5. 참석한 방백들이 낭독된 말씀을 듣고 크게 감명을 받음(16절). "그들이 그 모든 말씀을 들었다" 라는 사실에 유의하자. 그들은 그를 중단시키지 않았고 참을성 있게 끝까지 경청하였다. 듣지 않고는 그 내용에 대하여 타당성 있는 판단을 내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모든 말씀을 듣고 놀랐다." 그들 모두가 한결같이 놀랐다. 이는 펠릭스 총독이 바울의 변론을 듣고 놀란 것과 마찬가지 경우였다. 비난은 정당했고 경고는 끔찍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예언들은 정확히 성취를 향해 진전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수군거리면서 큰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이 두루마리가 낭독되었을 때 백성들이 받은 인상이 무엇이었는지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10절). 그러나 방백들은 그 말을 듣고 놀라며 서로를 보았다. 그들은 무어라 말을 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그들은 모두 이 말씀이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그러나 그들 중 아무도 이 말을 지지할 용기를 지닌 사람은 없었다. 다만 그들은 "이 모든 말을 왕에게 고하자" 고 합의를 보았을 뿐이었다. 그들은 왕이 합당히 여긴다면 그가 그들에게 무슨 지시를 내릴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그때 가서 그들이 움직이는 것을 현명하게 여겼다. 그리고 왕이 달게 여기지 않을 경우 그 말이 민족의 파멸을 방지할 수 있는 말이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태도였다. 아니 그들은 왕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았다. 그러므로 바룩과 예레미야에게 스스로 숨어서 할 수 있는 한 안전을 도모하라고 충고하였다. 이는 왕의 마음을 돌이키는커녕 그를 격분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하게 될 것밖에 기대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죄인들은 신앙의 확신있는 말을 들을 때 그것은 회피하려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들은 본문에 나오는 방백들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실행의 책임을 전가하든지 사도행전의 펠릭스 총독처럼 좀 더 적당한 때가 되면 믿겠다고 미루어 버린다.

6. 그들은 바룩에게 하찮은 질문을 던졌다. 즉 그들은 되어진 모든 일에 무어 의심스러운 점이 있기나 한 것처럼 "네가 그 구전하는 이 모든 말을 어떻게 기록하였는가?" 고 물었다(17절). 이 질문에 대하여 바룩은 평범한 어조로 답변하였다. 즉 남들이 하듯이 예레미야는 말하였고 자기는 그것을 받아 기록하였다고 답변하였다(18절).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된 진리를 회피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말씀이 영감으로 이루어진 과정이나 방식에 관하여 쓸데없는 질문을 퍼붓는 것이 흔히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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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마리의 소각 (예레미야 36:20-32)

우리는 두루마리 책이 백성들을 거쳐 방백들에게까지 전해진 경로를 고찰하였다. 이제 본문에서는 이 책이 왕에게 전달된 경위가 기록되고 있다. 우리는 본문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Ⅰ. 두루마리에 대한 소식을 듣자 왕은 그것을 가져오게 하여 그의 앞에서 낭독하게 하였다(20,21절).

그는 바룩이 직접 와서 자신이 그것을 낭독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바룩이 한다면 누구보다도 지혜롭게 능력있게 또 열정적으로 낭독하겠기 때문이었다. 또 방백들 중 하나에게 그것을 명령하지도 않았다(물론 가장 높은 방백에게 그 일을 시킨다고 해서 그 방백에게 실례가 될 염려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것을 선뜻 자신이 읽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두루마리를 갖고 와서 대령하여 서 있었던 그의 시종 중 하나인 여후디에게 그것을 읽으라고 명하였다. 아마 여후디는 그 의미를 잘 납득하지 못할 줄 알았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왕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경멸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말씀을 증오한다는 사실이 곧 표면에 나타난다. 그들은 말씀을 천히 여길 뿐 아니라 해롭게 생각한다.

Ⅱ. 왕은 방백들처럼 그 내용이 끝까지 읽혀지는 것을 참고 듣지조차 않았다. 그는 서너 장의 내용을 듣고는 노하여 "소도로" 그것을 조각 조각 찢어 "화로" 에 던졌다. 그리고 그것이 타 없어지기를 끝까지 확인하였다(22,23절).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자칫하면 범하기 쉬운 잘못의 하나" 이다. 그러나 이 두루마리는 하나님의 메시지이므로 이런 행위는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에게 가장 불경된 범죄인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그의 다음과 같은 점을 드러내 주고 있다.

1. 그가 자기에 대한 비난을 참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죄를 계속 저지려는 마음이 뿌리 깊이 박혔으므로 그의 결점이 들먹여지는 것을 그는 참을 수 없었다.

2. 그가 바룩과 예레미야에 대하여 분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이렇게 화났을 때에 그들이 그에게 잡힐 수 있기나 하였다면 바룩과 예레미야를 발기발기 찢어 태워 죽이려 했을 것이다.

3. 그가 자기에게 주어진 경고의 뜻과 취지에 결코 따르지 않으리라는 오만한 결의를 표명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말씀하셨음에도 자기 하고 싶은 데로 하고자 하였다.

4. 그는 어리석게도 자기를 향한 경고를 무시해 버리려 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경고의 말씀이 쓰여진 두루마리가 없어지기만 하면 하나님도 형을 집행하실 수 없으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5. 그는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사실들이 더 이상 알려지지 않도록 자기가 효율적으로 처리하였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행위는 대제사장들이 복음이 전파되지 못하도록 저지한 행위와 같은 것이었다(행 4:17). 그는 사람들에게서 이 두루마리가 백성들과 방백들 앞에서 어떻게 낭독되었는지에 대하여 들었다. 이 소식을 듣고 그는 다음과 같이 응수한다. "그래! 그렇다면 그것이 다시는 읽혀지지 못하도록 내가 조치를 취하지" 라고 하였다. 육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한이 얼마나 강열한가를 보라. 그럼에도 참으시는 하나님의 인내에 놀라움을 품게 될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행하여지는 이러한 불의도 참으신다.

Ⅲ. 왕이나 방백들 그 누구도 이 말씀을 듣고 마음이 감동되지 아니하였다. "왕과 그 신하들이 그 말씀을 듣고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다" (24절). 처음 그 말씀을 들었을때는 놀라 떨었던 방백들도 이제는 두려움이 없어졌다(16절). 희망적인 계기는 너무도 빠르고 쉽게 그들에게서 사라졌다. 그들은 어느 정도 관심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왕이 그 말씀을 경시하는 것을 보고 그들은 품었던 관심을 떨쳐 버렸다. 그들은 바로 여호야김의 아버지였던 요시야가 "율법책" 읽는 소리를 듣고 그랬듯이 "그 옷을 찢지 아니하였다." 실상 요시야가 그 내용을 들었던 율법책은 여호야김이 들은 이 두루마리의 내용처럼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적한 것도 아니었고 지금처럼 사건에 즉시 대처할 필요성도 덜한 것이었다.

Ⅳ. 세 명의 방백들이 두루마리를 태우는 것을 막으려 하였으나 허사였다. 아직도 그들에게는 식별력이 있었고 은혜의 능력이 역사하고 있었다(25절). 이들이 지금 보인 것과 같이 당초에 말씀에 자신들이 감동받은 것을 나타낼 수 있었다면 그들은 아마 왕의 마음을 잘 구슬려서 끝까지 참고 들으라고 설득할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런 자들은 종종 그들이 선을 할 수 있을 때는 행하지 않고 그들이 선을 행할 능력 밖에 있을 때는 하고 싶어하기 마련인 것이다.

Ⅴ. 여호야김은 이제 하나님의 사역자들인 예레미야와 바룩을 체포하라는 영장을 발부하였다(26절). 그는 자기를 체로하라는 하나님의 영장을 태워버렸으니 일이 잘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제 반대로 하나님의 사역자들을 체포하려 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을 숨기셨다." 방백들이 예레미야와 바룩 보고 도망가라고 종용한 것은 사실이다(19절). 그러나 그들이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은 방백들이 그들을 염려해 주었기 때문도 아니요 또 스스로 자기들이 조심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하나님의 보호로 그들은 안전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피난처를 마련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이 그들을 아무리 사로잡으려 하여도 때가 이르기 전에는 어림도 없다. 하나님이 바로 그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

Ⅵ. 예레미야는 여호야김이 불태운 두루마리에 씌어진 말씀과 같은 내용을 다른 두루마리에 기록하라는 지시와 명령을 받았다(27,28절). 하나님의 말씀을 퇴치하려는 악마의 시도가 아무리 치열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일점 일획도 땅에 떨어지게 할 수 없다. 또한 인간의 불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아무런 영향력도 미치지 못한다. 원수들이 득세하여 많은 성서를 태워 버릴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이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지는 못한다. 결코 그들은 말씀을 근절시킬 수 없으며 그 성취를 막지 못한다. 율법이 기록된 돌판이 깨졌으나 그것은 다시 만들어졌다. 마찬가지로 타버린 두루마리의 재 속에서 다른 불사조가 태어났다. "여호와의 말씀은 영원하나이다" 함과 같다.

Ⅶ. 유다 왕도 왕이기는 하나 기록된 말씀에 대하여 저지른 불법에 대하여 만왕의 왕에게 엄히 문책을 당한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야김이 모독을 가한 두루마리 속의 내용을 잘 아셨다. 여호야김이 화가 난 것은 그 속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었기 때문이었다. "바벨론 왕이 정녕히 와서 이 땅을 멸하리라" (29절)고 거기 기록되어 있었다. 실상 "바벨론 왕" 은 이 사건이 있기 2년 전에도 와서 "국토를 황폐하게" 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여호야김 통치 3년되는 해에 있었던 일이었다(대하 36:6, 7; 단 1:1). 하나님과 그의 예언자들이 왕에게 진실을 말하였기 때문에 즉 임박한 파멸에 대하여 경고하고 그 파멸을 방지할 충고를 왕에게 말하였기 때문에 왕은 하나님과 그의 예언자들을 원수로 여겼다. 그러나 이는 왕이 상황을 볼 줄 모르는 데서 기이한 것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아야 했다.

1. 하나님의 진노가 느부갓네살의 손길을 통하여 제일 먼저 왕 자신과 그의 가족에게 임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죽음을 당할 것이며 몇 주 후에는 그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도 폐위당할 것이요, 그의 왕복은 수의로 바뀔 것임을 알아야 했다. 또한 빛나던 가문의 영광은 쇠퇴하고 그에게 끝날 것을 알아야 했다. 이제 그의 시체는 매장되지도 못한 채 버려지거나 "나귀와 같이 매장을 당하리라" 고 하였다. "나귀와 같이 매장을 당하리라" 는 말은 즉 그의 시체가 도랑에 버리워져 낮에는 더위, 밤에는 추위를 당하리라 한다. 일기로 변화로 시체가 썩어서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악취를 풍기게 된다. 가테이커 씨(Mr. Gatak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의 몸은 죽었으므로 자신에게 닥친 참혹한 형편을 깨닫지는 못하리라. 그러나 이렇게 버림당한 왕의 시신은 이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끔찍스런 구경거리가 되고 그를 향한 하나님의 무거운 진노와 격분이 어떠한가를 보여 주는 산 증거가 될 것이다. "그의 신하와 그의 종들까지" 그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가혹한 운명을 함께 당하게 된다고 한다(31절). 그러나 왕의 죄로 그들이 처벌받는 것은 아니고 자기들의 죄로 인하여 곧 처벌을 당하게 된다고 한다.

2. 두루마리에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저주가 왕과 그의 가족들에게 미치리라는 점이다. 사본은 태워버릴 수 있지만 원본은 신의 생각 속에 남아 있다. 이 원본이 다른 방법으로 복사되어 피를 부르리라 한다. 하나님의 심판에 도전하여서는 그것을 피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이 강퍅한 자로서 번영한 사람이 누구였는가? 아무도 없을 수밖에 없다.

Ⅷ. 두루마리가 새롭게 씌어지게 되자 "그 외에도 그 같은 말을 더 많이 하였다" (32절). 즉 더 많은 진노와 보복의 경고가 추가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과는 역행하는 길을 걷기를 바랐으므로" 하나님께서도 "용광로를 칠 배나 뜨겁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한 마음이시므로 아무도 그를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그는 그의 전통에 더 많은 화살을 준비하신다. 하나님의 진노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진노를 가중시키는 것임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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