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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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

심판의 예언 (예레미야 32:1-15)

본문에 나오는 연대를 볼 때 이제 갈대아인들에 의한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이 일어난 운명의 해가 매우 가까워졌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심판은 점차로 그들에게 임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은 하나님이 심판으로 임해 오실 때에 회개로써 그를 맞이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황폐될 때까지 그들과 쟁론하시었다. 이 멸망이 실현된 해는 시드기야 11년이었다. 그런데 본문에 기록된 사건은 시드기야 10년에 발생하였다. 바벨론 군대의 통치자인 왕은 이제 예루살렘을 침략하였고 용맹스럽게 포위망을 쳤다. 그들은 잠깐 후면 예루살렘을 정복하게 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한편 포위된 자들은 항복을 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성을 지킬 것을 결의하였다.

Ⅰ. 예루살렘 성과 궁전이 바벨론 왕의 수중에 떨어질 것을 예레미야가 예언함. 그는 백성들에게 침략자들이 그 성을 노략물로서 탈취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성의 주인은 특별한 섭리에 의해 하나님이신데 그가 성을 그들의 손에 내어주고 보호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하였다(3절). 시드기야가 도피하려 하여도 그는 사로잡힐 것이며 느부갓네살의 손에 포로로 넘김을 당할 것이며 그의 앞에 끌려가 두려움으로 떨게 될 것인데 이는 그가 바벨론 왕과의 약조를 깨뜨렸으므로 그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다. 시드기야는 바벨론 왕이 그에게 운명의 심판을 선고하는 소리를 들을 것이며 분노에 치를 떨며 그를 쳐다보게 될 것이다(" 눈이 서로 볼 것이다." 5절). 이같이 시드기야가 바벨론으로 끌려가 "하나님이 그를 권고할 때까지" 거기서 비참한 포로 생활을 계속할 것이라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시드기야의 생명을 거기서 거두어 가시겠다는 뜻의 말씀이다. 그러나 그는 수명을 다 산다. 한편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보다 훨씬 앞서서 눈이 뽑힘을 당하여 죽임을 당한다. 비참한 생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본향에로 부르시는 것이 오히려 그의 긍휼을 입는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예레미야는 침략자들을 진지에서 몰아내려는 이스라엘의 모든 노력이 소용없을 것을 예언한다. 그러므로 본문에는 "너희가 갈대아인과 싸울지라도 승리치 못하리라" 한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싸우시지 않을 때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5절)(34:2, 3 을 참조).

Ⅱ. 이 예언 때문에 예레미야가 감옥에 갇힘. 이 감옥은 일반적인 감옥이 아니라 왕궁 즉 "유다 왕의 궁중에 있는" 특수한 감옥이었다. 거기서 그는 행동의 자유에 제한을 받은 것이 아니었고 "뜰 안에서는"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거기서 그는 동료들을 만날 수도 있었고 맑은 공기를 즐기며 또 외부의 소식도 접할 수 있었다. 또한 포로들의 공격에서도 안전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여하간 그곳은 감옥이었다. 시드기야는 그의 예언 때문에 그를 거기 가둔 것이다(2,3절). 시드기야는 전처럼(대하 36:12) "예레미야 앞에서 겸비치 아니하였고" 그를 향하여 마음을 강퍅하게 먹었다. 전에 그는 예레미야를 궁중 예언자로 택하지는 않았어도 그가 "그들을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해 줄 것을" 바랐었다(21:2). 그러나 지금은 예레미야가 예언하는 것조차 못마땅하게 여겼다(3절). 그리하여 예레미야를 감옥에 가두었다. 이렇게 그를 가둔 것은 예레미야를 처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더 이상 예언하지 못하도록 제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시드기야의 잘못은 컸다. 하나님의 예언자들을 능욕하고 죽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침묵시키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것이 된다. 죄에게 기만당하므로 죄인들의 마음이 얼마나 비참할 정도로 강퍅해지는가를 이 말씀을 통하여 깨닫게 된다. 박해하는 일은 죄가 된다. 바로 이 죄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과 겨루시고 계셨다. 시드기야는 이로 인하여 깊은 곤경에 빠져 있었지만 아직도 죄를 고집한다.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게 할 어떠한 섭리도 힘도 없다. 시드기야 같은 이들은 그들을 개선시킬 수도 있는 심판으로 인하여 더욱 악하여진다. 이는 하나님의 은총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Ⅲ. 감옥에 있으면서 예레미야는 아나돗에 있는 토지를 그의 가까운 친척에게서 산다(6,7절).

1. 예언자의 이러한 행위는 예상밖의 것이었다.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그렇다.

(1) 예언자가 이 세상의 일에 그렇게 깊이 관여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그러지 말라는 이유는 없다. 교역자들이 세상일에 얽메여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인생의 문제에 관심을 갖지 말라는 법은 없다.

(2) 예언자는 아내도 자녀들도 없는데 땅을 살 필요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확실히 예레미야는 가정이 없었다(16:2). 그렇지만 그는 살아 있는 동안에 자신의 생계를 위하여 또는 그가 죽더라도 그의 친척들의 자녀들에게 그것을 물려주기 위해 땅을 살 수도 있는 것이다.

(3) 죄수가 땅을 살 수 있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어떻게 그가 사전에 땅을 살 돈을 장만할 수 있었던가 하는 점인데 그는 검소하게 살았던 것 같고 제사장으로서 그에게 속해 있었던 재산의 얼마를 저축하였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저축 때문에 그의 인격이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재산이 있었으므로 그가 생계를 유지한 것이라 하겠다. 백성들이 그에게 친절을 베풀어 그가 그들의 호의로 삶을 영위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4) 무엇보다 이상한 점은 전토(全土)가 폐허로 되고 갈대아인들의 수중에 떨어진다는 것을 자신이 잘 알면서 그가 땅을 산다는 점이다. 그 땅이 이 판국에 그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가 땅을 산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고, 그러기에 그는 땅을 산다는 것은 돈을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을 알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다. 그의 친척이 그에게 와서 그런 제의를 하였다. 땅을 사는 것이 예레미야 자신이 요구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집과 전토를 많이 소유하려고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그렇게 했을 뿐이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 가장 좋은 이익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기업의 상속권" 이 그에게 있었다(8절). 만일 그가 거절한다면 근친으로의 임무를 배역하는 것이 된다. 그에게 법적으로 거절할 수 있는 길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예언자였으므로 이 같은 성격의 문제로서 자신의 직업의 명예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는 그렇게 해야만 했다. "이 일은 그에게 있어서 의를 온전히 이루는 방법이었다." 또 이 땅은 제사장들의 소유성(所有城)의 교외에 있었다. 그런데 만일 그가 거절한다면 그 같은 혼란의 틈바구니 속에서는 그 땅이 다른 지파에게 매매될 위험도 있었다. 땅을 다른 지파에 파는 것은 율법에 저촉되는 일이었다. 이러한 불법을 미연에 방지하는 데도 그가 땅을 사는 것이 편리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가 밭을 사므로 그의 친척에게도 유익하였다. 그의 친척은 그때 돈이 대단히 필요했으리라. 예레미야가 갖고 있는 액수는 얼마 안 되었으나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친구들과 자기 향리의 유익을 위하여 자기가 가진 돈을 이런 식으로 기꺼이 내놓았다. 그는 자기의 사적인 이익보다는 이 일을 더 귀중하게 여겼다.

2. 땅을 구입하는 문제와 결부하여 고찰할 두 가지 문제.

(1) 매매가 공정하게 이루어진 점.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이는 "여호와의 말씀이었다") 하나멜이 그에게 오리라는 것을 알았을 때 예레미야는 땅을 사기로 결심하였다. 그는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지 않고 즉시 밭을 샀다. 이 일에 있어서 그는 다음과 같이 하였다.

[1] 그는 돈을 지불함에 있어서 매우 정직하였고 또 정확하였다. "그는 은을 달아 주었다." 그리고 상대가 가까운 친척이었지만 무리하게 어려운 요구를 하지 않았다. 다만 그에게 현금으로 은을 달아 주었다. 그 값은 "은 십 칠 세겔이었다." 이는 영국 화폐로 약 40쉘링이 된다. 값이 그렇게 쌌던 것은 아마 땅의 평수가 적어 소출이 적었기 때문인 것 같다. 게다가 "상속권" 이 예레미야의 것이었으므로 즉 하나멜이 죽으면 그 땅은 자연히 그의 것이 되므로 하나멜이 생존할 동안 소유할 권리만을 산 것이었으리라. 어떤 이들은 본문에 나오는 금액은 거액 중 계약금에 불과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당시의 돈이 대단히 귀중하였고 토지라는 것이 형편없이 쌌던 것을 생각할 때 값이 적다고 놀랄 것은 못되리라고 여기는 바이다.

[2] 그는 증서를 써서 보존하는 일에 대단히 신중을 기하였다. 증서는 "증인들 앞에서" 기록되었다. 그 중 한 증서는 "인봉을 하였고" 다른 하나는 인봉치 아니하였다. 한 통은 원본이고 다른 하나는 사본이었다. 또한 인봉한 것은 예언자 자신이 보관할 것이었고 인봉치 않은 것은 누구나 참고할 수 있도록 등기부에 기록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성격의 사건을 취급하는데 필요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불의한 모의를 저지하는데 필요하다. 매매행위는 증인들 앞에서 바룩의 손에 맡겨졌다. 바룩은 또한 그 증서를 질항아리에 보관하라는 명을 예레미야에게서 받았다. (질항아리는 당시에 파손되기 쉬운 물건들을 보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그 덕으로 지금까지 이러한 류의 것들이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다)또한 이 증서들을 "많은 날 동안 보존"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렇게 명한 것은 예레미야의 친족 중 후예들이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후 알려 주려는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때에 그들은 이 땅을 예레미야가 사놓은 덕을 톡톡히 보겠기 때문이었다. 유산을 물려준다는 것은 후손들에게 좋은 일이다.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이렇게 "몇 대 후의 자손들을 위해 유산을 남겨 놓는다."

(2) 매매계약 체결의 의도가 무엇인가 하는 점. 이 매매가 뜻하는 것은 다음의 사실이다. 현재는 예루살렘이 사로잡혔고 온 나라가 황폐되어 있지만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될 때" 가 다시 오리라는 뜻이다(15절).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로 하여금 미혼으로 살게 하여 예루살렘 파멸이 임박하였다는 자기의 예언이 틀림없음을 깨닫게 하셨고 이제는 그로 하여금 토지를 사게 함으로 예루살렘의 장래 회복에 대한 그의 예언의 확실성을 깨닫게 하셨다. 목자들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한 사실이 일상 생활 속에서 나타나 직접 생활을 보고 그들이 믿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렇게 하므로 듣는 사람에게 더욱 깊은 인상을 심어 주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레미야가 위의 경우들에서 그랬던 것처럼 목회자들도 수 없이 자기를 부정해야만 한다. 이 나라가 다시 그의 백성의 소유가 될 것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예레미야도 그의 후손들을 통해 한 몫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세속적인 문제들도 신앙으로 다스리며 일상생활 속에서의 잡무(雜務)도 하나님의 섭리와 약속의 관점에서 해결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임을 기억하자. 역사가 루시우스 플로루스(Lucius Florus)는 로마 시민들의 용감성의 실례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때는 제2차 퓨닉 전쟁(Punic War)중이었다. 하니발 장군이 로마를 포위하고 곧 그것을 함락시키려고 접근해 오고 있었다. 하니발의 군대가 점령하고 있는 땅을 한 시민이 팔려고 내어놓자 다른 사람이 즉시 그것을 샀다는 것이다. 그 시민은 비록 지금은 적의 수중에 있지만 로마의 정병들이 포위망을 뚫게 되리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전집 ii. 6장).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전부를 의탁하고 시온성의 승리를 믿는 넘치는 신념이 있으므로 우리가 틀림없이 최후의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Non si male munc et olim sicerit-즉 우리가 현재 고통을 당한다고 해서 항상 고통을 당하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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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의 기도 (예레미야 32:16-25)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예레미야의 기도문을 대하게 된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알려 주신 하나님의 목적에 대하여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한 그의 목적을 포기하시고는 또 다시 그의 목적을 시간이 얼마동안 흐른 후 실현하시겠다는데 예언자는 곤혹을 느낀다. 그는 성실하게 메시지를 전했지만 메시지의 내용을 살펴 볼 때 서로 모순되는 메시지의 내용에 어떻게 스스로 조화를 이룰 것인지 곤혹을 느낀다. 이 곤혹 속에서 그는 기도로 하나님 앞에 자기 영혼을 쏟아 아뢰므로 평안을 얻고자 한다. 그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손해볼 것 같은 매매 때문은 아니었다. 밭을 사는 것이 현재 그에게는 아무런 유익도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의 불안은 그의 백성들로 인한 것이었다. 그는 아직도 이 백성에 대한 친절하고 신실한 중재자였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대로 이후에 긍휼을 이스라엘에게 내리겠다면 지금부터라도 이스라엘을 가혹하게 더 이상 위협적으로 징벌하시지 말기를 희망한다. 예레미야는 기도하러 가기 전에 바룩에게 그가 새로 구한 땅에 대하여 행할 바를 인계하였다. 이 사실을 통하여 얻게 되는 교훈은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려 할 때는 이 세상의 염려와 걱정을 우리의 마음에서 완전히 제거해야 된다는 사실이다. 예레미야는 감옥 속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섭리의 뜻에 대하여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기도한다. 기도는 모든 고통에 대하여 위로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우리에게 짐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는 기도로서 주님께 맡길 수 있고 그로서 쉼을 얻을 수 있다.

이제 그의 기도 또는 명상에 대하여 고찰해 보자.

Ⅰ.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의 절대 완전하심을 기린다. 또한 그가 창조자로서 모든 피조물의 유지자요, 보호로서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린다. 또한 그의 절대적인 능력을 통하여 하고자 하시는 일은 다 하실 수 있음에 대하여 또 그의 비견할 수 없는 주권에 의하여 그가 하고자 하시는 일을 하신다는 사실에 영광을 돌린다(17-19절).

하나님의 섭리의 특별하신 방법과 그 시행에 대하여 문제를 느낄 때는 언제든지 우리의 모든 것 되시는 분에게 의지하며 또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선하심을 생각하고 위로를 받아야 한다. 다음에 예레미야가 본문에서 술회하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우리도 하나씩 고찰해 보자.

1. 하나님은 모든 존재와 능력과 생명과 온전함의 근원이시며 동력의 근원이시다.

그러므로 본문에 "주께서 큰 능과 드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라고 예레미야도 고백한다. 그러니 누가 그를 대적할 수 있겠는가. 또 누가 그를 지배할 수 있겠는가?

2. 그에게는 불가능이 없으시며 이길 수 없는 어려움도 없으시다. 그러므로 본문에 "주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니이다" 라 하였다. 인간의 재능과 힘이 못 미칠 때도 능력과 지혜가 크신 하나님은 모든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신다.

3. 하나님은 자비가 무한하시고 끝이 없으신 분이다. 자비는 하나님의 속성이다. 그의 선하심이야말로 그에게는 영광이 되신다. 그러므로 주님은 친절을 베푸시며 또한 은혜를 베푸신다. 그것도 간혹 몇 사람에게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천만인에게 베푸신다.

4. 하나님의 의는 공정하며 변함이 없으시다. 그가 징벌을 연기하셨다고 곧 용서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자비를 조상들에게 내리실 때 그들이 회개할 때도 있었다. 그렇다고 용서하신 것은 아니다. 다만 연기하신다. 그는 여전히 죄를 증오하신다. 그는 여전히 죄인에 대하여 불쾌히 여기신다. 그러므로 "아비의 죄를 그후 자손의 품에 갚으신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악하신 것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불의를 그토록 증오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義)이며 그 의에는 타협이 없기 때문이다.

5. 하나님은 우주의 지배자이시다. 하나님은 능하신 분이므로 그는 위대하시다. 또한 그는 인간들로 뛰어나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다." 그는 그렇게 불리우시게 합당한 분이시다. 왜냐하면 그는 천지의 만물과 인간과 천사의 무리들을 마음대로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6. 그는 만물이 최선의 상태를 유지케 하시며 그가 뜻하신 대로 만물은 이루어진다. "주는 모략에 크시다." 그러므로 그의 지혜의 뜻은 깊고 광대하시다. 또한 그의 경륜을 이루실 만큼 "행사에 능하시다." 이러한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은 시비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다만 언제나 그에게 예배를 드리고 그의 뜻대로 묵종하는 것이 인간 본연의 자세다.

Ⅱ.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들의 행위를 돌보시며 실수가 없는 판단을 내리신다는 보편적인 진리를 인정한다(19절). 그러므로 본문에 "인류의 모든 길에 주목하신다" 고 그는 기도한다. 즉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그들의 선악을 지키신다. 인류의 모든길을 주목하시되 그들이 옮겨놓은 한 걸음 한 걸음을 지키시며" 또 무심한 구경군처럼 방관하시는 것이 아니라 날카로운 검사처럼 주목하신다. 그리하여 "그 길과 그 행위의 열매대로 보응하신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에게 발견되었듯이 인간들도 하나님 앞에 설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그들은 하나님의 보응을 받는다.

Ⅲ. 예레미야는 전에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크신 일을 열거하신다.

1.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구속되었던 애굽에서 "징조와 기사로" 그들을 인도하셨다. 지금 그들에게 이런 구속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지만 "오늘까지도" 그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이 구속 사건은 결코 잊혀질 수 없는 일이었다.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지킴으로 매 년 이 일을 기억하지만 "외인들" 도 이 일은 기억한다. 모든 인접 국가들이 그 일을 알고 그 일이야말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높이 사건으로 기억한다. 또 이 사건으로 "주의 이름이 오늘과 같이 되었다." 이 사건은 21절에서 반복되고 있다. 백성들에게는 기쁨과 위로를 주시고 자신은 영광을 받으시려고 "징조와 기사로써 그들을 인도하여 내셨다." 또한 "강한 손" 으로 인도하셨는데 이는 애굽인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드신 팔" 로 인도하셨는데 그 팔은 바로와 같이 교만한 자에게까지 미치는 것이었다. 또한 "큰 두려움" 으로 인도하셨는데 이 두려움은 애굽인들과 인근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미치는 것이었다. 이 내용은 신명기 4장 34절에서 유래된 것 같다.

2. 하나님은 가나안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셨다. 이 땅은 비록한 땅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그들에게 주시기로 그 열조에게 맹세하신 것이다." 이 맹세를 이루시사 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 땅을 주셨다(22절). 그러므로 "그들이 들어가서 이를 차지한 것이다." 예레미야는 이 사실을 말해서 그들이 지금 죄와 불복종으로 고통 당한다는 사실을 강조함과 동시에 하나님에게 그들을 구속해 주실 것을 탄원하고자 한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전에 그의 교회를 위하여 행하신 위대한 일을 자주 기억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함을 잊지 말자. 특별히 초대 교회를 세우심에 있어서 기적의 역사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Ⅳ.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거스려 죄를 지음으로 저지른 반역을 애통해한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게 배은망덕한 짓을 저지른 경위를 슬픈 마음으로 설명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행하시기로 약속하신 것을 남김없이 행하시었다(왕상 8:56 을 보면 그들도 이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주께서 행하라 명하신 일을 행치 아니하였다" (23절). 그들은 "주의 법" 을 기억조차 아니하였고 행치도 아니하였으며 선지자들을 통하여 부르시는 부름에 대하여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본문에 그들이 "주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다" 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레미야는 "주께서 이 모든 재앙을 내리심" 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의로우시다고 결론을 내린다. 성읍은 포위되었고 외부에서 "칼" 로써 공격을 당하며 "기근과 염병으로 인하여" 약하여졌다. 그리하여 이제 "갈대아인들의 수중에" 떨어질 운명에 처해 있었다(24절). 그러므로 그는 25절에서 다시 한 번 "이 성은 갈대아인의 손에 붙인 바 되었나이다" 라고 탄식한다.

1.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현재의 상태를 하나님의 경고에 비추어 비교해 본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을 발견한다. 하나님은 전에 이 일을 경고하셨다. 그들이 이 경고에 주의하였다면 파멸이 닥치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경고하던 내용이 그대로 임할 수밖에 없었다.

2.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가련한 상태를 이제 하나님의 긍휼과 동정에 의탁한다(24절). 이제 적들은 성을 쳐부수고 성벽을 깨뜨리기 위하여 "토산 또는 흉벽" 을 쌓고 성을 칠 "병기" 를 준비하였다. 이 사실을 살펴 "보옵소서" 라고 예레미야는 호소한다. 다시 그는 "주께서 이를 보시고" 아신다고 호소한다. "이 도시는 당신의 이름을 거기 두시려고 택한 곳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포기하시려나이까" 라고 간구한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하여 그에게 불평하지도 않았고 자신이 할 일을 하나님께 묻지도 않았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참상을 보시기만을 바라며 그가 이 모습들을 하감하시리라 생각하며 안심한다. 개인적으로 또는 공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고통이 닥쳐오든지 하나님께서 굽어보리라는 것을 생각하며 우리도 위로를 받자. 하나님이 우리 고통을 보시고 그것을 치료하시리라 믿고 위로를 받아야겠다.

Ⅴ.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친척의 밭을 사라고 하신 명령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알고자 한다(25절).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성은 갈대아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이제 누구도 자기의 소유를 즐길 수 없게 되었는데 주께서는 내게 밭을 사라고 하시나이까?" 그가 밭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는 불순종하지 않았다. 그는 하늘의 환상에 순종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행하기는 하였으나 하나님이 왜 그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하셨는지 알기를 원했다. 아직도 그는 이 사건을 이해할 수 없었고 이상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법과 그의 심판을 우리가 논박할 수가 없다. 그러나 "여호의 명하신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인가?" 물을 수는 있다(신 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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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에 대한 예언 (예레미야 32:26-44)

본문에는 예레미야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기록되어 있다. 이 답변은 예레미야의 마음을 평정케 하고 쉼을 주고자 하여 계획하신 것이었다. 따라서 이 말씀 속에는 이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목적과 미래의 세대에 내리실 은총의 목적이 무엇인지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예레미야는 자비와 심판이 어떻게 병행할 수 있는지로 아직도 몰랐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본문에서 양자의 관계를 그에게 알려 주신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이 서로 모순되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두 말씀 모두 진실이며 순전하며 선케 하는 능력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 두 말씀 중 어느 쪽의 말씀의 한 획이나 한 점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하나님이 재앙의 심판을 거두시고 갈대아인들로 포위망을 풀게 하실까 하는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희망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답변하신다. "심판은 집행될 것이요 예루살렘은 황폐해지리라" 하신다. 미래에 주시겠다고 하시는 자비를 현재의 고통을 푸신다는 말씀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밭을 사라고 명하신 뜻을 알게 하신다. 그 뜻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하여 자비를 보류하셨다가 그들이 귀향한 후 자비를 베푸사 그들로 다시 기업의 땅을 소유하게 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이 매매는 그들이 귀향할 때 주어질 영적인 축복의 상징이요 모형인데 불과한 것을 알리신다.

이 영적 축복은 밭이나 포도원에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더욱 가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에서" 처음에는 위협적인 경고의 말씀을 보게 되며 두 번째로는 구약 다른 어디에서 발견되는 것보다 더 귀중한 약속의 말씀을 보게 된다. 생명과 사망, 선과 악이 우리 앞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깊이 생각하고 현명하게 선택해야 한다.

Ⅰ. 유다와 예루살렘의 파멸이 본문에 선언되고 있다.

1.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권과 능력을 선언하신다(27절). "보라. 나는 여호와니라. 자존하며 부족함이 없도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나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고 선포하신다. 본문의 모든 육체란 말씀은 인류를 뜻하는 말로써 특히 육체라 하신 것은 인간이 연약하고 하나님으로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붙인 명칭이다(시 56:4). 또한 약하고 부패하였고 하나님을 따르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주어진 명칭이다.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만물을 그의 목적대로 쓰시기를 바라신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또한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시오, 모든 육체의 영혼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추방하시고 그의 이름 앞에 부르실 수 있다. 그가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시니 그에게 어려울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분에게서 인간의 모든 능력이 유래되었는데 그가 무엇을 못하시겠는가? 모든 인간들이 그를 의지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도 그에 의하여 지시되고 통치되지 않는가? 진노이든 자비이든 그가 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무도 방해할 수 없고 그의 계획을 막지 못한다.

2.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바빌론 왕에게 망하리라고 자주 하신 말씀을 그대로 실행하신다(28절). 본문에 이르기를 "내가 이 성을 그의 손에 붙이겠다" 하셨다. 그러므로 이 성을 바벨론 왕이 포위하였다. 또 "그것을 취하리라" 했으므로 그가 이 성을 먹이로 삼은 것이다(29절). 또한 "갈대아인이 와서 이 성읍에 불을 놓아 성을 태울것이요, 성안의 모든 집을 사르리라" 하신다. 하나님의 성전도 예외가 될 수 없고 왕의 궁전도 예외가 되지 못한다.

3. 하나님께서는 그가 그토록 아끼시던 성에 이 같은 가혹한 처사를 내리신 이유를 설명하신다. 그 이유는 바로 죄이다. 죄가 성을 파멸시키는 것이지 그 외에 다른 이유는 있을 수 없다.

(1) 그들은 염치없이 죄로 자행하고 또 죄에 애착을 품었다. 그들은 "바알에게 분향하였고" 또 이런 일을 남이 볼까 부끄럽고 두려워 몰래 한 것이 아니라 보라는 듯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하고 "집꼭대기" 에서 행하였다.

(2) 그들은 하나님과 대적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하나님을 격노케 하려고 그 일을 저질렀다(29절). 그러므로 32절에 이르기를 "이스라엘 자손은 그 만든 것을 가지고 나를 격노케 한 것 뿐이니라" 하였다. 그들이 하나님을 배반해서 무슨 쾌락이나 이익이나 명예를 얻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다만 하나님을 거스리려는 목적으로 그렇게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32절에 다시 "이는 이스라엘 자손과 유다 자손이 모든 악을 행하여 내 노를 격동하였음이라" 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하나님은 예배드리는 문제에 있어서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란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의 질투를 자극하려 마음먹고 감히 그의 정면을 향하여 도전을 하였다. 그러므로 31절에 "이 성이 건설된 날부터 오늘까지 나의 노와 분을 격발하였다" 고 하신다. 만사에 있어서 그들의 행위는 하나님을 격발시키는 것이었다.

(3) 그들은 하나님을 격발케 하기를 일찍이 시작하였고 내내 그 짓을 계속하였다. "그들이 한 민족으로 된 처음부터 내 목전에 악만 행하였도다. 그들 자신이 광야에서의 불평과 반역에 대하여 증인이라" 고 하신다.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서도 그것이 거룩한 성이면서도 건설된 날부터 오늘까지 거룩한 하나님만을 노여우시게 하였다(31절)고 한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통해 얻으시는 보잘 것 없는 영광을 우리가 배아파할 무슨 이유가 있기에 유다조차 하나님께 모욕을 입히는가! 유다는 "그를 알며 그의 이름이 존귀하게 된 곳이 아니던가?" 그리고 살렘은 "그의 언약궤" 가 있는 곳이 아니던가!(살렘은 예루살렘을 가리킴:역자 주) 그런데 이곳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뿐이었다.

(4) 모든 인간들이 그 지위를 막론하고 같은 범죄를 저질렀으므로 마땅히 똑같이 멸망을 당하게 된다. 성전이 싫어서 떨어져 나간 이스라엘뿐 아니라 성전을 지킨 유대 자손들까지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하는 평민들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죄로 책망하고 견제해야 할 입장이면서 오히려 그 죄에 주모자가 되었던 왕이나 귀족, 제사장이나 예언자들까지 예외가 있을 수 없다.

(5) 하나님께서는 되풀이해서 그들이 회개할 것을 간청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부르심에 귀머거리처럼 행세하였고 그들을 부르시는 분을 향하여 등을 돌려댔다. 비록 그분이 그들의 주인이므로 그들은 그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으며 그들은 그에게 은혜를 입었으므로 마땅히 감사해야 하고 그의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함에도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내가 그들을 부지런히 가르쳤도다. 인자한 부모가 자녀를 가르치듯이 하였으며 그들을 가르치려고 일찍이 일어났으며 적당한 때를 따라 그들의 능력에 알맞게 가르치려 고심하였도다. 그리하여 아주 어려서 가르치기 쉬울 때부터 가르쳤으나 이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들이 내게로 얼굴을 향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를 보지 않으려는 연고요 오히려 등을 내게로 향하였으니 이는 최대의 멸시의 표시가 아닌가!" 라고 하신다. 그가 그들을 불렀으나 그들은 고집센 아이들처럼 그를 멀리하였다(호 11:2). 또한 "그들은 교훈을 듣지 아니하고 받지 아니한다." 그들은 그들의 유익을 위해 증거한 말씀이지만 그들에게 전해진 말씀을 한 마디도 듣지 아니한다.

(6) 그들의 우상 숭배는 하나님에게 불경스러운 모독이다. 그들은 우상이 하나님에게는 가장 더러운 것임을 알면서도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 자기들의 가증한 물건들을 세워서 그 집을 더럽게 하였다" (34절). 그들은 높은 언덕과 산에 우상을 세우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하나님의 전에까지 우상을 끌어들였다.

(7) 그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가장 몹쓸 짓을 행하였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자녀를 몰렉에게 희생제물로 바쳤기 때문이다(35절). 이와 같이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보존하기를 싫어하였기 때문에 그의 영광을 수치로 바꾸었다. 그들은 자녀들을 악독한 정욕의 제물로 삼았고 생명까지 박탈하였다. 즉 자녀들은 그들의 영광인데 이같이 행하므로 그들은 그들의 영광을 수치로 바꾼 것이다.

(8) 이 모든 행위의 결과는 무엇일까?

[1] 그들은 "유다로 범죄케 하였다" (35절)(유다 지방 즉 땅이 더럽혀진 것을 의미함:역자 주). 온 국토는 가증한 우상 숭배에 감염되었고 예루살렘의 불법으로 물들었다.

[2] 그들은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였다. 이렇게 행한 것은 하나님으로 "그들을 그의 목전에서 제하여 버리시도록" 권유한 것과 마찬가지였다(31절). 그들은 스스로 그의 사랑을 박차버릴 것이다.

Ⅱ. 유다와 예루살렘의 회복이 여기에 약속되고 있다(36절 이하). 하나님은 심판 중에도 자비를 기억하신다. 그리하여 시온이 은총을 얻을 때가 올 것이다. 그때는 이미 정해졌다.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찾을 수 있다.

1. 백성들이 좌절을 겪게 된다. 심판의 위협이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을 때 그들은 두려워할 줄 몰랐다. 그러나 심판이 그들에게 임하자 그들은 완전히 절망한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이렇게 탄식한다(36절). "이 성이" 우리의 실수나 비겁함 때문이 아니라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인하여 바벨론 왕의 손에 붙인바 되었도다" 라고 한다. 또한 그들은 자기들의 국토에 대하여 애통하며 이렇게 말한다(43절). "그곳이 황폐하여 사람이나 짐승이 없으며 아무런 위로도 없고 치료할 길도 없도다. 이 땅이 갈대아인의 손에 붙인 바 되었도다" 라고 한다. 안일에 깊이 빠지면 결국 깊은 절망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반면에 언제나 거룩한 두려움을 품고 사는 사람들은 아무리 위험한 시기에 직면해도 살아날 구멍을 발견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은 그의 자비로 인하여 베푸시는 희망을 그들을 위하여 훗날로 보류하신다. 그들은 포로가 되어 죽을 것이지만 그들 뒤에 태어나는 자손들은 다시 축복의 땅을 보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게 된다.

(1) 그들의 자손들은 포로 생활하던 곳에서 돌아와 고국에 다시 정착하게 된다(37절). 그들은 하나님의 "노와 분과 큰 분노 아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그의 은혜와 사랑과 큰 은혜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가 그들을 쫓아내 각 처로 흩어지게 하셨다. 도주하다 그들은 흩어졌고 또 적의 수중에 떨어진 자들은 적군에 의해 강제로 흩어짐을 당하였다. 그들의 적은 정책상 이스라엘이 합력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였다. 하나님은 이렇게 양면으로 이스라엘을 흩으셨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으사 그가 율법 속에서 약속하신 대로 "그들을 흩었던 그 모든 백성 중에서 그들을 모으신다" (신 30:3, 4). 이는 또한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다(시 106:47; 느 1:9). 그가 그들을 추방하셨었다. 그러나 그가 "그들을 다시 이곳으로 모으실 것이다." 이 땅을 그들은 그리워할 뿐 스스로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지나간 수백 년 동안 그들은 조국에 살면서도 끊임없이 위험 속에 노출되었고 전쟁의 경고로 떨며 지냈다. 그러나 이제는 "안전히 거하게 할 것이라" 고 약속하신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안에서의 그들의 양심이나 외부에서의 적들이 그들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지 못한다. 그는 "내가 정녕히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고 약속하신다(41절). "내가 확실히 이를 행할 뿐 아니라 그들은 이를 인하여 거룩한 안식을 즐기게 되리라. 그들은 여기에 뿌리를 박을 것이요 안전히 심기울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흔들리거나 뽑히지 않으리라" 고 하신다.

(2) 하나님께서 그들과 약속을 갱신하실 것이다. 이 언약은 은총의 언약이요 그 언약으로 인한 축복은 영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언약으로 인해 그들 가운데 선한 일이 역사될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행하고자 작정하신 큰 일에 쓰여지기에 합당한 자들이 될 것이다. 이 언약은 40절에서 "영원한 언약" 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이 언약에 대하여 신실하실 것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언약의 효과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문의 약속이 육체에 따라 된 이스라엘 자손을 초월하여 주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언약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신 것이요 참된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기독교인들은 스스로 하나님께 의탁하고 간구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한 위로를 얻을 수 있다.

[1]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의 것으로 삼으시며 또 자신을 그들의 것으로 내어 주신다(38절). 그러므로 본문에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고 말씀하신다. 그가 그들에게 역사하사 그의 백성으로 합당한 성격과 기질을 부여하심으로 그들을 백성으로 삼으신다. 그리고 그들을 그의 백성처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 다스릴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계속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그들을 참되고 온전하게 할 것이며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할 것이라" 고 하신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기들의 하나님으로 예배하며 섬길 것이며 오직 그만을 의지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그가 그들의 하나님임을 입증하실 것이다. 그가 곧 모든 것이 되시며 그러기에 모든 것을 소유하신 그가 그들의 축복을 위하여 전념하실 것이라 한다.

[2]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신다(39절). 그가 그의 백성으로 언약을 맺으실 때 상대방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그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이 그의 위엄을 경외하며 그의 진노를 무섭게 여기며 그의 권능을 존경하여 그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신다. 이제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자신이 직접 그들 안에서 역사하게 하시며 또한 그들을 그의 백성으로 선택하는 일을 이행하겠다고 하신다. 인간들의 마음을 빚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전권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백성을 바르게 만드실 것이라 약속하실 수 있음을 기억하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야말로 진실로 참 마음이요, 훌륭하게 비쳐진 마음이다. 이러한 내용의 말씀은 40절에 또 다시 반복되고 있다. 즉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겠다" 고 하신다. 즉 그들의 마음속에서 은총의 섭리가 역사되어서 이 은총이 그들의 모든 일상생활에 미쳐지고 또 그들의 생활을 다스리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교사들은 우리의 머리에 좋은 지식을 공급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이 좋은 지식이 마음에 역사하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그만이 우리로 그런 뜻을 품게 하시고 또 행하게 하신다.

[3]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도를 주실 것이다." 그들로 한 길을 걷게 하시기 위하여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실 것이다. 마음이 그러하므로 그들의 행함도 그러하리라. 그래서 양자는 일치가 된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첫째, 그들의 마음이 분열을 일으키지 않으리라는 뜻이다. 그들의 마음은 새 마음으로 모두 하나가 된다(겔 11:19).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완전히 결정되고 완전히 그에게 드려질 때 그것은 하나가 된다. 우리의 시야의 초점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목적 할 때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만 주력되고 우리는 그를 복종하므로 일차가 되고 하나가 된다. 이렇게 되는 것이 곧 마음이 하나요 도(道)도 하나가 되는 경지이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 한 발걸음이 안정되기는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이 약속으로부터 기도하라는 지시를 받으며 또 용기도 얻게 된다. 다윗이 "일심으로 주의 도를 경외하게 하소서" (시 86:11)라고 기도한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기도하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어 나를 경외하게 하리라" 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둘째, 그들은 모두 서로 단합될 것이라는 뜻이다. 모든 신실한 기독교인들은 하나로 단합되어야 한다. 유다인과 이방인들이 "한 양의 무리" 가 되어야 한다. 거룩하게 된 자들은 모두 하나가 된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싶은 마음을 지닐 것이다. 그들이 한 공동체 안에서 고백하는 복음이 그들을 서로 사랑하도록 강력하게 이끌 것이며 또한 그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도 사랑의 성령이시다. 사소한 견해 차이가 그들에게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같은 형상을 따라 새롭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이 큰 일에는 모두 하나가 된다. 그들은 또한 소로를 각각 거닐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참된 선이란 오직 한 길을 걷는다.



[4]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주어질 은혜와 그와 그들 사이에 맺어진 영원한 계약을 참고 기다리도록 그들에게 효율적인 영향력을 가하실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을 멀리 하지 않았을 때 낙원에서 행복했던 것처럼 그들도 처음 가나안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행복하였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그때의 행복을 되찾을 것이다. 그들은 내부에서 하나님을 떠나려는 생각을 누르는 힘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이 힘에 의해 그들은 조국에서 견고히 지낼 것이다. 그들을 범죄하지 못하게 하는 이 힘이 그들의 축복을 완성시킨다.

첫째, 하나님께서 결코 그들을 버리거나 그들로부터 떠나시지 않으리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40절에서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겠다" 고 하신다. 지상의 군왕들은 변덕이 심하고 그들에게 심은 은혜는 그들의 기분에 따라 언제 화로 변할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그는 사랑하는 자를 끝까지 사랑하신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버리시지나 않았나 여겨질 때도 있다(사 54:8). 그러나 그때에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선한 일을 행하시고 또 계획하심에는 변함이 없다.

둘째, 그들 또한 하나님을 떠나거나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는 가장 위험한 시험이다. 하나님의 불변하심을 불신할 이유는 없다. 다만 못믿을 것이 있다면 우리 자신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영원히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시겠다" 고 하신다. 즉 매일 매시간 그에 대한 두려움을 품게 되리라고 하신다. 그러기를 그들이 죽는 날까지 계속 될 것이다. 그가 그들의 마음에 한 원칙을 세우실 것인데 그것은 그들이 그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자신을 전폭적으로 드린 사람일지라도 그들만 내버려둠을 당하면 그를 떠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그들을 지배해야만 그들은 그를 떠나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이외의 어느것도 우리를 그에게 붙잡아 두지 못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계속 가까이 하며 또한 그에게 신실할 수 있다면 이는 우리들 자신의 어떤 힘이나 결단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전능하신 은총의 덕분이다.



[5]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후손들에게 축복을 물려주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를 두려워하는 은총을 주실 것이다. "그들과 그들의 후손을 위한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으므로 그들의 자손들에게 손실이 주어진 것같이 이제 그들이 하나님에게 신실하므로 후손들에게 유익이 안겨진다. 재물을 보존하는 데는 그 가정이 하나님의 대한 두려움과 예배하는 생활을 지속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6] 그들의 번영이 하나님께는 기쁨이 되며 그리하여 그들의 번영이 더욱 확고히 되도록 모든 조치를 취하여 주실 것이다(41절). 그러므로 본문은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줄 것이라" 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그들에게 선을 베풀고자 하신다. 그들은 그에게 사랑스러운 존재들이다. 그는 그들을 자랑거리로 여기신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선을 행하실뿐 아니라 그들에게 좋은 것을 주심으로 기쁨을 삼으신다. 그가 그들을 처벌하실 때는 마지못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포기하겠느냐?" 고 말씀한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회복시키실 때는 만족한 마음으로 하신다. 그는 그들에게 선을 베푸심을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기쁨으로 섬기고 그를 섬길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기뻐해야 한다. 그는 자신이 기쁨으로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즐거히 그를 섬기는 종들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나의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고 말씀하신다. 그는 그 일에 여념이 없으실 것이며 그러므로 기쁨으로 삼으신다. 그는 그들을 가나안에 다시 정착시키시는 일로 그의 본업으로 삼으시며 또 이 일에 필요한 여러 가지를 공급하실 것이다. 마지막 날에 모든 것이 드러날 것인데 그때에 그가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하신 수고도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모두 말하리라. 세계의 치리자이신 하나님께서 교회를 보살피시기 위하여 온갖 배려를 하셨다고.

[7] 지난 날에 저주가 그랬던 것처럼 이 약속들도 확실히 이루어질 것이다. 백성들의 안녕이 위협되는 일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저주는 실행되었었다. 이제는 그들의 낙심에도 불구하고 이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은 틀림없은 사실이다(42절).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이 백성에게 큰 재앙을 내린 것같이 허락한 모든 복을 그들에게 내리리라" 하신다. 전자의 재앙을 내리신 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영광을 위한 것이요, 후자의 약속을 주심은 하나님의 자비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재앙을 내리신다는 약속에 충실하셨던 하나님은 이제 축복의 약속에는 더욱 신실하시다. 이제 그는 "그가 그들에게 고통을 주셨던 날 수에 따라" 그의 백성을 위로하실 것이다. 교회도 역경의 날이 지나면 안식을 얻게 되리라.

[8] 이 모든 약속의 증표로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있는 집과 전토가 다시 제 값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한다. 현재 집과 전토는 매매가 되지 않는 품목이지만 다시 구매자들이 늘게 될 것이다(43,44절). "이 땅에서 사람들이 밭을 사되" 다른땅보다는 이 곳의 땅을 사려고 탐내리라고 한다. 땅들이 나는 대로 곧 팔리게 된다. "예루살렘 사방뿐만 아니라" "유다와" 이스라엘의 성읍들도 팔릴 것이다. 그 대지가 산 위에 있든지 골짜기에 있든지 남쪽에 있든지 어느 곳에 있든지 "밭을 은으로 사고 증서를 기록한 것이다." 그들은 땅을 살 만한 돈이 충분히 있으므로 거래가 다시 이루어진다. 돈을 가진 사람들이 곡식을 땅에 심으려 하므로 농경이 재생될 것이다. 이제 법도 제 구실을 발휘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증서를 기록하여 인봉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 말씀들은 예레미야가 밭을 산 행위와 조화를 이룬다. 그가 비록 얼마 안 되는 토지를 샀고 또한 그가 직접 가보지는 못하였지만 그는 이 행위가 앞으로 있을 많은 매매 행위의 보증이라고 믿었다. 하늘에 있는 가나안에 사둔 땅은 불확실한 상징이기는 하나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에게서 떠나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약속의 예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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