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에 대한 약속(1) (예레미야 30:1-9)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내용을 기록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먼저 이 말씀은 그가 이전에 받은 모든 예언의 말씀을 기록하라는 말씀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가 예언의 말씀을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 이유는 그가 말한 것을 한 번 들은 것으로 아무 깨달음도 얻지 못한 사람들도 깊이 생각할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그 말씀을 읽음으로 깨달음을 얻게 되기를 바라서였다. 다음으로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번영을 누리리라는 약속만을 기록하라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약 속의 말씀은 그의 다른 말씀과 자주 혼동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약 속의 말씀만을 모아 함께 편집하고 여기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다른 많은 약속들을 추가한 것 같다. 그가 이 말씀들을 기록한 것은 장차 올 세대를 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약속의 성취를 볼 수 있는 장본인들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예언이 실현된 것을 확인하므로 후대인들의 예언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지겠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전 장에서 포로들에게 보낼 때같이 "편지투" 로 기록하지 않고 "책의 형태로" 기록하였다. 이는 문서 보관소 또는 국가 공문 보관소에 귀중히 보관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니엘은 포로 생활이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러나 바로 이 책들에 의해서 이해할 수 있었다(단 9:2). 또한 예레미야는 약속의 말씀을 분실되기 쉬운 종이 조각에 써서는 안 되었고 책에 써야만 했다. 왜냐하면 "때가 이르러야 했고 그 때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걸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에야 내가 이스라엘과 유다의 포로를 돌이키리라. 즉 유다의 두 지파와 이스라엘 열 지파의 수다한 무리가 돌아오리라" 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3절). 그들이 돌아오는 때에도 이 예언은 읽혀져야 했고 그래야 예언대로 약속이 얼마나 정확하게 성취되는가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이 예언의 말씀은 기록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또한 그들이 후에 읽어야 된다는 것이 예언 기록의 한 목적이기도 하였다. 한편 그들은 "조상들로 인하여 사랑을 입은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이 본문에 암시되고 있다" (롬 11:28).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포로들을 다시 가나안으로 인도해 내고자 예정하시고 계신다. "그 땅을 그들의 열조에게 주셨기 때문에" "그들이 그것을 차지하리라" 고 본문에 약속되고 있다.
Ⅱ. 예레미야는 기록해야할 내용을 지시받고 있다. 이 말씀들이야말로 가르쳐 주신 것이라 하겠다(4절). 이 말씀은 또한 하나님이 그에게 기록하라고 명령하신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명령에 의하여 기록된 이 약속들은 그가 직접 쓰셨던 십계명과 마찬가지로 명실상부한 그의 말씀이었다.
1. 예레미야는 백성들이 현재 겪고 있는 놀라움과 당혹함을 기록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또한 그들은 아직도 갈대아인들이 그들에게 가하는 온갖 침략을 당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기록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이 사실을 기록하라는 이유는 그러므로 그들의 구속이 더욱 놀라웁고 반가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겠기 때문이었다(5절). 본문에 여호와께서 "우리가 떨리는 소리를 들었다" 고 했다. 즉 위험의 경고를 받고 경악하여 외치는 소리이다. 그들이 평화로울 것이라고 거짓 선지자들은 말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두려움뿐이요 평안은 찾을 수 없었다." "밖으로는 싸움이요, 안으로는 두려움 뿐이었다." 남자들 심지어 전쟁터의 용사들까지도 그들의 조국의 재난에 어쩔 줄을 몰라 적들 앞에 의기소침하여 항복하였고 마치 "해산 중의 여인과 같은 몰골이었다." 고통이 절정에 이르러 있어서 도저히 피할 구멍이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았다(6절). 이렇게 말씀된다. "너희가 자식을 해산하는 남자가 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스라엘에는 겁장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성들이 불타고 마을들이 황폐되는 것을 볼 때 극도의 노여움과 고뇌 속에서 그들은 해산하는 여인과 같이 손으로 각기 허리를 짚었도다" 라고 했다. 그러나 이 고통은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으로 비교되나 임종하는 사람의 고통으로는 비교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고통은 마지막에는 기쁨으로 끝나며 고통은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이 그러하듯이 잊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얼굴빛이 창백하여지겠다" 고 하였다. 얼굴이 창백하여진 것은 놀란 데 원인이 있기도 하겠지만 또한 못먹은 데서 온 병약한 체질이 원인이기도 하였다. 예언자는 닥쳐 올 재난을 내다보며 다음과 같이 탄식한다(7절). "슬프다 그 날이여 비할 데 없이 크니 이는 심판의 날이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라(욜 2:31; 유 6절). 이 날을 크다함은 이 같은 날이 결코 없음이라" 한다. 우리 주님께서도 예루살렘의 마지막 파멸을 비할 데 없이 큰 사건으로 말씀하셨다(마 24:21). "이는 야곱의 환난의 때" 곧 슬픔의 때가 다가 오기 때문이다. 그 날이 환난의 때인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무리들이 다른 백성보다 고난이 극심할 것이기 때문이다. 야곱의 환난의 때는 곧 포로생활을 하는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야말로 야곱 자손의 안녕과 야곱의 하나님의 영예에 관심을 지닌 사람들이 크게 탄식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였다.2.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결국은 이 재난을 종식시키시고 축복된 결과를 주시리라는 사실을 기록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1) 야곱의 환난이 끝날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본문에 "그가 이에서 구하여냄을 얻으리라" 하였다. 교회에서 환난이 아무리 오래 지속된다 할지라도 그 환난이 언제나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으므로" 그가 그의 교회를 구하여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2) 야곱을 괴롭히는 자들이 그를 더 이상 괴롭히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야곱에게 가한 악행 때문에 보응을 받으리라고 하신다(8절). 이 일을 착수하실 이는 그의 손안에 대권을 쥐신 "만군의 여호와이시다." 그러므로 본문에 "내가 네 목에서 그 멍에를 꺾어버리리라. 바로 네 목을 오랫동안 무겁게 짓눌러 참을수 없는 고통을 주던 멍에를 꺾으리라. 또한 네 줄을 끊으며 너에게 자유와 쉼을 허락하리라. 그러므로 너희가 다시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이방인들의 명령을 받지 않겠고 그들을 섬기지도 않을 것이며 그들이 너희로 자기를 섬겨달라고 하지 못하리라. 다시는 그들이 너의 소유를 탈취하거나 너희를 부려먹음으로 부요케 되는 일이 없으리라" 하신다.
(3) 자비의 극치는 그들이 다시 신앙생활을 자유롭게 하게 되는 데서 실현된다(9절). 그들은 원수를 섬기던 데서 해방될 것이요, 막연히 살면서 원수들이 기뻐하는 바를 하지 않게 될 것이며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며 그들의 왕 다윗을 섬기리라" 하신다. 이 말은 교회와 국가의 지휘 체제가 수립되어 그들이 법질서 아래 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들이 고통을 당하며 원수를 섬기게 된 것은 그들이 마땅히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할 의무인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신 28:47).
그러나 때가 이르면 그들은 환난에서 구출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를 섬길 마음을 주시며" 또한 그를 섬길 기회도 동시에 허락하시므로 그들을 준비시키실 것이며 자격을 갖추게 하실 것이다.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은" 우리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려하심" 인 것이다(눅 1:74, 75). 일시적인 재난에서 우리를 놓으심은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하며 더욱 힘써야 할 것을 알게 될 때 더욱 자비롭게 인식된다. 그들은 자기의 하나님만을 섬기게 될 것이요, 배역하던 옛 시절에 하던 것처럼 마지못해 하거나 또 그들이 포로생활 말기에 강제로 다른 신들을 섬기던 것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왕 다윗" 을 섬길 것이다. 이러한 통치자를 하나님은 다윗의 계통에서 때때로 그들 위에 세우실 것이며(스룹바벨처럼) 최소한도 느헤미야같이 "다윗의 집이 심판석" 에 앉게 하시리라신다. 이 말씀에는 보다 큰 의미도 있다. 풀어서 쓴 갈대아 사본에서는 본문이 다음과 같이 되었다. "그들이 메시야(또는 그리스도)요, 그들의 왕 다윗의 아들에게 복종하리라." 즉 유대인 해석가들은 그리스도에게 이 말씀을 적용한다. 이 말은 포로생활에서 놓여나게 하심으로 시작하신 하나님의 통치자 메시야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들 속에서 역사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 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그들의 왕 다윗" 이라고 불렀고(마 22:42) 또한 그는 그렇게 그를 부르는 사람에게 답변을 하시었다(마 22:31, 32).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의 영광에서 다윗은 메시야의 뛰어난 예표였다. 다윗과 맺은 왕권 계약이 주로 그리스도에게 적용되고 있으며 또 그리스도에게서 이 계약은 완성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에게 "그의 조상 다윗의 보좌" 를 허락하셨고 "그를 그들 위에 세우시고 거룩한 산 시온에 앉히셨다." 신약 성서에서는 하나님이 "예수를 세우셨다." 즉 그를 왕으로 삼으셨다는 말씀이 자주 나온다(행 3:26; 13:23, 33). 다음 사실을 생각하여 보자.
[1]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섬기는 사람들은 "그들의 왕 다윗" 도 섬겨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들을 맡겨야 하며 그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들은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리듯이 아들에게도 영광을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중재자(Mediator)이신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영적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드리고 있음이 나타나야 한다. 그의 안식을 받은 사람들은 그의 멍에도 져야 하는 것이다.
자비에 대한 약속(2) (예레미야 30:10-17)
앞의 단원에서와 마찬가지로 본 단원에서도 포로 중에 있는 유대들의 비참한 정경이 묘사된다. 그러나 때가 되면 그들이 안식할 것이요 영광스러운 구원이 다가 올 것이라는 귀중한 많은 약속의 말씀이 그들에게 주어진다.
Ⅰ. 전에 하나님은 그들을 대적하셨다. 그는 그들을 "흩으셨고" (11절) 그가 "이 모든 일을 그들에게 행하셨다" (15절). 그들이 당한 모든 재난은 그가 보내신 것이었다. 그들을 치는 도구가 누구이었든간에 그들을 치신 주동자는 하나님이었다. 하나님, 바로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을 끌어내리고 멸하시겠노라는 말씀이 그들의 처지를 더욱 슬프게 하였다.
1. 하나님이 그들을 치심은 아버지의 사랑의 견책에 불과한 것이었다(11절). 그러므로 본문에 "내가 공도로 너를 징책할 것이라. 너희는 견책을 받아 마땅하며 그러므로 잘 참아 견뎌야 할 것이라" 하신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치시는 것은 그들의 잘못을 시정해 주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견책은 언제나 관용어린 것으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내가 너희와 친교를 맺었으므로 내가 그렇게 하리라. 너희들이 짐작한 대로 너희를 내가 결코 무죄한 자로 여기지 아니하리라" 하신다. 신앙 고백이 아무리 그럴듯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죄에 대한 책임을 모면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하나님은 편파적인 분은 아니시다. 따라서 죄를 발견하시면 그것에 대한 그의 증오를 나타내신다. 그는 그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죄를 발견하실 때 죄를 더욱 미워하신다. 하나님은 그들의 "허물이 크고 죄가 수다함을 인하여" 그의 백성들을 바르게 하고자 본문에서 견책하신다(14,15절). 언제나 슬픈 사건이 많이 일어나고 또 그런 일이 계속될 때 우리는 어떻게 할까? 이러한 때에 우리는 우리의 죄가 많고 또 격증되고 있기 때문임을 인식해야 한다. 허물이 우리 안에서 계속되기 때문에 고난도 계속되는 것이다.2. 그러나 하나님이 아버지다운 사랑으로 책벌하신 것을 유다 백성들과 다른 백성들은 하나님의 대적 행위로 해석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의 상하게 하는 그것으로 그들을 상하게 하며 잔학한 자의 징계하는 그것으로 그들을 징계하는" 분으로 간주한다(14절). 마치 그가 그들을 멸하시려고 작정하셨고 잘못을 시정한다거나 그들을 위해 자비를 유보하시려 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였다. 확실히 모든 면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너무 가혹히 다루시는 것 같았고 그가 그들의 적이 되셔서 그들을 대적하여 싸우시는 것처럼 여겨졌다(사 63:10). 욥도 불평하기를 하나님이 그를 가혹하게 대하시며 "그의 상처를 깊게 하셨다" 고 했다. 환난이 크고 오랠 때 우리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마음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과 그의 섭리로 인해 오는 환난에 대하여 완고한 마음을 품어서는 안된다. 그가 주시는 환난은 자비하심에서 오는 경책이지 잔학한 것은 아니시다. 그 환난이 표면적으로 어떠하든지 말이다.
Ⅱ. 그들의 친구들이 그들을 버렸고 그들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들이 번영을 누릴 때 그들에게 아부하던 자들도 이제 그들이 곤경에 빠지자 아무도 아는 체하지 않았다(13절). 가문이 기울면 이런 현상은 곧잘 일어난다. 측근자들이 그들을 떠나간다. 친구들의 도움이 기쁨을 주며 그들의 협조가 필요한 두 가지 경우가 있다.
1. 우리가 비난과 책망을 들을 때 친구가 나타나서 우리를 변호해 주고 또 우리가 정면으로 그들을 대하여 자신을 변명할 수 없을 때 조언을 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 보면 그들의 "송사를 변호할 자가 없다." 아무도 나서서 그들을 보호해 주려하지 않았고 그들을 위하여 압제자들에게 중재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변호하신다. 왜냐하면 이토록 하늘의 은총을 많이 입은 백성에게 지지해 줄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이상히 여기셨기 때문이다(사 63:5).2. 우리가 아프거나 괴로울 때 또는 상처를 입었을 때 친구가 옆에 같이 있어서 조언도 해 주고 동정도 베풀며 뜻밖의 일이 생기면 치료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 보면 아무도 그렇게 하여 주는 사람이 없다. 그들의 상처를 싸 줄 아무도 없었고 조언과 위로로 그들로 닥친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너를 사랑하던 자가 다 너를 잊었다" (14절)고 하였다. 즉 눈에 안 띄게 되자 곧 마음도 떠났다는 말이다. "그들이 너희를 찾지 않고 너희를 버렸노라" 하신다. 이러한 매정함은 세상에서의 신앙이 있고 경건하라고 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자주 발견된다. 교육, 직업 면에서 볼 때 소망스러운 출발을 하는 사람들을 자기들의 친구와 연인, 후견인과 보호자로 삼기를 바란다. 반대로 이러한 요소를 잃어버리면 사람들은 그를 버리고 잊어버리며 나서서 변호해 주려하지 않으며 그 상처를 싸매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는다. 이제 "너를 사랑하던 자가 다 너를 잊으니 이는 내가 너를 상하게 하였음이라" 는 말씀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 대적하는 백성을 누가 감히 도울 수 있겠는가? 또한 누가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겠는가? 본문에 나오는 "네 상처는 싸맬 약이 없고" (12절) "네 슬픔을 치료할 약이 없다" (한글 개역과 다소 틀림:역주)는 말씀을 볼 때 그들의 처지가 절망적이며 평안의 때는 지나간 것처럼 보인다. 포로 중에 있는 유대인들의 상태가 이와 같았으므로 인간의 힘으로는 그 누구도 그들의 슬픔을 치료할 수는 없었다. 거기서의 그들의 모습은 "시체와 마른 뼈로 가득 찬" 골짜기와 같은 형상이어서 전능자가 아니고는 거의 생명을 불어넣을 아무도 없었다. 이토록 인구가 감퇴되고 쇠약해진 국민이 다시 그들의 조국을 되찾고 거기서 세움을 입을 수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들의 참상을 가중시켰으므로 그들의 슬픔이 경감될 징후는 조금도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강력한 위로가 나타나 그들을 압도하는 슬픔의 파도에 그들이 밀리지 않도록 지켜 주셨을 때까지 그들의 영혼은 위로받기를 거절하였고 또한 당하는 비극은 요지부동인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고통이 낫지 못한 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었다. 그들은 죄를 회개하고 죄에서 떠나는 대신에 죄를 더욱 자행하였다. 감할 수 없는 슬픔이란 감하여지지 않는 욕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이 비참한 상태에서 그들은 경멸어린 눈초리의 대상이 된다(17절). 그러므로 본문에 "그들이 너희를 쫓겨난 자라, 버림받은자라, 파멸하도록 내버려진 자라," "찾는자가 없는 시온이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성과 성전이 서 있던 곳을 바라보면서 그곳을 유배지라고 칭하였다. 이제 모든 것은 파괴되었고 쉴 만한 곳도 없었다. 또한 거주할 만한 곳도 남아 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전처럼 시온으로 가는 길을 묻는 사람도 없었다. "아무도 시온을 찾는 자가 없게 되었다." 또한 그들은 전에 시온에 거하였으나 이제는 포로가 된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을 추방당한 자들이라고 불렀다(슥 2:7 에서는 이들을 바벨론 성에 거라는 시온이라고 불렀다). 바벨론의 포로들은 시온에 속한 사람들이었고 그러기에 시온에 대하여 얘기하고 싶어하였고 그곳을 기억하고는 울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돌아보는 자는 없었고 그들에 관하여 묻는 사람도 없었다. 시온은 그 주변에 있는 자들에 의하여 유린당하고 멸시를 받아왔다. 이것이 시온의 운명이었음을 기억하자.
Ⅲ. 위와 같은 모든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적절한 시일에 그들을 해방시키시고 구원하시겠다고 한다. 다른 누구도 그들의 상처를 치료할 능력이 없고 그러기에 그들을 구하지 못하였지만 그는 하실 수 있으시다.
1. 하나님이 비록 그들과는 멀리 계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하실 것과 능력과 은총을 베푸실 것을 그들에게 확약하신다. 그러므로 본문에 "내가 너를 구원하리라" (10절) 하셨고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이라" (11절) 하셨다. 그들이 고통을 당할 때 그는 그들과 함께 하셔서 그들을 원수들의 수중에서 구원하셨으며 그들을 구원해야 할 시기가 이르렀을 때 역시 그들과 함께 하시며 기회가 포착되는 대로 그들을 고통에서 구하여 내셨다.2. 비록 그들이 조국을 떠나 멀리 있지만, 즉 "멀리 떨어져 포로된 땅에 가 있지만 구원은 그들에게 임하여 그들과 그 자손들을 그곳에서 구하여낼 것이다. 그들이 돌아오므로 그들은 이방인들 가운데 알려질 것이요 그들과 구분될 것이다" (10절).
3. 그들은 지금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고 계속 경고를 받고 있지만 그들이 "태평과 안락을 누리며" 안전과 쉼을 누릴 때가 올 것이다.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다" (10절).
4. 그들이 흩어져 가 있는 나라들은 망할지라도 그들은 파멸을 면할 것이다(11절). "내가 너를 흩어놓은 열방은 진멸하며" 또한 그로 인하여 너희가 그들 가운데 흩어질지라도 너는 진멸하지 아니하리라" 하신다. 이웃 성들이 평안해야 그들도 평안할 것이라고 약속되었으며(29:7) 민족들이 파멸하는 틈바구니에서도 그들은 파멸을 면할 것이라 한다. 때로 하나님의 교회가 매우 침체될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그대로 버려두시지 않으신다" (5:10, 18).
5. 하나님은 그들의 죄 즉 무수한 범죄와 치명적인 죄 때문에 그들을 경책하셨고 그것은 또 당연한 일이기도 하였지만 그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이요 하나님의 때가 오면 비록 죄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구원을 얻지 못하도록 방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6. 그들을 모략하는 자들이 강할지라도 하나님이 모략하는 자들을 꺾으실 것이요, 그들의 힘을 막으실 것이다(16절). 그러므로 본문에 "무릇 너를 먹는 자는 먹히며 시온의 정상이 참작되어 온 세상에 시온의 공번됨이 나타날 것이라" 한다. 따라서 시온을 압제하는 자들이 멸망할 때가 되면 시온의 구원도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시온의 원수들은 지금까지 그들의 시온에게 행한 모든 상해에 대하여 보상을 치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땅에서 일어나는 일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며" 이 하나님에게 "원수갚는 일이 속하여"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도 빠짐 없이 포로로 사로잡혀 갔었다." 그러나 "그들을 약탈하던 자들이 노략을 당할 때" 가 오고만다. "사로잡는 자들이 사로잡힐 것이다" (계 13:10). 이렇게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이므로 현재의 정복자들도 포로가 될 날이 이를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현재의 포로들을 잘 대우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들과 장래를 생각하여 현실에 남에게 잘하는 것은 마땅한 일인 것이다.
7. 그 상처가 불치의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상처를 치료하실 것이다(17절). 그러므로 본문에 "네 상처를 낫게 하리라" 하신다. 아무리 불치의 병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치료에 손을 대시면 환자는 안전하다.
Ⅳ. 이 진귀한 약속 속에는 공포와 근심을 무마시키기에 충분한 것이 있으므로, 부당한 공포와 근심을 버리라는 주의 사항이 있다. "내 종 야곱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마치 희망없는 자들처럼 늘 피해서는 안 된다(15절). "왜 너는 환난 때문에 부르짖느냐? 그것은 네 죄 때문이니라. 그런고로 슬퍼할 것이 아니라 회개를 하라."
복된 약속 (예레미야 30:18-24)
저들의 재앙의 날이 지나가고 하나님의 은혜가 되돌아오리라는 약속을 계속해 주고 있다.
Ⅰ. 그 도성과 성전이 재건될 것이다(18절). "야곱의 장막들" 과 "그의 거처" 가 "포로됨" 의 결과를 맛보았다. 왜냐하면 죄다 패망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거주지가 다시 개선되고, 하나님이 그 거하는 곳들에 긍휼을 둘 것이다." 사실 그 거처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정의의 본보기가 되어왔던 것이다. 그 후 예루살렘 "성읍이 자기 산에 중건될 것이다." 물론 "자기 산" 이라 해야 패허에 지나지 않지만 말이다. 그러나 "성읍을 무더기로 만들 수" 있는 자(사 25:2)는 원하기만 하면 "무더기를 성읍으로" 다시 "만들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궁궐(하나님의 궁궐인 성전)은 본래대로 될 것이다." 옛 모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다시 짓게 될 것이다.
Ⅱ. 신성한 절기가 다시 엄숙히 거행되리라(19절). "그 성읍과 성전과 야곱의 거처 모든 곳에서 감사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가 나올 것이다."
Ⅲ. 인구가 다시 늘어나 번성케 되리라. 그들은 적지 않을 것이요, 작지도 않을 것이다(흠정역). 오히려 만국 중에 뛰어나게 되리라. "내가 그들을 번성케 하고, 영화롭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영예롭게 되는 것은 바로 구원받을 자들이 자꾸만 교회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원로원에는 신실한 정치인이 대를 이을 것이요, 성도의 회중에는 신실한 예배자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
Ⅳ. 그들을 다스리게 될 좋은 정권이 자신들에 의하여 수립될 것이라고 하신다(21절). 그러므로 본문에 "그 왕과 치리자들은 본국에서 날 것이라" 하였다. 또한 그들이 이방인들과 원수들에 의하여 더 이상 통치받지 않으리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본문에 "그 통지자는 그들 중에서 나올 것이라" 하셨다. 또한 그 통치자는 그들과 함께 포로생활의 고통을 짊어진 자라야 할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의 통치자요 왕 다윗인 그리스도를 뜻한다(9절). 그리스도도 우리 가운데서 나오신 분이시다. 그는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와 같은 형체를 가지신 분이다. 또한 본문에 "그를 내게 접근케 하리라" (21절) 하셨는데 여기서 "그" 는 다음의 두 가지 부류의 인물들 중 하나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수 있겠다.
1. 야곱과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말씀일 것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확대시킬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들을 내게로 이끌어 이전처럼 성전에서 나를 섬기게 하리라. 그리고 나의 백성으로서(22절) 계약을 나와 맺게 하리라. 또한 나와 가까이 있으며 교제를 나누게 하리라. 그러니 담대히 내게 접근할 자가 누구뇨? 또한 누가 나와 계약을 맺고 합심하겠느뇨?" 실로 이 말씀대로 행한 사람은 몇 사람이 안 된다. "그들을 가까이 오게 하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이 없이는 아무도 이를 행할 수가 없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거룩한 규례를 준수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행하기 위하여 전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또한 마음도 의무를 이행할 준비가 갖추어져야 하며 그 일에 적응하며 그것에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마음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살피시며 요구하시는 곳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지키려는 많은 노력과 수고가 따르지 않는다면 또한 희생 제물에 마음이 들어있지 않다면 자기 기만적이요 탈선에 불과한 것이다.2. 그렇지 않으면 통치자에 대한 말씀일 것이다. 그 이유는 본문이 3인칭 단수로 호칭되는 점을 생각할 때 그러하다. "그들의 통치자들이 그의 직위에 복직되어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만사를 그와 상의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통치자로 그를 가까이하게 하실 것이다. 그가 아니면 아무도 이 연약한 백성을 돌볼 사람이 없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면 낙담될 일이 아무리 많더라도 이루고야 마신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은 더 나아가서 중재자로서의 그리스도를 지시해 준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중재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사명과 직능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하시는 것이다. 이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다. 또한 우리의 신앙 고백의 대상이신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이름과 입장을 대변하신다. 이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자라고 일컬어지고 있다(레 10:3; 21:17). 딴 곳에도 모세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갔음을 볼 수 있다(출 20:21).
(2)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중재자로서 자기에게 나아오도록 하시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 일을 하라고 명하셨고 그를 임명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를 성별하셨고 인치셨으며 이 일을 목적하여 그에게 기름을 부으셨고 그를 용납하셨으며 그를 자기가 기뻐하는 자라 선포하셨다.
(3) 아버지로 말미암아 중재자로서 그에게 나아가도록 요청된 예수 그리스도는 전심을 다하여 그 일을 이루시었다. 즉 그 일에 자신을 전적으로 바치시었다. 그는 자기의 심령을 이 일에 대한 보증으로 삼으셨다. 때가 찼을 때 그의 일은 죄를 위한 속죄가 되었다. 그는 그의 아버지의 뜻에 호응하여 또한 타락한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자발적으로 이 일을 착수하셨고 그 일을 이루는 것을 자신의 영예로 여기셨다. 또한 그는 진심으로 단호하게 그리고 자유롭고 기쁘게 그 일에 임하셨고 그의 도중에 놓여 있는 장애들을 개의치 않으셨다(사 63:3-5).
(4) 이 모든 점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놀라우신 분이시다. 그외에 이러한 일을 전심을 다하여 이루실 분이 누가 있겠는가? 다만 우리는 경탄할 수밖에 없다.
Ⅴ.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계약에 따라서 그들이 다시 하나님과 계약을 맺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22절). 그러므로 본문에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백성 삼으시고 그의 이름을 위한 백성을 삼으심은(행 15:14)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의 결과이다. 본문의 말씀을 바꾸어 말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한 마디로 계약을 요약하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를 향한 그의 선하신 뜻이 표현된 말씀이다.
Ⅵ. 그들의 원수들은 수명이 다하여 멸망할 것이라고 하신다(20절). 그러므로 본문에 "무릇 그를 압박하는 자는 내가 다 벌하리라" 하신다. 이로서 "하나님이 기름부은 자를 해하는 일은" 위험하다는 사실이 경고된다(시 105:15). 마지막의 두 절(節)은 다음과 같은 서두로 시작된다. "보라, 여호와의 노가 발하여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다." 이 두 구절은 앞에도 기록된 적이 있었다(23:19, 20). 앞에서의 두 절은 이스라엘의 악한 위선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경고로서 쓰여지고 있고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을 박해하는 악한 탄압자들에 대한 경고로 쓰여지고 있다. 이 구절들은 다음의 말씀과 같은 성격의 말씀들이다(사 51:22, 23). "내가 나의 분노의 큰 잔을 내 손에서 거두어서 너를 다시는 마시지 않게 하고 그 잔을 너를 곤고케 하던 자들의 손에 두리라." 악한 자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본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
1. 놀라웁고 거역할 수 없는 회오리바람처럼 무서운 것으로 나타난다.2. 매우 가혹하게 나타난다. 그것이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라" 한다. 그들은 놀라게 될뿐 아니라 중상을 입는다.
3. 여호와의 노가 그들을 추격한다. 회오리바람은 대게 금방 그치고 만다. 그러나 여호와의 노는 "계속되는 회오리바람이 될 것이다."
4. 여호와의 노가 발한 이상 그 뜻한 바를 이루고야 말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다 완료되기까지는 돌이키지 아니하리라" 하신다. 그의 사랑의 목적과 마찬가지로 그의 진노의 목적도 모두 성취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 마음의 뜻한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 하리라 하신다.
5. 지금 이 사실을 유념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때의 진노에 대한 공포를 떨어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말일에 그것을 깨달으리라" 하신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진노를 막기에는 너무 늦은 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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