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론에 거하는 포로들에 대한 충고 (예레미야 29:1-7)
Ⅰ.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에게 편지를 띄웠다. 거기에는 여고냐가 항복하여서 포로로 잡혀가 있었고 그의 어머니, 본문에서는 "환관" 이라고 불리우고 있는 내무대신들과 "유다와 예루살렘의 방백" 들이 있었다. 동시에 그들은 가장 활동적인 인물이었다. 또한 "목공들과 철공들" 도 사로잡혀 갔는데 이는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자들이 그들의 성을 수축하거나 전쟁 무기로 그들이 무장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온순한 항복에 의하여 느부갓네살이 누그러지길 사람들은 바랐다. Satis est prostrasse leoni-즉 사자는 그의 적수를 쓸어뜨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러나 이 거만한 정복자는 아합에 대하여 벤하닷이 그러하였듯이(왕상 20:5, 6) 유다에 더 큰 양보를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포로된 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출발하자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다시 와서 더 많은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백성들을" 사로잡아갔다(1절). 이렇게 하여 그는 만족히 여겼다. 그리하여 군사들이 그들에게 손을 뻗쳐 바벨론으로 그들을 사로잡아갔다. 이 포로들의 입장은 매우 비관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고국에 계속 남아 있는 나머지 형제들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보다 더 큰 죄인들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편지를 써서 그들을 위로하며 그들이 아무런 구원도 없으리라 생각하고 절망하지 말 것과 또 고국에 남아 있는 그들의 형제들을 부러워할 이유도 없음을 확신시켜 준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도 직접 들려진 말씀처럼 참으로 "하나님의 영감에 의하여" 주어진 것이란 사실이다. 기록이야말로 멀리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을 선포하는 적절한 방법이다.2. 우리는 멀리 있는 친구들에게 적절한 위로와 유익한 충고로 이루어진 경건한 편지를 띄움으로 하나님께 봉사하고 또 선도 행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말로 할 수 없는 자들에게 우리는 편지로 써야 한다. 기록된 것은 보존의 장점이 있다. 예레미야의 이 편지는 시드기야 왕이 느부갓네살에게 보내는 사절들 편에 의해서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에게 전달되었다. 아마도 그들이 간 것은 시드기야가 느부갓네살에게 조공을 바치고 복종의 서약을 갱신하는 것 때문이든지 또는 느부갓네살과 평화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것 때문이든지 일 것이다. 이 조약을 체결한 때 포로들은 자기들의 문제도 포함되지나 않을까 하는 소망을 품었을 것이었다(3절). 이들 사절편에 의해서 예레미야는 메시지를 전하였다. 그들 편을 택하여서 그는 메시지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다. 왜냐하면 그 메시지는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택한 다른 이유가 또 있다면 바벨론으로 편지를 띄울 이외의 안전한 방법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편지의 효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만일 포로된 자들이 고국에 남아 있는 친구들이나 친척들로부터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한다면 포로 생활은 비참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편지는 멀리 떨어져 있는 자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만족감을 주었다.
Ⅱ. 예레미야가 쓴 편지의 내용. 편지 내용이 4절에서부터 24절까지 길게 취급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예레미야는 포로들에게 이 편지를 쓰신 분은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심을 확증한다. 예레미야는 다만 기록자 또는 필경사에 불과하다. 포로 생활 속에서도 그들이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시라" 는 소리를 듣는 것은 큰 위로가 되었다. 만군의 여호와이므로 그는 그들을 도우실 수 있고 그들을 놓아주실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지금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라고 한다. 비록 하나님이 그들과 싸우시고 현재 그들의 원수들이 그들에 비해 너무나 강한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은 그의 백성과 맺은 계약을 아직 저버리시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 말씀은 또한 그들로 바벨론 우상의 모든 유혹에 대하여 자신을 지키라는 경고이기도 하였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 은 "만군의 여호와" 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 편지를 보내시는 것은 포로생활을 하는 그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그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증거요 비록 그들에게 못마땅한 점이 있어서 그들을 시정하려고 하시기는 하지만 그들을 포기하지도, 상속권을 박탈하지도 않았다는 증거였다.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를 원하셨다면 그가 그들에게 편지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2. 하나님은 유다를 포로로 사로잡은 자들까지 주관하심을 선언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4절과 7절에서 "내가 너희로 사로잡혀 가게 하였다" 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명이 없었다면 바벨론 왕이 전력을 기울였어도 그들을 사로잡아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바벨론 왕은 위로부터 그에게 허용된 것 이상의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그들을 사로잡혀 가도록 하셨다 해서 그가 그들에게 불공평하시다거나 해하려 하시거나 하려는 것은 아니었음을 그들에게 확신시키고자 한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거기 자신을 적응시키고 참으며 그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과하신 것으로 여기는 것이 매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이르기를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하였나이다" 라고 하셨다.
3. 하나님은 포로들에게 바벨론에 정착하여 살 것만을 생각하라고 명하신다. 그리고 그곳에서 최선을 다하여 살라고 말씀하신다(5,6절). 고로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라" 고 말씀하신다. 이 모든 사실을 통하여 그들에게 주지시키고자 하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
(1) 그들이 포로 생활이 속히 끝나리라는 희망을 품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이 소망 때문에 그들이 정착하지 않고 결과적으로 불 안정된 삶을 살게 될까 해서였다. 즉 그들이 아무일도 하지 않으려 하며 그곳에서 위로받기를 거절하며 아무 의욕도 없이 편히 쉴 날만 바라서 그들의 정복자들에게 도전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끝내는 실망이 좌절로 변하여 이런 소망이 없었던 것보다 더 비참한 상태에 머물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거기서 그들이 계속 살 것으로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그 생활에 스스로 적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마치 그들이 고향에 있는 것처럼 집을 짓고 곡식을 심고 결혼하며 자녀들을 키우라고 하신다. 그리고 그들의 가족이 번성하는 모습을 보며 기뻐하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그들 당대에는 포로생활을 하다가 죽을 수밖에는 없지만 그들의 자녀들은 살아서 더 좋은 날을 볼 수 있겠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고 산다면 그들이 바벨론에서 편안히 사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다만 있다면 때때로 "시온을 기억하고 우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슬픔 때문에 생활에 지장을 초래하여서는 안 된다. 그들은" 소망이 없는 자들처럼 울어서는" 안 된다. 또한 기쁨이 없는 자들로 행세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생활 형편에서라도 있는 그대로의 삶을 최대로 선용하는 것, 그것은 우리의 지혜이며 의무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을 다 갖지 못하였다고 해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위로마저 내동댕이 쳐서는 아니된다. 우리가 조국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조국이란 기묘하게도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러한 달콤한 감정은 무엇이라고 설명하기가 어려웁다(nescio qua dulcedine). 그렇지만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를 어떤 다른 나라로 가도록 하신다면 조건이 우리의 마음에 썩 내키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거기서 마음 편하게 적응하여 살려고 결심을 내려야 한다. 만일 세상이 "여호와의 것이라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그곳이 곧 아버지의 땅임에는 별차이가 없는 것이다. Patria est ubicunquebene est-즉 우리가 쉼을 얻을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우리의 고향인 것이다. 만약 사태가 전과 다르다 할지라도 그 때문에 안달하는 대신에 만사가 보다 잘되기를 바라며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Non simale nunc, et olim sic erit-즉 당장 고난을 받는다고 늘 고통을 당하라는 법은 없는 법이다.
(2) 그들이 견디기 어려운 포로 생활의 고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동요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이 집은 지어서 무엇 하는가고 얘기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비관하여 사태를 악화시키고는 한다). 그들은 바벨론의 영주나 주인들이 그들이 집을 지어도 살도록 묵인해 주지는 않으리라든가 그들이 재배한 포도원의 실과를 먹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결코 두려워 말라" 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계속하여 "너희가 바벨론 사람들에게 고분고분하면 그들도 너희를 정중히 대접할 것이라" 고 말씀하신다. 일이나 하면서 자기 사업에나 몰두하는 온순하고 조용한 백성들은 낯선 무리들 가운데서나 원수들에게까지 기대한 이상의 대접을 받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저희를 "사로잡은 모든 자에게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다" (시 106:40). 또한 집을 지은 사람을 그 집에서 못살도록 쫓아내는 무자비한 일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4.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이 포로된 그 국가의 유익을 위해 일하라고 지시하신다(7절). 또한 그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고 그 나라의 발전을 도모하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그들이 바벨론 왕에게 예속되어 있는 동안은 공공질서를 저해하는 짓을 저지르지 말라는 부탁이다. 비록 바벨론은 왕이 이방인이요 우상 숭배자요 박해자이며 하나님과 그의 교회의 원수 노릇을 하고 있지만 그가 그들을 보호하려는 한은 그들은 그에게 충성을 다하며 경건함과 정직함으로 그의 휘하에서 조용하고 평안한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신다. 또한 그가 메워 준 멍에를 벗어나려고 시도하지 말고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해방시켜 주실 것을 믿고 참고 그에게 의탁하라고 하신다. 그들은 그들이 사는 곳의 평안을 위하여 또한 지배자들이 포로인 그들에게 계속 친절을 베풀어주기를 바라서 또한 자기 민족에게 주어진 오명을 씻기 위하여, 그리고 유다가 "항상 배반하는 일을 행하여 열왕과 각 도에 손해가 되었다" (스 4:15)는 평을 면키 위하여 기도해야만 한다고 말씀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정권에 진실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뱀과 같이 지혜롭고 또한 비둘기같이 순결해야 했다. 이런 모든 행위의 근거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 이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그 나라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 그들도 마찬가지로 그 재난으로 말미암은 큰 타격을 입을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초대 기독교인들도 그들의 거룩한 종교의 인내심을 본받아 권력자들을 위하여 기도했었다. 비록 그 지배자들이 박해자들이었지만 말이다. 또한 포로된 유대인들은 그들이 사로잡은 땅의 평안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를 위하여 애써야 했다면 우리가 우리의 조국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조국이 있으므로 우리는 같은 핏줄의 통치 아래 자유만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조국이 평안해야 우리와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이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배에 탄 승객이라면 모두 그 배의 안전에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에게 주는 충고 (예레미야 29:8-14)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포로 생활을 평온하게 할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하신다.
Ⅰ. 하나님께서는 자칭 선지자들이라고 하는 자들이 거짓된 기초위에 세운 건물에서 그들을 끄집어 내신다(8,9절). 그들은 백성들에게 포로 생활이 속히 끝날 것이니 바벨론에 정착할 생각은 하지 말고 돌아 갈 준비나 하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제 그들이 너희를 속이리라. 비록 그들이 나의 이름으로 예언한다 할지라도 너희에게 거짓을 예언함이니라. 그러니 그들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며 또 너희 스스로 속임을 당하지 않도록 하라" 고 하신다.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보존하려하시는 진리의 말씀을 갖고 있으면서도 현혹당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다. 왜냐하면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현혹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꾼 꿈도 신경을 쓰지 말라" 고 하신다. 즉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신비하게 여기는 꿈과 환상을 경고하신다. 백성들은 무슨 꿈이라도 꾸면 온통 거기에 정신을 다 쏟는다(다만 그들이 깨어있을 때 생각했거나 발생하였던 사건들이 꿈속에서 순간적으로 나타났을 뿐인데 그들은 그것을 생각하고 또 여러 사람에게 말하며 그것을 무슨 좋은 징조나 되는 듯이 여겨 헛된 기대로 부풀게 되곤하는 것이다). 또한 예언자들도 자신들이 꾼 꿈에 근거하여 예언을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말씀하신다. 즉 거짓 예언자들의 꿈은 너희를 위하여 조작된 꿈이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그들은 백성들이 원하는 꿈을 꾸기를 바란다. 그들은 그렇게 하여서 자기들이 원하는 꿈이 잠 속에서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꿈이라도 근거를 잡아 백성들을 설득하고 그래서 속일 수 있겠기 때문이었다. 또한 거짓 예언자들이 이런 거짓된 것을 예언하는 이유는 백성들이 좋은 일만이 예언되기를 바랐기 때문이기도 하였다(사 30:10). 그들은 자기들이 말하던 것을 꿈으로 꾼다. 거짓 선지자들이 아첨하는 말로 백성들을 죄 가운데 머물게 하는 것은 백성들이 달콤한 말을 좋아하는데 원인이 있었다. 백성들은 예언자들에게 은근한 태도로 비위를 맞춰 줌으로 또 그들의 입에서 좋은 예언이 나오기를 바랐던 것이다.
Ⅱ.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그들이 소망을 걸 만한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신다. 우리는 백성들이 집을 모래 위에 지었다고 해서 그 집을 부셔버리라고만 설득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그들이 다시 지을 수 있는 반석이 준비되었다고 말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본문에서 그들에게 그들이 속히 돌아갈 수는 없더라도 결국은 돌아갈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그것은 곧 70년이 차고 난 후이다. 이 말씀에 의거하여 볼 때 70년의 포로생활이란 마지막 사로잡혀 갈 때부터 계산된 것이 아니라 첫 번째 사로잡혀 갈 때부터 계산된 것이 분명해진다. 교회의 구속이 우리가 바라는 시대에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때가 되면 그 일은 충분히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때야말로 가장 적절한 때인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약속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비록 그가 오랫동안 그들에게 전혀 무관심하셨던 것 같지만 그들 가운데 찾아오시며 그들을 위하사 영광을 그들에게 안겨 주리라고 하신다. 즉 귀하신 분들이 천한 사람들을 방문하면 그것이 곧 천한 사람들에게 무상의 영광이 되듯이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포로 생활을 종식시키실 것이며 포로생활에서 오는 모든 재난을 면케 하시겠다고 하신다. 또한 그들이 흩어져 있어 어떤 이는 이 나라, 다른 이는 저 나라에 있지만 그가 "쫓아 보내었던 열방과 모든 곳에서 모으며" 그들이 모두 따를 한 법을 세워 다시 그들을 하나로 연합시키겠다고 하신다. 또한 그들이 먼 곳에 있지만 다시 그들의 조국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요, "사로잡혀 떠나게 되었던 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다(14절).
1. 포로에서의 귀향은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 속의 실현이 될 것이다(10절). 그러므로 본문에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겠다" 고 하신다. 참으로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존엄한 말씀을 경시해서 그 예언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지 않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또한 "선한 말" 이시다. 그러므로 그것은 유익한 것이요, 일점 일획도 땅에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가 말씀하셨으니 또한 이루지 아니하시랴" 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포로생활에서의 귀향은 안연하게 이룰 것이다. 또한 귀향은 하나님의 약속한 바의 "선한 말씀" 의 성취가 될 것이다. 즉 은혜로운 약속의 실현이라 하겠다.2. 포로에서의 귀향은 그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의 관철이 될 것이다(11절). 그러므로 본문에서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니니" 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모든 일은 계획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나타난 일은 모두 그의 마음속에 생각되었던 일들이다(행 15:18). 또한 그가 행하신 일은 그의 계획과 전혀 일치된다. 그는 "그의 뜻에 따라" 모든 일을 이루신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생각도 모를 때가 있다. 또한 자신의 마음도 모를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안에 어떤 불확실한 요소도 없으시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에게 모두 불리할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는 정반대의 계획을 품으신다. 즉 그의 계획들은 선한 것이지 악한 것은 아니다. 비록 나쁜 것으로 보이는 것일지라도 결국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계획된 것이다. 그의 생각은 모두 약속된 미래를 향하여 역사하는 것으로 때가 되면 그가 이루신다. 비록 우리가 기대하던 때에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기대하던 결과는 꼭 이루어지는 것이다. 열매가 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리면 과실을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고 또 기다리게 하신다. 이것이 그의 참 뜻인 것이다.
(1)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들의 고통의 결과가 어떠할지를 보라고 하신다(그것은 고무적인 결과가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들의 고통이 오래 지속될지라도 언제나 계속될 것은 아니라고 하신다. "시온에게 은혜를 베풀 때" "곧 그 정한 때" 가 반드시 오리라하신다. 최악의 사태에 이르면 그들이 회개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그가 그들의 영광된 구속을 완성시키실 것이다. 그 일이 완성될 수 있음은 하나님의 일에는 빈틈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창조를 시작하시자 그는 하늘과 땅의 창조를 마치셨다. 그러므로 그가 창조하신 하늘과 땅의 만군이 그의 백성에게 축복을 내릴 것이다.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실 때는 그것이 완성될 때까지 자비를 베푸신다. 하나님은 중간에서 그만두는 일이 없으시다.
(2) 하나님은 그들에게 기대를 가지라고 하신다. 그들이 바라고 원하던, 그리고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것에 대하여 기대를 가지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공포스런 미래를 기다리라고 하지도 않으셨고 그들의 환상에 대한 기대를 가지라고 하지도 않으셨다. 그가 그들에게 약속하셨고 또 그들에게 최선의 결과를 이루어 줄 목적을 믿음을 갖고 기다리라고 하셨다.
3. 포로 생활에서의 귀향은 그들의 기도와 간구에 대한 응답이 될 것이라 하신다(12-14절).
(1) 하나님은 그들에게 기도하도록 격려하신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바 선을 이루고자 하실 때는 그들에게 기도의 영을 부어 주신다. 그들에게 기도의 영이 임하면 그가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고자 하신다는 좋은 표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라던 바 목적이 가까워 옴을 볼 때 우리는 부르짖어야 된다. 약속이 주어지는 것은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기도를 격려하기 위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구속이 가까워 올 때는 우리는 기도로써 그것을 맞이할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다니엘은 70년이 다 찬 것으로 생각되자 "주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기를 더욱 열심히 하였다" (단 9:2, 3).
(2) 그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임하여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하신다(시 80:2). "내가 너희의 기도 소리를 듣겠고 너희를 만나 주리라."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다" 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우리는 그 약속에 의지하자.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는 말씀을 우리의 좌우명으로 삼자. 하나님에게 구할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를 찾아야 한다. 찾되 부지런히 찾아야 하고 그를 구하는 바른 방법을 따라 찾으며 믿음과 소망을 굳건히 해야 한다. 우리는 계속 구해야 하며 또 수색하는 자가 으레 그러하듯이 구함에 있어서 오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또한 구하되 참마음으로 해야 한다(이 말은 진실함과 정직함으로 구하라는 말이다). 또한 전심으로 구해야 된다(이 말은 힘과 열성을 다하여 기도하라는 말이다). 이같이 하나님을 구하는 자들은 그를 찾게 될 것이다. 또한 그가 풍성하게 상 주시는 이심을 알게 될 것이다(히 9:6). 하나님께서는 결코 "너희가 구하여 보라. 그러나 허사가 되리라" 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시다.
거짓 선지자들의 운명 (예레미야 29:15-23)
앞에서 예레미야는 포로들 가운데 진중하며 올바른 것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호의를 갖고 계심을 확신시켜 주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포로들 가운데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전한 하나님의 뜻과 위로를 경시하고 거짓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아첨하는 말을 의지하는 자들을 향하여 예레미야는 말한다. 예레미야의 편지가 그들에게 당도할 때 그들은 다음처럼 말하게 되리라고 예레미야는 말한다. "예레미야는 왜 그렇게 극성스러운가? 누가 자기더러 우리를 충고하라고 하였는가? 여호와께서 바벨론에서 우리를 위하여 선지자들을 일으키셨는데 말이야(15절). 우리는 이들 선지자들로 만족하다. 그들을 의지하면 되지 않는가? 구태여 예루살렘에 있는 예언자에게 청종할 이유가 있는가?" 라고 할 것이라고 한다. 이들의 뻔뻔스러운 악에 대하여 살펴보자. 먼저 예언자들이 거짓을 예언하면서도 그들은 하나님께 그 예언을 받았다고 하였었다. 마찬가지로 백성들은 자기들에게 아첨하는 예언자들을 영접하고는 그들의 거짓 예언을 하나님의 책임으로 전가시키고 자기들에게 이런 예언자들을 일으킨 것은 여호와이시라고 말하였다. 백성들로 강퍅케 하므로 죄 가운데 있게 하며 거짓되고 근거없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소망으로 그들을 현혹시키는 예언자들은 결코 하나님이 세우신 예언자들은 아니다. 백성들이 믿는 예언자들은 백성들에게 다시는 포로로 잡혀가는 일이 없을 것이요 사로잡혔던 자들로 곧 돌아가게 되리라로 말하였다. 이런 예언에 대하여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1.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거짓 예언자들의 예언과는 반대로 아직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자들이 완전히 망하고 말 것을 예언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다윗의 위에 앉은 왕과 이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이 너희가 돌아갈 때 너희를 영접하리라고 생각하나 천만의 말씀이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도 차례차례 심판을 받아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죽으리라. 이로서 수다한 무리가 죽고 다만 가난한 자들과 곤궁한 자들만이 살아남아 세계 열방 중에 흩어지리라(16,18절)고 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악한 무화과 같게 하신다. 아니 악한 무화과처럼 취급하신다. 자신들의 악으로 말미암아 그들 스스로 악한 무화과가 된 것이요, 따라서 하나님도 그들을 그렇게 취급하신다. 마치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쓸데없어 쓰레기통에 버려지듯이 말이다. 썩은 무화과 역시 마찬가지의 운명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가 24장에서 보았던 예언과 환상을 회상시켜 주고 있다. 이들에게 주어진 심판의 이유는 회개할 줄 모르는 죄인들이 당하는 영원한 파멸의 이유도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한다고 불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의 정당성이 입증되는 것이다(19절). 본문의 말씀대로 이는 "그들이 여호와의 말을 듣지 아니하며 듣지 아니함인 것이다."2.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거하는 거짓 선지자들에게 임할 하나님을 심판을 예언한다. 그들은 바벨론에 거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기만한 자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거짓 선지자들을 하나님이 세운 선지자들이라고 자랑하는 포로된 모든 자녀들을 부르신다(20절). 그리고 "너희는 조용히 서서 너희가 그토록 신임하는 예언자들의 운명에 대하여 들으라" 하신다. 두 예언자들의 이름이 본문에 나오는데 그들은 "아합과 시드기야였다" (21절). 이들 예언자들에 대하여 고찰해 보자.
(1) 그들이 견책받는 죄는 불경과 부도덕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한 자" 였고(21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지 아니한 거짓을 그의 이름으로 말하는 자" 들이었다(23절). 거짓말은 나쁜 짓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을 속여 거짓된 희망을 품게 하는 것은 더욱 나쁜 행위이다. 그러나 더 더욱 나쁜 것은 그들의 거짓말을 모두 진리의 하나님에게 전가시키는 행위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한 마음에 대한 공의로운 심판으로 그들을 내버리셨다는 사실은 그들 스스로 자초한 운명이므로 놀라울 것이 못된다. 그들은 "이스라엘 중에서 망령되이" 행한 자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이웃의 아내와 행음하였기" 때문이었다. 음행은 망령된 행위이다. 그런데 이 망령된 짓을 이스라엘 가운데서 행하였다면 더욱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주제에 예언자인양 하지만 바로 이러한 악행이 그들의 거짓됨을 드러내고 만다. 하나님은 이런 비열한 난봉군들에게 그의 사명을 맡기지는 않으신다. 그는 "거룩한 선지자들의 여호와 하나님이시지" 이러한 불순한 무리들의 하나님은 아닌 것이다. 본문에서 거짓 선지자들이 왜 아첨을 하여 다른 사람들을 죄 가운데 지내게 하였는지 이유가 밝혀진다. 그것은 백성들을 책망할 만한 염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음탕한 짓들을 세상 사람들의 눈길에서 은폐하는 길은 사람들의 신임을 얻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았다. 그러나 "나는 아는 자요 증거인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고 하신다. 아무리 은밀한 죄라도 하나님에게는 드러나게 마련이다. 하나님은 위선이란 두꺼운 망토로 가리워 놓은 추행도 보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들 모든 어두움의 숨겨진 행위들을 드러내시는 날이 이를텐데 그때가 되면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야 만다.
(2) 이들 거짓 선지자들에게 주어진 심판의 경고. "바벨론 왕이 너희의 목전에서 저희를 죽일 것이라" 고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비참하게 죽게 하신다. 즉 그들을 "불살라 죽이리라" 고 하신다(22절). 느부갓네살이 이들 거짓 선지자들을 가혹하게 처형한 것은 그들의 불경과 부도덕 때문이 아니고 반역죄 때문이었다고 우리는 생각할 수도 있다. 즉 공공의 안녕을 깨뜨리고 백성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도록 이들 불온한 정신의 소유자들이 획책하였기 때문이었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런 이유보다는 그들의 음행이 드러날 정도로 지나쳤으므로 그들은 이렇게 비참한 최후를 당한 것이요, 그래서 그들의 이름의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 가운데 저주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봄이 옳겠다(22절). 사람들이 자기들이 싫어하는 자를 가장 나쁜 말로 저주할 때 "여호와께서 너로 시드기야와 아합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고 말하는 것보다 더 나쁜 저주는 없을 것이라고 한다. 이같이 하여 백성들은 자기들이 자랑으로 여겼던 예언자들을 수치스럽게 생각할 것이요, 끝내는 그들의 말을 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었음을 수긍하게 된다. 때때로 하나님의 신실한 선지자들은 한 나라의 가시와 같은 노릇을 한다는 문책을 받을때도 있다. 그리하여 고난을 당하고 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죽여 사라졌을 때 이들 거짓 선지자들과는 달리 그들의 이름은 축복이 되며 그들에 대한 회상은 아름다운 추억이 되는 것이다. 악인들에게는 오명과 치욕이 안겨지지만 순교자들에게는 영광과 명예가 안겨진다.
스마야의 악행 (예레미야 29:24-32)
우리는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에게 보낸 예레미야의 편지의 내용을 다 살펴보았다.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은 그것을 받아 보고는 하나님과 예레미야에게 그러한 사실을 알려 주심에 대하여 감사를 표하고 편지를 귀중하게 보관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있었던 거짓 선지자들이 이 편지를 보고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이 편지는 그들의 본체를 드러내 주기 때문이었다. 본문에 이들 거짓 선지자들 중 한 명에 관한 말씀이 있다.
Ⅰ. 그가 예레미야의 대한 적의를 어떻게 나타냈는가에 대하여. 이 부지런한 친구는 "느헬람 사람 스마야" 로서(난외의 기록을 보면) 그 이름의 뜻은 "꿈꾸는 자" 였다. 꿈꾸는 자라 함은 그가 자기의 모든 예언을 꿈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처럼 행세하였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는 예레미야가 포로들에게 보낸 편지 사본을 얻었든지 그것이 낭독되는 것을 들었든지 그 편지에 관하여 무슨 정보를 입수하였든지 한 것 같다. 그리고 그 편지가 그를 극도로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손에 펜을 잡고 편지에 응수한 것이다. 그러나 그 방법이 어떠하였는가? 그는 자신의 사명을 정당화함에 있어서 예레미야에게 편지를 보내지 않고 또 포로들이 속히 돌아오리라는 자기의 예언을 지지하는 타당한 이유도 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거짓 선지자들이 신방할 만한 후견자들인 제사장들에게 편지를 쓴다. 그리고 제사장들에게 예레미야를 박해할 것을 교사하였다. 그는 백성들의 승인을 얻어서 쓰기나 하는 것처럼 자기 이름을 내세워 편지를 썼다. 그는 마치 자기가 전 인류에 대한 지령자이기나 한 것처럼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들과 남은 모든 백성들에게 회람 편지를 띄웠다. 아마도 이 편지는 예레미야의 편지를 전해 주었던 사자들의 편에 의해 보내진 것 같다. 그러나 이 편지는 주로 스바냐를 대상으로 한 편지였다. 이 스바냐는 마아세야의 아들이든지 아니면 마아세야를 우두머리로 하는 제사장 반열에 24번의 서열에 속해 있는 자였다. 그는 대제사장은 아니었고 대제사장에게 속한 부제사장이었거나 20장 1절의 바스훌과 같이 성전에서 다른 중요한 직책을 맡은 자였던 것 같다. 아마도 그는 예언자들이라고 자칭하는 무리들을 바르게 식별하기 위하여 특수한 방식에 의하여 임명된 제사장 위원회의 회장이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예언자라고 자칭하는 무리들이 많았었고 따라서 진부(眞否)를 가려내는 판결이 필요하였다. 그러면 스마야의 편지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살펴보자.
1. 스마야는 스바냐와 다른 제사장들에게 그들의 직책상 띠고 있는 임무를 상기시키고 있다(26절). 그리하여 그는 "여호와께서 너로 제사장 여호야다를 대신하여 제사장을 삼으셨도다" 라고 그의 직책을 상기시킨다. 어떤 이는 스마야가 요아스 시대의 위대한 개혁자였던 유명한 여호야다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테이커씨(Mr. Gataker)는 말하기를 스마야가 스바냐를 그 정신과 열심에 있어서 여호야다와 같은 정도라고 추켜세우고 있다고 본다. 즉 스바냐를 제사장으로 세운 것은 여호야다가 그랬듯이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라고 부추긴 것으로 본다. 그래야 스바냐가 우쭐하여 예레미야를 대적할 수 있겠기 때문이었다. 가테이커씨(Mr. Gataker)는 계속 말한다. 예레미야를 모함하는 스마야의 이러한 행동은 치사하고 더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악랄한 중상배요 거짓 선지자인 그들은 이 일을 시도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열심히 있고 또 경건한양 가장까지 하였다(사 66:5; 요 16:2). 그러나 나의 생각에는 여기서 말하는 여호야다는 요아스 시대의 여호야다와는 다른 자로서 스바냐의 바로 전임자였던 것 같다. 아마도 여호야다는 제사장들 가운데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간 사람이었던 것 같다(1절). 여호야다가 사로잡혀 갔으므로 스바냐는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먼저 세력과 신망이 있는 이 자리를 물려받게 된 것 같다. 그리고 스마야는 이를 이용하여 스바냐에게 하나님의 섭리가 그의 편이 된 것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박해하라고 한것이었다고 설득시키려 하였다. 또한 그에게 스마야는 이같은 시기에 그가 권력을 잡게 되었는데 만약 권력을 행사할 기회를 놓치거나 남용하면 부당한 것이요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 짓이라고 설득시키려 하였다. 불의를 저지를 힘이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 불의로운 행위를 합리화시키는 자들이 있는데 이는 그들의 마음이 비참할 정도로 강퍅하게 된 탓이라 하겠다. 이들 제사장들의 본래의 임무는 "무릇 미친 자와 자칭 선지자" 를 색출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신실한 예언자들이 본문에서는 자칭 예언자, 직권 찬탈자로 간주되고 있으며 악마에게 사로잡혀서 신적인 영감은 결여된 미친 사람들이나 광포한 인간 또는 정신착란자로 간주되고 있다. 즉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이 참 선지자들에게 씌워졌다. 만약 이런 특징이 정말 참 예언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라면 미친 사람처럼 묶어 사기군처럼 처형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다. 스마야는 바로 예레미야를 이렇게 처리해야 한다고 결론짓고 있다. 스마야는 그들에게 예레미야가 자신의 사명에 대한 증거를 댈 수 있는지 시험해 보라거나 그가 미치지 않았는지 알아보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물론 그에게 그러한 하자가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한 번이라도 예레미야가 이런 오명을 쓴 일이 있었다면 그는 비난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2. 스마야는 그들에게 예레미야가 포로들에게 보낸 편지에 대하여 말한다(28절).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저 그가 바벨론에 있는 우리에게 예언자의 권한을 사칭하여 편지하기를 때가 오래리니 단념하고 현실에 적응하는 것이 상책이라하오" 라고 한다. 그런데 도대체 이 말이 무엇이 해로와 예레미야를 범죄자로 몰아세우려 하는가?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된다. 거짓 선지자들은 이전에 사로잡혀 가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고 하지 않았던가!(14:13) 그러나 예레미야는 사로잡혀 가게 될 것을 말했고 또 이루어진 사건은 그가 옳았음을 이미 입증해 주었다. 그러므로 포로기가 곧 끝나리라고 말하는 자들보다 포로기가 오래리라고 말하는 예레미야를 신용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저들은 벌써 거짓말장이들이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3. 스마야는 예레미야를 "미쳤고 자칭 선지자라는" 이유를 들어 그에게 벌을 내릴 것을 요구한다. 그는 그들이 예레미야를 옥에 가두고 그에게 "차고를 채우도록" 명령을 내리기를 바랐다(26절). 그들이 이같이 그를 처형하면 그에게 모욕을 가한 것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그를 좋지 않은 선입견을 갖고 보게 될 것이요 그러면 그의 명성도 저하되고 따라서 예루살렘에서의 그의 예언이 신임받지 않게 될 것을 바랐다. 또한 이로서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이 예레미야에 의해 영향받는 일이 없게 되기를 바랐다. 한걸음 더 나아가 스마야는 스바냐의 태만에 대하여 그를 꾸짖기까지 한다(27절). "이제 네가 어찌하여 아나돗 사람 예레미야를 책망하지 아니하느냐?" 이들 거짓 선지자들이 얼마나 오만불손한가를 알게 된다. 그들은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자유인인 동시에 권력을 지니고 있는 제사장들을 손아귀에 넣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웃보다 아는 것이 많은 체 뽐내는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범과를 그가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본문에서 죄인들의 마음의 완악한 두드러진 실례를 찾아보게 된다. 우리도 "마음이 어느 순간에라도 완악하여지지 않도록" 두려움을 갖고 살아야 하겠다. 본문에서 우리는 이들의 상태를 분석해 볼 수 있다.
(1) 이 죄인들은 가장 확실한 증거에 의해서도 믿게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자신의 말씀을 확고히 하였었다. 이 말씀이 그들에게도 분명히 전하여졌었다(슥 1:6). 그렇지만 그들은 예레미야가 그들이 바라는 대로 좋은 미래를 예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예언자로 부르는 것이 온당치 않다고 주장하였다. 의도적으로 보지 않으려는 자들이야말로 소경중의 소경이라 하겠다.
(2) 그들을 가장 혹심한 징벌에 의해서도 돌이킬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사자들을 비웃고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을 청종치 않았기 때문에" 비참한 노예 상태로 전락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겨루시는 것은 죄로 인해서였다. 그러나 이들은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였다" (대하 28:22). 이 죄를 그들은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끈질기게 범하고 있다. 이 사실은 재난을 가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들의 죄에서 스스로 돌이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은총이 그들에게 역사하지 않는 한 재난도 소용없는 것이다. 오히려 불행을 자탄하여 더욱 부패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다음과 같은 말씀이 언제나 진리임을 깨닫게 된다(잠 27:22). "미련한 자는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어지지 아니하느니라."
Ⅱ. 예레미야가 이 사실을 알게 된 경로에 대하여(29절). 본문에 보면 "스바냐가 스마야의 글을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읽어 주었음" 을 알게 된다. 스바냐는 스마야가 예레미야에게 품은 계획대로 그를 처리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레미야에게 존경을 표시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왜냐하면 그가 21:1 과 37:3 에서 예언자로서 예레미야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명을 부여받은 사실을 보아도 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예레미야를 보호하였다. 명예와 권력을 계속 누리고 있던 그가 포로로 있는 스마야보다 하나님과 그의 심판을 더욱 두려워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예레미야로 편지의 내용을 알도록 도와주었다. 이는 그에게 사로잡힌 자들 중에서까지 그가 적들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우리의 친구들에게 그들의 적이 누구인지 알게 하는 것은 큰 친절을 베푸는 것임을 기억하자.
Ⅲ. 이 편지를 쓴 이유로 스마야에게 선고된 형벌의 내용에 대하여. 예레미야가 스마야의 무고에 대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자 하나님은 그에게 답변하시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이 예언의 말씀을 스마야에게 보내지 말고 스마야를 하나님이 세우신 예언자로 취급하여 그를 오만하게 만들고 있는 "모든 포로들에게" 보내라고 명하셨다(31,32절).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리라고 하신다.
1. 스마야가 그들을 우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스마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평화를 약속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보내지 않으셨다. 그는 하나님의 위임을 날조하고 거기에다가 하늘의 인봉된 사실을 아는 권세를 지닌 것처럼 사칭하였다. 그리고 백성들로 "거짓을 믿게 하였고" 그들에게 거짓된 위로를 전하여 줌으로 정작 참된 위로는 받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그가 그들을 우롱하였을 뿐만 아니라 더욱 나쁜 것은 그가 그들로 하나님에 대한 반역자를 만들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하나냐가 그랬듯이(28:16) 포로된 백성들에게 "여호와께 대한 반역을 교사하였다." 만일 반역에 대한징벌이 가해진다고 하면 자신들의 가르침과 행동으로 반역을 가르친 자들에게 더욱 심하게 안겨질 것이었다.2. 스마야가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는 사실이다(17:11). 그의 이름과 가문이 소멸될 것이요 매장될 것이다. 그는 그의 이름을 물려받을 후손을 갖지 못할 것이다. 그의 가계(家系) 또한 그에게서 종식될 것이다. 또한 "이 백성 중에 거할 그의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 그와 그에게서 출생한 어떠한 사람도 "내가 내 백성에게 행하려 하는 선한 일을 보지 못하리라" 하신다.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며 살기를 기뻐하지 않는 자들은 훗날에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에 내리시는 은총을 나누어 받을 가치가 없는 자들임을 기억하자. 스마야는 예레미야가 포로들에게 바벨론에서 그들의 가족들이 번성하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충고한 사실에 대하여 격노하였었다. 또한 예레미야가 포로들이 번식하고 줄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데 대하여 노하였다 .이렇게 예언한 예레미야가 못마땅하여 예루살렘에 편지를 쓴 스마야가 거기서 자손을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은 사필귀정이다. 또한 하나님의 축복된 말씀을 경시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은덕을 상실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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