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부갓네살의 승리 예언 (예레미야 27:1-11)
이 예언의 연대를 결정하는 데 약간의 어려움이 있다. 이 말씀은 "여호야김의 즉위한 지 오래지 않아서" 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1절). 그러나 예레미야가 바벨론에게 충성의 표시를 하라고 권한 사신들은 "유다 왕 시드기야를 보러 왔다" 고 기록되어 있다. 시드기야는 여호야김의 통치가 시작된 후 11년 후에야 왕위에 올랐다(3절). 어떤 이들은 이를 복사가의 과실이었다고 본다. 따라서 1절은 "시드기야의 즉위한 지 오래지 아니하여" 로 되어야 옳다고 본다. 부주의한 복사가가 전 장의 1절을 기록하던 습관으로 여호야김이라 기록했을 것이라고 한다. 만일 과오로 본다고 하면 1절에서 착오가 생긴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시드기야가 다시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12절). 그리고 다음 번의 예언도 같은 해로 기록되는 데 즉 "시드기야의 즉위한 지 오래지 않을 해" 라고 되어 있다(28:1). 라이트푸트 박사(Dr. Lightfoot)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해결한다. 여호야김이 통치를 시작하던 해에 예레미야가 줄과 멍에를 만들어 목에 걸고 유다가 바벨론 왕에게 항복할 것을 예고하였다. 이러한 예레미야의 행위가 바로 그 때에 속한 것이다. 그러나 이웃 왕들에게 사신들을 보낸 것은 여호야김을 계승하여 즉위한 시드기야 시대로서 그가 사신을 보낸 답례로 사신들이 이스라엘에 온 것이다. 이 사실이 예언 직전에 언급된 것이라고 한다.
Ⅰ. 예레미야는 이 모든 국가들이 바벨론 왕에게 항복해야 된다는 것을 단번에 나타낼 수 있는 상징물을 준비하였다(2절). 즉 그는 줄과 멍에를 만들어 멍에를 목에 걸고 빠져나오지 않도록 목에 단단히 맸다. 이렇게 하여 예언자는 자신의 목을 그들이 깨닫게 하려는 예언적 상징으로 삼았다. 그가 이렇게 하고 다니면 예레미야의 멍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누구나 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28장 10절에서 그의 모습이 문제가 되고 있는 내용을 볼 수 있다. 그는 그들에게 조언해야 할 사실을 자신의 몸으로 표현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무거운 멍에를 지우면서" 자기들은 손가락도 하나 대지 않으려는 무리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교역자들은 이와 같이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한 설교에 대하여 책임감을 느껴야만 한다.
Ⅱ. 예레미야는 이러한 모습을 하고서 인접 국가의 왕들에게 예언 내용을 전하라고 사신들에게 명한다. 여기서 언급된 국가들은(3절) 가나안 땅과 인접한 국가들이다. 유다 왕과 이들 모든 국가의 왕들과의 사이에는 공동방위 조약이 체결된 것처럼 보인다. 예루살렘은 조약체결 국가들의 회의 장소로 지정된 곳이었다. 모든 왕들은 예루살렘에 그들의 전권대사를 파견하였다. 그들은 동맹을 맺어 바벨론 왕의 증대해가는 위협을 막아 공격하는 일에나 방어하는 일에 서로 돕기로 하였다. 그리하여서 바벨론 왕의 엄청난 세력을 막고자 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연합된 힘을 대단히 신뢰하여 스스로 칭하기를 대동맹국이라 하였다. 그러나 사절 일행이 조약 체결서를 가지고 각각 자기 군주에게로 돌아갈 때 예레미야는 각국 사절들에게 그들의 군주에게 그들이 멍에를 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라고 명하였다. 즉 그들은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바벨론 왕의 종이 될 것인데 어느 길을 택하겠느냐는 것이었다. 그 전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은 누구도 관여할 수 없는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여 그가 원하시는 대로 나라들을 처리하실 것이 주장되고 있다(5절). 그는 만물의 창조자시라. 비록 "한 세대는 가고 다른세대는 오지만" 이 원리는 한결 같으시다. 그는 또한 계속되는 창조 활동을 통하여 "지상에 사람과 짐승들을 지으시는데" 이는 그의 "크신 권능과 펴신 팔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는 팔을 펴셔도 힘은 여전하시다. 이러므로 그는 자기가 기뻐하는 자들은 누구에든지 재물과 지배권을 주실 수 있다. 그는 자비를 베풀어 "땅을 인생에게 주셨다" (시 115:16). 그뿐 아니라 크든 작든 각자에게 그 몫을 정해 주셨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좋은 것을 가지고 있다면 무엇이든지 그것을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시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수여된 것임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만족히 여겨야 한다. 비록 우리가 가진 것이 작더라도 말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많이 가졌다고 하여 그들이 가진 것을 탐내서도 안 된다.2. 하나님께서 이 모든 나라들을 느부갓네살에게 넘기셨음이 선포된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 받은 은사에 의하여 알게 된다. 다음과 같은 사실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포된다. Sciant praesentes et futuri-즉 이 모든 나라들을 그 나라에 속한 재물과 함께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긴다는 사실을 이 일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포하노라. 밭의 짐승들 즉 야생동물이나 가축을 물론하고 또한 목초지와 휴양지도 그에게 주노라. 이 모든 것이 다 그의 것이라. 느부갓네살은 거만하고 악한 인물이었으며 또한 우상 숭배자였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의 섭리에 의하여 이 막대한 영토와 소유물을 그에게 주신다. 이 세상의 물질들이 최상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막대한 소유물을 악인들 곧 하나님과 겨루고 그에게 대적하는 자들에게 주시기로 하기 때문이다. 그는 사악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많은 소유를 허락하셨다. 지배권이란 은총에 의한 것이 아님을 기억하자. 영원한 행복이란 아름다운 권리로 얻지 못하는 자들이 일시적인 재물을 누린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느부갓네살은 매우 나쁜 인물이었는데도 하나님은 그를 그의 종이라고 칭하시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로 자기의 섭리의 도구로 사용하시기 때문이었다. 즉 나라들은 특히 그의 백성들을 징벌하시는 하나님은 그를 도구로 쓰신다. 하나님은 그의 수고의 대가로 그에게 소유물로 보상하신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그를 위하여 쓰여진 자를 섭섭하게 하시지 않으신다. 더구나 성실하게 마음먹고 그를 섬기는 자들에게 그는 풍부한 보수자가 되신다.
3. 하나님께서는 그들 모두가 한동안 어쩔 수 없이 바벨론 왕의 지배하에 있을 것을 확증하신다(7절). "열방이" 즉 본문에 기록된 나라들과 기타 여러 나라들이 "그와 그 아들과 손자를 섬기리라" 고 하신다. 느부갓네살의 아들 이름은 에벨메로닥이고 그의 손자의 이름은 벨사살이었다. 이 벨사살 때에 이르러 왕국은 망한다. 즉 그의 나라를 계수하신 때가 이르른 것이다. 이제 판도는 바뀌어 많은 나라들과 대왕들이 메대와 페르샤 제국으로 병합되겠고 25장 14절에서 말씀된 바와 같이 그들이 "바벨론으로 자기를 섬기게 하리라" 고 한다. 이같이 되어 아도니베섹은 그가 다른 왕들을 짓밟은 것처럼 자신도 짓밟히게 되었다.
4. 하나님께서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대적하고 바벨론 왕에게 복종하지 말자는 사람들을 경고하신다(8절). "그 목으로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지 아니하는 백성은 내가 그의 손으로 진멸시키기까지 칼과 기근으로 벌하리라." 느부갓네살은 인접국가의 권리와 자유를 짓밟는데 있어서 또한 무력으로 그들을 그에게 굴복시키는데 있어서 매우 불의하고 야만적이었다. 그렇지만 느부갓네살로 그렇게 하도록 허용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바르고 거룩한 것이었다. 즉 이들 민족들의 우상 숭배와 큰 부도덕 때문에 그들을 처형하시기 위하여 그를 이용하신 것이었다.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은 파멸시키기로 작정해 놓은 적들을 섬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5.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탐닉하고 있는 꿈 즉 그들이 자기들의 자유를 수호할 수 있다는 생각의 헛됨을 보여 주신다(9,10절). 다른 국가에도 그들 나름대로의 예언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별, 꿈, 열광적인 황홀 상태를 통하여 미래를 예언할 수 있는 듯이 행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군주들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그들이 바벨론 왕을 섬기지 않으리라" 고 보장하면서 그들의 비위를 맞추었다. 또한 이들 점술사들은 그와 같은 점괘를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므로 점술사들은 군주들로 생기를 얻어 용감히 저항하도록 하고 있었다. 점괘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이었지만 그 점괘대로 되기를 그들은 바랐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열왕들에게 결과는 그들의 파멸뿐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저항으로 인하여 열왕들은 정복자를 격노케 할 것이며 따라서 그는 그들을 가혹히 취급하여 포로로 삼아 끌고 갈 것이기 때문이다. 열방들은 포로가 되어 거기서 뿔뿔이 흩어져 결국 망각 속에 묻히게 될 것이라 한다. 이스라엘에 인접하고 있는 이들 국가들에 대한 특별 예언들은 몇 번이 나타난다. 본문에서는 일반적으로 그들의 파멸이 예언되고 있다. 이러한 예언을 우리는 48, 49장, 에스겔 25장에서 볼 수 있는데 이들 예언들도 본문의 말씀과 함께 그대로 성취되었다. "하나님은 하시고자 하면 그대로 이루신다" 는 사실을 기억하자.
6. 하나님께서는 항복이라는 쉽고도 조용한 방법을 통하여 그들이 파멸을 면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신다(11절). 그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바벨론 왕을 섬겨 70년동안 조공을 바치기를 수락하는 국가들은 내가 그들을 그 땅에 머물러서 거하게 하리라." 구부리는 자들은 꺾임을 당하지 않는다. 또한 바벨론 왕의 지배가 자기들의 왕들의 지배보다 더 어려운 짐을 지우지 않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을 구하기보다 자유를 선택하는 것이 더욱 참된 지혜인 경우가 가끔 있기는 하다. 또한 반면에 잇사갈이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며" 그 아름다움을 평화롭게 즐기기 위하여 본문에서 충고되고 있는 것처럼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서 섬기리라" 고 하였으나 그렇다고 그것을 잇사갈의 수치라고 하지는 않았다(창 49:14, 15). 마찬가지로 본문에도 "바벨론 왕을 섬기며 밭을 갈며 거기 거하게 하리라" 고 하신다. 어떤 이들은 이런 행위를 천박한 영혼을 지닌 소치라고 비웃을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예언자는 이 행위로 온유한 영혼에서 우러나온 행위를 권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불가항력적인 것이기 때문이었다. 가혹한 섭리의 변화에 잠잠히 복종하는 것이 불행 중에서 최선의 길을 택하는 것이 된다. 섭리에 역응하여 사태를 악화시키는 것보다는 그렇게 하는 것이 유익하다. 다음과 같은 고시(古詩)가 있다.
-Levius fit patientia
Quicquid Corrigere est nefas. -Hor
-우리에게 인내가 요구될 때 참는 것은 짐을 가볍게 하는 효력이 있네.
비천한 운명(섭리) 앞에서 자기를 굴복시킴으로 파멸의 운명(섭리)를 제지한 많은 사람들이 있다. 말할 수 없이 무거운 십자가를 우리 머리 위에 얹고 가는 것보다 우리의 가는 길에서 십자가를 가벼이 하고 가는 것이 더 좋다.
예레미야의 시드기야의 회담 (예레미야 27:12-22)
열방을 대상으로 말씀되던 내용이 본문에서 특별히 유대 민족에게 부드럽게 권고되고 있다. 유대 민족이야말로 예레미야에게는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현재의 정황은 다음과 같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자주 바벨론 왕과 전쟁을 해 왔었다. 이제 사태는 최악의 경지에까지 진전되었다. 벌써 많은 귀인들과 귀중한 재산이 바벨론으로 압송되었다. 특별히 "여호와의 집의 그릇" 일부도 압송당하였다. 이제 이 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가 문제였다. 예루살렘에는 자칭 예언자라고 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 예언자들은 백성들에게 성을 굳게 지킬 것을 명하였고 그러면 잠시 후에 바벨론 왕도 지쳐서 물러 갈 것이요, 그리하면 그들이 잃었던 모든 것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항복을 권고하도록 보냄을 받았다. 그들이 상실했던 것을 찾으려 하는 대신에 그것을 위하여 굴복하라고 권고하도록 보냄을 받았다. 그렇지 않으면 남은 것까지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백성들을 권고하는 내용이 본문이 다루는 범위이다.
Ⅰ. 예레미야는 유다 왕에게 바벨론 왕에게 항복할 것을 겸손히 설득한다. 왕의 행동이 백성들의 행동을 좌우하며 따라서 그들의 운명도 그의 손에 달린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왕에게 말하면서 모든 백성도 포함시켜 말하고 있다(12절). "왕은 목으로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고 그와 백성을 섬기소서. 그러면 살리이다" (흠정판에는 백성이란 어휘가 나오지 않는다:역주). 그러나 난폭한 폭군의 무거운 쇠 멍에를 짐으로 그들의 육신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 과연 지혜이겠는가? 그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의로우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가볍고 즐거운 멍에를 지는 것이 더 현명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여러분의 영혼이 회개하고 믿음을 갖기를 바란다. 이 길이야말로 여러분의 영혼이 하늘 영광에 이르게 되는 바른 길인 것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예레미야가 멸망할 백성들을 권고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는 설득력과 사랑을 가지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권고해야 한다.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어찌하여 왕과 왕의 백성이 칼과 기근에 의하여 죽으려 하나이까? 비굴한 방법으로 살려고 하지 않으려다가 당신은 필연적으로 비참한 죽음을 자초하게 되리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바벨론 왕에게 복종하지 않으려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이 이 말씀을 자신의 권고로 받아들여 두려움을 갖게 되기를 바라서였다. 마찬가지로 만일 죄인들도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아들이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파멸의 경고를 두려움으로 받아들여 다음과 같이 자문하게 된다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어찌하여 우리가 두 번 죽음을 자초하겠는가. 두 번 죽음이라니 그것은 칼과 기근에 의해 죽는 것보다 몇 천 배 나쁜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도 우리가 복종하면 살 수 있는데도 말이다."
Ⅱ. 예레미야는 제사장들과 백성들에게도(16절) 그들이 살고 또 예루살렘 성의 파멸을 저지하려면 바벨론 왕을 섬기는 길밖에 없다고 설득한다(17절). "어찌하여 이 성으로 황무지가 되게 하겠느냐? 너희가 성을 끝까지 지키고자 하면 필연코 성은 황폐하고 말리라" 한다. 제사장들은 예레미야의 적으로서 그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노리던 자들이었다. 그렇지만 예레미야는 자신이 그들에게 호의가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들의 생명을 구하며 그들을 보존하며 안전하게 하고자 노력한다. "악을 선으로 갚는" 이러한 예레미야의 행위는 우리의 좋은 본이 된다.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는 온전한 자를 미워하지만 올바른 사람은 정직한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그의 번영을 바란다" (잠 29:10)(한글 개역과는 내용이 틀림. 공동번역 참조:역주). 그러나 본문에는 예레미야의 말과는 전혀 다르게 일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들은 파멸의 절벽 가까이에 이르고 있었다. 만일 그들이 예레미야의 뜻을 따랐다면 그와 같은 상태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예레미야는 친절하게 계속 그들을 경고하여 최후의 한 사람이라도 구하려고 하였다. 그는 문제를 현명하게 처리하고자 노력하였고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 "그들의 안전을 얻은 방법" 을 잘 이해하게 되기를 바랐다. 그들이 돌아설 수 있는 시간이 불과 얼마 남지 않았어도 그는 그렇게 하였다.
Ⅲ. 이 두 개의 설교를 통하여 예레미야는 허망한 안전으로 그들을 몰아넣고 있는 거짓 예언자들을 믿지 말라고 경고한다. 거짓 선지자들이 이렇게 한 것은 그들 지도자들이 안일한 꿈꾸기를 좋아하는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에게 예언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14,16절). 그들은 하나님이 보낸 예언자들이 아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들을 보내신 적이 없도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으며 그를 기쁘게 해드리고자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너희들의 선지자 노릇을 하고 있도다. 그들은 너희가 시킨 말만을 하며 너희를 기쁘게 하는 것만으로 능사를 삼는도다." 그들의 예언자들이 그들에게 아첨하여 믿게 하려는 두 가지 사실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바벨론 왕이 유다에 대하여 가하고 있는 압력이 이제 쉽게 끝나리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14절). "너희가 바벨론 왕을 섬기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자진하여 그에게 굴복할 필요가 없노라. 왜냐하면 너희가 그들에 의해 강제로 굴복당하는 일이 결코 없겠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거짓 선지자들은 마치 하나님이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어 이 일 때문에 그들을 보내기나 한 것처럼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명예스러운 항복을 하여 스스로 욕을 보지 말라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그들은 또 하나님이 자기들을 보내셨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거짓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말을 부정하신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다" 고 하신다. 그들은 백성들이 바벨론 왕에게 절대로 예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거짓말이었다. 그것이 거짓임을 사건이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들은 최후까지 성을 수호하는 것이 자신과 성이 사는 길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거짓말이었다. 왜냐하면 결국 쫓겨나 멸망당하는 것이 그들의 종국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가 거짓말이었다. 예언자들은 거짓말로 백성들을 현혹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속이는 일이었다. 눈먼 지도자와 눈먼 추종자는 둘 다 구덩이에 빠지고 만다. 그러므로 "너희와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을 멸망시키기에 이르리라" 하신다. 그들은 너희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스스로의 안전도 지키지 못한다. 죄인을 부추켜 계속 죄의 길을 걷게 하는 자들은 종국에는 죄인들과 함께 망한다.2. 거짓 선지자들은 전에 바벨론 왕이 약탈해 간 성전의 기구들이 이제 곧 되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하였다(16절). 이들은 이렇게 하여 제사장들의 꿈을 부풀게 하였다. 그들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달콤히 여기리라는 것을 알았다. 이 제사장들은 금을 성별케 하는 성전보다는 성전의 금을 더 사랑하였다. 이들 기구들은 여고냐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 함께 약탈당했던 것이었다(20절). 열왕기하 24장 13절, 역대하 36장 10절에서 우리는 이 내용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이는 비극적인 사실이다. 모든 성별된 기구들(여호와의 집에서 사용되는 것은 모두 금으로 된 기구들인데)과 모든 보배들이 노략당하여 바벨론으로 옮겨졌다. 이 사실이 제사장들을 슬프게 하였다. 왜냐하면 성전은 그들의 자랑이요 신뢰의 대상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성전이 약탈당한 것은 참 선지자들이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난 것" 을 뜻하는 것이 명백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거짓 선지자들은 바벨론 왕이 잠시 후면 격퇴당하고 그들이 회복되리라는 것밖에는 백성들을 안심시킬 방도가 없었다.
(1) 예레미야는 제사장들에게 명하기를 참된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없어진 기구들을 환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기도로써 남아 있는 기구나마 보존하는 길을 생각하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그들이 선지자이고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에게 있을진대 또한 만일 그들이 하늘과의 교통이 있고 그곳에 대하여 관심이 있다면 심판의 진전을 막아서 그러한 사실을 입증해 보게 하라" 고 그는 제사장들에게 말한다. 자칭 선지자들로 이 상황에 개입하여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그리고 사로잡혀간 자들과 남아있는 자 사이에서 그들의 기도의 향로를 세워 이 재난을 멈추게 해보도록 하라고 한다. "그들은 만군의 여호와께 구하게 하여" 남아있는 기구들이나 약탈당하지 않게 하라고 한다.
[1] 예레미야는 거짓 선지자들에게 예언 대신 기도하라고 하였다. 예언자는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함을 잊지 말자. 기도에 풍성함으로써 하늘로부터의 말씀을 들어 전하도록 하자. 이 거짓 예언자들처럼 자주 기도를 통하여 하늘과 접촉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무슨 말씀을 들으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 성전의 안전과 번영을 위하여 기도함으로써 예언자로서 여러 사람의 영혼을 위한 자들임을 입증하라고 한다. 그리고 그들의 기도가 이루어질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심이 나타날 것이라고 한다.
[2] 예레미야는 거짓 선지자들에게 그들이 잃은 것을 되찾으려고 부심하지 말고 남아있는 것을 보존하는데 전력을 기울이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만일 그들이 남은 것을 보존할 수 있다면 이 사실은 큰 은혜의 결과임을 알라고 한다. 하나님의 심판이 바로 문밖에 임하여 있을때는 큰 것을 구해서는 안 된다. 다만 적은 것으로 감사해야 한다.
(2)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남은 것을 보존코자 하는 노력도 관철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금으로 된 기구들이 노략당한 것같이 이제는 놋으로 된 기구들이 노략당할 것이라 한다(19, 22절). 느부갓네살이 한 번 훌륭한 전리품에 맛을 들였으므로 틀림없이 다시 침략하여 "여호와의 집에서" 뿐만아니라 "왕의 집" 에서도 전리품을 약탈할 것이라고 한다. 이 모든 전리품이 승전 기념으로 바벨론으로 운반될 것이요, "그것들이 거기 있을 것이라" 하신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때가 이르면 그것들이 모두 환원될 것이라고 약속함으로 결론을 맺는다. 약속했던 대로 "내가 이것을 돌아보는 날까지" 거기 있다가 그 다음 "내가" 그 기구들을 "옮겨 이곳에 다시 두리라" 고 하신다. 확실히 이스라엘은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의 보호 아래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들 기구들은 용광로에 집어넣어져 다른 용도에 쓰여졌을 것이다. 그러나 제2의 성전이 세워질 것이요, 그 때를 위하여 기구들은 보존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귀환에 대한 내용은 에스라 1장 8절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 교회의 번영스러운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낙심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때가 되면 그것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집의 기구들이" 곧 환원될 것이라고 예언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이 말하는 예언은 거짓이었다(16절). 결국 언제인가는 그것들이 다시 환원될 것이라고 말하는 예레미야의 예언이 진실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시계를 하나님의 시간보다 앞당겨 시간을 멈추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 그리고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투정을 부린다. 그러나 여호와는 심판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하실 때만을 기다리는 것이 본분이다.
Previous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