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에게 대한 하나님의 충고(예레미야 25:1-7)
여기에는 유다의 모든 백성에게 대한 하나님의 메세지가 나오는데 (1절)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 메시지를 전 유다 백성에게 전했다(2절). 모든 사람과 관련된 일을 모든 사람에게 주지시켜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하나님의 말씀 특히 복음의 말씀은 모든 사람들과 중대한 관련이 있다. 이와 같이 만인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말은 전체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공표되어야할 뿐만 아니라 각 개인에게도 가급적으로 세부적으로 고지되어야 마땅하다. 예레미야는 유다 왕의 집으로 보내심을 받았었다(22:1). 그 때 그는 용기를 내어 거기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가 모든 백성에게로 보내심을 받는다. 그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수고를 감내한다. 그 때는 아마 모든 백성이 예배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절기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런 때라야 그는 모든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을 것이며 백성이 기꺼이 하나님의 교훈을 경청하고 그 훈계를 받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예언의 시기는 여호야김 사년 곧 느부갓네살 원년이었다. 다니엘서에 나타나는 대로(단 1:1) 느부갓네살이 단독으로 통치하기 시작한 것은(그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의 아비와 공동 통치를 했으므로) 여호야김 삼년 말경이었다. 그러나 여호야김 사년은 느부갓네살 원년이 채 끝나기 전에 시작되었다. 기민하고 호방하고 호전적인 느부갓네살 세계의 지배자로 자칭하기 시작한 것은 이 때였다. 하나님은 자기의 선지자를 통해 느부갓네살이 자기 종이라는 것을 알리시며 그를 어떤 사업에 고용하실 계획인지 시사하신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느부갓네살의 위력이 점증함에 따라 열방은 공포에 떨게 되지만 이로 인해 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권능과 섭리가 오해되고 비난받는 일이 없도록 하시기 위해서였다. 느부갓네살이 세계의 군주(폭군이라고 말해야 옳다)가 될 가망은 없었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을 이용하여 자신의 의도를 이루려하셨을 따름이다. 이 일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자에 먹칠을 하는 것같이 보였다.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용납하시고 명하시는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본문 말씀 속에서 백성을 회개시키기 위해 무척 많은 공과 노고가 투입되었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백성들은 여기서 그런 하나님의 노력을 상기하게 된다. 그것은 그들의 죄를 가중시키며 하나님의 처사를 합법화시키는 이유가 된다.
Ⅰ. 예레미야는 23년 간 백성들에게 꾸준히 설교하였다. 그는 요시야 13년에 시작하여(요시야의 재위 기간은 31년이었다)약 18,9년 간 예언했고 그 다음 여호아하스를 거쳐 여호야김 치세 4년까지 통산 23년간 설교해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은혜의 수단을 얼마나 오랫동안 향유해왔는지를 우리 스스로 계산하든 말든 상관없이 계산하고 계신다는 점을 명심하자. 우리가 은혜의 수단을 오래 누렸으면 누렸을수록 그런 수단을 활용하지 않는 우리의 책임은 더욱 더 무거워질 것이다. "내가 삼년(이십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였노라" (눅 13-7).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하나님께서는 그 동안 필요한 경우마다 백성에게 사자 보내기를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그 때부터 오늘까지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너희가 이용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 경고의 핵심적인 부분은 이미 모세의 책을 통해 그들에게 전달되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경고가 제대로 존중받고 적절히 활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자들을 보내셔서 그 경고를 창조하시고 보다 상세히 알리셨으니 이는 그들로 변명의 여지가 없도록 하시기 위해서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은 옛 세계에 대해 그러하셨듯 이들 백성들에 대해 애쓰고 계셨다(흠정역, 창 6:3 에는 애쓴다고 되어있음:역주).2. 예레미야는 이 메시지를 전하는 데 신실하고 근면했다. 그는 하나님이나 자신의 양심에 호소할 때와 마찬가지로 백성에게도 직접 호소할 수 있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되 부지런히 일렀노라." 그는 하나님의 계획의 전모를 그들에게 선언하였다. 그는 아주 노심초사해 가면서 하나님께 대한 신뢰심을 백성들에게 심으려고 했고 백성의 마음을 끌거나 움직이기에 가장 효과적이라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들에게 접근하였다. 사람들은 자기가 애쓰고 열중하는 일을 실행하기 위해 일찍 일어난다는 것에 주목하자(본문에서 부지런히 일렀다는 말의 원의는 일찍 일어나 일렀다는 것이다:역주). 이것은 예레미야의 머리속이 온통 이 일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고 그의 마음은 선행에 열중하고 있어서 잠도 달아났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는 미리 일어나서 어떤 길을 택하면 백성에게 가장 유익을 줄 수 있을까 하고 심사숙고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일찌기 일어났는데 이것은 그가 시간을 지체하지 않기 위해서였거나 아니면 최선의 시간을 포착하여 선용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맑은 정신으로 앉아있는 시간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설교하시러 아침 일찌기 성전으로 오셨고 백성들은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해 마찬가지로 일찍 나아왔던 것이다(눅 21:38). 아침 강의는 잇점이 있다. "주께서는 아침에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이다" (시 5:3).
Ⅱ.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외에도 다른 선지자들을 같은 일로 보내셨다(4절). 예언서를 기록한 선지자들 중 미가, 나훔, 하박국같은 이들은 예레미야보다 약간 앞 시대 사람이었고 스바냐는 그와 동시대 사람이었다. 그러나 일깨우는 설교를 행한 하나님의 종 선지자는 이들 외에도 많이 있었다. 그들의 설교는 책으로 남아있지 않다 뿐이지 그들은 많은 설교를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종 선지자를 보내시되 부지런히 보내셨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백성이 악한 길로 행하다가 죽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돌이켜 사는 것을 얼마나 바라시는지 암시하고 있다(겔 33:11).
Ⅲ. 그들에게 보낸 메시지는 한결같이 지당한 말씀이었고 전부가 아주 동일한 취지를 담고 있었다(5,6절).
1. 하나님의 사자들이 전한 메시지는 그들의 과오 즉 그들의 악한 길과 악행을 언급하고 있었다. 백성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 같이 아첨하던 자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들이 아니었다.2. 그 메시지는 하나같이 그들 특히 그들의 우상 숭배를 택망하였다. 우상 숭배는 특별히 하나님을 격노하시게 하는 죄였다. 그들은 다른 신을 좇아 섬기거나 숭배하였고 자신의 손으로 만든 것을 신으로 숭배하였던 것이다.
3. 그 메시지는 그들에게 죄를 회개할 것과 자기 삶의 개선을 촉구하였다.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라" 는 것은 노래의 후렴처럼 몇 번이고 반복된 가르침이었다. 개인의 회개와 각자의 개혁이 한 민족의 구원에 필요한 것으로 강조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각자는 그 자신의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안 된다. 각자가 제 집 문앞을 쓸지 않는 한 거리는 깨끗해지지 않을 것이다.
4.. 그 메시지는 그들이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면 "그들의 평안함이 장구하게 되리라" (단 4:27)는 것을 그들에게 확약하였다. 그들이 누리던 자비는 그들에게 계속 베풀어질 것이었다.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와 너희 열조에게 주어 있게 한 이 좋은 땅에서 거하게 될 것이니 편안히 거하게 될 것이며 평화롭게 거하게 될 것이다. 죄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너희를 이 땅에서 쫓아내지 못하며 너희가 죄에서 돌이킨다면 죄도 너희를 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두려워하던 심판도 방지될 것이다. "나의 노를 격동치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해치 아니하리라." 우리가 죄로 하나님을 격동시키지 않으면 하나님께로부터 벌을 받지 않게 될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공명정대하게 다루시는 분이다. 그는 이유없이 자기 자녀를 징계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그는 우리에게 고통을 야기시키지 않으신다.
Ⅳ.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노를 돌이키는 유일하고도 정당한 방법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예레미야는 아주 활기있고 자애로운 설교가였다. 그럼에도 백성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3절). 다른 선지자들도 그들에게 신실히 행했지만 백성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고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4절). 다른 모든 죄보다 특히 여기서 꼬집는 죄는 바로 이죄였다. 이 죄는 하나님을 극히 노엽게 했다. 이 죄로 인해 그은 하나님의 공의의 벌을 면할 길이 없었다. 그들은 고의로 이 죄를 고집했다. "너희는 너희 손으로 만든 것으로 나의 노를 격동하여 스스로 해하였느니라." 하나님을 격동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의 해로 판명된다는데 주목하자. 우리는 자신을 해친 자라는 비난을 면할 길이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아! 너는 스스로 패망하였느니라" (호 13:9).
파멸의 예고(예레미야 25:8-14)
여기에는 앞의 문책에 근거한 판결이 나온다.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은즉 나는 다른 방책을 취해야겠다" (8절). 사람들이 하나님의 입의 심판을 증시하지 않을 경우 그들은 하나님의 손의 심판을 각오해야 하며 그 심판을 뼈저리게 느끼고 초달하시는 소리를 듣게 될 것으로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죄인은 자기 죄에서 떠나든지 자기 죄중에서 멸망하든지 해야 한다. 회개하는 일이 없이 죄짓는 자들에게 닥쳐오는 진노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그 진노에는 교정책도 구제책도 없다. 인간을 파멸시키는 것은 인간의 탈선에 있다가 보다 인간이 돌아오지 않는 데 있다.
Ⅰ. 여기에 포고되고 있는 것은 유다 땅이 바벨론 왕의 근대에 의해 여러 멸되리라는 것이다(9절).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내셨으나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 선지자들을 보내셨던 것처럼 자기 종 바벨론 왕을 보내려고 하신다. 이 종 만큼은 그들이 조롱하거나 시하거나 박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의 사자들을 영접하려고 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진노의 사자들을 보내신다는 데에 사실에 주목하자. 이런 방법으로 안 되면 저런 방법으로도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주의를 기울이게 하실 것이며 자기가 주 여호와시라는 것을 알게 하실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참 신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이었다. 아니,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나중에는 하나님의 경쟁자가 되려고 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의 종" 이었다. 그는 이 유다 땅을 침공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목적을 수행했다. 그는 하나님께 고용된 종이었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징계하시기 위해 그 손에 드신 도구였던 것이다. 그가 자신의 목적을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도 실은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군의 여호와" 로 칭하시는 것은 타당하다(8절). 왜냐하면 본문에는 이 지구상의 주민뿐만 아니라 군대들이 대해서도 절대적 주권을 행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는 그 모두를 수중에 장악하고 계신다. 가장 강력하고 절대적인 군주
들도 다 하나님의 종인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기계인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의 자비의 도구인 고레스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종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은 유대땅을 황폐화시키기로 하셨으므로 여기서 그 일을 떠맡을 자기 군대를 소집하시며 집합시키시고 필요한 경우에는 북방 모든 족속을 취하사 그들의 최고 사령관으로서 그들을 인솔하시고 지휘하신다. "하나님은 그들을 불러다가 이 땅을 치게 하신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성공을 허락하신다. 하나님은 그들로 유다와 예루살렘을 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사방 모든 나라" 도 치게 하시는데 이는 동맹국이나 원조국으로서 이들에게 의지하여 이 위협적인 세력에 대항하는 자가 없도록 하시기 위해서였다. 유다와 인근 모든 나라에 대한 완전한 멸망이 묘사되고 있다(9-11절). 그 멸망은 전체적인 멸망이 될 것이다. "이 온 땅이 황폐할 것이다." 도성과 지방, 도시와 농촌이 다 황폐하게 될 것이며 모든 재물이 약탈당하게 될 것이다. 그 멸망은 영속적인 멸망이 될 것이다. 그 땅은 영영한 황무지가 될 것이다. 그들은 너무나 오래도록 폐허 더미 속에서 머무르게 되고 아주 장기간을 기다려도 구원받을 가망은 거의 보이지 않을 것이어서 누구나 그 파멸을 영속적인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 황폐로 말미암아 그들의 명예와 신망은 그들의 인방 사이에서 완전히 허물어질 것이다. 이 황폐는 그들의 명예를 티끌 속에 매장할 것이며 그들로 놀램과 치소거리가 되게 할 것이다. 자기들을 파멸시킬 것이 확실시되는 사기꾼들 때문에 자기들의 보호자가 되어 줄 하나님을 버렸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들에게 야유를 퍼부으며 그들을 연극 무대에서 퇴장시킬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들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황폐는 그들 자신의 위안도 멸절시킬 것이며 그들의 모든 기쁨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내가 그들 중에서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가 끊쳐지게 하리라. 내가 그들에게서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를 제할 것이며(직역하면 그렇다:역주) 그들의 수금을 버드나무 위에 걸 것이며 그들의 노래 가락이 맞지 않게 할 것이다. 그들은 즐거워할 이유도 마음도 없게 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의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그들 중에서는 즐거워하는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될 것이다. 그들은 식량도 빼앗길 것이다. 맷돌 소리가 끊쳐지게 하리라." "맷돌 가는 소리는 들리지 않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적군이 그들의 창고를 점령하면 맷돌 가는 소리가 적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전 12:4 참조). 모든 영업도 종막을 고하게 될 것이다. "등불 빛도 끊쳐지게 될" 것은 등불빛 아래서 할 만한 일이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자유도 박탈당하게 될 것이다. "이 나라들은 칠십 년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포로 기간은 칠십 년으로 지정되었다. 이것은 예언의 확증을 위해 큰 도움이 된다. 사건의 추리가 예언과 꼭 부합할 때(이런 것은 그 어떤 인간의 예지로도 예견할 수가 없다) 그 예언은 확증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재난 중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고 그들의 심앙심과 기도를 불러 일으키기 위해서도 크게 도움이 된다. 다니엘은 그 자신도 한 사람의 선지자로서 이것을 유의하였다(단 9:2). 아니, 하나님 자신이 이 점을 유의하셨던 것이다(대하 36:22).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던" 때문이다. 하나님의 모든 행위는 세상 처음부터 그에게 알려진 바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적당하다고 생각하실 때 자기 일중 일부를 자기 종 선지자들에게 알리시고 그들을 통해 자기 교회에 알리셨다는 사실로 나타난다.
Ⅱ. 마찬가지로 바벨론도 결국 멸망하게 되리라는 것이 여기에 예고되는데 이것은 이미 이사야가 오래 전에 예언한 사실이다(12-14절). 멸망자들 자신도 결국 멸망당하지 않으면 안되며 초달하는 막대기도 징계 업무가 끝나면 불아궁이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일은 칠십년이 마치면 일어날 것이다. 바벨론의 멸망은 포로들의 해방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칠십 년이 언제부터 시작되는지는 큰 의문거리이다. 흑자는 여호야김 사년 곧 느부갓네살 원년을 기준하는데 반해 다른 사람들은 이보다 팔년 후인 여호야긴의 포로 시기로부터 계산하기도 한다. 나는 전자를 지지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 나라들이 "바벨론 왕을 섬기기 시작한 것도 이 때였고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의 종살이 사백년을 계산하실 때 보여 주신 것처럼 통상 자비의 약속의 성취를 계산하심에 있어 최초의 시기를 기준으로 취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루살렘과 성전의 완전히 파괴가 자행된 시드기야 십일년에는 이칠십년 중 십팔내지 십구년이 흘러가 버린 셈이 된다. 여하튼간에 정해진 시기 즉 시온에 은총을 베푸신다는 시기가 이를 때에는 바벨론 왕이 벌을 받고 그의 모든 폭정은 낱낱이 갚음을 당하게 될 것이었다. 그 나라는 다른 나라들이 자국의 불의로 인하여 징벌을 받았던 것처럼 "자기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벌을 받게 될 것이다. 갈대아인의 땅은 다른 땅에서 스스로 그렇게 했듯이 "영영히 황무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열방의 왕과 성도들의 왕으로서 "공의를 행하시고 불의한 자에게 보수"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창 18:25 참조). 교만한 정복자와 압제자들은 권력의 행사와 번영의 구가에 절제해야 할 것이니 그들에게도 수난과 고초의 차례가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전성 시대는 쇠하게 될 것이다. 메대인과 파사인에 의해 초래될 바벨론의 멸망은 다음 두 가지를 암시하게 된다.
1. 하나님이 하신 말씀. "내가 나의 모든 말을 그 땅에 임하게 하리라." 바벨론의 모든 재물과 명예를 하나님의 예언의 진실성을 위해 희생될 것이며 하나님 말씀의 일점 일획이 땅에 떨어지기보다 오히려 바벨론의 모든 권세가 붕괴될 것이다. 갈대아인에 의한 다른 나라들의 멸망을 예언했던 예레미야가 또한 갈대아인의 멸망을 예언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은 반드시 그들 위에 임할 것이었다(13절). 하나님께서 "내가 내 종의 말을 응하게 하여 내 사자의 모략을 성취하게 하리라" (사 44:26)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것을 가리킨 것이다.2. 그들이 행한 일(14절). "내가 그들의 행위와 그들의 손의 행한대로 보응하리라." 그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고용된 때조차 자기들의 행위로 하나님의 법을 범했던 것이다. 그들은 많은 모든 민족들로 하여금 자기들을 섬기게 했으며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무례로 그들을 짓밟았던 것이다. 그러나 저희 불의의 양이 다 찼으므로 여러 나라와 큰 왕들이 페르샤 왕 고레스와 연합하고 그를 도우러 와서 "그들로 자기 역군을 삼을" 것이며 그들의 국토를 지배할 것이고 그들의 약탈물로 부유하게 될 것이며 그들의 세계 통치의 보좌에 오르기 위한 발등상으로 삼을 것이며 그들을 종과 군사로 사용하게 될 것이다. "포로를 끌고 가는 자는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이다."
진노의 잔(예레미야 25:15-29)
여기에는 좌중의 모든 사람에게 한 순배씩 돌아가는 술잔의 비유를 통해 고대 근동 지역에 입박하던 전체적 파멸이 묘사되고 있다. 느부갓네살은 이제 막 등극하여 활약하기 시작하였는데 바로 그가 이 전체적 파멸의 도구가 될 자였다. 그러나 이 파멸은 결국 느부갓네살 자신의 땅에도 돌아올 터였다. 환상 속의 잔은 칼을 뜻하는 것이라고 설명되고 있다(16절). "내가 그들 중에 칼을 보내리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보내시는 것은 바로 전쟁의 칼이다. 그 칼은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강하며 화해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칼이 될 것이다.
Ⅰ. 이 심판의 상황에 대해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멸망시키는 칼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손에서" 온다. 그것은 "하늘에서 마신" (사 34:5) "여호와의 칼이다" (렘 47:6). 악인은 하나님의 칼로 이용된다(시 17:3; 사 10:5; 렘 51:20). 멸망의 칼은 "그의 진노의 잔" 이다. 이 심판을 보내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분노이다. 열방은 죄악으로 하나님을 격동시켰고 따라서 그들은 그의 진노의 표징에 해당되지 않을 수 없다. 이 표상은 모종이 취하게 하는 액체로 비유되고 있다. 그들은 이 액체를 마시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과거에는 유죄 판결을 받은 흉악범에게 강제로 독약을 마시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악인은 "전능자의 진노를 마신다" 고 한다(욥 21:20; 계 14:10). 악인이 이 세상에서 받을 환난은 불순물이 가득한 술잔의 찌꺼기로 묘사된다(시 75:8; 11:6 참조). 이 세상이 있을 하나님의 진노는 저 세상에서의 진노가 넘쳐흐르는 시냇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2. 멸망시키는 칼은 누구의 손에 들려 그들에게 보내질 것인가? 예레미야는 "열방 위에 세워진" 재판관이었다(1:10). 그들에게 판결을 내리는 재판관 예레미야와 판결의 집행자인 느부갓네살의 손을 통해 이 심판은 행해진다. 세상의 눈에는 권세있는 군주가 크게 보이고 이 선지자는 초라하게 보였지만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눈을 돌리면 초라한 선지자가 얼마나 월등한 존재인가!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손에서 "그 잔을 받아가지고" 열방에게 강제로 "마시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그들에게 어떤 해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예언하려고 지정해 준 것만 예언한다. 신적 권위로써 예언된 것은 신적 능력에 의해 기필코 성취될 것이다.
3. 멸망시키는 칼은 누구에게 보내지는가? 이스라엘이 알고 있는 범위 안에 모든 나라와 그들과 통신이 가능한 모든 지역에 이 멸망의 칼은 보내진다. 예레미야는 그 잔을 받아가지고 "모든 나라로 그것을 마시게 했다." 즉 그는 본문에 언급되어 있는 모든 나라에 대하여 그들이 임박하고 있는 이 큰 황폐에 흽쓸려 들어갈 것이라고 예언했다.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 이 맨 먼저 꼽힌다(18절). 이는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 (벧전 4:17), 성소에서(겔 9:6) 시작되기 때문이다. 느부갓네살이 이 정벌에서 주로 예루살렘과 유다를 겨냥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는 아마 예루살렘과 유다를 공격 목표로 삼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본문에 언급된 것으로 봐서 유다가 다른 어떤 나라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주로 이들을 주목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이 예언의 일부는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사실은 "오늘날과 같으니라" 는 우울한 말씀에서 나타나고 있다. 여호야김 사년에는 사태가 매우 험악한 국면으로 접어들고 모든 기초가 궤도를 벗어나고 있었으므로 이 표현은 타당했던 것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애굽 왕 바로이다. 이는 유대인들이 그 상한 갈대를 의지한 때문이다(19절). 유대인의 남은 무리는 애굽으로 도망갔고 예레미야는 거기서 그 나라의 멸망을 구체적으로 예언하였다(43:10, 11). 가나안과 접경한 모든 다른 나라들도 예루살렘과 함께 이 쓴 잔, 이 떨림의 잔을 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흑자는 잡족을 아라비아인이라고 생각하며 또 다른 사람들은 약탈로 살아가던 여러 유랑민이라고 해석한다. 에돔 나라에 접경한 우스 땅의 왕들도 이 잔을 마셔야 했다. 블레셋 인들은 이스라엘을 괴롭혀 왔지만 그들의 도시와 성주들도 이 강력한 정복자의 먹이가 되어야 했다. 에돔, 모압, 암몬, 두로 그리고 서돈은 이스라엘과 인접한 것으로 알겨진 지역들이다. 바다 저편 또는 바다 곁의 섬들은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베니게와 수리아의 도서로 추측된다. 23, 24절에 언급된 드단과 그 외 나라는 이두메아 경계와 아라비아 사막에 위치한 것 같다. 엘람은 파사인으로서 당시에는 보잘 것없는 민족으로 간주되었지만 나중에는 메대인과 연합하여 바벨론에게 보복할 수 있게 되며 자국과 인근의 모든 나라를 바벨론의 억압에서 해방시키게 된다. 바벨론에 근접해 있던 북방의 왕들과 다소 멀리 떨어져있던 다른 왕들도 반드시 사로잡히게 될 배우며 느부갓네살의 승리의 칼에 제물이 될 것이다. 아니, 그는 필설로 다할 수 없으리만치 맹렬히 그리고 파죽지세로 승승장구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알렉산더는 세계를 정복했다고 하며 로마 제국도 천하(원의:세계, 눅 2:1)라고 칭해진다. 또 이것은 지구상의 모든 나라의 운명을 뜻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제나 저제나 그들은 전쟁의 두려운 과를 느끼게 될 것이다. 인간이 자기 지체 중에서 싸우듯(약 4:1) 인간의 정욕이 싸우는 한, 세계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장차도 큰 투계장이 될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정복자들도 피정복자와 같은 자기 운명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세삭 왕은 그 후에 마시게 되리라" 고 결론적으로 말한다. 세삭왕은 바벨론 왕을 말한다. 바벨론 왕은 자기 인근 나라들에게 온간 환난과 괴로움을 안겨 주었다. 세삭이 바벨론을 의미한다는 것은 51장 41절에 분명히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이 바벨론 성의 이명(異名)인지 아니면 바벨론 왕국내의 다른 성의 명칭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바벨론의 멸망자가 된다는 이 예언이 그 자신의 멸망의 예언이 다시 들어가 있다는 것은 아주 적절하다.
4. 그 결과는 어찌 될 것인가? 그 칼이 이 모든 나라에 행할 파멸은 과음으로 묘사되고 있다(16절). "그들이 마시고 비틀거리며 미치리라. 그들이 마시고 취하여 토하며 엎드러지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 (27절).
(1)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술취하는 죄를 혐오하게 해 준다. 과음의 결과는 극히 슬프고 비참한 상태를 가져오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술은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켜서 미친 사람이나 다름없이 만든다. 술은 이성 다음으로 귀중한 축복인 건강을 빼앗아간다. 술은 인간을 병들게 만들며 골수와 생명까지도 위협한다. 술취한 사람은 왕왕 "엎드려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다." 술취함은 그 자체가 형벌이 되는 죄이다. 언제든지 자신을 취하게 하며 특히 독한 술에 취하는 죄를 번번히 저지르는 취한들은 얼마나 비참한가?
(2)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전쟁의 심판을 두려워하도록 해준다. 하나님께서 한나라를 황폐케 만드시겠다는 영장인 칼을 보내실 때 그 나라는 곧 술취한 자처럼 되어버리며 전쟁소식에 혼란의 도가니가 되어버리고 우왕좌왕하게 된다. 그 나라의 대신들은 미치게 된다. 모사꾼들은 지혜가 다하게 되어 그들이 세우는 대책은 전부가 갈팡질팡하며 그들의 모든 행동은 두서가 없고 그들의 마음은 끊임없는 걱정으로 병들게 된다. 그들은 탐욕스럽게 삼켰던 재물을 다시 토하게 될 것이며(욥 20:15) 원수 앞에서 엎드러질 것이고 대취한 자처럼 다시 일어 설 수도 없고 자기 자신을 도울 어떤 일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합 2:16 참조).
5. 이 멸망의 확실성은 의심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한 이유가 제시되고 있다(28,29절). "그들은 네 손에서 잔을 받아 마시기를 거절할 것이다." 그들은 심판이 오리라는 것을 싫어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믿기도 싫어할 것이다. 그들은 예레미야와 같이 비천한 자의 예언을 아예 신용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는 그것이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 임을 그들에게 고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는 그것을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들이 전능자와 다툰다는 것은 헛된 일이었다. "너희가 반드시 마시리라."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그것이 형벌의 시기요 계산일이며 예루살렘도 이미 회계에 소환되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가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에서부터 재앙내리기를 시작하였노라. 나와의 관계로도 그성이 형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너희가 어찌 형벌을 면할수 있느냐? 절대로 면치 못하리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나무는 어떻게 되리요?" (눅 23:31) 얼마간의 선을 간직한 자들도 그들에게서 발견된 악으로 인해 그토록 심한 처벌을 받는다면, 보다 죄질이 나쁜 악을 소유하면서 아무런 선도 찾아 볼 수 없는 자들이야 어찌 도피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예루살렘은 열방에게서 우상 숭배를 가르쳐 준 열방이 징벌을 받지 않을 것인가? 두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은 벌을 받게 될 것이다. "내가 칼을 불러 세상의 모든 거민을 칠 것은 그들에 예루살렘 거민의 타락을 방조한 때문이라."
Ⅱ. 우리는 전체적 사실에서 다음과 같은 관찰을 할 수 있다.
1.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 지상의 모든 민족과 나라는 이 하나님께 책임을 져야 하며 그의 심판에 따라야 한다.2. 하나님은 아무리 강대하고 무수하고 힘세고 극히 안전할 것 같은 민족이라도 쉽사리 파멸시키실 수 있으시다.
3.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고 해롭게 한 자들은 결국 그에 대한 계산을 받게 될 것이다. 이들 여러 나라 중 대다수는 이스라엘을 교란시킨 적이 있었으나 이제는 그들에게 멸망이 임하게 되는 것이다. 구속주의 해가 올 것이며 "시온의 송사를 위해 산원하실 해" 가 임할 것이다(사 34:8).
4. "여호와의 엄중하신 말씀" 은 결국 여호와의 엄중하신 심판이 될 것이다. 이사야는 오래 전에 이미 이들 다수의 나라들을 쳐서 예언했는데(사 13장 이하) 이제 결국 그의 모든 예언은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
5. 권력과 지배욕에 사로잡히는 자들은 흔히 세상을 괴롭히고 자기 세대를 병들게 한다. 느부갓네살은 자기의 강대한 힘을 자랑하는 나머지 경의감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이러한 자들은 세계를 뒤집어엎고서도 칭찬과 찬미받기를 기대한다. 알렉산더 대왕은 남들이 자기를 큰 해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스스로를 위대한 군주라고 생각했었다.
6. 이 세상의 그리고 히 큰 권세와 극히 화려한 것도 그 존속이 매우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보다 강대한 느부갓네살의 힘 앞에는 왕들이라 하더라도 굴복하고 포로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전반적인 황폐(예레미야 25:30-38)
여기에는 바벨론 왕이 자기 군대로써 예루살렘 주위의 모든 국가에게 자행할 두려운 파멸이 보다 상세히 묘사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다 자기 성전을 세우셨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신탁과 규례가 있었고 인근 나라들이 이 규례와 신탁에 주의를 기울여야 마땅했으며 그럼으로써 혜택을 입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거기서 하나님과 자기들의 의무에 대한 지식을 구해야 했다. 만약 그랬다면 그들은 예루살렘의 이웃됨을 인하여 하나님을 송축할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반대로 온갖 기회를 이용하여 그 거룩한 도성을 타락시키거나 교란시켰던 것이다. 열방의 길을 너무나 많이 배웠다는 이유로 예루살렘과 회계하러 오신 하나님께서는 열방에 대해서도 예루살렘의 길을 너무나 배우지 않았다하여 계산하셨던 것이다.
그들은 느부갓네살의 침공을 곧 알아차리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선지자는 여기서 그들에게 전쟁을 도발하는 자가 느부갓네살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은 대적할 수 없는 신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고하도록 지시를 받는다.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전쟁이 선포되고 있다(30절). "여호와께서 높은 데서 부르신다. 시온 산과 예루살렘(욜 3:16; 암 1:2 에서처럼)에서가 아니라 하늘에서 즉 하늘에 있는 그의 거룩한 처소에서 부르신다." 이제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노호(怒號)하시는 대상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위에 있는 처소로부터 땅에 있는 "그의 처소(한글 개역 성서:그 우리)를 향해 크게 부르실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셨다. 그는 열방의 악을 눈여겨보시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이 무지한 시대를 보고도 못 본체 하셨다. 그러나 이제는 그가 공격군이 전투에서 하는 것처럼 "세상 모든 거민을 대하여외 치시리니" 그들에게는 이것이 공포의 외침이 될 것이지만 하늘에서는 포도 밟는 자의 외침처럼 기쁨의 외침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할렐루야를 부르는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이 들린다(계 19:1). 그는 사자처럼 부르짖으시며(암 3:4, 8) 그 소혈에서 나온 사자처럼 소리를 발하신다(38절). 그는 자기 먹이를 찾으려고 돌아다니면서 먹이를 보다 쉽게 잡기 위해 부르짖는 사자와 같다.2. 하나님께서 왜 이 전쟁을 선포하는지 그 원인과 이유를 설명하는 성명서가 여기에 발표되고 있다(31절). "여호와께서 열국과 다투신다." 하나님께서는 열국과 논쟁하실 정당한 이유를 갖고 계신다. 그는 그들과 이런 식의 변론을 전개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과 다투시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그들의 사악함 때문이며 열국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와 자비를 그들이 무시하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는 악인을 칼에 붙이실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노를 격동시켰다. 따라서 이 모든 파멸은 하나님의 진노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이는 여호와의 진노의 연고로다(37절). 이는 잔멸하는 칼의 진노를 인함이다(진멸자라는 단어는 이성이기 때문에 진멸하는 칼로 해석하는 것이 더 낫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까닭없이 노하시는 법이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러나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리요(시 91:1)?
3. 경보가 울려서 사람들은 놀라게 된다. "요란한 소리가 땅끝까지 이를 것이다. 그 소리는 너무도 크게 울려서 아주 멀리 멀리까지 이를 것이다" (31절). 이 경보는 나팔이나 목소리가 아니다. 이 경보는 대풍에 의한 것이다. 이 대풍은 땅끝 즉 세계의 먼해안에서 일어나는 폭풍이나 태풍이다(32절). 갈대아 군대는 북방에서 일어나서 굉장한 위력을 가지고 순식간에 진행하는 폭풍처럼 그 앞에 거치는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릴 것이다. 갈대아 군대는 하나님께서 욥에게 대답하실 때 보이신 극히 두려운 폭풍과 같다(욥 37:1; 38:1). 이와 같이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에서 사자처럼 부르짖을 때 땅에서 찢어지는 듯한 반향이 울린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하나님이 이와 같이 분노 중에 말씀하시면 떨지 않을 자가 누구냐?(호 11:10 참조) 목자들은 외쳐 애곡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호기롭고 용맹무쌍하고 태연자약하였지만 이제는 간담이 떨어질 것이다. 그들은 재에 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적군을 대항할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과 자기들의 책임하에 있는 조국의 파멸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슬픔과 근심에 파묻히게 될 것이다. "목자들의 부르짖음과 양떼의 인도자들의 애곡하는 소리여" (36절). 큰 권세자들에게 이런 공포를 심어주고 이렇게 경악시키는 재난이야 말로 참으로 큰 재난이다. "여호와가 그들의 초장을 황폐케 함이로다." 그들은 이 초장에서 자기들의 양떼를 먹였고 스스로의 배를 채웠던 것이다. 그들은 그런 초장의 황폐로 인해 이렇게 울부짖는 것이다. 울부짖는 사자의 은유를 동반하는 것으로 보아 이 말씀은 아마 목자들의 대경실색을 암시하는 것같다. 우는 사자가 자기들의 양떼들에게 접근하는 소리를 들은 목자들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 도망할 수도 없고(35절) 양떼의 인도자들이 도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들은 크게 놀라게 될 것이다. 적군은 너무나 무수하고 맹렬하고 끈덕지며 군대의 규모가 너무나 커서 그들의 손길을 피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태연히 대할 수 없듯이 그 심판을 피할 수도 없고 그 심판에서 달아날 수도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목자들이 외쳐 애곡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4. 전쟁의 집행이 묘사되고 있다(32절). "보라 재앙이 나서 나라에서 나라에 미칠 것이다." 잔이 한 순배씩 돌아가듯 모든 나라가 제 몫은 받게 될 것이며 제 차례가 될 것이니 이는 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재난을 경종으로 삼아 회개하거나 개혁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이것은 최후의 대심판을 다소 상징하기라도 하는 듯이 땅 이 끝에서 땅 저 끝에 미칠 것이다(33절). 보수의 날은 그의 흉중에 있으나 그의 손은 이제 자기 원수들이 어디에 있든지 그들을 발견해내실 것이다(시 21:8). 우리의 이웃집이 불탈 때는 우리 자신의 집을 염려할 때라는 것을 명심하자. 한 나라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있을 때 모든 인근 국가는 이를 듣고 두려워하며 하나님과 화해해야 할 것이다.
5. 전쟁의 음울한 결과가 예고되고 있다. "도륙을 당한 날과 흩음을 당한 기한이 찼다." 즉 하나님의 계획서에는 살륙과 이산의 시기가 결정되어 있는데 그 날자와 기한이 만료되었다는 것이다. 이 살륙과 이산으로 인해 열방은 완전히 황폐케 될 것이다. 무수한 자들이 갈대아 군대의 칼에 쓰러질 것이어서 여호와에게 살륙을 당한 자가 도처에서 발견될 것이다. 죄 때문에 살륙당하는 자는 여호와에게 살륙을 당하는 자이다. 그들의 살륙을 한층 더 비참하게 하는 것은 그들이 일일히 슬퍼함을 받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애통하는 일은 그토록 대대적인 일이 될 것이다. 아니, 그들은 염습함을 입지 못할 것이며 매장함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이는 남아서 그들을 매장해 줄 친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며 원수들에게는 그들을 매장해 줄만한 인정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지면에서 분토가 될 것이며 인분처럼 추악하고 불쾌한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인분이 비료로서 땅을 기름지게 하듯 이 두려운 광경이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기념물로서 세상의 거민들로 하여금 의를 배우게 하는(사 26:9) 각성제가 된다면 좋을 것이다. 이 전쟁의 결과 온 땅이 차례차례로 황량하게 될 것이다(38절). 왜냐하면 전쟁의 무대는 온 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 상황을 각별히 숙연하게 만드는 표현이 두 가지 나온다.
(1) "너희는 귀한 그릇의 떨어짐 같이 될 것이라.(34절). 그들 중에서 가장 선망의 적(的)이 되고 스스로 귀중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극히 귀중하게 존중받는 자들 곧 귀한 그릇으로 존중받는 자들이 칼에 엎드러지게(엎드러진다와 떨어진다는 단어는 꼭 같음) 될 것이다. "너희는 떨어지면 곧 산산조각이 나버리는 베니스제의 유리잔이나 중국제 접시처럼 떨어지게 될 것이다." 심지어 인정있고 유연한 자까지도 공동의 재난을 당하게 될 것이다.
(2) 평안한 목장들(흠정역:거소)조차 적막하다. 늘 평온하고 훼방받지 않던 목장 즉 너희가 오랫동안 평화 속에서 거하던 처소도 이제는 이상 더 그런 곳이 되지 못할 것이며 전쟁으로 말미암아 적막하게 될 것이다. 아니면, 늘 평온하여 어떤 이웃 사람도 괴롭히지 않던 자들, 평화 속에서 편안히 생활하며 어떤 자도 도발하지 않던 자들도 피하지 못할 것이다. 남을 전혀 해치지도 못하고 악의도 없는 자들이 어려운 일을 당한다는 것은 전쟁의 무서운 결과 중 하나이다. 모든 화평의 자녀들을 위해 불과 칼이 닿지 않는 평안한 목장을 하늘 위에 마련하신 하나님을 송축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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