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과 약속과 경고(예레미야 24:1-10)
본장은 다른 여러 장에 비해 아주 짧지만 우리가 그 긴 장들을 편안히 해석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즉 24장은 섭리가 어떤 자들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 이면서 또 다른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통해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설사 하나님의 백성이 타인들과 함께 동일 한 재난을 겪는다고 하더라도 그 재난의 의미는 동일하지 않으며 그 재난은 믿는 자들의 유익을 위해 예정되어 있어서 그들에게 복된 결과를 가져 올 것이란 말씀이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그 재난이 인자하신 아버지의 징계하는 막대기이지만 타인들에게는 의로우신 심판관의 손에 드려 있는 복수의 칼이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Ⅰ. 이 설교의 시기. 이 설교는 여고냐가 바벨론으로 잡혀 간 얼마 뒤에 행해진 것이다(1절). 여고냐는 천한 파기였으나(22:28) 그와 함께 끌려간 자 중에는 에스겔처럼 매우 고귀한 자들도 더러 있었다(겔 1:12). 다수의 "유다 방백" 들이 이 때 끌려갔으며 다니엘과 그의 동료들은약간 먼저 잡혀 갔다. 백성들 중에서는 목공들과 철공들만이 강제로 끌려 갔다. 그 이유는 길데아 인들이 이 방면의 솜씨 좋은 기술자들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거나(점성가나 천문가는 아주 많았지만 목공과 철공은 아주 부족했으므로) 아니면 유대민들로서는 이들이 없으면 자기들의 성읍을 견고히 하지도 못하고 무기 제조도 하지 못하기에 그 손실을 뼈저리게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미루어 보건데 이번 포로 가운데는 많은 선량한 백성들이 포함되었던 것 같다. 경건한 예레미야 선지는 이것을 가슴 아파했는데 반하여 이를 기뻐하고 포로의 신세가 된 자를 모욕하는 자들도 있었다. 우리는 최초로 그리고 최대로 수난받는 자에 대해 그들이 가장 악하고 가장 큰 죄인이라고 결론을 내리지 않도록 주의하자. 왜냐하면 여기에 나오듯이 그 결과는 전혀 딴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Ⅱ. 예레미야에게는 환상이 나타났고 그는 이 환상을 통해 포로를 구별하게 되었다. 그는 "여호와의 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 를 보았다. 그것은 여호와의 영예를 위해 첫 소산물로써 봉헌되기 직전에 있었다. 아마 제사장들은 의무 이행에 태만하였으므로 율법대로 이 헌물을 받아서 조처할 준비를 갖추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그 무화과 광주리가 성전 앞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이 환상의 의의는 한 광주리의 무화과는 굉장히 훌륭한 데 반해 다른 한 광주리의 무화과는 심히 불량하다는데 있다. 인간들은 모두 무화과나무의 열매와 같아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봉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삿 9:11). 그러나 좋은 무화과보다 맛난 것도 없으며 썩은 무화과보다 매스꺼운 것도 없듯이 어떤 사람은 좋은 무화과 같은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상하고 썩은 무화과 같다. 악인보다 악하고 상스러운 것도 없으며 경건한 사람보다 귀중한 것도 없다. 좋은 무화과는 처음 익은 무화과를 말한다. 무화과는 처음 익은 것이 가장 환영을 받으며 제 철에 새로 날 때 극상품으로 친다(막 7:1 이하). 나쁜 무화과는 먹을 수 없을 만큼 극히 악한 무화과이다. 악한 무화과는 자기들이 창조된 목적에 부응하지 못했고 식품으로서 만족감도 유익함도 주지 못했다. 그렇다면 악한 무화과는 무엇에 소용될 것인가? 하나님이 만약 인간들에게서 존귀를 받지 못하시고 그 세대로부터 아무런 봉사를 받지 못하신다면 그들은 먹을 수 없는 악한 무화과와 같다. 그들은 아무런 선한 목적을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그 때로부터 거름더미로 가는 것밖에는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마 5:13). 장막 문에서 여호와를 배알하는 자 중에는 진지한 자들도 있는데 이들은 극히 악한 자들이다. 죄인은 인간들 중에서 극히 악한 자이며 외식하는 자는 죄인들 중에서 극히 악한 자이다. Corruptio optim estpessima-즉 가장 선한 것이 부패할 때는 가장 악한 것이 된다.
Ⅲ. 이 환상의 설명과 적용. 하나님이 이 환상을 통해 의도하신 것은 포로로 끌려 간 자들에게 복된 귀환을 확실히 믿도록 해 주심으로써 그들의 낙심하는 심령을 분기시키시고 아직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에게는 비참한 포로의 신세가 되리라는 것을 확신시킴으로써 그들의 교만하고 안심하는 심령을 겸비케 하고 각성시키는 데 있었다.
1. 여기에는 처음 익은 열매 곧 극히 좋은 무화과의 교훈이 나온다. 이것은 경건한 신앙심을 갖고 있던 포로를 상징한다. 이들은 맨 먼저 포로로 잡혀갔기 때문에 처음으로 멸망을 위해 무르익은 자들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맨 먼저 자비의 열매로 판명될 것이다. 그들의 포로 생활은 그들을 성숙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들은 좋은 무화과가 우리에게 즐거움을 가져다주듯 하나님을 기쁘게 하여 후일 유용하게 쓰일 수 있도록 주의 깊게 보존될 것이다. 여기서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1) 먼저 포로로 끌려 간 자들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은 무화과였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나타낸다.
[1]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모든 것으로써" 하나님의 애증(愛憎)을 단정할 수 없다. 하나님의 심판이 널리 퍼질 때 먼저 심판 받는다고 하여 가장 악한 자는 아니다.
[2] 초기의 수난이 때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판명된다. 아이를 일찍 징계하면 할수록 장계의 효과는 더 크다. 먼저 포로로 끌려 간 자들은 아비가 "사랑하여 늦기 전에(한글 개역:근실히) 초달하고" 소망이 있는 동안 징계하는 아들과 같다(잠 13:24; 19:18). 그리고 그것은 잘하신 처사여서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뒤에 남아있던 자들은 오래도록 혼자 내버려 둔 자식과 같았다. 혼자 내버려 둔 자식은 나중 징계하여 고칠혀고 해도 고집이 세서 그로 말미암아 더 악해지기 마련이다(애 3:27 참조).
(2)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포로됨을 자신의 소행으로 인정하신다. 그 일의 도구가 누구였든지간에 명령하고 지시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5절). "내가 그들을 이곳에서 옮겨 갈데아 인의 땅에 이르게 했노라." 외견상으로는 이 일이 어느 모로 보나 그들에게 해를 입히기 위한 것 같았다. 포로란 것은 재산과 명예와 자유의 파괴를 의미했고 그들을 친척과 친구로부터 갈라놓으며 원수와 압제자들의 권세밑으로 굴종시키는 일이었던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포로 생활은 그들의 의기를 소침케 하고 그들의 믿음을 위축시키며 하나님께로부터 신탁과 명령을 받는 혜택도 누리지 못하게 하고 그들을 유혹받도록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은 그들에게 유익을 주도록 하기 위해 계획된 일이었다. 또 결국에 가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실제로 그렇게 판명되었던 것이다.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왔던 것이다" (삿 14:14). 그들은 자기들의 고난들의 고난을 통해 자기 죄를 깨달았으며 하나님의 손길 아래서 자신을 낮추게 되고 세상을 멀리하며 진지하게 되고 기도를 배우며 자기 죄에서 돌이키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그들은 우상 숭배하던 버릇을 고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고난 당한 것은 그들에게 유익이 되었다" (시 119:67, 71).
(4) 하나님께서는 포로된 가운데에서도 그들을 자기 소유로 인정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그들은 완전히 버림받은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그들은 인식될 것이며 인정받을 것이다. 그들이 남겨 둔 친척들은 그들을 차가운 눈초리로 보며 거들떠 보지도 않을 것이고 친척이로 인정하지도 않을 터이나 하나님께서는 "네가 그들을 보아 게 할 것이라" (원의:그렇게 인식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속한 자들을 아신다. 그리고 그는 자기에게 속한 자들이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든지 자기의 소유로 인정하실 것이다. 벌거벗음이나 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내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5) 하나님께서는 환난 중에서도 보호하시며 때가 되면 영화로운 구원을 베푸시리라고 그들에게 확약하신다(6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좋게 하기 위해" 포로로 보내셨으므로 그들은 결코 그곳에서 허무하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제련사가 용광로에 넣은 금이 결국 정금으로 변모하듯 그들은 그 결과가 더 나을 것이다.
[1] 하나님은 자기 금이 용광로에 있는 동안 자기 시선을 거기서 떼지 않으시며 그 시선은 금이 아무런 해를 입지 않도록 지켜보는 주의 깊은 눈길이다. "내가 그들을 돌아보아 좋게 할 것이며 만사를 최선의 상태로 수배하여 환난의 상황이 큰 목적과 부합하도록 하겠노라."
[2] 하나님께서는 의도하신 일이 끝나는 대로 틀림없이 그 금을 용광로에서 다시 끄집어 내실 것이다. "내가 그들을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리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개량하기 위해 잠간동안 해외로 보내서 엄한 훈련을 받게 하셨으나 그들이 그곳에서 소정의 시험을 통과하면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데리고 오실 것이다.
[3] 하나님께서는 그 금을 정련하신 뒤 주형에다 부으셔서 자기가 사용하시기에 알맞는 귀한 그릇으로 만드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시련에서 구출하신 뒤 "그들을 세워서" 자신의 거소로 삼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심어서" 자신의 포도원으로 삼으실 것이다. 그들이 포로된 것은 울퉁불퉁한 돌을 다듬어 하나님이 세우시기에 적합하게 하고 어린 가지를 쳐서 하나님이 심으시기 알맞도록 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6)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런 여러 가지 현세적 자비를 예비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영적 자비를 부여하심으로써 그들에게 현세적 자비를 아울러 주시려고 계획하셨다. 그들이 포로됨을 좋게 할 것은 바로 이점이었다. 이것은 그들의 고난을 개선시키는 동시에 그들의 구원 자격을 구비하게 해 줄 터였다. 우리가 받는 고난도 성별되면 우리는 그 결과가 좋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약속은 다음과 같다.
[1] 그들은 하나님을 보다 잘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과거 예루살렘에 있을 때 하나님의 모든 신탁과 명령을 통해 하나님께 대해 배웠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바벨론에서는 섭리를 통해 그 때보다 하나님께 대한 사실을 더 많이 알게 되었다. 만일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강력히 작용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하나님을 영영 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약속되고 있는 것은 "나를 아는 머리가 아니라 나를 아는 마음을 내가 그들에게 주겠노라" 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지식은 관념이나 사색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지와 애착심을 지시하고 규제하는 실천적 판단력의 확신에 있다.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좋은 자각이 있다(시 111:10).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알려는 진지한 열망과 애착심을 주시는 자에게 그 지식도 주실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자신의 무지속에서 영영 멸망할 수밖에 없다.
[2] 그들은 하나님께로 완전히 돌이킬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기준으로 삼고 하나님께 대한 봉사를 자기 일로 삼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들의 목적으로 삼을 만큼 완전히 돌아 설 것이다. "그들은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손수 그들이 돌아오도록 조처하신다. 그가 우리를 돌이키신다면 우리는 돌아서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은 바로 앞의 말씀을 따른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올바로 알려는 마음이 있는 자라면 하나님께로 돌이킬 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돌아서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굳이 패역을 고집하거나 경건한 신앙을 가장하여 의식하는 자들은 실로 하나님께 대해 무지한 자라고 말해 무방하다.
[3] 그들은 다시금 하나님과 언약을 맺게 될 것이며 그들의 위안은 전과 다름없이 풍성하게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전처럼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인정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은혜로이 나타나시는 가운데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은혜로이 나타나시는 가운데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소유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 드리고 그에게서 기대하는 가운데 그를 자기들의 하나님으로 향유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배반할 자라도 진정으로 그에게 돌아간다면 어느 누구나 다름없이 영원한 언약의 특권과 위로를 값없이 허여받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언약을 어긴다고 해서 우리가 그 언약으로부터 축출당하는 것은 아니며 고난은 언약의 사랑과 모순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언약의 사랑으로부터 유출된다는 것이 여기에 잘 나타나있다.
2. 여기에는 악한 무화과의 교훈이 나온다. 시드기야와 방백들과 그 땅에 남아 있는 자들은 아직도 무척이나 교만하고 태평하였다(겔 11:3). 애굽으로 피신한 자들도 많았는데 그들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요령있게 처신했다고 생각했으며 비록 하나님의 명령에 위배되는 짓을 했을 망정 자신을 위해서는 현명한 행동을 했노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포로로 끌려간 자들을 아주 경멸하던 이 양자에 대해 경고가 제시된다.
(1) 이미 포로되어 간 자들은 한 나라에 정착하여 비록 포로중에 있으면서도 서로 만나 교제할 수 있는 낙이라도 있었으나 이들은 세상 모든 나라 중에 흩어져서 서로 기쁨을 나누지 못할 것이다.
(2) 전자는 끌려갔어도 그것이 전화위복이 되었고 자신의 유익이 되었음에 반해(좋게 할 것이라) 후자는 "환난을 당하기 위해" 모든 나라로 이산당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환난은 그들을 겸비케 하기는커녕 도리어 그들을 강퍅케하며 그들을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하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더욱 멀리 떨어지게 만들 것이다.
(3) 전자는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소유로 인정받는 영광을 누리지만 후자는 모든 인류에게 버림받는 치욕을 당하게 된다. "내가 쫓아보낼 모든 곳에서 그들로 치욕을 당하게 하며 말거리가 되게 할 것이다." 모든 이웃 사람은 그들을 놀릴 것이며 그들에게 임한 재난을 조롱할 것이다. 누구누구는 유대인처럼 거짓되고 교만하다든가 모모한 자는 유대인처럼 가난하고 비참하다고 말하면서 그들을 조롱할 것이다.
(4) 전자는 그들의 땅으로 돌아오게 될 것임에 반해 후자는 그 땅에서 멸절하게 될 것이며 고토를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 땅에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열조에게 주신 땅이라고 주장해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 땅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순종을 조건으로 그 땅을 주셨던 때문이다.
(5) 전자에게는 보다 좋은 시절이 예비되어 있었으나 후자에게는 보다 악한 시절이 예비되어 있었다. 그들은 어디로 흩어지던지 간에 칼과 기근과 염병이 그들에게 보내져서 그들을 엄습할 것이며 그런 사명을 띠고 와서 그들을 압도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의 심판 수단을 소유하셔서 정의로부터 도피하는 자들에게 심판을 집행하실 것이다. 한 가지 심판을 모면한 자라도 회개와 개선을 하게 되기까지 또 다른 심판을 각오해야 한다. 우리는 여고냐와 시드기야의 포로 예언에서 현저한 차이를 읽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이 예언이 그 세대 사람들에게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것은 로마인에 의해 마지막으로 멸망된 유대인을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것 같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다고 믿으면서도 완악하게 불신앙을 고수하던 자들은 이 최후의 멸망에서 모든 나라 중에 흩어져서 조롱과 저주를 당하였으며 오늘날까지도 그렇게 남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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