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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복음적 예언(예레미야 23:1-8)

Ⅰ. 여기에는 태만한 목자들에게 주시는 두려움 말씀이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위탁하신 신뢰와 책무에 대해 그들과 셈하실 날이 임박하고 있다. "목자들에게(교회와 국가의 지도자들에게) 화 있으리라." 그들은 목자로 세움을 입어서 인도하며 먹이며 보호하고 돌봐야할 양떼가 있다. 그들은 그 양떼의 목자가 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 양떼의 소유자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문에서 그들을 "내 목장의 양 무리 즉 내가 이해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좋은 목장을 제공한 나의 양 무리" 라고 표현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을 먹이도록 명령받고 또 먹인다고 자처하면서 도리어 양떼를 흩고 압박과 강포로 그들을 몰아내며 그들을 돌아보지 아니하며 그들의 복지를 도모하지 않으면 그들에게 유익을 베풀려고 하지 않은 자들은 화가 있을 것이다. 양떼를 돌아보지 않고 양떼에게 대한 의무를 행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은 사실상 양 무리를 흩으며 몰아낸 셈이다. 맹수가 그들을 흩었다고 해도 목자들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니 목자라면 의당 그 양 무리를 한데 모아 두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행을 인하여 그들에게 보응하시고 그들이 받아 마땅한 대로 처리하실 때 그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의무의 길로 양 무리를 찾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복수의 길로 그들을 찾아와 벌하실 것이다.

Ⅱ. 등한시된 양떼를 위로하는 말씀이 나오고 있다. 목자들이 양무리를 돌보지 않고 그들을 위해 수고하지 않으며 그들을 배신할지라도 목자장께서 그들을 보살피실 것이다. "부모는 바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시 27:10). 하나님의 교회로 돌아보아야할 자들이 세상에서 교회의 이익을 등한시하고 자기 개인의 세속적 이익을 교회의 이익보다 우선하더라도 하나님의 교회는 결코 몰락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고용하시는 자들이 자기 의무를 의행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의무를 이행하실 것이다.

1. 이산된 유대인들은 마침내 자기 고국으로 귀환하게 될 것이며 선한 통치하에서 행복한 정착을 하게 될 것이다(3,4절). 비록 하나님의 양 무리가 조금밖에 남아있지 않으며 멸망을 간신히 피해 나온 잔존자가 소수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남은 무리를 끌어 모으실 것이며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간에 그들을 발견해 내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 에서 그들을 데리고 올 수 있는 방법과 길을 찾아내실 것이다. 그들을 이산시킨 것은 하나님의 공의였다. 그것은 목자들의 죄 때문이었다. 그러나 양떼들을 배신한 목자들이 멸절당하는 날 하나님의 자비는 그 양떼들을 끌어 모으실 것이다. 양떼가 그 우리로 돌아오게 되듯 그들은 이전 거소로 돌아오게 될 것이며 거기서 그들은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그 수가 증가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전 목자들이 그들을 돌보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이 더 이상 많아지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일부 사람들이 신성한 직분을 남용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 직분을 철폐해야 할 좋은 이유는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양 무리를 멸하였지만 내가 목양을 자기 본분으로 삼는 목자를 세우리라" 고 말씀하신다. 이전에는 그들이 끊임없이 놀라눈 일을 당하고 이런 저런 경악에 시달렸으나 이제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게 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외부로부터 오는 위험에도 들지 않게 될 것이며 내부로부터의 놀라움도 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전에는 그들이 때때로 맹수의 밥이 되었었다. 그러나 이제는 어느 누구도 죽거나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교회가 비록 오랜 세월을 불리한 가운데서 보내 왔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늘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스룹바벨이나 느헤미야 같은 목자들은 여호야김이나 여고냐가 누리던 호화판 속에서 살지도 못했고 그와 같은 두각을 나타내지도 않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백성에게 큰 역병같은 존재였음에 반해 그들은 백성에게 큰 축복이 되었다. 교회의 평강은 교회를 지배하는 자들의 화려한 것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2. 왕되신 메시야, 저 크고도 선하신 목자께서 말일에 일으킴을 받아 자기 교회를 복되게 하시며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 되실 것이다(5,6절). 다윗 가는 여고냐의 자손 중 아무도 다윗의 위에 앉지 못하리라(22:30)는 경고로 완전히 몰락하고 파멸한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다윗과 맺은 명예로운 언약은 효과적으로 보장될 것이라는 약속이 여기에 나오고 있다. 그 언약에 의해 다윗 가는 폐허 속에서 일으킴을 받아 어느 때보다 광채를 더 발하게 될 것이며 솔로몬 시대보다 더 빛나게 될 것이다. 예레미야에서는 이사야서보다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많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께 대한 한 가지 예언과 접하게 되는데 그것은 몹시 혁혁한 예언이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예레미야 선지는 여기서 바로 그리스도께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첫마디는 오랜 세월이 지나야 이 약속이 성취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때가 이를 것이지만 아직은 당도하지 않았다. 내가 그를 볼 것이나 아직은 아니다." 그러나 나머지 말씀은 전부 그 약속의 성취가 영화스러울 것이라고 암시해 준다.

(1) 그리스도는 다윗의 가지로 비유되고 있다. 그는 순(사 11:1; 슥 3:8)이요 가지이다. 싹이나 맹아처럼 그 출현은 미천하고 그 시작은 사소하며 보기에는 땅에서 나오는 것 같으나 자라면서 푸르르게 되고 커지며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 다윗 가계에서 나온 가지는 보기에 마른땅에 파묻혀 있는 줄기 같아서(사 53:2) 소생할 것 같지도 않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다(계 22:16). 다윗의 뿔은 그에게서 돋아난다(시 132:17, 18). 그는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가지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성별하사 세상에 보내셨고 그에게 사명과 자격을 부여하셨다. 그는 의로운 가지이니 이는 그 자신이 의로우시며 그에게 속하는 많은 자들이 전부 그를 통해 의롭게 되는 때문이다. 그는 대언자로서 의로우신 자 예수 그리스도이다.

(2) 그는 자기 교회의 왕으로 언급되고 있다. 이 가지는 자기 조상 다윗의 위만큼 높이 들릴 것이며 왕이 되어 형통할 것이다(한글 개역 성서:지혜롭게 행사할 것이다). 그는 그 모든 행사에서 뒷걸음질 친 다윗 가의 왕들 같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그는 세상에 한 왕국을 세우실 것이니 그 나라는 모든 대적에게 승리할 것이다. 그는 영원 무궁한 복음의 병거를 타고 전진할 것이며 그는 계속해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할 것이다(계 6:2). 하나님이 그를 들어 올리시면 하나님은 또 그를 형통하게 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 손의 행사를 인정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 기쁨이 되는 일은 위탁받은 자의 손에서 성취되고 형통하게 될 것이다(사 53:10 참조). 그는 형통할 것이다. 이는 그가 세상에서 공평(판단이란 뜻도 있음:역주)과 정의를 행하며 세상을 판단할 것이기 때문이다(시 96:13). 다윗 가의 임금들은 불공평하고 압제적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형통하지 못한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이 찬탈한 권세를 자기 복음으로 깨뜨려 버리실 것이며 거룩하게 사는 완전한 통치를 확립하실 것이고 그런 통치가 득세하는 한 온 세상을 의롭게 만드실 것이다. 그에게 신실한 충성을 바치는 모든 자에게는 거룩한 안보와 마음의 평정이 뒤따를 것이다. 그가 지배하는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다. 즉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기도의 조상 야곱의 모든 영적 자손들은 하늘의 저주와 지옥의 악의로부터 보호받을 것이며 율법의 포박으로부터 특사받을 것이고 사탄의 권세에서 구출될 것이며 죄로부터 구원받을 것이다. 그들은 죄의 유죄 판결과 죄의 지배에서 구원을 받아 평안히 거할 것이며 모든 해받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눅 1:74, 75). 장차 임할 진노로부터 구원받을 자들은 현재 평안히 거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그리스도께서 우리 영혼 속에서 왕노릇하시고 우리 영혼의 제일 높은 곳에서 정사를 펼치시는 날 우리 영혼은 평안히 거하게 된다.

(3) 그는 여기서 여호와 우리의 의라고 지칭된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그는 누구이며 무엇인가? 그는 하나님으로서 여호와이다. 여호와는 연락불통의 이름으로서 그의 영원성과 자존성을 나타낸다. 그는 중보자로서 우리의 의이다. 그는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킴으로써 영원한 의를 가져 오셨고 은혜의 언약 안에서 우리를 그 의에 따르도록 하신 것이다. 즉 우리가 믿음으로 그 언약에 동의하면 그 의는 우리의 의가 되는 것이다. 그가 여호와 우리의 의라는 것은 그가 어떤 피조물도 될 수 없는 우리의 의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지고무상(至高無上)하시고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의이시다. 우리의 모든 의는 그에게서 얻는 것이며 우리의 모든 의는 그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된다.

[2] 이에 대한 고백과 선언.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그는 우리의 의가 되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알려지기도 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그를 이 이름으로 부르실 것은 그를 우리의 의로 지명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그를 그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그리고 모든 참된 선지자들도 그를 그렇게 부를 것이며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탄원은 용납되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칭함을 받고 우리 죄는 사함받으며 우리는 은총 속으로 거두어 들여지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일어나셨다" 는 것밖에 내세울 것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 주님으로 모시고 있는 것이다.

3. 유대인이 바벨론에서 귀환한 뒤 우일 임할 이 큰 구원은 애굽에서의 구원을 무색하게할 정도로 빛날 것이다(7,8절).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집 자손을 북방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리라." 이 말씀은 앞서도 나왔다(16:14, 15). 그러나 여기서는 16장 말씀보다 더 명백하게 메시야의 날을 가리키는 것같이 보이며 두 구원을 비교한다기 보다(후자의 구원에 우선권을 부여하면서) 이들 구원 뒤에 점차로 바뀌어간 교회의 두가지 상태를 비교하는 것 같다. 시간적 비율을 살펴보면 그들이 애굽에서 나온지 꼭 480년 만에 솔로몬은 성전을 건립하였다(왕상 6:1). 그리고 아주 기적적으로 애굽에서 구출된 이 민족은 점차로 전성기 즉 그 절정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또 그들이 바벨론에서 귀환한지 꼭 490년만에(칠십 이레) 왕되신 메시야께서는 복음 성전을 세우셨던 것이다. 이것은 바벨론에서 그토록 경이적으로 구출된 이민족의 최대자랑꺼리였다(단 9:24; 25 참조). 솔로몬 시절의 영광이 현세적이요 이 민족의 첫째번 영광이었다면 두번째 영광 특히 복음 교회로 옮겨간 영광은 영적인 영광이었다. 두번째 영광과 비교하면 첫째번 영광은 영광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복음 교회의 영광은 빼어나고 아주 혁혁하다.

 

23:2 없음.

 

23:3 없음.

 

23:4 없음.

 

23:5 없음.

 

23:6 없음.

 

23:7 없음.

 

23:8 없음.

 

23:9

거짓 선지자들의 죄(예레미야 23:9-32)

여기에 거짓 선지자들에게 대한 장황한 교훈이 나오고 있다. 거짓 선지자들은 어느 누구보다 하나님의 참 선지자들에게 가혹하고 원한에 찬 존재들이었다. 따라서 참 선지자들은 어느 누구보다 이들에게 엄격하고 공정했다. 예레미야 선지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하나님께 호소하였었고(14:13) 그들이 공동의 파멸에 휩쓸리게 되리라는 것을 누차 예언했었다. 본문에는 거짓 선지자들 자신의 재난이 나오고 있다.

Ⅰ. 그는 이 때문에 자신의 심심한 우려를 표명한다. 하나님의 위탁과 영감을 받았다고 자처하는 자들이 스스로 파멸하는 것을 본다는 것은 예레미야 선지로서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백성 중에 거하면서 허위와 패역으로 백성을 파멸로 몰아넣는 자들이었다. "내 중심이 떨리며 내가 취한 사람 같도다" (9절). 그의 머리는 경이와 놀람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고 그의 마음은 비탄과 상심으로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경위야 어찌 됐든 간에 자기 조국을 위태롭게 할 일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그가 고통을 당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선지자들과 그들의 죄 때문에. 선지자들이 전파한 거짓 교훈과 그들이 영위한 사악한 생활 때문에 그는 고뇌한다. 특히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하나님께 교훈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을 들으면 그는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여호와께서 그토록 모욕당한 적도 없었던 것이다. 이들 만치 그 거룩한 말씀을 남용한 자도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성호에 대한 치욕과 그의 거룩하신 말씀에 대한 모독은 은혜로운 심령에게 최대의 비탄이 된다는 점을 주목하자.

2. 여호와와 그의 심판 때문에 그는 고뇌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런 방법으로 우리에게 홍수처럼 엄습하기도 한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얼굴과 그 거룩한 말씀의 진면목으로부터(그렇게 읽을 수도 있음) 임하는 파혐과 황폐를 생각하고 전률하였다. 이 파멸은 하나님 말씀의 경고대로 하나님의 진노의 권능에 의해 부과되고 그의 거룩함으로 확증되는 파멸이다. 하나님을 자기편에 모시는 자들조차 하나님을 적대하는 자들의 불행을 생각하고 전률하지 않을 수 없다는데 유의하자.

Ⅱ. 그는 그 땅에 미만한 가증스런 악과 하나님의 현재적 진노의 표징 때문에 슬퍼한다(10절). "이 땅에 행음하는 자가 가득하도다. 이 땅에는 영접 간음과 육체적 간음이 충만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라 이교신을 섬긴다(음행한다는 말고 이 관용어는 동일하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버렸으므로 그들이 온갖 종류의 음행에 탐닉한다고 해서 놀라울 것은 하나도 없다. 그들은 자신과 자신의 육체를 더렵혔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급하고도 거짓된 맹세로 하나님과 그 이름을 더럽힌다. 이 맹세(한글 개역:저주)로 인하여 땅에 슬퍼한다. 거짓 맹세와 공동 서약은 한 나라가 진정으로 회개하며 슬퍼해야 할 죄악이며 그러지 않으면 그 나라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서 슬퍼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땅은 이제 기근의 심판 아래서 슬퍼하게 되었다. 광야의 아름다운 곳(흠정역) 또는 광야의 초장은 강우 부족으로 마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회개의 빛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을 교정하려는 목적에 부응하지 아니한다. 사람들의 행위는 악하다. 그들이 말하고 행하는 취지와 경향은 죄스럽다. 그들의 행로는 악이며 그들은 여전히 악한 길로 계속 행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 악한 길에서 방향을 전환하려 들지 않는다. 그들은 굉장히 많은 결심을 하지만 그 결심은 그릇된 길로 돌아서 버렸다. 그들은 열심히 내긴 하지만 좋은 일에 대해서가 아니다(갈 4:17, 18) 그들이 힘쓰는 것은 정직하지 못하다. 그들의 마음은 악을 행하기에 담대하며(전 8:11) 그들은 진리를 위해 용감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이처럼 자기들과 쟁론하고 계심을 보면서도 자기들의 악행 행위를 딱 잘라 끊을 만한 용기를 지니고 있지도 못하다.

Ⅲ. 그는 모든 제사장과 선지가 특히 선지자들을 책망한다. "그들은 다 사특하다(11절)."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규례를 실시한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모독하며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체하면서 그것을 모독한다. 그들의 담화와 모든 행위는 불경스럽다. 그렇다고 할 때 백성이 그토록 타락했다고 해서 이상스러울 것은 없다. 그들은 다 외식을 행한다(그렇게 읽는 자도 있음). 그들은 신성한 것을 빙자하여 극히 비열한 계획을 추진한다. "아니, 그들 자신의 집과 그들이 자주 가는 나쁜 집에서뿐만 아니라 내 집에서도 내가 그들의 악을 발견하였노라." 성전은 제사장들이 시무하고 선지자들이 예언하는 곳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 성전에서 우상 숭배와 부도덕한 일을 자행하였던 것이다. 흡니와 비느하스의 비참한 사례를 참작하라(삼상 2:22). 하나님께서는 자기 집을 탐색하시며 자기 성전에 어떤 악이 있는지 발견해 내실 것이다. 악이 하나님께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를 더욱 더 노엽게 할 것이다. 두 가지 이유로 질책을 당했다.

1. 솔선하여 백성에게 범죄하도록 가르쳤다는 것. 선지자는 그들을 사마리아 선지자들과 비교한다. 사마리아는 열 지파 왕국의 수도로서 오래도록 황폐해있었다. "사마리아 선지자들의 우매함은" 그들이 "바알을 의탁하고"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했다" 는 것이었다. 아합의 선지자들은 바알을 의탁하고 예언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그릇되게 하였으며 참 하나님의 예배를 포기하고 바알을 섬겼다" (13절). 그러나 예루살렘의 선지자들은 그렇게 행하지 않았다. 그들은 참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했으며 바알의 의탁하고 예언하던 사마리아 선지자들이 우상 숭배로 나라를 타락시켰듯 그들이 부도덕한 짓으로 그 나라를 타락시켰다면 나을 것이 무엇인가? 예루살렘 선지자들에게는 가증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면서 온갖 불결한 일에 탐닉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행음을 예사로 여긴다. 그들은 진리의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면서 거짓으로 행한다. 그들은 거짓 예언을 할 뿐만 아니라 일상 대화 가운데에서도 그들의 말은 한 마디도 믿을 수가 없다. 그들의 말은 죄다 농담이거나 희언이거나 아니면 기만과 계략이 담긴 말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죄인들을 부추겨서 안한 길로 행하게 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실로 우리는 선지자들이 하는 대로 행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우리 선생보다 더 나을 것으로 기대할 사람이 누구인가?" 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 악에서 돌이키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들은 악행을 계속할지라도 평강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니 이는 그들의 선지자들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유다와 예루살렘은 다 "하나님 앞에서 소돔과 고모라와 다름이 없이" 되었다. 소돔과 고모라는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 이었다(창 13:13).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불과 유황으로 멸망받아 마땅할 자로 간주하셨다.

2. 거짓 예언으로 백성들을 범죄하도록 장려했다는 것. 그들은 죄를 지어도 아무런 해나 위험이 없다고 믿었으며 따라서 그렇게 행하였다. 그렇다고 할 때 그들이 타인들도 그렇게 믿도록 했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16절). "그들의 말한 목사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그들 자신이 안출해 낸 산물이어서 그들 자신의 성향과 일치하는 것이지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은 그들에게 예언할 말을 구술하지 않으셨다. 그들의 말은 모세의 율법과 일치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다른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것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그들은 죄인에게 죄를 지속해도 괜챦을 것이라고 말한다(17절). 그들이 권면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살펴보자. 그들이 격려하는 대상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 들이다. 또 그들의 격려 대상은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자" 들이다. 쾌락에 열중하는 자 그런데 자기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선지자들은 그들을 어떻게 위무하고 어떻게 그 비위를 맞추었는지 살펴보자. 그들은 계속 악한 길로 행하고 있는 자에게는 평강이 없다는 것을 줄곧 말했어야 옳았다. 즉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는 경멸히 여김을 당하리라" (삼상 2:30)고 말했어야 마땅했다. 아니 그들에게는 재난이, 수 천의 재앙이 있을 것이라고 말해야 했으나 오히려 그들은 "너희가 평안하리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고 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쁜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함으로써 하나님을 죄의 후원자로 만들고 자기 모순자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자기의 악한 길로 계속 나아가겠다고 굳게 마음먹은 자들은 행악을 계속하더라도 평안할 것이라고 말하는 자들의 강열한 현혹을 믿도록 포기되어 마땅하다.

Ⅳ. 하나님께서는 이 거짓 선지자들이 죄 중에 있는 백성을 달래려고 말한 것은 전부 다 부인하신다(21절).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노라." 그들은 결코 하나님께로서 아무런 사명도 받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이 일을 위해 파견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일로도 보냄을 받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어떤 용무에도 이들을 고용하신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백성에게 평강하다는 것을 확신시키라는 교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노라고 자처하며 그것을 가장한다. 이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런 훈령을 그들에게 내리신 적이 없다는 것을 천명하신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거짓 선지자들은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들은 달음질하였다." 그들은 매우 대담했다. 참 선지자들은 때로 어려움과 씨름하면서 예언하는데 반하여 그들은 아무 어려움없이 예언하였다. 그들은 죄인들에게 "너희가 평안하리라" 하였다. 그러나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예하였느냐? 너희는 이 일을 이렇게 자신하는데 너희 중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석했느냐? 너희는 이 메시지를 아주 자신만만하게 전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것에 대해 하나님과 상의라도 한 적이 있느냐? 그런 적은 결단코 없다. 너희는 죄인을 벌하지 않고 방면하는 일이 하나님 스스로 자신에 관해 나타내신 것과 부합하는지 않는지 고찰하지도 않았으며 하나님의 거룩한 명예와 공의에 일치하는지 않는지도 살펴보지 않았다. 너희는 이것을 성서와 비교하지 않았다. 만일 너희가 그것을 주목하여 성서의 항구여일한 대의를 주시했더라면 그런 메시지를 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지자들은 자기들이 예언하는 대상자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율법과 성서를 시금석으로 하여 영들을 시험해야 했다. 그러나 평안을 예언한 자 중 어느 누가 그렇게 했던가? 그들이 하나님의 회의에 참예하지 않았으며 그의 말씀을 듣지도 않았다는 것은 22절에 증명된다. "그들의 주장대로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예하였더면 다음 세 가지를 이행했을 것이다."

1. 그들은 성서를 자기들의 표준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들은 내 백성으로 하여금 내 말을 듣게 했을 것이며 양심적으로 내 말을 꼭 지키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기준에 의거하여 말하지 않으므로 그들 안에 광명이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2. 그들은 영혼의 회오(悔悟)를 자기 본분으로 삼고 그들의 모든 설교에서 이를 목적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들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여 백성들로 전체적인 "악한 길과" 개개의 모든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했을 것이다." 그들은 풍습의 개선을 권장하고 조력했을 것이며 사람과 죄의 분리를 모든 설교의 목적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그들의 염두에 없고 도리어 죄 중에 있는 죄인을 격려한 듯이 보인다.

3.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얼마간이라도 보증받았을 것이다. "그들이 만일 내 회의에 참예했고 그들이 전한 말이 내 말이었더라면 그들은 백성들로 악한 길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 죄인을 뉘우치게 하기 위해 신적 권위가 그 말씀에 수반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제정하신 규례를 축복하실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철칙이 아니다. 예레미야 자신도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지만 악한 길에서 돌이키게 하는 데 성공을 거둔 것은 극소수였던 것이다.

Ⅴ. 하나님은 이들 악한 선지자들을 벌하시겠다고 위협하신다. 그들은 백성에게 평안을 약속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우매함을 보여 주시기 위해 거짓 선지자들 자신도 평안을 얻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들은 백성에게 평안을 보증하고 재앙이 임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을 전달하기에는 아주 부적합한 자들이었다. 왜냐하면 온갖 재앙이 자기들에게 임하고 있는데도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12절). "선지자와 제사장이 다 사특하기 때문에 그들의 길이 그들에게 흑암 중에 미끄러운 곳과 같이 될 것이라." 남을 인도하는 일을 맡고 있는 자들이 자기 길에서 위안을 얻지 못할 것은 그들을 그릇 인도하기 때문이며 또 그것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1. 그들은 남에게 길을 안내하는 척한다. 그러나 그들 자신은 흑암이나 농무(濃霧) 속에 있게 될 것이다. 그들의 등불은 껴질 것이며 그들의 시야는 흐려져서 그들은 자기 앞도 보지 못할 것이며 자기들을 위한 예측도 할 수 없을 것이다.

2. 그들은 남들에게 안전을 보장한다고 주장하지만 자신의 안전한 거점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길이 그들에게는 미끄러운 곳과 같이 될 것이다." 그들이 나아가는 길에는 확실함이나 안전이나 만족이 없을 것이다.

3. 그들은 아첨하는 말로 백성들을 안심시킨다고 하지만 그들 자신은 불안할 것이다. "그들은 밀침을 받은 포로처럼 억지로 떠밀려 앞으로 나아가거나 추적당하는 자처럼 도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탈출하려고 기도하던 그 길에 엎드러질 것이며 그래서 원수들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다."

4.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협하는 재앙을 방지하겠다고 나서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벌하는 해에" 즉 그들에게 책임을 추궁하기로 정해진 때에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실 것이다." 스스로 판단하지 않는 모든 자들에게는 그런 때가 정해져 있다. 그리고 그때는 재앙의 때가 될 것이다. "벌하는 해는 보상의 해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그들에게 쑥을 먹이며 독한 물을 마시우리라" (15절)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 쑥은 욕지기가 나게 할 뿐만 아니라 유독한 식물이다. 그리고 독한 물은 "쓸개즙 또는 헴록크(미나리과의 월년초 열매에서 재취하는 독약)의 즙이라고 읽혀지기도 한다" (9:15 참조). 떨림의 잔이 그들의 손에 먼저 쥐어져 마땅한 것은 경건의 모범이 되어야 하고 모든 면에서 칭찬할 만한 사표가 되어야 할 "예루살렘 선지자들에게서 사악이 나와 온 땅에 퍼지기" 때문이다. 목사들의 타락보다 한 나라를 효과적으로 타락시키는 것은 없다.

Ⅵ. 이들 거짓 선지자들을 신용하지 말라고 경고가 백성에게 주어지고 있다. 그들이 벌받지 않고 무사히 넘어 가리라는 희망으로 백성들을 안심시키지만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그들에게 진노하실 것이다(16절).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주목하고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왜냐하면 결국 그들의 말은 서지 못하되 하나님의 말씀은 선다는 것을 너희가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너희를 진지하게 만드나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며 헛덴 소망으로 너희를 배부르게 하나니 그것은 마침내 너희를 낭패시킬 것이다. 그들은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 보라(19절). 보라 나 여호와의 노가 발하여 폭풍과 회리바람 같을 것이라. 그들은 너희에게 모든 것이 고요하고 청명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폭풍이 이르고 있다고 너희에게 말씀하신다. 그것은 여호와의 회리바람이다. 그것은 여호와가 보내시는 회리바람이기에 그 앞에 서 있을 수가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야기된 회리바람이다. 그것은 노여움 가운데서 발하신 회리바람이며 하나님의 복수의 곳간에서 끄집어 낸 바람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극심한 회리바람(원문에서 그렇게 되어있음:역주)이며 악인이 머리를 비와 우박으로 세게 칠 것이다. 악인들은 이를 피할 수도 없고 도피처를 찾을 수도 않을 것이다." 그것은 백성을 미혹한 악한 선지자과 스스로 미혹받은 악한 백성들을 칠 것이다. "두려운(한글 개역 성서:태우는) 바람은 저희 잔의 소득" 이 될 것이다(시 11:6). 이 판결은 번복될 수 없는 것으로 고정되어 있다(20절). "여호와의 노는 돌아오지 아니할" 것이다(한글개역:쉬지 아니 할 것이다). 왜냐하면 법령은 이미 발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판결을 "행하여 그 마음의 뜻하는 바를 이루기까지는" 자기 마음을 바꾸거나 돌이키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회리바람은 일단 "하늘에서 내려오면 그리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그가 보낸 일에 형통할 것이다" (사 55:11). 지금은 그들이 이것을 생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말일에는 그것을 완전히 깨달을 것이며 그것을 고찰하여 이해할 것이다. 경고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도 그 경고가 실행될 때에는 피부로 느끼게 될 것이며 확실한 증거조차 용납하려 들지 않았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게 될 것이고 공의롭고 투기하시는 하나님의 수중에 떨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제때에 깨닫지 않는 자들도 결국은 깨닫게 될 것이며 그때는 이미 너무 늦을 것이다. 아들아, 이를 기억하라.

Ⅶ. 거짓 선지자들의 각성을 위해 몇 가지 일이 제시되고 있는데 이는 할 수만 있다면 그들로 자기 과오를 철회하게 하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행한 자기들의 현혹을 인식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1. 그들은 사람들을 기만할 수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을 기만당하기에는 너무 지혜로운 분이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오류를 간파하지 못하나 하나님은 그들의 잘못을 간파하실 수 있으며 또 간파하신다.

(1)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무소부재하심과 전지전능하심을 주장하신다(23,24절). 그들은 백성들에게 악한 길을 계속 나아가도 재앙이 암히자 않을 것이라고 말했고 이 때 그들은 무신론적 원리 위에서 행동했다. 즉 그들은 여호와께서 자기들의 죄를 보지 않으시며 어두운 구름 때문에 판단하시지도 못하고 그것을 요구하지도 않으실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 종교의 제일 원리부터 배워야하며 극히 자명한 진리와 대면하지 않으면 안 된다.

[1]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에 비치되어 있고 땅은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그는 이 아랫 세계에 계시는 하나님이다. 하계는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고 상계는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는 이 하계에도 계신 신이다(23절). 천국에 계신 하나님은 동시에 땅도 조망하신다. 하나님은 거기 뿐만 아니라 여기도 두루 감찰하신다(대하 16:9). 인간은 영이 육이 감춰져 있는 존재이고 하나님의 보좌는 둘러싸고 있는 천사로 그 영이 감춰지지 않은 천상의 존재이다. 하나님은 천사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 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것도 분명하게 통찰하신다. 하나님의 권능은 천국에서 천군 천사들에게 역사하신다. 그러나 바로 그 권능은 지상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도 역사하신다. 우리 인간에게는 관찰이나 활동에 있어서 원근이나 명암이 큰 차이를 일으키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는 명암이나 원근이 마찬가지다.

[2] 인간이 자신의 성격과 계획 그리고 자기 자신을 감추는데 아무리 재간이 있고 아무리 부지런하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으로부터 감출 수는 없다(24절).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누가 자기의 계획과 의향을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마음의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인간은 어떤 은폐 기술로도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 없으며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을 그르칠 수가 없다.

[3] 그는 모든 곳에 편만하시다. 그는 천지를 지배하시며 우주적 섭리로 천지를 지탱하신다. 뿐만 아니라 그는 본질적 존재로 "천지에 충만하시다" (시 139:7, 8 이하). 어떤 일정 장소도 하나님을 내포하거나 배제할 수가 없다.

(2) 그는 이것을 거짓 선지자들에게 적용한다. 그들은 자신을 위장하는 데 탁월한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은 하나님께서 저 다른 세상에 전적으로 몰두하고 계신 까닭에 이 세사에서 일어나는 일은 확인할 겨룰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그들의 모든 협잡을 아신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리실 것이다. 그들이 신적계시를 빙자하여 세상을 기만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아시며 그것을 그들로 하여금 알게 만드실 것이다. 그들은 백성의 환심을 사기 위해 실제로는 몽사를 얻지 않았으면서 하나님께로부터 꿈속에서 지시를 받은 것처럼 가장한다. 백성들은 이 점을 판별하지 못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내게 이러이러한 꿈을 꾸었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렇게 말하는 자는 내가 자기 꿈 얘기를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만을 간파하신다. 하나님은 이들 거짓 선지자들의 협잡을 발견하셨다. 아마 거짓 선지자들은 자기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는 자들의 귀에 "내가 이러이러한 몽사를 얻었노라" 고 말하면서 자기들의 말을 속삭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말을 엿들으셨던 것이다. 심령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은 그들을 추적하면서 백성을 기만하기 위해 사용하는 그들의 모든 방법을 목격하시고 이렇게 절규하신다. "언제까지냐? 내가 늘 그들에게 대해 참겠느냐? 거짓을 예언하는 것과 그 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하는 것이냐?(이렇게 읽는 자도 있음)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께 어떤 모욕을 가하고 있으며 백성에게 어떤 학대를 하고 있고 자신들을 위해 어떤 심판을 예비하고 있는지를 결코 깨닫지 못할 것인가?

2. 그들은 계시을 위조하여 백성을 기만하고 신의 망상으로 신적 영감을 자 대체하는 일이 모든 경건한 신앙을 멸시 천대받게 만들고 백성들을 무신론자와 이단자로 만드는 첩경임을 깨달아야 했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로 그들이 의도하던 일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빈번히 입에 올리고 무슨 말을 하든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는 말을 앞세웠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몽사를 말하니 그 생각인즉 내 백성으로 내 이름을 잊게 하려 함이로다" 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그들의 열조가 바알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린 것 같이"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하나님의 율법이나 규례나 참 선지자에 대한 존중에서 물러나게 하려고 꾀했다. 사탄이 크게 노리는 것은 사람들로 하나님을 잊게 만드는 것이며 그가 자신의 정체를 알리는 것도 바로 이것이 전부다. 사탄은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갖가지 교묘한 방법을 사용한다. 때로는 거짓 신들을 세우기도 하고(사람들로 바알을 사랑하게 만들면 그들은 곧 하나님의 이름을 잊게 된다) 때로는 참 하나님이 마치 우리들과 꼭 같기라도 한듯 하나님을 그릇되게 묘사하기도 한다. 새로운 계시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계시에 대한 전면적 부정만큼이나 위험한 것으로 판명되기도 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는 거짓 선지자는 아마 바알의 이름으로 거짓 예언하는 선지자가 경건한 능력에 대해 미치는 해보다 더 많은 피해를 입힐 것이다. 왜냐하면 경건한 백성은 후자보다 전자를 덜 경계하기 때문이다.

3. 그들은 자기들의 예언과 여호와의 참 선지자가 전하는 예언간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28절). 꿈은 영감의 전달 수단이었다. 거짓 선지자들이 걸핏하면 내세우는 것은 몽사였다. "몽사를 얻은 선지자는, 즉 그가 꿈을 꾼다면 그것을 꿈으로 말할 것이니라(가타커 선생은 그렇게 해석한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 꿈을 강조하지도 말지니라. 그들은 그 꿈이 하나님께로서 온 것이라고 말하지 말며 자기들의 어리석은 꿈을 신탁이라고 부르지도 말지니라. 그러나 내 말을 받은 참 선지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요 그 말을 성실이 내 말이라 말할지니라(이렇게 읽는 자도 있음). 그로 하여금 자기가 받은 지시를 고수하게 하라. 그러면 너희는 거짓 선지자들이 말하는 몽사와 참 선지자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지시 사이에 큰 차이를 곧 깨닫게 될 것이다. 꿈으로든 육성으로든 하나님한테서 메시지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자가 있거든 그로 하여금 받았다는 메시지를 선포하게 해라. 그러면 그들은 그 메시지가 하나님께서로서 온 것인지 아닌지를 곧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겨와 밀을 어찌하겠느냐? 이 선지자들이 너희에게 전하는 평안의 약속은 하나님의 약속과 비교할 때 겨와 밀을 비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인간의 환상은 바람에 날리는 쭉정이처럼 가볍고 헛되고 무가치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 안에 알맹이가 들어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귀중하며 영혼의 양식이 되며 생명의 떡이 된다. 밀은 저 환상의 골짜기 가나안의 주산물이었다(신 8:8; 겔 27:17). 인간의 헛된 공상과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 간의 차이는 겨와 밀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그 다음에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29절)는 말씀이 나온다. 그들의 말은 불 같은가? 그들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갖고 있는 능력과 효험을 갖고 있는가? 천만에, 그런 것은 전혀 없다. 그것은 마치 그림 속의 불과 진짜 불을 비교하는 것과 같다. 그들의 말은 ignis fatuus-즉 사람들을 샛길과 위험한 낭떠러지로 인도하는 도깨비 불과 같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과 같다는 것을 주목하자. 율법은 불같은 율법이었고(신 33:2)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에 대해서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 (눅 12:49)고 말씀하신다. 불은 작용하는 대상에 따라 상이한 효력을 나타낸다. 진흙을 굳게 하는가 하면 밀랍을 녹이고 찌꺼기를 태워버리는가 하면 금을 정금으로 순화시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도 어떤 이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되고 또 다른 이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 가 된다(고후 2:16). 하나님은 여기에서 말씀을 받은 자들의 양심에 호소하신다.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너희에게는 내 말이 불 같지 않느냐? 너희가 느낀 대로 말해 보아라(슥 1:6 참조)."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은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로 비유되고 있다. 자신을 낮추지 않는 인간의 마음은 바위와 같다. 불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도 녹지 않는 인간의 마음은 바위와 같다. 불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도 녹지 않으려 하는 마음은 방망이 같은 그의 말씀으로 산산조각이 나게 될 것이다. 말씀에 대해 어떤 항거를 하더라도 그 항거는 압도될 것이며 부스러뜨러질 것이다.

4. 그들은 자기들이 계속 이런 길로 행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대적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그들은 이런 말을 세 번이나 듣는다(30.31,32절). "보라. 내가 선지자들을 치리라."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는 척하면서 그의 이름을 사용했지만 실은 하나님을 대적했다. 하나님은 그들을 실제 그대로 보시고 그들을 대적하신다(친다는 말과 대적한다는 말은 동일한 단어임:역주). 전능한 권능의 하나님을 대적으로 삼고 있는 자들이 어떻게 오래도록 안전할 수 있으며 편안할 수 있는가? 이 거짓 선지자들이 백성에게 평안을 약속하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선진 포고를 하고 계셨다.

(1) 그들은 절도죄로 기소를 당하고 있다. "그들은 서로 자기 이웃에게서 내 말을 도적절한다." 후자는 이것을 선한 선지자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한다. 그들은 선한 선지자들의 설교를 도둑질하고 그들의 표현을 훔쳐다가 자신의 표현에다 섞었다. 그들은 나쁜 물건을 좋은 물건과 섞어서 팔아먹는 도붓 장수와 같다. 진정한 선지자들의 정신이라곤 전혀 알지 못하는 자들이 참 선지자들의 언어를 흉내내며 그들의 훌륭한 말을 몇 가지 골라서 마치 자기들의 말이기라도 하듯 백성에게 전했지만 그것은 울며 겨자 먹기로 한 말이었다. 그 말들은 그들의 나머지 담화와 일치하지 않았다. "저는 자의 다리는 같지 않나니(한글 개역:힘없이 달렸나니)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도 그러하다" (잠 26:7). 또 다른 자들은 이것을 일부 백성이 받아 간직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이 그들의 마음으로부터 훔쳤다는 것이다. 복음서의 비유에서는 악한 자가 말씀의 좋은 씨앗을 도둑질한다고 기록하고 있다(마 13:19).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확신을 얻고 있던 자들의 마음에 교묘히 접근하여 말씀의 권위를 감소시키며 말씀의 효능을 약화시켰다.

(2) 그들은 인감 위조죄로 기소당하고 있다. "그들은 백성에게 말할 때 자기들 마음대로 혀를 놀렸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치신다" (31절). 그들은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말하고는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께 받았다고 주장하며 "그가 말씀하셨다" 고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혀를 매끄럽게 놀렸다" (흑자는 그렇게 해독한다) 그들은 백성에게 매우 공손하여 듣기 좋고 그럴듯한 것만 얘기한다. 그들은 결코 백성을 책망하거나 경고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말은 기름보다 매끄럽다" (시 55:21). 이와 같이 하여 그들은 백성의 환심을 사고 백성에게서 금전적 이익을 취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기들의 거짓말의 후견자로 전락시킬 만큼 후안무치하고 불경건했다. 그들은 "그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고 한다. 진리의 하나님의 문 앞에 거짓말의 아비의 애새끼들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모욕이 있겠는가?

(3) 그들은 공중 기만죄를 기소당하고 있다(32절). "내가 그들을 치리라." 이는 그들이 자기들이 날조에 지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가장하여 거짓 몽사를 예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서운 기만이다. caveat emptor-즉 물건을 사는 사람이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거나 si populus vult decipi, decipiatur-즉 사람들이 속아 넘어 가거든 속아넘어가게 하라고 말하더라도 그것은 변명의 되지 않을 것이다. 미혹당하는 것은 백성의 잘못이다. 백성들은 사물의 정신을 분변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믿고 받아들인다. 그것은 백성의 잘못이다. 그러나 선지자들이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미하게 하는 것은 더 더욱 잘못이다. 선지자들은 죄 가운데 있는 백성에게 달래고 아첨하는 설교를 하며 방정치 못하고 상스러운 처신으로 백성이 계속 범죄하도록 고무했다.

[1]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자기에게서 사명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신다.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하지 아니하였노라." 그들은 하나님의 사자가 아니며 그들이 하는 말은 하나님의 메시지가 아니다.

[2]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대한 축복을 거절하시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이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그들이 노리는 모든 유익은 백성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일조차 여의롭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섭리는 동시에 그들을 불안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백성을 이롭게 하지 아니한다" (그렇게 읽는 이도 있다). 이 말씀을 언외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들은 백성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주 많은 해를 입히기도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키는 자들은 말씀을 설교한다고 주장하는 동안에도 교회를 유익하게 가르치기는커녕 최대의 화를 끼치고 있다는 데 주목하자.

여기에는 제사장이나 선지자의 불경과 함께 백성의 독신(독신)이 구체적 사례로 책망받고 있다. 그들의 큰 죄악에 비하면 이것은 사소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평범한 담화 가운데 나타나는 신성 모독이나 한 민족의 언어상 타락은 악이 만연해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이 문제가 대규모로 따금하게 취급된다 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23:10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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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책과 경고(예레미야 23:33-40)

Ⅰ. 그들이 여기서 책망받는 죄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에게 대한 희롱의 죄이다. 그들은 선지자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희롱하며 거룩한 것을 웃음거리로 삼았다. 그들은 물어 이르기를 여호와의 무거운 짐이 무엇이뇨(한글 개역:엄중한 말씀이 무엇이뇨) 하였다. 이 표현은 33,34,38절에 나오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을 크게 격분시키는 말이었다.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 을 칭할 때마다 조소하고 야유하는 의미에서 "여호와의 중한 짐" 이라고 불렀다.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이 말은 선지자들이 빈번히, 그나마도 진지하게 사용하던 표현이었다. 선지자들이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얼마나 무겁게 작용하며 얼마나 중요하며 듣는 이에게 얼마나 강하게 내리루르는지그러나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거짓 선지자들의 말은 묵직한 데가 전혀 없어서 겨와 같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장중하여서 밀과 같았다. 이제 불경스러운 냉소자들은 이 말을 취하여 우스개 소리로 만들었다. 그들은 이 말을 사용할 때 백성들로 이 말에 대해 진지해지지 않도록 하려고 하였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거룩한 것을 유희와 조롱의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그 효용성을 봉쇄하려는 것이 사탄의 궤계였음을 주목하자. 하나님의 사자들을 조롱하는 것은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봉쇄하여 말씀의 의도를 좌졸시키기 위한 것이다.

2. 이 말 아마 냉소자들이 꼬투리를 잡아 선지자들에 의해 신조(新造)된 부당한 말이라고 비난하던 말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 말이 그때까지의 어떤 전통적 저자도 그런 의미로 사용한 적이 없는 말이라고 하면서 비난했을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여호와의 무거운" 짐이라고 불리운 것은 이 마지막 시대뿐이었고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의 사전에서 이런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보는 대로 다른 여러 분야에서는 보다 의미심장하고 보다 명백한 표현이라고 생각되는 경우에는 새로운 말을 자유자재로 만들어낸다. 그렇다고 한다면 신에게 관한 어휘라고 해서 신어(新語)가 나오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는 특히 이로써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언어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엄연한 사실을 관찰해야 한다.

3. 흑자는 이렇게 생각하기도 한다. 즉 여호와의 말씀을 짐이라고 할 때 그것을 모종의 책망과 경고의 말씀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위협적인 말은 또한 는 이에게 부담을 안겨다 주는 것이 상례이다(나는 이런 관찰이 언제나 유효한 지의 여부는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무거운 짐(" 엄중한 말씀")이란 말을 위선적 말투로 사용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을 모욕했던 것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이 언제나 자기들을 압제하고 희롱하며 공포에 떨게 하는 분이라고 비난하며 하나님의 말씀은 자기들을 끊임없이 불안하게 하는 것이라고 흑평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들에게 대한 무거운 짐으로 여기고는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그 말씀으로 자기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운다고 해서 언쟁을 벌인다. 이와 같이 말세의 조롱자들은 천국과 구원을 업신여기는 일면 지옥과 저주를 선포한다는 이유로 신실한 목회자들을 비난한다. 우리는 대체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가볍게 여길지라도 크신 하나님께서는 이를 주목하고 계시며 이들, 신성한 일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하고 성서의 진리를 웃음거리로 만들기 위해 성서의 언어를 조롱하는 자들을 크게 노여워하신다는 사실을 관찰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재담(才談)에는 확실히 지혜가 없으며 종내에는 그렇게 판명될 것이다. "너희는 경만한 자(원의:조롱자)가 되지 말라. 너희 결박이 우심할까 하노라" (사 28:22). 이러한 죄를 범한 자들은 세 부류의 사람들이다. 그 하나는 일부 거짓 선지자들이다. 이들은 아마 참 선지자들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도둑질하려고 했을 것이다. 또 다른 부류로는 일부 제사장들을 들 수 있다. 이들 제사장들은 참 선지자를 고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으러 나왔을 것이다. 그 다음 부류로는 일붑 백성을 들수 있는데 이들은 참람한 선지자와 제사장들한테서 하나님의 일을 우롱하는 것을 배웠던 것이다. 선지자와 제사장은 행악의 원흉이었다. 이들이 만약 그처럼 가르치지 않았더라면 백성은 예레미야와 그의 하나님을 모욕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Ⅱ. 그들은 이런 식의 참람한 발언에 대해 책망을 받으면서 동시에 보다 예절 바른 표현법도 지시받는다. 선지자들이 이 말을 더 이상 사용하지 말라고 지시를 받았다는 구절은 어디도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이 말이 이 뒤에도 오랫동안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슥 9:1; 말 1:1; 나 1:1; 합 1:1). 그러나 우리는 예레미야가 이런 의미로 그 말을 사용한 적은 전무후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여러 경우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악용한 말이나 물건은 사용하지 않는게 현명하며 그 자체는 아무 결점이 없는 표현이라 하더라도 왜곡되거나 거침돌이 될 우려가 있으면 피하는 것이 사려깊은 행동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선지자로 하여금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 (15:19)라는 자기의 규칙에 따르게 하려고 하신다. 즉 "너는 중단하지 말고 이 말을 사용하라. 그러나 그들로는 이 말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중단시켜라" 는 뜻이다. "너희가 다시는 이와 같이 외람되고 경솔한 어투로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말하지 말라(36절). 이는 너희가 사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망령되이 쓰며 악용함이니라. 그것이 불경하고 위험한 짓임은 그가 만군의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신 것을 고찰하면 알 것이다." 우리가 만약 마땅히 해야 하는 대로 하나님을 크고 선하신 분이라고 간주하려 들면 그 분께 대한 우리의 관계와 의무를 제대로 인식하려 하기만 한다면 그의 말씀을 조롱한다든지 하여 그를 감히 모욕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만군의 주요, 우리들의 하나님이자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욕한다는 것은 무례한 짓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표현해야 했는가? 그는 그들에게 이와 같이 말해 준다(37절). "너는 선지자에게 말하기를 네가 하나님께 물을 때 여호와께서 네게 무엇이라 대답하셨으며 무엇이라 말씀하셨느뇨 할지니라." 그리고 그들은 자기 이웃에게 물을 때도 이와 같이 말해야 했다(35절).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말할 때는 언제나 공손하고 진지해야 하며 하나님의 신탁에 어울리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하나님의 의사를 묻고 우리 이웃에게 무엇을 들었는지 물으며 우리 선지자들에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전언이 무엇인지 묻는 다는 것은 갸륵한 행동이다. 그러나 이렇게 할 때 유의해야할 것이 있다. 즉 정당한 목적으로 묻는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우리는 정당한 태도로 묻지 않으면 안 된다. 목사들은 교인들의 잘못된 말이나 행동을 책망할 때 그냥 책망으로 끝낼 게 아니라 보다 올바른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도록 그 방법을 가르쳐줘야 한다.

Ⅲ. 그들은 이처럼 나쁜 입버릇에 대해 충고를 받았지만 그런 악습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그들에게 완전한 파멸을 경고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셔서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 이라 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 말을 하려고 하였다(38절). 그들은 신적 권위를 얼마나 하챦게 여겼는가! 그들은 쓸데없는 말을 중단하라는 하나님의 설득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떤지 살펴보자.

1.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망령되이 쓰고"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며 악용하는 자들은 엄중한 보상을 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자들을 조롱하는 일은 하나님께 대한 큰 도발로 판명될 것이다. "내가 그 사람과 그 집에 벌하리라." 그가 선지자든 제사장이든 일반 백성이든 간에 그에게는 벌이 임할 것이다(34절).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며 하나님의 설교자를 조롱하는 것은 가족들에게 대한 파멸의 심판을 초래하는 죄이며 한 집에 저주를 임하게 하는 죄이다. 36절에는 또 다른 위험이 나오고 있다. "각 사람의 말이 자기에게 중벌(중한 짐:원의)이 되리라." 즉 이 죄악은 너무나 무거워서 이를 범하는 자를 멸망의 구덩이로 가라앉게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혀가 그들을 해하게 하실 것이다" (시 64:8).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조롱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실 것이어서 그들이 다시는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고 말할 엄두가 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희롱으로 그 말을 한다고 하지만 "횃불은 던지며 살을 쏘아서 죽이는 미친 사람" 이나 다름없다(잠 26:18, 19).

2. 하나님의 말씀은 망녕되이 사용더더라도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 무엇이뇨?" 하고 묻는다. 그러면 선지자는 "엄중한 말씀말이냐? 그것은 내가 너희를 버리리라는 말이 아니냐?" 하고 반문해야 할 것이다(33절). 이것은 바로 그들에게 부하(부하)되고 그들을 옴짝달싹도 못하게 묶을 엄중한 말씀이요, 중한 짐이었다(39,40절). "보라 내가 너희를 온전히 잊어버리며 내가 너히를 버리리라. 내가 너희를 떠날 것이며 너희에게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으리라." 참으로 비참한 자는 하나님께 버림받고 잊혀지는 자들이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우습게 알고 희롱한다. 그러나 그런 희롱은 결코 헛되이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몸서 고룩한 도성으로 삼으신 성읍이었고 그들과 그들의 열조에게 주신" 성읍이었다. 그러나 그런 성읍이 이제는 버림을 받을 것이며 잊혀질 것이다. 하나님께서그런데 그들을 자신의 친근한 백성으로 삼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그 앞에서 내어버림" 을 당할 것이다. 그들은 열국 중에서 크고 존귀한 나라였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들로 영원한 치욕과 잊지 못할 수치를 당하게 하실 것이다." 그들의 죄와 벌은 그들의 영속적인 수치가 될 것이다. 그것은 여기에 기록되어 그들의 불명예가 될 것이며 세상 끝날까지 그렇게 남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하는 자들은 비방을 받고 비천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는 때 하나님의 말씀은 칭송을 받을 것이며 명예롭게 될 것이다.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삼상 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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