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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바스훌의 죄와 운명(예레미야 20:1-6)

Ⅰ. 예레미야에게 대한 바스훌의 부당한 반감과 그 노여움의 결과(1,2절). 바스훌은 제사장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예레미야를 보호했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예레미야는 그 자신의 반열에 속했고 그와 똑같이 제사장이었던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여호와의 집 제사장이었다. 즉 바스훌은 여호와의 사역자들인 제사장들의 이익을 도모해야 했다. 그것이 그의 직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제사장은 자기가 응당 애호해야 할 사람의 박해자가 되었다. 그는 임멜(Inner)의 아들이었다. 즉 그는 제사장들 중에서 열 여섯번째 반차에 속했다(대상 24:14). 즉 임멜은 열 여섯번째 반열의 아비(조상)인 셈이다. 스가랴는 아비야 반열에 속했다고 하는데(눅 1:5) 아비야는 여덟째 반열에 시조다(대상 24:10). 그렇게 하여 이 바스훌은 21장 1절에 나오는 바스홀과 구별된다. 즉 후자는 다섯째 반차에 속한 인물이었다. 바스훌은 "성전의 유사장" 이었다. 아마 그는 "짧은 기간" (pro tempore) 동안만 유사장이었을 것이다. 즉 자기가 대표하고 있는 반차의 봉직 기간 동안에만 성전의 유사장 노릇을 했을 것이다. 즉 자기가 대표하고 있는 반차의 봉직 기간 동안에만 성전의 유사장 노릇을 했을 것이다. 아니면 그는 대제사장 바로 밑의 부대 제사장이었든지 성전 책임자(행 4:1)나 성전 경비병의 우두머리였을 것이다. 이런 그가 예레미야의 큰 원수였다는 것은 놀랍다. 하나님과 교회에 대해 신성한 의무와 관심을 표명하는 자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선지자들에게 대한 최대의 악의가 발견되었다.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칠 기회를 얻으려는 악한 목적으로 도벳 골짜기에 가서 그의 예언을 들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고서는 이 자가 예레미야와 함께 도벳 골짜기로 간 제사장의 어른 중 하나였다고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도벳에서 여호와의 집 뜰로 돌아왔을 때 바스훌이 그의 말을 직접 보고 들었을 법도 하다. 그래서 1절은 이렇게 읽을 수도 있다. "예레미야가 이 일을 예언하고 있을 때 그가 그 예언을 들은지라." 그러나 우리가 본문에서 읽는 대로 다른 사람이 그 정보를 바스훌에게 가져 왔고 그는 그 사람에게 이것저것 깨물었던 것이다. "그가 예레미야의 이 일 예언했다는 것을 들은지라." 그는 예레미야가 이런 일들을 예언했다고 듣지 참을 수가 없었다. 특히 자기가 유사장으로 있는 여호와의 집뜰에서 예레미야가 감히 자기 허락도 없이 설교를 했다는 것은 바스훌로서 견딜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교회의 권력이 남용될 때 그것은 교회를 해치는 가장 위험한 권력이 된다.

1. 바스훌은 격분하여 예레미야를 때렸다. 그는 손바닥이나 권세의 지팡이로 예레미야를 쳤다. 이렇게 친 것은 아마 대제사장이 바울을 치라고 명령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단지 예레미야를 망신시키려는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예레미야를 해칠 심산으로 많이 때렸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그는 불한당처럼 예레미야를 혹독하게 구타하였을 것이다. 농부들은 종들을 때렸다고 책망을 듣는다(마 21:35). 여기서 일을 처리한 방법은 불법적이다. 대제사장과 나머지 제사장들은 예레미야의 신임을 묻고 심사해야 마땅하였다. 그들은 회의를 열어 그가 그렇게 말할 권세를 지니고 있는 지의 여부를 조사했어야 올바른 처리를 한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공정한 규칙은 한갖 허울뿐인 형색으로 외면되고 무시되고 있다. 옳든 그르든 예레미야는 도태되어야만 했다. 경건의 원수들은 결코 공평의 법칙에 구애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2. 바스훌은 그를 착고에 채웠다. 흑자는 이 착고를 유폐 장소로만 파악한다. 즉 그는 예레미야를 투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바싹 조이는 기구로서 그에게 고통과 망신을 주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 흑자는 이것을 목과 팔에 씌우는 칼로 생각한다. 또 다른 이들은 (우리처럼) 이것을 그의 다리에 채우는 한 벌의 착고로 생각한다. 그게 어떤 기구였든지 간에 예레미야는 그 착고를 차고 밤새도록 베냐민의 윗문에 머물렀다. 이것은 여호와의 전 안이나 곁에 있었다. 아마 이 문은 예루살렘성과 성전 사이를 드나드는 통용문이었을 것이다. 예레미야는 여러 사람이 다니는 곳에서 착고를 차고 밤새도록 있는 셈이다. 바스훌은 이런 식으로 그를 징계하여 예언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바스훌이 이와 같이 예레미야로 하여금 경멸받고 얄밉게 보이도록 한 것은 그가 예언을 하더라도 존중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와 같이 극히 선한 자라도 이 각박하고 은혜를 모르는 세상에서는 최악의 대접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시대의 최대 축복이 만물의 찌끼로 간주되었다(고전 4:13). 바스훌 같은 자가 재판석에 앉아 있고 예레미야 같은 사람이 착고에 채워져 있는 것을 보면 어찌 경건한 분노가 일어나지 않으랴! 사람과 사정이 다른 국면을 띠고 나타날 다른 생이 이 생 뒤에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Ⅱ. 바스훌에 대한 하나님의 지당하신 노여움과 그 증거. 다음 날 바스훌은 예레미야를 착고에서 놓아주었다(3절). 아마 바스훌은 상례를 따라 그를 거기에 머무르게 했을 것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를 바스훌에게 말해 준다. 우리는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착고에 채웠을 때 그가 바스훌의 행위를 꾸짖었다는 증거를 찾아보지 못한다. 그는 아무 소리하지 않고 그 학대를 감수했던 것 같다. 그는 고난을 받되 위협하지 않았다(벧전 2:23). 그러나 바스훌이 그를 착고에서 풀어 주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의 입에 한 말씀을 두셨다. 그가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다면 가책을 받을 터였다. 여호와의 선지자가 매일 때에도 그의 말씀은 매이지 않았다(딤후 2:9). 우리는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치고 학대함으로써 무엇을 노렸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그가 노린 게 무엇이든지 그것은 상관없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그가 실망을 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바스훌은 그의 잘못을 꼬집어 주고 백성에게 대한 그의 명성을 감소시킬 것 같은 자를 침묵시킴으로써 자기 자리를 든든히 하며 자기를 편안히 하겠다고 생각했던가? 그러나 그는 소기의 목적을 거두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예레미야가 입을 다물더라도 바스훌 자신의 양심이 정면으로 대들고 항상 자기를 못살게 굴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확증하느라고 그는 마골밋사빔(Magor-missabib) 즉 "주의의 공포, 사방으로 두려움" 이란 이름을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이 이름을 지어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그렇게 부르신다면 그는 꼭 그대로 될 것이다. 이것은 잠언적 표현인 것처럼 보인다.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에게 고난과 절망 가운데 있다고 한다. 사면 팔방에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다윗처럼 사람운 위험에 둘러 쌓일 수도 있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않게 된다. 시 3:6; 27:3) 어디를 둘러 봐도 두려움이 있게 될 것라고 본문은 말한다. 전혀 위험이 나타나지 않을 때에라도 사람은 이렇게 될 수 있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며" (잠 28:1)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도 크게 두려워한다" (시 53:5). 바스훌의 경우가 바로 그렇게 될 것이다(4절). "보라 내가 너로 네게 두려움이 되게 하리라. 즉 너를 끊임없이 놀램을 당하게 될 것이며 네 자신의 공상과 상상으로 끊임없이 불안하게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담이 큰 죄인이라도 제 스스로 두려움을 느끼게 하실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하자.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놀라게 하여 의무 이행을 하지 못하게 하는 자들에게 두려움을 줄 수 있는 길을 찾아내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지자들로부터 자기 잘못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자들은 자기 양심한테서 그 잘못을 지적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선지자는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이지만 양심은 가슴속에서 책망한다. 양심은 기를 죽일 수도 없고 침묵시킬 수도 없다. 이와 같이 자기 자신에게 두려움이 되는 자는 불행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어떤 자는 자기 자신에게 아주 두려움이 되면서도 이를 숨기고 남들에게 명랑한 척한다. 그러나 "내가 너로 네 모든 친구에게 두려움이 되게 하리라 너는 언제나 굉장한 공포와 전율을 표시하기 때문에 네 모든 친구들은 너와 사귀지를 두려워하고 네 고통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 할 것이다." 깊은 우울증과 정신 착란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자기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도 두려움이 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좋은 이유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늘 우리 이성을 활용하게 해 주시며 양심의 평화를 얻게 해 주시기 때문이다.

(2) 바스훌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그를 실망시킬 것이다. 그들은 바스훌이 신뢰하던 자들이었다. 아마 그는 예레미야를 대적하는 일에 이들이 동조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려고 궁리하였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대적한 일로 그에게 당장 죽음의 일격을 가하시지 않으시고 그로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던" 가인(창 4:12)처럼 끊임없는 놀램 가운데서 살아가게 하신다. 그는 어디로 가든지 신적 공의의 기념물이 될 것이다. "무엇이 이 사람을 끊임없는 두려움 속에 두는고?" 하는 물음이 나오면 "그것은 예레미야를 착고에 채운 데 대한 하나님의 벌이라" 고 대답하게 될 것이다. 바스훌을 격려해야 할 그의 친구들은 모조리 멸절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 원수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그의 눈은 그것을 보게될 것이다." 그 두려운 광경을 그의 두려움을 한층 더 크게 할 것이다.

(3) 그는 결국 자기의 두려움이 무근한 것이 아니라 신의 복수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6절). 그와 그의 가족은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옮기울 것이다. 그는 요시아처럼 재앙이 이르기 전에 죽지 않고 딴 사람들처럼 살아서 이 일을 당하게 될 것이었다. 그는 포로로 일생을 마치게 될 것이며 사실상 쇠사슬에 묶은채 매장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친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바스훌의 운명은 이처럼 암담하다. 핍박하는 자들은 이 말씀을 읽고 전율을 느껴야할 것이다. 파멸의 전율을 당하기 전에 회개의 전율을 해야 할 것이다.

2. 바스훌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예레미야가 예언한 멸망을 방지할 심산이었던가? 그는 예레미야의 신망을 실추시킴으로써 예레미야가 예언한 말이 땅에 떨어지게 할 목적이었던가? 그랬을 법도 하다. 6절에 보면 그가 예언자로 자처하며 백성들에게 평강을 누릴 것이라고 말한 것같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에게 거짓 예언을 하였다." 그는 예레미야의 예언이 자기 예언과 상충하였고 자기가 좌중에서 편안히 잠재우려고 노력하던 백성들이 예레미야의 예언에 각성할 듯했으므로 예레미야를 대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었을까? 없었다. 예레미야는 유다와 예루살렘을 쳐서 예언한 자기의 말을 고수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자기 입을 통해서 그 말씀을 되풀이하신다. 자기를 책망하고 경고해 주는 자들의 입을 막음으로써 이득을 얻을 자는 아무도 없다. 왜 그런고 하니 그 말을 못하게 한다 해도 그 말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였다.

(1) 나라는 멸망할 것이다(4절). "내가 온 유다를 바벨론 왕의 손에 붙이리라." 이 나라는 오래도록 하나님의 땅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가 이 땅에 대한 권리를 느부갓네살에게 넘겨 주실 것이다. 느부갓네살이 이 나라를 소유하게 될 것이며 이 땅의 주인이 되어 이 땅의 주민들을 마음대로 처분할 것이다. 그가 더러는 칼에 붙이고 더러는 포로로 데려 가되 아무도 그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2) 그 성도 멸망할 것이다(5절). 바벨론 왕은 예루살렘 성을 약탈할 것이며 그 안에 있는 귀중품은 전부 다 바벨론으로 가져 갈 것이다.

[1] 느부갓네살은 그들의 무기고와 군수 창고(본문에서는 이 성의 힘이라고 일컫고 있다:한글 개역 성서와 다름)를 점령하여 거꾸로 그들을 대적하는 데 이용할 것이다. 그들은 이것들을 자기들의 힘으로 의지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보호 밖으로 뛰쳐나가자 이들이 무슨 소용이 될 수 있었는가? 하나님이야말로 그들의 힘이었는데도 그들은 자기들의 힘이 되신 하나님을 떠났던 것이다.

[2] 그는 그들의 모든 상품 즉 잡화와 교역품을 다 가져 갈 것이다. 본문은 이 상품을 "그들의 소득" (원래의 뜻은 수고)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그 상품들이 수고하여 얻은 것인 때문이다.

[3] 그는 그들의 아름다운 주택과 값비싼 가구들을 약탈할 것이다. 본문에서 이들을 귀물이라고 칭하는 이유는 그들이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굉장한 애착심을 가졌던 때문이다. 병정들의 손이 닿지 않는 하나님의 귀하신 약속 가운데서 귀물을 확보하는 자는 복이 있다.

[4] 그는 국고를 샅샅이 뒤져서 왕관의 보석들과 유다 왕들의 모든 보물을 가져갈 것이다. 이 사례는 누구보다 먼저 히스기야에게 경고된 재난이었다. 히스기야는 오래 전에 바벨론왕의 사신들에게 자기 보물들을 보여 주었는데 그에 대한 발로 이 재난을 경고 받았던 것이다(사 39:6). 그들은 보물이 자기들을 방어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기도도 허무한 꿈에 지나지 않았다. 보물은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대적의 손쉬운 먹이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20:2 없음.

 

20:3 없음.

 

20:4 없음.

 

20:5 없음.

 

20:6 없음.

 

20:7

선지자의 다급한 호소(1) (예레미야 20:7-13)

바스훌은 그 자신에게 두려움이 되기를 운명지워져 있었다. 예레미야는 이 시험의 순간에도 전혀 두려워하는 기미가 없다. 그럼에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육신의 약함으로 인하여 자신의 마음속으로 이상한 동요를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선한 사람이란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자들이 잘못 말하거나 잘못 행한 것을 극단적으로 주시하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의 동요와 두려움을 느끼지 말고 그것을 최대한 선용해야 한다. 이 문단에 나타나는 것은 예레미야가 바스훌에게 큰 격분을 사서 피해를 입은 순간 그의 흉중에는 은혜와 부패 간의 투쟁이 일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때 예레미야는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하나님가도 담화를 하는데 그의 담화는 약간 혼란스럽다. 우리는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보자.

Ⅰ. 여기에는 예레미야 자신에게 가해진 부당한 일과 모욕에 대한 슬픈 설명이 나오고 있다. 이 설명은 누가 뭐래도 사실 그대로 일 것이고 아무런 잘못도 없을 것이다. 그는 이 설명을 자기의 파견자에게 해 드리고 있는데 그것은 매우 지당하고 적절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설명을 들으시고 그를 끝까지 저지하시리라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1. 예레미야는 자기가 조소받고 조롱당한 것을 불평한다. 그들은 예레미야가 말하고 행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조롱하였다. 순박한 마음을 지닌 자에게는 이것이 크게 억울하고 고통스런 일이 아닐 수없다(7,8절). "나는 조롱거리가 되며 모욕거리가 되나이다." 그들은 예레미야를 놀렸다. 마치 그가 천치라고 되는 뜻 그들은 그를 상대로 깔깔거렸고 예레미야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노리개깜인듯 그들은 서로 즐거워하였다. 그는 끊임없이 조롱을 당했다. "종일토록(혹은 매일) 나를 조롱하나이다." 그는 도처에서 조롱을 받았다. "사람마다 나를 조롱하나이다." 극히 큰 자들은 자기 체통을 망각할 정도이오며 극히 비천한 자들조차 내 체면을 잊을 정도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주 예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제사장들과 백성들에게 욕설을 받으셨다. 그래서 각각의 욕설은 각자의 죄를 더 가중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이처럼 경멸과 조롱을 받게 된 것은 무엇때문일까? 그것은 다만 그가 자기 직분을 충실하게 열성적으로 수행했기 때문이었다(8절). 그들은 예레미야의 설교를 제외하면 그에게 대한 조롱거리를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치욕이 된 것은 여호와의 말씀이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라는 위탁을 받은 선지자였다. 그들은 이 여호와의 말씀 때문에 그를 명예롭게 여기며 존경해야 마땅하였다. 그럼에도 여호와의 말씀은 그들이 예레미야를 욕하고 비난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가 설교하기만 하면 그들은 그가 하나님의 교훈을 아무리 철두철미하게 지킨다 해도 꼭 이런 저런 조롱거리와 비방꺼리를 찾아내곤 했다. 하나님의 계시는 여지껏 세상이 부여받은 것 중에서 최대의 축복과 명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히 열성적 전도자와 선지자들이 그 하나님의 계시로 인해 수치를 당하는 일이 많음을 생각하면 슬프다. 그들이 예레미야를 조롱한 것은 두 가지였다.

(1) 그의 설교 태도. "그는 말할 때마다 외쳤다." 그는 언제나 활기와 사랑이 넘치는 설교자였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기 시작하면 언제나 진지하고도 열심있는 자로서 말했다. "그는 크게 외치고 아끼지 않았다" (사 58:1). 그는 자신도 아끼지 않았고 설교의 대상자들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진지해지기를 싫어하는 자들은 이런 점을 비웃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나의 일을 좋아하지 않고 불만스럽게 여기는 자들이 신적인 일에 감동하는 자들을 보고 조소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들을 때 주위를 기울이지 않고, 듣고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활기찬 설교자가 조소의 대상이 된다.

(2) 그의 설교 내용, 그는 "강포와 멸망(또는 약탈)을 부르짖었다." 그들은 서로 폭력을 휘두르며 약탈을 일삼았다. 그래서 선지자는 그들에게 이를 책망하였다. 그는 그 죄에 대한 벌로서 그들에게 강포와 멸망이 임하리라고 예언하였다. 그들은 전자 즉 책망에 대해서는 그가 지나치게 꼼꼼하다 하여 조소하였고 후자 즉 예언에 대해서는 그가 너무 경솔히 믿는다 하여 조롱하였다. 이 두 가지 일로서 그는 그들의 격분을 샀다. 그래서 그들은 그를 처치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런 일만 해도 악한 짓이었다. 그런데 예레야의 호소는 여기서 그치질 않는다.

2. 그는 그들이 해치려는 음모를 꾸몄으며 그의 멸망을 계획했다고 호소한다. 그는 나약한 인간이란 조소를 받았을 뿐 아니라 악인이라는 비방을 들었으며 정부의 위험 인물로 모략을 당하였다. 그는 이것을 억울한 일로 슬퍼한다(10절). 조소받는다는 것은 사람의 명예와 체면에 손상이 가는 일이긴 하나 쉽사리 되받아 웃어버릴 수 있는 일이다. 잘 관찰해보면 조소를 당한다는 것은 수치가 아니고 조소받아 마땅한 경우라야 수치가 된다. 그러나 예레미야에게는 보다 앙심 깊고 간교하게 행동하는 자들이 있었다.

(1) 그들은 그가 변명할 기도도 없을 때 즉 등뒤에서 그를 욕했다. 그들은 그에게 대한 거짓 소문을 퍼뜨리려고 혈안이 되었다. "나는 간접적으로 무리의 비방과 사방의 두려움(흑자는 말은 마골밋사법이라고 읽음)을 들었나이다." 무리란 말의 원의는 많은 자란 뜻이다. 바스훌 같은 사람이 많다는 말이다. 또 그들은 달리 그를 비방하였다. 그들은 예레미야가 민중의 마음에 사방의 두려움과 질투심을 주입함으로써 현 정권하에서는 불안감을 느끼도록 만들어 반란을 일으키게 하는 자라고 그릇되게 묘사했다. 또 그는 그들이 자기에게 악의를 품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래서 "그는 사방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어디로 가든지 밀고자를 두려워할 만하였다. 그들은 그를 거의 마골밋사빔으로 만들어버렸다. 이 말씀은 시편에도 원문 그대로(verbatim) 나온다.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으오며 사방이 두려움이 있나이다" (시 31:13). 예레미야는 자기의 호소 속에 다윗이 사용했던 바로 그 표현을 즐겨 채택하고 있다. 그가 이런 표현을 차용한 것은 다른 선한 사람들도 자기와 꼭 같이 수난 당했다는 것을 생각함으로써 위안을 얻고 우리도 그런 경우를 당할 때마다 다윗의 시편을 이용하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이다. 우리가 무엇을 말해야 하든지간에 우리는 여기서 말씀을 취할 수 있다. 예레미야의 원수들이 어떻게 일을 꾸몄는지 살펴보자.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또는 소문내라). 우리도 고소하리라(소문내리라) 하나이다." 그럴 듯한 이야기를 지어내는 너희나, 그를 약간 안다고 주장하는 너희가 그 소문을 한 번 내느냐? 그러면 우리는 너희에게서 들은 그 소문을 만나는 사람마다 말해 줄 것이다. 너희는 그것을 말하는가? 우리는 그것을 맹세하겠다. 너희는 그 소문을 지어내느냐? 우리는 그 소문을 따라 다니겠다." 소문을 내는 자나 퍼뜨리는 자가 이처럼 똑 같은 죄를 짓고 있다. 장물아비는 도둑질하는 자나 매 한가지로 나쁜 것이다.

(2) 그들은 그의 면전에서는 아첨을 하였다. 그 목적은 그를 고소할 수 있는 근거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스스로 의임인 체하며 그리스도께 나아온 정탐꾼과 같았다(눅 11:53, 54; 20:20). 그와 친밀한 자들도 "그의 타락하기를 기다렸으며 그가 흉허물 없이 사귀며 신뢰하던 자들도 그가 말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그의 말을 무리하게 곡해하여 악의로 해석할 수 있으며 그것을 그의 대적들에게 전했다. 자기 친구로 여기던 자들에게 배반당한 그의 처지는 매우 처량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수근거렸다. "우리가 그에게 사근사근히 말을 걸며 교묘히 그의 환심을 사게 되면 그는 꾀임에 빠져 자기가 적군과 내통 중에 있으며 바벨론 왕의 은급을 받고 있다고 실토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까진 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감언이설로 그를 속여 몇 마디의 반역하는 말을 지껄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를 고소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 잘못을 꼬집고 하나님의 심판을 들어 위협한 것에 대한 원수를 갚게 될 것이다. 비둘기의 순결이나 뱀의 지혜도 부당한 비방과 거짓 고소로부터 사람을 안전히 지키지 못한다.

Ⅱ. 여기에는 그가 받던 유혹의 설명이 나온다. 그는 이런 환난중에서도 유혹을 받고 있었다. 그는 시편 기자처럼 거의 실족할 뻔하였다(시 73:2). 그리고 환난에 쫓겨 죄를 짓게 된다는 것은 극히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느 6:13 참조).

1. 그는 자기를 선지자로 삼은 데 대해 하나님과 언쟁하고 싶은 유혹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시작한다(7절).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속이시므로(개역 성서:권유하시므로) 내가 속임을 받았나이다(그 권유를 받았나이다)." 우리가 읽는 대로 이 말씀은 가혹하게 들린다. 하나님의 중들은 하나님이 신실하신 주인이시며 결코 속이지 않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언제나 기꺼이 고백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어리석음과 부패의 언어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시면서 그를 열방 민국 위에 세우실 것이며(1:10) 견고한 성읍이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1:18). 이때 그가 만약 하늘의 사자로서 만인에게 추앙을 받으며 안락하게 살 것이란 기대를 품었다가 나중에 그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이런 말을 한다면 그것은 예레미야의 잘못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자기를 속이셨다고 말할 게 아니라 자기가 그 자신을 속였다고 말해야 옳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땅의 왕들과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그를 치리라는 것을 분명히 그에게 말씀해 주셨다(1:18, 19). 그는 이 말씀을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않았던들 그는 이와 같이 하나님을 비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 제자들을 실족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하여(요 16:1, 2) 그들이 굉장한 반대에 부딪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러나 본문은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나이다" 라고 읽는 게 옳다. 이 "권유한다" 는 말은 "하나님이 야벳을 권유하시리라" (창 9:27)는 성귀에 사용된 단어와 동일하며 "오래 참으면 관원이 그 말을 용납한다" (잠 2:15)는 말씀의 "용납하다" 란 단어와 동일어이고 호세아 2장 14절에 "개유한다" 는 단어와 꼭 같다. 그렇게 볼 때 이 말씀은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과 가장 잘 부합한다. "주께서는 나보다 강하셔서 논리로 나를 설득하셨읍니다. 아니, 주의 성령의 감화로 나를 사로 잡으셨읍니다. 주는 나를 이기셨읍니다." 예레미야는 예언자적 직분을 터맡기를 몹시 망설였었다. 그는 자신이 나이도 어리고 그런 사명을 적격이 아니라는 것을 들어 호소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탄원을 기각시키면서 "너는 가야한다" (1:6, 7)고 말씀하셨다. 이제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내게 이런 직분을 맡기신 이상 이찌하여 그 일로 내 편을 드시지 않으십니까? 내 스스로가 그 일에 뛰어든 것이라면 조롱거리가 되더라도 하등 이의가 없읍니다. 그러나 주께서 나는 억지로 그 일에 밀어넣으셨는데 어찌하여 내가 조롱거리가 됩니까?" 자기를 불러 선지자로 삼으시면서 어려움을 당하게 하신다고 하나님께 불평을 호소한 것은 예레미야의 약점이었다. 만일 이 일로 자기에게 올 마지막 영예를 참작하기만 했더라도 그는 이런 호소를 드리지 않았을 것이다. 최후의 영광은 그가 지금 당하고 있는 현재적 모멸을 상쇄하고도 남을 터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길, 곧 의무의 길 위로 걸어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종종 바라본다. 특히 우리가 의무의 길로 행하는 동안 어려움과 좌절에 부딪칠 때 자신의 모습을 돌아다 보다 그길로 발을 딛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후회한다면 그것은 약하고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2. 그는 자기 일을 단념하고 싶은 유혹을 들었다. 그는 하나님의 위탁을 수행하는 가운데 많은 곤란과 애로를 당하였다. 그것도 부분적 이유였다. 또 다른 한편으로 그는 유다 민중과 그 지도자에게 보내심을 받았으나 그들이 교화되고 개선되긴 커녕 악화되고 분격하게 되었다는 데에도 그가 이런 유혹을 받게 된 이유가 있었다(9절).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함으로써 나를 위해서나 그를 위해서 불명예와 치욕밖에 얻은 게 없으므로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내가 말하는 일의 장본인으로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고 말하였나이다." 나약한 목사는 자기들의 설교가 경시당하고 전혀 효과가 없다고 깨달으면 더 이상 설교하지 않겠다는 강열한 유혹을 받게 된다는 점에 유의하자. 그러나 교인들은 자기들의 목사를 이런 시험에 빠지게 만들까봐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목사들이 화가 치밀어 올라 다시는 우리들에게 수고하지 않겠다고 말하게 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께서도 그들이 다시는 너희들에게 수고하지 않으리라" 고 말씀하시도록 성나게 해드려서는 안 된다. 그럴러면 우리는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한편 목사들은 이런 유혹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자기 의무의 길로 매진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실망과 좌절을 당하더라도 목사는 계속 자기 의무에 집착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더욱 감사할 만할 일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모이지 않을지라도 그들은 영화롭게 될 것이다.

Ⅲ. 여기에는 그가 시험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직분을 충실히 고수하고 즐겨 하나님께 의지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1.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 안에서 강력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기 일을 그만 두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그로 하여금 자기 일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내가 다시는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고 급히 말했나이다. 내 마음에 발표할 게 있더라도 나는 그것을 억눌러서 발설하지 않으리라고 말했나이다. 그러나 나는 곧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친다는 것을 알았나이다. 그 불은 내부에서 타올라 밖으로 새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나이다. 그 불은 꿀 수가 없었나이다. 나는 열이 불덩어리 같은 자가 되었나이다. 나는 불안했고 끊임없는 동요 가운데 있었나이다.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하지 아니하니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웠고 그것은 내게 근심과 고통이 되었나이다. 그래서 내가 시원해지기 위해서는 말을 해야 되겠나이다(시 39:2, 3; 욥 32:20).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내 뼈가 쇠하였나이다(시 32:3)." 예언의 영에 따라 활동하는 자가 자신을 잊게 만들 것이다. "나는 믿는 고로 말하였다" (고후 4:13). 예레미야는 이윽고 설교하고 싶어서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었고 자신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충성된 목회자들에게 있어서는 침묵을 지키는 것보다 고통과 공포를 가져다주는 것도 없다. 그들의 확신은 이런 종류의 유혹을 곧 눌러 버릴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 전파가 내게 어떤 대가를 요구하더라도 내가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9:16). 그리고 우리의 부패한 것을 눌러 이길 만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강력하게 작용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자비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계심을 확신하였다. 하나님의 임재는 그에게 대한 대적들의 모든 기도를 분쇄시키기에 충분하였다(11절). "그들은 우리가 그를 이기리라고 말한다. 그날은 분명코 우리의 날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이기지 못할 것이며 형통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다. 나는 그들을 죄다 무시해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나와 함께 하시며 내편에 계셔서 그들을 대적하시며 그들의 모든 궤계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때문이다(롬 8:31). 여호와는 나와 함께 하셔서 나를 후원하시고 현재 중한 짐으로 압박당하고 있는 나를 지탱해 주신다. 그는 나와 함께 하셔서 내가 전하는 말씀이 나의 바램과는 부합하지 않더라도 그의 의도와는 일치하게 만드신다. 그는 강하고 두려운 분으로서 나와 함께 하사 그들을 두려움으로 치셔서 그들을 정복하신다." 하나님의 두려운 점도 그를 신뢰하는 종들에게는 진정한 위안이 된다는 데 주목하자. 하나님의 두려우심은 자기 백성을 두렵게 하려고 꾀하는 자들에게만 두려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전단을 열었고 하나님은 강하신 하나님이었다. 예레미야는 자기처럼 위임받은 자를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강하신 하나님께서 두려운 하나님으로 군림하신다고 믿었다. 자기가 주위 사람들을 벌벌떨게 한다고 생각하거나 아무 것도 겁날 게 없다고 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두려우실지 모른다. 우리가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 두려운 용사처럼 나타나심을 보게 될 때에는 우리의 가공스러운 대적도 초라하게 보인다(느 4:14 참조). 예레미야는 이제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면 나를 박해하는 자가 넘어질 것이어서 나를 따라잡으려고 나서도 나를 붙잡지 못할것이다(시 27:2 참조). 그렇게 되면 그들은 자기들의 무능한 악의와 헛된 시도를 크게 수치스럽게 여길 것이다. 아니, 그들은 자기들의 수치와 당황을 영원히 잊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들 자신도 그 일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이 일을 생각할 때마다 그것은 그들에게 항구적으고 지속적인 괴로움이 될 것이다. 남들도 이 일을 잊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지울길 없는 수치가 될 것이다."

3. 그는 하나님께 그들의 의로우신 심판관이 되어 주시기를 호소하며 선지자 자신의 신원을 위해 판결을 내려 주시도록 기도한다(12절). 예레미야의 심관(神觀)은 이렇다. 하나님은 의인을 시험하며 의인을 인지하시고 그들의 이해가 걸려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알아보시고 살펴보시는 신이란 것이다. 하나님은 편파심을 갖고 의인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지는 않으신다. 그는 의인을 시험하사 그들에게서 옳은 점을 발견하시고 그들의 박해자가 그른 행동을 했으며 의인에게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을 규명하신 뒤에라야 그들에게 유죄 선고를 하신다. 의인을 심리하시는 분께서는 불의한 자도 역시 심리하신다. 그는 이 두 가지 일에 다 적격이시다. 왜냐하면 그는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생각과 애착, 목적과 의도를 확실히 아신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의 언어와 행동에 대해 오류가 없는 판결을 내리실 수 있다.

(1) 선지자는 여기서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법정에서 자기 사정을 호소한다. "여호와여 내가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나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룀이 없으면 그 사건의 진장과 공과를 완전히 아시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내 놓는 송사를 그 앞에서 개진(開陳)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그 사건의 전말을 죄다 아신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우리에게서 아시기를 원하신다. 그는 우리가 그것을 일일히 아뢰도록 허락하시는데 이것은 하나님 자신이 감동되시기 위해서 그러시는 게 아니라 우리들이 감동을 받도록 하시기 위해서 이다. 우리가 억압받고 무거운 짐에 억눌려 있을 때 우리 일을 하나님께 아뢰고 우리의 억울한 점을 그 앞에 쏟아 놓으면 우리 심령이 편안해진다는 것을 명심하자.

(2) 그는 하나님께서 시정해 주시리라고 기대한다. "주께서 그들에게 보수하심을 나로 보게 하옵소서. 당신이 그들을 깨닫게 하고 제 누명을 바로 잡기에 적당하다고 생각되시는 복수를 내리소서. 박해자를 벌할 때 사용하시는 복수를 그들에게 내리소서." 어떤 피해를 입었든지 간에 우리를 스스로 복수하려고 궁리해서는 안 되며 그 복수를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사실 유념에 하자. "보수는 하나님의 것이며" (신 32:35; 히 10:30) 그는 "원수 갚은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롬 12:19)고 말씀하셨다.

4.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시기 위해 나타나시리라는 것을 완전히 신뢰하여 크게 기뻐하고 하나님을 천양한다(13절).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시는 위로를 만끽하고 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으며 그의 약속에 의지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기쁨이 넘쳐서 자타를 막론하고 하나님께 그 영광을 드리도록 촉구한다.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그가 이 담화를 시작한 이래 여기서 그에게는 큰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구름은 걷히고 그의 불평은 전부 잠잠해져서 감사로 바뀌고 있다. 이제 그는 불신하던(7절)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고 있다. 그는 다시는 말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던(9절) 그 이름을 직접 찬양하기 위해 떨쳐 일어나고 있다. 이런 복된 변화를 일으킨 것은 믿음의 활기찬 움직임이었다. 믿음은 그의 한숨을 찬미로 바꾸었고 그의 전율을 승리로 변화시켰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써 그에게 대한 우리의 소망을 표현하고 그에게 노래함으로써 우리의 찬송을 나타내는 게 온당하다. 찬송 제목이 된 것은 "그가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다" 는 것이다. 그는 특히 자기 자신 즉 자기의 가난한 영혼을 의미하고 있다. "그는 이전에 내가 곤란을 당하고 있을 때 나를 구원하셨으며 근자에는 바스훌의 손에서 나를 건지셨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나를 구원하실 것이다(고후 1:10). 내가 이처럼 핍박받을 때 내 영혼은 죄에 빠질 위험에 처하는데 그는 내 영혼을 그 죄로부터 구원하실 것이다. 그는 나를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다. 그래서 저희는 소기의 목적을 거두지 못할 것이며 그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선행에 충실한 자들은 악행에 애착하는 짖궂은 자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들에게는 믿고 의지할 하나님이 계신 까닭이다. 그 하나님은 선행자들을 보호의 손길 아래 두고 계시며 악행자들을 견재의 손길 아래 두고 계신다.

 

20:8 없음.

 

20:9 없음.

 

20:10 없음.

 

20:11 없음.

 

20:12 없음.

 

20:13 없음.

 

20:14

선지자의 다급한 호소(2) (예레미야 20:14-18)

도대체 이것은 무슨 뜻인가?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 것인가?(약 3:10)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13절)고 그토록 즐겁게 말했던 자가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다면" (14절)하고 이렇게 분연히 말할 수가 있는가?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앞에 나온 말씀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록했듯이 여기에 나오는 말씀은 자신의 수치를 위해 기록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는 착고에 채워져 있는 동안 굉장한 흥분 상태에 있었다. 그러다가 믿음과 소망으로 다시 자기 정신을 되찾았다. 따라서 본문 말씀은 그가 나중에 새로운 시험에 빠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기 보다 이전의 그 시험을 언급하는 것인듯하다. 이것은 "내가 경건한 중에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나이다" (시 31:22)라고 한 다윗의 기도와 같다(시 27:7 이하 참조). 은혜가 승리했을 때 이전에 부패와 싸우던 기억을 더듬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들 자신과 자신의 어리석음을 부끄러워할 수 있고 우리의 말대로 받아들이지 않으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미할 수 있으며 이 일을 거울삼아 우리 심령에 대한 경각심을 배나 높일 수 있다. 선지자는 천우신조로 이 유혹을 이길 수 있었지만 우리는 그 유혹이 얼마나 강렬했으며 그가 얼마나 그 시험에 굴복하고 있었는지 살펴보자. 이는 우리가 어느 때든 육신이 약하여 이같은 시험을 당하더라도 낙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Ⅰ. 이 시험 중에 선지자가 사용한 언어는 어떤 것이었는가?

1. 그는 곤고한 욥이 그랬던 것같이(욥 3:1) 자기 생일을 불명예스런 날로 낙인찍는다.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다면, 그 날은 슬픔의 시작이었고 이 모든 불행으로 통하는 입구였기에 내게는 흉한 날이었다" (14절). 이것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하였다는 그의 바램이다. 지옥에 있는 가룟 유다는 그런 소원을 품을 만한 이유가 있지만(마 26:24) 땅 위의 어떤 사람도 그렇게 바랄 만한 까닭이 없다. 왜냐하면 그 어떤 사람도 자기가 긍휼이 그릇이 될는지(롬 6:23) 알 수 없는 까닭이다. 하물며 선한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랴! 어떤 사람들은 해마다 생일이 돌아 오면 기쁨으로 맞는다. 이에 반해 그는 자기 생일을 우울한 날로 간주하려 하며 자기 생일을 슬픔으로 지키려 하고 흉한 날로 간주되게 하려고 한다.

2.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 생남 소식을 전한 사람을 저주하였다(15절). 그의 아버지는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아마 첫 소생이었을 것이다) 매우 기뻐했을 것이다. 특히 그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는 더 기뻤을 것이다. 제사장 가계 출신이었으므로 그는 살면서 하나님의 제단에 봉사하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 생남의 기별을 해 준 자를 가차없이 저주하고 있다. 자기 아버지가 전갈을 듣자 고맙다는 인사를 했을 텐데도 그는 그 사람을 저주하고 있다. 가터커(Gataker) 선생은 다음과 같이 잘 관찰하고 있다. "부모들은 왕왕 자녀의 출생을 매우 기뻐한다. 그러나 만약 태어난 아이들이 어떤 불행을 당할지 예견하기만 하더라도 부모들은 기뻐하기는 커녕 오히려 슬퍼할 것이다." 예레미야는 자기의 탄생 소식을 기별한 자에게 대해 아주 거침없이 그리고 지독하게 저주를 퍼붓는다(16절). "그 사람은 여호와께서 훼파하시고 후회하지 아니하신 소돔 고모라 성읍같이 되었으면." 하나님께서는 소돔 고모라는 불행을 조금도 경감시키시거나 완화시키지 않으셨다. 그들을 완전히 멸망시키시고도 후회하지 않으셨다. 그의 출생 소식을 전한 자도 그런 성읍같이 되게 해 주셨으면 좋을 뻔 했다고 그는 저주한다. 그로 아침에는, 즉 일어나자 마자 포위한 대적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게 하여 놀라게 하고 낮에는 승리의 함성을 듣게 하였더면 좋았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렇게 하여 그 사람을 끊임없이 공포 속에서 살게 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예레미야는 생각한다.

3. 그는 자기 운명이 애굽에 있던 히브리 자녀의 운명과 같지 않았다는 데에 분노를 느낀다. 그는 자기가 태에서 죽음을 당하지 않고 자기의 첫 호흡이 마지막 호흡으로 되지 않고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곧 질식사하지 않은 것을 노여워한다(17절). 그는 자기의 탄생을 알렸던 기별자가 자기를 죽이는 하수인이 되었더라면 좋았을 뻔했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는 자기를 낳아 준 어머니가 비참하게도 언제나 그를 복중에 품고 있어서 더 이상 소동을 피우지 않고 그 아기집으로 그의 매장지가 되게 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욥은 태와 무덤간의 유사성과 공통점을 시사해 준다(욥 1:21). "내가 모태에서 적신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4. 그는 자기의 현재적 재난이 이 패역한 소원들을 합리화시켜주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한다(18절).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수욕으로 보내는가? 태중에서는 숨기워서 보이지 않았고 미움을 받지 않았으며 안전하여 재앙이란 것을 알지 못했는데 어찌하여 거기서 나와 가지고 이 모든 수고와 슬픔을 보며 나의 날들을 수욕으로 보내는고? 끊임없이 괴롬을 당하고 학대를 당하며 내 인생을 환난 속에서 보낼 뿐만 아니라 그 환난으로 말미암아 내 삶을 허비하고 소멸시켜 버리는가?"

Ⅱ. 우리는 선지자의 이런 말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이 말씀이 기록된 것은 우리에게 본받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좋은 교훈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이다.

1. 인생살이의 허무함과 삶에 수반되는 헛수고를 관찰하자. 만일 이 생 뒤에 다른 삶이 없다면 우리는 몇 번이고 이런 유혹을 받아 이 생을 알지 못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소원을 가질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갖는 우리의 날은 얼마 안 되는 데다가 그나마도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2. 죄많은 정욕의 우매성과 불합리성을 관찰하자. 정욕과 혈기를 가만 놔두면 그것이 얼마나 비이성적일 말을 하는지 잘 살펴보자. 생일을 저주하고 기별할 말 때문에 기별한 자를 저주하다니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자식이 자기 어미의 해산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야만스럽고 짐승적인 일인가!(사 45:10 참조) 우리는 남들이 이런 소원을 한다면 십사리 그 우매성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서 경고를 받아야 한다. 즉 그들의 일을 귀감으로 삼아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무절제의 혈기와 정욕을 억제하고 이들을 처음에 질식시켜 버리며 악한 영이 말하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마음이 뜨거울 때 혀에는 재갈이 먹여야 한다(시 39:1, 2).

3. 선한 사람도 약점을 가진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선한 자라고 해봐야 고작 인간에 불과하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들이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조심을 해야 하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라고 날마다 기도해야할 필요성이 얼마나 많다는 데에 주목하자.

 

20:15 없음.

 

20:16 없음.

 

20:17 없음.

 

20:18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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