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18:1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인자와 공평(예레미야 18:1-10)

예레미야 선지는 여기서 토기장이의 집으로 보냄을 받는다(그는 그 집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알고 있었다). 이는 전에 예루살렘 성문으로 보냈을 때처럼 설교를 선포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설교를 준비시키기 위해서였다. 아니, 준비된 설교를 수령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예레미야의 경우처럼 설교를 직접적인 영감으로 받는 자들은 무엇을 설교해야 할지 연구할 필요가 없었다.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그리고 그 토기장이가 어떻게 일하는지 관찰하라. 그러면 내가 거기서 은밀한 속삭임으로 내 말을 네게 들리리라. 너는 거기서 백성에게 전할 메시지를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자 하는 자들은 그가 지정하시는 것들을 관찰해야 하며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곳에 참석해야 한다. 예레미야 선지는 하늘에서 보인 것을 결코 거스리지 않았다(행 26:19). 그러므로 그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주목한즉 토기장이는 녹로로 일을 하고 있었다(3절). 토기장이그런데 자기가 하기 좋을 대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나마 아주 손쉽게 그리고 눈깜짝할 사이에 해치우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한 가지의 형태로 만들려고 의도했던 진흙 덩어리가 너무 굳거나 그 안에 돌이 들었거나 아니면 이런 저런 이유로 그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자 그는 즉시 그것을 다른 형태로 바꾸었다(4절). 그것이 귀히 쓰는 그릇이 되기에 합당치 않으면 토기장이는 자기 의견에 선한데로 그것을 천한 그릇이 되게 할 것이다. 예레미야는 아마 토기장이가 어떻게 일하는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즉 토기장이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그릇을 만들며 그것도 아주 쉽사리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을 법하다. 그러나 그는 가서 그 일을 관찰해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는 그가 이 일을 새삼스레 생각함으로써 하나님이 나타내고자 하시는 진리를 보다 쉽사리 그리고 분명히 이해하도록 해서 백성에게 보다 알기 쉽게 설명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은 "자기 종 선지자들을 빙자하여 비유를 베푸셨다" (호 12:10). 선지자들은 자기가 베푸는 비유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목회자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이야기하고 성서의 비유를 설명해야 하는 자이다. 그가 만약 신적인 일을 보다 분명하고 자상하게 말할 줄 알고 비유의 해설을 터득한다면 이 세상의 생활 문제를 적절히 이용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갖고 있는 모든 지식을 이모저모로 자기 직업에 유용하도록 활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예레미야가 백성에게 전하라고 토기장이 집에서 위탁받은 메시지를 무엇인지 살펴보게 된다. 예레미야가 토기장이의 일을 주의 깊게 응시하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속에 두 가지의 큰 진리를 넣어 주셨고 그는 이 두 가지를 이스라엘 집에 전파해야 했다.

Ⅰ. 하나님께서는 권세와 능력을 갖고 계신다. 그 권세는 다툴 이가 없고 그 능력은 항거할 이가 없다. 그는 자기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자기가 좋아하시는 대로 열국과 열방을 형성하고 만드실 수 있다.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6절) 내가 힘과 정의에 있어서 너희에게 대해 절대적 권세를 소유하고 있지 않느냐?" 아니, 하나님은 토기장이가 진흙에 대해 주장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분명히 우리에게 대한 주권을 주장하실 수 있다. 토기장이는 진흙의 모양만 부여하는 데 반해 우리는 본질과 형태를 다 하나님께로부터 얻어 가지기 때문이다.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어서 그가 원하는 대로 그릇이 되듯 너희는 내 손에 있으니라." 이 말씀이 암시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해 명명백백한 절대권을 소유하시는 분이라는 것. 하나님은 우리에게 채무자가 아니시다. 그래서 그는 자기 생각에 적당하신 대로 우리를 처분하실 수 있으시다. 그는 우리에게 책임을 질 필요가 없고 변명할 필요가 없는 분이시다. 만일 우리가 이런 것을 논란한다면 그것은 마치 진흙이 토기장이와 언쟁하는 것 만큼이나 얼토당토 않는 짓이 될 것이다.

2. 우리를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사용하시고 바꾸신다는 것쯤은 하나님께 아주 쉬운 일이란 것과 우리는 하나님께 항거할 수 없다는 것. 손바닥을 한 번뒤집거나 녹로를 한 번 돌리면 진흙의 형태는 아주 달라져서 그릇이 되기도 하며 부수어지기도 하고 다시 새로운 그릇이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우리의 운명도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지 우리 수중에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과 다투려 해봐야 그건 쓸데없는 짓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것은 열국에 대해서 이다. 가장 슬기로운 민족이나 가장 강한 나라도 하나님이 원하셔서 그렇게 만드신 것이지 달리 무슨 이유는 없다. 욥은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살펴보자. "그는 만국을 커지게도 하시고 다시 멸하기도 하시며 열국으로 광대하게도 하시고 다시 사로잡히게도 하신다" (욥 12:23; 시 107:33 이하 참조; 욥 34:29 와 비교하라). "하나님께는 열방이" 곧 닦아낼 수 있는, "통의 한 방울 물같고" 훅 불어버릴 수 있는, "저울의 적은 티끌 같다" (사 40:15). 그러므로 토기장이가 진흙을 만지듯 하나님께서 열국을 자유자재로 요리하실 수 있으시다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3. 하나님은 결국 어떤 자로부터도 자기 영광을 손상받지 않으실 분이며 그들이 만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들 때문에라도 영광을 받으실 눈이라는 것. 만일 토기장이의 그릇이 한 가지 용도에는 못쓰게 되더라도 딴 용도에는 쓸모가 있을 것이다. 그들이 자비의 기념물은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공의의 기념물은 될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잠 16:4). 하나님은 우리를 흙어서 지으셨다(욥 33:6). 아니,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 손에 들어있는 진흙과 같다(사 64:8).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토기장이가 흙에 대해 가지는 것과 동일한 권세는 우리에게 대해 소유하고 있지 않으시겠는가? 진흙이 토기장이의 지혜와 의사에 따라야 하듯 우리는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지 않는가?(사 29:15; 45:9)

Ⅱ. 하나님께서는 항상 공평과 인자의 철칙에 의지하여 이 권세와 능력을 행사하신다. 그는 통치권을 행사하시는 가운데 은총을 베푸시는 분이다. 그는 결코 전단적 권력으로 벌하시지는 않으신다. 그의 오른손은 높으시지만 그는 높은 손(강압을 의미)으로 다스리진 않으신다(시 89:13). 그러므로 바로 다음에는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를 앞서 행하나이다" (시 89:13)란 말씀이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전제적 권력을 주장하시며 무슨 일이든지 행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신이 의롭고 자비로운 재판관으로 행세하시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납득시키신다.

1. 하나님이 심판의 길에서 우리를 치러 오실 때 우리는 그것이 틀림없이 우리 죄 때문이라고 믿어 무방하다. 동시에 우리는 국가적으로 회개하면 심판의 진행이 저지되리라는 것을 확신해도 좋다(7,8절). 하나님께서 어느 민족을 뽑으리라 하신다고 하자. 그 민족의 안보의 울타리를 뽑아서 무방비 상태로 만들고 그 민족을 장식해 주고 부유케 해 주던 과일 나무들을 뽑아서 황량하게 만들며 그 민족의 철옹성들을 파하여 대적들로 마음대로 들어오게 하신다고 하자. 그 거민들을 쫓겨나지 않을 수 없게 하셔서 포도원이나 성읍이 훼파되듯 그 민족을 멸하신다고 하자. 이 경우, 만일 그 민족이 그 경고를 받아들여 자기 죄를 회개하고 생활을 개선하며 각자가 악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면 하나님께서는 은혜로이 그들을 영접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논쟁을 중단하시고 자비로 그들에게 돌아오실 것이다. 비록 자신의 마음은 바꾸실 수 없다고 하시더라도 자기 길을 바꾸실 수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내리고자 하셨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신다" 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일은 사사 시대에 자주 있었다. 억압받던 백성이 회개하는 백성으로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계속 구원자들을 일으켜 주셨다.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이키자 그들의 사장은 즉각 새로운 국면을 띠었다. 니느웨의 경우도 그랬다. 우리는 예루살렘의 경우의 경우도 아주 빈번히 그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다(대하 7:14 참조). 죄악에서 진심으로 회개하면 결국 형벌의 재앙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리이다. 토기가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했을 때 토기장이는 그 토기를 새로 만들 수 있었듯 하나님은 회개하는 백성을 파멸에서 쉽사리 일으키실 수 있으신 분이다.

2. 하나님이 자비의 길로 우리를 향해 나아오실 때 만일 도중에서 그 자비가 멈추어 서기라도 한 다면 그것은 오직 우리의 죄 때문이다(9,10절). 하나님이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거나 그 민족의 진정한 세력을 신장시키거나 확립시키신다고 하자. 이 때 그 민족이나 국가는 "하나님의 밭(혹은 밭갈이)과 그의 집(또는 건축)이 된다(고전 3:9)." 하나님이 그 민족을 성운하시면 그 민족을 심거나 건설하는 일은 그대로 실행된다. 그 민족은 수가 늘고 부유하게 되며 창대하게 되고 그 무역을 번성하고 그 통치는 선한 지배자의 손에서 안정되며 국사는 모두가 형통하고 그 민족의 기업은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혜택을 잔뜩 입히고 계신 이 민족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는다면-즉 그 민족이 미덕을 상실하고 타락하며 더럽혀진다면, 경건한 신앙이 멸시와 천대꾸러기가 대며 악은 모두가 좇는 유행이 되어 악한 자는 체면이 서고 명성을 누리며 그 민족 중에는 진지한 경건이 전반적으로 쇠퇴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손바닥을 뒤집어서 그들을 치실 것이다. 하나님은 심고 계시던 것을 뽑으실 것이며 건설하고 계시던 것을 파하실 것이다(45:4). 시행되고 있던 선한 사업은 정지되며 붕괴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더 베풀려고 계획하셨던 은총이 얼마든지간에 그것은 철회되고 말 것이다. 본문은 이것을 "그에게 유익케하리라 한 선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엘리의 집에 대하여 자신의 의도를 바꾸신 것(삼상 7:1)이나 가나안의 목전에까지 인도하셨던 이스라엘을 그히 광야로 내몰았던 일에서 역역히 입증된다. 죄는 하나님과 민족을 이간시키는 대 원흉이라는 점에 주목하자. 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약속을 혜택 받지 못하게 만들며 우리의 기도가 성공을 거두지 못하도록 망쳐 놓는다. 죄는 백성에게 대한 하나님의 인자하신 의도를 꺾어버리며(호 7:1), 하나님께 대한 백성의 즐거운 기대를 무산시켜버린다. 죄는 백성의 위로를 풍비박산시키고 그들의 괴로움을 연장시키며 그들을 진퇴유곡으로 몰아 넣고 그들의 구원을 지연시킨다(사 59:1, 2).

 

18:2 없음.

 

18:3 없음.

 

18:4 없음.

 

18:5 없음.

 

18:6 없음.

 

18:7 없음.

 

18:8 없음.

 

18:9 없음.

 

18:10 없음.

 

18:11

고발당하고 위협받는 하나님의 백성(예레미야 18:11-17)

이 부분의 성귀는 앞에 제시된 진리를 유대 민족과 그들의 현재 상태에 적용한 것 같은 감을 준다.

Ⅰ. 하나님께서는 이제 유대 민족에게 대해 뽑고 파하고 멸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들의 경우는 위에서 말한 심판의 규칙과 부합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이제 너는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며 계책을 베풀어 너희를 치려 하노라 하셨다 하라" (11절). 선지자는 이렇게 말한다. "섭리의 모든 작용은 너희의 파멸을 항해 나아가고 있다. 하나님께 대한 너희 자신의 행동을 살펴 보라. 너희는 자신이 파멸을 당해 마땅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너희에게 대한 하나님의 행위를 생각해 보라. 너희는 하나님이 이런 파멸을 도모하실 만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 듯 재앙을 만드신다(본문의 내린다는 말은 만든다는 뜻이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은 목적을 이루신다.

Ⅱ. 하나님은 그들에게 회개와 개심을 권하신다. 그래서 심판의 길에 나와 있는 하나님 자신을 만나 더 이상 그들을 치지 않게 하라고 그들에게 회개를 권유하신다.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라. 그리하여(앞에 제시된 규칙되로) 하나님으로 하여금 너희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시게 하라. 그러면 녹로 위의 그릇처럼 너희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 같던 섭리가 즉시 그 형태를 달리하게 될 것이며 그 결과는 너희에게 유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경고와 섭리의 위협을 활용하여 우리 삶을 개혁할 수 있는 강력한 동기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삶 속에서 악한 길로부터 돌이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않다. 우리는 이 규칙, 이 법대로 우리의 길과 행위를 선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Ⅲ. 하나님은 그들의 완고함을 예견하신다. 그들은 이 권유가 굉장한 혜택을 가져다 줄 것인데도 불구하고 집요하리만치 이에 응하기를 거부한다(12절).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는 헛된 말이라(원 뜻은 소망이 없도다). 우리가 악한 길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가 없다고 하는데 그렇다 해도 우리는 그까짓 구원쯤 포기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도모대로 행할 것을 결심한 까닭이다. 선지자들이 우리에게 더 이상 말해봐야 그것을 쓸데없는 것이다. 더 이상 논증을 제시하거나 그 문제를 가지고 가타부타해봤자 소용없다.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우리의 길을 가리라.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리라. 우리는 결코 하나법의 구속 아래 있지 않겠노라." 죄인을 망하게 만드는 것은 욕망대로 살려는 마음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그들은 구애받지 않고 멋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고 부른다. 그러나 정작 욕망의 노예가 되는 사람은 모든 노예 중에서도 최악의 노예인 셈이다. 어떤 사람의 마음은 죄의 기만성으로 완악하게 되어 보상조차 믿으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이상한가! 아니,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기까지 한다. "우리는 자신의 도모대로 계속할 것이니 하나님은 자기의 도모대로 행하시게 하라. 우리는 모험삼아 이렇게 해보리라."

Ⅳ. 그는 그들의 괴물스런 어리석음, 곧 그들의 고집과 잘못을 고치기 싫어하는 어리석을 질책하신다. 실로 그토록 부조리한 일을 지저르는 백성도 없었다. 이성있는 백성임을 자처하면서 그토록 비이성적으로 행동하는 백성은 결코 없었다(13절). "너희는 누가 이러한 일을 들었는가 열방 중에 물어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처럼 신적계시와 신탁과 선지자들의 혜택을 받지 못한 이방인들에게 물어 보라. 니느웨 사람들은 이와 같은 경고를 받자 자기들의 악한 길에서 돌이켰던 것이다. 극히 흉악한 자라도 자기 잘못을 지적당할 때 특히 그 잘못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기 시작할 때면 최소한 개선을 약속할 것이며 잘못을 고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처녀 이스라엘은 회개를 멸시하며 양심과 섭리가 어떤 반대의 말을 하든지 개이치 않고 패역한 행동을 계속하기로 결심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처녀 이스라엘은 심히 두려운(우리 성서:가증한) 일을 행하였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정혼하셨다. 그러므로 처녀 이스라엘은 자신의 순결을 보존하고 하나님께 대한 정절을 지켜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멀리 하였으며 그에게 돌아오기를 거절하고 있다. 이것은 생각만 해도 전율을 느끼게 하고도 남을 만큼 두려운 일임을 명심하자. 범죄로 자기 형편을 슬프게 만든 자들이 개과천선(改過遷善)하기를 거절함으로써 자기 처지를 절망적으로 만든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의적인 불회개는 최대의 자살 행위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기도 몸서리쳐지는 두려운 일이다.

Ⅴ. 그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두 가지로 설명하신다.

1. 그들이 범한 죄 자체의 본질로써 그들의 우매성을 설명하신다. 그들은 우상 때문에 하나님을 버렸다. 이처럼 두렵고 가증한 일이 없다. 그들은 자신에게 대해 극히 위험한 기만을 하고 있는 셈이다(14,15절). 눈은 레바논 산중에서 녹아 가지고 흘려내린다. 그 녹아 내리는 눈은 들의 바위를 통과하여 깨끗하고 맑고 수정같은 시냇물이 된다. 목마른 나그네가 어찌 그 레바논의 눈을 놔두고 떠나겠는가? 목마른 길손이 이들 시내를 지나치면서 흐린 응덩이 물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겠는가? 아니면 "원방에서 흘려 내리는 찬물이" 한 여름의 복더위에 마다하고 "배척을 당하겠는가?" 그럴 리가 없다. 사람이 더위와 갈증으로 시달리다가 시원하고 상쾌한 시냇물을 만나면 이를 싫것 마시지 등을 돌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읽는 이도 있다. "길가는 사람이 울퉁불퉁하고 힘든 바위나 높이 쌓여 길을 통과할 수 없게 만드는 레바논의 눈 때문에 어찌 평탄하고 쉬은 나의 들을 떠나겠으며 이상한 찬물 때문에 어찌 흘러내리는 물을 버리겠느냐?" 이런 일이라면 사람들은 자기들의 유복한 시기를 알고 그걸 지킬 것이다. 그들은 불확실한 것을 택하려고 확실한 것을 버리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 백성은 나를 잊고(15절) 터진 웅덩이를 위해 생수의 근원을 버렸노라(2:13). 그들은 허무한 것 즉 우상에게 분향하였느니라. 그 우상들은 극히 허무한 것이다. 그것들은 유명무실하며 기대하는 바를 실제로 행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그들의 식견은 나그네만큼도 못했다. 심지어 그들의 지도자들조차 백성으로 실족하게 하며 백성들은 그릇 인도되는 것에 만족하였다.

(1) 그들은 옛길을 버렸다. 옛길은 하나님의 법으로 지정된 길이었으며 모든 성도들이 행한 길이었다. 그러므로 옛길은 목적지에 이르는 정도(正道)였으며 안전한 길이었다. 발만 잘 내딛으면 찾기도 걷기도 쉬운 길이었다. 그러나 이 선한 옛길의 통행을 권했을 때 그것은 그 길로 행하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말했다(6:16).

(2) 그들은 곁길을 택했다. 그들은 닦지 아니한 길로 행하였다. 그 길은 대로가 아니었다. 안전히 여행할 수 있고 바른 목적지로 인도할 왕의 공도가 아니라 더럽고 험하고 넘어지지 않을 수 없는 길이었다. 이런 게 바로 우상의 길이었다(모든 죄의 길은 그렇다. 즉 그것은 거짓된 길이며 거침돌이 가득 찬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길을 택해 걸었을 뿐만 아니라 남들도 그 길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2. 그 죄의 불행한 결과로써 그들의 어리석음을 설명하신다. 그 일 자체는 나빴다고 하더라도 기대할 만한 이익이라도 있었다면 다소 구실이라도 될 터였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가 몰고 올 직접적 결과는 "그들의 땅으로 황폐케 하고" (우리 한글 개역 성서:놀랍고) 따라서 그들 자신을 비참하게 하며(그들의 땅이 황량하게 되면 그 거민은 불행하게 될 수밖에 없으므로)그들 자신과 그 땅을 "영원한 치소가 되게 하는 것" 이었다. 따끔한 경고가 주어지는 데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자들은 치소를 받아 마땅한 자들이다. "그리로 지나는 자마다" 그 땅의 참상을 목도하고는 "놀라서 머리를 흔들 것이다." 모든 땅의 영광이었던 나라가 황폐케 됨에 어떤 이들은 기이히 여길 것이며 어떤 이들은 측은히 여길 것이고 또 다른 이들은 의기양양해 할 것이다. 그들은 조소하는 뜻에서 머리를 흔들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과 자기들의 의무를 저버림으로써 이런 불행을 초래한 그들의 어리석음을 질책할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반역하는 자들은 마땅히 주위 모든 사람의 조소를 받을 것이며 여호와를 욕되게 하였으므로 그들 자신도 치소꺼리가 될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그들의 땅이 그들을 멸망시키느라고 황량하게 되었을지라도 "내가 그들을 흩기를 동풍으로 함같이 할 것이라" 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17절). 이 바람은 흥맹하고 격렬한 바람이다. 그들은 그 원수 앞에서 이리 저리 불려 다닐 것이며 도망할 길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원수 앞에서 도망하게 될 뿐만 아니라 흩어짐을 당하기도 할 것이다. 이것은 질서정연한 퇴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를 이리로, 일부는 저리로 풍비박산됨을 의미한다. 그들의 불행을 결정에 이르게 하는 것은 "내가 그들의 재난의 날에는 등을 보이고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리라" 는 것이다. 우리가 재난을 당하고 있더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미소를 지으시고 성원하시면서 은총을 베푸신다면 우리는 너끈히 참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등을 돌리시고 당신의 불쾌감을 나타내시며 우리 기도에 귀를 막으시며 도움을 거절하시며 우리를 버리시며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 맡겨버리시며 우리한테서 멀리 떨어져 계신다면 우리는 아주 파멸이다. "주께서 자기 얼굴을 가리우실 때에 누가 감히 뵈올 수 있으랴!" (욥 34:29) 이 점에서 하나님은 그들이 자기에게 행한 그대로 행하려고 하신다. "그들이 그 등을 내게로 향하고 그 얼굴을 내게로 향하지 않았다" (2:27). 하나님께서 환란의 날에 그들을 모른 체하신다고 해도 불의한 점은 하나도 없으시다. 형통의 날에는 그들이 하나님께 무례와 불충을 나타내던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경건을 고백하면서도 불의를 행하는 자들에게 "내게서 떠나라. 내거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마 25:41)고 말씀하실 그 날에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

 

18:12 없음.

 

18:13 없음.

 

18:14 없음.

 

18:15 없음.

 

18:16 없음.

 

18:17 없음.

 

18:18

박해자들의 행동과 선지자의 기원(예레미야 18:18-23)

선지자는 과거에도 종종 그랬듯이 여기서 자기 일신상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많은 교훈을 던져 준다.

Ⅰ. 핍박자들에게 공통된 수법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우리는 예레미야에 대적들에게서 이 점을 살필 수 있다(8절).

1.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그를 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의논했다. 이는 그가 한 말에 대해 복수를 하고 정차 그의 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백성과 사역자들을 대적하는 이들은 왕왕 매우 간교하며 서로 연합하여 이들에게 해를 입힌다. 개별적인 행동해서는 경건한 신앙에 해를 입힐 수 없는 경우 그들은 일제히 보조를 같이 하여 행동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악인은 의인을 치려고 음모를 꾸민다. 가야바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우리의 복되신 구주를 치려고 그렇게 행하였다. 음부의 문(즉 권세)이 하늘 나라에 대해 펼치는 반대는 아주 다양한 저주받을 만한 계책으로 추진된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계책을 베풀어 너희를 치려 하노라" (11절)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마치 하나님께 앙갚음을 하고 무한하신 지혜자를 꾀로 이기기라도 하려는 듯이 계교로써 하나님의 선지자를 치기로 결심하고 있다. 그들은 예레미야 개인뿐만 아니라 그가 자기들에게 전한 말씀도 치려고 하였다. 그들은 교묘한 술책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선지자를 패배시키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계획을 무산시키기를 바라는 자들은 미쳐도 이만저만 미친 것이 아니다.

2. 그들은 교회에 대해 굉장한 열심을 품고 있는듯이 가장했다. 그들은 예레미야를 설교하도록 그대로 놔두면 교회가 위험하기라도 한듯 시사하고 있다.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그를 찍소리 못하게 분쇄하자. 진리의 법은 제사장의 입에 있으니(말 2:6) 우리는 거기서 율법을 찾을 것이다. 율법을 따라 거행하는 규례도 제사장의 수중에 있다. 그러니 진리의 법이나 규례의 집행도 제사장과는 뗄래야 뗄 수 없다. 지혜로운 자에게서는 모략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공공 업무는 언제나 추밀원 고문관이나 국무 위원에게 위임될 것이다. 공무의 집행은 이들의 소관사이다. 선지자에게서는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라고 그들은 말한다. 여기서 선지자라는 것은 그들 자신이 택해 세운 선지자들이었다. 이들 선지자는 그들에게 매끄러운 말로 순진한 것만 예언하며 평강의 환상으로 그들의 비위를 맞춰 주었다. 그들이 교묘하게 둘러대면서 부각시키려고 한 일은 두 가지였다.

(1) 예레미야는 참 선지자일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선지자를 사칭하는 자며 자칭 선지자로 자처하는 위장 인물이란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제사장들에 의해 위임받은 것도 아니며 다른 선지자들과 협력하지도 않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계속해서 선지자 행세를 한다면 그의 권위는 무시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예레미야가 신탁을 받은 자로 간주된다면 우리 제사장과 지혜로운 자와 선지자들의 신망을 끝장이 난다. 그러니 우리는 이들의 명예를 옹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예레미야를 억압해야 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이유이다."

(2) 예레미야의 예언은 때때로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을 비난하였으므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예언일 리가 없다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선지자와 제사장들이 모든 악행의 원흉이며(5:31) 백성들을 기만한다고(14:14) 책망하였다. 그는 그들이 "실심할 것이며 놀랄 것이고" (4:9)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수욕을 받을 것이며(8:9, 10) 제사장과 선지자들은 난뜩 취하게 될 것(13:13)이라고 예언하였었다. 이제 그것이 딴 어떤 일보다 그들을 속상하게 한 일이었던 것이다. 자기들의 선지자나 제사장과 함께 하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할 때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려고 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교회에서 하는 안내는 절대로 오류가 없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을 취하리라고 예언한 자는 거짓 선지자로 정죄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와 같이 교회에 가장 충실한 벗들이 교회를 위한 열성이란 미명하에 주륙을 당해 온 것이다.

3. 그들은 예레미야의 성가를 깎아내리기 위해 가능한 온갖 시도를 하기로 합의하였다.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를 악명 높은 자로 만들자. 그에게 오명을 덮어씌우자.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를 비천한 자로 말하여 멸시받기 쉽도록 만들고 다른 사람들한테는 위험하고 핍박받아 마땅한 자로 나타내며 모든 사람들에게 그를 용납하기에 온당찮고 역겨운 자로 모함하자." 이것이 그들의 꾀였다. 그들의 계책은 fartiter calumniari, aliquid adhoeebit-즉 다소의 비난이 그에게 달라붙으리라는 바램에서 그에게 대한 극히 악한 중상 모략을 퍼붓는다는 것이었다. 그를 시커먼 곰가죽으로 치장시키려는 것이 그들의 계교였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은 예레미야를 낚을 수가 없었다. 이 일을 획책한 자들은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 변설은 결코 미미한 중상 모략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설명은 아무리 허위라고 하더라도 방백들과 백성에게 신망을 얻었을 것이다. 이런 자에게는 정의감을 불러 일으키고 저런 자에게는 노여움을 자아내게 하여 예레미야로 그 피해를 입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혀로 때리는 채찍은 따끔한 매질이 될 뿐만 아니라 깊은 상처를 내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혀의 채찍을 피하게 된다" 는 것은 크나 큰 자비이다(욥 5:21).

4. 다른 자들에게 본을 보이기 위해 그들은 예레미야가 하는 말이 아무리 무게가 있고 하나님의 메시지로 확인된다고 해도 주목하지 않을 것을 결심했다. "우리가 그이 아무 말에도 주의치 말자." 옳든 그르든 그들은 예레미야가 말하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않고 "그의 말" 로 간주하려고 한다. 주의하지도 믿지도 않겠다는 각오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에게 무슨 유익을 줄 수 있겠는가?

5. 그들은 예레미야의 입을 완전히 막기 위해 그를 죽이기로 작정한다(23절). "나를 치기 위한 그들의 모든 계략은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들은 귀중한 생명을 찾고 있나이다." 그들이 사냥하고 있던 것은 참으로 귀중한 생명이었다. "많은 선지자들을 죽이고 그 모든 선지자를 다 죽이고 싶어했던 자여!" (마 23:27; 눅 13:34 참조)라는 이 비참한 평판은 예루살렘이 유구히 지녀 온 특성이었다.

Ⅱ. 여기서 핍박받는 자에게 공통된 구원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우리는 예레미야가 이런 가혹한 대우를 받자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살펴봄으로써 이를 알 수 있게 된다. 예레미야는 즉시 기도로 자기 하나님께 의지하였고 그럼으로써 평안을 찾았다.

1. 그는 자신과 자기 일을 하나님께서 인식하도록 의뢰한다(19절). 그들은 예레미야의 말 한 마디도 주목하여 하지 않았고 그의 호소를 용납하려 하지 않았으며 그의 억울한 고통을 눈여겨 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호와여, 나를 주의하소서(개역 성서:돌아 보소서)" 라고 그는 말한다. 신실한 목사들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사람들이 설령 그들의 설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에 주의를 기울이신다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모든 재판관이 다 그래야 마땅하듯 쌍방의 말을 듣는 공평무사한 재판관되신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 "나를 주의하실 뿐만 아니라 나로 더불어 다투는 그들의 목소리로 들어보옵소서. 그들이 네게 대해 그리고 자기들을 위해 하는 말을 들어보옵소서. 그리고 난 뒤 주께서는 보좌에 앉으사 옳게 판단하시는 분임을 나타내소서. 나와 다투는 자들이 얼마나 시끄럽게 요란하며 그들의 말은 얼마나 거짓되고 악한지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옵소서. 그래서 그들이 자신의 입으로 심판을 받게 하시며 그들의 혀로 그들 자신에게 돌아가게 하옵소서."

2. 그는 그들의 야박한 배은망덕을 호소하고 있다(20절). "어찌악으로 선을 갚으리이까? 그리고도 벌을 받지 않겠나이까? 주께서는 그들의 악에 대하여 내게 선으로 갚지 않으시겠나이까?(삼하 16:12)"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은 인간적이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짐승이하는 짓이다.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기독교적이요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적이다. 이것은 너무나 엉터리없이 약한 짓이어서 우리는 하나님이 보수해 주시리라고 생각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행한 적대 행위가 얼마 큰 악이었는지 살펴보자. "그들은 내 생명을 해하려고 구덩이를 팠나이다." 그들은 그의 생명을 취하려고 기도(企圖)하였다(그의 목숨이 아니면 그들은 만족하지 않을 터였다). 그나마 관대한 방법으로 공공연하게 공격했다면 그가 스스로 방어할 기회를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사용한 방법은 야비하고 비겁하고 은밀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를 해하려고 웅덩이를 팠으며 이 웅덩이를 막을 담장은 없었다(시 119:85). 그러나 그가 그들을 위해 베풀었던 선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살펴보자. "내가 주의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하여 선히 말씀한 것을 기억하소서." 그는 하나님께 그들을 변호하는 중재자가 되었고 그들을 위해 자기의 천국 발언권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예레미야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최대의 친절이었다. "그는 선지자니 그가 너를 위해 기도하리라" (창 20:7). 모세는 이스라엘을 위해 자주 이렇게 중재했지만 백성들은 그와 다투었으며 심지어 그를 돌로 치자고 말했다(출 17:4). 예레미야는 그들이 멸망의 절박한 위기에 처하여 극히 필요로 할 때 이 친절을 베풀어주었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격발하여 바야흐로 여호와의 분노가 그들에게 돌격하려고 할 때 예레미야는(모세처럼, 시 106:23) 그 틈 사이에 서서 주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이켰던 것이다. 다음 사실에 주목하자.

(1) 그들은 매우 비열하였다. 어떤 사람에게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불러보라. 그 이상 나쁜 호칭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하나님을 망각한 자들이 가장 선한 친구를 몰라본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2) 그는 몹시 괴로움을 느꼈다. 이와 같은 일은 다윗에게도 있었다(시 35:13; 109:4).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시 109이하) 이와 마찬가지로 죄인들은 크신 중보자를 부당하게 취급하고 있다. 즉 그의 피가 하늘에서 그들을 위해 대언하고 있는 동안 땅에서는 죄인들이 그를 새로 십자가에 못박으며 그를 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요 10:32 참조).

(3) 그러나 그들이 자기에게 원한을 품고 있더라도 그들에게 자기 도리를 다 했다는 양심의 증언은 선지자의 위로가 되었다. 우리도 그런 재앙의 날에 마찬가지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는 온전한 자를 미워하고 정직한 자의 생명을 찾느니라" (잠 29:10).

3. 선지자는 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기원한다(21-23절). 이것은 복수심의 발로가 아니라 그들의 가증한 악에 대한 예언자적 분개심에서 이다.

(1) 그는 그들의 가족이 절량(絶糧)으로 기아에 허덕이게 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그러하온즉 그들의 자녀를 기근을 당하게 하시며 도시에 있는 자는 그 성의 포위로 말미암아 기근을 당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부모가 지은 죄에 대한 벌이 그 자녀에게 임하게 하소서."

(2) 그는 그들을 칼의 세력에 붙이시도록 기도한다. 그들이 전쟁의 칼에 별절되게 해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 대적의 손에 무엇이 들려 있든지 간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 대적의 손에 무엇이 들려 있든지 간에 하나님의 손에서는 그것이 정의의 칼이 될 것이다. "칼의 힘으로 그들을 쏟아내소서(직역하면 그렇다:역주). 그들의 피가 물처럼 헤푸게 쏟아지게 하셔서 그들의 아내로 자식없는 과부가 되게 하시며, 그들의 남편은 죽음에 잡혀가게 하옵소서(흑자는 선지자가 역병을 가리켜 사망이라고 한다고 생각한다). 이 세대의 굳센 힘이요 다음 세대의 희망인 그들의 청년은 전장에서 칼을 맞게 하소서."

(3) 그는 전쟁의 공포와 파괴가 불시에 그들을 기습하여 사로잡게 해 주시도록 기도드린다(22절). 그렇게 하여 그들의 별이 그들의 죄에 부응하게 해 주기를 기도한다. "주께서 갈데아 군대로 졸지에 그들에게 임하게 하사 그들의 집에서 부르짖음과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리게 하옵소서. 그래서 갈데아 군대가 그들과 그들의 모든 소유를 다 포획하게 하시며 그들을 포로로 삼고 그들의 재산을 약탈하게 하소서." 왜냐하면 그들도 예레미야를 이처럼 해치우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레미야가 눈치 채기 전에 그를 단번에 멸하려고 꾀하였다. "그들은 야수를 잡을 때처럼 나를 취하려고 구덩이를 팠으며 해로운 새를 잡으려는 듯이 내게 대해 올무를 베풀었나이다." 남을 올가미 씌우려고 생각하는 자들은 응당 재앙의 날에 그들 스스로가 올무에 걸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유의하자.

(4) 그는 그들을 이 죄과 대로 다루어 주시도록 기도드린다. 이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죄였다. "여호와여, 그 악을 사하지 마시며 그 죄를 주의 목전에서 도말하지 마옵소서. 즉, 그들로 자기 죄에 대한 정당한 자들의 온갖 불행 속에서 지나게 하소서."

(5) 그는 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곧 그들의 파멸로 되게 해 주식를 기도드린다. "그들로 주의 앞에서 넘어지게 하옵소서." 이것은 공의가 그들을 추적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이에서 피하려고 노력했으나 허사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들은 도망하더라도 걸려 넘어지게 될 것이며 너어지면 틀림없이 잡히게 될 것이다.

" 여호와여, 그리고 나서 주의 노하시는 때에 그들에게 행하옵소서(원문에는 "이같이" 란 말이 없다. 그리고 선지자는 하나님께 그들을 어떻게 해주시면 좋겠다는 것을 말하고 있진 않다). 주께서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대로 그들에게 행하소서. 주께서 노여워하시는 자들에게 늘 하시던 대로 그들에게 행하소서. 즉 이같이 그들에게 행하소서." 이 기도는 우리에게 본받으라고 기록된 것은 아니다. 예레미야는 선지자였다. 그는 예언의 영의 충동으로 그의 박해자들에게 확실히 임하고 있는 파멸을 예견하고 이런 기도를 올릴 수 있었다. 우리는 이런 기도를 올릴 수 없다. 우리가 만일 이 선례를 따라 그런 기도를 올리고 자신을 합리화시키려든가면 우리는 "자신이 어떤 영에 속해 있는지를 모르고 있는" 셈이다(눅 9:55, 우리 개역 성경에는 없음). 우리 주님께서는 자기의 교훈과 모범을 통해서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며 우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고 가르치셨다(눅 9:28).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도가 기록된 것은 우리의 교훈을 위해서이며 그 용도를 다음 세 가지의 가르침에 있다.



[1]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자기를 위해 기도해 준다는 것은 큰 혜택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도를 상실하는 자는 마땅히 자기에게 불리한 기도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박해는 한 민족의 불의의 잔을 급속히 채우는 죄이다. 그리고 박해는 어떤 것보다 확실하게 쓰라린 멸망을 몰고 올 것이다.

[3] 하나님과 그 선지자들의 친절과 인자에 감동되지 않는 자들은 결국 필시 이 양자의 정당한 분노를 사게 될 것이다.

 

18:19 없음.

 

18:20 없음.

 

18:21 없음.

 

18:22 없음.

 

18:23 없음.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52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01장
51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02장
50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03장
49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04장
48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05장
47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06장
46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07장
45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08장
44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09장
43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10장
42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11장
41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12장
40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13장
39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14장
38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15장
37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16장
36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17장
»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18장
34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19장
33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20장
32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21장
31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22장
30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23장
29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24장
28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25장
27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26장
26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27장
25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28장
24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29장
23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0장
22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1장
21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2장
20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3장
19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4장
18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5장
17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6장
16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7장
15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8장
14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9장
13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40장
12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41장
11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42장
10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43장
9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44장
8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45장
7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46장
6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47장
5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48장
4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49장
3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50장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Next
/ 2

All the Bibles, Commentaries and Dictionaries here have their own rights.
All rights are reserved for them, not for us. Thanks! Praise our great God, Christ Jesus!

HANGL Lingua Franca 한글 링구아 프랑카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