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의 죄(예레미야 17:1-4)
백성들은 마치 책망들을 만한 일이 없기라도 하듯 "우리의 죄악은 무엇이며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범한 죄는 무엇이뇨" (16:10)라고 물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자기들의 허물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런 설명의 요구에 대한 답변은 16장에 나왔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것에 대한 대답이 부연되고 있다.
Ⅰ.기소 내용. 즉 사실과 죄과가 죄수에게 완전히 입증된다. 그들의 죄는 너무 명백하여 부인할 수 없고 너무 악하여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정상의 참작을 받거나 판결의 저지와 경감을 가져오도록 변명할 것이 하나도 없다.
1. 그들은 "무죄" (Not Guilty)를 주장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죄는 하나님의 전지(全知)의 책과 그들 자신의 양심의 책에 기록되어 있는 때문이다. 아니, 그들의 죄는 세상 사람의 눈에 확연히 들어나 있으며 명료한 관찰의 대상이 되어 있다(1,2절). 그들의 죄는 하나님 앞에 극히 읽기 쉽고 극히 지우기 어려운 부호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의 곳간에 봉하여져 있어서 결코 잊혀지질 않는다(신 32:34). 그들의 죄를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게 기록된 것은 세월에 마멸되지 않는 것이며 욥이 말하는 대로 영영히 돌에 새겨져 있다(욥 19:23). 죄인의 죄는 그것이 사함을 받을 때까지는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하자. 우리는 죄는 회개로 우리 앞에 있게 되기까지는 늘 하나님 앞에 있다. 그들의 죄는 그들의 마음판에 새겨져 있다. 그들의 양심은 그들을 쳐서 증거하며 그들을 치는 증인 일천 명 몫을 한다. 마음에 새겨진 것은 일시적으로 은폐되거나 봉쇄되는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새겨져 있으므로 지워지지 않으며 책이 펼쳐질 때는 증거로 남아 있을 것이다. 아니, 우리는 마음 판에 호소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아마 자기 양심의 가책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혐의 내용을 증명하기 위해 그들의 제단 뿔 이상 들먹거릴 필요가 없다. 그 제단 위에는 우상 제물의 피가 뿌려져 있었다. 그리고 아마 그 영광을 위해 세워진 우상들의 이름이 거기에 새겨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이웃 또한 그들을 쳐서 증거할 것이다. 그들이 욕망의 충족을 위해 남용했던 모든 피조물도 다 그들을 쳐서 증거할 것이다. 증거를 더욱 완전하기 위해 그들의 자녀들도 그들을 쳐서 증거하게 될 것이다. 자기들의 아비들이 시치미떼고 얼버무릴 때 그 자녀들이 진실을 말할 것이다. 자녀들은 자기들이 어릴 때 그들의 부모가 데리고 갔던 단들과 아세라들을 생각한다(기억한다:원인). 그들은 우상에 대한 기억으로 꽉 차 있었으며 일찍부터 우상을 잘 알았던 것 같다. 그들은 번번히 또 아주 허물없이 그리고 아주 기꺼이 우상에 대해 얘기했던 것처럼 보인다.2. 그들은 자기들이 회개한다거나 보다 선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고 주장하지 못한다. 아니, 그들의 죄악이 부정하기 어려운 것이 듯 그들의 죄짓는 성향은 이기기 어렵고 고치기 힘든 것이다. 이런 의미로 해석하는 자가 많다(1,2절). 그들의 죄는 철필로써 하듯 그들의 마음 판에 이 새겨져 있다. 그들은 죄악에 대한 뿌리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다. 죄는 바로 그들의 본성 속에 섞여 있다. 그들의 죄는 소위 우리가 "우리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 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듯 그들에게 소중한 것이 되어 있다. 우상에게 대한 그들의 편견은 여전히 강렬하며 그들의 마음은 우상에게 대한 애착을 버리거나 감소시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채찍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들의 죄는 그들의 단 뿔에 기록되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지기 이름들을 우상에게 내어 주고 지기들이 행하여 온 것을 고수하기로 작정 한 때문이다. 그들은 밧줄로써 묶듯 자신들을 제단의 뿔에다 동였다. 2절 말씀은 완전히 다음과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즉 "그들이 자기 자녀를 생각하듯(기억하듯) 그 단둘과 아세라들을 생각하도다." 그들은 그들의 단들과 아세라들을 좋아하며 사람들이 자녀를 아주 즐거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우상한테서 즐거움을 얻으며 그것들과 헤어지기 싫어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우상과 함께 삶과 죽음을 같이 할 것이며 여인이 그 젖먹은 자식을 잊지 못하듯(사 49:15) 그들은 자기들의 우상을 잊지 못할 것이다.
Ⅱ. 기소 사실이 이처럼 완전히 증명되었으므로 심판은 승인되고 판결은 인준된다(3,4절). 그들이 이와 같이 자기 죄와 결합하고서 헤어지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들은 다음과 같은 일을 당하게 된다.
1. 그들은 자기 재물과 헤어지게 될 것이며 그들의 소유는 이방인의 수중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은 들에 있는 하나님의 산이다. 예루살렘은 평야 한가운데 있는 산 위에 축성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부유한 도성의 모든 보물로 노략을 당하게 하실 것이다. 또는 "들이 있는 나의 산아! 내가 네 재물과 네 모든 보물을 약탈의 위험 속에 드러내 놓으리라" 고 읽을 수 있다. 그 땅의 생산물과 그 도성의 비축품이 다 갈데아 인에게 탈취당할 것이란 말씀이다. 그들이 그런 것을 빼앗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그런 것으로 자기들의 우상을 섬겼으며 자기 욕망 충족의 재료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너희는 나의 산을(온 땅이 그의 산이었다. 시 78:54; 신 11:11) 죄로 인하여 너희 산당으로 화하게 하였으며 높은 메 위에서 너희 우상을 섬겼다. 그러므로 그 산당들은 이제 네 온 지경에서 노략을 당하게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로 인해 만드는 것을 노략 당하게 하실것이라는 점을 유의하자. 하나님을 수치스럽게 해드리는 일에서 우리가 무슨 위안을 얻을 수 있겠는가?2. 그들은 자기들의 기업 즉 동산 뿐만 아니라 부동산과도 헤어지게 될 것이며 낯선 이방 땅으로 사로잡혀 가게 될 것이다(4절). "너 곧 바로 네 자신(또는 너와 네게 있는 자들 즉 모든 거민들)이 내가 네게 준 기업에서 손을 떼게 될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그 땅이 그들의 산업이라는 것과 당신께서 그 땅을 그들에게 주셨다는 것을 토로하신다. 그들은 그 땅에 대해서 명명백백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그 소유권 밖으로 뛰쳐나간 그들의 우매성을 가증시키는 점이었다. "네가 소유권을 박탈당하는 것은 네 자신으로부터 말미암으며(이렇게 읽는 자도 있음) 네 잘못 때문이다." "너는 네 땅의 점유를 중지하게 될 것이며 네 땅에서 손을 떼게 될 것이다" (원의는 "중단하게 된다" 는 뜻임). 율법은 그들에게 칠 년마다 한 해씩 저희 땅을 갈지 말라(출 23:11, 원의는 "쉬게 하다" 는 뜻으로 본문에 사용된 단어도 바로 이것이다)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 율법을 준수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이 그들로 그 땅을 쉬게 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고자 하신다(그 땅이 쉬어 안식을 누릴 것이라. 레 26:34). 그러나 그것이 그들에게는 아무런 안식이 되지 못할 것이니 그들은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땅에서 자기들의 대적을 섬기게 될 것이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죄는 우리의 위안을 서서히 중지시키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우리가 누리지 못하도록 빼앗아 가버린다.
(2) 그럼에도 이 소유권의 중지는 권리의 폐기 처분이 아니다. 그들이 회개하면 그 소유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현재로는 "너희가 내 노로 맹렬케 하였다. 그 진노하심의 불은 너무나 맹렬하여 영원히 타오를 것처럼 보인다. 너희가 만일 회개치 않는다면 그 불은 영영히 타오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사의 영혼에게 공격의 손을 늦추지 않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분노이기 때문이다. 누가 그 노의 능력을 알리요?" (시 90:11)
참된 신뢰와 거짓된 신뢰(예레미야 17:5-11)
이 문단에서 선포하고 있는 것은 아주 훌륭한 교훈이다. 그것은 우리와 일반적 이해 관계가 있으며 우리 모두에게 이용 가치가 있다. 그것은 유독 유다와 예루살렘의 당시 상황을 가리키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선지자의 설교는 전부가 다 예언적이 아니라 그 중 일부는 실천적이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 대강만 읽는다고 할 수 있는 이 담화는 환란날에 그릇된 것을 의지하지 말라는 경고로서 그들에게 도움이 될 터였다. 우리는 모두 본문에서 가르쳐 주는 것을 배우자.
Ⅰ. 실망과 원통함에 대하여(5,6절). 한란을 당할 때에 피조물에게서 성공과 구원을 얻으려고 의지하는 자는 틀림없이 실망과 상심을 맛보게 될 것이다. "사람을 믿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하나님은 다른 것을 의지함으로써 자기에게 가하는 모욕을 인하여 저주를 선언하신다. 또는, 그렇게 하는 사람은 저주스럽다(즉 비참하다). 이는 그가 상한 갈대를 의지하는 때문이다. 그 상한 갈대는 그에게 실망을 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갈대는 그 손에 찔려 들어 갈 것이다(왕하 18:21; 사 36:6). 다음 여러 가지를 관찰하자.
1. 여기서 정죄되는 죄는 "사람을 믿으며" 인간의 지혜와 능력, 인자와 성실성을 신뢰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속성안에 들어가야 마땅한 것들이다. 인간은 섭리의 수중에 있는 도구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모든 행위의 주체자로서 의뢰하고 제 1 요인으로서 인간에게 기대를 건다는 것은 죄란 말이다. 그것은 "혈육으로 그 권력(원의는 팔이다)을 삼는 것" 이다. 그것은 곧 우리가 의지하는 팔(사 33:2)이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착수하신 일을 피조물에게 내어 주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인간을 자기들의 의지로 삼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보이기 위해 사람은 혈육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그는 혈육이어서 뼈나 근육이 없는 살처럼 약하고 힘이 없다. 그는 영이 없는 육체처럼 비활동적이며 영이 없는 것은 죽은 것이다. 그는 곧 부패하여 악취를 풍기는 혈육으로서 죽거나 죽어가고 있는 존재이다. 그는 끊임없이 소모되어 가고 있다. 아니, 그는 거짓되고 죄스러우며 자기의 순전성을 잃어버린 존재다. 그가 육체가 된다는 것은 바로 이상과 같은 뜻이다(창 6:3).2. 이 죄에는 흉악한 점이 있다. 이것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는 것이다(히 3:12). 인간을 신뢰하는 자는 아마 입으로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며 입술로는 하나님께 경의를 표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기들의 소망이라고 부르며 자기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나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불신하며 경멸하고 그와의 교통을 버리는 자이다. 물통에 매달려 집착하는 자는 샘을 떠나는 자이며 따라서 그에 상당하는 앙갚음을 당하게 된다.
3. 이 죄의 치명적 결과 인간을 신뢰하는 자는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6절). 그는 불모지에 생겨난 애처로운 떨기나무처럼 수액이 없고 활기가 없고 쓸모가 없고 가치가 없을 것이다. 그가 위안으로 삼던 모든 것이 그를 저버릴 것이며 그의 희망은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는 시들어버릴 것이며 스스로 낙심할 것이며 풀이 죽은 것이며 자기 주위의 모든 자에게 짓밟힘을 당할 것이다. 그는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 좋은 것을 나누어 가지지 못할 것이다. 시절이 바뀌어도 그의 사정은 변함이 없게 될 것이며 그는 "광야 간조한 곳에 거하게 될" 것이다. 그의 기대는 끊임없이 좌절당하게 될 것이다. 남들이 수확을 거둘 때에도 그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의만 믿고 자기 힘을 신뢰하며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 없이도 제 혼자 충분히 잘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지와 같이 혈육으로 자기 권력(원하는 팔)을 삼는 자로서 그들의 영혼은 위로와 은혜 속에서 형통할 수가 없다. 그들은 하나님께 열납되는 예배의 열매를 산출하지도 못하고 하나님께로서 오늘 축복의 열매도 거두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건조한 땅에 거하는" 자들이다.
Ⅱ. 하나님을 자기들의 신뢰로 삼는 자들이 누릴 풍성한 만족에 대하여. 이런 자는 하나님의 섭리와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며 언제나 자신을 하나님께 의뢰하며 그의 인도하심에 따른다. 그리고 극히 불안정한 시기에도 하나님과 그의 사랑 안에서 편히 쉰다(7,8절).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우리에게 요구되는 의무는 여호와를 의지하라는 것이다. 즉 여호와께 대한 우리의 의무를 행하며 그 의무를 행할 때 그가 우리를 붙들어 주시리라고 그를 신뢰하라는 것이다. 피조물과 제 2원인(조물주 곧 제 1원인에 대칭되는 말임)이 우리를 기만하거나 위협하며 우리에게 거짓되이 행하거나 사납게 대할 때에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뢰하라는 것이다. 우리를 낭패케 하는 자의 자리를 대신 메꾸어 주고 공격하는 자로부터 우리는 보로해 주는 데 부족함이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맡기라는 것이다. 그것은 "여호와를 우리의 소망으로 삼는" (한글 개역 성서:" 여호와를 의뢰하는")것이며 그의 은총을 우리가 바랄 좋은 것으로 삼는 것이고 그의 권능을 우리가 소망할 힘으로 삼는 것이다.2. 이런 의무를 행할 때 따르는 위안. 이렇게 행하는 사람은 "물가에 심기운 나무와 같을 것" 이다. 그는 가장 좋은 토양에다 심어놓고 여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엄선된 나무와 같아서 사막의 떨기나무와는 천양지차가 있다. 그는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는 나무와 같을 것이다. 그는 뿌리를 뻗어 내림으로 든든히 서게 되고 강변에 뿌리를 뻗침으로 풍부한 수액을 빨아올릴 수 있는 나무와 같다. 이것은 하나님을 자기 소망으로 삼고 의뢰하는 자가 얻을 확고한 위치와 위로를 의미한다. 그들은 편안하며 즐겁고 줄곧 안전과 심적 평정을 누린다. 이렇게 심고 이렇게 물주는 나무는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여름철의 타는 듯한 무더위에도 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 뿌리로부터 올라오는 수분 공급이 너무나 원활하여 그 나무는 한재가 와도 충분히 보존될 것이다. 하나님을 자기 소망으로 삼고 의뢰하는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그들은 그 잎이 시들지 않고 항시 청청한 나무와도 같아서 그 신망에 있어서나 안락함에 있어서 더욱 더 형통할 것이다. 그들은 제 스스로도 유쾌할 것이요 남 보기에도 아름다울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신망을 돌림으로써 하나님을 존귀하게 해 드리는 자들은 하나님께도 존귀하게 해 주실 것이며 늘 푸른 나무처럼 자기 사는 곳의 자랑꺼리와 기쁨이 되게 해 주실 것이다.
(2) 그들은 내적 평화와 만족감을 견지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강우량이 부족한 때에도 즉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을 것" 이다. 나무는 자체 내에 씨앗을 가지듯 자신의 습기를 갖는다. 하나님을 자기 소망으로 삼아 의뢰하는 자는 이 세상의 모든 위안물이 없어진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을 다 보충하고도 남을 만한 것을 하나님한테서 얻게 된다. 우리가 샘 근원을 소유하고 있는 한 물통이가 깨졌다고 해서 안달을 낼 필요가 없을 것이다.
(3) 그들은 성결한 생활과 온갖 선한 행실로 많은 결실을 맺을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에게서 힘과 은혜를 유도해내는 자는 결코 그 "결실이 그치지 않을 것" 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타인의 혜택과 자신의 이익에 이바지할 수 있는 능력이 결코 없어지지 않고 계속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Ⅲ. 인간의 죄많은 마음과 그것을 항시 감찰하시는 하나님께 대하여(9,10절). 인간을 신뢰하는 것이 어리석은 까닭은 인간이란 약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거짓되고 속임수가 많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으므로 그렇게 하는 자에게 주시겠다고 여기에서 약속하는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들 자신은 바로 우리 마음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마음이 딴 어느 것에 못지 않게 우리를 많이 속이는 일이다. 피조물이 웃거나 찡그리는 데 따라 우리의 희망과 불안이 오르내린다는 사실에서 나타나듯 실제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지 않으면서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1. 다음 몇 가지는 대체로 사실이다.(1) 우리 마음에는 악한 것이 있다. 우리 자신도 그 악함을 모르며 우리 마음속에 악한 것이 있을 줄은 눈치채지 못한다. 아니, 자신을 또는 적어도 자신의 마음을 실제보다 훨씬 선한 줄로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공통된 잘못이다. 마음 즉 타락되고 부패한 상태에 있는 인간의 양심은 만물보다 심히 거짓된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간교하고 거짓된 것이다. 마음은 속이는 경향이 있다(속인다는 이 말의 고유한 뜻을 궤홀로 사취하거나 대신 들어앉는다는 의미이다). 야곱이 속여서 빼앗는 자란 이름을 얻게 된 것도 바로 이런 마음 때문이었다(창 27:36). 마음은 악을 선이라, 선을 악이라 부르고 사물을 거짓되게 꾸미며 평강하지 않는 자들에게 평강하다고 외친다(렘 6:14; 8:11). 사람들은 자기 심중에 이르기를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지도 않으시며 갚지도 않으실 것이라는 마음의 속삭임을 묵인한다. 그들은 그대로 계속 행해도 별 탈이 없을 것이라는 마음의 속삭임에 귀가 솔깃해 한다. 이런 일이나 이와 유사한 수 천가지 암시를 하는 마음은 사특하다. 이런 마음은 인간을 속여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만든다. 마음의 죄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은 그들이 자기 기만자와 자기 파괴자가 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마음은 이 점에서 심히(원의:절망적으로) 부패한 것이다. 마음은 치명적이며 절망적이다. 다른 여러 기능의 과오를 교정해야 마땅할 양심이 허위를 만들어내는 장본인이 되며 망상을 일으키는 원흉이 된다고 할 것 같으면 병세는 실로 악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병세는 비탄할 만한 상태에 있어서 구제의 가망이 없다. 여호와의 등불이 되어야 할 심령이(잠 20:27) 거짓된 빛을 비추며 그 사람의 이익을 부지하도록 하나님께로부터 위탁받은 영혼의 대리자가 배신하여 외면한다면 그 사람은 어찌될 것인가? 마음의 기만성을 이토록 심하기 때문에 우리는 실로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누가 능히 마음의 악함을 묘사할 수 있으리요?" 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시험의 순간이 이르면 우리 자신의 마음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지 못하며(히스기야나 베드로도 자기 마음을 알지 못했다) 우리 마음속에 어떤 부패한 기질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르며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많은 일에서 곁길로 나아갔는지도 알지 못한다. 누가 능히 자기 자신의 잘못을 깨닫겠는가? 하물며 남의 마음을 어찌 알겠으며 남의 마음을 어찌 의지할 수 있으랴!
(1)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속에 어떤 악이 있든지 간에 그것을 보고 계시며 알고 계시며 완전히 통달하고 계시며 평가하고 계신다.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느니라." 이것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 즉 마음의 모든 생각이나 모든 의도에는 다 적용된다. 번개처럼 빨리 스쳐가는 생각이나 우리가 극히 무심하게 지나쳐버리는 생각까지도 다 하나님은 살피시며 극히 은밀한 의도, 즉 극히 교묘하게 위장되거나 은폐된 의도조차 하나님께서는 감찰하신다. 인간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은 속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꿰뚫으시는 눈으로 심장을 살피시며 폐부(본문:혈관)도 감찰하신다. 그는 자신이 발견하시는 것을 판단하시며 모든 것의 진면목과 사실 그대로의 비중을 평가하신다. 금의 순도가 표준치에 달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시험하거나 죄의 유무를 알아보기 위해 죄수를 심리하듯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시험하신다. 그가 마음을 이렇게 심사히는 것은 그 사람에게 심판을 내리시기 위해서 이다. 그것은 곧 각각 그 행위대로 보응하시기(원문:모든 자에게 그의 행한 길대로 갚아 주시기) 위함이다. 걸어온 인생 행로의 공과(功過)와 경향을 따라 생명의 길로 행한 자에게는 생명을, 멸망자의 길을 고집한 자에게는 사망을 주시기 위함이다. 또 그것은 행실대로 보응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기의 말씀에 의해 거둔 행위의 열매대로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을 주시고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저주는 내리신다. 하나님은 심판관이시며 그만이 홀로 심판관이 되신다는 점을 명심하자.
2. 그것은 특히 마음의 기만성과 사악함, 마음의 모든 부패한 계략과 소원과 의도에 대해 타당하다.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관찰하시고 식별하신다. 그는 마음의 은밀한 행위를 판단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악을 아는 것보다 우리 악을 더 많이 알고 계신다는 데 유의하자. 이것은 우리가 왜 자화자찬하고 않고 언제나 하나님의 심판을 외경하고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Ⅳ. 부당하게 얻은 재물에는 저주가 따른다. 기만과 폭력은 유다와 예루살렘에 편만한 죄였다. 그것은 그 소리가 하늘에 사무치는 죄였다. 예레미야 선지는 이런 죄를 범한 자들에게서 바라는 것이 있었다. 그들은 속임수와 폭력으로 부정 축재를 했지만 그 모든 소유를 탈취당하게 되었다. 그런 꼴을 당하는 그들은 그런 벌을 자기들의 죄 때문이라고 해석해야 마땅했던 것이다.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그 재물을 소망으로 삼으나 결코 그 기쁨을 누리진 못할 것이다. 재물을 얻기 위해 불법적 수단을 부리는 자가 일시적으로 성공도 하고 번창도 한다는것은 있을 수 있다. 많은 자들이 돈만 벌 수 있다면 자기 이웃을 속이거나 학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것은 많은 자에게 시험이 된다. 망령됨과 거짓된 혀로 재물을 얻은 자는 자기 성공을 즐거워하면서 "나는 부자라. 아니, 나는 무죄한 자라" (호 12:8)고까지 말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나게 될 것이다." 그 재물은 그에게서 탈취될 것이다. 아니, 그가 그 재물로부터 취해감을 입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가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라" (눅 12:19, 20)고 말할 때 어떤 놀라운 치심으로 그를 끊어버리실 것이다. 그는 알지도 못하는 자에게 자기 재물을 남기고 떠나게 될 것이며 그 재산을 하나도 갖고 가지 못할 것이다. 죽음을 앞둔 세상적 사람에게 있어서 자기 재산을 놔두고 떠난다는 것을 굉장히 원통한 것을 암시한다. 게다가 재물을 부당하게 취득한 자들이 공포를 느낀다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 재물은 저 세상까지 따라 오지 않으나 그 죄는 따라 올 것이기 때문이다.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을 것을 이미 받았다는 것을 기억하라" (눅 16:25)라는 말씀처럼 그것은 영원한 고통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필경은 그가 어리석은 자 곧 한 사람의 나발(삼상 25:25)이 될 것이다. 나발이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을 때" (삼상 25:37) 그가 인색하게 모으던 재물은 그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줄곧 미련한 자였던 것이다. 아마 그의 양심을 때때로 그에게 그런 말을 속삭였을 것이다. 그러나 필경에는 그도 어리석은 자로 판명될 것이다. 필경에 가서 우매자가 되는 자는 참으로 어리석은 자이다.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지혜있는 자라고 칭찬을 받은 많은 자들이 어리석은 자로 판명될 것이다(시 49:12, 18). 은혜를 얻은자들은 필경 지혜로운 자로 나타날 것이며 죽어서 그 은혜의 위로를 받을 것이고 그 혜택을 영원토록 입게 될 것이다(잠 1:20). 세상 재물이 자기 행복을 두며 정당하게 든 부당하게든 부자가 되려는 자는 그 어리석음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자기들의 치명적 과오를 돌이키려고 해봐야 그 때는 이미 늦다. 이것은 마치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과 같다." 그 알은 깨지거나(욥 39:15) 도둑 맞거나(사 10:14) 썩는다. 이와 흡사한 종류의 새가 유대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었는데 그 새는 이런 경우를 흔히 당하였던 것이다. 부자는 한 재산을 모으기 위해 온갖 고생을 다하며 알을 품듯 곰곰히 생각하지만(" 알을 품는다" 는 말은 "심사숙고 한다" 는 뜻으로 전용된다:역자 주) 그 재물에서 어떤 위안이나 만족을 얻지 못한다. 죄스러운 경로로 부유해지려는 그의 계획은 유산되고 수포로 돌아가버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기를 놓치지 말고 제때에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한다. 좋은 기초 위에 재물을 쌓고 영원히 지혜로운 자가 되기 위해서는 정직하게 재물을 취득해야 하며 자선에 사용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치하와 호소(예레미야 17:12-18)
전에도 종종 그랬듯이 예레미야 선지는 여기서 개인적 명상과 로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해 한적한 곳으로 물러난다. 자기 일에서 위안을 얻고자 하는 사역자들은 자주 이렇게 해야 된다. 그는 여기서 하나님이나 자신의 마음과 사귀며 대화하는 가운데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자유 분방하게 표현하고 있다. 독실한 믿음의 소유자들은 왕왕 방법이나 일관성에 너무 구애받지 않고 한 가지 일에서 다른 일로 건너뛰는 분방한 독백을 한다.
Ⅰ. 그는 자기 백성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크나 큰 은총을 치하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 가운데 계시의 종교를 베푸시고 신적 규례로써 그들의 이름을 존엄하게 만드셨던 것이다. "원시부터 높이계신 영화로우신 보좌는 우리의 지성소시니이다" (원문을 직역하면 그렇다. 우리 한글 개역 성서와 대조해 보는 것도 유의할 것이다:역자 주).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은 그들의 지성소(피난처란 뜻도 있음:역주)였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특별하신 임재 나타내신 곳이었고 살아있는 탁명(託命)을 맡기신 곳이었으며 백성들이 그 주권자에게 충성을 바치는 곳이었으며 환난 때에 피난을 위해 도망해 들어가는 곳이었다. 거룩함 때문에 그 보좌는 참으로 영화롭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였다. 이 때문에 그 보좌는 참으로 높은 보좌가 되었다. 예루살렘은 큰 임금의 성이라고 불리운다. 즉 그 임금은 이스라엘의 왕이실 뿐만 아니라 온 땅의 왕이시다. 그러므로 그런 임금의 성은 세계의 수도, 세계의 왕성으로 간주되어 마땅하다. 그 성소는 맨 처음부터(원시부터, 한글 개역) 그러했다. 맨 처음 다윗이 설계하고 솔로몬이 지을 때부터 그러했다(대하 2:9). 하나님이 이스라엘 중에 그토록 영화로우신 보좌를 설치하셨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명예였다. 어떤 이들은 이 부분을 "영화롭고 높이 계신 보좌는 우리의 성소이시기 때문에" 라고 읽는다. 모든 선한 자들은 하나님의 규례를 높이 평가하고 존중하며 지성소를 영화롭고 높이 계신 보좌로 간주한다는데 주목하자. 예레미야가 여기서 하나님께 이런 말을하는 것은 둘중 하나이다. 즉 그의 영광의 위(렘 14:21)에 욕되지 않도록 그 땅에 하나님의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탄원이거나 그들 중에 하나님의 보좌가 계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버림으로써 그의 면류관과 성소를 모독한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더 악하다고 하는 고발이다.
Ⅱ. 그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치하드리고 있다. 그는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께 대한 충성에서 발을 뺀 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당하고 멸망받는 것을 옳은 일로 인식하고 있다(13절). 그는 이 두 가지 일을 필연적이고도 공평한 일이라고 말한다. "주께 집착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되시는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그들은 꼭 수치를 당하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당신을 거짓말하는 헛된 것으로, 자기들을 기만하고 수치스럽게 할 자로 여겨서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수치를 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 창피해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수치를 당해 마땅할 이유는 또 있다. 환란이 오는 때 그들의 체면을 세워 줄 수 있는 분이 하나님 한 분뿐이다. 그런 분을 그들은 버렸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그들로 수치를 당하게 하소서" 라고 읽는다. 이렇게 읽는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 위에 임하기를 기원하는 경건한 기도이거나 그들이 참회로 수치를 느끼게 해 주시도록 그의 은혜를 바라는 탄원일 것이다. "무릇 나(한글 개역 성서, 여호와)를 떠나는 자들은, 즉 내가 전파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는 자들은 사실상 하나님을 떠나는 자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가 선지자에게 돌아오는 자로 일컬어지는 것(렘 15:19)과 같다.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그들은 땅에 쓴 글자처럼 곧 지워져버릴 것이다. 그들은 짓밟힐 것이다. 보물을 땅에 쌓아 두는 자들은 땅에 속하며 그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지(히 12:23) 않은 자들은 땅에 속한 자들로 계수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스라엘의 어리석은 자들과 함께 이와 같이 흙에 기록되어 모든 자에게 그 어리석음이 밝히 드러나게 되어 마땅하다. 이는 그들이 생수의 근원(즉 샘물)이신 여호와를, 그나마도 터진 웅덩이(렘 2:13)와 바꾸기 위해 버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속한 모든 사람한테 생수의 근원이 되신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하나님께는 충만한 위로가 있다. 그 위로는 가득찬 샘물처럼 넘쳐흐르고 항상 흐른다. 죄의 즐거움이 웅덩이 물이라면 그 위로는 샘물처럼 항상 신선하고 맑고 깨끗하다. 그들은 값없이 그 샘에 나올 수 있다. 그 샘은 봉한 샘이 아니다(아 4:12). 그러므로 그들은 아담처럼 흙으로 돌아가는 정죄를 받아 마땅하다. 그들은 자기 본성의 부패로 흙과 연분을 맺었으니 이는 그토록 물이 잘 흐르는 하나님의 동산을 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된다.
Ⅲ.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치료와 구원의 자비를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을 떠나는 자의 형편이 그토록 비참한 것이라면 나는 언제나 주께 가까이 나아가게 해 주소서(시 73:27). 여호와여, 이를 위해 나를 고치소서. 나를 구원하소서(14절). 나의 뒷걸음질과 타락하려는 성향을 고치소서. 주를 버릴려는 힘에 휩쓸리지 않도록 나를 구원하소서." 그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마음이 슬픔으로 상처를 입었다. "여호와여, 주의 위로로 나를 고치시고 편안하게 하소서." 그는 끊임없이 비이성적인 사람들의 원한을 샀었다. "여호와여, 그들로부터 나를 구원하소서. 나로 하여금 그들의 악한 손에 떨어지지 않게 하소서. 나를 고치소서, 주의 은혜로 나를 성결케 하소서. 나를 구원하소서. 나를 주의 영광에 이르게 하소서." 나중 구원받을 자면 누구나 먼저 성결케 된다. 죄악의 질병이 말끔히 소제되지 않으면 영혼은 살지 못한다. 그는 이 청원을 강조하기 위해 다음 두 가지 주장을 한다.
1. 그가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 품고 있는 굳은 신념.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주께서 치료하려 드시기만 하신다면 틀림없이 치료될 것입니다. 그 치료는 임시 변통하는 응급 처치가 아니라 완전하도고 철저한 치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치료받으러 나아오는 자들은 자기들의 전능하신 의사(醫師)를 아주 흡족히 여겨야 마땅합니다. 나의 위험과 원수가 아무리 위협적이라 하더라도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네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라고 예레미야는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어올리시면 우리는 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면 우리는 안전할 것이다.2. 그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품는 진지한 존경심. "주는 나의 찬송이시니이다. 그 때문에 나는 고침과 구원을 받고저 원하나이다. 이는 내가 살아 주는 찬송하기 위함이니이다. 내 혼을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를 찬송하리이다(시 119:175). 주는 내가 찬양하는 분이십니다. 주께 돌아가야 할 찬송은 내가 결코 다른 자에게 돌리지 않았나이다. 내가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자랑하는 분은 당신입니다. 이는 내가 주께 의지하는 까닭입니다. 주는 내게 끊임없는 찬송 제목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나는 이미 내게 베풀어주신 주의 은총에 대해 찬송을 드렸나이다. 주는 나의 찬송이 되실 것입니다(이렇게 읽는 이도 있음). 나를 고치소서. 그리고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주께서는 그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 71:6; 79:13)고 선지자는 말한다.
Ⅳ. 그는 자기가 가르친 백성의 불신앙과 무모한 불경건에 대해 불평한다. 그는 이들의 불신앙 때문에 큰 곤욕을 치렀다. 손님을 청하러 보냄을 받은 종이 그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자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안 것처럼(눅 14:21) 예레미야 선지는 이 어려움을 하나님 앞에 고한다. 그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백성에게 충실히 전달했다. 그런데 그는 자기를 보내신 이에게 무슨 대답을 돌려 드려야 했는가? "그들이 내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 있느뇨? 이제 임하게 할지어다 하나이다" (15절; 사 5:19). 그들은 선지자를 희롱했고 그가 대단히 심각하게 전한 것을 농담으로 받았다.
1. 그들은 예레미야 선지가 전한 말씀의 진실성을 부정했다. "만일 네가 우리에게 전하는 것이 여호와의 말씀이라면 그 말씀이 어디 있느냐? 그 말은 왜 이루어지지 않는가?" 이와 같이 그들은 무엄하게도 하나님의 인내를 악용하여 그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근거로 삼았다.2. 그들은 그가 한 말의 두려움을 무시했다. "전능하신 하나님더러 마음대로 해보시라고 여쭤라. 그가 말한 모든 것이 그대로 일어난다고 해도 우리는 끄덕도 하지 않고 괜찮을 것이다. 사자는 소문만큼 사납지 않다" (암 5:18 이하 참조). "여호와여, 믿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 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무슨 의도이십니까?"
Ⅴ. 선지자는 자기가 소명받은 의무를 충실히 이행했다고 하나님께 호소한다(16절). 사람들은 선지자로 하여금 자기 일에 진절머리를 내도록 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행하였다. 그들은 온갖 수단을 다해 그를 격분시키며 불안하게 만들려고 하였다. 그들은 그로 하여금 그들의 비위를 상하게 할까봐 적당히 얼버무리거나 메시지를 바꾸고 싶은 시험이 들게 하려고 갖은 애를 다 썼다. 그러나 선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호와여, 내가 그들에게 굴복하지 않았음은 주께서 아시는 바다."
1. 그는 꾸준히 자기 일을 계속하였다. 그는 자기 직분 때문에 명예롭게 되고 보호를 받게 되긴 커녕 오히려 치욕과 멸시와 상해를 입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지만 나는 목자의 직분에서 물러가지 아니하고 주를 좇았나이다. 나는 내 일을 그만 두지 않았나이다. 나는 내 직분의 취소나 사직을 구하지도 않았나이다." 선지자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의 꼴을 먹이는 목자였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하나님을 좇는 목자가 되어야 했다. 무릇 모든 목사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자(렘 3:15)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좇으며 하나님이 주시는 지시와 교훈을 따라야 한다. 예레미야는 바로 그런 목자였다. 비록 어느 사람보다 많은 곤란과 좌절을 겪은 그였지만 요나처럼 도주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심부름을 더 이상 못하겠노라고 면해 주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자들은 비록 기대에 부응하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더라도 자기 임무를 포기해서는 안되며 면전에 폭풍이 몰아치더라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길아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2. 선지자는 자기 백성에게 대해 계속 애착을 갖고 있었다. 백성들은 자기를 학대했으나 그는 그들을 측은히 생각했다. "재앙의 날도 내가 원치 아니하였음을 주께서 아시는 바라." 그런데 예언을 했다. 그 예언이 성취되는 날은 재앙의 날이 될 터였다. 예루살렘으로서는 그 날이 실로 재앙의 날이 될 터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 날이 오지 않게 해 주시기를 탄원하였다. 예레미야 자신으로서는 그 재앙의 날이 복수의 날이 되고 자기가 진실한 예언자임을 입증하는 날이 될 것이었다(그들은 이를 의문시했으므로, 15절). 이런 이유로 그는 재앙의 날를 바라는 유혹에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이 날을 결코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죽음을 원치 않으시고 그가 돌이켜 살게 되기를 바라신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그러므로 목사들도 그래야 한다. 예레미야처럼 우리도 재앙의 날을 경고하긴 하면서도 그 날을 바라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 때문에 통곡해야 한다.
3. 선지자는 하나님의 훈령을 그대로 지켰다. 만일 그가 그토록 신랄한 책망과 혹독한 경고를 하지 않았더라면 백성의 애호를 받을 수 있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노여움을 피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가 위탁받은 메시지를 충실히 전달하려고 했다. 게다가 그렇게 하는 것이 그에게는 위로가 되었다. "여호와여 내 입술에서 나온 것이 주의 목전에 있나이다. 내 입에서 나온말은 내가 주께 받은 말과 꼭 부합하였나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나와 언쟁하는 가운데서 주는 체면을 손상당하신 셈이옵니다." 만일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정당하다면 우리는 세인의 비난과 흑평을 아무렇지 않게 무시할 수 있다. "그들에게 판단(재판의 뜻)을 받는 것은 작은 일" 이다(출 18:22 참조).
Ⅵ.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인정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며 즐거이 그 일에 매진하게 해 주시기를 겸손히 청하고 있다. 그 일은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를 불러 맡기신 일이었다. 그 일은 자기가 그토록 성심껏 몰두했던 일이었다. 그가 여기서 바라는 일은 두 가지이다.
1. 그는 자기를 보내신 하나님을 섬기면서 위안을 얻고자 하였다(17절). "주는 내게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 이 말씀에는 확실히 더 많은 것이 언외에 함축되어 있다. 그것은 이런 의미이다. "주는 내게 위로가 되소서. 내 원수들이 나를 두려움에 질리게 하기 위해, 그리고 나로 내 일에서 손떼게 하려거나 아니면 무거운 마음으로 일하게 하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할 때 은총으로 내 마음을 기쁘게 하시며 용기를 복돋아 주소서." 일시적이긴 하나 하나님께서 욥(6:4)과 아삽(시 77:3)과 헤만(시 88:15)에게 두려움이 되셨듯이 지극히 선한 사람에게도 하나님을 두려워할 일이 있으며 또 이는 당연하다는 데 주목하자. 선한 자들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고후 5:11) 무엇보다 이를 두려워하고 이런 두려움을 내리시지 않도록 기원하는 것이다. 그들의 대적이 아무리 두렵게 나타나고 아무리 무서운 사고가 그들에게 높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두려움이 되시지 않는 한 그들은 충분히 견디어 낼 수 있다. 선지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주는 나의 소망이십니다. 그렇다면 재앙의 날에도 내게 두려움이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극히 위협적이고 긴박한 날에도 내가 두려워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가 의지하는 분은 당신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자기 신뢰로 삼는 자는 자기 잘못만 아니라면 극히 악한 때에라도 그 하나님을 자기의 위로자로 삼게 된다는 점에 유의하자. 만약 하나님을 우리의 신뢰자로 삼는다면 우리는 그가 우리의 두려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2. 그는 백성을 상대하면서 용기를 갖고자 하였다. 그는 그 백성에게 파송된 자였다. 의당 그를 환대하고 격려해야 할 백성들은 그를 도리어 박해하였다. 그는 "여호와여, 나를 박해하는 자로 수욕을 당하게 하시고, 나로 수욕을 당하게 마옵소서. 그들로 말씀의 확신에 사로 잡히게 하옵시고 자기들의 완고함을 부끄러이 여기게 하옵소서. 아니면 그들에게 경고된 심판을 결국 그들에게 내리소서. 나로 놀게 마옵소서. 그들이 협박에 놀라 내게 맡기신 일을 배반하지 말게 하소서" 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에게는 할일이 있다. 그 일은 행하기에 부끄러워할 필요도, 계속 행하기에 두려워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오히려 그 일은 수치감이나 공포감이 없이 그 일을 계속 행해 나가는 데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일이다. 예레미야는 전체적으로 자기 조국에 비애의 날이 임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러나 자기를 박해하는 자들의 악의에 대해서는 정당하고도 경건한 분노를 느껴 "재앙의 날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소서" 라고 기도한다. 이것은 일부 박해자에게 대한 심판으로 전체 조국의 파멸을 미연에 방지하자는 바램에서 한 기도이다. 그런 박해자자 제거된다면 백성은 더 나을 터였다. "그러므로 배나 되는 멸망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뿌리와 가지 할 것 없이 그들로 완전히 멸망당하게 하소서. 그래서 그 멸망으로 그들이 수욕을 당하고 놀라게 하소서." 선지자가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설욕하거나 편안해지고자 함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 행하시는 심판으로 자기를 알리시게 하고자 함이다(시 9:16).
안식일의 성수(예레미야 17:19-27)
이 말씀은 안식일 성수(聖守)에 관한 설교이다. 이것은 선지자가 여호와께 받은 말씀이었고 극히 엄숙하고 공적인 방법으로 백성에게 전하라고 명령받은 말씀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신 것은 전체적으로 죄를 책망하고 순종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세부적인 지시도 하시기 위함인 까닭이다. 안식일에 관한 이 메시지는 아마 요시아 왕 당시에 요시아 왕이 착수한 개혁 사업의 촉진을 위해 보내졌을 것이다. 그 이유는 여기에 나오는 약속(25,26절)이 극도로 악화된 사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 메시지는 모든 집합 장소와 성문에서 선포되어야 했다. 성문은 백성들이 출입하고 왕래할 때 통과하는 문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법정을 개설하거나 재화를 쌓아 두는 곳이기도 하였던 때문이다. 이 메시지는 우선(왕이나 왕후의 행차나 칙령이 포고되듯) 궁정문에서 선포되어야 했다. 이 문은 "유다 왕들이 출입하는 문" 이었다(19절). 선지자는 그들에게 맨 먼저 그들의 의무, 특히 이 안식일 성결의 의무를 고해야 했다. 안식일은 성별되어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안식일을 거룩히 하지 않는다면 유다 귀인들은 책망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실제로 그러했다, 느 13:17). 그들이 행하는 의무는 확실히 결여되어 있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모든 문에서도 이 메시지를 선포해야 했다. 그것은 전체 백성과도 관계가 큰 일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그것을 주목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만 하였다. 그는 유다 왕들로 여호와의 말씀을 듣게끔 이 메시지를 선포해야 했고(그들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들보다 높으시기 때문에) 또 예루살렘의 모든 거민에게도 들려주어야 했다. 평민이 설사 아무리 낮은 신분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존중하시며 그들이 안식일에 하는 말과 행동을 주시하시기 때문이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Ⅰ. 안식일은 어떻게 성별되어야 하며 안식일 성화에 관한 율법은 무엇인가?(21,22절).
1. 그들은 안식일에 자기들의 세상일을 쉬어야 하며 어떤 육체노동을 해서도 안 된다. 안식일에는 성밖으로 나가는 집이든 성안으로 들어오는 집이든 그들은 집을 져서는 안 되었다. 집에서 내는 짐이든 집으로 들여가는 짐이든 그들은 짐을 져서는 안 되었다. 농부가 곡식 짐을 지고 들어 와서도 안 되었으며 비료의 짐을 지고 나가서도 안 되었다. 상인이 성품이나 물건을 지고 드나드는 것도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대로든 소로든 안식일에는 짐 실은 말이나 수레가 보여서도 안 되었다. 그 날에는 짐군이 손님을 기다려서도 안 되었고 종들은 땔감이나 양식을 운반해서도 안 되었다. 그 날은 안식의 날이기에 만부득이한 경우 이외에는 수고의 날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2. 그들은 안식일의 고유한 일에 전념해야 했다. "너희는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 즉 너희는 하나님의 존귀를 위해 안식일을 성스럽게 하며 하나님께 대한 봉사와 예배로 그 날을 소일하라." 세상일을 젖혀 두어야 한다는 것도 바로 이를 위해서 이다. 하나님께 대한 봉사와 예배는 인간의 전체를 필요로 하며 또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는 세상일을 젖혀 둠으로써 이 일을 완전히 할 수 있게 되며 이 일에 열중할 수 있게 된다.
3. 그들은 이 일에 매우 신중해야 한다. "너희는 스스로 삼가하라. 안식일을 더럽힐 듯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경계하라." 우리는 하나님이 질투하시고 경계하시는 곳에서는 방심하지 말아야 한다. "너희는 스스로 삼가하라. 안식일은 하나님이 너희 시간 중에서 자기 몫으로 떼놓으신 것이다. 만일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그 시간을 강탈한다면 그것은 너희 생명을 걸고 하는 짓이기 때문에 스스로 주의하라." "너희는 너희 영혼을 조심하라" (원뜻은 그렇다). 안식일의 성화(聖化)를 올바로 하려면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잘 감시하지 않으면 안 되며 속사람의 일거일동을 철저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안식일에는 영혼으로 이 세상 근심 걱정의 짐을 지게 하지 말고 우리속에 있는 모든 것으로 안식일에 일에 종사시켜야 한다.
4. 하나님은 그들에게 율법을 참조하라고 이르신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이란 안식일에 대해 제정된 법을 가리킨다. "이것은 내가 너희에게 새로 부과한 법이 아니라 너희 열조에게 명했던 것이다. 그것은 옛적에 생긴 법이다. 그것은 원래 계약한 법조문이었다. 아니 그것은 족장들에게 한 명령이었다."
Ⅱ. 안식일은 어떻게 더렵혀지고 있었던가?(23절) "너희 조상들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그들은 청조치 않았다. 그들은 이 안식일에 관한 명령 외에도 다른 여러 가지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 목을 곧게 하여 다른 여러 가지 명령과 함께 이 명령도 듣지 않았다." 그가 이 안식일 문제를 언급하시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한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이다.
또 그들은 오래도록 안식일에 관한 법을 위반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에 대해 마땅히 그들과 쟁론하신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이 문제를 언급하신다. 그들은 목을 곧게 하여 이 명령을 듣지 않았는데 이는 다른 명령에 관한 훈계를 듣지 않거나 받지 않기 위해서 이다. 안식일이 무시당하는 곳에서는 모든 신앙이 눈에 띄게 쇠퇴하는 법이다.
Ⅲ. 그들이 안식일 성수를 본분으로 삼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축복을 예비하고 계시는가? 그들의 열조는 비록 안식일을 모독하는 죄를 범했으나 만약 그들이 안식일을 보다 잘 지키려 한다면 조상들의 안식일 모독 때문에 혼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도시와 국가는 옛날의 영광을 다시 회복하게 되리라는 것이다(24-26절). 그들은 안식일을 거룩히 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그렇게 하면 그 결과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1. 궁정이 번성할 것이다. 대를 계승하는 왕들이나 하나같이 왕들 만큼 위대한 많은 왕손들은 판단의 보좌 곧 다윗 집의 보좌에 앉는(시 122:5) 다른 방백들과 함께 이 성문으로 위풍당당히 입성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수 많은 유다 수행원들을 거느린채 더러는 말을 타고 더러는 병거로 입성하게 될 것이다. 통치자의 명예는 국가의 기쁨이라는 데 주목이자. 경건한 종교를 후원하는 일은 이 양자 곧 통치자의 존귀함과 국가의 기쁨에 큰 이바지를 한다.2. 그 도성은 번성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안식일을 성수함으로써 예루살렘의 신앙적 면목을 유지해야만 했다. 그렇게 하면 거룩한 도성이란 청호와 부합할 수 있을 것이며 예루살렘은 영영히 있을 것이고 영원토록 사람이 거하게 될 것이다(원문의 의미로 바로 이것이다). 경고된 예언과는 달리 이 성은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그 거민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경건한 신앙을 후원하는 세력이 무엇이든지간에 그것은 그 나라의 국리민복을 든든히 하는 경향이 있다.
3. 그 나라는 번영하게 될 것이다. 유다 성읍들과 베냐민 땅은 무수한 거민들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풍요와 평화 속에 생활할 것이다. 이런 점은 그들이 하나님께 헌납하는 제물의 수량과 가치로 입증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 나라가 어떻게 하고 있는가?" 란 점으로 한 나라의 번영을 판단할 수 있다. 자기의 경건한 신앙을 굶주리게 하는 자들은 빈곤하거나 아니면 가난하게 될 가능성이 많다.
4. 교회가 번성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소제와 유향과 감사(또는 찬미)의 희생을 가지고 여호와의 집으로 올 것이다. 이런 헌물의 지참은 성전 예배를 지속시키고 성전에서 봉사하는 종들을 부양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규례는 양심적으로 준수될 것이다. 어떤 유향이나 희생도 우상에게는 봉헌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소외되지도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은 정당한 경로로 들어갈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또는 찬미)의 희생을 바칠 기회와 마음도 갖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번영을 누리고 있다는 증좌가 된다. 경건한 종교가 국민 사이에 번성할 때라야 그 국민은 참으로 번성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그들이 안식일을 거룩히 한 결과이다. 그런 지엽적인 신앙 생활이 유지될 때라야 다른 여러 가지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로 유지된다. 반면에 안식일의 성수를 상실하게 되면 신앙은 미신이나 속된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모든 신앙의 냇물은 안식일이란 제방을 지키거나 무시하는 데 따라 깊이 흐르거나 얕게 흐른다고 관찰한 이들이 있는데 이것은 참된 관찰이다.
Ⅳ. 그들이 안식일의 신성을 계속 더럽힌다면 그들은 어떤 심판을 각오해야 하는가?(27절) "너희가 이 문제에 있어서 나를 청종치 아니하고 안식일에 불필요한 출입을 못하도록 성문을 닫아 두지 아니하며 신법으로 규정한 것을 깨뜨려가면서 안식일을 다른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다룬다면 하나님께서 성문에 불을 놓으시리라는 것을 알라." 이것은 그 성을 포위하고 성문을 공격하는 대적들이 성문을 소각시켜서라도 억제로 입성하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죄악을 쫓아내고 사람들로 자기 의무에 충실할 수 있도록 불러들이는 데 사용되지 않는 성문들은 당연히 불타게 될 것이다. 이 불은 심지어 예루살렘 궁전도 삼킬 것이다. 궁전은 왕족들과 귀인들이 거하는 곳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안식일을 명예롭게 유지하기 위해 자기들의 권력과 세력을 이용해야 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질 않았다. 그 불은 전 도성을 초토화시키기 전까지는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다. 이 일은 갈데아 군대에 침략에서 그대로 성취었다(52:13). 안식일의 모독은 하나님이 불로써 자기 백성을 자주 꾸중하시는 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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