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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유다에게 대한 심판의 확증(예레미야 15:1-9)

여기에는 패역한 백성에게 대한 하나님의 노여워하시는 표현이 나오는데 우리는 이같이 애타는 말씀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선지자는 여지껏 백성을 위해 간절히 기도를 하였고 그에게 합세하는 자까지도 몇이나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판의 유예는 고사하고 심판의 감면조치도 받지 못하였다. 선지자의 기도에 대해 응답이 내리긴 하였으나 그것은 명령이 발해졌으며 그 명령은 철회될 수 없고 곧 실시될 것이라는 응답이었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Ⅰ. 이 엄한 판결의 기초가 되는 죄악은 무엇이었는가?

1. 그것은 이전의 불의를 기억하시고서 이다. 그것은 므낫세 때문이며 그가 예루살렘에서 행한 일 때문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열왕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왕하 24:3, 4). 그것은 그의 우상 숭배 때문이었고 그가 흘린 무죄한 자의 피 때문이었으니 여호와께서는 이를 사하기를 즐겨하지 않으셨다. 그는 히스기야의 아들이라고 불리우는데 이는 그토록 훌륭한 아비의 혈육이란 사실이 그의 죄에 대한 구제 조항이 되기는 커녕 그의 죄를 가증시키는 요소가 됐기 때문이다. 므낫세 기대 이후 그 세대의 대부분은 점차로 사라져갔지만 그의 죄는 셈을 치르게 된 것이다. 예루살렘의 마지막 멸망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땅 위에서 흘린 모든 의로운 피를 그곳에 돌리셨다. 이것은 피흘리는 죄가 얼마나 무거우며 조만간 어딘가에 내려 엎드릴 것이며 유예는 용서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2. 그것은 당시 저들이 개전의 정을 보이지 않음을 침작하시고서이다. 그들의 죄는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지 살펴보자(6절). "너희는 나를 버렸고 네게 대한 봉사와 의무를 버렸다. 너는 내게서 물러갔고 상반길로 되돌아갔다." 이들의 불회개가 어떻게 묘사되는지 살펴보자. "그들은 그 길에서 돌이키지 않았다" (7절). 그들은 자기들의 마음의 길에서 하나님의 계명의 길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곁길로 향한 자신이 만일 돌이키려 한다면 그들에게는 자비가 기다린다. 그러나 자신의 변절을 고집하는 자들이야 무슨 은총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Ⅱ. 심판은 무엇인가? 그것은 완전한 파국 이상을 뜻한다.

1. 하나님은 그들을 단념하시고 증오하신다. "내 마음이 그들을 향할 수 없노라" 고 말씀하신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어떤 흐믓함이 남아 있겠는가? 그들은 하나님께 대해 그토록 뿌리깊은 혐오감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자들에게 대해 거룩하신 하나님이 만족감을 품으신다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극도로 보기 싫고 역겨운 것처럼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내라. 그들을 나아가게 하라. 나는 그들로 인하여 이 이상 괴로움을 당하지 않겠노라" 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혈기가 아니라 거룩하고 정당하신 분노에서이다.

2.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드리는 어떤 증보의 기도도 용납치 않으려고 하신다(1절). "모세나 사무엘이 나와 저들을 화해시키기 위한 기도나 제사로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나는 마음이 움직여서 저들을 은총 안으로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모세와 사무엘은 여지껏 그 땅의 축복이 된 자 중 가장 하늘의 총애를 크게 받은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특히 하나님과 범죄한 백성간의 화해를 성사시킨 것으로 유명한 자들이다. 만일 백성의 범죄시 모세가 하나님 앞에 서지 않았다면 그들은 멸망을 여러 번이나 당했을 것이다. 그들은 사무엘의 기도 덕분으로 목숨을 부지하였다(삼상 12:19). 그러나 모세와 사무엘의 기도조차 주효하지 못할 것이다. 설사 그들이 완전한 상태에 있다고 하더라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하물며 예레미야의 기도야 말해 무엇하랴. 그는 남들과 성정이 같은 자였던 것이다(약 5:17).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라고 가정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서지 않는다는 것을 추하고서 하는 말이며 천국성도들은 지상 성도를 위한 중보자가 아님을 암시한다. 모세와 사무엘과 딴 자들이 이 세상에서는 무엇이었든지 간에 저 세상에서 유일한 중보자가 되는 것은 "영원하신 말씀" 의 특권이다.

3. 하나님께서는 그들 전부를 이모저모의 멸망시키는 심판에 정죄시키신다. 하나님이 그들을 면전에서 쫓아내실 때 그들은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2절) 안전하고 편안할 곳은 실로 아무 데도 없다. 하나의 심판을 당하는 동안 또 하나의 심판이 따라온다. 급기야 그들은 사면 팔방으로 재앙에 포위당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탈출할 수가 없다. "사망할 자는 사망으로 나아갈지니라." 여기에는 사망은 역병을 의미한다(계 6:8, 우리 성서에는 없음). 역병은 보이지 않는 사망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사망할 자는 사망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갈지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서 지정한 방법으로 멸망할 터였다. 악인의 죽음을 정해 놓고 있는 율법은 그가 어떤 죽음을 당할 것인지도 결정하고 있다.

또는 자신의 선택에 의해 이 심판을 반대하지 않는 자라면 이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저런 심판에 의해 다 엎드러질 것이며 하나도 피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다윗이 처했던 선택과 같은 것이다. 다윗은 그 선택으로 인해 큰 곤경에 빠졌었다(삼하 24:14). 포로됨이 맨 마지막에 나오는 것은 포수(捕囚)가 복합적이고도 계속적 불행이어서 무엇보다 쓰라린 심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칼의 삼판은 3절에 다시 반복되며 네 가지 두려운 멸망자 중 첫째가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병졸 위에 장교를 세우듯 이 네 가지 파괴자를 그들 위에 임명하셔서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게 하셨다. 칼을 피하는 자들이 역병이나 기근이나 포로됨으로 끊어지듯 칼로 엎드러지는 자들은 하나님의 보수하심으로 끊어지게 될 것이다. 신의 복수는 죽음 저편까지도 죄인을 추격하는 법이다. 성중에는 찢는 개가 있을 것이며 들에는 삼키는 공중의 새와 짐승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의를 앞지를 것으로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그들은 공의에 대한 그리고 히 공공연한 기념물이 될 것이다. "내가 그들을 가인처럼 세게 열방 중에 흩으리라." 가인은 모든 사람에게 두려움이 되도록 땅에서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되었다(창 4:12).

4. 그들은 구원을 받지도 못하고 엎드러질 것이다. 누가 능히 그들에게 도움이 될 일을 할 수 있는가?

(1) 하나님은 곧 그들 자신의 하나님(이전에는 그들의 하나님이셨다)조차 그들을 대적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신다. "내가 네게로 내 손을 펴리라" 는 것은 칠 것을 숙고하시고 결심하셨음을 의미한다. 그 타격은 멀리까지 미칠 것이며 깊은 상처를 입힐 것이다.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염증이 났음이로다" (6절). 이 말은 이상한 표현이다. 그들의 소행은 너무나 패역하였다. 특히 뜻을 돌이키는 일 곧 참회의 고백에 패역하였으므로 심지어 무한한 인내심조차 한도에 이르도록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왕왕 그들에게 대한 진노가 막 폭발하려는 순간 돌이키시곤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유예를 허락하사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를 거역하여 오래동안 봄죄하다가 결국 자비까지 상실한 정도로 범죄한 자들의 형편은 비참하다.

(2) 그들 자신의 조국조차 그들을 추방시키며 그들 앞에 있던 가나안 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들을 즉각 토해 내려고 한다. 이 일은 미리 예고되었었다(레 18:28). "내가 그들을 그 땅의 여러 성문에서 즉 그들 자신의 성문에서 키로 까불 것이다" (17절). 그 성문들을 통해 그들은 이산될 것이다. 또는 "내가 그들을 키질하여 그 땅의 여러 성으로 들어가게 할 것이며 주위의 모든 도시로 몰아 놓을 것이다" 라고 해석할 수 있다.

(3) 그들의 성문에서 원수와 말할 때에 자기들을 도와주어야 할 자녀들이 끊어지게 될 것이다. "내가 그들의 자식을 끊어서 그들은 그 다음 세대가 자기들의 일을 벌충해 주리라는 소망을 거의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니 이는 내가 내 백성을 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거민이 살륙당하면 그 땅은 곧 황폐하게 될 것이다. 이 우울한 기사는 확대되고 있다(8,9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그들에게 임하는 파괴자. 하나님은 유혈극을 벌이실 때 그 일을 맡을 주역을 찾아내신다. 느부갓네살은 여기서 대낮에 훼멸할 자라고 불리운다. 그는 들킬까봐 두려워하는 밤도둑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그는 권리와 재산의 모든 담벼락을 두려움없이 훼멸하고 파괴하며 그나마도 태양 앞에서 그 빛을 무시하면서 행하는 것이다. "내가 청년 곧 훼멸자를 데려다가 어미를 치게 하였다" (흑자는 그렇게 읽는다). 이렇게 해독하는 이유는 느부갓네살이 즉위 원년 처음으로 유다를 침공하였을 때는 청년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훼멸할 자를 그들에게로 데려다가 그들과 청년들의 어미를 치게 하였다" 고 읽는다. 즉 청년들을 무수히 갖고 있는 어미 성 예루살렘을 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 침입은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여럿 둔 어미에게 특히 두려웠을 것이다. 청년들은 전장의 고지에서 생명을 무릎쓰고 지키고 있지만 대적의 적수가 되지 못하기에 거기서 쓰러질 것이며 그렇게 되면 그들을 애지중지하여 키운 어머니의 슬픔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훼멸자를 그들에게 데려오신 바로 그 하나님께서 졸지에 기습으로 훼멸자가 약탈품 위에 임하게 하셨다. 그리고 나자 두려움이 그 도성(우리 성서:놀람)에 임하였다. 원문에는 도성과 두려움이라고 매우 급박하게 되어 있다. 오! 도성이여! 그 안에서 얼마나 큰 놀램이 있을 것인가

! 그 도성을 사로잡을 두려움이여! 그 때에는 서로 떨어져 있는 것같이 보이던 도성과 두려움이 함께 있게 될 것이다. "내가 순찰자와 두려움을 졸지에 성(예루살렘)에 임하게 하리라." 가타(Gataker)선생은 그렇게 해독한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다니엘서에서 순찰자로 사용되기 때문이다(단 4:13, 23). 그런데 갈데아 군사는 순찰자(watcdhers, 우리 성서는 "치는 자" 라고 읽음, 렘 4:16)라고 불리웠다.



[2] 이 훼멸자에 의해 자행될 파괴. 본문은 두려운 살륙자를 묘사하고 있다.

첫째, 아내는 자기 남편을 빼앗긴다. "그들의 과부가 바다 모래보다 더 많아졌느니라" (8절). 과부 수는 그토록 무수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남자들은(남자들만 계수하였으므로)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지리라는 약속이 주어졌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모두 끊어질 것이며 그들의 과부들이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이 내 앞에서 많아졌느니라" 고 말씀하시는 데 주목하자. 남편들은 비록 하나님의 공의의 칼날에 멸절되었다곤 하나 그들의 불쌍한 미망인들은 그의 자비로우신 팔 안에 거두어들여졌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과부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을 명예로운 청호 중 하나로 간주하셨다. 과부는 계수되었다고 한다. 하나님은 과부의 수효에 대해 각별한 동정심과 관심을 품우신다.

둘째, 부모는 그 자녀를 빼앗기게 된다. 일곱 자식을 생산한 여인은 그 자식이 자기 노년의 의지와 기쁨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지만 다년 간 무거운 짐이 되고 걱정을 끼쳤던 그 아들들이 단 하루만에 전부 칼로 멸절되는 것을 보고는 쇠약게 된다.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삼상 2:5). 자녀란 얼마나 불확실한 위안물인지 유심히 살피자. 그러므로 우리는 기쁘지 않은 자갈이 자녀를 기뻐하자. 자녀가 살륙당하면 그 어미는 기절한다. 어머니의 생명은 자녀의 생명에 동여매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해는 오히려 백주에 떨어진다. 그녀는 자녀를 한창 향유한다고 믿고 있을 때 그 모든 위안을 빼앗기게 된다. 그녀는 자기가 자녀를 얼마나 사랑하였으며 얼마나 사랑하였고 얼마나 기대가 컸던지를 생각하고 수치와 근심을 당하게 된다. 흑자는 이 쇠약하게 된 어미가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예루살렘은 불쌍한 어미가 자기 자식을 위해 통곡하듯 그 거민의 죽음을 격렬히 애통해한다. 이미 멸절된 자도 많지만 "그 남은 자도 내가 그 대적의 칼에 붙이리라" 고 천지의 심판관이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이미 도피해서 다음 세대의 근원으로 보존되기를 바랐던 자들조차(유죄 선고받은 흉악범을 사법관에게 인도하듯)대적에게 내어 주리라는 것이다. 우리는 비록 심판이 가혹하게 보이긴 하나 천지의 주재이신 여호와께서 진리를 따라 심판하신다는 것을 확신한다.

5. 그들은 쓰러져도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할 것이다. "예루살렘아! 너를 불쌍히 여길 자 누구냐? 네 하나님이 너를 자기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의 긍휼심이 네게서 거두어질 때는 네 대적이나 친구들도 너를 동정하지 않으리라. 그들은 너를 가엽게 여기지 않으리라. 그들은 너를 곡하지도 않고 네게 애석한 마음도 품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게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며 네게 평안을 물으러 한 걸음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친구의 도리를 할 것으로 기대되던 그들의 친구들은 모두 이 재난에 연루되어 자신을 위해 곡하기에도 모자랄 것이다. (2)그들의 모든 이웃이 보기에도 그들이 분명코 죄에 대한 고집으로 이 불행을 자초했으며 회개와 개심만 했더라면 이 재난을 쉽사리 방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회개하라" 는 부르심을 자주 들었지만 그것은 소용이 없었다. 그러니 "누가 너를 불쌍히 여기겠는가. 아! 이스라엘아! 너를 멸망시킨 것은 바로 네 자신이다" 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이렇게 쉬운 조건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려고 아니하는 자는 멸망할 것이며 영원히 긍휼히 여김을 받지못할 것이다.

(3)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불행을 더욱 완전하게 하실 것이다. 욥의 경우에서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천지를 그들에게서 멀리 떼놓으실 것이다. 우리는 원수들에 의한 모든 피해 뿐만 아니라 우리 친구들의 모든 대에서도 하나님의 손길, 즉 그의 의로우신 손을 인식하게 된다.

 

15:2 없음.

 

15:3 없음.

 

15:4 없음.

 

15:5 없음.

 

15:6 없음.

 

15:7 없음.

 

15:8 없음.

 

15:9 없음.

 

15:10

선지자의 불평(예레미야 15:10-14)

예레미야는 이제 자기의 공적 사업에서 자기 밀실로 물러났다. 이 많아쑤단과 다음문단은 그와 하나님간에 오갔던 일의 설명이다. 그는 이를 나중에 공표하였는데 이는 자기 메세지의 중요성과 비중을 백성에게 주지시키기 위해서였다.

Ⅰ선지자는 예언 활동을 하면서 부작친 여러 가지 낙심꺼리에 대해 하나님께 불평하고 있다(10절).

1. 그는 아주 많은 반박과 반대에 봉착했다. 그는 전국(그의 사업은 그 나라에서만 하는 일이었으므로 온 세계라기 보다 전국이라고 읽을 수 있음)에서 다툼과 침을 당할 자가 되었다. 도시와 지방 사람들이 그와 다투었고 그에게 대항하였으며 그를 훼방하기 위해 온갖 말과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그는 화평한 사람이었고 누구에게도 도발하지 않았으며 도발당해도 쉽사리 분개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다툼의 사람이 되었다. 그는 다투는(striving) 사람이 아니라 다툼을 당하는(striving) 사람이었다. 그는 화평을 위했지만 그가 말할때에는 사람들이 싸우려고 하였다. 그들이 무슨 주장을 하든지 간에 다툼의 실제 이유가 된 것은 하나님과 백성의 영혼에게 대한 선지자의 충실성이었다. 선지자는 그들에게 그들의 죄를 보여 주었고 그 죄는 그들의 파멸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그 파멸을 방지하는 길로 그들을 끌어들이려 하였다. 이것은 선지자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대의 호의였다. 그럼에도 이 때문에 그들은 그에게 격분하였고 그를 원수로 간주하였다. 심지어 화평의 왕 자신도 이처럼 다툼의 사람이 되셨고 자기에게 대한 죄인들의 거역을 끊임없이 참으심으로써(히 12:3) 이 말씀의 표적이 되셨다. 화평의 복음은 분쟁을 가져오며 심지어 불과 검을 가지고 온다(마 10:34, 35; 눅 12:49, 51). 이제 이런 일은 예레미야를 참을 수 없는 정도로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것이 마치 자기를 낳은 모친의 잘못이기라도 하듯, 또 그런 불안한 생활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더 나을 뻔 하였다는 듯이 "내게 재앙이로다. 나의 모친이여! 모친은 나를 낳았도다" 고 부르짖는다. 아니, 그는 마치 그의 출생시에 동쪽 지평선 위로 떠오르는 주성(主星) 때문에 이런 운명이 결정되기라도 한냥, 모친이 자기를 다툼의 사람으로 낳았다고 성내고 있다. 만약 그가 이런 식의 의도를 품었다면 그의 믿음은 틀림없이 이만 저만 약한 게 아니다. 우리는 오히려 이 말씀이 그의 개인적 형편에 대한 애절한 통곡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극히 조용하고 온순한 자라도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긴다면 왕왕 분쟁하는 자가 되는 수도 있다. 우리는 화평을 길을 수 있을 뿐이다(딤후 2:22; 히 12:14). 우리는 한쪽 당사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로서는 할 수 있는 대로 평화할 수밖에 없다(롬 12:18).

(2)기질이 온순한 자들로서는 자기들과 끊임없이 다투려고 하는 자들 속에서 지낸다는 것이 매우 불편하다.

(3) 우리는 이웃과 바라는 만큼 평화롭게 지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마음의 평정을 잃고 안절부절못할 정도로까지 동요되어서는 안 된다.

2. 그는 경멸과 오만불손과 비난을 무수히 경험하였다. 그들은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전부가 예레미야를 저주하였다. 그들은 그를 민심교란자와 파쟁적 인물로 낙인찍고 그에게 불화의 선동자와 치안 교란의 원흉이란 오명을 덮어 씌웠다. 그들은 예레미야를 축복하고 그를 위해 하나님을 송축해야 마땅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적개심이 극에 달하여 하나님 때문에 그의 사자를 저주하고 욕하고 잘못 되기를 빌며 그를 보기 싫은 존재로 만들기 위해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가 그렇게 행하였다. 유다나 예루살렘에는 그에게 좋은 말을 해 줄 친구가 하나도 없었다. 극히 훌륭한 사람에게 극히 악한 평판이 분깃으로 돌아 오는 수가 왕왕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들은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 같이 핍박하였으니라" (마 5:12). 그러나 누구든지 예레미야가 틀림없이 모종의 일로 그들을 도발하였을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그가 이렇게 망연자실할 리가 없다고 의심하기 쉽다. 허나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다. "내가 채권자도 채무자도 되지 아니하였다." 이 말씀의 의미는 너무나 개괄적이다.

(1) 이 세상 사업을 많이 취급하는 자는 왕왕 분쟁과 다툼에 휩쓸리게 된다는 것이 본문의 요지이다. meum et tuum-즉 내 것과 네것을 분쟁의 주범이다. 빌려주는 자와 빌리는 자는 고소를 하고 고소를 당하며 크게 거래하는 자는 흔히 큰 원한을 사는 법이다.

(2) 그것은 예레미야가 아주 사려 깊었다는 증좌였다. 이것이 기록된 것은 그가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이래 이 세상사에 말려들지 않고 그런 것에서 초연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레미야는 자기 일에 보다 전념하고 세속이익을 꾀한다는 혐의를 추호도 받지 않으려 했으며 남과 사단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돈을 대출하지 않았다. 그는 고리대금업자도 아니었고 빌려 줄 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을 꾸지도 않았다. 그는 물건을 구입하는 자도, 상인도, 낭비자도 아니었던 때문이다. 그는 이 세상과 이 세상 것에 완전히 죽은 자가 되었다. 그가 먹고 마시고 입는 데는 아주 적은 것으로 족하였다. 우리는 그에게는 부양할 아내나 자식이 없었다는 것을 읽게 된다(16:2).

(3) 그는 비록 이렇게 분별있는 처신을 했고 누가 생각해도 모든 자의 존경을 받아야 마땅했는데도 그 시대의 불의 때문에 모든 자의 반감을 사고 있었다. 하나님을 송축하리로다. 사태가 우리에게 아무리 불리하다고 하더라도 미덕을 칭찬해 줄 자가 있는 한 그 일은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또 극히 사려깊게 행동하는 자들은 설사 당연히 받을 존경과 존중을 얻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상에게 생각하지 말 일이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요일 3:13).

Ⅱ. 이 불평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비록 이 불평 속에는 노여움과 연약함이 뒤범벅되어 있긴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 불평을 은혜로이 인지하셨다. 왜냐하면 선지자가 수욕을 당한 것은 당신을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1. 하나님께서는 이 대답 속에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그가 결국 폭풍을 뚫고 나아갈 것이며 드디어 편안하게 되리라고 확신을 주신다(18절). 그의 이웃은 그가 직분을 수행하느라고 행한 일로 그에게 트집을 잡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용납하시고 그의 편을 들겠다고 약속하셨다. 원문에는 맹세의 형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만약 내가 너를 돌보지 않거든 나를 신실한 자로 여기지 말아라. 내가 진실로 네 남은 것 즉 네 여생(우리 성서와 다름:단어의 뜻은 그렇다)을 복되게 하리라. 너의 남은 날을 지금까지 보다 더 안락하게 되리라." "네 종말은 복되리라" 고 갈데아 주석은 읽는다. 그 길이 아무리 험난하더라도 그 결국이 복되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큰 의지와 충분한 후원이 된다는 점을 명심하자(시 37:37). 그들에게는 아직 남은 것이 있다. 그들은 무엇인가 뒤에 남아있는 것을 가지며 예비되어 있는 것을 소유한다. 그것은 그들의 모든 불행을 상쇄시키고도 남을 만한 것이다. 이것에 대한 소망은 그들을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다. 예레미야는 자기 동포가 자기를 성가시게 한 것 외에도 자기가 미리 내다본 국민적 심판의 임박을 생각하고 불안해했던 것처럼 보인다. 비록 그가 이 점을 언급하진 않았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각을 아시고 모세에게 하셨듯(출 4:9) 대답하신다. "내 친구들도 나를 이토록 학대한다면 내 원수들은 어떠할 것인가?" 란 것이 예레미야의 생각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서 이런 종류의 각오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적합할 것으로 생각하셨다(12:5). 그러나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약속으로 그의 마음을 진정시키신다. "내가 진실로 네 대적으로 재앙과 환난의 때 곧 네 주위의 모든 것이 황폐하게 될 때에 네게 간구하게 하리라" (11절). 하나님께서는 모든 자의 마음을 당신의 수중에 장악하시기에 자기 종들이 극히 두려워하는 자들의 마음도 돌이켜서 그들에게 은총을 베풀도록 하실 수 있다는 데 주목하자. 또 여호와의 선지자들은 자칭 여호와의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에게서 보다 공공연한 대적들에게서 더 정당하고 더 나은 대접을 받는 수가 있다. 환란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면 매우 위협적으로 보인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자. 왜냐하면 그 일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 보다 더 나은 것으로 판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약속은 느부갓네살이 도성을 점령하자 수비대장에게 예레미야를 선대하며 그가 운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주라고 명령했을 때 이루어졌다(39:11, 12).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 즉 "철이 어찌 능히 북방의 철과 놋을 꺾으리요?" (12절)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를 쇠 기둥과 놋 성벽이 되게 하였다(1:12)는 약속과 비교해 볼 때 그에게 대한 위로를 의도하는 말씀같이 여겨진다. 백성들은 예레미야와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었고 강철같이 억세고 단단하였다. 그러나 위로부터 오는 권능과 용기로 무장한 예레미야는 천연적으로 강한 북방의 철과 같고 인공적으로 단련된 쇠와 같다. 그러기에 그들은 예레미야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이 말씀을 에스겔 2장 6절, 3장 8,9절과 비교해 보라). 예레미야는 승리를 확신할 때 그들과의 싸움을 보다 잘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원수와 박해자들이 심판의 폭풍 속에서 행방불명이 될 것이며 결국 멸망할 것이며 이 일로써 그의 입에 담으신 하나님의 말씀은 성취될 것이며 그는 참된 선지자로 증명될 것이라고 그를 확신시키신다(13,14절).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말씀을 선지자로부터 백성에게로 돌리신다. 12절 말씀은 그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누가 능히 철 곧 북방의 철과 놋을 꺾으리요?" 그들의 용맹과 힘과 노력이 제아무리 굳세고 활기차다고 해도 하나님의 계획이나 갈데아 군대와 겨룰 수 있을 건가? 갈데아 군은 북방의 철과 쇠처럼 불굴이며 무적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 운명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네 사경의 모든 재산과 보물로 탈취당하게 내어 줄 것이며 그것은 그들에게 값싸고 손쉬운 먹이가 될 것이다. 선지자는 가난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그는 꾸어 주지도 빌리지도 않았다. 그는 잃어버릴 것도, 재산도, 보물도 갖지 않았다. 그러므로 원수들은 그를 잘 대우할 것이다. cantabit vaccus coram latrone viator-즉 가진 게 없는 나그네는 강도가 접근하면 그에게 축하할 것이다. 그러나 현찰로든 부동산으로든 큰 재산을 소유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소유 때문에 살해될 것이다. 또는 적군이 그들의 많은 재산을 보게 되면 그들을 가혹하게 고문하여 더 많은 것을 자백하게 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징계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불위를 인함이다. 그것은 "네 모든 죄로 인함" 이며 "네 모든 사경" 에서 있었던 죄 때문이다. 전국 방방곡곡 심지어 극히 멀리 떨어진 벽지조차 국가적 죄악에 관여하였으므로 모두가 이제 셈을 치르게 될 것이란 말씀이다. 한 지파는 지파에게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 되었다. 그것은 "네 모든 사경에서 저지른 네 모든 죄를 인함" 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이 탈취되는 것을 볼 때까지 집에 머물러 있다가 포로로 잡혀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여생을 비참한 노예 생활 중에서 보내게 될 것이다. "내가 바로 네 대적과 함께 네가 알지 못하는 땅에 이르게 하리라. 네 대적은 의기양양하게 너를 끌고 갈 것이며 너는 거기서 아무런 위안을 기대할 수 없으리라."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결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맹렬한 불이며 그 불은 그들을 사를 것이다. 만약 제 때에 꺼지지 않는다면 그 불은 영원히 사를 것이다.

 

15:11 없음.

 

15:12 없음.

 

15:13 없음.

 

15:14 없음.

 

15:15

하나님께 대한 선지지의 겸손한 호소(예레미야 15:15-21)

우리는 전처럼 다음과 같은 내용을 대하게 된다.

Ⅰ. 예레미야 선지는 하나님께 겸손한 말씀을 여쭙는다. 그 말씀에는 선지자 자신의 순진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당한 고생에 대한 의견 제시가 들어 있다. 우리를 괴롭히는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에게서 가서 호소할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은 위로가 된다. 우리는 그 앞에 우리 사정을 늘어놓을 수 있으며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한 이 선지자처럼 그의 전능하심에다 호소할 수 있다. 그의 호소는 이렇다. "주께서는 나의 성실함을 아십니다. 사람들은 나의 성실성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당신께서는 사람들이 눈여겨보기를 경멸하는 나의 고통을 아십니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선지자는 간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15절)

(1) 그는 하나님이 자기의 사정을 살피시고 자기를 유의하시도록 기도한다. "여호와여! 나를 기억하소서. 나를 영원히 생각하소서."

(2) 그는 하나님께서 힘과 위로를 자기에게 전달해 주시도록 기도한다. "나를 권고하소서. 나를 기억하실 뿐만 아니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신다는 것을 나로 알게 하시며 주께서 내게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알리소서."

(3)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학대자를 대적하사 자기 편을 들어주시도록 기도한다. "주께서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소서. 아니,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서 나를 변호하소서.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소서. 나를 해명하기에 필요한 만큼만 심판을 실시하시며 그들이 내게 잘못 행했다는 것을 인식하기에 필요한 정도로만 심판하소서." 이 선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그 이상 복수해 주시는 것은 원하지 않을 것이다(참소자가 아무리 반대되는 말을 하더라도). 예레미야는 의인이며 그가 섬기는 하나님도 의로우시다는 두 가지 사실을 세상 사람에게 납득시킬 모종의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4)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살려 주시고 산 자의 땅에 계속 남아 있다록 해 주기를 기도한다. "돌연히 치심을 인하여 나로 멸망치 말게 하옵시며 주의 오래 참으심을 인하여 내 날을 장구하게 하소서." 극히 선한 자라도 자기가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입기 쉬운 존재여서 생명을 부지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내하시는 덕분이라고 고백한다. 또는 "주께서 나의 박해자들에게 오랜 고난을 내리사 그들로 나를 멸망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라고 읽을 수도 있다. 그는 격정을 이기지 못해 자신의 출생을 불평했지만(10절) 여기에서는 죽음의 재촉을 원하지 않는다. 생명은 자연의 아름다움이며 유용한 자의 생명은 은혜 세계의 아름다움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사에서 데려 가시기를 위함이 아니니이다" (요 17:15).

2. 그가 자기 원수들과 박해자들과 중상자들에게 대항해서 하나님께 자비와 구원을 요청한 근거는 무엇인가?

(1) 이 일에는 하나님의 명예가 걸려 있다. "주를 위하여 내가 치욕당하는 줄을 아시옵고 또 그 일을 알리소서." 자기 자신의 잘못과 어리석음 때문에 남에게 비난받는 자들은 그 비난을 참을성 있게 들어야 할 만한 큰 이유가 있으나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변호하시리라고 기대할 만한 이유는 전혀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선행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의로운 연고로 온갖 욕설을 먹는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명예와 함께 우리 명예를 변호하실 것으로 소망해도 좋다. 16절 말씀도 같은 취지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그의 원수들이 그를 미워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고 또 이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인정해 주시고 편들어 주시기를 즐겨 기다렸던 것이다.



(2)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요구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종사하였다. 그는 자신의 영혼 가운데 역사하는 말씀의 능력과 즐거움을 체험하였다. 따라서 그가 성령의 은혜도 받았고 이로 인해 은사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자격을 생겼다. 우리는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나이다" (마 7:22)라고 말할 수 있던 자가 하나님께 배척받는 것을 보게 되는데 예레미야는 이보다 더한 말을 할 수 있었다(16절). "내가 주의 말씀을 얻었고 찾았나이다" 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성경을 뒤졌고 율법을 부지런히 연구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부흥시키는 요소를 그 안에서 얻었다. 우리는 구하면 얻게 될 것이다. "그 말씀을 나에게 주셨다" 고 그는 말한다. 그는 말씀을 남에게 전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 말씀은 그가 얻을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었고 영감으로 그에게 전달되었다. "내가 주의 말씀을 맛볼 뿐만 아니라 먹기도 했나이다. 나는 그 말씀을 완전히 받았고 그 말씀과 친하게 교제하였나이다. 나는 굶주린자가 음식 대하듯 그 말씀을 환영했나이다. 나는 말씀을 즐겼고 소화했으며 in succum et sanguinem-즉 피가 되고 영이 되게 했나이다. 나 자신은 남에게 전하기로 되어 있는 진리의 모형으로 되었나이다" 라고 그는 말한다. 에스겔 선지는 두루마리를 먹으라는 말씀을 들었다(겔 2:8; 계 10:9 참조). 그는 "내가 주의 말씀을 먹었더니 그것이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되었나이다. 그 어떤 것도 이보다 더 즐거울 수가 없었나이다" 라고 말한다. 다음 것을 잘 이해하자.

[1] 그가 전해야 할 말씀 자체. 그는 자기에게 소중한 조국의 파멸을 예언해야 했다. 그는 조국의 패망에서 깊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조국애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에 삼켜 버린 바 되었으며 이런 진노의 말씀조차 하나님의 메세지였기에 그를 만족시키는 것이 되었다. 그는 또한 처음에 백성이 그 경고를 받아 들여서 심판을 예방할 것이란 소망으로 즐거워하였다.

[2] 이 메시지를 전하라고 그가 위탁받은 임무. 그가 부르심을 받아 맡게 된 일은 세속적 이익이 따르는 일이 아니라 정반대로 경멸과 핍박을 받기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 일은 하나님을 섬기고 선을 행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는 이 일을 즐거워하였고 이 일에 종사하는 것을 기쁘게 여겼다. 자기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것은 그의 양식이었다(요 4:34).

[3]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 하나님께서는 그를 도우시며 그의 일에서 그를 인정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렘 1:8). 그는 하나님의 그 약속을 만족히 여겼고 그것에 의존했으며 따라서 그 약속이 어긋나지 않기를 소망했다.

(3) 나중에는 거의 만곡을 느끼지 못했을 망정 그는 가능한대로 온갖 진중함과 성실함과 자기 부인으로써 직무에 전심전력하였다(17절).

[1] 자신을 전적으로 직무에 바치며 자기 일에 어긋나는 것은 하나도 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위안이 되었다. 그는 기분 전환을 위해 그 직분에서 떠나는 일이나 그 일에 부적합한 일은 전혀 행하지 않았다. 그는 어울리지 않는 교우 관계를 맺은 일도 없었고 심지어 합법적 오락까지 거부하였으며 경박하게 보이는 일이면 무엇이든 금하였다. 이것은 그런 일 때문에 자신이 보잘것없이 되거나 존중을 덜 받게 될까봐 우려해서 한 일이었다. 그는 주의 손을 인하여 홀로 앉았으며 골방에서 매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여호와의 손은 힘있게 그를 붙잡아 계속 그의 일을 수행하게 하셨다(겔 3:14 참조). "이는 주께서 본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라." 그것은 곧 분노의 말 때문이었다. 이 백성에게 대한 진노의 말씀은 언제나 그를 수심에 잠기게 만들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멸시하더라도 자기 양심의 증언이 자기를 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자들에게 위안이 될 것이란 점을 잊지 말자. 즉 이것은 헛되고 어리석은 행동으로 자신의 모습을 볼품없이 만든 적이 없었으며 이 선지자가 그랬던 것 같이(10절) 이 세상 재물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이 세상 쾌락에 대해서도 자기를 죽였다는 양심의 증언을 말한다.

[2] 그의 불평은 자기 일에 즐거움이라곤 거의 없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것이 마음의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를 우울하게 만들었으므로 그는 기뻐하는 자의 회에 앉을 마음이 없었다. 그는 친구를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참으로 어떤 사람도 그를 좋아하지 않았던 때문이다. 그는 백성의 완고함과 백성에게 대한 자기의 수고가 거의 빛을 보지 못함에 안달을 내면서 앉아 있었다. 이 일은 그를 거룩한 분노로 채웠다. 선한 자들이라도 성질상 초조함과 불안함이 있다. 그들이 만약 그런 성질을 억누르긴 커녕 그런 기질에 맞장구를 치고 거기 빠져 들어감으로써 신앙의 즐거움을 많이 잃어 버린다면 약하고 어리석은 자가 아닐 수 없다.

(4) 그는 사뭇 격정적 충간을 드리면서 하나님의 긍휼과 약속에다 자신을 내어 던진다(18절).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그것을 완화시킬 조처가 취해지지 않음은 어찜이니까? 나의 대적이 나의 평화와 명성에 대해 끊임없이 가하는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않으며 나의 위안이나 명예를 회복시킬 어떤 일도 행해지지 않음은 어찜이니이까? 나는 이토록 소홀히 취급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나이다. 내게 임재를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내게 대하여 속이는 자 같으시리이까?" 우리는 이 말씀을 기꺼운 마음으로 최대한 선용하고 다음 두 가지에 대한 호소로 받아들인다.

[1]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호소. "나는 하나님께서 자기 종의 고통이 계속되지 않게 하시며 그 고통을 덜어 주실 것이고 그의 상처를 고칠 수 없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고치실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낙심하지 않겠노라" 라는 말이다.

[2] 그의 신실하심에 대한 호소. "주께서 내게 대해 속이는 자 같으시리이까? 아닙니다. 나는 주께서 그렇지 않으실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말해야 하는 인간이 아니십니다. 생명의 샘되신 주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대해 결코 마르는 물같지 않으실 것입니다."

Ⅱ. 이 말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응답(19-21절). 선지자의 말속에서 여러 가지의 인간적나약성이 많이 노출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선하신 말씀과 위로의 말씀으로 응답해 주신다. 이는 그가 우리 체질을 아시기 때문이다(시 103:14). 다음을 관찰하자.

1. 하나님이 여기서 그에게 내세우시는 조건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앞으로 은혜를 주시는 데 대한 조건을 요구하신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위해 많은 것을 행했고 또 하나님 때문에 수난도 많이 당하였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인정해 주실 것이다.

(1) 그는 냉정을 회복하여 자기 일에 만족하고 다시 화해해야 하며 전처럼 불평해서는 안 되었다. 그는 돌아와야 했고 이 신뢰치 않고 만족치 않는 생각과 혈기를 떨쳐 버려야 했으며 그런 것에 굴복해서는 안 되었다. 그는 다시금 자기 자신을 평화롭게 소유하고 향유해야 했으며 편안하도록 결심해야 했다. 우리가 어쩌다 불쾌한 기분과 흥분에 빠지면 돌아오는 일 곧 마음의 평정을 회복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스스로 도울려고 노력하는 뒤에라야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2) 그는 자기 일에 신실해야겠다고 결심해야 했다. 그는 스스로의 신실성을 인정할 수 없는 한 하나님의 보호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를 부실하다고 비난할 이유도 전혀 없었고 하나님도 그의 마음이 성실하다는 것을 아셨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이런 경고를 내리시는 것이 적당하다고 판단하셨다. 의무를 행하는자들은 자기 의무에 대해 말듣는 것을 나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두 가지 일로 그는 신실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 그는 자기 설교를 듣는 자들 중 이런 자와 저런 자를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너는 천한 것에서 천한 것을 취해야 한다." 의인은 아무리 비천하고 가난하다 하더라도 귀한 자이다. 악인은 아무리 돈이 많고 권세가 당당하더라도 천한 자이다. 우리의 회중에는 이런 자들이 뒤섞여 있으며 마루에는 밀과 겨가 함께 널려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이름으로 구별하지 말고 그 인품으로 구별해야 한다. 우리는 각자에게 제 몫은 주어야 한다. 귀한 성도에게는 위로의 말을 함으로써 응분의 대우를 해야 하고 죄인에게는 두려움의 말을 함으로써 응분의 대우를 해야 한다. 의인의 마음을 슬프게 하지 말며 악인의 손을 굳게 하지 말고(겔 13:22)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해야 한다(딤후 2:15). 목회자들은 자기에게 소중히 여겨지는 자들을 마음속에 받아들여야 하며 예레미야처럼 홀로 앉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자기들이 유익을 줄 수도 얻을 수도 있는 자들과의 교제를 지속해야 한다.

[2] 그는 자기 자신의 훈계를 고수해야 하며 그 교훈을 조금도 바꾸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네게로 돌아 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 즉 그는 백성들을 하나님의 의사대로 양육하기 위해 자기 설교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하나님의 뜻에 부응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그에게서 도망쳤고 하나님께서 은총을 내리시마고 하신 조건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자들은 "네게로 돌아올 것이며 생각을 다시 하여 조건에 응하고 계약을 맺도록 하라" 는 것이다. "너는 그들에게 돌아가지 말지니라." 이 말씀은 규정한 것 이상으로 그들의 일을 편하게 해 주려고 생각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이나 생활이 하나님의 율법한테로 나아와야 하는 것이며 그 율법에 순응해야 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율법이 인간의 마음이나 삶에게로 내려와서 순응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2. 이런 조건을 이행할 때는 어떤 것을 주시겠다고 하나님은 그에게 약속하시는가? 그가 이를 선히 실증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실 것이다.

(1)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을 진정시키실 것이며 현재 소용돌이치는 그의 심령을 평온하게 해 주실 것이다.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네 영혼을 소생시킬 것이다" (시 23:3 참조). 어느 때든지 정도에서 곁길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로 결심하는 자가 있다면 그가 아무리 선하고 강한 성도라고 해도 다시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2) 하나님께서는 그를 선지자로서 봉사하게 하실 것이다. 선지자는 그토록 악한 시절에도 자기 삯이 되기에 충분한 위로와 명예를 자기 일 속에서 얻었었다. "내가 너를 내 앞에 세울 것이며 종이 자기 주인에게 하명을 받듯 내 교훈을 받게 할 것이다. 너는 사자가 자기를 보내는 임금의 입이듯이 백성에게 내 메시지를 전하는 입같이 될 것이라." 신실한 목사는 하나님의 입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교역자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입으로 간주해야 하며 하나님의 의사를 말로 전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해야 한다(벧전 4:11).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그런 자로 간주해야 하며 그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들어야 한다. "만일 네가 네 교훈을 굳게 지키면 너는 내 입같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 입같이 되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을 잘 살피자. 하나님께서 그런데 교역자들이 기록된 말씀에 의거하는 만큼만 그들의 편에 서실 것이다. "너는 내 입같이 될 것이라" 는 말은 "네가 하는 말은 나 자신이 말한 것처럼 실행될 것이라" 는 뜻이다(사 44:26; 삼상 3:19).

(3) 그는 직무 수행 중 부닥치는 많은 어려움을 능히 감당할만한 용기와 힘을 얻게 될 것이며 그의 심령도 다시는 지금처럼 약해지지 않게 될 것이다(20절).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라. 폭풍이 맹렬히 몰아치고 휘갈기나 끄덕도 하지 않는 놋 성벽이 될 것이다. 너는 어떤 죄스런 굴종으로도 그들에게 돌아가지 말 것이며 은혜로 무장시켜 주시는 네 하나님을 경건한 결심으로 신뢰할지니라. 겁쟁이가 되지 말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로 담대하게 하시리라."

그는 자기가 다툼의 사람으로 났다고 불평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각오하라" 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너를 칠 것이며" 적대 행위를 계속할 것이지만 "너를 이기지 못할 것이며 너를 네 일에서 쫓아내지 못할 것이고 너를 산 자의 땅에서 끊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하나님은 그에게 이르신다.



(4) 하나님은 그의 보호자와 강력한 구조자가 될실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하여 건질 것이라."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자들은 구주를 모시고 있는 자들이다. 그 구주는 극히 흉맹한 원수라도 너끈이 요리할 만한 지혜와 힘을 소유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와 함께하여 자기에게 충실한 자들을 환난으로부터나 환난을 통하여 구원하실 것이다(21절). 그들은 악한 자의 손아귀에 떨어질지도 모르며 악인은 그들에게 두려운 존재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 악인의 손에서 구조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실 것이다(딤후 4:18). 그것은 충분한 구원이다. 보기에는 매우 두려운 것 같으나 결국 선한 사람에게 털끌만치의 해도 입히지 못하는 일은 허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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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28장
24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29장
23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0장
22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1장
21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2장
20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3장
19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4장
18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5장
17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6장
16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7장
15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8장
14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9장
13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40장
12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41장
11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42장
10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43장
9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44장
8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45장
7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46장
6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47장
5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48장
4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49장
3 예레미야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5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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