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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더 큰 고난을 각오하라(예레미야 12:1-6)

예레미야 선지는 하나님과 자기 영혼 사이에 있었던 일이 무엇이며 자기를 공격해 온 시험은 무엇이며 또 자기가 그 시험을 어떻게 극복하였는지를 남에게 알리는 것이 유익하리라고 믿어마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에게 다음 사실을 고하고 있다.

Ⅰ. 겸손한 어조로라도 하나님의 공평하신 판결에 대하여 변론하려 든다는 것은 매우 방자한 짓이 아닐 수 없는데 은혜롭게도 그는 그 허락을 얻었다(1절).

그가 하나님과 쟁변하려는 것은 언쟁하거나 그의 처사를 힐난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가 하시는 일의 의미를 해집고 들어가 봄으로써 흡족하게 여길 만한 이유를 더욱 더 많이 발견하며 자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처사에 대한 반대를 답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여호와의 행사와 그 이치는 이를 즐거워하는 자들까지도 다 연구한다(시 111:2).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으신 자와 다툴 수는 없지만(사 45:9) 그와 변론할 수는 있다.

선지자는 명명백백하고도 확실한 진리를 여기에 제시하는데 그는 이 토론을 전개하면서도 이 진리는 꼭 고수하려고 마음먹고 있다. "여호와여! 내가 주와 쟁변할 때에 주는 외로우시니이다." 이와 같이 그는 악인의 형통에 대한 담판에 들어가기에 앞서 악인의 변영을 부러워하게 하려는 유혹에 대하여 스스로를 무장시키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의미에 대하여 전혀 알 길이 없을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생각을 여전히 유지하도록 마음을 다지지 않으면 안 되며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어떤 피조물에게도 털끝만치의 부당한 일을 행하지 않으셨고 언제까지든 그런 일은 행하지 않으실 것이란 점만은 믿어야 한다는 데에 유의하자. 하나님의 판단이 큰 바다와 같아서 헤아릴 길이 없고 전혀 설명할 수가 없을 때에라도 그의 의는 태산과 같이 확연하고 움직일 수 없다(시 36:6). 때로 구름과 흑암이 그 주위에 둘려 있더라도 의와 공평은 그 보좌의 기초이다(시 97:2). 우리가 개개의 섭리를 이해하기 힘들다고 깨달을 때에도 우리는 우리의 제일 원리가 되는 일반적 진리에 의지해야 하며 그것을 고수해야 한다. 섭리가 아무리 불분명하더라도 여호와는 의로우시다(시 73:1 이하 참조).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 나오는 예레미야 선지처럼 하나님과 쟁변할 때조차 이 사실을 그에게 고백해야 한다. 논쟁할 생각을 품은 자로서가 아니라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는 의로우실 것이란 점을(시 41:4), 완전히 믿고 무언가 배울 생각을 하는 자로서 그의 의로우심을 시인해야 한다. 우리가 아는 정보로 하나님과 변론할 만한 명분이 아무리 뚜렷하다고 하더라도 그가 무슨 말씀과 어떤 행동을 하시든지 간에 그는 정당하시다고 인정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을 유의하자.

Ⅱ. 그에게 거침이 되고 그가 토론을 벌이려고 생각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 중 어떤 것이었는가? 많은 현인과 선한 자들이 시험을 당하고 그 시험의 극복을 어렵게 하는 것도 바로 악인의 길이 형통하며 악한 자의 도모와 계획이 성사됨을 목격하는 일이다. 악인이 악의에 찬 계획을 성취하며 그 목적을 이룬다는 것은 알지 못할 일이었다. 그들은 악인의 형편과 관심사가 양호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악인이 하나님과 사람에게 패역하게, 매우 패역하게 행하는 데도 그들은 다 안락하며 이 세상에서 행복할 수 있는 데까지 행복하게 지낸다. 여기서 뜻하는 것은 주로 위선자(2절에 나오듯)이다. 외식하는 자는 훌륭한 신앙을 고백하는 가운데 위장하고 있으며 선한 출발과 선한 약속을 중단한다. 이로써 그들은 아주 패역한 자이다. 그 행동이 부당하고 부정직한 자들은 번영을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해왔는데도 그들은 다 안락하다. 선지자는 그들의 형통과 형통에 대한 남용을 설명하고 있다(2절).

1. 하나님은 그들에게 매우 관대하셨고 그들은 세상에서 누구보다 유리하였다. 그들은 좋은 땅에 식민되었다.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다. "주께서 그들을 심으셨나이다. 아니,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기 위하여 이방인들을 몰아 내셨나이다" (시 44:2; 80:8). 또 심어도 자라지 않고 아무 것도 되지 못하는 나무가 많은데 그들은 뿌리가 박혔다. 그들의 번영은 확고하게 되고 정립되는 듯이 보였다. 그들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스스로 정착하며 모든 민족의 수액을 빨아올린다. 뿌리를 내리는 나무라 하더라도 자라지 못하는 나무가 적지 않은데 이들은 장성할 뿐만 아니라 열매도 맺었다. 그들의 가정은 확고하게 세워졌고 그들은 호화롭게 생활하며 씀씀이도 넉넉하였다. 이러한 모든 것이 그들에게 미소를 던진 하나님의 자애로우신 섭리의 덕분이었다(시 73:7 참조).

2. 그들이 비록 하나님께 패역한 행동을 하였으나 하나님은 이토록 그들을 총애하셨다.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 마음은 머니이다." 이 말씀은 무자비한 혹평이 아니었다. 그는 예언의 영에 의지하여 이렇게 말하였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외모가 그럴 듯한 사람들을 위선자로 질책하였다가는 무슨 화를 입을지 모를 터였다.

(1) 그들은 하나님께 대해 생각하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그에게 대해 진지한 애정을 품고 있지도 않았으나 하나님께 대한 말을 수시로 입에 올리고 진실한 표정을 애써 지으려고 하였다. 외부의 치아로부터 나오는 경건한 어려운 게 아니다. 참 이스라엘인이 아니면서 이스라엘의 언어를 구사하는 자들이 많다.

(2) 그들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성호를 즉시 부를 수 있고 경건의 냄새가 나는 언어 양식에 익숙해져 있으나 심중에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유지할 만한 신념을 없었다. 경건의 모양은 우리로 하여금 경건의 능력을 유지하도록 보증 해 주는데 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Ⅲ. 자기의 순전성에 대해 호소하는 가운데 그는 어떤 위로를 받았는가?(3절).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나이다." 그가 호소하고 있는 악인들은 아마 서슴치 않고 그를 비난하며 혹평하였을 것이다(18:18). 이에 대해 그의 위로가 된 것은 하나님이 그의 성실성에 대한 증인이시라는 사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입은 가까우나 마음은 멀리 떨어져 있는 그들과는 다르며 그들이 인식하고 있던 그런 부류의 사람도 아니고 그들이 묘사하는 대로 사기 예언자, 거짓선지가 아니라는 것을 아셨다. 오히려 그를 이렇게 흑평하는 그들이야말로 그를 알고 있지 못하였다(고전 2:8). "그들은 비록 내가 자기들의 주목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자라고 생각할지라도 여호와여! 당신께서는 나를 아십니다" 고 그는 외친다.

1. 그가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는 것은 무엇에 관해서인가를 살피자. "주께서는 주를 향한 나의 마음을 아시나이다." 우리는 우리 마음의 선악에 따라 선인도 되고 악인도 되며 우리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선하냐 않느냐에 따라 선악이 정해진다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가 하나님께 시인을 받기 위해서는 이 점을 면밀히 검토해야 하며 우리 마음을 살펴야 한다.

2. 그가 호소하는 인식 범위를 살펴보자. "주께서는 내가 나 자신을 알고 있는 것 보다 나를 더 잘 아십니다. 소문이나 보고에 의해 나를 아시는 게 아님을 주께서 나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지나가는 시선으로 흘낏 보신 게 아니라 나의 마음이 어떠함을 감찰하셨읍니다."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지식은 마치 그가 우리를 극히 엄밀하게 조사하시기라도 한듯 분명하고 정확하며 확실하다. 우리가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은 자신을 향한 우리 마음이 어떠한지 완전히 아시는 분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그는 위선자의 간사와 정직자의 성실을 다 아신다.

Ⅳ. 그는 하나님께서 이 악한 백에 대한 방침을 철회하셔서 그들이 비록 오랫동안 번영을 누려 왔으나 항상 형통하게 허락하지 마시기를 기도 드린다. "양을 잡으려고 끌어냄과 같이 모종의 심판을 내리셔서 그들을 이 기름진 초장에서 끌어내소서. 그리하여 그들의 오랜 번영도 결국 죽일 날을 위하여 넓은 장소에서 먹이며 예비해 둔양과 같다는 사실이 들어나게 하옵소서" (호 4:16). 하나님께서는 저들 악인이 자기들의 교만과 사치로 불의의 양을 채우며 그래서 그들의 멸망이 무르익기까지 그들을 통하도록 내버려두셨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 스스로가 화를 당해야 옳으며 그것은 꼭 필요한 공의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남에게 너무나 많은 화를 입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땅에서 끌어냄을 당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들은 그 땅에다 파멸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세대의 염병과도 같아서 그 땅에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더욱 더 많은 해를 끼쳤던 것이다(4절). "이 땅 거민의 악을 인하여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리이까?(그 땅에 내린 하나님의 심판 때문에) 여호와여, 자기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파멸시키는 자들을 형통하게 하실 것입니까?"

1. 그 땅이 심판을 받아 음하도록 한 것은 무엇인지 여기서 살펴보자.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며(풀은 타버리고 땅의 모든 소산은 흉작이 된다)따라서 짐승과 새들도 물론 멸절하게 된다(왕상 18:5). 이것은 오랜 한발이나 부족한 강우량의 결과였는데 요시야 왕의 통치 말기와 여호야김 치세 초기에 있었던 일로 보인다. 이것은 3장 3절, 8장 13절, 9장 10,12절에도 언급되며 뒤에 14장에서는 한층 완전하게 나온다.

그들이 이 자그만 심판으로 회개에 이르게 되었더라면 보다 큰 심판은 방지되었을 것이었다. 그 거민의 악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 옥토가 염밭으로 화했겠는가?(시 107:34) 그러므로 선지자는 이 악인들이 그들 자신의 죄로 인해 죽게 하시며 온 민족의 그들의 악때문에 수난을 당하지 않도록 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2. 그 악인들의 악한 언어는 무엇이었는지 여기서 살피자. "그들은 그가 우리의 결국을 보지 못하리라" 고 말하였다. 이것은 다음 두 가지 중 하나가 된다.

(1) 하나님 자신이 이 결과를 보시지 못하리라는 말. 무신론은 외식의 밑뿌리가 된다. 그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알랴?" 하고 말하기 때문에 입으로는 하나님께 가깝지만 그 마음은 멀리 있다(시 73:11; 22:13). 우리가 취하는 길이 무엇이며 그 길의 종점은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가? 그가 바로 본문에서 말하는 위선자이다.

(2) "예레미야는 우리의 결국을 보지 못하리라" 는 말. "그가 결국이 어떻게 될지 우리에게 묻고 어떤 주장을 하든지 간에 그는 우리의 결국을 예견할리가 없다." 즉 그들은 예레미야를 거짓 선지자로 간주하는 셈이다. 또는 "그의 주장이 어떻든 간에 그는 우리의 결국을 보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그를 살해할테니까" (11:21)이란 말도 된다. 다음 사실을 주목해 보자.

[1] 사람들은 온갖 악의 근저에는 자기들의 종말을 아주 멀리 설정해두거나 불확실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이 존재하고 있다(애 1:9).

[2] 전 피조 세계는 인간의 죄짐아래서 신음하고 있다(롬 8:22). 땅이 슬퍼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땅은 너로 인해 저주를 받았느니라(창 3:17).

Ⅴ. 그는 자신의 이런 원망에 대해 하나님께서 내리신 응답을 우리에게 주지시켜 주고 있다(5,6절). 선지자의 직무는 남에게 훈계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선지자가 훈계받는 것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사 8:11). 목사들은 가르칠 교훈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한테는 스스로 배워야 할 교훈도 있다. 목사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야 하며 자기 자신에게도 설교를 해야 한다.

예레미야는 아나돗 사람들의 악에 대해 매우 많은 불평을 하였다. 그들은 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형통했던 것이다. 이제 다음과 같은 사실이 그 불평에 대한 해답인 것같이 보여진다.

1. 그는 불평할 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용인되고 있다(6절). 아나돗의 제사장들은 그의 형제였으며 그 아비의 집에 속하였기에 그를 보호하려고 팔을 걷어부쳐야 마땅하였다. 그런 자들이 그에게 패역한 행동을 하였으며 그를 속이고 우호를 표방하면서 계획적으로 그에게 온갖 해를 가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많은 무리를 불러 그의 뒤를 따르게 하며 뒤에서 크게 외치게 하였다. 그들은 폭도를 모아 그를 덮치게 하여 일반 백성을 선동하여 그를 치게 하였다. 온갖 가능한 방법과 기술을 다 동원하여 그를 보잘 것 없고 밉살스런 존재로 보이게 하려 하면서도 그들은 박해하거나 자유를 박탈한 의도가 전혀 없는 것처럼 가장하였다. 그들은 좋은 말을 할지라도 실로 믿을 수 있는 존재가 못되었다. 그들은 친구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원수였다.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은 원수가 자기 집안식구이며 친절을 기대하였던 자들이 신뢰하지 못할 자로 판명되더라도 절대로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마 10:36; 미 7:5).

2. 그러나 그는 문제를 너무 과장했다는 말씀을 듣는다.

(1) 그는 동향인들의 불친절을 지나칠 정도로 마음 깊이 새겼다. 그들은 그를 피곤하게 하였다. 그나마도 그 땅은 평안한 땅이었고 그가 무사하리라고 신뢰하던 곳이었다(5절). 자신의 혈족에게 이처럼 증오박고 학대받는다는 것은 그에게 여간 슬픈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이 일로 마음에 혼란을 일으켰고 그이 심령은 이 때문에 침체되었으며 위축되었다. 그는 큰 동요를 느꼈고 큰 곤란을 당하였다. 아니, 그는 이로써 자기 일에 대한 자신감과 용기를 잃어버렸으며 예언하는 일에 대해 피로를 느끼기 시작하였고 예언을 포기하려고까지 생각하였다.

(2) 그는 이 일이 자기 근심의 시초에 불과하며 그 앞에는 보다 더 쓰라린 시련이 가로 놓여있다는 사실을 살피지 못하였다. 이 어려움을 끈기있게 참아 냄으로써 보다 큰 환란에 대비하려고 노력해야 할텐데 그는 불안감으로 말미암아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일을 감당할 자격도 갖추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며 숨이 아주 턱에까지 차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아나돗 사람이 입힌 훼손에 그처럼 심한 충격을 닫는다면 예루살렘의 관원과 대제사장들이 권세로 맹공격해 올 때는 어떻게 할려고 하는가?(그들은 후에 그렇게 하였다. 20:2; 32:2) 그가 소요도 위험도 거의 없는 평안의 땅에서 그토록 쉽사리 녹초가 되었다면 범람하여 숲속에 있는 사자들조차 겁에 질리는 때에는 어찌하겠느냐?(49:19 참조)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이 세상에 있는 한 우리는 환란과 고생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의 삶은 경주이며 전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달리다가 거꾸러질 위험 속에 있는 것이다.

[2] 보다 작은 시련으로 시작하시는 게 하나님의 통상적인 방법이기에 우리가 여지껏 만난 어떤 시련 보다 더 큰 시험을 예상하는 것은 우리의 지혜이다. 우리는 만탄 자와 싸우라고 소집될지도 모르며 아낙 자손들이 최후의 대회전을 위해 예비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3] 그런 시련에 대비하고 환난 중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해두는 것도 우리에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일이다. 우리가 요단의 창일한 중에 당도하게 될 때에는 우리의 완전성과 평안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 이것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4] 앞으로 있을 보다 큰 시련에 대비하기 위하여 우리는 현재의 보다 작은 어려움들을 소화시키고 우리의 기백을 유지하며 약속을 굳게 붙잡으며 상을 바라보고 우리의 길을 계속 달려가서 그상을 얻을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다. 어떤 훌륭한 해석자들은 이 말씀에 백성에게 하신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백성들은 심판을 경고받고도 매우 안심하고 있었으며 겁내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보다 작은 여러 재난으로 굴욕을 당하였고 가난하게 되었으며 앗시리아 인들로 인해서 피페케 되었었다. 암몬 인과 모압 인들은 그들의 형제국이었고 그들과 동맹을 맺은 자들이었지만 그들을 속였다는 게 입증되었다(물론 이스라엘 자신도 속이려고 하였기에 그랬겠지만).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그들이 갈데아와 같이 강대한 대적은 어떻게 당할 수 있겠는가? 요단의 창일함처럼 밀려오는 침략에 그들이 어떻게 꼿꼿이 쳐들고 버티겠는가?

 

12:2 없음.

 

12:3 없음.

 

12:4 없음.

 

12:5 없음.

 

12:6 없음.

 

12:7

하나님의 아픔(예레미야 12:7-13)

여기에서는 유대 민족의 파멸이 작정되고 있다.

Ⅰ.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사이가 틀어지셔서 그들을 황폐하도록 내버려두셨다. 그들이 하나님을 격동시켜 자기들을 유기하시도록 하지만 않았더라면 결코 화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이 여기서 하시는 말씀은 무서운 말씀이다(7절). 성전은 하나님의 궁전이었다. 그들은 그 하나님의 궁을 오염시켰으며 그래서 그로 하여금 그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가 자기 산업을 내어던졌다는 것은 더 이상 돌보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이다. 그가 그토록 즐거워하여 보살피던 백성이 이제는 그의 보호하심으로부터 내던져짐을 당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 마음의 사랑하는 것이었으며 그가 보시기에 소중한 자들이었고 어떤 백성보다 더 존귀한 자들이었다. 사랑을 증오로 갚고 그토록 자비심을 품고 계신 분의 은총에서 스스로 뛰쳐나간 그들의 행위는 죄를 더욱 가중시키고 자기들의 불행을 심화시키며 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처사를 합리화시키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는 그들에게 등을 돌릴 기회를 결코 찾지 않으셨다. 그들이 어지간한 예의를 갖추고 행동하였더라면 그들은 최선의 대우를 받았을 터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마음의 사랑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처신을 잘못하여 그를 격동시켰고 따라서 그는 그들을 그 대적의 손에 붙이셨으며 무방이 상태로 버려두셨으며 그들에게 악의를 품고 있던 자들의 손쉬운 먹이가 되게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토록 오랫동안 소중히 여기시던 자기 백성과 다투시는 쟁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타락하였다는 사실이다.

1. 그들은 맹수와 같이 되었다. 맹수를 사랑하는 자는 아무도 없으며 누구나 될 수만 있으면 멀리 떨어지려고 피한다. 그러나 "내 산 업이 내게는 삼림 중의 사자같이 되었다." 그들의 죄는 마치 사자가 포효하듯 복수를 달라고 하늘을 향하여 울부짖는다. 아니,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소리를 발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들한테 외치는 선지자들에게 위협과 살륙이 노호를 발한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대적해서 한 말이나 행동을 곧 하나님 자신께 대한 적대 행위로 간주하신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호를 참람되이 말하며 그의 권위에 대항하고 그의 공의를 무시한다. 그래서 삼림 중의 사자처럼 그를 향하여 소리를 발한다. 하나님의 초장의 양떼였던 자들이 이제는 야만적인 탐식자가 되어 숲 속의 사자처럼 제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미워하셨다. 울부짖는 사자와 성난 맹수같이 되어버린 백성한테서 무슨 즐거움을 얻으실 것인가? 주위의 모든 자에게 성가심과 고통을 주는 맹수의 무리는 사살하거나 포획하는 게 적당하지 않겠는가?

2. 그들은 맹금류처럼 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집에 한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없게 되었다. 맹수나 맹금류는 성전 제사에 봉헌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내 산업이 내게 대하여는 발톱달린 매가 아니냐?" (이렇게 해석하는자도 있음) 그들은 끊임없이 서로 쫍고 찢는다. 도리에 닿지 않는 분쟁으로 그들은 나라를 하나의 주계장으로 만들고 말았다. 또 그들은 무늬있는 매처럼 되었다. 이것은 물감을 들였거나 뿌렸거나 아니면 먹이의 피를 뒤집어쓰게 된 매를 말한다. 무죄한 자의 피흘림이 예루살렘의 관영한 죄악이었고 또 그것은 그들의 멸망을 재촉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을 격동시켜서 그들을 치시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웃의 격한 적대 행위도 유발하였다. 자기 손으로 모든 사람을 치는자들은 모든 자의 손에 맞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창 16:12). 그래서 본문에서도 그런 논리가 전개된다. "매들이 그를 에워싸지 아니하느냐?" 이 새를 무늬있고 얼룩덜룩한 잡색의 매로 해석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어서 이방인의 미신적인 관습과 습속을 신성한 규례에다 혼합시켰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채로운 종교를 좋아했으며 실제로는 그것이 자기들을 보기 싫도록 만드는 데도 자기들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멧비둘기는 결코 무늬있는 매가 아니다.

Ⅱ. 여기에는 대적들을 데려다가 그들을 엄습하게 하며 황폐하게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흑자는 그들이 무늬있는 매에 비유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새들은 보통 기묘하고 진기한 색깔의 새를 보면 둘러싸고 소란을 떤다고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의 자녀들 가운데에서는 사람들이 기이히 여기는 자들처럼 되고 무늬있는 매처럼 된다. 그러나 이 백성은 자기들의 미련함으로써 스스로를 그렇게 만들었다. 하나님께서는 맹수와 매를 불러모아서 그들을 먹이로 삼으라는 명령을 내리신다. "모든 매는 그를 에워쌀지니 하나님이 그를 버렸음이니라. 그와 함께 모든 들짐승도 다와서 그를 삼킬지니라." 타인을 먹이로 삼는 자는 자신도 남의 먹이가 될 것이다. 그들 위에 내려진 황폐화가 하늘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 열방의 죄를 감소시키지는 않았으나 유다와 예루살렘의 불행은 아주 극대화시켰던 것이다. 새들과 짐승들은 아마 사도 요한 이 본환상(계 19:17)에서와 같이 살륙된 자들의 시체를 먹는 큰 잔치에 초대된 것이리라. 본문에는 갈데아 군대에 의한 철저한 국토 파괴가 가까운 장래에 확실히 행해질 일로 묘사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이 자기가 이미 예정한 것이며 자신이 딴 죄인의 죽음처럼 이 백성의 멸망도 즐거워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1. 이 땅의 관영한 죄악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언약과, 또 자기가 이전에 이 땅으로부터 받았던 존귀와 영광을 기억하심으로 말미암아 그가 이 땅에 대하여 얼마나 따뜻한 애정을 갖고 말씀하시는지 살펴보자. "이것은 내 포도원이요 내 분깃이며 나의 낙토이다" (10절). 하나님께서는 설사 자기 교회에 많이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친절한 관심을 품고 계신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그리고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어느 모로 보아도 교회에 대한 그의 만족감과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2. 그는 이 땅의 황폐화에 대해 얼마나 따뜻한 동정심을 갖고 말씀하시는지 살펴보자. "많은 목자가-이것은 아라비아 목자들이 양떼로써 공동 목초지의 풀을 쉽사리 다 먹어치우듯 군대로써 전국을 손쉽게 석권하고 병탄해버린 갈데아 장군들을 말함-내 포도원을 훼파하였다. 그들은 내 포도원의 가치와 나의 이해 관계를 고려하지도 않고 망쳐 버렸다. 그들은 최대의 무례함과 분개함으로써 나의 분깃을 유린하며 낙토되었던 곳을 황무지로 만들어 버렸다." 파괴는 전반적이었다(11절). 또 그 파멸은 전쟁의 칼날에 의해 이루어졌다. 훼멸하는자들 즉 갈데아 군사들은 평야를 통과하여 모든 고지에 이르렀고 천연의 요새나 인공의 성채 할 것 없이 모조리 점령하였다. "칼이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삼킨다. 원수의 칼에 노출되지 않은 곳은 하나도 없으며 무수한 침략군들은 그 비옥한 땅의 방방곡곡에 흩어져서 무릇 혈육있는 자가 평안치 못하도다." 이 재난을 면하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며 아무도 평온을 누릴 수 없을 것이다. 무릇 육신이 자기 길을 타락시킬 때에는 어떤 혈육도 평안을 얻지 못할 것이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들만이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다.

3. 이 모든 불행은 어디서 오는지 살펴보자.

(1) 그것은 하나님의 노여우심에서 유래한다. 삼키는 것은 곧 여호와의 칼이다(12절).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바짝 접근해 있을 때 그들을 보호하고 구원해 주는 자들의 칼은 곧 여호와의 칼이 된다. 기드온의 칼이 이를 증거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버림으로써 하나님이 자기들의 원수가 되셔서 자기들과 싸우시게 될 때는 침략하여 훼멸하는 자들의 칼이 바로 여호와의 칼이다. 이것은 갈데아 인의 경우가 입증하고 있다. 이것은 여호와의 칼이다. 이것은 갈데아 인의 경우가 입증하고 있다. 이것은 여호와의 분노를 인함이다(3절). 그들 중에 이 불을 사르고 그들의 원수들을 이토록 격노하게 한 것도 하나님의 노였다. 하나님이 진노하실 때 누가 능히 그 앞에 서리요?

(2)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으로 삼게 된 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다. 특히 이전의 책망에도 잘못을 고치려 하지 않은 데 있었다(11절). "황무지가 나를 향하여 슬퍼하는도다." 황폐하게 되는 땅은 하나님 앞에 호소를 쏟으며 하나님의 수하에 겸손히 굴복하지만 그 거민들이 너무나 몰지각하고 노둔하여 이를 개의하는 자가 없다. 그들이 발을 딛고 있는 땅도 그들은 수치로 여기는 데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애곡하지도 않으며 하나님의 불쾌하심에 전혀 무감각하다. 하나님의 손이 높이 들려 있어도 사람들이 그것을 보려고 하지 않을 때에는 그의 손이 닿는 날 그들은 혼나게 될 것이다(사 26:11).

4. 그들이 이같은 재난에 대하여 자신을 지키기에는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살펴보자. 그들이 밀을 심었다는 것은 자신들의 안전 보장을 위해 굉장히 수고하고 자기들의 노력에서 큰 것을 고대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모든 수고와 기대는 헛일이다. 그들은 가시를 거둘 것이니 그 모든 것을 매우 괴롭고 성가신 일로 판명될 것이다. 자기를 구하게 되기는 커녕 그들은 스스로를 더욱 불편하게 할 것이다. 그들은 노동과 기대로써 수고하여도 소득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자진하여 뛰어든 곤경으로부터 자신을 구출하는 데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그 소산으로 인하여 스스로 수치를 당할 것이며 전쟁 준비와 특히 전비의 부담 능력에 너무 지나친 의지를 했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군자금은 전쟁의 지주를 이루는데 그들은 전비가 충분하다고 생각하였으나 그것을 수치스러워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진노하시는 날에는 은과 금이 그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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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침입자들에 대한 경고(예레미야 12:14-17)

선지자들은 때때로 하나님의 이름으로써 이스라엘 땅에 인접한 모든 나라에게 심판과 자비의 메세지를 선포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모저모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피해를 입히고 그들을 압제하거나 그들의 압제를 의기양양하게 생각했던 모든 자들 전반에 대한 말씀이 나오고 있다.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

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문제거리로 삼으신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그의 악한 이웃" 이었으며(14절) 하나님의 교회에 악한 이웃이었다. 하나님은 교회에 대한 적대 행위를 자신에게 대한 적대행위로 간주하셨기에 "나의 악한 이웃" 이라고 부르셨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이웃답게 행동해야 했었지만 전혀 그 반대로 행하였다. 불친절하고 도발적인 악한 이웃 중에 살아야 하는 것은 선한 자들이 흔히 당해야 하는 운명임을 명심하자. 그런데 그 모든 이웃이 다 그럴 때는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들 악한 이웃은 모압 인과 애돔 인과 이웃이 되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하나님 자신의 악한 이웃이라고 부르신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들이 이스라엘을 황폐하게 만드는 수단이 되었고 갈데아 인과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공정하시게도, 우리가 범죄의 도구로 삼았던 자들을 이용하셔서 우리에게 대한 환란의 도구가 되게 하신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책임을 추궁하시는 일은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산업으로 준 산업을 그들이 다쳤다" 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소유가 아닌 것을 부당하게 점유하였다. 아니, 그들은 하나님의 선민에게 주어진 것을 외람되이 자기 전유물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라" 고 말씀하신 분이 또한 "그들의 산업을 다치지 말라. 너희가 그것에 손을 대면 목숨이 위태하리라" 고 말씀하셨다(대상 16:22; 시 105:15). 하나님의 백성은 그 생명뿐만 아니라 그의 재산까지도 하나님의 보호 하에 두고 있다.

Ⅱ. 그는 그들을 어떻게 처치하시려는가?

1. 그는 자기 백성에게 행사하던 그들의 권세를 꺾어서 그들로 반환치 않을 수 없도록 하시려고 하였다. "내가 유다 집은 그들 중에서 뽑아 내리라." 이것은 포로가 되었거나 피신을 위해 도망했다가 오히려 붙잡혀 죄수가 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큰 은총이 될 것이었지만 그들의 원수에게는 큰 굴욕이 될 것이며 먹이를 잃은 사자같이 될 터였다. 유다 집은 자기 자유를 위한 투쟁을 대담하게 전개할 수 없었으며 할려고도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은혜로우신 완력으로 그들을 뽑아 내실 것이며 자기 성령으로 그들을 나오게 하실 것이며 자기 능력으로 그들의 간역자들로 하여금 그들을 놓아 보내게 하실 터였다. 이는 마치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뽑아 내신 것과 같다.

2. 그는 자기 백성의 재난에 방편으로 삼았던 자들에게도 꼭 같은 재난을 내리시고자 하셨다. "내가 그들을 그 땅에서 뽑아 밝히리라."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되었으나 거기서 끝이 난 것은 아니었다. 느부갓네살이 이스라엘 땅을 폐허로 만든 뒤에는 그 모진 손을 돌려 이스라엘의 악한 이웃들을 침으로써 그들의 채찍이 되었던 것이다.

Ⅲ. 하나님께서는 자기와 연합함으로써 자기의 백성이 되려고 하는 자들을 위하여는 어떤 자비를 예비하고 계시는가?(15,16)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우상 숭배에 끌어들임으로써 그들을 타락하게 만들었고 자기들에게 합세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회개하고 돌아오는 백성에게 이끌려 살아계신 참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가담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대한 그들의 증오심을 용서받게 될 뿐만 아니라 이전에 가졌던 거리감도 제거될 것이었고 하나님의 이스라엘과 동일한 수준에 설 수 있도록 용납될 터였다. 이 일이 부분적으로나마 성취된 것은 포로에서 귀환한 뒤 이스라엘의 악한 이웃이었던 땅의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으로 되었던 때였다. 그리고 완전한 성취를 보게 된 것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으로 개종하였을 때이다. 이스라엘이 악한 이웃에게 침해를 당하더라도 그들에게 대한 앙심을 고집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화해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죄에 대한 공의심과 이스라엘의 명예에 대한 배려에 의하여 그들을 뽑아낸 후에 내가 돌이켜 내 행로를 바꾸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리라." 이방인이기 때문에 언약에 의한 자비를 주장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들은 창조주의 긍휼에 의한 혜택을 입게 될 것이다. 창조주께서는 이 모든 이유에도 불구하시고 그들을 자기 손의 작품으로 간주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피조물과 벌이시는 논쟁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이긴 하나 그래도 조정될 수가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이들처럼 이전에 이방인되었던 자들 뿐만 아니라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자들도 화목케 될 수가 있다(골 1:21).

1.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조건은 무엇이었던가? 언제나 전제가 되고 있는 것은 "그들이 내 백성의 도를 부지런히 배운다" 는 것이다. 즉 이것은 일반적으로 그들이 "내 백성" 으로서 행동할 때 걸어가야 할 기르며(그들이 과거에 곁길을 행했던 구부러진 길이 아님) "내 백성" 이 행하라고 지시받은 길이다. 다음 사실에 유념하자.

(1) 하나님의 백성의 길은 특별히 선한 길이다. 그 길의 선택에는 아무리 의견을 달리하더라도 그 길로 행하는 데는 전부가 의견을 같이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길이다. 거룩함과 천국 지향적 길, 사랑과 화평의 길, 기도와 안식일 성수 그리고 제도화된 의식에 열심히 참석하는 길 등이 하나님의 백성의 도이다.

(2) 하나님의 백성과 분깃을 같이 하며 그들과 결국을 함께 하려는 자들은 그들의 길을 배워야 하며 그 길로 행해야 한다. 또 그들이 행위의 기준으로 삼는 규칙을 관찰하여서 그 규칙에 일치해야 하고 그 규칙을 따라 걷는 그들의 발걸음을 주목함으로써 그들의 발자욱대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과 친밀히 교제함으로써 그들이 행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을 터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아주 많은 관심과 고통없이 하나님의 백성의 길을 마땅히 배워야 할 만큼 터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 길들을 부지런히 살펴보고 그 길로 행하는 것을 본분으로 삼으며 부지런히 찾으며(12:15) 부지런히 이루어야 한다(눅 13:24).

특히 그들은 하나님께 온갖 엄숙한 호소를 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롭게 해드를 줄 알아야 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시인하고 찬양하며 그의 공의대로 지키는 것을 말한다. 그것도 "내 백성을 가르쳐 바알로 맹세하게 한 것같이" 해야 하였다. 그들은 열심으로 바알에 의한 맹세를 가르쳤었던 것이다. 그들이 바알로 맹세한 것만 해도 아주 나쁜 일이었다. 게다가 남들한테도 그것을 가르쳤다는 사실은 더욱 악한 일이었고 이전까지 선한 가르침을 받아왔던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와 같은 짓을 가르친 것은 극히 악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결국 개심하려고만 든다면 열납될 것이었다.



[1] 우리는 극히 악한 자의 개종이 불가능하다고 체념해서는 안 된 다. 남들을 그릇되게 만들고 타락시키는 데에 한몫 거들었던 자들이라고 해도 회개에 이르게 될 수 있으며 그들도 뉘우치면 자비를 얻게 될 것이다.

[2] 우리는 남들을 악한 일에 끌어들이려고 애써 왔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과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주실 때에는 마찬가지의 열심으로 그들을 따라 선한 일을 행해야 한다. 따라서 죄악의 길에서는 선생되었던 우리가 의무의 길에서 그들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대한 거룩한 복수가 될 것이다.

[3] 속임을 당한 자의 회개는 심지어 속인 자의 회개를 유발하는 복된 계기가 될 수 있다. 이와 같이 도랑으로 함께 굴러 떨어진 자들이 때로는 거기서 함께 구출되는 것이다.

2.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돌아오실 때 이 은총의 표징과 열매는 무엇이겠는가?

(1) 그들은 그들 자신의 땅으로 환원되어서 재확립될 것이다(15절). 그들을 뽑으신 바로 그 손이 그들을 다시 심으실 것이다.

(2) 그들은 이스라엘의 영적 특권을 누릴 자격을 얻게 될 것이다. "그들이 유순하여 내 백성의 도를 배우고 규칙을 준수하며 내 족속의 규제를 받아들이려 한다면 그들이 내 백성 중에 세움을 얻게 될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집에 이름과 자리를 갖게 될 것이며-성전에는 이방인을 위한 법정이 있었다-그들 중에 세움을 입을 것이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과 연합하게 될 것이며 이전의 적의는 소멸될 것이다. 그들은 교화될 것이며 이 백성 중에 정착하게 될 것이다(사 56:5-7). 하나님의 백성의 길을 부지런히 배우는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된 특권과 위로를 향유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Ⅳ. 자기 주변사람들은 많이 여호와께로 전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악한 길에 매달려 있는 자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17절) "그들이 그리하지 아니하며 어느 누구라도 계속하여 버티려 한다면 내가 반드시 그 나라, 그 사람을 뽑아 멸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지배되지 않으려는 자는 그의 공의로 멸망을 받을 것이다. 불순종하는 나라가 멸망당할 것이라면 보다 선한 것이 기대되는 교회의 불순종은 어떻게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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