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언약을 기억하라(예레미야 11:1-10)
예레미야는 의로우신 주권자의 명령에 고의로 불순종하는 유대인들에게 대한 기소장을 작성하고 있는데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소하는 검찰관이 되어 있다. 이 고소를 한층 엄숙하게 하기 위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행한다.
Ⅰ. 그는 자기가 그들에게 대한 고소장을 작성하라고 받은 영장을 제시한다. 그는 자기 백성을 기소하기가 싫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말을 유다인에게 고하라고 그에게 명령하셨던 것이다(1,2절).
원문에는 이 말이 복수도 되어 있다. "너희는 이것을 고하라." 그 이유는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은 그가 자기의 모든 종 곧 선지자들에게 명령하신 것과 동일하였기 때문이다. 선지자들 중 어느 누구도 모세가 율법으로 한 말씀과 다르게 외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을 바로 그 율법을 의뢰하여 백성들을 가르쳐야만 했다. "이 언약의 말씀을 들으라. 너희 성경을 비추어 보고 그것에 의지하여 판단을 받으라," 예레미야는 이제 유다의 성읍들과 예루살렘의 거리에서 이 말씀을 선포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는 모든 자가 다 관련되어 있으므로 모두가 다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책망을 위한 것이든 확신을 주기 위한 것이든 선지자들이 외찬 모든 말씀은 언약의 말씀에 근거하였고 또 그것과 일치하였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들으라. 그래서 너희 자신과 언약을 비교함으로써 너희는 현재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곧 알게 될 것이다."
Ⅱ. 그는 그들의 위치의 기반이 되고 특혜가 규정된 약정서를 펼친다. 그들은 계약서의 취지를 망각하였다. 그들은 그 인가가 절대적이며 마음대로 행해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듯이 생활하였다. 아니면 계속적 의식의 준행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전부이라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듯이 행동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주장하신 것이 제사보다 나은 순종이었다는 것을 명명백백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그는 4절과 7절에서 "너희는 내 목소리를 청종하라" 고 말한다. 이 말은 곧 이런 뜻이다. "하나님을 네 주인으로 인정하라. 너희 자신을 그의 신하와 종으로서 그에게 바쳐라. 그의 마음과 의지가 선포하는 모든 것에 주의를 기울이며 그것에 순응하는 것을 본분으로 삼으라. 몇몇 일로 내가 명한 것을 행할 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명령을 좇아 행하라. 특히 도덕적인 의무를 본분으로 삼고 단순히 제의적인 것에 안주하지 말고 언약의 말씀을 듣고 행하라."
1.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처음으로 민족이 되게 하셨을 때 그들과 맺은 원래의 계약이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열조를 애굽 땅에서 처음 이끌어 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한 것이었다(4,7절). 그는 결코 딴 조건으로 그들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실 의사는없으셨다. 그는 쇠풀무에서 그들을 구출하셨을 때 그들을 위해 행하신 크신 일들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요구하신 것은 이것이었다. 그는 애굽인들을 섬기는 일에서 그들을 건져내셨는데 그것은 완전히 종살이였다. 그런 그들을 구출하신 것은 그들로 자기를 섭기도록 하시기 위해서였고 그를 섬기는 일은 완전한 자유였다(눅 1:74, 75).
2. 이것은 그 때 그들 앞에 지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상상할수도 없으리 만치 집요하게 요구되었다(7절).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열조를 구출하시고 자기와 언약을 맺도록 하셨는데 그 때 이것을 명하셨을 뿐만 아니라 간절히 경계하기도 하셨다. 모세도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면서 몇 번이고 이것을 반복해서 가르쳤다.3. 이것은 그들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맺는 조건이 되었고 그들의 큰 명예와 특권이 되었다.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나는 너희를 내 소유로 인정할 것이며 너희는 나를 너희 것으로 불러도 좋다." 이 말씀은 그들이 순종하기를 거부하면 더 이상 관계의 혜택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4. 가나안 땅이 그들의 소유로 주어진 것은 이 조건 위에서였다. "나의 목소리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 열조에게 한 맹세 곧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리라고 한 언약을 이루리라" (5절).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을 기꺼이 성취하려고 하셨으나 그러려면 그들도 조건을 충족시켜야 했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 약속은 무효가 되며 하나님이 그들의 소유를 박탈하신다고 해도 정당하다. 선한 행동을 조건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악한 행동으로 인해 쫓겨난다고 해도 그들은 억울한 대우를 받은 것이 아니었다. 순종은 임대차 계약에 의한 유보된 임대료였고 미불하고서도 재입주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5. 이 순종은 축복의 조건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저주의 벌금으로 요구되었다. 이 말씀이 여기에 처음으로 언급되는 것은(3절) 가능하면 그들로 여호와의 두려우심에 의해 각성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 언약의 말씀을 좇지 않는 자는 설령 일개 개인이라 하더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다. 하물며 반역하는 일단의 민족의 경우이랴! 언약에는 축복과 더불어 저주가 있다. 모세는 생명과 복뿐만 아니라 사망과 화도 그들 앞에 두었었고(신 30:15) 불순종의 치명적인 결과에 대해 따끔한 경고를 해 주었다.
6. 이 언약을 망각하지 않게 하고 시대에 뒤진 것이라 생각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수시로 그들에게 언약을 기억하라고 촉구하셨으며 자기의 종 선지자을 통하여 이 임대료를 끊임없이 요구하셨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미불에 대한 변명으로 결코 자기들이 지불 요구를 받아 본 적이 없다고 주장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던 날부터 오늘날까지(이 기간은 거의 천년간이었다) 여러 시기에 다양한 방법으로 순종의 필요성을 역설해 오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은혜의 수단을 누려 왔으며 그 은혜의 수단들이 얼마나 강력했으며 우리의 의문에 대하여 얼마나 빈번하게 지적하셨고 경계하셨는가를 설명하신다.
7. 이 언약은 동의를 받았었다(5절). "내가 대답하여 가로되 아멘 여호와여 하였노라." 이것은 선지자의 말로서 다음 세 가지 중 하나를 의미한다.
(1) 언약에 대한 선지자 자신의 동의와 언약에 혜택을 얻고자 하는 소원.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자에게 가나안을 주시기로 약속하셨다. 여기에 대해 선지자는 말한다. "여호와여! 내가 당신의 말씀으로 당신을 받아들입니다. 내가 순종하겠습니다. 나로 약속의 땅에 나이 분깃을 갖게 하소서. 가나안은 그 표징이니이다."
(2)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이 언약의 혜택을 얻게 하려는 선지자의 선한 의지와 선한 소원. "아멘, 여호와여! 저들로 이 좋은 땅을 계속 소유하게 하시며 쫓겨나게 하지 마옵소서. 그들에게 하신 약속을 이행하소서."
(3)이 안역에 대한 자기 백성의 동의. "그 때에 내가 백성의 이름으로 그렇게 되어지이다 하고 대답하였나이다." 이런 의미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백성이 언약에 대하여 동의를 선언하였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들이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며 순종하리이다" 라고 말했을 때는 이 언약의 교훈에 동의한 것이며 그들이 에발산 위에서 모든 저주에 대해 "아멘" 하였을 때는 언약의 형벌에 동의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엄숙히 약속하면 할수록 그 약속이 보다 영속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그들이 한 약속은 그렇지 못하였다.
Ⅲ. 그는 그들에게 계약 위반을 논고하는데 그 위반은 약정의 취소에 이를 정도로 심한 것이었다(9절). 하나님은 자기의 율법과 선지자를 통하여 "너희는 명받은 대로 내 목소리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잘 되리라" 고 누차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청종하지 않았다. 그들은 마음을 하나님의 계명에 바치지 않겠다고 작정했기 때문에 귀를 기울이는 일조차 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되도록이면 소리가 들리지 않는 먼 것으로 뺑소니치려 하였다. 그들은 각각 그 악한 마음의 강퍅한 대로(또는 상상대로) 행하였고 자신이 꾸며낸 일을 좇았다. 각 사람은 신앙의 행위와 일상 행동 가운데서 옳든 그르든,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자기 생각과 기분에 이끌리는 대로 행하였다(7:24 참조). 언약의 명령과 조거에 순응하지 않으려는 이상 그 언약의 저주 아래 들게 되는 것밖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행하라 명하여도 그들이 행치 아니한 이 언악의 모든 말로 그들에게 응하게 하리니 곧 그 언약 속에 내포된 모든 위협적 경고를 응하게 하리라."
언약의 말씀은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순종으로써 복받을 자격을 갖추지 않는다면 우리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저주 아래 들게 되는 셈이 된다.
하나님께서로부터 그들의 이탈과 반역을 더 악화시키는 사실은 그 일이 누구에게나 있었다는 점, 말하자면 동의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이다(9,10절). 많은자들이 공공연한 불순종 가운데서 생활하는 것은 예레미야 자신도 묵도하였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사태가 그의 생각보다 더 악하였음을 그에게 일려 주셨다. "그들 중에 반역이 있도다" (발견되다는 뜻임). 그 눈이 흑암에 숨기운 행위를 바라보시는 분이 그들에게서 음모를 발견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과 경건한 신앙을 거역하는 단체 행동이 있으며 하나님의 통치 기구를 전복시키고 사칭자들 곧 위조된 신들을 내세우려는 위험한 모의가 형성되었다. 이것은 그들이 악을 행함에 있어서 고의적이고 계획적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부지중에 하나님을 배반하게 된 것이 아니라 건방지게 고자세로 그에게 대한 반역을 저질렀다 . 즉 그들은 악을 행함에 있어서 간교하고 교묘했으며 신앙에 대한 음모를 굉장한 기술과 꾀로 진행시켰다. 그들은 다같이 이 계획에 가담하였고 반역자들이 흔히 그러하듯 서로 돕기로 약속하고 생사를 함께 하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그들은 꼭 이 거사를 성취하겠다고 결심하였다. 이것은 얼마나 저주받을 반역인가! 우리 시대에는 이런 자들이 없다면 좋으련만!
1. 그 반역은 무엇이었나?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뒤엎고 그것을 후퇴시키며 백성을 설득시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게 하며 주의하지 않도록 하려고 꾀하였다. 성서의 권위를 저하시키고 그 가치를 감소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행하였다. 그들은 백성을 유인하여 다른 신들을 좇아 섬기게 하며 우상에게 신탁을 묻고 우상을 시혜자로 삼아 그에게 빌게 하려고 꾀하였다. 그들에게는 인간의 이성이 신이 되고 신이 주는 지적 능력이 되며, 오류가 없는 재판관이나 성도나 천사도 그들의 신이 되로 이런 저런 민족의 신도 그들의 신이 되었다. 이와 같이 그들은 갖가지 구실로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여 한결같이 동맹을 맺고 있었다.2. 반역에 가담한 자는 누구인가? 이 음모에는 외국인 주모자가 다소라도 끼여 있을 것으로 누구나 예상하겠지만 실은 그게 아니었다.
(1) 예루살렘 거민이 유다인과 공모하고 있다. 도성과 지방이 딴 일로는 아무리 이견을 노출시킨다고 하더라도 이 일에서는 합심이 되고 있다.
(2) 이 세대 사람들은 그 앞 세대 사람들과 공모하여 신앙에 거역하는 전쟁을 세세토록 수행해 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자기들의 선조의 죄악에 돌아가서 열조를 뒤이어 일어난 죄인의 종류였다(민 32:4). 요시아 왕 때에는 개혁이 있었으나 그의 사후에는 백성들이 한때 포기했었던 우상 숭배로 되돌아 가버렸다.
(3) 열 지파의 나라인 이스라엘과 두 지파의 나라인 유다는 왕왕 견원지간의 적대 관계에 있었지만 하나님이 자기들의 열조와 맺은 언약을 파하는 데는 공동으로 모의를 하여서 열 두 지파가 같은 보조를 취한 셈이다. 이스라엘 집이 먼저 반역을 했지만 유다 집도 곧 그 뒤를 따랐다. 이 반역자들의 징계와 반역의 분쇄를 위해 하나님께서 엄한 방법을 취하시리라는 것외에 달리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 대해 이처럼 마음을 강퍅케 하고도 형통한 자는 아무도 없지 않는가? 이 돌을 굴리는 자는 그 돌을 자기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재앙(예레미야 11:11-17)
이 문단에는 하나님의 막대하신 진노가 포함되어 있는데 자기 백성의 죄가 아주 많이 포함되어 있는 앞의 말씀에 이런 진노의 말씀이 잇달아 나오리라는 것은 누구라도 당연히 예상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서 많은 악을 발견하시고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11절)는 말씀을 하신다고 해서 우리는 이상하게 생각할 수가 없다. 그것은 죄의 악(피해)에 대한 형벌이라는 재앙인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는 치료 방안도 구원책도 있을 수 없다. 명령은 내렸고 그 선고는 집행될 것이다.
Ⅰ그들은 스스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으며 하나님의 심판과 다투기에는 자신이 너무 약한 존재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이 피할 수 없고 어떤 발뺌에 의해서도 빠져 나올 수 없다는 것부터가 재앙이다. 하나님의 통치에 승복하려 하지 않는 자들은 그의 진노하심을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의 공의로부터 도망할 수 없는 뿐만 아니라 그의 인식으로부터도 도피할 수 없다. 재앙은 죄인을 추격하여 자기 스스로 헤어나지 못할 함정에 빠뜨리고 만다.
Ⅱ그들의 하나님은 도와주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도 그들에게는 결코 은총을 베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이다." 고난을 당하게 되면 그들은 과거에 소홀히 여기던 하나님을 찾을 것이며 전에는 말조차 걸려 하지 않던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그들이 성공을 바랄 수 있겠는가?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8절). 하나님께서는 이들처럼 자기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않으려고 하는 자는 그 기도조차 가증하게 여기실 것이라고 언명하셨다. 그래서 여호와의 말씀은 그들에게 치욕과 책망의 말씀이 되었던 것이다.
Ⅲ. 그들의 우상도 그들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12절). 그들은 그 분향하는 신들에게 가서 부르짖으며 자기들이 바쳤던 값비싼 예배 행위를 상기시킬 것이다. 영광을 돌렸던 우상들로부터 구원을 기대하면서 이런 행동을 하겠지만 그것은 헛 일이 된다. 그들은 자기들이 섬기던 신들에게 보냄을 당하겠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삿 10:14; 신 32:27, 28) 그 신들이 절대로 그들을 구원치 못할것이며 그들의 구원을 위한 그 어떤 일도 행하지 못할것이고 그런 가능성도 전혀 보여 주지 못할 것이다. 그 잡신들은 눈꼽만치의 위안도 주지 못할 것이며 그들의 고통을 제거해 주거나 경감시켜 주지도 못할 것이다. 어려울 때 친구가 되어 주시고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 되어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 (시 46:1). 우상은 제 자신도 돕지 못한다. 그런데 어찌 자기 예배자들을 도와 줄 수 있으랴? 세상과 육을 우상으로 삼고 있는 자들은 환난 날에 그것들을 의지해봐야 헛일이 될 것이다. 우상이 자기를 숭배하는 자들에게 실제로 자비를 베풀 능력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이 백성을 위해서도 친절심을 발휘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은 우상을 포옹하기 위해 참되신 하나님을 버렸으며 그 성읍의 수효대로, 아니 예루살렘 거리의 수효만큼이나 우상을 많이 세웠던 것이다(13절). 그들이 많은 우상을 두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자기들을 도와 줄 우상의 능력과 구원의 손속성을 의심하였으므로 몇몇의 우상이 소용에 닿지 않을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구석구석마다 우상을 산재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우상의 도움이 필요할 때 아무런 방해없이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거기 두시려고 택하신 도성이었다. 그 예루살렘의 모든 거리에 그들은 공공연하게 수치되는 물건의 단 곧 바알에게조차 수치가 되는 단을 쌓았다. 그들은 이 제단을 수치로 여겨야 옳았는데 이로써 여호와께 치욕을 돌리드리고 자신들은 혼란을 자초하게 되었다. 그러나 곤란을 당하게 된 이 마당에 그들의 많은 신들과 제단은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범죄를 악한 일로 부끄러워하지 않으려는 자들은 죄로부터 기대한 결과가 무익함을 부끄러워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Ⅳ. 예레미야의 기도도 그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할 터였다(14절). 하나님께서는 앞서 하신 말씀(7:16)을 여기서 다시 반복하신다.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이 친구의 도고에 의한 혜택을 받지 못하리라는 것은 선지자에게 대한 명령이나 백성에게 대한 협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에게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격려하지 않으셨고 기도의 심령을 분기시키려고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을 억누르시면서 백성들 전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중 남은 무리를 위해서, 그리고 그들에게 임하고 있는 현실적 심판으로부터의 구출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한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는 마음을 스며들게 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드려지는 기도는 들리지 않게 하셨다. 기도의 혜택으로부터 단절된 자들은 실로 슬픈 입장에 놓여 있는 자이다. "그들이 부르짖을 때에 나는 그들을 듣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너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자기 기도를 듣지 않으실 정도로 그의 은총으로부터 멀리 내쳐진 자들은 남아 자기들을 위해 기도를 해 준다고 하더라도 별다른 이득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을 유의하자.
Ⅴ. 신앙에 대한 그들의 고백도 그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터였다(15절). 그들은 원래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 였으며 배우자였다. 그는 독특한 언약에 의하여 그들과 혼인을 맺으신 분이다. 심지어 믿지 않는 유대인도 "조상들을 위하여 사랑을 입은 자" 라고 일컬어진다(롬 11:28). 그들은 그런 신분으로, 하나님의 집에 자기 자리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전 뜰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허용되었고 그들은 하나님의 제단에 참예하였다. 그들은 본문에서 거룩한 제육이라고 칭해지고 있는 화목제의 고기를 먹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거룩한 제육으로 영화로움을 받으셨고 그들은 그 위안을 받았었다. 그들은 이것을 자랑으로 삼았고 의뢰하였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인 동시에 그 집의 보호 하에 있는 그들에게 어떤 해로운 결과가 이를 수 있겠는가? 그들은 악을행할 때조차 기뻐하였고 이것을 자랑하였으며 굉장히 큰 소리로 떠들어댔던 것이다. 그들의 재앙이 있을 때(재앙과 악은 어원이 같기에 이렇게 해독하는 사본도 있음:역주), 즉 그들에게 환란이 임할 때에도 그들은 이 종교적 혜택을 기뻐하며 자기들의 신뢰할 것으로 삼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배척하셨고 그들 자신도 아주 자랑하던 특권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안심하고 의지하던 것에서 실망을 맛볼 터였다. 그들은 많이 행음하였으며 영적 매음죄를 범하여 많은 우상을 숭배하였다. 그러므로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성전은 그들에게 아무런 보장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음녀 특히 음행을 너무 자주 되풀이하다 보니 아주 방자하게 되어 도저히 회복될 길이 없는 음녀는 마땅히 떠나게 하고 문밖으로 축출하는 것이 적절한 일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나의 집에서 무엇을 하는고? 그녀는 그 짓으로 추문이 자자하여 나의 집의 치욕이 되었다. 그러므로 내 집은 더 이상 그녀의 피난처가 되지 않으리라."2. 하나님의 제단도 그들에게 아무런 만족을 주지 않을 것이며 그들은 그 제단으로부터 아무런 위로를 기대하지도 못할 것이다. "거룩한 제육이 그에게서 떠났다." 즉 성전이 유회장이 되어 버릴 때 "네 제사에도 종말이 곧 이를 것이라" 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네가 그다지도 자랑하던 거룩한 제육은 어디로 가 있을 것인가?" 제사의 거룩한 고기가 우리에게서 떠나더라도 거룩한 마음이 우리에게는 위로가 될 것이다. 은혜의 내적 원리는 은혜의 외적인 수단의 결핍을 메워 줄 것이다. 그러나 거룩한 제육의 떠나감에 성령의 떠나심이 동반된다면 우리에게 화가 아닐 수 없다.
Ⅵ. 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이전 은총도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터였다(16,17절). 환란을 당하고 있는 그들이 과거에 받은 은총을 기억한다고 해서 위안을 받을 수는 없는 터였고 하나님의 그들에 대한 기억도 구원을 유발시키지 못할 터였다.
1.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큰 일을 행하셨음은 사실이다. 그 백성은 세상의 어떤 민족보다 은총을 많이 받았고 이를테면 하늘의 총아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이름을 일컬어 푸른 감람나무라고 하셨고 실제로 그렇게 만드셨다. 하나님께서 그릇 명령하시는 법이라고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들을 심으셨고(17절) 결실을 많이 맺고 번성하는 백성으로 만들기 위하여 가능한 온갖 이점을 주어서 한 민족으로 형성시키셨으니 그들의 율법은 그토록 선하였고 그 토지 또한 그토록 아름다웠다. 그렇게 심고 물주고 가꾼 백성이라면 경건과 번영이란 두 측면에서 감람나무처럼 늘 푸르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고 누구나 생각할 것이다(시 52:8 참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일컬어 좋은 행실 맺는 아름다운 나무라 하셨으니 그 열매를 먹기에 좋고 보기에 즐거우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쓸모가 있는 것이라 하셨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사람이 다 감람나무의 푸르름과 기름으로 영화롭게 되는 때문이다(삿 9:9).2. 그들이 하나님을 거역하여 악한 짓을 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사실이다. 그는 그들을 푸른 감람나무, 선한 감람나무로 심으셨으나 그들은 돌갈람나무로 전락해 버렸던 것이다(롬 11:17).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이 다 악을 행하여 바알에게 분향하며 대망하던 메시야 외에 그들과 지고하신 하나님 사이에 딴 중재자들을 세움으로 하나님의 노를 격동하였다. 아니, 그들에게는 주인도 많고 신들도 많았으므로 그들은 살아계신 참 하나님과 경쟁시키기라도 하듯 딴 신들을 세웠다.
3.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선을 베푸셨고 그들에게는 선한 것을 주시려고 의도하셨지만 그들이 이토록 그릇된 행동을 했을 때는 그가 그들에게 선언하셨던 재앙을 내리시리라는 것 외에 달리 그들이 기대할 것은 없었다. 그들은 만드신 분이 그들을 구해 주시려고 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이 푸른 감람나무를 심으면서 열매를 기대하셨던 그가 열매맺지 못하는 돌감람나무임을 발견하고는 서있는 그대로 태우기 위해 그 위에 불을 피우셨으니 열매 없는 나무는 죽고 또 죽어뿌리까지 뽑히며(유 12) 찍어 불에 던지우기 때문이다(마 3:10). 땅에 방해가 되는 나무가 가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는 아궁이이다. "그 가지"즉 운래의 의미대로 하면 "높고 우뚝한 가지는 꺾였고" 으스러졌으니 방백들과 제사장들은 멸절을 당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노를 격동하기 위해 하나님께 대하여 자행한 악은 실상 그들 자식에게 대해 악을 행한 셈이다. 그들은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이다(잠 8:36).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미치지 못할 곳에 계시기에 그들은 자신만 망칠 뿐이다(7:19 참조). 하나님께 대한 모든 죄는 우리 자신에게 대한 범죄이며 또 그 사실을 조만간에 꼭 드러날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아나돗 사람들이 받을 벌(예레미야 11:18-23)
예레미야 선지는 자신의 기록 속에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을 상당히 포함시키고 있으며 이것은 이사야 선지보다 한층 더하다. 그 이유는 예레미야 선지가 살던 시대의 심한 혼란상 때문일 것이다. 본문에서 우리는 그의 슬픔의 발단을 엿볼 수 있다(그렇게 보인다). 그의 근심은 그 자신의 성읍 사람 곧 제사장 성읍이면서도 악한 도시였던 아나돗 사람들에게서 유래하였던 것이다. 다음 사실을 잘 살펴보자.
Ⅰ. 예레미아를 해치려는 아나돗 사람들의 음모(19절). 그들은 선지자를 헤하려고 꾀하였으며 머리를 맞대고서 어떻게 하면 가장 그럴 듯하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그를 죽일 수 있을지 궁리하였다. 악연은 악의 실천에 부지런할 뿐만 아니라 악한 계획에도 재간이 비상하다.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대해 "우리가 그 나무와 과실을 함께 박멸하자" 고 말하였는데 이 말은 잠언적 표현으로서 "우리가 그의 뿌리와 가지를 완전히 파괴하자. 아비와 가족을 다 멸하자" 는 뜻이다. 이것은 반역죄로 처형당하면서 그 아들들까지도 다 죽음을 당할 나븟의 경우가 입증한다.
또는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예언자와 예언을 다 말살하자. 예언자를 죽여 예언을 꺾어 버리자. 그를 산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 이름으로 다시 존경받거나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우리가 그의 명성을 떨어뜨리며 그의 예언의 신망을 훼손시키자." 이런 것이 그들의 음모였다.
1. 그것은 잔인한 음모였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박해하는 무리들은 너무나 잔혹하였다. 그들이 찾아다니는 것은 다름 아닌 보배로운 생명이며 그들은 너무나 귀중한 목숨을 사냥하려고 하기 때문이다.2. 그러나 그것은 좌절된 음모였다. 그들은 그의 연한에 종지부를 찍을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그는 대다수의 원수들보다 더 오래까지 목숨을 보존하였다. 그들은 그에게 대한 기억을 말살시키려고 생각했지만 그의 명성을 오늘날까지 살아 있으며 또 시간이 지속하는 한 복된 이름으로 칭송될 것이다.
Ⅱ. 이 음모에 대해 하나님이 알려 주신 정보. 그들은 이 모해를 너무나 교묘하게 위장했으므로 그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나돗 사람들에게 해를 입힐 의도가 추호도 없었기에 그들로부터 해를 당할까봐 염려하는 마음도 전혀 없이 그는 아나돗으로 갔다. 그는 끌려서 잡히러 가면서도 평소와 같이 들로 가고 있는 줄로 생각하는 순한 어린양과 같았다. 가련한 예레미야는 자기를 미워하던 성민들이 자기에게 대해 베푸는 궤계를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바울의 생질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잡기 위해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바울에게 알려 주었으나 예레미야의 친구 중 어느 누구도 그에게 귀띔을 해 주어서 안전을 도모할 수 있도록 해 줄 수가 없었고 어느 원수도 그에게 알려 주려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죽음의 계단에 발을 올려놓고 간발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 때에 여호와께서 꿈이나 환상이나 그 마음의 영감을 통하여 이것을 그에게 알리셨는데 이는 엘리사에게 예고받은 이스라엘 왕처럼(왕하 6:10) 스스로 그가 구함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그것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은 그들의 행위를 그에게 보이셨다. 그들의 모계가 탄로난 이상 그것은 실패를 뜻하는 것이었다. 만약에 하나님이 그에게 자신의 위험을 알게 하시지 않으셨더라면, 조국의 패망은 예언하던 자가 자신의 위험은 예견하여 피할 수 없더냐고 하는 식으로 무지한 자들이 이를 이용하여 그의 예언이 위신을 해쳤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선지자들을 얼마나 보살피고 계신지는 유념하자. 그는 사람이 그들을 해하기를 용납지 아니하신다(대상 16:21). 그들이 자기 증언을 끝마치기까지는 원수들의 그 어떤 분노도 그들을 압도하여 꺾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모든 비밀한 계획 뿐만 아니라 그 백성의 원수들의 음모까지도 샅샅이 알고 계시며 원하실 때는 그들에게 알리실 수가 있다. 공중의 새가 그 소리를 전할 것이다(전 10:20).
Ⅲ. 이 일로 그가 하나님께 드리는 호소(20절). 그의 눈은 공의로 판단하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부당한 행동을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가서 아뢸 하나님이 있으며 또 그 하나님은 무죄한 자의 침해당한 사연을 변호하셔서 가해자와 맞서는 분이시란 사실은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하나님의 공의가 악인에게는 두려움이 되지만 경건한 자에게는 위로가 된다.
그의 눈은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속에 있는 것을 온전히 보시며 그 생각과 의도가 어떠한지 아신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아의 마음속에 있는 성실성을 아셨으며 세인들이 묘사하는 유의 인간이 아님을 알고 계셨다. 오히려 그들이 아무리 교활하게 위장하고 은닉하였더라도 그들의 마음속에 있던 악을 아셨던 것이다.
1.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대한 심판을 기도한다.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수를 내가 보리이다.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나와 그들간에 정직히 행하소서." 흑자는 이 기도에 약간에 인간적 약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리스도께서는 교훈과 실제의 수법을 통해 우리에게 달리 가르쳐 주셨으며 그것은 곧 우리를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다. 또 다른 이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순수한 열성과 예언자적 경건한 분노에서 유래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이 자들믄 직업이 제사장이었고 여호와의 사역자들이었으면서 자기들에게 아무런 해도 가하지 않은 자들이 단지 하나님께 봉사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에게 공격을 가할 만큼 악하였다.이 청원은 예레미야 자신이 그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복수를 보게 되리라는 예보가 아니었다.
2. 그는 자기 일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에 일임한다. "나의 원정을 주께 아뢰었나이다. 나는 그 일로 딴 어느 누군가 영향을 받으리라는 것을 바라거나 기대하지 않은 채 당신께 그것을 맡깁니다."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위로가 되는 것은 우리에게는 그 일을 맡길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그 일을 하나님께 의뢰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도 된다. 하나님께 명령을 내리는 게 아니라 그의 확정적 판결에 묵종하겠다는 결의를 가지고 그의 명령에 동의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의무이다.Ⅳ. 그를 핍박하던 사람 곧 아나돗 사람들에게 내리시는 심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 있는 재판소에 호소한다는 것은 아무 소용없는 일이며 거기서는 정의의 판결을 그에게 베풀어주지 않을 터였다.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들은 아나돗 제사장들을 편들 것이었고 그들에게 얹짢은 기색을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비호할 것이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이 사거을 친히 심리하시려고 하신다. 륑는 하나님의 판단이 진실대로 되는 줄 안다(롬 2:2).
1. 판결의 기초가 되는 그들의 범죄가 낭송되고 있다(21절). 그들은 선지자에게 죽음의 고통을 예언하지 말도록 금했으나 그가 듣지 않으므로 그의 생명을 찾았다. 그들은 선지자의 입을 막든지 아니면 죽여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가 그들의 노여움을 촉발한 것은 바로 그 성읍의 지사로부터 허락을 받지 않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했다는 점이다. 선지자도 그 성읍의 한낱 성민에 지나지 않으면서 통치자들의 허락을 받지 않은 데다가 그들이 입버릇처럼 뇌까리던 대로 원만한 일을 예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에게 예언을 금지한 것은 사실상 그의 생명을 찾는 행위였다. 그에게서 예언을 앗아간다는 것은 그의 생명의 목적과 필생의 사업을 짓뭉개고 그 생명의 위안을 강탈하려고 노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신실한 사역자들에게 있어서 입막음을 당한다는 것은 숨을 못쉬게 하는 것 만큼이나 견딜 수 없게 하는 짓이 된다. 그들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꼭 예언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결행한다면 그것은 곧 그들의 손에 죽음을 당하는 것이 되는 경우는 특히 그러하다. 그들의 기소자와 재판관과 집행자 등 모든 역을 다 맡고자 하였다.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다고 일컬어지게 된 것은(눅 13:33) 그 곳에 대공회의소가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레미야에 게 대한 아나돗 사람들의 앙심은 너무나 격렬하여 그들은 손수 그를 요절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선지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귀하게 되지 못할 뿐더러 은총조차 입지 못하게 될 것이다.2. 이런 범죄로 인해 그들에게 내려진 판결(22절,23절).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들을 벌하리라" 고 말씀하신다. "그들에게 대한 처리는 내게 맡겨라. 내가 그들 위에 이런 벌을 내리겠다(원 의미는 그러함)."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조사하실 것이며 그에 대한 셈을 치르실 것이다. 하나님의 쓰리게 하는 네 가지 심판 가운데서 두 가지가 그들의 성읍을 파멸시키는 데 이용될 것이다. 칼이 청년들을 삼킬 것이다. 젊은 제사장들은 전쟁하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죽음을 당할 것이니 그 특성이 그들의 신명을 보호해 주지 않을 것이다. 기근이 집에 남아있는 자녀들을 멸망시킬 것이다. 이것은 칼에 의한 멸망보다 한결 더 비통하고 괴로운 죽음이다(애 4:9). "그들 중에서 남는자가 없으리라." 이 세대 중에서 후손을 끼칠 자는 아무도 없다는 말씀이다. 그들은 예레미야의 생명을 찾았으므로 죽게 된다. 그들은 그의 뿌리와 가지를 박멸하고자 하였고 그의 이름이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들 가운데서 남을자가 없을 것이다. 이 일에서도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시다. 이와 같이 그들에게는 재앙이 내리고 그들을 벌할 해가 다가온다. 그것은 그들의 공과에 부합하는 충분한 보상이 될 것이며 악이 될 것이다. 이 때에는 예레미야가 자기 원수의 보응받는 것을 보기 될 것이다(시 92:11; 112:8). 선한 목사들과 선한 백성들의 원망하는 기도를 받는 자들은 슬픈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을 주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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