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10:1

우상 숭배의 죄악(예레미야 10:1-16)

이사야 선지가 바벨론 포로를 예언하면서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를 덧붙이고 우상 숭배자의 어리석음을 대략적으로 설명한 것은 바벨론에 끌려 갈 유대인들이 거기서 우상 숭배에 유혹받을 우려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바벨론에서 당하는 고초의 목적이 그들의 우상 숭배를 치료하는 데에 있기도 한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예레미야 선지도 이교도의 사신 숭배 관습을 경계시키기 위해 여기에서 백성을 무장시키고 있다. 바벨론에 가 있는 자들뿐만 아니라 뒤에 남아 있는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시키며 깨달음을 얻게 하며 교종시키려 하는데 이는 채찍을 맞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우리가 가르침을 얻도록 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여기서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Ⅰ. 이방인의 길과 관습을 따르지 말라는 엄숙한 명령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내려지고 있다. 이스라엘 집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로부터 이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야 했다. 즉 "열방의 길을 배우지 말고 그것을 시인하지도 말며 그것에 대해서는 냉담히하여 생각하지도 말라. 하물며 그 길을 모방하거나 습관들이는 일이랴! 그들의 어떤 풍습도 너희 속에 스며들지 못하게 하며(이방 풍습은 부지중에 들어오기 쉬우므로) 그들로 너희 신앙을 자기들의 종교에 혼합시키지 못하게 하라."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 열방의 길을 배우고 거짓 신을 섬길 때 사용하곤 하던 의식과 제의로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생각한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신 12:29-31 참조). 천군 즉 일월성신을 경배하는 것이 이방의 길이었다. 천체에게 신적 영광을 바치고 그것들로부터 신적 은총을 기대하며 하늘의 징조가 길조이냐 흉조이냐에 따라 자기들이 신들에게서 지지를 거나 못받거나 한다고 생각하였으므로 그들은 굉장한 불안감을 가지고 사뭇 떨면서 하늘의 징조를 살폈으며 일식이나 월식, 혹성의 접합과 충돌 등 온갖 천체의 기현상을 관찰하였다. 좋지 못한 징조로 생각되는 일이 발생하면 하던 일도 중단하였다. 그들의 좌측에 벼락 소리가 나기만 해도 그들은 마치 벼락에 맞기라도 한양 거의 사색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며 별들을 신으로 경외하고 또 천체의 징후로 놀라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하늘의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했으며 그의 섭리에 대한 경외심을 지녀야 했다.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자기 길을 가는 별들은 하나님과 화평한 어떤 자에게도 싸움을 걸지 않는다. 이방인은 더 선한 지식이 없으므로 이들 징조를 두려워하나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은 이스라엘의 집은 그래선 안 된다.

Ⅱ. 이 명령을 시행시키기 위해 선한 여러 가지 이유가 제시되고 있다.

1. 이방인의 길은 매우 우스꽝스럽고 불합리하여 올바른 이성의 명령으로도 정죄된다(3절). 이방인의 법령과 율례는 매우 허망하여 합리적으로 논고해보면 쉽사리 알 수 있다. 이사야가 지적했던 것처럼 여기에서도 이 점을 몇 번이고 강조되어 있다. 갈대아인들은 자기들의 지혜를 대단히 자부하고 있었고 지혜에 있어서는 인근 모든 나라를 능가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우상을 섬기고 우상에게서 도움과 구원을 기대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금수와 같고 주정뱅이나 다름없는 상식이하의 인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1) 예배를 받던 우상은 어떤 것인지 살펴보자.

그것은 본래 삼림에서 벤 나무였고 공장의 손이 제조한 것이었다. 장인이 나무를 사방으로 잘라 톱으로 켜서 형태를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나무 둥치에 불과하여 무엇보다 문설주로 만들면 안성마춤이었다. 그럼에도 그것이 나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하여 그들은 은과 금으로 그것을 꾸미고 금박이나 옻칠을 입히며 금실 은실 또는 박사로 장식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지정한 장소에다 못과 장도리로 그것을 든든히 하여 요동하지 않게 하며 넘어지거나 도둑맞지 않게 한다(4절). 형상은 아주 꼿꼿하여 장인이 제 역할을 다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으니 "그것이 갈린 기둥(또는 종려나무) 같기" 때문이다(5절). 그것은 의젓하여 곧 말이라도 할 듯이 서있으나 말도 못한다. 그것은 불쌍하게도 말 못하는 피조물이며 너희를 구원하려 하나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는 물건이다. 제 자리를 옮겨야 할 필요성이 있을 때에는 행렬로 메고 가야 한다. 그것은 걸어다니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오는 권면은 매우 적절하다. "하늘의 징조와 마찬가지로 너희는 그것들을 두려워 말라. 그것들에게 노여움을 입을까 겁내기 말라. 그것은 화를 주지 못함이니라. 그것들의 총애를 몰수당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것은 복을 주지 못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우상의 재료를 개량함으로써 사태를 개선시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면 너희 스스로를 속이는 셈이 된다. 금이나 은으로 된 우상은 나무로 된 잡신과 마찬가지여서 섬길 가치는 없는 존재들이다." "우상의 도는 나무뿐이다" (8절). 그것은 거짓말을 가르치며 하나님께 대한 거짓말을 가르친다. 그것은 헛된 것들의 교훈이다. 나무뿐이다. 은과 금으로 됐다는 우상도 그 하부 구조는 목재로 되어서 그 위에다 다시스에서 가져온, 즉 해외에서 수입한 은박과, 우바스 또는 바스에서 가져 온 금으로 입혔던 것 같다. 우바스란 말은 때때로 정금이라고 해석된다(시 21:3). 이 우상을 만드는 데는 온갖 기술과 수고가 투입되었다. 목조 우상을 만드는 데 고용되었던 그런 평범한 기술자가 아니라(3절) 이들은 솜씨 좋은 자들이었다(9절). 그것은 본문의 표현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것은 만드는 사람의 만든 것이다(원문의 직역임). 그 우상이 장색의 손을 거치고 나면 조각사가 제 구실을 다해야 하였다. 금과 은으로 여기 저기를 장식하고 나면 그것은 전신이 금과 은으로 뒤덮이게 되었다. 청색과 자색은 제왕의 의복에 사용하는 빛깔인데 이들은 청색과 자색으로 그 옷을 삼았다(9절). 이것은 그 잡신들을 왕으로서 높이기 위함이었다. 그런다고 해서 더 나아질 것은 없었다. 인간이 최선을 다해 만들었다고 해도 손으로 만든 것인 이상 그 우상이 무슨 쓸모가 있을 것인가? 선지자는 우리에게 그 부어 만든 우상이 거짓 것이라고 말해 준다(14절). 그것들은 내노라하는 그대로가 아니라 세상을 속이는 대사기꾼이다. 그것들은 인간에게 호흡과 생명과 감각을 주는 신으로 숭배되고 있지만 그것들 자체가 생명이 없고 감각이 없는 존재이다.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그것들 속에서 영이 없다(원문의 뜻은 그렇다). 그들은 활기를 띠지 못하며 사람들이 상상하듯 어떤 신령한 것 또는 numen-즉 신성이 깃들이 있지도 않다. 그들은 신이기는 고사하고 아래로 내려가는 짐승의 영혼도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헛것이요 망령되이(또는 실수로)만든 것이다(15절). 우상의 용도를 조사해 보면 그것이 헛것인 줄 알게 될 것이다. 그것들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 어떤 도움도 기대할 수가 없고 그것들은 믿을 수가 없다. 그것은 속여서 조작된 것이요 환상이 만들어 낸 것이며 단순히 조롱감에 지나지 않는다(흑자는 그 다음 하반절을 그렇게 해독한다). 우상은 자기에게 신뢰를 두는 자들을 속이며 우롱한다. 아니, 자기 자신을 조롱거리로 만든다. 우상이 생겨 나는 것을 조사해 보면 그것들이 최대의 실수에 근거한 오류의 산물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성을 가졌다고 자처하는 인간이 범한 최대의 오류는 바로 우상의 제조이다. 우상은 현혹된 환상의 산물이다. 그것들은 잘못의 산물로 태어났으면서 그 잘못을 자기들의 숭배자들에게 보급시킨다.



(2) 여기서 이 우상의 숭배자는 어떤 인간들인지 추론해 보자(8절). "그들은 다 무지하고 어리석다." 우상을 만드는 자들은 다 우상과 같아서 지각이 없고 우둔하며, 그 안에 생기가 없고, 영혼이 없다. 그들은 이성을 사용하지 못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잡신들을 결코 숭앙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자존심도 없다. 그렇지 않다면 결코 그런 무생물에게 허리를 굽혀 절하지 않았을 것이다(14절). 우상을 만들거나 숭배하는 사람마다 그 지식이 우준하게 된다. 즉 지식의 부족으로 금수처럼되며 누구나 그들이 완전하게 정통하고 있는 줄로 생각하는 일도 짐승같이 본능으로 아는 것, 본연지(本然知)에 의하여 알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창조의 역사 가운데서 그들은 창조주의 영원하신 권능과 신성을 깨닫지 않을 수 없으면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여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게 되었다(롬 1:21, 28 참조). 아니, 그들이 이처럼 신을 많이 늘리는 일이 지혜의 일단으로 생각하였을 때 실제로는 그들이 범할 수 있는 최대의 우행이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로 볼 때 이 세상은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고전 1:21; 롬 1:22). "금장색마다 자기의 조각한 신상으로 수치를 당한다." 금장색은 실수로 신상을 만들고 나서도 그 우상으로 말미암아 자기 실수를 더욱 더 확실하게 하게 된다. 그는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되며 넋을 잃게 되어 그 올무를 헤치고 나오지 못한다. 그는 이제나 저제나 그 우상을 인하여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2.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오직 유일무이하신 참 신이요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시다. 그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자들은 딴 어떤 신에게 청원할 필요가 없다. 아니, 그와 대립하는 딴 신을 세운다는 것은 그 하나님께 대한 최대의 모욕이요 침해이다. 이스라엘의 집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고수하고 오직 그만 섬기며 경배해야 할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는 비길 데 없는 신이시다. 인간들이 그와 대항하여 어떤 것을 세우더라도 그와 견 줄 수 있는 것은 도무지 존재하지 않는다. 선지자는 이방인의 우상을 극히 경멸하며 말하다가 급선회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대해 극히 깊고 두려운 경외감으로 말한다(6,7절). "여호와여! 주와 같은 자 없나이다." 이방인들이 신격화시키고 우상화시키느라고 야단법석을 부리는 모든 영웅들 가운데에도 주와 같으신 분은 없다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죽은 사람도 동상을 만들어 절하고 섬기나 그들 중에서도 하나님과 짝할 이는 없다. 어떤 이들은 그 지혜 때문에 신격화되고 흠모를 받는다. 아폴로나 헤르메스같이 열방의 모든 지혜로운 자들과 최대의 철학자와 정치가들 중에도 "주와 같은 자" 는 없다. 또 딴 자들은 그 주권으로 하여 신격화되고 숭배받는다. 그러나 "그 모든 왕족 중에" 즉 새턴이나 쥬피터처럼 권세가 당당한 모든 임금들 중에도 "주와 같은 자는 없다." 세계를 창조하시고 사람 속에 영혼을 조성하는 분의 영광에 비하면 유용한 기술을 안출해내거나 융성하는 나라를 창건하는-이방인들에게는 이런 것이 신격화시키는 데 충분한 근거가 되었다-자의 영광은 아무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는 나라의 주권자와 견줄 때 이 세상에서 최대의 군주나 명령권자의 영광은 천양지차가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6절). "여호와여! 주는 크십니다. 무한하시고 광대하십니다. 그리고 주의 이름이 그 권능으로 인하여 크시니이다. 당신께서는 모든 권세 같게 계십니다. 또 그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인간은 흔히 그 능력보다 이름이 더 높아지는 수가 있으며 제 보다 더 크게 인식되는 수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은 크시지만 실제의 크심을 도저히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열방의 왕이시여! 주를 경외치 아니할 자가 누구리이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신 곧 이방인이 섬기는 죽은 우상을 숭배하느니보다 차라리 이와 같은 신 곧 모든 것을 능히 할 수 있으신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나서지 않을 자가 누구이겠는가? 권능으로 인하여 그 이름이 크신 하나님을 노엽게 하거나 버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느가? 자기들의 이해 관계를 똑바로 이해한다면 모든 나라 중에서 어느 나라가 열방의 왕이신 분을 경외하지 않겠는가?

크신 여호와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성도들의 왕으로 경배해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집뿐만이 아니다(계 15:3, 4). 땅 위의 모든 족속들은 그를 열방의 왕으로 섬겨야 할 의무가 있다. 왜냐하면 이는 주께 당연한 일이며 그에게 알맞는 일이며 어울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을 섬기는 일에는 놀라운 일치점과 적절함이 있다는 것을 주목하자.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은 홀로만 섬김을 받아야 마땅하며 만유의 주가 되신 분이 모든 것에서 섬김을 받고 크신 분이 크게 경외받고 크게 찬미를 받는다는 것은 적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 그의 진실성은 우상의 헛됨만큼이나 분명하다(10절). 우상은 사람의 손이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기에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자기가 섬긴다는 것은 누가 뭐래도 장난임이 분명하다(우상 숭배를 장난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동시에 이 장난은 우리를 지으신 분에게는 큰 모욕이 된다. 이에 반하여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진리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진리되신 하나님이요 참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시다. 여호와 하나님은 진리이시다. 그는 가짜 신들 즉 우상처럼 모조품이 아니며 사청자가 아니시고 우리에게 계시하신 그대로의 실제시다. 그는 우리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분이시며 우리는 그 안에서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속임을 당하는 일이라곤 절대로 없다.

[1] 본질적인 면에서 그를 바라 보자.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생명 그 자체시요 자기 안에 생명을 소유하시는 분이시며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다. 이방인의 잡신들은 죽은 것들이요 고목이요 고철이며 가치없고 쓸모없는 것들이지만 우리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요 불후 불멸성을 소유하시는 하나님이시다.

[2]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그를 바라보자. 그는 왕이시요 만유의 위에 계신 절대 군주시며 만물의 소유자요 지배자시다. 그는 만물을 명령하고 처분할 수 있는, 이의의 여지가 없는 권리를 보유하신다. 왕으로서 그는 피조물을 보호하시며 그들의 복리를 위해 부양해 주시고 그들의 평화를 보존하신다. 그는 영원한 왕이시다. 그의 나라의 계획은 영원 전부터였으며 그 나라의 존속은 영원까지일 것이다. 그는 영원의 왕이시다. 사람들이 자기 왕이라고 부르는 우상은 단지 어제부터 생겨났고 또 곧 패위될 것이며 또 그들이 세워서 숭배하는 땅의 임금들도 곧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오! 시온요! 네 하나님 여호와는 세세토록 영영히 다스리시리라.

(3) 그의 분노의 위력은 아무도 모른다. 오직 그에게만 돌려야 마땅한 영광을 다른 것에게 돌려 감히 그를 노여우시게 해서는 안 되며 그를 계속 두려워해야 할 것은 그 진노하심에 땅이 진동하면 땅의 왕들 중에서 가장 강하고 당당한 자조차 떨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아주 견고히 고정되어 있다고 하는 땅조차 그가 원하시면 진동하게 되고 바위도 전율하게 된다(시 104:32; 합 3:6, 10). 열국이 그를 대항하기 위하여 연합하며 힘을 합칠지라도 전혀 저항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그 분노하심을 능히 당치 못하리라는 것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이 그의 진노하심을 막아내지 못함은 그 진노가 자기들을 이길 것이기 때문이며 그들이 그 진노하심 아래서 견뎌내지 못함은 그 진노가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시 76:7, 8; 나 1:6).

(4) 그는 자연의 하나님이시요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다. 자연계의 모든 위력도 다 그의 명령과 처분을 기다린다(12,13절).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천지를 만드시고 그 양자에 대해 지고하신 지배권을 갖고 계신 분이시다. 따라서 그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는 것들 가운데서 명백히 나타나고 입증된다.

[1] 뒤로 돌아보면 우리는 온 세계가 제일 원인이 되신 그에게 기운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심지어 헬라인들 가운데서도 "딴 신으로 자처하는 자는 응당 먼저 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는 속담이 널리 퍼지고 있었다. 이방인들은 자기가 만든 신들을 숭배하지만 우리는 우리와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첫째, 땅은 부피가 광대한 덩어리로서 그 내부에는 값진 보화가 들어 있으며 그 표면에는 보다 귀한 소산이 있다. 땅과 땅 안팎에 있는 것들은 하나님이 자기 권능으로 지으셨다. 그리고 현재도 그러한 것같이 땅이 공간에 매달려(욥 26:7)ponderibusl-ibrata-즉 자기의 무게로 균형을 이루고 있음은 다름아닌 그의 무한하신 권능에 의해서이다.

둘째, 땅의 거주 가능 구역인 세계는 인간의 사용과 봉사를 위해 놀랄 만한 정도로 알맞게 되어 있다. 그의 지혜로 세계를 그렇게 세우셨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그 유용성을 잃지 않으며 한 세대로부터 다른 세대로 지나가면서도 그 안정성을 지속하고 있다. 그렇게 땅과 세상은 그의 것이다(시 24:1).

세째, 하늘들은 놀라울 정도로 무한히 펼쳐졌다. 하늘들이 믿을 수 없으리만치 광대하게 전개되고 천체의 운행이 아래에 있는 세상의 혜택을 저향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에 의해서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시 19:1)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게 만들며 하늘들을 지으신 분에게 돌려야 마땅할 영광을 자기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한다.



[2] 위로 쳐다보면 우리는 그의 섭리가 계속되는 창조임을 알 수 있다(13절). "그가 목소리를 발하신즉 (명령의 말씀을 내신즉) 하늘에 많은 물이 생기도다." 이 물은 땅 위로 쏟아지는데 그가 의도하시데 그가 심판의 품이 되기도 하고 자비의 단비가 되기도 한다. 그가 우뢰로 목소리를 발하시면 즉각 뇌우가 뒤따른다. 이 속에는 많은 물이 생겨 있다. 흑자가 해석하는 대로 여기에는 소리가 따른다. 그리고 우리는 열왕기에서 "큰 비의 소리" 라는 표현을 볼 수 있다(왕상 18:41). 아니, 자연계에서는 날마다 소리없이 경이로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는 땅 끝에서 구름이 오르게 하신다." 지구의 모든 지역과 심지어 극지방에서까지 증발 현상이 있는데 주로 바다에 인접한 곳에서 구름이 많이 오른다. 온 땅의 축복을 받기 때문에 증기라는 조공을 바친다. 나라 안의 화폐나 신체 내의 혈액처럼 우주 속의 습기는 전체의 유익을 위해 끊임없이 순환한다. 이 증기는 경이로운 일들을 발생시킨다. 그 속에서 비를 위한 번개가 형성되는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그 곳간에서 바람을 내신다. 필요하실 때면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정도와 용도를 지시하셔서 바람을 불게 하신다. 주인이 창고에서 지불할 것을 꺼내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 곳간에서 바람을 내신다. 모든 대기 현상은 너무나 순순히 하나님의 목적을 충족시키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고에 들어있는 것같이 보인다. 그것은 무진장의 보고요 언제라도 꺼낼 수 있는 창고라고 할 수 있다(시 135:7). 하나님은 이런 창고들을 소유하시며 그 곳간을 자랑하신다(욥 38:22, 23). 하나님은 이같은 일들을 능히 하실 수 있는데 이방인의 우상 중 어느 것이 그와 같은 일을 할 수 있는가? 어떤 종류의 기상(氣象)이든 우리에게 크신 창조주의 지혜와 권능을 입증하고 그 실례가 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유의하자.

(5) 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요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고 계신 하나님이시며 모든 참이스라엘인의 복이 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집은 그에게 밀착해야 하며 우상을 품기 위해 그를 버려서는 아니 된다. 만일 그들이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정녕코 선한 것을 악한 것과 바꾸는 것이 될 것이니(16절), 야곱의 분깃을 그들과 같지 아니한 때문이다. 그들의 반석은 우리의 반석과 같지 못하며(신 32:31) 우리의 반석은 그들의 흙무더기와 같지 아니하다.

[1]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고 있는 자들은 그 안에서 충일하고도 완전한 행복을 얻는다. 야곱의 하나님은 야곱의 분깃이다. 하나님은 야곱의 모든 것이요 야곱은 하나님 안에서 충분히 소유하며 이 세상에서든 저 세상에서든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 귀한 분깃을 두고 있다(시 16:5).

[2] 우리가 우리의 분깃으로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만족하고 흐뭇해 한다면 하나님께서도 은혜로이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서 기뻐하실 것이다. 그는 자기 백성을 그 산업의 지파로 인정하시고 자기 소유물과 보배로 인정하시고 그들과 같이 거하시며 그들에게 섬김을 받고 영광을 얻으신다.

[3] 여호와의 모든 백성들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위안이 되는 것은 자기들의 하나님되시는 분이 만물의 조성자이시며 따라서 자기들을 위해 모든 것을 행하실 능력과 자기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실 능력이 있으시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분의 이름에 있다. 그리고 그는 만군의 여호와시다. 그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무리의 주이셔서 모든 것을 장악하고 계시기에 필요한 경우에는 그들에게 명령을 내려 자기 백성을 섬기게 하실 것이다. 그들이 그를 아는 것도 이 이름으로써요 그에게 처음으로 영광을 돌리고 나서 그 위로를 받는 것도 이 이름으로써이다.

[4] 이 점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여타 모든 백성보다 복되며 참으로 행복하다. bona is sua norint-즉 그들은 자기의 복됨만 알뿐이었다.

이방인들이 자랑하고 기쁨으로 삼으며 분깃으로 여기는 잡신들은 헛된 것이요 거짓된 것이다. 그러나 야곱의 분깃은 이 같지 아니하시다.

3. 이방인의 신들을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비교하고 나자(이 양자간에는 비교가 있을 수 없지만) 예레미야 선지는 저 모든 사칭자들 곧 우상들의 확실한 숙명을 알져 주면서 동시에 유대인들더러 하나님이 이름으로 이 사실을 우상 숭배자들에게 들려주라는 지시를 내리고 있다. 우상에게 예배하는 자들은 유대인을 부리고 속박하는 주권자였지만 그들은 이 사실을 고해야 하였다(11절). "너희는 이같이 그들에게 이르라(너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이 말을 끝까지 하도록 너희를 버티어 주실 것이다). 처니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신이 아니며 천지를 창조하신분께만 돌아가야 할 존귀를 가로채는 횡령자들이다. 그것들은 망할 것이며 헛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망할 것이다. 그것들은 하나님과 필적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의로우신 심판으로 망할 것이다. 신들이라고 하는 것은 땅 위에서 망할 것이다. 그들이 신으로 섬기는 땅 아래 있는 것들도 다 마찬가지로 망할 것이다. 또 이 하늘 아래서 망할 것이다. 제 2계명이 나와 있는 대로 궁창에 있는 모든 것도 신으로 받들어지는 것이면 가장 높은 이 하늘 아래서 망하게 될 것이다. 원문에 있는 말씀은 딴 부분과는 달리 히브리어로 되어 있지 않고 갈대아 방언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포로된 유대인들이 갈대아 사람들에게 우상 숭배의 유혹을 받으면 즉시 그들의 방언으로 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즉 "너희는 너희 신들을 섬기라고 우리를 압박하느냐? 우리는 절대로 못하겠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것들은 가짜 신들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천지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신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충성을 받을 자격이 없다. 그리고 우리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은혜를 입고 있는데 반해 너희의 잡신에게서는 땅의 소산물로든 하늘의 감응으로든 신세를 지고 있지 않다." 이것이 그들의 우상 숭배 거부에 대한 첫번째 변이었다. 원시 기독교인들이 그런 신의 숭배를 강요당했을 때 그들은 "그에게 세계를 만들게 해보라. 그러면 내가 그를 하나님으로 삼겠노라" 고 말하려 했던 것이다. 우리가 천지를 지으신 분을 예배의 대상으로 모시고 있는 이상 또 다른 자를 섬긴다는 것은 매우 모순된 일이다.

(2) "그것들은 정죄된 신들이어서 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현재처럼 존중받지 못하고 망각 속에 파묻히며 숭배하는 자와 더불어 사라져버릴 때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땅은 그것들을 더 이상 받들어주지 않은 것이며 하늘도 더 이상 덮어 주지 않을 것이니 양자가 다 그것들을 버릴 것이다." 이것은 15절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다. "징벌하실 때에 그것들도 멸망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자들과 셈하게 될 때는 그들로 하여금 자기 우상에 염증을 내게 만드실 것이며 기뻐 그것을 제거하도록 만드실 것이다. 그들은 자기 우상을 두더쥐와 박쥐에게 던지게 될 것이다(사 2:20). 하나님과 신앙에 대해 모순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결국 침목하게 될 것이다.

 

10:2 없음.

 

10:3 없음.

 

10:4 없음.

 

10:5 없음.

 

10:6 없음.

 

10:7 없음.

 

10:8 없음.

 

10:9 없음.

 

10:10 없음.

 

10:11 없음.

 

10:12 없음.

 

10:13 없음.

 

10:14 없음.

 

10:15 없음.

 

10:16 없음.

 

10:17

예레미야의 기도(예레미야 10:17-25)

Ⅰ. 예레미야 선지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파멸을 경고한다(17,18절). 일부의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간 뒤 자기 땅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매우 안심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을 요새의 거민(우리 성서:에워싸인 가운데 앉는 자)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들의 나라는 그들의 견고한 성채였고 자기들의 생각에는 난공불락의 요새 같았다. 그러나 본문은 그들에게 떠날 차비를 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 동포들의 뒤를 따라 갈 준비를 해야 했고 그것을 예상하여 가재도구를 싸야 했다. "네 꾸러미를 이 땅에서 수습하라. 할 수 있는 데로 네 물건을 줄이고 간편하게 축소시켜라. 일어나라, 떠나라, 이것이 너희의 쉴 곳이 아니니라(미 2:10). 너희가 가진 것을 흘리지 않도록 하라. 하나님이 너희에게 내린 판결의 집행자가 되기 위해 갈대아인들이 다시 너희를 덮칠 것이기 때문이다(18절)."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이 땅에 거하는 자들을 이번에는 내어 던질 것이라. 그들이 이제까지는 한 때에 조금씩 떨어져 나갔지만 한 번 더 포로가 되는 날에는 철저히 제거될 것이니, 투석기가 쉽사리 그리고 완전히 돌을 발사하듯이 그들도 철저하게 내던짐을 당할 것이며 추방될 것이다. 그들은 격렬하게 내쫓길 것이며 순식간에 먼 곳으로 몰려나게 될 것이다. 완전한 멸망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던 비유를 살펴보고 이 말씀과 비교해 보자(삼상 25:29).

하나님께서는 또 한 번 그들을 진동하실 것이며 악인을 거기서 흔들어 내실 것이다(히 12:26). 거기다가 "그들을 괴롭게 하여 깨닫게 하리라" 고 덧붙여 말씀하신다. 그는 그들을 거기서 던져 버리실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딴 곳에 떨어져도 거기서 편안하게 될 수는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곤란한 일이 그들을 뒤따르게 하실 것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당혹감을 느끼고 괴롬을 당할 것이며 마음이 다급하여 어쩔 줄 모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괴롭게 하여 깨달음을 얻도록 하려는 자드림으로써 을 누가, 무엇이 편안하게 해 줄 수 있으랴?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고통을 통하여 자기들이 믿으려 하지 않던 일을 따끔하게 맛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얼마나 중한 것이며 그의 진노의 저항하거나 그 노하심을 견디어 낸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차 경고받았었다. 그들은 범죄가 곧 파멸이라는 말씀을 들었지만 그 말씀을 귀담아 듣거나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 점을 깨닫고 억지로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자기 심판으로써 그들을 추격하실 것이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꼭 그대로 일들이 되어간다는 것을 조만간에 깨닫게 될 것이며 그의 경고는 헛소리가 아니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Ⅱ선지자는 자기 재난을 슬피 탄식하는 백성들을 등장시키고 있다(19절). "슬프다! 내 상처여!" 흑자는 이 말씀을 선지자 자신의 비탄으로 해석한다. 즉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조국의 재난과 황폐 때문에 슬퍼하는 선지자의 탄식하는 것이다. 자신들을 위해 애곡하라고 설득해도 들으려 하지 않는 자들을 위해 그는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함께 슬퍼할 만큼 지각있는 인사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남몰래 눈물울 흘리며 "슬프다" 고 절규하는 것이다. 슬픈시기에는 슬픈 마음을 품는 것이 어울린다.

그러나 백성을 하나의 집단으로 간주하고 개인의 표현 양식을 빌린 것으로 생각할 때 이 본문은 백성의 말로 해석할 수도 있다. 선지자는 그들이 의당해야 할 말을 그들의 입에 둔 것이다. 그들이 말하고 싶든지 않든지간에 그들은 그렇게 말해야 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이렇게 한탄하고 싶었을 것이지만 결국 그 나머지 사람도 다 이런 탄식을 내뱉지 않고는 안 되게 되었다.

1. 그들은 고난이 매우 심하며 아주 견디기 어렵다는 것을 슬피 탄식한다. 그들은 고생은 고생을 늘 당해 보지 않았고 또 그것을 예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견디기 어려웠다. "슬프다. 내 상처여!" 그들이 슬퍼하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아픔이었다. 어떤 자들은 상처보다는 공포를 더 악하게 여기지만 이들은 반대이다. 게다가 그 상처는 가벼운 데 아니라 중상이었다. 매우 고통스럽고 위협적인 부상이었다.

2. 그들은 참는 것 외에는 달리 치료할 길이 없다는 것을 슬퍼한다. 그들은 스스로 손쓸 도리도 없고 가만히 앉아서 참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라." 이것은 상처에 대해 막 불평하려고 하다가 "불평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것은 고난이라 할 수 있는 한 내가 참아야지" 하는 독백이다. 기꺼이 순복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찡그리고 하는 말이며 부득이 참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지 원리의 의해 참는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 있을 때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즉 "이것은 재앙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나는 참아야하며 그가 지혜로 나를 위해 이 일을 정하셨고 그가 은혜로 이 고난을 통해 나의 유익을 이루려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감수해야 하겠다." 이것은 하나님의 손에서 받는 재앙이다(욥 2:10). 그러나 "이것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재난이기 때문에 참지 않을 수 없다" 고 말하는 것은 무지한 인내이며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항상 품고 있어야 할 선한 생각이 결여되어 있다는 증거가 된다. 고난 속에서조차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일을 행하실 수 있으시며 또 행하실 것이다" 라고 말해야 할 뿐더러 "주여! 원대로 하옵소서" 하고 말하기도 해야 한다.

3. 나라가 완전히 망하고 황폐케 된 것을 슬퍼하고 있다(20절). "내 장막이 훼파되고." 예루살렘은 견고한 도성이었으나 여기에서는 장막처럼 연약하고 이동될 수 있는 것임이 입증되었다. 정부는 와해되고 국가는 무너진 장막이나 천막처럼 붕괴되어 조각이 났으며 장막을 붙들어 매고 있어야 할 모든 줄은 끊어졌다.

또는 여기에서 말하는 장막은 성전, 지성소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성전은 맨처믈 장막에 불과하였고 장막이 종종 성전이라고 불리웠듯이 지금도 성전이 장막이라고 불리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교회와 국가, 지방과 도시할 것 없는 전체적인 파괴였다. 이러한 파괴를 당하고도 수리할 자가 없었다. "내 자녀가 나를 떠나가 버렸다." 일부는 도주하였고 또 딴 자들은 살륙되었으며 나머지는 포로로 끌려가 버려서 "내게는 그들의 있지 아니하다." 나는 부랑인이 될 지경이며 피신처가 없어 망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내 장막을 세울 자가 다시 없으며 나를 위해 그 일을 해 주던 자녀가 하나도 없고 내 장을 칠 자가 다시 없으며 내게 봉사해 줄 이라곤 도무지 없는 까닭이다." "예루살렘이여! 네가 낳은 모든 아들 중에 너를 인도할 자가 하나도 없구나" (사 51:18).

4. 통치자들이 백성의 고난을 제거하고 파괴된 국가의 재건을 위하여 애쓰지 않으며 적절한 대책을 세우지 않음을 그는 슬퍼하고 있다(21절). "목자들은 우준하다." 장막 즉 목자들의 천막이 훼파됐을 때 그것을 돌보는 것은 목자가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목자들은 우매한 자들이었다. 그들의 왕들과 방백들은 공중의 복지 따위를 염두에 없었으며 국토의 황폐를 인식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들은 아주 얼간이들이었으며 얼이 빠져 있었다. 하나님의 장막을 지키는 목자들 즉 제사장들은 신앙의 파괴에는 아주 많은 이바지를 했으면서 그 수선에는 아무 것도 행하지 않았다. 그들은 참으로 우준하였다. 그들은 여호와를 찾지 않았던 때문이다. 그들은 그와 화해하려 하지도 않았고 기도드리지 않았으며 일을 처리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그 섭리를 안중에 두지도 않았다. 그의 손에서 나올 심판을 인식하지도 않았으며 또 역시 그 손에서 나올 구원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여호와를 찾지 않으며 기도 생활을 하지 않고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자들은 우준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양떼를 지식과 명철로 먹여야 할 목자들이 이처럼 우준하다면 그 백성은 실로 슬픈 백성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결과는 어떠한가? "그들은 형통치 못한다." 공공의 안전을 위한 그들의 시도는 하나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모든 길에서 기도와 신앙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자들은 형통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

그리고 목자가 우준한 때에 그 모든 양떼가 흩어지는 것밖에 달리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흔히 백성의 멸망은 그 목자들의 우준함에서 기인한다.

5. 원수의 내보(來報)가 매우 두려우므로 그는 슬퍼한다(22절). "크게 떠드는 풍성이 오니." 그 소문은 처음에 귓속말로 주고 받는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널리 퍼졌다. 그러나 확인된 것은 아니었다. 이제 그 소문이 사실로 판명된 것이다. 북방에서 큰 소요가 일어났으니 그것은 곧 온 유다의 성읍들로 황폐케 하여 사랑의 거처가 되게 하리라는 위협적 소문이었다. 그들은 모두 갈대아 군대의 탐욕과 분노의 제물이 될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죄악으로 말미암아 강도의 굴혈이 된 곳은 시랑의 소굴로 되는 것밖에 달리 바랄 것이 없지 않은가?

Ⅲ.font> 선지자는 백성에게 말해 봤자 무용함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향하여 말을 걸고 있다. 사람들이 말을 들어주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들어주실 것이라는 것은 목사들에게 다소나마 위안이 된다. 하나님께는 그들이 언제든지 접근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아무리 말해 봐야 반응이 없을 때 목사는 자책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이런자는 예레미야처럼 기도로 설교를 끝맺어 보라. 그러면 헛되이 수고했다고 말할 이유가 없게 될 것이다.

1. 선지자는 여기에서 신의 섭리의 지엄하심과 주권을 확인하며 국가의 일이나 개인의 일을 지시하고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와 지혜가 아니라 바로 이 섭리라는 것을 고백한다(23절). 이것은 고통을 호소하거나 자비를 애원하려고 할 때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에서 고백하기에 안성마춤인 신앙 고백문이다. "여호와여! 사람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함을 나는 알고 믿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저 혼자 우리 강토를 치러 온 게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의 지시를 따라 온 것임을 알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역사하시고 우리의 구원을 명령하지 않으신다면, 우리 혼자 우리 자신들을 구하기 위한 어떤 일도 해 낼 수 없다. 걷는 자가 완전한 자유 속에서 자기 길을 선택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않는 때문이다. 자기 재산과 소유를 오래 오래 즐길 것으로 기대하던 그들은 갈대아인에게 축출당하는 비운을 겪고 나서야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이 심사숙고하여 보기 좋게 세운 계획도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만다. 우리는 누구나 자행자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요 하나님의 지도 하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거기에 신앙을 가미해야 할 것이다. 세상 일은 왕왕 우리의 의도와 기대하곤 전혀 딴 방향으로 결말이 나는 수가 적지 않다. 우리는 우리 길의 주인이 아니며 만사가 우리 의사대로 또한 다고 생각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싯을 하나님께 의뢰해야 하며 그의 뜻을 묵묵히 좇아야 한다.

흑자는 선지가가 이 말씀을 편리하게 이용하려는 의도에서 언급한다고 생각한다. 즉 갈대아 군대의 길도 그들 자신에게 있지 아니함으로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것 이상의 절대로 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들 교만한 파도에서 한계를 정하셔서 "여기까지 오고 넘어가지 못하리라" 고 하실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극히 흥맹한 대적들도 위로부터 주시지 않으시면 우리를 해할 권세가 없다는 것은 조용이 음미해 볼 말씀이다.

2. 그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하나님의 이스라엘 위에 떨어지지 않게 해 주시기를 탄원하고 있다(24절).

그는 자기 혼자만을 위해 말하는 게 아니라 자기 백성을 위해 기원하고 있다. "여호와여! 나는 징그러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적당하게 약간만 징계하시고 우리 마음속에 꽁꽁 매여 있는 미련한 것을 쫓아내는 정도 이상은 마옵소서)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당신은 징계가 아무리 엄해도 좋읍니다만 그 징계가 당신의 사랑에서 나오게 하시고 우리의 유익을 목표로 하시고 선을 이루는 것이 되게 하소서). 우리로 없어지게 하지 마시고 우리가 제 정신을 차리도록 하소서. 우리의 죄에 댓가대로 징계하지 마시고 당신의 은혜대로 징계하소서." 다음을 명심하자.



(1) 우리는 신앙 양심상 절대로 징계받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드릴 수는 없다. 우리는 징계가 필요하고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으며 하나님이 많이 사랑하시면 할수록 그만큼 더 연단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2) 환란 중에 우리가 크게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진노이다. "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하고 말할 게 아니라 "여호와여! 나를 진노로 징계하지 마옵소서" 하고 기도하라. 하나님의 진노하심은 환란에다 쑥과 독한 물을 부으시며 우리로 없어지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따끔한 매는 우리가 참을 수 있으나 진노하심은 견딜 수가 없다.

3.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압제하고 핍박하는 자들에게 진노를 내리시도록 기원하고 있다(25절).

"주를 알지 못하는 열방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이 기도는 악의나 복수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며 심판을 베푸셔야 할 대상과 순서를 하나님께 지시하려고 하는 기도도 아니다.



(1)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호소이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여호와여! 우리는 패역한 백성입니다. 그러나 보다 더 패역한 민족들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만 벌을 받습니까? 우리는 당신의 자녀들입니다. 그러기에 아버지의 징계를 예상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당신의 원수들입니다. 그러므로 진노의 대상은 우리가 아니라 그들이어야 한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손에 든 잔을 섞인 것이 가득하나 그것은 곧 자비의 혼합물이지만 땅의 모든 악인에게는 그 잔의 찌끼가 예비되어 있는 것이다. 땅의 악인은 그 찌끼까지도 기울여 마셔야 할 것이다(시 75:8).



(2)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와 나라에 대적하며 회개하지 않는 모든 원수들에게 내릴 하나님의 심판의 예고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시작된다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리요?(벧전 4:17)

하나님의 분노가 부어질 이방인들은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1]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며 또 그것을 만족히 여긴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못하며 알기를 원치도 않는다. 그들은 기도하지 않는 족속들이며 신앙이라곤 눈꼽만치도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르지 아니한다. 기도를 멀리하는 자들은 그를 알지 못한다는 증거이다. 그를 아는 자들은 그를 찾고 그의 은총을 간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자들이며 또 그렇게 하려고 다짐하고 있다. 배고픈 자들이 허겁지겁 음식을 먹어 치우듯 이 그들은 탐욕으로 야곱을 씹는다. 아니, 그 보다 더하다. 그들은 배부른 시기가 언제인지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야곱을 삼켜 멸하며 그 거처를 황폐케 하였다. 그의 거처란 야곱의 사는 땅 또는 하나님의 성전을 말한다. 성전은 하나님이 그들 중에 계신 그의 거처이다.

하나님께서는 징계의 도구로 이방인을 사용하시지만 이방인이 악의와 분노로 자기 백성에게 행하는 일로 인하여 그들을 자기 분노의 대상으로 삼으실 것이다. 이 기도는 시편 76편 67절에서 인용되었다.

 

10:18 없음.

 

10:19 없음.

 

10:20 없음.

 

10:21 없음.

 

10:22 없음.

 

10:23 없음.

 

10:24 없음.

 

10:25 없음.




































 


  1.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01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2.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02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3.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03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4.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04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5.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05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6.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06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7.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07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8.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08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9.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09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10.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10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11.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11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12.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12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13.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13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14.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14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15.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15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16.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16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17.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17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18.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18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19.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19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20.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20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21.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21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22.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22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23.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23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24.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24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25.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25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26.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26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27.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27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28.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28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29.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29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30.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0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31.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1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32.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2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33.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3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34.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4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35.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5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36.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6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37.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7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38.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8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39.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9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40.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40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41.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41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42.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42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43.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43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44.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44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45.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45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46.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46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47.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47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48.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48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49.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49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50.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50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Next
/ 2

All the Bibles, Commentaries and Dictionaries here have their own rights.
All rights are reserved for them, not for us. Thanks! Praise our great God, Christ Jesus!

HANGL Lingua Franca 한글 링구아 프랑카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