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는 불행의 운인(예레미야 9:1-11)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박한 멸망의 예고와 그런 파멸의 빌미기 되는 죄악의 지적을 위탁받은 선지자는 딴 데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이 두 가지를 매우 실감나게 언급하고 있다. 그가 말한 것은 진정에서 우러나온 것이기에 누구나 그 말씀에 심금을 울릴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Ⅰ. 그는 자기 백성의 참담한 형편을 생각하고 자신의 슬픔에 내 맡긴다. 그는 자기의 큰 기쁨보다 예루살렘을 더 아끼고 자기의 큰 슬픔보다 예루살렘의 곤고를 우선시하는 자답게 슬피 통곡하고 있다.
1. 그는 사람의 살륙과 유혈과 인명의 상실을 애곡한다(1절).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며 비탄으로 아주 녹아서 분해가 되어 버리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까!" 이 탄식은 울어야 할 일이 자꾸만 새로이 생기기 때문에 넘치리만치, 끊임없이, 쉴새 없이 울며 눈물의 홍수가 여전히 계속되는 것을 말한다. 이 근심의 땅에서는 보는 일보다 우는 것을 위해 우리 눈이 생긴 것이기라도 한 양 히브리어로 눈과 샘이란 말은 동일한 단어로 나타내 주고 있다. 예레미야는 많이도 울었다. 그런데도 그는 우둔한 백성을 감동시키고 그들을 일깨워 하나님의 치시는 손길을 제 때에 인식하게 하기 위하여 더 많이 울기가 소원이었다.우리가 이 눈물의 골짜기에 사는 동안 이곳의 기후에 적응하여 눈물로 씨뿌린다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으니 그들은 나중에 위로함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비가 온 뒤에도 구름이 여전히 모인다는 것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우리 마음이 죄의 근원임을 발견하는 이상 우리 눈은 눈물 근원이 된다는 것은 온당하다. 그러나 본문에서 예레미야가 슬퍼하는 것은 공적인 이유 때문이다. 그는 주야로 곡읍하고자 하였다. 자기 친 혈육의 죽음을 당해도 이렇게 애곡하지 않을 터인데 그는 살육당한 딸 그의 백성 곧 전쟁으로 칼에 쓰러진 무수한 동포를 위하여 슬퍼하였던 것이다.
큰 전투와 포위 공격에서 많은 사람이 살상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될 때 우리는 지성으로써 많은 느낌을 받아야 하며 그 일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살륙당한 자가 우리 백의 여인에게서 난 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어떤 백성이건 간에 그들은 우리와 본성이 꼭 같은 인간이며 우리에게 있어서 생명이 소중하듯 귀중한 인명이 그토록 많이 상실되고 그토록 귀한 많은 영혼이 상실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2. 그는 국토의 황폐를 애곡한다. 격렬하게 흐느끼는 자들은 흔히 그 말에 두서가 없고 조직적이지를 못한 까닭에 그는 10절에 가서야 이렇게 비탄해한다. "크고 작은 도시뿐만 아니라 산들을 위해서도 내가 곡하며 부르짖으리라." 그가 슬퍼한 것은 볼모의 산들이 아니라 유대에 풍부하였던 비옥한 구릉지였다. 또 그는 광야 목장을 위하여 슬퍼하였다. 그곳은 양떼로 옷입히듯 하였고 곡식으로 뒤덮여 있어서 매우 보기 좋은 광경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제 그것들이 갈대아 군들에 의하여 불에 탔기 때문이다. 전쟁의 관습대로 군마의 양초(糧草)를 위해 꼴은 다 징발되었고 가축은 죄다 몰아 가버렸다. 그래서 그곳을 통과하려는 자들이 없음은 적군의 잔당을 만나게 될까봐 두려워해서이며 아무도 그것으로 지나기를 좋아하지 않음은 모든 것이 음침하고 두렵게 보이기 때문이며 아무도 그리로 통행할 일이 없음은 옛날처럼 거기서 가축의 소리가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전에는 매애 매애하는 양 울음소리가 들렸고 그것이 그 소유주의 귀에는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되었었다. 뿐만 아니라 공중의 새도 짐승도 다 도망하여 없어졌다. 적군이 내는 난폭한 소음과 충천한 회광에 놀라 도망하였거나 아니면 먹을 게 없으므로 하는 수없이 달아났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중에 거하는 거민의 악을 인하여 소산이 많은 땅을 황무하게 만드시는데 그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다. 국토를 대규모로 파괴하는 전쟁은 마음이 여린 모든 자에게 애통을 가져다 줄 뿐이다. 그것은 비극이며 연극이 상연되는 무대를 파괴하는 비극이기 때문이다.Ⅱ. 그는 백성의 악명높은 특성과 고약한 행위를 생각하고 고독에 빠진다. 비록 그는 하나님을 아는 땅 유다에 거하고 하나님의 장막이 있는 살렘에서 살고 있지만 "메섹에 유하는 것이 내게 화로다" (시 120:5)하고 외쳐대고 싶은 심정이다. 그의 모든 이웃 사람들이 적군의 격노를 두려워하여(4:5, 6)견고한 성곽 도시 특히 예루살렘으로 피신하고 있는데 그는 자기 백성의 죄악을 혐오하여 어떤 사막으로 은둔하려고 궁리하고 있다(2절). "어찌하여 내가 광야에서 나그네의 유할 곳을 얻을꼬!" 사람이 살지 않던 아라비아 사막에는 길손이 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고적한 오막살이집이 있었다. 그는 지금 그런 곳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가 내 백성을 떠나가리라." 이것은 백성들이 그에게 나쁜 대우를 하였다는 이유에서만은 아니었다. 그는 그토록 패역하고 야만적인 백성중에 사느니보다 차라리 광야의 들짐승들 틈에서 연명하기를 바랐다. 이것은 주로 소돔에 있던 롯처럼 날마다 그들의 악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자기의 의로운 심령이 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벧후 2:7, 8).
이것은 예레미야가 이렇게 은둔할 의사나 결심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백성 중에서 일하도록 배정해 놓으셨고 그는 자신의 안일을 위하여 그 일을 버리고 떠나 갈 수는 없었다. 세상이 비록 악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우리의 시한 전에 세상으로부터 나가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예레미야 선지는 설령 자기 백성을 회개시키지는 못하더라도 그들을 쳐서 증거할 수는 있을 터였다. 많은 자들에게 유익을 주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몇몇 사람들에게는 선을 행할 수가 있을 터였다. 따라서 본문 말씀은 그가 백성을 떠났으면 하는 시험에 들어 있었음을 암시해 주며 이런 백성에게서는 자기의 사역을 박탈해야 마땅하다는 위협이 내포되어 있다. 특히 그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가증스런 악을 계속 자행한 데 대해 그가 품은 거룩한 분노를 담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그들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을 볼 때는 사는 것조차 귀찮아졌던 것이다. 하나님을 수치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그들 자신의 멸망을 의미한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거기 두시려고 택하신 곳은 선량한 자들에게 사모와 기쁨의 대상이 되던 시대였다. 광야에 있던 다윗은 하나님의 집뜰에 다시 서기를 동경하였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성전의 뜰에서-그가 이 말을 할 때는 거기 있었다-광야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소원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람들과 사역자들로 하여금 염증을 느끼게 만들어 자기들에게서 떠나가고픈 마음이 들도록 한 그들을 스스로를 매우 비참하게 만든 자들이었다. 그들을 떠나 가고파하는 자신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준다.
1. 그가 그들 중에서 직접 관찰할 것.(1) 그들이 가난하다거나 곤고한 중에 있다고 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악하기 때문에 그는 떠나갈 생각을 하였다.
[1] 그들은 음탕하였다. "그들은 다 행음하는 자요." 음란은 그들 대다수의 일반성이었다(5:8). 그들은 전부가 이 음란죄를 저질렀거나 묵인하였다. 음란과 부정은 소돔의 심판을 호소하는 죄가 되었고 의로운 롯은 이에 심령이 상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모든 선한 자들의 눈에 역겹게 보이도록 하는 죄이다. 음란은 사람을 가증히 여김을 받게 만든다.
[2] 그들은 거짓되었다. 본문에서 아주 상세히 설명하는 것은 바로 이 죄이다. 자기들의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했던 자들은 서로 간에도 충실하지 못하였고 이것은 그들의 죄악인 동시에 형벌의 일부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속이기를 즐겨하는 자들이라 하지만 속임을 당하기는 싫어했기 때문이다.
첫째, 종교적 행사나 정의의 행사를 위하여 또는 상업을 위해 그들의 엄숙한 모임에 나가 보라. 즉 교회에 법정과 거래소에 들어가 보라. 그들은 패역한 자의 무리(단어의 의미는 회중)이다. 그들은 동의로써 서로의 패역을 용납하고 있으며 서로의 손을 강하게 하여 부실한 일을 행하게 한다. 거기서 그들은 유유히 그리고 부지런히 속일 것이며 꾀로서, 악한꾀로서 기만할 것이다(3절). 그들은 활을 당김같이 그 혀를 놀려(원뜻:구부려) 거짓을 아주 능수능란하게 말할 것이다. 잡아당긴 활이 쏘기에 알맞듯 그들의 혀는 거짓말하기에 적합하며 그런 목적으로 변함없이 사용된다. 그들의 혀는 활이 순하게 시위에 맞닿을 듯이 굽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제조해낸다. 그러나 그들은 이 땅에서 강성하나 진실하지 아니하다. 그들의 혀는 시위먹인 활과 같아서 자기들의 능숙한 솜씨와 결의를 진실된 일에 이용하려고 하기만 한다면 좋은 봉사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렇게 행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선지자들을 통해 전달받은 하나님의 진리를 방어하러 나서지 않는다. 그 말씀들이 진리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던 자들조차 진리의 퇴락을 방관하고 있었다. 법의 행사에 있어서도 그들은 정당한 주장을 응호할 만한 용기가 없었다(강성하다는 원뜻은 용감하다). 이 편에 진실이 있고 저편은 허위라고 하더라도 권세있는 자들은 감히 그에 맞서 진실된 자의 정직한 송사를 편들지 못하였다. 진리에 충실하려는 자는 진리를 위해 용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리에 대한 반대에 기가 꺾여서는 아니 되며 사람의 낯을 두려워해서는 아니 된다. 흑자는 이렇게 해석하기도 한다. "그들이 진실을 위하여 이 땅에서 용감하지 아니하며." 땅 곧 그 나라가 영화로우려면 그곳에 진실이 있어야 한다. 진실이 땅에 떨어졌지만 그것을 일으켜 세우려고 감히 손을 내미는 자가 없었다(사 59:14, 15). 저 다른 날에 우리는 진리와 적대 관계에 있는 것 뿐만 아니라 진리를 수호하는 일에 비겁하였던 일 때문에도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둘째, 그들의 가정에 들어가 보라. 그러면 그들이 자기 형제조차 속이려 든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형제마다 온전히 속인다). 그들은 할 수만 있으면 남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려고 한다. 그들은 남을 이용해 먹고 싶어하며 온갖 이득을 우려낼 수 있는 봉을 잡으려고 기회만 노리고 있다. 야곱은 속임으로 자기 이름을 얻었는데 본문의 속인다는 단어는 바로 야곱의 기사에 나오는 단어와 동일하며 "속여서 밀어내고 대신 들어 앉는다" 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따라간 것은 그의 진실된 성격 곧 간사함이 없는 성격이 아니라 그의 이름이었다. 그들은 너무나 거짓되어서 형제도 믿을 수 없었다. 형제를 대할 때에도 낯선 자 즉 그 손에 속이는 저울을 든 가난안인과 거래하기라도 하는 듯이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람이 자기형제도 믿지 못하게 된다면 사태는 실로 난감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셋째, 상점에 들어가서 그들의 거래와 행사를 살펴 보라. Nec hospesab hopite tutus-즉 주인과 손님이 다 쌍방으로부터 위험을 느낀다. 지혜로운 자가 줄 수 있는 최선의 충고는 각자가 자기 이웃을 삼가며 자기 친구(흑자는 그렇게 해독한다) 즉 자기에게 친절히 대하거나 우정을 표하는 자를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고맙게 하거나 성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행사를 살펴보면 이웃마다 다니며 비방하려 하였다. 그들은 아무런 거짓된 험구라도 개의치 아니하고 서로가 입에 올렸다. 그들은 비방이 가는 길이면 따라 가려고 하였다. 그들은 비방과 함께 행하려 하였다. 중상 모략을 들고서 저집으로 돌아 다녔다. 이간을 붙이기 위해 주워 모을 수 있은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모아 가지고 다녔으며 날조한 악담도 휴대하였다. 그들의 장사와 거래를 살펴보자. 그들은 각기 이웃을 속이려 하였다. 이익을 위해서는 거짓인 줄 뻔히 아는 일도 진실인 양 말하려 하였다. 아니, 그들은 자기 혀를 거짓말에 사용하기 위해 거짓말을 위한 거짓말을 하였다. 그들은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고 일부러 거짓말을 찬찬히 얘기하였으며 거짓을 말하고는 쾌활하게 웃어댔다.
(2) 이 거짓되고 거짓말하는 세대의 죄를 더욱 악하게 하는 것이 있다.
[1] 그들은 범죄하는 데 재가이 뛰어났다. 그들은 자기 혀로 거짓말 하기를 가르쳤다. 이것은 그들이 양심을 혐오함으로써 양심에 맞춰 행동하기가 어려웠음을 암시한다. 그들의 혀는 진실을 말하려고 했으나 그들은 거짓말 하기를 가르쳤다. 점차 그들은거짓말의 대가로 되어 갔고 거짓말을 습관적으로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거짓말을그들에게 제 2의 천성이 되어 버렸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거짓말을 배웠다-악인은 모태에서부터 거짓을 말하므로(시 58:3)-그래서 이제는 거짓말을 교묘히할수 있을 만큼 장성하였다.
[2] 그들은 죄짓는 데 부지런하였다. 그들은 악을 행하기에 힘쓴다. 그들은 양심에 무리한 힘을 가하여 자기들의 악한 범죄를 용인하게 만든다. 그들은 끊임없는 폭력으로 자기들의 확신을 지치게 만든다. 천신만고 끝에 스스로를 기진맥진하여 만들어서 자기들의 악한 계획을 성취한다. 그들은 죄악을 추구하는 일로 지쳤지만 아직도 죄에 싫증을 느끼지는 않는다. 죄에 대한 봉사는 완전히 고역이다. 사람들은 자기 영혼을 파멸시키기 위하여 범죄의 길로 숨가뻐하며 달려가고 극심한 고생도 불사하다.
[3] 그들은 점점 더 악해진다(3절). "그들은 악에서 악으로 진행하며 한 가지 죄에서 딴 죄로 나아가며 낮은 정도의 죄에서 높은 정도의 죄로 올라간다. 그들은 하잘 것 없는 죄에서 시작하였다 Nemo repente fit turpissimus-즉 누구도 한꺼번에 악의 정상에 오르지는 못한다. 그들은 어물쩡 넘어가는 말과 농담에서 출발하여 마침내는 노골적 거짓말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도 그들은 계속 보다 큰 죄로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나를 알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라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도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추구하지 않는 자들에게서 무슨 선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인간들 사이에 모든 비행은 하나님께 대한 무지에서 야기된다.
2.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알려 주신 그들의 악함을 실염하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결정하신 일을 제시한다.
(1)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악을 주목하셨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가 다루어야 할 백성이 어떤 부류의 인간인지 그에게 말씀해 주실 수 있으셨다(그리고 궁휼한 마음으로 그것을 말씀해 주신다). "
나는 네 행위가 네가 어디 사는지를 아노라" (계 2:13). 본문의 뜻도 마찬가지이다(6절). 네 처소는 궤휼 가운데 있도다. 네 주위에 있는 자들은 전부가 속이는 일에 열중하고 있으니 너는 경계하라. "사람들이 다 거짓말을 하는 경우에는 사람을 조심하고 뱀같이 지혜로와지도록 힘써야 한다. 그들은 궤사한 인간들이다. 그러므로 "네가 그들에게 선을 행하려고 해도 그것은 희망이 거의 없다. 아무리 알기 쉽게 설명한다고 해도 그들은 이런 저런 계략을 써서 자기들의 확신을 무산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이 책망은 8절에서 부연되고 있다. 그들의 혀는 당긴 활이어서 음모를 꾸미며 행악을 예비하고 있었다(3절). 여기에서는 죽이는 살 즉 쏜 살이 되어서 자기들이 계획한 것을 실행하고 있다. 그들의 혀는 많은 사람에게 죽이는 무기가 되어왔다. 그들은 입으로는 그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나 동시에 마음속으로는 해를 도모하고 있다. 요압은 아브넬을 막 죽이려는 찰나에도 그에게 입을 맞추었으며 가인은 자기의 악한 꾀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자기 형제와 자유스럽고 친근하게 말을 나누었다. 아름다운 말도 선한 의도가 수반되지 않으면 비루한 말이 되고 악한 의도를 위장하고 은폐하기 위한 것이면 가증스런 말이 된다. 그들이 서로간에 이같은 온작 피해를 입히는 반면 하나님을 크게 멸시하기도 하였다(6절).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3절) 궤휼로 인하여 즉 거짓 선지자들의 현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는 것을 거절하였다(6절). 그들은 기만을 당하여 자기들의 길을 선하게 생각하며 자기 마음의 행사를 높이 평가하게 되어서 하나님의 길에 대한 지식을 원하지 않는다. 또는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들어가 있는 이 죄스러운 길에 너무 밀착되어 있고 그 길과 그 길에 소득에 너무나 매혹되어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결코 용납하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죄중에 있는 자기들을 억제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죄인들의 멸망을 의미한다. 그들은 여호와께 대한 선한 지식을 배울 수가 있었는데도 배우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관한 지식이 없는 곳에서 무슨 유익을 바랄 수 있으랴!(호 4:1)
(2)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셨다(7,9,11절). 하나님이 자기들의 입법자임을 알려고 하지 않는 자들은 그가 자기들의 재판관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시기를 결심하시는데 이것은 일부는 연단시키시고 나머지는 멸망시키시기 위함이었다.
[1] 일부는 연단을 받게 될 것이다(7절). "그들이 이처럼 부패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을 녹이고 연단하리라. 그들을 환난 속에 집어넣고는 회개의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볼 것이며 고난의 용광로가 그들을 불순물로부터 정화시킬 것인지 어떤지 시험해 볼 것이며 그들이 용해되고 나서 보다 나은 형태로 새로 주조될 것인지의 여부를 지켜보겠노라" 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그는 그들을 완전히 멸망시키기 전에 보다 작은 고난으로 시험해 보신다. 왜냐하면 그는 죄인의 죽음을 원치 않으시는 까닭이다. 단련하는 자의 일이 헛되게 되기까지는 그들은 내어버린 은으로서 버림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6:29, 30).
" 내가 내 딸 백성을 어떻게 처치할꼬?"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그들에게 가장 최선의 해결이 될는지 자기 자신과 상의하기라도 하는 듯이 말씀하신다. 먼저 모든 가능한 방법을 동원하여 그들을 회개시키려는 시험을 해 보기 전에는 그들을 추방하며 파멸당하도록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는 분처럼 말씀하신다. 또는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내가 달리 어떻게 그들을 처치할꼬? 그들은 너무나 타락하여서 용광로에 집어넣는 것 말고는 달리 길이 없다. 내가 그들에게 딴 무슨 방도를 취할 수 있겠는가(사 5:4, 5). 그들은 내 딸 백성이다. 그래서 무엇인가 내 자신의 명예를 입증할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내가 그들의 악을 묵인한다면 나의 명예는 수치를 당하게 되리라. 그들을 환원시키고 개선시킬 일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독백이었다. 부모가 자기 자녀를 징계하는 것은 그들이 자기 자신의 소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괴롭게 하실 때에는 그들을 달래고 개심시키려는 은혜로우신 목적에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단지 그렇게 하실 필요가 있으시며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으실 때만 그렇게 행하신다.
[2] 나머지 무리는 파멸을 당할 것이다(9절). "내가 이 일들을 인하여 벌하지 아니하겠느냐?" 사기와 허위는 하나님께서 증오하시며 장차 셈하실 죄악이다. "온통 부패하고 죄 중에서도 뻔뻔스러워서 하나님의 보수를 감히 두려워하지않고 무시하는 나라에게 내 마음이 보수하지 않겠느냐?" 판결은 내려졌고 명령은 발하여졌다(11절). "내가 예루살렘으로 쓰레기 무더기를 만들며 폐허가 되게 할 것이니 사랑의 굴혈이 되는 것 외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될 것이며 유다 성읍들도 황폐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시행하실 것이니 원수에게 그렇게 행하라는 위임장과 권세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째서 거룩한 성이 쓰레기더미로 되는가? 그 해답은 자명하다. 거룩한 성이 거룩하지 못한 곳으로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지혜있는 자여 통곡하라(예레미야 9:12-22)
예레미야 선지는 임박한 예루살렘과 유다의 멸망에 관한 이 말씀 가운데에서 두 가지 일을 의도하고 있다.
1. 백성에게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확신시키는 일. 그들은 죄로인해 파멸을 자초한 것이며 따라서 그들에게 아무런 그릇된 일을 행치 않으신 하나님과 언쟁을 벌일 이유가 없고 자기들에게 이 모든 해를 가한 장본인인 죄와 시비를 가려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그는 갈파한다.2. 닥쳐오고 있는 황폐의 정도가 얼마나 심하며 그 비참한 결과가 어떤지를 언급함으로써 백성을 감화시키는 일. 목불인견의 파멸상을 미리 전망하게 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각성하여 회개하고 개전의 정을 나타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는 이렇게 설득을 하는 것이다. 회개야말로 멸망을 방지하는 유일의 방법이었다. 아니면, 최소한 그들의 형벌을 경감시키는 단 하나의 길이었던 것이다. 이런 것을 의식하고 그는 다음과 같이 행동한다.
Ⅰ그는 백성들이 거칠고 가혹한 듯이 보이긴 하였으나 하나님의 처사가 공평함을 그들에게 설명할 지각있는 인사를 부르고 있다(12절).
"여호와의 입의 말씀을 받아서 공포할 지혜있는 자나 선지자는 누구며 어디에 있는가? 너희는 너희 지혜와,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을 자랑한다. 인간의 이성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신적 계시에 정통한 자를 하나만 내게 보내라. 그리하면 그는 곧 이 일을 깨닫게 될 것이며 그에게 이 일이 너무나 명확하여서 그는 즉시 그것을 남들에게 선포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백성과 벌이시는 하나님의 논쟁에는 정당한 근거가 생기게 된다."
지혜로운 자들은 "이 땅이 어찌하여 멸망하는가? 이 땅에 그와 같은 변화가 생기는 것은 무슨 영문인가?" 하고 반문하면 조사해 보라. 이 땅은 하나님께서 애지중지하시고 언제나 자기 눈을 떼지 않으시던 땅이었다(신 11:2). 그러나 하나님께서 버리시고 자기 얼굴을 돌리시는 땅이 되었다. 그곳은 여호와의 동산으로서 번성하던 곳이었고 주민으로 꽉 채워진 곳이었는데 이제는 광야 같이 타서 지나가는 자가 없게 되었다. 하물며 거기 들어가 살려고 하는 자가 있겠는가!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게 되면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이 땅에 이같이 행하셨느뇨? 이같이 크고 맹렬하게 노하심은 무슨 뜻이뇨?" 하고 의문을 제기하게 될 것이란 사실을 오래 전에 상상되었었다(신 29:24). 하나님께서는 이런 질문에 대해 충분한 대답을 하시는데 모든 인간은 그 대답에 잠잠하지 않을 수 없다.
1. 하나님께서는 기록을 들추셔서 기소장을 제출하신다. 이에 따르면 그들의 유죄가 입증된다(13,14절). 부인할 수 없는 그들의 혐의 사실은 다음과 같다.(1) 그들은 자기들의 의로우신 주권자에게 대한 충성심을 버리고 반역하였다. 그들은 그토록 분명히, 그리고 완전히, 너무나 자주 그들 앞에 세우신 그의 법을 버리고 그의 명령을 준수하지 않았으며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았으며 그가 지정한 길로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땅을 버리셨으며 또 그것을 공정한 일이었다. 그들의 악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의 태만과 그의 권위에 대한 멸시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들에게 대한 추궁은 계속된다.
(2) 그들은 찬탈자와 침해자의 일에 몰입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군주에게 대한 복종심을 버렸을 뿐만 아니라 무기를 들고 그에게 대항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기소 내용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입증된다.
[1]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 경쟁하며 그것을 부정하기라도 하듯이 자기 육욕의 명령을 따라 행동하며 자신의 의지 즉 육적인 의지와 세속적 마음을 세웠다. 그들은 그 마음의 강퍅함을 따라 행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과 양심이 어떤 반대의 말을 하더라도 자기들의 마음대로 행하려고 하였다.
[2] 그들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전통을 따라 자기들 상상의 창작물이요 자기들 손의 산물인 피조물을 경배하였다. 그들은 바알들을 좇았다. 이 단어는 복수형이다(바알림:baalim). 그들에게는 여러 바알들이 있었다. 바알브을이라든가 바알브릿이 있었고 이 곳의 바알, 저 곳의 바알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열조가 섬기라고 가르쳐 준 주인들(바알은 주인의 뜻임)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희 열조의 하나님께서는 재삼 재사 그들에게 이것을 금지시키셨다. 이것이 바로 이 땅이 멸망하게 된 이유였다. 왕 중의 왕께서는 이와 같이 그 자신의 백성에게 결코 전쟁을 걸지는 않으신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에게 반역하여 떠나가며 반란을 일으킬 때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그들의 반란을 징계하고 그들의 충성심을 회복시키시는 것이 불가피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도 자기들에게 임한 모든 일 가운데서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는 것을 결국 고백하게 될 것이다.
2. 이 기소에 대해 내려진 파멸. 이 반역에 대해서는 유죄 선고가 내려졌고 그것은 이제 집행되어야 했다. 그 판결은 의로웠고 그 어떤 것도 집행을 저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 하셨는데 누가 그것을 번복할 수 있으랴(15,16절).
(1) 자국 내에 있는 모든 위안물은 독하게 되며 쓰게 될 것이다. "내가 이 백성에게 쑥을 먹이리라." 쑥은 쓴 나물이긴 하나 몸에 해롭지는 않다. 본문의 쑥은 늑대독이란 독초를 가리킬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건강에 해롭고 욕지기나며 유독한 풀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그들에게 독한 물울 마시우리라" (원문의 독한 물은 곧 쓸개즙의 대역으로 월년초의 독액이나 딴 유독한 풀의 즙액을 의미할 것이다). 그들이 먹고 마시려 하면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그들에게 두려움과 고통으로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복을 저주하실 것이다(말 2:2).
(2) 그들의 해외 산재는 그들의 멸망이 될 것이다.(16절). "내가 그들을 열국 중에 해치리라." 그들은 이방인들과 친숙해짐으로써 타락하였고 부패하게 되었으며 그들과 섞여서 열국 사람들의 행사를 배웠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자기들의 미덕을 상실하게 된 열국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들은 사회와 상업의 기반이 되고 접합체가 되는 진실의 법을 깨뜨리고 기만과 거짓말에 탐닉하였으므로 가루로 부스러뜨려지고 열국 중에 흩어짐을 당해 마땅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이나 그 조상이 알지 못하던 이상한 신들, 새로운 신들을 세웠다(신 32:7). 따라서 하나님은 그들과 그들의 조상이 알지 못하였고 결코 안다고 주장할 수도 없으며 따라서 은총을 기대할 수 없는 열국 중에 그들을 흩으실 것이었다. 그들이 서로 어디서 찾을지 알 수 없는 곳에까지 산재하게 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발견해 낼 장소를 알고 계셔서(시 21:8) 회개치 않는 죄인을 계속 추적하는 재앙으로써 찾아가게 하실 것이다. "진멸되기까지 그 뒤로 칼을 보내니라." 이것은 이모저모의 살륙하는 심판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는 그가 이기실 터이요 그가 추적하실 때에는 꼭 따라가 붙잡으실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땅이 멸망하는 까닭을 생각해 보자. 이 같은 모든 황폐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실천을 유기함으로써 그 말씀이 성취된 결과요 저희 행위에 대한 응분의 보답이었다.
Ⅱ. 그는 곡하는 여인들을 불러 곡하는 재주를 다하여 백성을 감동시키고 그들의 간장을 녹여서, 임하였거나 임하고 있는 이 슬픈 재난을 애곡하게 하라고 한다. 온 국민이 놀라 재난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는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곡하는 부녀를 불러오라고 말씀하신다(17절). 이 말씀의 의도는 이 백성의 처지가 얼마나 애처럽고 비애에 찬 것이 될지를 보여 주기 위함이다.
1. 여기에는 곡장이의 작업이 나온다. "보내어 지혜로운 부녀를 불러오라." 이들은 만가를 지어낼 줄 아는 재주꾼들로서 적어도 곡하는 가락과 악양으로 슬픈 노래를 부를 줄 알았기 때문에 상주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장례식에 이용되었다. "이들로 우리를 위해 애곡하게 하라" (18절). 죽음과 장례가 너무나 많아서 백성들은 사무엘 상 30절 4절에 나오는 자들처럼 울 기력이 없기까지 통곡하게 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곡하는 것이 직업인 부녀들에게 이 일을 하게 하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오히려 이 백성의 멍청함과 우둔함을 시사하는 것일 게다. 그들은 자기들이 심판 아래 있음을 유념하지 않았고 이토록 많은 살륙과 유혈 사태가 벌어졌는 데도 눈물 한방울 흘릴 마음이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박을 받을지라도 소리 높여 울지 않았다(욥 36:13). 하나님께서는 애국하는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내셔서 그들로 애통해하며 통곡하게 촉구하였으나 선지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로는 그들의 신앙을 이루어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웃으면서 파멸로 달음질쳐 가게 하기보다 곡하는 부녀를 데려다가 그들의 상상력을 자극시키도록 노력하여 저희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게 하며 그 눈꺼풀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라는 말씀이다. 처음이든 마지막이든 죄인은 통곡하는 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2. 여기에는 진정으로 곡하는 자들의 작업도 나온다.
(1) 그것은 곧 애가로서 현재의 장면은 매우 비극적이다(19절). "시온에서 호곡하는 소리가 들린다." 흑자는 이렇게 곡하는 부녀들의 애가라고 해석하나 이것은 오히려 그들의 곡성에 마음이 움직인 자들의 반향이요 메아리라고 할 수 있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밀착되어 있었을 때는 시온에서 기쁨과 찬미의 소리가 들려 오곤 하였는데 죄악이 그 곡조를 바꾸어 버렸다. 이제는 그 소리가 애곡하는 소리로 되어버렸다. 이것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안전을 위해 시온 성으로 피난해온자들의 소리인 것 같다. 거기에 안전히 피신하게 됐음을 기뻐하는 대신 그들은 억지로 거기에 피신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을 애통해하였다. "우리는 아주 망하였구나! 우리는 소유물을 전부 다 박탈당하였구나. 우리가 크게 수치를 당하였구나! 우리는 자신과 우리의 가난이 부끄럽구나!" 그들이 불평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죄를 생각하고 부끄러워하는 게 아니라 빈궁해진 것을 생각하고 낯을 붉히고 있다. "우리가 수욕을 당하는 것은 우리가 땅을 버렸기 때문이며(적군에게 강제로 추방당하였으므로) 우리 자신의 정욕에 이끌리고 꾀임을 받아 여호와를 버렸기 때문은 아니다. 또 그들이 우리 주책을 헐고 쫓아냈기 때문이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추방하신 때문은 아니다." 이와 같이 겸비치 못한 심령은 재난의 원인이 이 되어 있는 자기들의 불의를 슬퍼하지 아니하고 재난을 슬퍼하는 것이다.
(2) 아직도 슬퍼할 일은 더 많이 임할 것이다. 사태는 악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더욱 악화된 사정에 놓이게 될 터였다. 그들의 땅은 선주민 가나안인들을 그랬던 것처럼 그들을 토해 내었는데 이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왜냐하면 그들도 그 선주민의 전철을 밞았던 때문이다(레 18:28). 그들은 그 땅에서 쫓겨나 성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을 불평하고 있다. 그러나 잠시 후면 성안에 있던 자들과 함께 그 성에서도 쫓겨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20절). 하나님께서는 하실 말씀이 더 계셨다. 부녀들에게 들으라고 하시는 것은 마음이 연약한 까닭에 슬픔과 두려운 느낌을 받기 쉬운 때문이다. 남자들은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려 하지 않으며 참을성있게 들으려 하지 않는 때문이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떠는 부녀의 회중에게 설교하기를 즐거워할 것이다. "너희 귀에 그 입의 말씀을 받으라. 비록 공포의 말씀이긴 하나 그것을 환영하라. 부녀들은 자기 말들에게 애곡을 가르칠 지어다." 이 말씀은 환란이 오래 계속될 것이며 슬픔이 다음 세대에까지 끼치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청년은 환락을 좋아하며 기대하는 경향이 있고 기질상 쾌할하며 명랑하다. 그러나 나이든 부인들은 젊은이들에게 진중하기를 가르쳐야 하며 이 세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눈물의 골짜기뿐이니 그 이상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 주어야 하며 시온에서 호곡하는 자들 가운데에서 그들을 양육시켜야 한다(딛 2:4, 5). "각기 이웃에게 애가를 가르치라." 이것은 환란이 멀리 파급되고 이집에서 저집으로 퍼져 갈 것을 암시한다. 사람들은 자기 이웃을 동정할 나위가 없을 것이며 모두가 자신을 위해 애곡해야 할 사유를 가지게 될 것이다.
여호와의 두려움에 감전된 자들은 남들도 그 두려운 일들을 느낄수 있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경고되고 있는 심판은 매우 두렵게 보인다.
[1] 다수의 사람들이 살륙당하게 된다(21절). 사망이 의기양양하게 밀어닥칠 것이며 죽음이 위탁을 받고 올 때는 집 안에서든 집 밖에서든 그 손길을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문 안에서도 죽음의 독수를 피할 수 없음은 아무리 문을 굳게 닫고 아무리 견고한 자물쇠와 빗장으로 채운다 할지라도 밤도둑처럼 사망이 우리 창문으로 올라오는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깨닫기 전에 살짝 두려덮친다. 죽음은 이와 같이 대담하게 오두막살이는 공격할 뿐만 아니라 궁실에도 들어온다. 군주와 권세자들은 궁궐이 제 아무리 장엄하고 견고하게 건축되었으며 강한 자들이 경비하고 있다 하더라도 죽음 앞에는 무용지물이다.
어떤 궁전도 죽음의 접근을 막지 못한다. 밖에 있는 자들이라 하여 더 안전한 것은 아니다. "죽음이 밖에 있는 자녀와 거리에 있는 청년들을 멸절한다." 어린아이들은 적군으로서 별반 해를 입히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불쌍히 여겨 살려 줄 법도 했고 청년들은 이용할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정책상 살려 둘 수도 있었으련만 이 양자가 다 칼에 쓰러질 것이란 말씀이었다. 요즘은 극히 가혹한 무력 행사에 있어서 조차 무장하지 않은 자에게는 칼을 대지 않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길거리에서 놀고 있는 소년 소녀까지 정복자의 희생물이 되었다.
[2] 살륙당한 자들은 매장되지 못한 채 버려져 있을 것이다(22절). 이것은 앞서 말한 것의 확인 행위이며 그보다 한층 악화된 것임을 나타낸다. "너는 이같이 이르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시체가 분토같이 떨어질 것이며 아무리 보살피는 자가 없어 내버려둠을 당하여 흡사 분뇨처럼 역겨운 냄새를 피우리라 하셨느니라." 살아남은 자가 죽은 자를 매장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며 그들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너무나 많은 사람이 살륙될 것이며 전국 도처에 그 시체가 널려 있을 것이어서 그 모두를 매장한다는 것은 끝없는 작업이 될 것이며 또 손도 모자랄 것이고 정복자들 또한 그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을 해야할 자들은 슬픔에 사로잡혀서 매장할 마음이 내키지 않을 것이다. 가장 아름답고 강하던 자라도 그 시체를 잠깐만 놔두면 두엄처럼 되어 버린다. 우리는 이렇게 추악한 신체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또 본문은 엎드러지는 자가 하도 많아서 그 시체는 밭이랑의 두엄더미 같을 것이라고 말씀한다. 추수하는 자가 이삭 줍는 자를 위해 뒤에 이삭을 떨어뜨려 놓아도 그것을 거두는 자가 없는 것같이 그들의 시체는 누구 하나 거들떠 보지 않을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보수에 대한 기념물로 방치되어 있을 것이다. 이는 살아 남은 죄인들이 보고서 느낀 바가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 그들을 죽이지 마소서, 그들을 매장하지 마소서, 내 백성이 잊을까 하나이다" (시 59:11).
인생의 미련함(예레미야 9:23-26)
선지자는 이 백성이 하나님과 그의 심판에 대한 경외심에 사로잡히도록 하며 죄와 진노하심을 깨닫도록 하려고 노력해 왔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여전히 이런저런 구실에 의지하였다. 그들은 뉘우치고 확신을 얻는 일에서 피신하기 위해 이 구실 아래로 모여들었고 이 구실로써 자기들의 완고함과 태만함을 변명하려 들었다. 그러므로 그는 여기에서 이들 거짓된 피난처에서 그들을 몰아내려고 하며 그 도피처의 불충분성을 납득시켜 주려 한다.
Ⅰ. 그들은 심판이 불가피하리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자기들의 책략과 힘에 의한 자위를 주장하였다. 재물과 보화를 수단으로 하여 자기들의 성읍이 난공불락의 철옹성으로 믿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선지자는 그들에게 지주가 될 언약의 하나님을 모시고 있지 않는 이상 이런 모든 지주를 신뢰하고 자랑하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설명하고 있다(23,24절). 여기서 그가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환난 날에 의지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지혜의 도움으로 원수의 모략을 능가하고 대항책을 강구하거나 궁지에 다달았을 때 이모 저모의 돌파구를 안출해낼 수 있을 듯이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사람이 지혜가 극히 필요할 때 그의 지혜는 성공을 가져다 주지 못할 것이며 그는 자기 꾀에 넘어가게 될 수도 있다. 아히도벨은 놀림감이 되었고 모사들도 때로는 꾐에 빠져 그르치게 되는 수가 있다. 그러나 사람이 계략에는 실패하더라도 힘과 용맹으로 확실히 승리할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본문은 아니라고 대답한다. "용서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강하다고 해서 싸움에 늘 이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애숭이 다윗은 누가 보아도 거인 골리앗의 상대는 아니었다. 하나님이 없이는 인간의 모든 힘도 초개에 지나지 않으며 없는 것보다 못하다. 그러나 부자의 재물나왔그의 견고한 성이 될 수 있지 않느냐?(돈이면 무슨 일이든 해결할 수 있으니까.) 그렇지 않다. "부부자는 그 부함을 자아치 말라." 재물이 부자를 보호해 준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망상이다. 부자는 바로 그 재물 때문에 위험이 노출되며 더 선명한 과녁이 될 수 있다.백성들은 자기들 중에 있는 자혜로운 자와 용사와 부자를 자랑해서는 안 되었다. 지혜로운 자가 있어서 전략을 베풀며 용사는 전장에 나가 싸우고 부자는 전비를 부담하기 때문에 갈대아 군을 물리칠 수 있기라도 하듯 그것들을 믿어서는 아니 되었다. 또 각 개인은 자기 지혜나 힘이나 돈으로써 이 공동의 재난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안전을 가져다주기에는 헛된 것으로 판명될 것이기 때문이다.
2. 환난 날에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1) 어려운 일을 당하여 우리에게 유일한 위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다했다는 점일 것이다. 하나님을 알기를 싫어한 자들(6절)은 자기의 지혜와 재물을 사랑하지만 그것은 공연한 자랑이 될 것이다. 그러나 명철하여 하나님을 알고 그가 여호와이시라는 것을 올바로 깨달으며 그의 본질과 속성, 그리고 인간과의 관계를 바로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 영향을 받아들이고 보지하는 자들은 그것이 저 악한 재앙의 날에 자기들의 기쁨이 되리라는 것을 자랑할 수 있다.
(2) 환난 시에 우리의 유일한 신뢰가 되는 것은 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다소라도 의무를 이행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는 전능의 신으로 나타나심을 보게 될 것이란 점이다. 우리가 어디 있든지간에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사하시는 신을 잘 알고 있으며 그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란 것을 우리는 자랑할 수 있다. 우리와 친분이 두터운 신은 자기의 모든 피조물에게 공의로우셔서 어느 누구에게도 악을 행치 않으시는 분일 뿐만 아니라 자기의 모든 자녀에게 인자하셔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부양하시는 분이다.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하나님께서는 인자를 베풀고 공평하게 시행하는 것을 즐거워하시고 귀여운 자녀로서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의 영화로우심을 알되 그와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되며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기까지 아는 자들은 그것이 곧 자기들의 영광이요 거룩함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신실하게 하나님과 일치하려고 할 때 그들은 최대의 곤경에서도 즐거이 그를 신뢰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선지자는 백성의 대부분이 이런 것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그들에게는 자기의 지혜와 용맹과 재물이 기쁨과 소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슬픔과 절망으로 끝날 기쁨이요 소망이었다. 개 중에는 극소수일 망정 하나님께 대한 자식을 소유하고 그것을 기뻐하며 자랑하던 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자들에게는 그것이 수천 개의 금은 보다 더 쓸모가 있을 터였다.
Ⅱ. 그들은 자기들의 죄가 하나님을 얼마나 격노하시게 만들었가를 들었을 때 헛되이도 할례의 언약을 들어 자기 변호를 해하였다.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이었다. 그들은 여호와의 성전을 자기들의 도성안에 소유하고 있었듯이 하나님의 자녀된 표적을 자기들의 육체에 가지고 있었다. "이런 저런 나라들이 갈대아 군대에게 유린되어 황폐케 된 것은 사실이나 그들은 우리와 달리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섭리의 보호 아래 있지 못하였던 까닭에 그 같은 일을 당한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이에 답하여 선지자는 형벌하여금 날이 다가왔으니 하나님께서 할례자와 무할례자를 구별하지 않으시고 모든 악한 백성을 다 벌하시리라고 말한다(25,26절). 그들은 범죄함으로써 선민이란 독특한 영광을 모독하였고 할례받지 못한 민족들과 공통된 생활을 함으로써 그 독특한 혜택을 몰수당하였다. 그러나 할례받은 민족이란 이유로 보다 나은 형편을 기대해서는 안 되었다.
"할례받은 자와 할례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벌하리라." 무할례자의 무지가 자기 악에 대한 변명이 되지 못하듯이 할례자의 특권도 자기 악에 대한 변명이 되지 못할 것이니 악한 자는 함께 징벌을 당할 것이다.
온 세상의 재판관께서는 공평무사하신 분이셔서 그의 법정에서는 어느 누구도 외면적인 이점을 가지고 남보다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없다. 세례받고서도 회개치 않는 죄인은 세례로 받지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죄인과 똑 같이 정죄함을 당할 것이다. 아니 그 보다 더 엄중한 정죄를 당할 것이다.
여기에서 애굽과 애돔 사이를 부지런히 왔가 갔다 하던 유다가 그들과 같은 수준에 놓이며 그들과 같은 운명아래 있다는 것을 보면 누구나 느낀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26절). 이들은 유대인의 특권에 대한 참여가 금지된 민족들이다(신 23:3). 그러나 본문은 유대인들이 그들과 형벌을 같이 할 것이라고 언명하고 있다. 광야에 거하는 자들, 가장 먼 구석(우리 성서에는 없음)에 거하는자들은 49장 28-32절의 비교에서 나타나는 대로 게달 사람과 하솔 왕국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된다. 흑자는 그들이 세상의 한 모퉁이에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웠다고 생각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그들이 머리털을 모질게 깎았으므로 끝모퉁이에 거하는 자들이란 명칭으로 불리웠다고 생각한다. 어찌됐든 간에 그들은 육신에 할례받지 못한 민족이었는데 유대인은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과 마찬가지의 범죄로 파멸에 접근해 있다는 말이다. 이스라엘의 모든 집이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표시는 지니고 있었으나 그 표시가 의미하는 것을 지니지는 못하였고 상징은 소유했지만 그 상징의 실체는 구비하지 못하였다(4:4). 마음으로는 하나님께 이방인이 된 자들이었다. 하나님의 자녀된 그들이 많으면 안 되었으로는 낯선 자에 지나지 않았고 그 생각으로는 악한 행실로써 하나님께 원수된 자들이었다. 할례받지 못한 이방인들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마음은 우상들을 향하고 있었다.
언약의 보증은 비록 우리를 존귀하게 하고 우리를 은혜 아래 두지만 우리의 심사와 삶의 방침이 그 언약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구원해 주지 못할 것이다. 마음으로 받은 것만이 유일한 할례와 세례이다(롬 2:2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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