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수도 없는 처지(예레미야 8:1-3)
이 구절은 갈대아 군대가 그 땅에 펼칠 파괴를 부연하는 말씀으로서 앞 장 말미에 접속되었으면 적절할 뻔하였다. 이 멸망은 죽음의 속성조차 생소하게 변질시키리 만치 악할 것이다.
Ⅰ. 죽는다는 것은 언제나 사자의 안식이 되어 왔으나 이제는 그렇지 못할 것이다. 욥이 무덤에 내려가기를 요구하는 것은 자기가 거기서 세상 임금들과 의사들과 함께 쉴 것이라는 소망에서였다. 그러나 이제는 죽은 자의 유해 즉 왕들이 뼈와 방백들의 뼈가 어지러이 널리고 그들의 해골이 음부 문에 흩어지게 될 것이다(시 141:7). 7장 끝부분에서는 살륙된 자가 매장되지 못할 것이라는 위협적 경고가 나왔었다. 그것은 태만 때문에 있을 수도 있어도 별로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발견하는 것은 애써 매장한 자들의 분묘가 승전한 적군에게 도굴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묘실에서 부장된 보물이라도 찾아 내려는 탐심에서나 아니면 이 나라에 대한 원한과 적개심에서 유다 왕들의 뼈와 방백들의 뼈를 끌어내었을 것이다. 저희 무덤에 위용으로도 그들의 시체는 안전하게 보호되지 못하였다. 아니, 그 때문에 오히려 그들의 시체는 도굴당할 위험성이 더 컸었다. 그러나 제왕의 유해를 이렇게 짓밟는다는 것은 야비하고 야만스런 짓이었다. 우리는 선한 요시야 왕의 유해만은 분탕질을 당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요시야는 우상 숭배하는 제사장들의 해골을 불사르면서도 하나님의 사람의 뼈는 경건히 보호하였기 때문이다(왕하 23:18). 제사장들의 뼈와 선지자들의 뼈도 마찬가지 신세를 면치 못하였다. 흑자는 이것이 거짓 선지자와 우상의 제사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런 치욕스런 오점을 입히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여호와의 선지자와 제사장들이라고 하더라도 시편 기자는 이런 일이 원수들의 강포로 말미암아 연츨되고 있음을 하소연한다(시 79:1, 2). 뿐만 아니라, 제왕과 제사장들의 묘를 굴총하지 못했던 갈대인들은 원한에 차서 그런 수지맞는 측에 끼이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으니 차라리 장난질이나 치겠다는 심사로 예루살렘 평민의 뼈를 그 묘실에서 끄집어 내었다. 야만 민족들은 때때로 그들의 피정복민에게 이런 비이성적이고도 비인도적인 만행을 저지르며 승리를 과시하였다. 하나님께서 이런 만행을 본문에서 용납하시는 것은 자기의 진노의 대상이 된 세대에 대한 자신의 노여움을 표시하고 잔명을 보존한 자들에게는 두려움이 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묘지에서 파낸 해골은 멸시하는 뜻에서 지면에 널리 뿌려서 수치가 한층 더 확대되고 더 오래 지속되게 하였다. 그 대적들이 저희 뼈를 뿌려서 곶감처럼 말리는 것은 의기양양하게 그것을 들고 다니거나 땔감으로 사용하거나 아니면 미신적 목적에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유다 백성은 해와 달과 뭇별들을 우상으로 삼았었고 그 사실을 한낮에도 공언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을 터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뼈는 해와 달과 별, 곧 하늘의 뭇 별아래 널려 있게 될 것이었다(2절). 선지자는 이런 비극을 태연히 구경하기만 할 해와 달과 별의 언급을 이용하여 그들이 이 자연물들을 얼마나 우상화하였으며 오직 하나님께만 표해야 할 경의를 얼마나 이들에게 쏟았는지 환기시켜 주고 있다. 그들이 피조물을 경배함으로써 얻은 이익은 무엇인지 관찰시키려고 하였다. 그들이 섬겼던 피조물들은 그들이 고통 중에 있을 때 내려다보기만 하였을 뿐 유의하지도 않았고 그들을 구출하지도 못하였으며 오히려 자기들을 우상으로 모시는 데 극성스러웠던 자들이 극성스런 학대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였다. 우상에게 대한 그들의 경배가 어떻게 열거되고 있는지 살펴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배우자.
1. 그들은 그 우상들을 사랑하였다. 애착이 가는 존재와 관대한 시혜자로서 그 우상들을 존중하고 기뻐하였으므로 그들은 다음에 나오는 일을 다 행하였다.2. 그들은 그 우상들을 섬겼다. 그것들은 영화롭게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행하였고 그렇게 하는 것으로도 흡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자기들의 미신적인 모든 율법에 순응하였다.
3. 그들은 우상에게 순복하였다. 그들은 우상에 대해서 들었던 평판과 설명을 따라 그 우상을 모방하고 닮고자 노력하였다. 이 때문에 이방 민족에게는 가증스런 악이 크게 유행하였고 만연 되었었다.
4. 그들은 우상을 구하였고 신탁으로 삼아서 그것들에게 문의하였으며 재판관으로 삼아 호소하였으며 자기들의 시혜자로 여겨 은총을 구걸하고 기도하였던 것이다.
5. 그들은 우상을 경배하였고 자기들에게 지고무쌍한 주권을 행사하는 자로 여겨 신적 영광을 돌렸다.
그들의 시체는 그들이 구해하던 이들의 눈 앞에 내던져져서 부패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지면에게 분토같이 될 것이다. 그들에게 쬐는 햇볕 때문에 그 시체들은 한결 악취가 많이 나고 역겹게 될 뿐이다. 참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 외에 딴 어떤 것을 신으로 삼든지 간에 죽음과 음부 저편에서는 그것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할 것이다. 신체를 위해서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터인데 우리 영혼을 위해서는 더더구나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다.
Ⅱ.font> 과거에는 그런 일이 없었지만 이제 죽음은 산자의선택물이 될 것이다. 산 자가 죽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은 죽으면 즐거운 일이 하나도 없을 것같이 여겨지는 때문이다. 그러나 역으로, 죽음이 이때보다 두렵고 무서운 형태로 나타난 적은 없었다. 안락한 죽음이나 매장을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북구하고 이 세상 만사가 너무나 귀찮고 모든 전망이 너무나 암담하고 낭패여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원하게 될 것이다(3절). 이것은 저 세상의 복된 삶을 믿고 소망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생의 편안은완전히 포기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민족이 이제는 족속(원뜻은 가족임)으로 축소되고 그나마도 거기 몸담고 있는 남은 자는 너무나 소수이다. 거기다가 그들은 악한 족속이다. 여전히 악하고 그 마음은 겸비하지 않으며 그 정욕은 억제되지 않고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쫓겨 나서 각처에 생존해 있지만 그것이 전부이다. 일부는 원수의 땅에 포로로 끌려가 있고 또 딴 자들은 인근 나라에서 구걸하여 연명하며 나머지는 타국이고 고국이고 할 것 없이 망명객이 되어 유리방랑을 한다. 죽은 자들도 비참하게 죽었지만 잔명을 보존한 자들도 이렇게 추방당한 채 살아가기란 한층 더 비참하였다. 그러기에 그 사람은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원하며 칼에 쓰러진 자들과 같이 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소원한적이 수백 번이 넘었다. 우리는 이것을 거울삼아 생에 대한 과도한 애착을 떨쳐 버리자. 산다는 게 부담과 공포가 되는 경우가 올 수도 있으며 차라리 목매어 죽고 싶은 유혹이 강하게 일어날 수도 있는 우리라는 점을 명심해야 하겠다.
파렴치한 민족의 운명(예레미야 8:4-12)
예레미아 선지는 여기서 이 백성에게 뉘우치지 않는 어리석음을 제시해 주라고 훈계를 받는데 그들에게 이런 파멸을 불러들인 것은 바로 회개하지 않는 완고함 때문이었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우둔하고 지각없는 백성이라고 분문에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무한하신지혜자께서 자기들을 제정신, 올바른 마음으로 돌아오게 하여 임박하고 있는 파멸을 예방시켜 주시려고 온갖 방법을 취하셨음에도 지혜있는 자가 되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Ⅰ.font> 그들은 이성의 명령에 유의하려고 하지 않았다. 딴 일에는 양식있는 행동을 하면서 영혼에 문제에 있어서는 동일한 슬기로 행동하려 하지 않았다. 죄인도 단지 자기가 인간임을 나타내려 하면 성자가 될 것이며, 올바른 이성의 지배를 받는다면 곧 신앙에 지배를 받게 될 것이다. 여기서 그점을 관찰해 보자. "오라! 우리가 함께하여 변론하자" 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4,5절). "사람이 엎드러지면 일어나지 않겠느냐?" 사람이 어쩌다 땅바닥에 넘어지고 진흖에 빠지면 재빨리 다시 일어서지 않겠느냐? 이 백성들은 넘어지고 계속 누워있을 만큼 바보가 아니냐? 사람이 바른 길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물론, 극히 조심성깊은 나그네라도 길을 잘못 들어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달으면 즉시 돌아 오지 않겠느냐? 틀림없이 그는 재빨리 돌아올 것이며 자기의 요류를 가르쳐 준 자에게 감사할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딴 일에서는 제대로 행동한다. "그런데 이 예루살렘 백성은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감은 어찜이냐?" 왜 그들은 죄에 빠졌을 때 회개로써 재빨리 다시 일어서지 않는가? 그들은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것을 깨닫고도 왜 자기 실수를 바로 잡으며 개선하지 않는가? 제 정신을 가진 자라면 누구도 자기의 목적지로 통하지 않는 길인 줄 알면서 계속 그 길로 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백성은 어찌하여 끊임없는 뒷걸음질로 물러가는가?
죄의 본질을 살펴보자. 죄는 뒷걸음질로 물러가는 것이다. 죄는 옳은 길에서 물러나 곁길일 뿐만 아니라 정반대의 길로도 들어가며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을 등지고 완전한 멸망에 이르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게다가 이 물러감은 전능자가 은혜로써 개입하여 방지하시지 않으면 끊임없이 물러감이 되고 말 것이다(항상 떠나 물러감이 끊임없이 떠나 물러간다는 말의 대역임-역주). 죄인은 끝없이 방황하면서 동시에 거꾸로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는 자이다. 사람들로 범죄케 하는 시험자의 바로 그 간교함이 그들을 죄 속에서 꽉 잡고 있으며 그들은 스스로 도와가면서까지 죄의 포로가 되고 있다. 즉 "그들은 거짓을 고집한다." 죄는 큰 사기꾼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것을 굳게 잡고 있다. 그들은 죄를 애지중지하여 놓지 않겠다고 마음 먹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과 죄 사이를 갈라 놓으시기 위해 취하시는 온갖 방법들을 무산시켜 버린다. 그들이 자기 죄에 대하여 늘어놓는 변명은 전부 거짓이며 자기들이 벌받지 않으리라는 그들의 모든 희망도 거짓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러한 것들을 꽉쥐고서 그 허구성을 깨닫지 않으려 한다. 그러기에 돌아 오기를 거절하는 것이다. 일부러 죄많은 길로 계속 행하는 자들은 이런저런 거짓을 고집하며 어떤 거짓을 그들의 우편 속에 있어서 그들은 이 오른 손으로 자기 죄를 고집한다.
Ⅱ.font> 그들은 양심의 명령에도 유의하지 않으려 하였다(6절). 양심은 우리 자신과 우리의 행동을 돌이켜 살피는 우리의 이성이다.
1. 그들에게서 어떤 기대를 할 수 있었는가? 그들은 곰곰히 생각해 보려고 했던가? "나는 귀를 기울려 들었노라." 선지자는 자기의 설교가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 반응을 보려고 귀를 기울여 들어보았다. 하나님께서도 죄인의 죽음을 원치 않는 분으로서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계셨다. 회개의 조믹이 보이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들으시고 기뻐하셨을 것이며 그런 취지로 하는 말이 있다면 틀림없이 들으셨을 터였고 곧 위로로 그 말에 응답하셨을 것이었다. 다윗이 "내가 자복하리라" 고 말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행하셨던 것이다(시 32:5).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릇되게 행하면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을 행하는지 보시기 위하여 그들을 바라보신다(욥 33:27). 그는 귀를 기울여 들으신다.2. 이런 기대가 어떻게 무산되었는가? 그들은 정직을 말하지 아니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정직하게 말하리라고 기대하셨으나 그들은 정직을 행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정직을 말하지조차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선한 말도 그들에게서 들으실 수 없었고 그들에게 은총을 베푸시거나 소망을 가지시는 데 근거가 될 것이라곤 전혀 엿보실 수가 없었다. 정직을 말하는 자는 아무도 없고 그 악을 뉘우치는 자도 전혀 없었다. 죄를 범한 자들은 뉘우치는 말을 할 때만이 정직을 말하고 올바로 말하는 셈이다. 회개할 일은 엄청나게 많이 행한 자들이 회개하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 민족적 악을 뉘우치는 자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이런 자가 있었더라면 그 민족적 죄의 그릇을 비우는 데 도움이 되었으리라. 뿐만 아니라 개별적 악을 참회하는 자도 한 사람 없었다. 각자가 죄지은 줄 알면서도 뉘우치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1) 그들은 참회의 제일보조차 내딛지 않았다. "나의 행한 것이 무엇인고?" 하고 말하는 일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움직임도 없었고 그런 최소한의 조짐이나 징조도 보이지 않았다.
참된 회개는 진지하고도 공평무사한 자기 질문 즉 "우리가 행한 것이 무엇이냐?" 하는 물음으로 비롯하며 이것은 우리가 그릇행하였다는 각성에서 일어난다.
(2) 그들은 자기 죄를 뉘우치기는 커녕 오히려 죄를 고수하겠다는 각오로 계속 범죄하였다. "전장을 향하여 달리는 말같이 각각 그 길로 행하도다." 군마가 전장으로 열심히 치닫고 고삐에 제어됨을 멸시하듯 모든 자들이 자기가 택하여 익숙해진 악한 길 곧 죄의 길로 향하였다. 군마가 전장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은 욥기에 잘 묘사되어 있다(욥 39:21 이하). 두려움을 비웃고 허깨비로 조소하며 죽음과 살륙의 기계를 향해 맹렬히 돌진한다. 그 어떤 것도 이런 죄인을 제지하지 못할 것이다.
Ⅲ.font> 그들은 섭리의 명령에 유의하려고 하지 않았다. 섭리 속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깨달으려고 하지 않았다(7절).
1.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섭리의 모든 암시 속에서 그의 의사를 즉시 깨달아야 마땅할 텐데도 그들이 "여호와의 규례" (또는 심판, 공의)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이 얼빠져 있다는 예증이다. 그들은 자비의 의미나 고난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순응할 줄도 몰랐으며 하나님의 의도에 응답할 줄도 몰랐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부여해 주신 은혜의 계절을 활용할 줄도 모르며 그의 목소리가 성에서 부르짖을 때에 받는 책망을 이용할 줄도 모른다. 그들은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지 못한다(마 16:3).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어떻게 다루고 계신 줄을 알지도 못한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규정해 주신 의무의 길을 알지 못한다. 비록 그것이 그들의 마음판과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고 하나 그것을 모르고 있다.2. 인간보다 못한 하등 동물한테도 상당한 슬기가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얼빠짐을 더욱 악화시킨다.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와서 머무는 때를 지키며,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 따위의 딴 철새들도 다 그렇게 행한다. 기온이 바뀌면 이들은 본능으로 서식처를 옮긴다. 겨울과 함께 와서 동절이 끝나면 가버리는 일부의 철새처럼 이들은 봄과 더불어 와서 겨울이 다가오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간다. 아마 보다 기후가 온화한 지방으로 가는 것이리라.
Ⅳ.font> 그들은 기록된 말씀의 명령을 유의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가 지혜롭다" 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8절). 짐승들 만치도 자신을 깨닫고 있지 못하면서 무슨 낯으로 지혜의 지자를 입에 올릴 수 있단 말인가? 여호와의 율법이 자기들에게 있기 때문에 즉 율법서와 그 해설서가 그들에게 있다고 하여 그들은 실로 자기들이 지혜로운 줄로 생각한다. 또 그들의 인근 나라에서도 같은 이유에서 그들이 지혜있는 백성이라고 결론을 내린다(신 4:6).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 자부심은 허무맹랑한 것이 되었다. "참으로 그는 그것을 거짓되게(원뜻:헛되게)하였다." 그들만큼 성경을 무용하게 소유한 백성은 아무데도 없었다. 선용하지 않을 바에야 율법이 없었더라면 그들에게는 더 다행할 터였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율법이 인간을 지혜롭게 만들어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하였으되 그들에게 대해서는 그것이 무용지물이 되게 하셨다. 그들은 율법으로도 더 지혜로와지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 율법을 기록하였고 또 이제는 그 율법에 대한 해설을 기록하는 서기관의 붓도 헛되다. 자기 하나님의 은총과 자기 서기관의 수고도 그들에게는 아무 효험이 없다. 이 말씀에 대한 대답이 나오고 있다(9절).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수욕을 받으리라." 그들은 자기들의 지혜를 보다 잘 이용하고 그 지혜에 맞춰서 처세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할 만하다. "그들은 경황 중에 잡힌다." 그들의 모든 지혜도 자기들이 파멸에 이르는 길로 가는 것을 방지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처럼 많은 지혜가 있다고 자처하지 않던 이웃 백성들이 걸려든 바로 그 올무에 잡히며 그들과 똑같이 경황없는 일에 사로잡힌다. 딴 사람들보다 많은 지식을 소유하많았을 뿐 안서도 자기 영혼을 위해 남보다 나은 행동을 하지 않는 자들은 수치를 당할 만한 이유를 가진다. 그들은 지혜 운운 하지만 보라!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지배되려고 하지 않았고 그 지시를 따르려 하지 않았으며 알고 있는 것을 행하려 하지 않았고 그 지시를 따르려 하지 않았으며 알고 있는 것을 행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 한 사람도 소용에 닿는 자가 없었다. 현재는 그것이 아무리 자기들의 자랑거리가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저 큰 날에 칭찬받게 될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 고 말하면서 지혜자로 자처한 것은 제사장과 거짓 선지자들이었다. 예레미야 선지가 여기서 지적하는 것은 분명히 그런 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1. 그는 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한다. 그들의 가족과 재산은 풍지박산이 될 것이란 말씀이 나온다(10절). 그들이 포로가 될 때 그들의 아내는 타인에게 넘어가게 될 것이며 승진한 적군은 그들에게서 전답을 빼앗아다가 그 차지할 자들에게 줄 것이다. 그 탈취는 일시적인 것데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전답을 자기들의 소유로 하여 재산권을 획득하고 자기들의 후손에게 상속시킬 것이다. 지혜와 성별을 내세우는 그들의 모든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다(12절).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벌받을 때에 즉 그 땅의 악이 심문을 당하게 될 때는 그들이 딴 어느 누구보다도 그 땅의 악에 기여한 바가 더 많았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자들은 거꾸러짐과 쫓겨남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2. 그는 이 심판에 대한 이유를 제시한다(10-12절). 그들의 악함에 대한 이 설명은 앞에서도 나왔는데(6:3-15) 거기서는 전체적인 의미에서 표현된 것이었다.
(1) 그들은 이 세상 재물을 탐하였다. 누구에게든지 탐욕은 아주 악한 것이지만 선지자와 제사장의 경우는 극히 악한 것이다. 그들은 저 세상을 가장 잘 알고 있어야 마땅할 자들이다. 그러므로 이세상 것에는 무감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나하였다.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고,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친다(미 3:11).
(2) 그들은 제사장과 선지자로서 말할 때 진실한 발언을 본분으로 삼지 않았다. 전부가 다 거짓을 행하며 표리가 부동하여 이 쪽을 보면서 속셈은 딴 데 가 있었다. 그들 중에서는 성실이라곤 찾아 볼 수가 없었다.
(3) 그들은 죄 중에 빠져 있는 백성에게 비위나 맞추고 또 그렇게 아첨함으로써 그들을 멸망에 이르게 하였다. 그들은 국가의 병을 고치는 이사로 자처하고 있었으나 만연하고 있는 병폐에 대해 적절한 치료술을 시행할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대한 논잰을 진행시키시며 따라서 그들에게 평강이 있을 수 없을 때에 "평강이다, 평강이다. 만사가 잘 되어가니 아무런 위험이 없다" 는 말로써 백성의 불안과 불평을 달래고 고식적 치료로 환자를 죽게 만들었다.
(4) 그들이 야비하게도, 얼마나 적당히 얼버무렸던가 하는 사실이 분명히 노출되어도 그들은 털끝만큼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것을 자랑으로 여겼다(12절). 그들은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다. 이렇게까지 염치심과 도의심이란 것을 죄다 망각해 버렸다. 자기들이 최대의 날조자라는 것을 깨달으면 그들은 허겁지겁 자기들의 잘못된 행위를 합리화시키기에 바빴고 또 자기들에게 기만당한 자들을 조소하였다. 이런 자들에게는 멸망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예레미야의 슬픔(예레미야 8:13-22)
Ⅰ.font> 여기에는 죄많은 백성의 멸망을 예고하시는 하나님이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대해서 오래도록 참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점점 더 도발적으로 되어갔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의 진멸의 결정된 것이다. "내가 확실히 그들을 진멸하리니 소멸하는 내가 그들을 소멸하리라" (13절). 확실히 그리고 완전히 그들을 소모시킬 것이며 완전히 진멸될 때까지 하나의 심판이 끝나면 또 다른 심판이 그들에게 따라다닐 것이다. 그것은 작정된 훼멸이다(사 10:23).
1. 그들은 모든 위안물을 깡그리 박탈당할 것이다(13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다." 흑자는 이 말씀이 그들의 죄를 시사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포도원에서 포도를 마실 것이이라고 바라고 오셨으며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셨지만 하나도 얻지 못하셨다(사 5:2; 눅 13:6). 아니, 이 나무에는 잎사귀조차 없었다(마 21:19 참조). 그러나 이 말씀을 오히려 그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니 곧 원수가 땅의 소산을 전부 약탈할 것이며 포도와 무화과를 다 따버리고 그들에게는 잎사귀만 떨어뜨려 놓을 것이란 말씀이다. 또는 비유로 해석하면 그들은 위안물이란 것은 전부 늑탈을 당하여 그들에게는 마음을 즐겁게 할 것이라곤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란 말씀이 된다. 이것은 마지막 부분에서 설명되고 있다.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에는 조건이 있으며 불이행시에는 취소도 가능한 것이다. 자비도 남용하면 몰수당하며 또 하나님이 몰수물을 취해 가시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2. 그들은 온갖 형태의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될 것이며 재난에 둘러싸이게 될 것이다(17절). 이 뱀은 곧 갈대아 군대로서 불 뱀이며 날아다니는 뱀이요 독이 있는 뱀이다. 이 뱀들은 독을 머금은 이빨로그들을 물 것이며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것이다. 어떤 뱀들은 음악으로 부릴 수가 있으나, 이들은 술법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뱀이다. 이 뱀들은 본성이 달라서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들은 귀를 막고 술법부리는 자의 목소리도 듣지 않는 귀머거리 독사 같은 자들이다. 원수들은 너무나 살륙에 열중하고 있으므로 그들에게 상냥히 접근한다거나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무엇을 제공한다거나 그들을 좋게 하여 기분을 호전시킨다는 것은 도무지 소용없는 일일 것이다. 하나님과 화평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도 평강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Ⅱ.font> 이런 재난의 중압 밑에서 자포자기애 빠지는 사람이 등장하고 있다. 환난이 멀리 있을 때는 경외함이 없고 두려움을 무시하던 자들이 급작스레 어려움이 엄습하자 이제는 소망이 없어지고 그 환난에 맞부딪쳐 대항할 마음도 참고 견딜 마음도 나지 않는 자들이 되었다(14절). 그들은 무방비 상태의 촌락에서는 안전을 생각할 수도 없었다. "우리가 어찌 여기에 가만히 앉았으랴? 모이자. 그래서 한 무리가 되어 견고한 성읍들로나 들어 가자." 최후에는 확실히 멸절당하는 것을 각오할 수밖에 없었으나 성 밖 촌락보다는 성 안에 있는 것이 좀 나중에 파멸당하게 되리라는 생각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들어 가서 거기서 멸망하자(또는, 잠잠하자). 거기서 아무것도 하려 하지 말며 불평조차 하지 말자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고 말한다. 그들이 본문에서 자진하여 내리는 선고는 유순한 침묵이 아니라 음울한 침묵이다. 흔히 형통할 때 극히 쾌활한 자가 고난을 당하게 되면 극히 낙담하고 우울해하는 법이다. 그들을 낙심시키는 것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1.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노여워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잠잠케 하시며(우리 성서:멸하시며) 경악으로 우리를 얼어붙게 하시고 우리에게 독한 물을 무시우심이니라." 독한 물이란 것은 쓸개즙을 말하는데 이것은 몹시 쓰며 마비시키거나 취하게 한다. "주께서 우리에게 비척거리게 하는(또는 놀라게 하는)포도주를 마시우셨다" (시 60:3). "우리는 일어나 있다가 엎드러지기 보다 차라리 가만히 앉아 있는 게 더 낫다. 쓸데없이 말하느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더 낫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우리의 원수가 되셔서 우리와 싸우시는데 우리의 숙명과 다툰다는 것은 무슨 소용이 있느냐?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 이런 지경이 된 것이다." 이 말은 다음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1) 분개하여 하는 말. 그들은 하나님과 언쟁이라도 벌이려는 투로 말하는 것 같다. 자기들에게 변명의 말 한 마디 할 수 없도록 하시고 침묵시키시며(멸하시며) 그리고 나서는 하나님께 범죄한 까닭에 이렇게 하신다는 말씀만 자기들에게 들려 주신다는 것은 자기들을 너무 가혹하게 다루신다는 것이다. 인간들은 이와 같이 미련함으로 인하여 자기 길을 구부러지게 해놓고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한다.
(2) 깨달음 끝에 하는 말, 마침내 그들은 자기들이 신음 중에 있는 재난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펴신 손을 발견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기들을 치시려고 쳐드신 손을 보고 그들은 하나님을 격동시켜서 자기들과 싸우게 하였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극히 완고한 자라도 조만간에 모든 환난 가운데에서 하나님 자신의 섭리와 공의를 인식하게 만드시고 그것이 바로 자기의 손길이며 하나님 자신은 의로우신 존재이심을 보고 고백하게 만드실 것이다.
2. 자기들로서는 그들의 원수도 너무 감당하기 벅찬 상대라는 것을 깨닫는다(16절). 그렇게 강력한 군대한테 저항한다는 것은 달걀으로 바위치기나 다름없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다. 그들과 백성은 아주 간담이 떨어져버렸다. 온 민족의 용감성을 사라져버리고 그들의 수효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터였다. 그 말의 부르짖음이 단에서부터 들렸다. 그 기병대가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어 소향무적이란 소문은 순식간에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서 모든 사람들이 그 준마들의 우는 소리에 사시나무 떨듯 떨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르렀으나 그들을 저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땅도 삼키고 성읍에 있는 모든 것을 삼켰다.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그들 앞에서는 황무지로 되었으며 재물뿐만 아니라 그 주민 즉 그 중의 거민도 깡그리 남지 않게 되었다.하나님이 우리를 대항하시는 것으로 나타나실 때에는 우리를 대항하는 모든 것이 매우 무섭게 보이나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그 어떤 것도 다 보잘 것 없이 보인다(롬 8:31).
3. 환난에서 구출되리라고 바라던 그들의 기대가 좌절됨으로써 그들은 실망을 느꼈다. 그들은 환난이 처음 밀어 닥쳤을 때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었다. 이런 이중적인 실망으로 인해 그들의 재난은 한층 가중되었다.(1) 환난은 그들이 전혀 예기치 않을 때 찾아 왔다(15절). "우리가 평강을 바라고 우리의 평화가 계속되기를 구하였지만 좋은 것이 없으며 밖에서 길한 소식이 오지 않았다. 우리가 고치심을 입을 때를 바라고 우리 나라의 번영을 희구하였지만 보라! 환난 곧 전쟁의 놀라움뿐이구나!" 그 바로 다음에는 "적군의 말의 부르짖음이 단에서부터 들린다" 는 말씀이 연하므로, 이 놀라움은 전쟁의 경보임에 틀림없다(16절). 그들의 거짓선지자들은 "평강이다, 평강이다" 고 그들에게 소리쳤었기 때문에 전쟁 장면이 갑자기 전개되자 그 두려움은 더욱 커졌을 것이다. 이런 한탄은 14장 19절에 다시 나온다.
(2) 구원은 그들이 오래도록 고대하였으나 이르지 않았다(20절).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다는 것은 많은 시각이 경과한 것을 가리킨다. 추수기와 여름은 일년 중 한 절후이지만 이 때가 지나면 그해도 저물게 된다. 본문의 의미는 이렇다. "한 해가 저물고 또 딴 해가 지나면 한 전쟁이 지나가나 또 다른 전쟁이 계속되어도, 우리의 처지는 여전히 악화된 상태에 있구나! 구원은 이르지 아니하며 우리를 구출하기 위한 그 어떤 움직임도 없구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하는구나! 아니, 여름과 추수기는 지나가 버렸으며 춥고 음울한 겨울이 곧 뒤따라 온다." 많은 기회가 있었으나 그들은 그것을 상실해버렸고 행동하기에 알맞은 시기는 소홀히하여 지나가 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와 백성들에게 대한 구원은 흔히 매우 완만하게 진행되며 하나님께서는 지혜롭고 거룩한 결과를 얻으시기 위하여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구원을 오래도록 학수고대하게 만드신다. 아니, 그들은 스스로 제 햇빛을 막고 서서 자신의 구원을 방해하며 갖추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4. 그들은 자기들의 의뢰하던 것들 즉 자기들에게 평강을 확보해 줄 것이라고 믿던 것들에게 기만을 당하였다(19절).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짖는 것은 그들을 침노한 외국 군대 때문이었다. 그들의 소유를 빼앗기 위해 먼 나라로부터 온 자들 때문이었다. 이것이 비명을 올리게 하는 원인이다. 그런데 그들의 부르짖음은 무엇인가? 그곳은 곧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 왕이 그 중에 계시지 아니한가?" 하는 것이다. 다음 두 가지는 그들의 줄곧 으쓱거리며 의지하던 기반이었다.
(1) 하나님의 전과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표징이 그들 중에 있다는 것.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않느냐? 그런데 우리가 무슨 위험이든지 두려워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이 그들의 상투적 용어였다. 환난이 덮칠 때면 그들은 으례껏 "확실히 우리는 별일 없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는 하나님을 모시고 있지 아니한가?" 란 이 말을 붙잡았었다. 그러나 사태가 막다른 궁지에 다달았을 때 그들이 이처럼 자위한다는 것은 그들의 불행을 더욱 악화 시킬 뿐이었다.
(2) 그들에게는 다윗가의 보좌가 있었다는 것. 그들에게는 성전이 있었듯이 jure divino-즉 신의 법에 의하여 군주가 있었다. 시온의 왕이 그 중에 있지 아니한가? 시온의 하나님께서는 시온의 임금과 그의 나라를 보호하지 않을 것인가? 틀림없이 그는 보우하실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는 가만히 있는가? 시온이 이처럼 몰락하고 곧 파멸할 것 같은데 시온에는 그를 편들고 도와 줄 신이나 왕도 없단 말인가? 그들의 이같은 절규는 하나님의 권능과 약속이 파괴되거나 약화되기라도 한 듯한 감을 주어 하나님께 대한 비난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이 외침에 대답하신다. "그들이 어찌하여 그들의 조각한 신상들로 나를 격노케 하였는고?" 그들은 우상숭배로 하나님을 밀냈으면서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유기하심으로써 무자비하게 다루시기라도 하신 듯이 하나님께 시비를 건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된 도리를 철회하였고 따라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부터 자진하여 뛰쳐 나갔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자기들 사이를 갈라 놓은 것은 자기들의 죄인데도(사 59:2)변조하여 자기의 왕,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한다(사 8:21). 그들은 여호와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왕이 그들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호 10:3)
Ⅲ.font> 우리는 여기서 자기 백성의 재난과 파멸을 통곡하는 선지자를 보게 된다. 정작 애가라는 표제의 책에서보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레미야 선지의 눈물을 더 많이 보게 된다.
1. 그의 슬픔은 얼마나 지대하였는가! 그는 조국의 파멸을 눈으로 목격한 자였다. 그렇지만 그는 이제 예언의 영에 의해 그 사실들을 미리 내어다보고 있는 것이다. 조국의 참성을 예견하는 가운데 -눈으로 볼 때에야 더 말할 것도 없으리라-그는 "내 중심이 번뇌하도다(기진맥진한다는 뜻임). 그것을 살피니 내가 가라앉는 것 같고 혼이 떠나가는 것 같구나!" 하고 절규한다(18절). "내 슬픔에 대해 어떻게 하면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 하고 궁리하지만 헛수고로구나. 슬픔을 경감시키려는 노력을 할수록 그것은 비애를 심화시키는데 지나지 않구나." 슬픈 일을 당하면 그 비애를 완화시키고 번뇌를 상쇄시키기에 적합한 일을 연상함으로써 우리의 근심에 대한 위로를 얻도록 노력하는 것이 현명한 일인 동시에 우리의 도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때로는 억누르면 억누를수록 더욱 강하게 되퉁겨나오는 슬픔도 있는 것이다. 본문의 예레미야 선지처럼 매우 선한 자들의 경우가 왕왕 그렇다. 그의 영혼은 위로받기를 거절하였으며 그 심령이 상하였다(시 77:2, 3). 그는 무슨 일 때뭄에 그러는지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다(21절). "내가 이처럼 상한 것은 딸 내 백성이 상하였기 때문이다. 나의 상함은 그들의 죄를 인함이며 그들이 죄로써 자초한 불행 때문이다. 내가 슬퍼하며(또는 검으며)검게 보이며 조객들처럼 검게 입고 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 내가 놀라움에 사로잡힌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일지, 어느 길로 향해야 할지 모르겠구나."우리는 조국의 불행을 진심으로 크게 슬퍼해야 마땅하다. 은혜로운 심령은 공공의 심령이며 부드러운 심령이며 슬퍼하는 심령일 것이다. 우리 동포의 불행을 애도하며 더욱이 조국의 위난을 명심하며 특히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참화를 슬퍼하며 "요셉을 위해 애통하는" 것은 우리에게 합당한 일이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했었고 그 예언의 진실성이 의심을 받아 온 터였지만 그 예언의 성취로 인하여 자기 예언의 진실성에 대한 증거를 기뻐하기는 커녕 개인의 명성보다 조국의 복리를 우선시하여 비탄해 마지 않았던 것이다. 예루살렘이 회개하여 파괴를 면할 수 있게 되었더라면 그는 요나처럼 안절부절 못해 하진 않았을 터였다. 예레미야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적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그들은 예레미야를 미워하여 비난도 하고 박해도 하였다. 그토록 그는 진심으로 자기 원수들을 용서했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바랐던 것이다.
2. 그의 소망은 얼마나 소소하였는가!(22절)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병들어 죽어가는 나라에 대한 특효약은 없는가? 그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즉 치료를 베풀기에 능하고 충심한 자는 없는가?" 그는 그들의 사정이 이미 통탄스럽고 구제의 가망이 없다고 간주한다. 길르앗에 유향은 많으나 죄라는 병을 고칠 수 있는 유향은 없으며 의사도 있지만 갈대아와 같은 외국 군대로 쑥밭이 되어 버린 국토의 건강을 회복시킬 의사는 없는 것이다. 이미 자행된 파괴는 회복할 수가 없으며 병세는 곧 극도에 다달아 억제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또 이 말씀은 그들의 질병의 치료가 불가능한데 대해 물은 책임이 그들 자신에게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그 물음은 긍정적으로 대답이 주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있다. 확실히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도우시고 치료하실 능력이 있으시다. 그에게는 그들의 모든 고통을 교정해 주실 힘이 충분히 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율법과 그의 선지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들의 도움으로 회개에 이를 수도 있었으며 그랬더라면 그들의 멸망은 방지되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방백과 제사장도 있었다. 그들의 임무는 국민을 개선시키고 그들의 고통을 바로 잡아 주는 일이었다. 그들의 회복을 위해 애쓰는 것 이상으로 해야 할 일은 달리 없지 않았겠는가? 그런데도 어째서 그들의 건강은 회복되지 않았는가? 그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탓이 아니라 그들이 약바르는 것을 용납하려 하지 않았고 치료 방법을 따르려 하지 않았던 때문이다. 의사와 약제는 모두 준비되어 있었지만 환자가 고집스러워 규칙에 따르려 하지 않았기에 비위나 맞추어 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죄인이 부상으로 죽어 간다면 그 피는 자기 머리 위로 돌아간다. 그리스도의 피를 길르앗의 유향이요 그의 성령은 그곳의 의사여서 다 효능이 있고 전능한 효력이 있지만, 죄인이 치료받기를 원치 않은 때문이다. 치료를 원하기만 했다면 고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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