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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예루살렘 심판 예고(예레미야 6:1-8)

Ⅰ.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의 경고가 나온다.

이 때는 예루살렘 성과 유다 왕국이 안전하여 위험을 우려할 만한 일이 없던 때였다. 구름이 보이고 있음을 볼 수도 없었고 만사가 안전하고 청청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는 곧 그들이 외국 군대의 침략을 받게 되리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들을 치러 한 군대가 북방에서 올 것이며 그들은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들고 전국민을 대경실색하게 할 뿐만 아니라 전국토를 잿더미로 만들 것이라는 무서운 예고이다. 이 예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이 일에 대한 경보는 요란하고 맹렬할 것이라는 말씀이 1절에 묘사되고 있다.

예루살렘 성의 일부를 분깃으로 점유하고 있던 베냐민 자손은 저희 안전을 위해 성 밖으로 피신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 성은-당초에는 성으로 피난하는 것이 권장할 난한 일로 생각되었었다. 4장 5, 6절- 얼마 있지 않으면 그들이 견디어 내기에는 너무 처참한 곳이 될 것이며 그들은 거기서 탈출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난리를 당하면 자기가 있는 곳 보다 딴 장소를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안에 있던 자들은 위험을 벗어날 막아낼 셈으로 도성 안에 들어오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탁을 받은 재앙이 죄인을 추격할 때는 이 모든 것도 헛 일이다. 베냐민 자손은 지방에 경보를 내리고 주민의 안전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다 행하라고 명을 받고 있다. 드고아는 예루살렘 북방 12마일 지점에 위치한 성읍이 거기서 나팔을 불어 그 성의 주민들로 하여금 궐기하여 경계에 임하도록 하나는 것이다. 벧학게렘에서 기호를 들라. 벧학게렘은 "포도원의 집" 이란 뜻으로 예루살렘과 드고아 사이의 언덕받이에 위치하였는데 거기서 불의 기호를 들라는 것이다. 이것은 봉화불을 올리라는 말이다. 이것은 재앙이 북방에서 엿보아 오기 때문에 완강히 저항할 태세를 갖추도록 하라는 신호인 것이다. 이 말씀은 반어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너희의 안전 보장을 위해 가장 좋다고 생각되는 방법을 취해 보아라. 그러나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될 것이다. 너희가 최선을 다 해 보나마나 그 결과는 큰 멸망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에 거역하려는 것은 헛 일이기 때문이다."

2. 그들에게 임할 공격은 대담하고도 가공할 만한 것이며 그들이 도저히 적수가 되지 못할 정도일 것이다.

(1) 공격의 대상인 "시온의 딸" 은 어떠한지 살펴보자. 시온은 아름답고 묘한 딸(2절)로 비유되고 있다. 이 여인은 온갖 좋은 것과 부드러운 것으로 양육되었으며 유순하고 연약하여 그 발바닥으로 땅을 밟아 보지도 않게 하며(신 28:56) 바람을 쐬게 하지도 않으려던 자였다. 고생에 길들이 않았기 때문에 이 여인은 원수에게 저항할 능력이 부족하며-전쟁하는 자들은 고생을 견디어 내지 않으면 안 된다-필요한 인내심으로 멸망을 견디어 낼 능력도 고난을 감당하기가 더 힘들어진다.

(2) 공격의 주체인 바벨론의 딸은 어떠한지 살펴보자. 그 장수들과 군대는 목자들과 양에 비유되고 있다(3절). 병력과 군대 질서에 있어서 많은 양떼가 목자를 따르듯 그 병졸들은 무수하였고 그 지휘관의 명령일하에 움직였던 것이다. "시온의 딸은 집에 거하면서" (어떤 자는 그렇게 해독한다) 구애받기를 기대하였으나 맹렬한 침략을 당하였다. 원수를 목자에 비유하였기 때문에 흑자가 해석하는 대로 나는 이런 해독도 긍정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 "시온의 딸은 아름다운 초장이나 묘한 땅과 같다." 이 훌륭한 목초지는 목자들에게 양 무리를 그리고 몰고 와서 풀을 먹이라고 손짓하여 부르는 셈이다. 목자들이-당시에 일부 지역이 그랬던 것같이-임자없는 이 공지를 쉽사리 점유하여 그 안에 장막을 치고 그 양 무리는 순식간에 그 초장을 다 먹어 치우듯 갈대아인들은 유대 땅을 쉽사리 석권하여 자기들 마음대로 원하는 곳에 병영을 세우고 모든 것을 삼켜 버릴 것이다. 이것을 보다 상세히 설명하기 위해 예레미야 선지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주고 있다.

[1]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소유였던 성지와 거룩한 도성조차 멸망시키기 위하여 갈대아인들에게 어떤 명령을 내리실 것인가? "너희는 그를 치기를 준비하라" 고 말하는 이는 하나님이시다(4절). 그는 모든 무리를 관할하고 계시는 "만군의 여호와" 이시다. 그런분이 공격을 위해 "너희는 나무를 베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흉벽을 쌓으라" 고 말씀하셨다(6절). 갈대아인들은 유다와 예루살렘을 치려고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나 아직 위로부터 주어진 것 외에는 달리 힘이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멸망의 도성으로 지목하신 것이다. "이는 벌받을 성이라" 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성읍은 진노의 벌을 받고 하나님의 공의로 벌받을 성인데, 그 형벌의 시기가 바로 이 때이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죄악의 길에서 태평하게 안심하고 있는 자들에게 틀림없이 형벌이 임할 날은 지금도 오고 있다.

[2] 그들은 하나님의 이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얼마나 서로를 고무시 킬 것인가? 하나님의 의향이 예루살렘을 치는 데 있으며 또 그 뜻은 변경되거나 취소될 수도 없기 때문에 원수들이 세우는 전쟁 도략은 하나님의 계획과 일치하게 된다. 하나님이 "그를 치기를 준비하라" 고 말씀하셨으므로 갈대아인들의 전쟁 결의는 하나님의 의향의 보조적 수단이 된다. 공간적 거리나 도중에 방해가 되는 허다한 어려움에도 뷸구하고 그 전쟁은 nemine contradicente-즉 만장일치로 결정될 것이다. "일어나라. 우리가 가자."

하나님의 계획과 법령이 어떻게 인간의 계책, 심지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모계(謀計)로 추구되고 수행되는지 관찰함은 유익하다(사 10:6, 7 참조). 이 원정에서 그들이 보여 주는 특색은 다음 두가지이다.

첫째, 그들은 매우 신속히 공격하려고 도모하고 있다. 그들은 전쟁을 하기로 결정하자 마자 곧 공략을 운위하고 있다. 이들이 오늘 할 수 있는 것을 내일까지 미루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비록 햇살이 뜨겁더라도 "일어나 정오에 올라가자" 고 말하는가 하면 어두워도 좋으니 "일어나 밤에 올라가자" 고 말하고 있다(5절). 아무 것도 그들을 막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속전속결하기 위해 부심하는 자들로 묘사되고 있다(4절). "아하! 아깝다. 날리 기울어 우리 작업을 계속하지 못하겠구나. 저녁볕 그늘이 길어졌으니 우리는 가만히 앉았다가 기회를 놓치지 말자." 우리가 우리의 영적 사업과 전쟁에 이처럼 열심이고 천국을 침노하여 빼앗는 일에 이토록 시간이나 기회를 잃을까봐 전전긍긍한다면 얼마나 좋으랴! 우리에게 성취해야 할 영원한 구원의 문제가 남아 있고 그 구원을 훼방하는 대적들과 싸워야 할 문제가 남아 있는 시기에 장난삼아 소일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다.

둘째, 그들은 그 공략이 아주 성공적일 것으로 자신있게 예상하고 있다. "우리가 올라가자. 가서 그 궁궐들을 쳐부수고 그 안에 있는 금은 보화를 모두 차지하자." 그들이 이렇게까지 열성을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서라기보다 그들 자신의 창고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로써 당신의 목적을 이루셨던 것이다.

Ⅱ. 이렇게 배정된 심판의 원인. 이 모든 일은 다 저희의 악함 때문이다. 그들은 천벌을 자초한 것이다. 그들이 이 심판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그 책임이 자기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포학한 압제자들이었기 때문에 이처럼 학대를 받는 것이다. 그들은 동족이면서 권세와 유리한 위치에 있게 될 때마다 서로가 상대방을 가혹하게 취급하였었다. 그러나 이제는 원수가 와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들 모두를 엄하게 다루게 되었다. 여기서 그들에게 힐책하는 것은 포학과 폭력과 부정의 죄이다.

1. 국가적 차원의 죄로서(6절). "이는 벌받을 성이요, 지금은 국문할 시간이니, 그 성에는 오직 포학한 것뿐이기 때문이다." 보좌에 앉은 왕으로부터 시정의 상점 주인에 이르기까지 신분의 귀천과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 수하에 있는 자를 억압하였다. 어느 쪽울 둘러 보아도 이런 유의 억울한 일들이 있고 그 원성은 하늘에 사무쳤다.

2. 그들에게는 이 죄가 아무런 죄책감을 주지 않는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7절). 그는 샘이 그 물을 너무도 풍성하게 그리고 아주 쉴새없이 솟쳐내어 그 흐름이 분수처럼 격렬하고 유해한 것같이 악랄하고 짓궂은 온갖 일로 그 악을 발한다. 샘에서 솟구쳐 나오는 물은 저지되지 않을 것이며 어떻게 해서라도 수로를 찾아 흘러갈 것이다. 그와 같이 이들도 법이나 양심의 제지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 포학한 처사를 계속 행할 것이다. 이것은 자연 상태에 있는 인간의 타락한 마음에 안성맞춤으로 적용된다. 샘이 물을 자연스럽게 쉽사리 용출시키듯 타락한 마음은 악을 발하여 하나의 나쁜 생각을 분출하기가 무섭게 또 딴 것을 토해 낸다. 그런 마음에는 늘 악한 생각이 흐르고 있으며 항상 출렁이고 있다.

3. 이 죄는 그들의 변함없는 관례가 되었다. "강포와 탈취가 거기서 들리며" 그 부르짖음은 소돔의 경우처럼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 "질병과 창상이 내 앞에 계속하느니라." 신체나 심령, 재산이나 명예가 부당하게 손상을 입어 스스로 학대받는다는 것을 깨달은 자들은 곧 하나님께 호소한다. 인류 공동의 어버이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 상호간에 저지르는 위해와 비행을 주시하시며 분개하시고 조만간에 그것을 보수하실 것이라는 사실에 유의하자.

Ⅲ. 이 심판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 위한 교훈. 전반적 일에 대해 따끔한 경고가 나오고 있다. "예루살렘아! 너는 훈계를 받으라(8절). 하나님의 법과 그 선지자들이 베푸는 교훈을 수납하라. 결국 네 자신을 위해 지혜를 얻으라." 그들은 행할 일에 대해 받은 교훈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받은 교훈을 따라 실천하는 일밖에 남은 것은 없었다. 그렇게 할 때까지 훈계를 받아들였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권면을 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베푼 훈계에 순응하기를 거부하면 그들이 결국 파멸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하여 아니하면 내 마음이 너를 싫어하거나 네게서 떠나가게 되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대해 얼마나 자상한 애정과 관심을 품고 계시는지를 암시해 준다. 바로 하나님의 영혼(마음)이 그들과 결합해 있었으며 죄 이외에는 어떤 것도 그 결합을 탈구(脫臼)시킬 수가 없었음을 시사해 준다.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자비의 하나님께서를 패역한 백성에게서 조차 떠나기를 싫어하셔서 극단적 사태에 이르는 것을 예방하시기 위해 진정한 회개와 개심을 간절히 권하시는 분이시다.

2. 하나님의 마음이 싫어하는(원뜻: 떠나가다) 자의 입장은 매우 비참하다. 하나님의 마음과 분리되었다는 것은 이 세상의 외형적 축복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그의 사랑과 임재하심을 보다 직접적으로 그리고 보다 특수하게 표상하는 위로와 은총의 상실도 뜻하는 까닭이다. 이것과 히브리서 10장 38절에 나오는 두려운 말씀, 즉 "누구든지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와 비교해 보라.

3.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는 자는 참으로 파멸이다. 하니님의 마음이 예루살렘에서 떠날 때 그 도성은 곧 황무하게 되고 주민이 없는 폐허가 되는 때문이다(마 23:38).

 

6:2 없음.

 

6:3 없음.

 

6:4 없음.

 

6:5 없음.

 

6:6 없음.

 

6:7 없음.

 

6:8 없음.

 

6:9

유다의 타락상(예레미야 6:9-17)

이 단원의 서두부는 앞에 나온 내용과 아주 흡사한데 그 이유는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해야 하기 때문이다.

Ⅰ. 여기에서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파멸이 경고되어 있다. 앞서는 갈대아 군대의 신속한 참전을 봉독하였는데(4,5절) 본문에서는 전쟁에 의한 대살륙을 대하게 된다. 여기에 묘사되고 있는 황폐화는 얼마나 비탄스러운가! 원수들이 그들 가운데 오래도록 군영을 베풀고 왕래할 것이며 피와 보화에 대한 원수들의 갈증은 가실 줄을 몰라서 닥치는 대로 노획하며 한 때 모면한 것도 딴 때에는 저희 수중에 들어가고 말 것이다(9절). "포도를 땀 같이 그들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말갛게 주우리라!" 포도 따는 자가 한 알도 남겨 두지 않으려는 마음을 먹고 더 많이 따서 담기 위해 광주리에 그 손 자주자주 놀리듯이, 그들이 비록 분산하여 숨더라도 원수에게 잡힐 것이며 한 사람도 그 원수의 눈과 손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아마 이 백성은 탐남하여(13절) 저희 포도를 다 줍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율법(레 19:10)을 지키지 않았다가 이제는 그들 자신이 땅에 떨어진 포도처럼 말갛게 주움을 당할 것이니 칼에 엎드려지거나 포로로 잡히게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분노를 붓고 그 손을 펼친다고 한11,12절 말씀에 잘 설명되고 있다. 즉 갈대아인들의 분노와 손이 이를 행한다는 말씀이다. 비록 악인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손으로 이용하시며(시 7:14) 우리는 악인의 본노 가운데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가득 찬 분노를 쏟는 대상은 누구인지 살펴보자. 그것은 밖이나 거리에 있는 아이들이다. 그들은 길 거리에서 놀고 있거나 천진난만하게 주위를 둘러보러 달려나오는 어린이들이다(슥 8:15). 그러나 무정한 갈대아인들의 칼은 이들을 결코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렘 9:21). 자녀들은 아비의 죄 때문에 초래된 재난 속에서 멸망을 당한다. 마찬가지로 형벌은 모인 청년들에게도 임하여 행악 중에 서로의 손을 굳게 해 주기 위해 모이는 즐거운 회합과 사교장에도 이를 것이다. 그들은 함께 멸절할 것이다. 행음하기 위해 보이는(5:7) 자들이 원수의 수중에 떨어질 뿐만 아니라 지아비와 지어미가 다 잡힐 것이다. 부부가 침상에서 함께 있다가 잡힐 것이니, 어느 하나도 남겨 두지 않고 모두 다 포획하고 말 것이다. 침략자들은 연약하고 아리따운 여성이라 하여 인정을 베풀지 않으며 노쇠하고 존경할 만한 노인이라 하여 동정하지 않는다. 노인과 늙은이는 살린다 해도 부려먹을 수 없고 죽인다 해도 자기들의 안전에 별반 도움을 주지 못하는 계층이어서 선도 해도 끼칠 수 없는 존재들인데도 원수는 멸절시키거나 아니면 데려 갈 것이다. "그들의 집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라" (12절). 정복자들이 저희 거소를 차지하여 재호를 사용하고 저희 창고에 있는 것으로 생활할 것이다. 저희 전지와 아내는 경고된 대로(신 28:30 이하)이들 정복자의 수중에 들어갈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손을 그 땅 주민에게 펴시매 아무도 빠져 나올 자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대한 이런 위협적 선언에 있어서 다음 사실을 주시하자.

1. 선지자는 이와 같이 무서운 선포를 하는 가운데 자신을 의롭게 부각시키고 있다. 그는 이 일에 대한 생각과 우려가 내 마음을 꽉 채우고 있어서 나는 솟아오르는 충동과 예언의 영에 의하여 이토록 격렬한 선포를 수행하노라." 그는 이 위협적 경고를 기뻐하지도 않았고 자기 주위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하는 이 설교가 즐거운 일도 못되었으나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참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는 할 수 있는 데까지 오래 억제하였고 감히 밖으로 표현하지 않으려고 버티어 보았으나 만군의 주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은 권능이 충만하여 저희가 참고 들으려 하거나 말거나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목사가 성서를 따라 여호와의 두려운 일들을 선포한다고 해도 우리는 하등 못마땅해 할 이유가 없다. 그들은 전령에 불과하기 때문에 유쾌한 일이든 불쾌한 일이든 받은 전언을 대신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2. 그는 그럴 듯한 말로 설교하던 거짓 예언자들을 정죄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민중에게 감언으로 아부하여 충실 도리를 지키지 못한 때문이다(13,14절). 백성의 파수꾼과 충고자가 되어야 마땅할 제사장과 선지자가 거짓을 행하여 책임에 충실하지 못하고 백성에게 저희 잘못과 위험을 말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백성의 병을 고치는 의원이 되었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환자가 마음대로 행하도록 방임하며 그들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주고 위독한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도록 입발린 말만 함으로써 병자를 죽인 살인자가 되었다(14절). 그들은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치며" 심상한 상처를 치료하는 때처럼 치료하여 환부의 표면만 손댈 뿐 그 깊숙한 속은 살피지 않았고 독한 소독제를 사용할 필요가 있을 때 경미한 진정제만을 투여했었다. 죄 중에 있는 백성에게 비위나 맞춰 주며 병이 고황에까지 침투하고 있는데 아편을 주어 일시적 편안만을 도모해 주었다. 우상 숭배와 무엄한 불경건에 계속 몰두하였으므로 평강이 없는 때 그들은 "평강하다, 평강하다. 만사가 잘 되어 나갈 것이다" 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백성 중에 지각있는 인물이 다소 있어서 경각심을 갖고 위기를 의식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들은 제사장과 예언자의 권위로써 그들의 입을 속히 막고는 교회도 국가도 어떤 위험에 처해 있지 않다고 대담하게 역설했던 것이다.

죄에 길에 선 우리에게 사탕발림을 하는 자들은 우리의 거짓된 친구로 간주해야 한다. 그와 같은 자는 우리의 최악의 원수이며 가장 위험한 원수이다.

Ⅱ. 하나님을 노엽게 하여 이 같은 파멸을 자초한 원인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죄악이었으며 하나님은 이 일에서도 의로우시다는 것이 여기에 선언되고 있다.

1. 그들은 자기들의 잘못이나 위험에 대한 충고를 한사코 들으려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에게 명하여 닥쳐오고 있는 심판에 대한 경고를 그들에게 말하도록 하셨다(9절). 선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정책하여 듣게 할꼬? 나는 참을성 있게 들으려 하는 자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구나. 나는 아무리 오랜 시간이라도 경고해 줄 수가 있는데 그 경고를 받아들일 자가 아무도 없구나. 내가 말해도 그들로 하여금 듣게 할 수가 없으니 내 말은 아무 소용이 없으며 성공할 가망도 없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저희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저희 귀는 혈육과 세상에 속해 있어 하나님의 음성을 받아들이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듣지 못한다. 말하자면 그들의 청각 기관에는 두터운 껍질이 돋아나 있어서 거룩한 일들을 그들에게 말하는 것은 목석에게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이 소용없는 짓이다. 아니, 그들은 신적일에 귀가 먹었을 뿐만 아니라 편견까지 품고 있다. 그들은 절대로 경청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있기 때문에 들을 수가 없다.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자기에게 욕으로 여긴다." 말씀의 책망과 경고를 다 그렇게 간주한다. 그들은 부당한 취급이나 모욕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며 선지자의 공명정대한 충언을 극히 근거없는 중상과 비방이기라도 한 듯 분개한다. 이것은 율법사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라고 한 것같이(눅 11:45) 소가 막대기를 향해 발길질하는 짓이었다.

책망을 수치로 간주하여 싫어하는 자들은 틀림없이 극히 중한 비애를 맛보게 될 것이다. 본문에서 그들이 이 말씀을 즐겨 아니한다고 할 `때 여기에 언외의 의미가 많이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그들은 이 말씀에 대해 혐오감을 품으며 감정이 고조된다. 아니, 그들은 이 말에 격정을 터뜨리며 부패한 마음에 불이 붙어 당장 달려들어 책망하는 이의 눈이라도 뽑아낼 듯한 기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겨 아니하여 그 말씀이 들리지 않는 곳이라면 어디로든 도망가려는 자들이 어찌 여호와의 말씀에서 위로를 얻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으랴!

2. 그들은 과도히 세상에 고착되어 세속에 대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넋은 잃었다(13절).

"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노소나 빈부나 귀천을 막론하고 온갖 신분과 직업을 가진 사람 전부가 "다" 부정한 이득을 탐내고 per fas per nefas-즉 옳든 그르든 획득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탐욕을 부린다. 이 때문에 그들은 강압적이고 폭력적으로 되었다(6,7절). 돈을 사랑하는 것은 딴 죄 뿐만 아니라 이 포학의 죄로서도 쓰디 쓴 뿌리가 되기 때문이다. 아니, 이 탐욕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선지자에 대항하여 마음이 더욱 강퍅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조소한 것도 이런 탐욕스런 바리새인들이었다(눅 16:4).

3. 그들은 죄를 지으면서도 뻔뻔스러웠고 수치를 느끼지 않았다. 극악한 범죄에 대해 준엄하게 힐난한 뒤 "그들이 자기의 이성과 종교에 치욕이 되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고 질문함은 매우 온당하였다. 그들이 양심의 가책과 신앙의 질책에 낯을 붉혔으며 얼굴에 동요가 일고 있음을 인식하였는가?

만약 그랬다면 그들에게는 희망이 다소 남아 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 같은 염치심마저 그들에게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자기의 악함을 자랑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유죄 선고에 공공연하게 대항하였다. 그들은 이 선고에 깨달음을 얻어 자신을 낮추고 회개하게 되었어야 옳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께 대해 시치미를 떼면서 자기들의 유죄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작정하였다. 흑자는 이 말씀이 백성을 심상히 고치고 평안하다고 말한 제사장과 선지자를 가르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들은 심지어 사건이 터져 자기들의 행위와 주장의 거짓됨이 입증되고 탄로 난 뒤에도 자신의 부실과 허위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수치를 모르는 자들은 은혜를 모르며 그런 자의 경우는 희망이 없다. 참회의 수치를 감수하지 않으려거나 그것을 마땅히 해야 할 일로 삼지 않는 자들은 완전한 파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본문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그들은 철저히 파멸을 당한 자와 분깃을 나누게 될 것이며 운명을 같이 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하심 가운데서 그 나라를 벌하실 때에는 그들이 틀림없이 거꾸러져서 사지를 떨게 될 것이니 이는 그들이 부끄러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죄를 범하면서도 낯을 붉히지 않는 자는 그 당장에도 몹시 흉한 입장에 처해 있는 자이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그는 더욱 흉한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들이 당초에는 강퍅하여 낯을 붉히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나중에는 너무나 굳어져서 낯을 붉힐래야 붉힐 수가 없었다. Quodunum habebant in manum perdunt, peccanbi verecundiam-즉 인간은 유일한 선한 특질을 일단 여러 가지 악한 특질과 혼합하게 되면 그것을 상실한다. 그 유일한 선한 특질은 곧 잘못을 범한 데 대한 수치감이다-세네카(De vit. Beat).

Ⅲ. 그들은 과거에 선한 훈계를 자주 들였는데 그것을 새삼스레 상기시켜 주어도 허사이다. 그들은 아주 많은 교훈을 받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1. 저희 의무에 관한 권면에 의하여(16절). 하나님께서는 "길에 서서 보라" 고 저희에게 늘 말씀하시곤 하였다. 이 말씀이 뜻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서는 저희가 경솔히 나아가는 일이 없도록 하시기 위해 길가는 나그네같이 심사숙고하기는 원하셨다. 길손은 여행의 목적지로 통하는 바른 길을 찾는 데 무척 신경을 쓰기 때문에 가던 길을 멈추어 서서 바른 길을 물어본다. 만약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생각이 들 만한 이유라도 있으면 올바른 길을 찾을 때까지 안부절 못하게 된다. 사람들이 자기 영혼을 위해 이처럼 지혜로우며 그 발 밑의 길을 헤아린다면 얼마나 좋으랴! 바른 길과 틀린 길이 길손에게 몹시 중요하듯 신자된 우리에게는 합법으로 믿느냐 불법적으로 믿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2) 하나님께서는 저희가 옛적 곧 자기들보다 앞서 간 자들의 관찰과 경험을 참조하도록 바라셨다. "옛적 길을 알아보고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욥 8:8) 네 아비,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신 32:7). 그리하면 너는 경건과 의로움의 길이 바로 하나님께 인정받고 축복받은 상도였고 사람들이 이 길에서 형통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옛적 길을 알아 보라." 그 길은 하나님의 율법 곧 옛적에 대한 참된 표준인 기록된 말씀에 의해 규정된 길이다. 너보다 앞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등의 족장이 거쳐간 길을 알아 보라. 네가 저희에게 약속된 것을 유업으로 받고 싶거든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라.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 보라." 그러나 우리는 오랜 법 규정이나 관습에서 요구하는 것만이 우리 길을 의롭게 하기라도 하는 양 선인의 길이란 이유만으로 따라 가서는 안 된다. 악인이 밟던 옛적 길도 있기 때문이다(욥 22:15). 우리가 옛적 길을 알아본다고 할 때는 선한 길 즉 의인의 대로를 찾는 것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신앙과 경건의 길을 선한 옛적 길이며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성도가 걸어갔던 길이다.



(3)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이 선한 옛길에 대한 조사의 결과에 따라 행동하기로 결심한 것을 원하셨다. "너희가 선한 길을 찾거든 그리고 행하라. 그대로 실천하며 그 길을 어김없이 고수하여 나아가며 끝까지 참고서 그 길로 행하라." 혹자는 이 말씀을 환난이 눈 높이에 와 있다고 말한 참 선지자와 평강하다고 말한 거짓선지자 간의 투쟁에 대한 훈계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들 백성은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 모르는 체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길에 서서보고 이 둘 중 어느 쪽이 기록된 말씀과 하나님의 섭리의 관례에 부합하는지 알아 보며 어느 쪽이 너를 선한 길로 인도하는지 조사해 보라. 그래서 결과를 따라 행동하라."

(4) 하나님께서는 저희가 이같이 행한다면 영혼의 복리와 만족이 확보될 것이라고 그들에게 장담하신다. "선한 옛적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행로가 편안하고 즐거움을 깨닫게 될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너희 자신을 다 향유하게 될 배우며 그 길은 너희를 참된 안식으로 인도해 줄 것이다. 그 길로 행하는 데에는 약간의 수고가 요구된다고 하더라도 너희는 나그네길의 종착점에 가서는 풍성한 보상을 얻게 될 것이다.

(5) 하나님께서는 이 선한 권면이 그토록 이치에 맞고 그들에게 적당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용납되지 못함을 보시고는 애통해 하신다. 그러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우리는 선한 길 곧 선한 옛적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려는 수고도 하지 않겠노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 길을 들어서 알게 되고 그것이 바른 길이라는 것밖에 달리 반박할 말이 없게 될 때에도 우리는 극기를 하지 않을 것이며 그리고 행하는 일만큼은 하고 싶지 않노라" 고 하였다. 이와 같이 많은 무리가 철저한 외고집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파멸을 당한다.

2. 저희 위험에 대한 경고에 의하여. 그들이 타당한 논증에 의한 지배도 마다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방법을 취하신다. 그는 아주 작은 심판을 통해서 보다 큰 심판을 경고해 준다. 그는 자기 예언자들을 보내 그들에게 이것을 설명하게 하시며 그들이 처한 위험을 알게 하여 그들을 놀라게 하신다(17절). "내가 또 너희 위에 파수꾼을 세웠노라."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파수꾼이며 주 안에서 우리 위에 세운 파수꾼을 모시고 있음은 우리에게 큰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이들 파수꾼이 고한 따끔한 경고는 그들에게 부담스런 노래가 되었다. 그들은 "나팔소리를 들으라" 고 몇 번이나 외쳤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섭리 가운에 나팔 소리를 내신다(슥 9:14). 파수꾼은 이것을 직접 듣고 감동을 받는다(렘 4:19), 그래서 그들은 라는 도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소리쳐 부르며 여호와의 성토하시는 소리를 들으라고 촉구해야 하라고 소리쳐야 한다.

(2) 이 공명정대한 경고는 무시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 하였도다." "우리는 듣지 않겠고 주의하지도 않을 것이며 믿지도 않겠노라. 예언자들은 우리가 환난을 당하든 말든 내버려두고 차라리 자신들이나 구하는 게 나으리라." 죄인들이 멸망하는 이유는 그들이 나팔소리를 듣지 않기 때문이다. 또 그들이 나팔소리를 듣지 않는 까닭은 그들이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왜 들으려 하지 않는가 하는 이유는 그르이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이 점에서 그들은 극히 비이성적이다. 한 사람의 고집장이보다 이성 있는 열 사람을 다루기가 훨씬 더 수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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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날의 참상 예고(예레미야 6:18-30)

Ⅰ. 하나님께서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자신의 공평하신 처사를 모든 이웃 나라들에게, 아니 온 세계에 고하신다(18,19). "너희 열방아! 들으라. 특히 강자들의 희중아! 알라. 주변 국가의 정세를 인식하고 주목하는 열방의 권세자들아!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살펴 보라. 너희는 그곳에서 빚어지고 있는 황폐화의 소문을 들으라. 땅이 그 소식을 울려 퍼지게 하고 세상이 그 일로 진동하지 않느냐! 너희는 누구 할 것 없이 어찌하여 내가 나와 언약을 맺은 백성 곧 나의 소유하에 있음을 고백하고 나를 경배해 왔으며 내게서 크게 총애를 받던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는지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너희는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이 땅에 이같이 행하겼느뇨?(신 29:24)하고 곧장 물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라."

1. 그것은 저들 자신의 꾀가 불러 온 당연한 결과라는 것. 그들이 당하고 있는 재앙은 그들의 생각의 결과이다. 그들은 외국인과 연합함으로써 자기들이 강하게 될 줄로 생각하였으나 바로 그 때문에 자신의 약화를 초래하였고 힘이 감소되었으며 스스로 배신하여 재앙을 불러 들이게 되었다.

2. 그것은 그들이 불순종과 반역에 대한 공의로운 형벌이라는 것. 하나님께서는 저희가 계명을 위반한 데 대하여 단지 율법의 저주를 집행하실 뿐이다.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법을 버리고 내가 그들에게 한 말을 존중하지 않으며 그것을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입의 심판에 복종하기를 거부하지 않았더라면 그 손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이처럼 파멸을 당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 처사가 그들을 부당하게 취급할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Ⅱ. 하나님은 그들의 청원을 기각해 버리신다. 그들은 외면적 예배 행위가 자기들의 모든 죄를 속하기에 충분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청원을 드렸던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것은 부질없는 청원이었다(20절). 유향과 향품은 최고급품이고 멀리서 애써 가져온 것이며 또 그것을 사르는 제단도 황금으로 된 것이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나는 너희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너희의 희생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 이런 제물은 하나님께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으며(어떤 희생물도 마찬가지이다, 시 50:9), 기쁨을 드리지 못한다. 오직 정직한 자의 희생 제사만이 그를 유익하게 하며 즐겁게 할 수 있다. 악인의 제물은 오히려 하나님께 가증한 것이 된다. 희생과 분향을 명하신 것은 회개를 촉발하고 그들로 하여금 중보자를 지행하게 하며 그를 믿는 신앙심을 보조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목적을 살리는 선한 제물을 드리는 경우에 그것은 열납되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제물과 그것을 드리는 자를 다 존중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제사로써 하나님께 채주가 되고 계속해서 범죄할 수 있는 면죄부를 구입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제물을 바칠 때는 하나님께 즐거움이 되기는커녕 그를 노엽게 만드는 것이 되었다.

Ⅲ.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아가 오고 있는 파멸을 예고하신다.

1. 그들이 개심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의 파멸을 작정하신다(21절). "내가 이 백성 앞에 거침을 두리라." 이 거침돌은 그들을 죄악에 빠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환난을 당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멸망시키기로 작정한 자들을 당황하게 하시고 그들의 계획을 혼란시키셔서 자기 안전을 위해 취하는 그들의 온갖 방도를 방해하시고 지연시키신다. 어디를 가나 원수의 무리를 만나고 만난 대적마다 그들의 거침이 되었다. 어느 모퉁이에서든지 그들에게는 거침돌이 있었고 그로 인해 그들은 산낫조각이 났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 가지로 거기 거칠 것이다." 지혜를 가진 아버지나 힘과 용기를 소유한 아들도 이를 피할 수 없고 극복하지도 못할 것이다. 아비와 한가지로 범죄한 아들은 그 아비와 함께 넘어질 것이다. 심지어 이웃과 그의 친구도 멸망할 것이니 자기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서로 도울 능력도 없을 것이다.

2. 하나님은 갈대아인들을 이 일의 도구로 사용하실 참이다. 그는 행하셔야 할 일이 있으면 그 일이 무엇이든지 성취하시기에 알맞은 도구를 찾아내실 것이다. 이 민족은 북방에서, 땅끝에서부터 데려오신 민족이다. 바벨론은 북쪽으로 아주 먼 거리에 놓여 있었다. 게다가 바벨론 왕이 자기 군대를 징발하는 속국 중 일부는 더 멀리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자들을 이 일에 사용하셔야 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22,23절).

(1) 이 민족은 매우 수가 많은 큰 나라이다. 그럼으로 해서 그들의 침략은 한결 더 가공스럽다.

(2) 이들은 호전적 민족이다. 그들은 활과 창을 잡았고 동시에 그것을 사용할 줄 안다. 왜냐하면 그들은 활과 창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을 타고 있기 때문에 아주 신속하게 행구하며 전장에서는 한층 사납게 공격한다. 어떤 나라도 갈대아인들보다 훌륭한 기병을 전장에 투입한 적이 없었다.

(3) 이들은 야만적인 민족이다. 그들은 잔인하여 자비가 없으며 그러므로 먹이를 탐하고 승리에 도취한다. 그들은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전율케 하는 데 자부심을 느끼는 자들이다. 그들의 목소리는 바다가 흉용함 같다.

(4) 그들은 특별히 유다와 예루살멜을 치려고 하는데 이것은 이 유명한 나라를 약탈함으로써 크게 부해지려는 소망 때문이다. "그들은 항오를 벌이고 딸 시온 너를 치려 하느니라." 하나님께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이 범죄하면 그들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원수된 자들에게 쉽사리 먹이가 되고 만다.

Ⅳ. 선지자는 이 두려운 대적이 보여주었다는 접근함에 따라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할, 아주 심한 경악을 묘사하고 있다(24-26절).

1. 그들은 원수의 접근을 알게 되는 데로 곧 공포에 떨게 될 것이라고 자인한다. "우리가 그 소문을 들었으므로 우리 손이 약하여 졌고 우리는 어떤 저항을 할 생각도 나지 않는다. 고통이 우리를 잡았으므로 우리는 즉각 아픔이 극에 달하여 해산하는 여인의 아픔과 같다."

어떤 두려운 환난이 닥쳐오면 죄의식이 사람을 낙담케 한다. 하나님을 자기 원수로 삼은 자가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하겠다고 바랄 수 있겠는가?

2. 그들은 감히 머리를 밖에 내밀지도 못하고 집안에만 쳐박혀 있겠다고 한다. 원수의 칼이 결국 집에까지 찾아오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모험을 감행하여 전투에 임하거나 도망함으로써 생명을 구하려고 하느니보다 차라리 순순히 그리고 비겁하게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려 하였다. 그들은 서로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양식을 가지러 밭에도 가지 말며 길로도 가지 말라. 감히 교회나 저자에도 가지 말라. 네가 그렇게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 될 것이다. 대적의 칼과 그 두려움이 사방에 있기 때문이다. 야엘의 때와 같이 대로는 비어 있다" (삿 5:6). 우리가 안전한 여행을 하고 길에는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이 하나도 없을 때면 우리는 이 말씀을 상기하고 공적 안녕을 향유함에 대해 하나님을 송축하도록 해야 하겠다.

3. 선지자는 그들에게 임하고 있는 황폐화를 슬피 통곡하고 촉구한다. "딸 내 백성아! 네 하나님이 네게 울고 애곡하라고 소리쳐 부르시는 것을 듣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라. 베옷을 하루 동안 입을 뿐만 아니라 너의 평상복으로 굵은 베를 두르라. 네 머리에 재를 뒤집어 쓸 뿐만 아니라 재 속에서 딩굴어라. 철저히 애곡하여 온갖 표정을 다 사용하여 망극한 비탄을 나타내되 겉보기만을 위해 억지로 짜내지 말고 극히 진지하게 애도하라. 독자를 잃은 부모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을 길이 없다는 생각에서 슬퍼하듯 통곡하라. 네가 이와 같이 통곡할 것은 멸망시킬 자가 홀연히 우리에게 올 것이기 때문이다. 멸망시키는 자가 아직은 이르지 않았으나 현재 오고 있으며 그에게 대한 명령은 이미 하달되었다. 그러므로 그에 알맞는 비애로 그 처분을 맞아들이자." 성도는 하나님의 자비를 약속 가운데서만 볼 수 있을 뿐이면서도 그 자비에 대한 소망 중에서 즐거워한다. 이에 반해 죄인은 단지 경고하심 속에서 하나님의 두려우신 심판을 보기만 해도 그에 대한 두려움으로 통곡하지 않을 수 없다.

Ⅴ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를 목하 재판을 받는 이 백성의 재판관으로 선임하신다. "내가 너를 열방 위에 세우고" (1:10)라고 하셨듯이 여기에서는 "내가 이미 너로 내 백성 중에 살피는 자(또는 망대)나 망대 위에 파수꾼이나 보초로 세웠고 저희 행동의 감시자로 삼아 그들의 길을 알고 살피게 하였노라" 고 하신다(27절).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동태에 관하여 자기에게 정보를 제공해 줄 자를 필요로 하셨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선지자는 예언의 영에 의하지 않고서는 이 백성에 대하여 거의 아는 바가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이처럼 선지자에게 직접 하명하셔서 그 백성의 특징에 대해 관찰해 보도록 하심은 이로써 선지자가 하나님의 공평한 처사에 완전히 공감을 느끼고 다가오고 심판을 보다 자신있게 경고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은 그를 모든 사람의 눈에 잘 띄는 망대로 삼으셨다. 따라서 그는 많은 사람에게 공격을 당하기 쉬웠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에 그를 "요새와 견고한 망대" 로 삼으셔서 시세에 역류할 수 있고 저희 불만의 충격에 견딜 수 있는 용기를 그에게 주셨다. 신실한 책망자가 되고자 하는 자들은 요새와 같이 견고할 필요가 있다. 이제 그들의 길을 살핌에 있어 그는 두 가지 일을 발견하게 된다.

1. 그들은 비참하리만큼 타락한 백성이라는 것(28절). "그들은 다 심히 패역한 자이며 반역자 중에 반역자(단어의 본뜻을 그렇다)여서, 종들의 종이 최하의 종이듯이 최악의 반역자이다. 그들은 반심을 품고 있으며 그 패역의 정도는 깊어서 점점 더 많이 배반하게 된다. 그들은 첫 출발은 그럴 듯하게 했으나 반역하여 되돌아온다. 그들은 다니며 비방하는 자이다. 거짓말하는 것과 서로 험담하는 것을 예사로 생각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전적인 업으로 삼고 있다. 그것은 그들의 변함없는 방침이어서 자기 귀에 들어오는 중상 모략에 의거하여 처신하며 극히 부당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욕설에 희생되는 자를 증오한다. 그들은 지천으로 흔한 금속인 놋과 철이어서 그 안에는 귀중한 것이 전혀 없다. 그들은 은과 금 같은 존재였지만 이제는 이렇게 타락한 것이다. 그들은 다 패역한 자이듯 다 사악한 자이기도 하다. 스스로 타락했을 뿐만 아니라 남을 타락시키는 데도 열심이며 자기들처럼 남을 부패케 하는 자들이다. 아니, 자기들보다 그들을 일곱 배나 더 지옥의 자식이 되게 하는 자들이다. 이런 예는 흔하다. 죄인은 쉬 유혹자가 되어 버리는 때문이다.

2. 그들은 결코 순화되거나 개선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 그들을 보다 선하게 고치려고 생각해도 그것은 허사였다. 그들에게는 다양한 방법을 시험해 보았지만 모두가 다 소용이 없었던 까닭이다(29,30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광석에다 비유하신다. 다소 좋은 금속을 포함하고 있는 광석으로 추정하고 제련사가 그것을 풀무에다 넣고서 자기의 갖은 기술을 다하며 고생을 무더기로 하였으나 전부가 폐석으로 판명되고 가치있는 것은 조금도 추출해 낼 수 없는 경우에다 비유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와 섭리를 통하여 가장 적절한 방법을 구사하심으로써 이 백성은 정제(精製)시키고 악에서 정화시키려고 하셨다. 그리고 그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던 것이다. 끊임없이 말씀의 선포와 일련의 고난에 의하여 그들은 꺼지지 않는 풀무불 속에 있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풀무는 너무 불 가까이서 공기를 불어넣는 작업을 계속하다 보니 그 열에 견디지 못해 불타버린다(본문: 풀무가 불붙고 납이 불에 살라져서). 아니면, 풀무는 오랜 사용 끝에 너무 닳아 있으나 마나한 것이 된다. 그래서 불 속에 던져 버린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해 목이 쓰리기까지 소리 높여 선포해 왔지만 그들은 각성하거나 겸비해지는 빛이 없었던 것이다. 요즈음의 수은처럼 당시에는 납이 은을 정련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 납이 불에 살라져서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하였다. 단련하는 자의 일은 헛되게 되고 그의 수고는 도로에 그치고 만다. 왜냐하면 악한 자가 제하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소중한 자와 부도덕한 자를 분리하고 오래된 누룩을 숙청하며 딴 사람에게 전염될 우려가 있는 부패한 자들을 회중에서 출척시키려는 어떤 낌새도 그들은 보여 주지 않고 있다. 또는 그들이 악은 제거되지 않았다(흑자는 그렇게 해독한다). 그들은 여느때와 같이 언제나 악하며 그 어떤 것도 그들과 그들의 죄를 분리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죄다 들었고 또 느낀바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상 숭배와 부도덕으로부터 물러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바로 그 운명은 그들에게 임한다(38절). 그들은 버려진 은이라 칭함을 얻을 것이니 사람들에게 쓸모없고 가치없는 자로 취급받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 안에 은이 조금이나마 들어 있기라도 한 듯이 번쩍거리지만 실제로는 미덕이나 선함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다. 이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버리셨다. 그는 그들이 더 이상 자기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으실 것이며 그들에게서 어떤 선한 것도 구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그들을 찌끼같이 버리실 것이며(시 119:119) 정련(精鍊)시키는 불로써 정화되기를 거부하는 자들한테는 소멸시키는 불을 예비해 두고 계실 것이다. 이 말씀 중에 나타나는 사실은 다음 두 가지이다.

(1)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죽음과 멸망을 즐거워하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의 멸망을 예방하고 그들을 구원받기에 합당한 자로 만들기 위해 그들에게 온갖 방법과 구단을 다 써 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법령과 섭리에는 공통된 경향성이 있으니 그것은 곧 그들과 그들의 죄를 분리시키려는 모습이다. 그러나 다수에게는 그 모든 것이 헛수고에 그치고 만다.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않았다."

(2)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죽음에도 의롭게 여기심을 받으며 모든 잘못은 죄인 자신에게 돌아갈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개선하시기 위해 온당한 온갖 방법을 사용해 보시기까지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고, 그들에게 희망이 있는 한 물리치지도 않으셨으며, 그들이 버려진 은으로 편명되기까지는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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