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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그 시대의 보편적 부패 풍조(예레미야 5:1-9)

예루살렘에 정직한 자가 한 사람 또는 다만 몇 명이라도 있거든 내세워보라는 도전이 나오고 있다(1절). 예루살렘은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하던(창 6:12) 옛 세계처럼 부패하였다. 일부 인사들은 아마 예루살렘에는 아직도 선한 자들이 많이 있어서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몸소 막아서며 돌이키려 할 것이라는 희망으로 우쭐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거룩한 도성임을 자랑하며 이것이 그의 진노를 막아 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도시를 다 뒤져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공평을 행한 자 곧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행하셨던 일을 본분으로 삼는 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 것이라고 시사하신다. 거리는 그들이 얼굴을 내밀고 서로 만나 예기하는 곳이었다. 넓은 거리는 그들이 시장을 개설하는 장소였다. "거리와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라. 너희가 공의를 행하는 자(흑자는 방백이라고 읽음) 곧 재판을 공평무사하게 실시하며 악고 독신(瀆神)에 대해 법을 집행하는 자를 찾을 수 있는지 알아 보라." 이와 같이 충실된 자가 끊어지고 정직한 자가 없을 때는 "재앙이로다. 나여!" 하고 소리칠 때요(미 7:1, 2) "여호와여 도우소서" 하고 부르짖을 때다(시 12:1). "참으로 양심적인 사람이나 적어도 진리를 구하는 사람이 간혹 있다손 치더라도 거리와 넓은 거리에서는 너희가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는 감히 공공연하게 나타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그가 학대와 멸망을 두려워해서이다. 성실이 거리에 엎드러졌으므로(사 59:14) 진실한 사람은 숨을 데를 찾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자를 찾으시면 하나님은 너무나 기쁘셔서 그들을 위해 그 도시를 사하려고 하신다. 소돔에 의인이 열 명만 있었더라도, 예루살렘에서 천 명 중 아니 만 사람 중 한 명의 의인만 나왔어도 그 도성을 살려 주셨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기꺼이 용서하려 하시며 자비를 보이시는 데 얼마나 신속하신지 살펴 보라. 그러나 본문에는 이런 말도 있다. "너희는 예루살렘에서 경건한 신앙과 하나님께 대한 관계를 계속 고백하고 있는 자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들은 예루살렘이 그들 때문에 파멸을 면하게 된다고 할만한 자들이냐?"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실되지 못한 고백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2절). 그들은 여호와께서 살아 계신다고 말하며 오직 그의 이름으로만 맹세하려고 한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거짓맹세를 한다.

1. 그들은 하나님께 존경을 고백함에 있어 진지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거짓으로 대한다. 그들이 "입술로는 그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그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 (사 29:13; 마 15:8).

2. 그들은 하나님께만 호소를 드리면서도 그를 거짓말의 증인으로 만드는 일을 예사로 자행한다. 그들은 우상을 두고 맹세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들은 거짓 맹세를 한다. 우상을 두고 하는 맹세가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듯이 헛맹세는 진실무망 하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짓이다.

Ⅱ. 선지자는 이 백성의 완고함과 방자함을 들어 하나님께 불평한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직접 목도하라고 호소하셨으나(1절) 여기서는 선지자가 하나님께서 친히 보시도록 호소한다(3절). "주의 눈이 성실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주께서는 만인의 진면목을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들이 자기 얼굴을 반석보다 굳게 하는 것이 그들의 참 모습이 아닙니까?" 또는 이런 말로 해석할 수 있다.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에 진실함을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이 세대 사람들 가운데 어디서 중심에 진실한 것을 찾을 수 있나이까? 그들이 비록 여호와께서 살아계신다고 말하지만 결코 주를 존중하고 있지 않습니다. 주께서는 이런저런 고난으로 그들을 치셨읍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고난에 대해 아픈 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환난을 당해도 목석 같았습니다. 하물며 그 환난의 빌미가 되는 죄에 대해 아픔을 느끼겠습니까? 주께서는 이에서 그치지 않으시고 그들을 멸하셨으며 한층 더 엄히 징계하셨읍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징계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증계하시는 주의 의도에 순순히 응하고 따르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징계에 의한 훈계를 받으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애써 신의 판결을 무시하려고 하였고 그 판결의 집행에 태연하려고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얼굴을 반석보다 굳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안색을 바꿀리가 없으며 수치심으로 얼굴이 붉어지거나 공포로 낯이 하얗게 질릴 리도 없다. 그들은 어떤 견제와 책망을 받더라도 움찔해서 자기들의 욕망의 추구를 그만 두는 법이 없다. 그들은 돌아오라고 외치는 소리를 몇 번이고 들었지만 돌아오기를 싫어하고 전장을 향하여 달리는 말같이, 옳든 그르든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였던 때문이다(렘 8:6).

Ⅲ. 부자와 빈자가 다 같이 시험을 당하고 마찬가지로 나쁜 평판을 받는다.

1. 가난한자들은 무지했고 따라서 악했다. 선지자는 돌아오기 싫어하는 자들을 많이 보았다. 그러므로 그들의 형편이 참작받도록 하기 위해 그는 기꺼이 그들을 위해 최선의 변명을 하려든다. 그 변명은 다음과 같다(4절). "실로 이 백성은 비천하고(원뜻:가난하고) 우준한 것 뿐이다. 그들은 좋은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런 훈계를 받아도 어떻게 해 볼재간이 없다. 그들은 자기 생계를 위해 열심히 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읽고 쓸 시간도 없고 능력도 없으므로 여호와의 길도 자기 하나님의 법도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자기를 향해 걸어오도록 교훈으로써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섭리로써 그들에게 걸어 오신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길과 방법을 이해하지 못한다. 다음을 주목하자.

(1) 온 백성의 무지는 많은 불경건과 불위를 야기시키는 통탄할 만한 근원이 된다. 하나님과 신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흑암 가운에 앉아 있으려고 하는 백성은 우준하고 짐승 같은 백성이다. 이런 백성에게서는 어두운 일(롬 13:12; 엡 5:11)밖에 달리 기대할게 없다.

(2) 이것은 흔히 가난한(비천한) 사람들 사이에서 잘 찾아볼 수 있는 죄악이다. 이 세상에는 악마의 가난한 자가 있는 반면에 하나님의 가난한 자도 있다. 하나님의 가난한 자는 자기의 가난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길을 알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책에서 배우지 않고도 그 길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그 길로 행하기 위해 그리고 자기 의무를 행하기 위해 그 길을 알려고 한다. 그러나 악마의 가난한 자들은 무지를 즐긴다. 그러므로 이들의 무지는 용서를 얻지 못하며 변명이 되지 못할 것이다.

2. 부자들은 오만하고 무례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악하였다(5절).

" 내가 귀인들에게 가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에 보다 잘 응하는지 보리라. 나는 그들에게 말하리라. 나는 세련된 교양을 지닌 자들에게 조금이라도 감명을 주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궁정에서 설교하겠노라." 그러나 그 결과는 전부 허사일 뿐이다. 그들이 여호아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또는 심판)을 안다고는 하지만 너무 뻣뻣해서 그의 다스리심에 굽히지 않는다. 이들은 일제히 그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었다. 그들은 자기 주인의 뜻을 알면서도 자기들의 뜻대로 하려고 결심한다. 그들은 그 마음의 길로 행하려고 하며 그 눈에 기뻐하는 대로 행하고자 한다. 그들은 아무리 만유의 주, 지고무쌍하신 여호와라곤 하지만 자기들이 통제받기에는 너무 대단한 존재이며 징계받기에는 너무 큰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가 매신 것조차 끊어버리려고 한다(시 2:3). 가난한 자는 연약하고 부자는 고집이 세기 때문에 그 어느 쪽도 자기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

Ⅳ. 몇 가지 특정 범죄가 열거된다. 이 죄들 때문에 그들은 극히 악명 높게 되었고 이 죄들은 복수를 바라는 부르짖음이 하늘에 극히 크게 사무친 죄였다. "그들의 허물은 실로 많았으니" 그들은 반복해서 허물을 범했고 그들이 범하는 허물의 종류는 다양했다. 그들의 패역은 심했다. 그들은 범죄의 수를 자꾸 증가시켰고 그런 증가되는 범죄 가운데서 더욱 뻔뻔스러워져 갔다(6절). 그렇지만 그 중에서 특히 두 가지 죄를 용서받지 못할 범죄로 간주해야 마땅했다.

1. 그들의 영적 음행. 그들은 하나님께만 돌려야 할 영광을 우상에게 돌렸다. "네 자녀가 나를 버렸느니라. 그들은 나를 위해 태어났고, 내게 헌신된 자들이요, 내 밑에서 양육된 자들이니라. 그리고 그들의 신(神)이 아닌 것들로 맹세하였느니라. 마치 그것들이 전지(全知)하고 공정한 심판관들인 양 그것들에게 나가 호소하였느니라." 이것은 각종 종교적 의무의 실행은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러한 의무를 자기들의 우상들을 위해서 바쳤던 것이다. "그들은 그것들에게 맹세했다" (이렇게 해석될 수도 있다). 즉 자신들을 그 우상들과 연합시키고, 그것들과 계약을 맺은 것이다. 하나님을 버린 자들은 신이 아닌 것들을 향하여 나아가는 슬픈 변화를 일으킨다.

2. 그들의 실제적인 행음.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사악한 욕망에 버려 두었다. 하나님께 치욕을 돌리는 자들은 결국 자기 자신들과 자기 가정을 치욕되게 만든다. 그들은 죄책에 대한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지극히 수치럽게 "행음했다." 그들은 "창기들의 집에 무리가 되어 모이고도" 더러운 장소에서 아무런 부끄러움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의 욕정이 그토록 강하고 더러웠기 때문에, 아무런 제재도 불가능했고, 만족을 채우기에만 급급했기 때문에, 그들은 완전히 짐승이 되고 말았다(8절). 그들은 마치 살띤 말(馬)과 같이 "각기 이웃의 아내를 좇아 울부짖는다" (8절). 굴레 없는 욕망은 사람이 "마치 야수처럼"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그 인간들은 지극히 괴물적이고 가증스러런 것이 된다.

또한 그들의 죄를 더욱 가증시키는 것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악용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배불리 먹게 되자," 그들의 욕정도 그만큼 강렬하게 커져 버렸다. 빵의 풍요는 소돔의 욕정의 불을 지펴주는 연료였다. Sinecerere et Baccho friget Venus- 즉 호화스런 생활은 욕정의 불꽃을 살찌게 한다. 단식은 "죽음의 독기 가득한" 무절제한 악을 길들이는 데 도움이 되며, 육체를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된다.

Ⅴ. 그 백성의 사약성과 그 땅에 만연된 방탕으로 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경고되어 있다.

1. 여기서는 구체적인 심판이 경고되어 있다(6절). 외국 군대가 침입하여, 그들을 다스리고, 온갖 것들을 황폐하게 하리라고 했다. 그들의 땅은 마치 야생 짐승들이 완전히 뒤덮고 만 그런 상태가 될 것이다.

(1) 이 원수는 "숲의 사자" 와 같이, 강하고, 난폭하고, 무적의 힘을 지니고 있다. 그 원수가 "그들을 살륙하리라."

(2) "저녁 늑대" 같다. 늑대는 배가 고픈 밤중에 기어나와서 먹이를 찾는데, 그 때는 매우 난폭하고 무자비하다. 게다가 사자와 늑대의 울음소리는 대단히 기분 나쁜 소리이다.

(3) 그 원수는 "표범" 같다. 표범은 대단히 날쌔고, 잔인하며, 조심성이 많아 결코 먹이를 놓치는 일이 없다.

이 원수의 군대가 "그들의 각 성읍을" 너무도 철저히 "경계할" 것이므로, 그 주민들은 슬픈 딜레마에 빠질 것이다. 즉 머물러 있자니 굶어 죽을 것이고, 나가자니 칼에 찔려 죽을 것이다. "나오는 자마다 찢기우리라" 는 것은 적군들이 도처에서 사람을 죽이라는 것을 시사해 준다.

이같은 모든 잔악 행위는 "그들의 패역함이 극히 심하기" 때문이다. 대 살륙을 가져오는 장본인은 바로 죄이다.

2. 이러한 심판의 공정을 알리는 호소가 있다(9절). "내가 어찌 이 일들을 인하여 말하지 않겠는냐? 질투하는 자라는 이름을 가진 하나님이 이런 우상 숭배자들을 벌 주지 않고 내버려 두리라고 생각할 수 있겠느냐? 또 무한한 순결의 하나님이 이런 부정한 가증성들을 묵과할 수 있겠느냐?" 이런 것들은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의 통치권의 체면이 유지될 수 없다. 또 그의 법이 멸시받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죄인들은 하나님의 삼판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기는 커녕, 하나님도 전적으로 자기들과 같은 존재인 줄로 생각하려는 유혹을 받을 것이다.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죽어야 마땅하다" (롬 1:32).

하나님이 죄인을 벌하실 때를 가리켜, "방문(우리 번역은 그대로 "벌함" 으로 되어 있음-역주)이라고, 즉 심문" 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는 선고를 내리기 전에 미리 사태를 검토하시기 때문이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성결 때문에 벌이 있을 것임을 각오해야 한다. 죄란 하나님의 성결에 지극히 적대적인 것이다. 그리고 물론 하나님의 정의로우심 때문에 오는 벌도 각오해야 한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의 정의에 맞지 않는 기분 나쁜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이 같은 나라에 내 어찌 보복하지 않겠느냐?" 하시는 말씀 속에 이런 뜻이 들어 있다. 복수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일 뿐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마음 자체이기도 하다. 그리고 하나님은 민족적 심판을 내림으로써 민족적 죄에 대한 보복을 가하신다. "이 같은 나라" 는 결코 영원토록 벌받지 않은 상태로 간과되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어찌 너의 이런 짓을 용서하겠느냐?" (7절). 이러한 죄에 대해서 죄책을 느낀 자들이, 영원한 나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자비를 입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므나세 왕도 비록 이 세상에서 많은 죄를 졌지만 자비를 얻었다). 그러나 "이런" 나라들은 이 세상에서만 보응이나 벌을 받을 수 있으므로, 이 같은 나라를 아무런 징계의 표지도 가하지 않은 채로 버려 두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합당치 못하다.

 

5:2 없음.

 

5:3 없음.

 

5:4 없음.

 

5:5 없음.

 

5:6 없음.

 

5:7 없음.

 

5:8 없음.

 

5:9 없음.

 

5:10

우상 숭배에 대한 징벌 예고(예레미야 5:10-19)

여기서도 앞에서와 같이,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찾아볼 수 있다.

Ⅰ. 이 백성의 죄이다. 그들에게 경고의 명령이 발동된 것은 이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부인해 버리시고, 그들에게 파멸을 선고하신다(40절). 그러나 "거기에 이유가 있는가?" 물론 있다.

1.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버렸기 때문이다(11절). "이스라엘의 집과 유다의 집" - 여러 가지 상이점이 있지만- 이 "하나님께 대해 심히 패역한"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경배를 떠났고, 그것 때문에 그와 맺은 계약을 위반한 것이다. 그들은 그를 거역하고, 그에게 위선을 행했다.

2. 그들이 하나님의 법도를 무시하고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그의 말씀의 경고를 거짓으로 여겼기 때문이다(12,13절). 그들은 재앙이 닥쳐오리라는 말을 종종 들었다. 그들은 어떤 황폐케 하는 심판, 곧 "칼이나 기근" 을 각오했어야 했다. 그런데도 방심하여, "우리는 계속 가리니, 우리에게 평강이 있을 것이니라" 는 식으로 말해 왔다.

(1)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를 속이고,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는 자연의 명령까지도 거역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아니다. 즉 그는 지금까지 우리가 믿어온 그런 분이 아니다. 그는 보지도 않으며, 생각지도 않는다. 또 그런 것을 필요치도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재앙이 임하지 않으리라."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의 말처럼 그렇게 엄격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 때문에 파멸을 당했다. 아니, 이러한 술책을 통해서 사탄은 우리를 멸망시켰다. 그래서 "우리는 칼이나 기근을 보지 않으리라" 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벌을 받지 않으리라는 망령된 희망이 모든 불신앙들의 마음을 거짓으로 지원해 주고 있다.



(2) 그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은 그들에게 정당한 경고를 보냈다. 그러나 그들은 농담으로 여기고 그 경고를 일소에 부쳤다. "그들은 말만 한다. 그게 직업이니까. 그들은 말장이들이요, 그들의 말은 바람과 같다. 그들의 말은 여호와의 말씀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우울한 공상이나 국가에 대한 반감의 산물이다. 자기들이 등용되지 못한 보복이다."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은 자기들에게 불쾌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하기를 싫어한다. 그런 말씀들이 죄인들을 그들의 죄에서 떠나게 하든가 죄 때문에 불안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언자들을 협박했다. 그들은 바람이라. 조용히 지나갈 것이다. 그러므로 그같이 그들이 당하리라. 그들이 우리에게 협박한 것은 오히려 그들 자신에게 임할 것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기근으로 놀라게 하려는가? 그들에게 고생의 빵으로 배부르게 하자" (왕상 22:27). 미가야는 그렇게 되었다.

" 그들이 칼을 예언하는가? 그렇다면 그들을 칼로 망하게 하자" (2:30). 이렇듯 그들이 하나님의 사자들을 조롱하고 학대함으로써 그들의 부정의 그릇은 다 채워지게 된 것이다.

Ⅱ. 죄로 인해 이 백성에게 내릴 처벌.

1. 그들이 코웃음쳤던 그 경고가 실현되리라(14절). 예언자들과 그 입에 있는 말을 경멸하는 "이런 말을 그들이 하였은즉," 하나님이 예언자들과 그들의 말을 명예롭게 할 것이니, 그 말의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삼상 3:19).

여기서 하나님은 예언자 예레미야에게로 말을 돌렸다. 그는 지금까지 크게 조롱을 받아 왔고, 그래서 다소 불안했을 것이다. "보라. 내가 네 입에 있는 나의 말로 불이 되게 하리라." 사람들은 예언자들을 무시했지만, 하나님은 자기의 말을 인하여 그들을 시인하시고, 마치 불이 자기 앞에 놓여 있는 모든 것을 살라버리듯, 그들의 말이 불과 같이 효력을 발생하게 만드실 것이다. "말씀이 불이 되게 하고, 그 백성은 장작이 되게 하리라." 죄 때문에 죄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의 연료가 된다. 성서에 보면, 하나님의 진노는 "어느 불경하고 불의한 사람들을 치기 위해 하늘에서부터 나온다" 고 했다. 분명 하나님의 말씀은 대항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앞에서 굽히지 않으려 하는 자들은 (할 수 없이) 꺽어지고 말 것이다.

2. 아무런 위험도 없다고 여기고 있던 바로 그 적들이 그들에게 닥쳐오리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사명을 주신다(10절). "그들의 성벽으로 올라가라. 그 위에 올라가서, 그것을 밟아 내려라.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는 돌 성벽도 진흙 성벽이나 마찬가지이다. 너희만 이제 성벽들의 주인이 되었은즉 마음대로 파괴하라. 그들의 성곽을 제거하여, 요새화시켰던 울타리가 드러나게 하라. 그들의 성곽은 여호와의 것이 아님이니라. 그가 그것들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니, 보호하거나 방비해 주지 않을 것이로다." 그 성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중에 건축되거나, 그를 의지하는 중에 된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도 그 성곽을 더 의지했다. 그러므로 그 성곽은 여호와의 것이 아니다.

그 성읍이 죄로 가득 차게 되자, 하나님은 그들을 지켜 주지 않으려 하신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성곽은 종이장에 불과하다. 우리의 방패요, 모든 방패 중에 방패이신 그 분이 "우리를 떠나시고" 나면, 그 무엇이 우리를 방어해 주랴?(민 19:9)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것 중 그 무엇이 우리를 지켜 줄 수 있겠는가?

이 침입자들이 하는 일이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 가를 보라(15절). "보라. 내가 한 나라를 원방에서, 너 이스라엘 족속에게로 오게 하리라." 하나님은 모든 나라들을 통솔하고 계시며, 그들을 모두 자기마음대로 다스린다는 것을 명심하자. 때로 하나님은 지상의 열방, 즉 이방 민족들로 이스라엘 족속에 대한 징계의 채찍으로 삼으신다. 이스라엘 족속이 "위선된 민족" 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보면 이 갈대아인의 나라는 멀리 있는 나라라고 했다. 그 나라는 "원방에서 온다." 그러므로 더욱 악랄할 것이요, 더 오래 체류할 것이다. 그래야 군인들이 그토록 오랜 행진을 한 보람을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나라는 멀리 있기 때문에 너희가 통상을 하지 않던 나라요, 따라서 한 푼의 동정도 기대할 수 없는 그런 나라이다." 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아주 엉뚱한 때와 곳에서 우리에게 걱정거리를 불러 올 수 있다.

그것은 "원방의 나라" 였다. 즉 아무런 경계도 않던 나라이다. 또 "오래된 나라" 이다. 그래서 자칭 태고의 나라임을 자부하고 있으므로, 더 거만하고 잔혹할 것이다. 그 나라는 "너희 나라 말을 알지 못하는 나라" 이다. 그들은 수리아 말을 한다. 당시의 유대 민족은 모르던 말이다(왕하 18:26 을 보라). 언어의 차이는 평화 조약을 더욱 곤란하게 만든다. 이 사실을 신명기 28장 49절의 경고와 비교해 보자. 이것은 그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 율법과 예언자들이 꼭 같기 때문이다.

그들은 경고를 충분히 받았다. "그들의 전통(화살통)은 열린 무덤이다." 즉 그들의 화살은 너무나 신속히, 아주 정확히 날아와서, 심한 상처를 줄 것이므로, 그들은 곧 죽음과 살륙을 들이마시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군사들은 모두가 "용사들" 이다(16절). 그 군사들은 그 성읍을 점령하고 나면, 닥치는 대로 죽여 버리고, 손닿은 모든 것은 자기들 것으로 간주해 버릴 것이다(17절).



(1) 그들은 온 나라를 약탈한다. 그들은 이 기름진 땅에서 나는 풍요한 산물로 자기들의 병사들을 먹일 뿐 아니라, 물리게까지 할 것이다. "그들은 (당시에는 그렇게 할 수도 있을텐데) 저장하지 않고, 네 자녀들이 먹을 그 밭의 추수 곡물과 집안의 네 떡을 먹으리라." 우리가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은 우리의 식구들을 위해서이다. 그리고 우리가 위해서 수고한 자녀들이 그것을 먹는 것을 보면 우리에게 위안이 된다. 그러나 우리의 귀여운 자녀들은 양식이 없어 죽어가는 판에, 나그네가 원수들이 와서 먹어치우고, 자기들의 창고에 우리 곡물을 쌓는 것을 본다는 것은 몹시 괴로운 일이다. 이것 역시 저 율법에 맞는 것이다(신 28:33). "그들이 네 양과 소를 먹을 것이니라. 그것은 너희가 그 소나 양으로 우상의 제물을 삼았기 때문이니라. 그들은 네 포도원과 무화과나무에 열매도 너를 위해 남겨 두지 않으리라" 고 되어 있다.

(2) 그들은 그 성민들을 굶겨 일 것이다. "그들이 견고한 성들을 파멸하리라" (가난이 독사처럼 다가오는 때에, 어떤 울타린들 가난을 막으랴?). "네가 의지하던 그 성읍들, 이 나라의 보호망이 되리라 믿었던 그 성읍도" 파멸하리라. 우리가 우리의 의지로 삼던 것을 하나님이 못쓰게 만드셨다면, 그것은 하나님으로서는 정당한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자.

그들은 성읍들을 "칼로" 멸망시킬 것이다. 즉 성읍들에서 오는 모든 식량을 차단시키고, 일체의 교역을 중단시킨다. 이것은 아무리 울타리가 잘된 성읍이라도 멸망시킬 수 있다.

Ⅲ. 그러나 아직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자비로운 동정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원수에게 파괴와 황폐를 명했지만, "진멸하지는" 말라고 했다(10절). 비록 그들이 대량 살륙을 할 것이지만, 그래도 살아 남을 자가 필경 있다. 그들이 무참한 약탈을 감행하겠지만, 뭔가 먹고 살 것이 남아 있게 된다. 하나님이 당면한 황폐에 대해서 nonobstante- 즉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18절). "비록 그 무서운 날에도, 내가 끝장을 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러하지 않는다면, 원수도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위해 자비를 예비해 주셨다. 따라서 이 황폐케 하는 심판에다 일정한 한도를 정하신 것이다. "여기까지만 오고, 더 이상은 안 되느니라."

Ⅳ. 그들에 대한 이러한 처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의로우심. 그가 그들을 끝장내지 않는 것은 그가 자비로운 분임을 보여 주는 것이듯, 거의 끝장을 내다시피 할 것이므로 그의 의로움 또한 나타나리라.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아무런 잘못도 행하지 않했다는 인정을 받으실 것이다(19절).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이 백성이 이러한 심판에 대해 건방진 이유를 불고 있다. 그들이 "말하리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였는가?' 우리가 그를 노엽게 했는가, 왜 그가 우리와 다투시는가?" 그런 죄악된 민족을 치는 행동에 이유가 충분히 밝혀져 있지 않았다는 식이다. 겸손하지 못한 자들은 자기들이 환난을 당하면 하나님이 부당하다고 비난하며, 그러한 환난에 대한 이유가 자기들의 이마에 씌어 있는 대로 마치 거기에 대한 이유를 찾아보아야 되겠다는 식으로 항의하기가 일쑤란 것을 잊지 말자.

2. 그러나 여기서 직접적인 이유가 나와 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대답할 말을 지시받고 있다. 하나님이 그 어느 때보다도 무서운 말씀을 하더라도, 일시 하나님은 "그가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그들이 하나님께 대해 취한 행동 때문에 그들에게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노라고 일러 주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원하면, 이 처벌 속에서 자기들의 죄과를 그들이 찾아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버렸다" 는 것을 잘 모르고 있는가?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버렸다는 것을 이상히 여기는가? 그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종종 "다른 신들을 섬겼는가" 를 잊어버렸는가? 더군다나 그 땅은 복된 땅이요, 줄거이 하나님을 섬겼더라면 풍성한 열매를 향유할 수 있었던 그런 땅이었는데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로 외국에서 "다른 사람들(외국인)을 섬기게" 만들었다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인가? 외국에서는 그들이 아무 것도 자기들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경고했던 그대로가 아닌가? (신 28:27, 48) 이방인들을 좋아하는 자들은 이방 나라로 가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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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게 대한 충고(예레미야 5:20-24)

죄에 대해 책망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한 선지자는 여기서 다른 임무를 부여받아서 그들에게 보냄을 받는다. 그는 이것을 유다에 공포해야 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설득시키기 위해서였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의 결여가 그들이 배반하게 된 이유였듯이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은 그들을 개선시키는 효과적 원리가 될 터였다.

Ⅰ. 선지자는 이 백성을 어떻게 다루면 좋을지 모르는 사람처럼 그들의 수치스런 우매성과 하나님을 배반하는 그들의 성황에 대해 호소하고 있다. 이런 호소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들의 이해력은 약화되어 신적 광선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은 우준하여 지각이 없는 백성이다. 하나님은 기록된 말씀이나 선지자나 섭리를 통해 자기 의사를 극히 간명하게 선포하셨지만 그들은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다(21절). 그들은 자기들이 만들어서 섬기든 우상과 같다(시 115:5, 6, 8). 누가 생각해도 그들은 진상을 알아 차리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실지로는 그렇지 못하였다. 그들은 지적인 능력과 기능을 소유하였지만 그런 이지적 능력을 활용하고 선용하지 못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은 모든 인근 주민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그들을 실망시켰다. 인방 사람들은 그들이 아주 우수한 지식의 도구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살펴 보곤 "이들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신 4:6)라고 결론을 내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실제에 있어서 우준하며 지각이 없는 백성이었다. 우리는 사람들이 향유하고 있는 이점과 기회를 가지고 그들을 판단할 수가 없다는 점을 명심하자. 광명의 땅에서도 어두운 속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있으며, 거룩한 땅에서조차 죄 중에 생활하는 자들이 있고, 극히 선한 자리에 앉아서 악을 행하는 자들도 있다는 데 주목하자.

2. 그들의 의지는 완강하여 신적 규례에 순종하기가 마땅치 않았다(23절). "이 백성은 배반하며 패역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할 때 이 백성이 우둔하여 지각이 없다고 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시 82:5 참조). 이해력을 매수하여 둔화시키고 어리둥절하게 하는 것은 의지의 부패한 편견이다. 보려고 하지 않는 자들처럼 눈먼 자는 없다. 이 백성의 품성은 하나님이 은혜로 변화시키기 전의 모든 자연인이 갖는 참 모습이다. 우리는 우둔하여 이해가 느리고 실수하기 쉬우며 잊어버리기 쉽다. 그러나 이 정도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이보다 더 나쁜 점이 우리에게 있다. 우리는 배반하고 패역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곧 세상적 마음이요 육욕적 마음이다. 이 마음은 하나님과 반목하며 그의 법에 순종하지 않는 마음이다. 그 마음은 선한 것에 대해 뿌리깊은 혐오감을 갖고 하나님을 배반할 뿐만 아니라 악한 것에 대해 강한 인력을 느껴 하나님께 패역하기도 하는 마음이다. 배반하는 사람은 패역하는 마음이란 점을 유의하자. 하나님께 대한 충성에서 후퇴하는 자들은 거기서 그치질 않고 죄와 사탄을 편들어서 하나님께 대항하는 병기를 들게 된다. 그들은 이미 배반하고 갔다. 배반하는 마음은 배반하는 생활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들은 이미 가서 행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읽을 수도 있다). "이후로는 그들이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창 11:6).

Ⅱ. 선지자는 이런 사태를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의 부족 때문이라고 못박는다. 그는 그들이 지각없는 자라고 관찰하면서 이렇게 반문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22절) 너희가 만일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단지 유지하고자 하기만 해도 너희는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더 잘 지킬 수 있으리라. 그리고 너희가 자신의 이익을 보다 잘 이해하려고 하기만 한다면 너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규칙의 지배 아래 있게 될 것이다." 그들이 이미 배반하고 갔다는 것을 관찰하면서 선지자는 그들이 배반하게 된 근거나 이유로서 24절 말씀을 추가시킨다. "그들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고 말하지도 아니한다." 그러므로 그토록 많은 악한 생각을 통해 악한 일로 급히 뛰어간다. 사실 우리 마음에 경외심을 넣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임에 틀림없지만 스스로 마음을 격려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외의 념을 불러 일으키기에 적당한 생각에 곰곰히 잠기는 것은 우리의 일이다. 이런 작업을 무시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현재처럼 경외심이 없으며 배반하기 쉽고 반역하기 쉽다.

Ⅲ. 우리는 여호와를 경외해야 하며 그의 크심을 두려워해야 한다(22절). 그는 우리의 경외심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가 그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이나 그를 시시한 분으로 놀리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인가? 자연계나 섭리의 세계에서 하나님은 자기의 전능신 능력과 지고하신 주권에 대해 명명백백하게 실증해 보이시는 분이 아닌가?" 이에 대한 실례야 무수히 나올 수 있지만 여기서는 한 가지 본보기가 제시된다. 하나님은 바다를 통제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조수는 굉장한 힘을 과시하면서 하루에 두번씩 넘나든다. 조수가 잠시 동안만이라도 계속 밀려든다면 온 세계가 물에 잠기게 될 것이다. 폭풍이 몰아치면 파도가 높이 일어나 거대한 힘과 노염으로 해변에 밀어닥친다. 그럼에도 바다의 조수나 파도는 한도를 지키며 물러갔다가 다시 돌아오며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않는다. 이것은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흔하진 않다고 하더라도 우리 눈에는 기이한 것이 될 것이다(시 118:23; 마 21:42). 그는 모래를 두어 바다에 한계를 삼으셨다. 그는 모래로써 어디까지 오며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 알 수 있게 하는 경계석을 삼으실 뿐만 아니라 바다를 멈추게 하는 제방 곧 담장을 삼기도 하셨다. 하나님이 원하실 때에는 모래 벽도 놋 성벽과 같은 효력을 나타내게 된다. 아니, 이것은 오히려 유순한 대답은 부드러운 모래 같아서 분노를 쉬게 하며 노도 같은 분노를 진정시킨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 선택된 말씀이라 할 수 있다. 과격한 대답은 단단한 바위 같아서 노를 격동시킬 뿐이며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쳐 내는 바닷물과 같다(사 57:20). 이 경계는 "영원한 법령" 즉 "태고적의" 율례로 말미암아 정해져 있다(혹자는 이렇게 읽는다).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육지와 바다를 나누고 그 사이에 경계를 만드신 천지 창조시까지 소급한다(창 1:9, 10). 이것은 시편(10:6 이하)과 욥기(38:8)에도 우아하게 묘사되어 있다. 아니면, 이것은 노아의 홍수때로 소급한다. 하나님은 그 때 다시는 세상을 물에 잠기게 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것이다(창 9:11). 우리는 이것을 영원한 법령이라고 번역한다(흠정역 성서는 그렇게 읽음). 그것은 "끊이지 않는 영원한 법" 이다. 그 법은 오늘날까지 줄곧 효력을 발생해 왔으며 밤과 낮이 끝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바닷물이 지나치지 못하여 통과하지 못한다는 것은 "영원한 철칙" 이다. 안정치 못하고 요동할 때의 바다처럼(사 57:20) 파도가 흉용하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마치 자기를 견제하는 데 화가 나기라도 한 듯이 노하여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 이제 이것은 우리가 왜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지 그 좋은 이유가 된다.



(1)우리는 이로써 그가 전능한 능력과 우주적 주권을 소유하신 하나님이시며 따라서 두려워하고 경외해야 할 분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이것은 하나님이 다시 세계를 물에 잠기게 하기란 손바닥을 뒤집기보다 쉽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우리는 계속 하나님의 처분하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맺는 일을 여간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바다의 거친 파도조차 하나님의 법을 준수하며 그의 꾸짖으심에 물러나는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을쏜가? 바다조차 배반하지 않으며 패역하지 않는 터에 어찌하여 우리 마음은 배반하고 패역하는가?

2. 우리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인자하심을 두려워해야 한다(호 3:5). 전자와 마찬가지로 이 일에 대한 사례를 하나님의 일반 섭리로부터 들춰지고 있다(24절).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해야 한다. 우리는 그를 경배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 하며 우리가 항상 그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도록 배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에게 선을 베풀고 계시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신다. 이른 비는 파종기가 조금 지나면 주시고 늦은 비는 추수 조금 전에 주시며 이 두 가지를 때에 맞춰서 내려 주신다. 이렇게 하여 그는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해 주신다. 추수 기한은 주(주)로 계산된다. 왜냐하면 일 년 먹을 양식을 넉넉히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추수 기한은 심음과 거둠이 결코 쉬지 아니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창 8:22)에 의해 우리에게 지정되어 있다. 이 약속을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추수기간은 우리에게 정해져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추수기간을 놓치게 될 것이며 추수에 미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추수의 고마움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인식하고 그에게 감사를 고백해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는 데 대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 의지할 필요성을 갖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그의 사랑 안에 묶어 둘 수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결실을 맺는 계절은 이방 세계에 대해서조차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었으며(행 14:17) 하나님을 경시하는 자로 변명의 여지가 없게 하기에 충분한 증언과 설명을 받고도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았다. 우리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하다는 게 밝히 드러나는 데도 경의하지 않는 것이다.

 

5:21 없음.

 

5:22 없음.

 

5:23 없음.

 

5:24 없음.

 

5:25

타락된 세상 (예레미야 5:25-31)

Ⅰ. 예레미야 선지는 저희가 죄악으로 말미암아 어떤 해를 입게 되었는지 제시해 주고 있다. 그들은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다:(25절). 즉 "때를 따라" 내리던 "이른 비와 늦은 비" 가 늦게까지 오지 않게 되자(3:3) 정해진 추수기간에 때때로 실망을 맛보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좋은 것을 쾌히 주시려고 하실 때 그것을 막는 것은 바로 너희의 죄이다."

우리에게로 향한 하나님의 은총의 흐름을 막고 우리가 늘 받곤 하던 축복을 빼앗아가 버리는 것은 바로 우리의 죄이다. 하늘을 놋과 같이, 땅을 쇠와 같이 만드는 것도 바로 죄다.

Ⅱ. 그는 저희의 죄가 얼마나 크며 얼마나 극악하며 도발적인지를 그들에게 설명한다. 그들이 참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유기하였을 때는 심지어 도덕적 정직성마저 자취를 감추고 말았을 것이다. "내 백성 중에 악인이 있어서" (26절). 일부 백성은 극악한 무리였다. 더욱이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 악함은 가증된다고 할 것이다.

1. 그들은 악의와 원한에 찬자들이었다. 행악을 기쁨으로 삼는 자들은 악인이라 불러 마땅한데 이들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저희 악행의 현장에서 "발견되었다" (즉 잡혔다: 원문에는 발견되었다는 뜻으로 되어있다). 사냥꾼이나 새잡이가 포획물을 잡으려고 올무를 치듯, 이들은 "사람을 잡기 위해 매목" 하였고 이런 일을 오락으로 삼았으며 마치 맹수나 새를 덫으로 잡은 것처럼 즐거워하였다. 그들은 선량한 사람들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였다(그들이 선한자들을 증오하는 것은 바로 저들의 선함 때문이다). 특히 저희 증오의 대상은 신실하게 자기들을 책망해 준 자들이었다(사 29:21). 그밖에도 출세에 방해가 되는 자나 모욕이나 불친절한 행동을 한 것으로 생각되는 자나 재산이 탐나서 나봇을 함정에 빠뜨렸었다. 아니, 이들은 결국 악자체를 위해 악을 저지르는 것이다.

2. 그들은 거짓되며 패역하다(27절). "조롱" 이나 새장에 "새들이 가득하고" 또 그들을 살찌울 모이가 가득하듯 "저희 집에는 속임이 가득" 하며 사기 행위로 얻은 재물이나 속이는 기술과 방법으로 가득 차 있다. 저희 가족이 종사하는 모든 생업은 사술로 운영된다. 누가 거래하러 오든지간에 그들은 그를 속이려 든다. 말과 행동을 예사로 하는 자들이라 쉽사리 속인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행위가 심히 악하여" 악인의 행위를 능가한다고 할 수 있다(28절). 법과 공평이란 허울 좋은 간판을 내걸고 사기 행위를 자행하는 자들은 아마 공공연한 완력과 폭력으로 자기들 앞에 있는 모든 것을 제거하는 악인(26절)보다 더 많은 악을 행하는 자들일 것이다. 또는 이들은 이교도, 아니 이교도 중 가장 악한 자보다 더 악하다. 그럼에도 이들은 그런 악한 행로를 걷는 가운데 번영을 구가하게 된다. 이 때문에 저희 마음은 더욱더 완악해진다. 그들이 세상을 탐하는 것은 이가 자기들에게 쏟아져 들어온다고 깨닫는 때문이며 그들이 어떤 악행도 서슴치 않고 행하는 것은 악이 자기들의 번창에 방해가 되기는 커녕 오히려 촉진제가 된다고 느낀 때문이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하옇든 그들은 세상에서 창대하게 되었고 거부가 되었으며 악으로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그들은 육신의 모든 욕망을 채울 만한 수단이 구비되어 있으며 또 그 욕욕에 아주 탐닉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안일한 삶과 온갖 관능의 즐거움에 침잠함으로 인하여 "살찌고 윤택" 하게 되었다. 그들은 말쑥하고 매끈하여 아름답고 즐겁게 보인다. 그래서 모두가 찬탄을 금치 못한다. 그리고 그들은 "악한 일을 지나쳐 버린다" (그 다음의 "행위가 심히 악하여" 란 부분의 원뜻은 "악인의 행위를 능가한다" 는 뜻인데 이렇게 해독하는 자도 있다). 즉 그들의 죄악을 보면 누구나 재앙이 그들에게 밀할 것으로 예상하지만 정작 그런 악한 재앙을 모면한다는 말이다. "저희는 타인과 같은 고난도 없다" (시 73:6). 하물며 악인에게 의당 의할 것으로 예상하는 재앙은 더 더구나 없다.

3. 이들이 큰 자가 되어 수중에 권세를 장악하게 될 때도 당연히 행하여야 할 선을 행하지 아니하였다(28절 하반절). 고아는 흔히 궁핍하며 항상 도움과 충고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그들의 어찌할 수 없는 형편을 기화로 피해를 피하려고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때 세력이 크고 부유한 자 외에 누가 그들을 구조하겠는가? 재물로 선을 행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그 부를 무엇 때문에 소유하고 있는가? 그럼에도 이들은 그와 같이 곤란을 당하고 있는 자들의 경우를 인지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정의감이나 피해자에게 대한 측은지심 따위는 그다지 품고 있지도 않았다. 아니, 그들이 이런 재판에 관여하게 된 경우에는 올바로 행치 않는다는 것보다 악을 행한 자들을 비호한다는 데 더 큰 문제점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형통하며 이익을 얻는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어리석음을 베풀지 아니하신다. 그렇다면 확실히 이 세상의 것들은 최상의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극히 악한 자가 이 세상 것의 대다수를 점유하는 경우가 흔한 까닭이다. 그러나 악인이 점점 잘되어 간다고 하나님이 악인의 행위를 용인하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비록 저희의 악한 일에 대한 심판이 속히 실시되지는 않더라도 반드시 집행 될 것이기 때문이다.

4. 계급과 신분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전반적으로 타락하였다(30, 31절).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라." 그토록 특권을 누리고 진보하였던 백성의 퇴보는 괴이한 일이었으며 보는 이마다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도대체 그들이 어떻게 하여 그 많은 은혜를 저버릴 수 있었을까? 그것은 두려운 일이며 혐오해야 할 일이었고 그 결과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우리는 죄를 생각만 해도 간담이 서늘하게 되기 위하여 그것을 두려운 것이라고 부르자. 그러면 무엇이 문제였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요컨대 문제는 다음 두 가지였다.

(1) 지도자들이 민중을 오도했다는 점.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음부의 대리인이면서 하늘로부터 위탁을 받은 양 명령을 위조하였다. 종교의 세계에 있어서 신적 계시를 받았다는 미명하에 자행되는 공격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 행사하라고 권세를 위임받아 있던 제사장들은 왜 이 거짓 선지자들의 발호를 저지하지 않았던가? 슬프게도 제사장들은 이런 직분을 충실히 이행하기는 고사하고 권세를 자기 야심과 전횡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거짓 예언자들의 도움과 또 그들이 민중 가운데 떨치고 있는 세력을 이용하여 자기들의 위세와 재물, 게으름과 사치, 그리고 가렴주구와 압제를 호도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거짓 예언자와 제사장들은 모든 선한 것에 대항하여 짝패를 이루고 있었으며 악을 행함에 있어 서로의 손을 강화시켜 주고 있었던 것이다.

(2) 백성도 그렇게 오도되는 것을 아주 만족해하고 있었다는 점.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그들은 내 백성이니 마땅히 나를 위해 궐기하여 저희 제사장과 선지자의 악함을 쳐서 증거해야 할터이나 그들은 그것을 좋게 여긴다" 고 하신다.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백성을 죄 중에 방치해 둔다면 그들의 범죄는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게 될 것이다. 그들은 헐거운 고삐로 어거됨을 좋아하며 자기들의 욕정을 억제하지 않는 통치자와 책망하지 않는 교사들을 매우 좋아하고 있는 것이다.

Ⅲ. 예레미야 선지는 이런 일의 결과가 필연코 매우 치명적일 것임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가 저들에게 주위를 환기시키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그들의 악에 대한 셈은 어떻게 될 것인가?(29절). "내가 이 일들을 인하여 벌하지 않겠느냐?" 이 말씀은 9절에도 나왔던 말씀이다. 자비는 때때로 공의를 누르고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하시면서 즐거워하지만 여기서는 공의가 "내가 벌하지 아니하겠느냐?" 고 자비를 설득하고 있다. 방법을 알고 계신 줄로 확신한다. 본문의 표현 양식은 매우 강조적인데 이는 다음 사실을 의미한다.

(1) 하나님의 심판의 확실성과 필요성. "내 마음이 복수하지 않겠느냐?"

물론 의심할 나위도 없이 복수는 임할 것이며 죄인이 회개치 않는다면 복수가 임해야 한다.



(2) 하나님의 심판의 공의성과 형평성. "그와 같이 가증한 죄를 범한 자들은 벌을 받아 마땅하지 않겠느냐? 내가 이 같은 나라에, 이와 같이 악하고 패역한 민족에게 복수하지 않겠느냐?" 고 하나님은 죄인의 양심에게 호소하신다.

2. 저희 악의 직접적인 추세는 무엇인가?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즉 이 물음은 다음 두 가지를 뜻한다.

(1) "너희는 종당 악의 절정에까지 이르려고 하는 게 아니냐! 너희는 어찌 하려느냐? 너희는 야비하고 악한 일을 행하려고 하는게 아니냐? 이렇게 하다 보면 어떻게 되겠느냐? 너희는 반드시 점점 더 악해져서 너희 불의의 그릇을 가득 채우게 되리라."

(2) "너희는 결국 멸망의 구덩이에까지 내려가려고 하는 게 아니냐! 사태가 이런 식으로 진전된다면 너희로부터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죄악의 홍수뿐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진노의 홍수밖에 더 기대할 수 있겠느냐! 이렇게 될 때 너희는 어찌 하려느냐?

악한 길로 행하는 자들은 자기의 길이 보다 큰 죄와 보다 완전한 파멸로 향하고 있다는 경향성을 참작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종말은 올 것이다. 악한 생애도 모든 생명을 호출하게 되는 때 그 종말을 맞게 될 것이며 그 결국이 쓰라릴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5:26 없음.

 

5:27 없음.

 

5:28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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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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