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4:1

내게로 돌아오라 (예레미야 4:1,2)

하나님이 배역한 이스라엘을 불렀을 때(3:22), 그들은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라고 즉시 대답하였다. 이제 여기서 하나님은 이 대답을 주목하시고, 그것에 응답하시는 형식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Ⅰ.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떻게 선한 결심을 추구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지시하신다. "나는 돌아가겠읍니다라고 너는 말하는가?"

1. "그렇다면, 너는 나에게로 돌아와야 한다. 즉 철저히 행하라. 단지 우상 숭배만 돌이키지 말고, 이스라엘의 하니님께서 정하신 예배로 돌아오라. "혹은 "너희는 지체하지 말고 신속히 돌이키라(사 21:12 에서 "네가 물으려거든 물으라" 함고 같이). 만일 너희가 나에게 돌이키고자 한다면 돌이키라. 그것에 관하여 말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하라" 는 것이다.

2. 그렇다면, 너희는 모든 죄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상 숭배의 잔재물까지도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라." 즉 모든 곳에서(그 어느 곳이나 하나님의 눈 아래 있다), 특히 성전에서, 즉 특별한 관심으로 보시는 하나님 집에서 깨끗함을 보여야 한다. 이것은, 우상 숭배는 하나님의 눈에 숨길 수 없이 명백하며, 혐오스러운 것임을 말한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목전에 두고는 견딜 수 없는 가증스러운 것들이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은 그의 목전에서 제하여 버려야 한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안 앞에서 그를 노엽게 하는 것들이다. 죄는 심중으로부터 제거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이면 하나님의 눈 앞에서 제하여진 것이 아니다. 인간의 심중과 그 안에 있는 모든 하나님 눈 앞에서는 밝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3. 그들이 다시 죄로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 흑자는 "마음이 요동치 아니하며" 라는 말씀을 "이동하지 말라" 란 말로 이해하여, 방황하거나 옮기지 말라고 해석한다.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마음이 방황치 아니하면, 모든 것이 복음 받게 될 것이다."

4. 그들은 하나님의 성호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야 한다(2절). "너희는 여호와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라, 그의 현존하심이 너희에게 가장 신성한 사실이 되어야 하며, 그 무엇보다도 확실한 것이 될 수 있어야 하고, 그의 판단은 너희가 호소할 수 있는 그 무엇보다도 최고의 법정이며, 가장 두려운 것이 되어야 한다."

맹세한다는 것은 종교적 예배의 한행위로서, 우리는 이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세 가지로 영광 돌릴 수 있다.



(1) 우리는 오직 참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만 맹세해야 되고, 다른 피조물들이나 어떤 거짓 신들을 통해서도 맹세해서는 안 된다. 즉 귀먹고 벙이리 되고 죽은 신들에 의해서가 아니요,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다. 스바냐 1장 5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또 맹세하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만 해야 한다.

(2) 우리는 "진리와 의 안에서" 참된 것으로만 서약해야 된다. 감히 거짓된 것을 고집하거나 미심쩍은 것을 확실한 것으로 주장하거나, 이행할 의사가 없는 것을 약속하거나, 자신이 서약한 것을 파기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참되지 못한 것을 말하는 것이나 서약한 것을 파기하는 것은 더 악한 일이다.

(3) 우리는 맹세를 경건히 해야 하되, "재판 때에," 즉 법적으로 부름받았을 때 해야 하며, 일반대화에서는 하면 안 된다. 신실성이 없는 맹세는 경건한 맹세가 영광이 되는 만큼 또한 큰 하나님의 성호에 모독이 되기도 한다(신 10:20; 마 5:34, 37).

Ⅱ. 그는 그들에게 선한 마음을 견지하고, 결심을 굴게 가지라고 고무하고 있다. 만일 흩어진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면,

1. 그들은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즉 너희는 옛 약속과 같이 포로에서 너희 땅으로 돌아오게 되리라" (신 4:29; 30:2). 혹은 그때는 내 안에서 쉼을 얻게 될 것이며, 비록 너희가 포로된 땅에 있는 동안이라도 너희는 평안히 돌아오게 될 것이다."

2. 그들은 타인들에게 축복이 될 것이다. 그들이 하니님께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분에게로 돌아오게 하는 수단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너희가 살아계신 여호와를 인정한다면 그것을 통하여 여러 민족들에게 영향을 주어 너희로 하여금, 그들에게도 복을 받게 할 것이며, 여호와의 은총을 받게 하여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복되게 된다는 것을 생각나게 할 수 있게 될 것이다(사 45:16). 그들은 "진리의 하나님 안에서" 축복을 받게 되지 거짓 신들에게는 축복을 받지 못하며, 그들이 하나님과 연합함으로써 명예와 만족을 얻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기들의 영광으로 삼아야 하며, 기쁘시게 해야 한다. 아니 자랑해야 하며, 축복받은 자신들을 통해, 그들이 행한 돌이킴을 자랑하게 될 것이다. 죄를 떠나 하나님께로 돌이킨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 일을 주저함이 있을지라도, 일단 떠난 다음에는 긍지를 가지게 될 것이다.

 

4:2 없음.

 

4:3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예레미야 4:3,4)

이 예언자는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설교를 자기가 살고 있던 땅 사람들에게로 돌이키고 있다. 우리는 그가 "북쪽을 향하여," 그들이 지금은 포로되어 있고, 하나님의 손에서 비천한 상태에 있으나, 그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선포한 메시지가 무엇인지 들었다(3:12). 이제 회개하고 깨달음으로써 번영을 누리고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 에게 그가 무엇을 말했는지 보자. 이 두 구절에서 우리는 그들 위에 내리기로 예비된 파멸의 심판을 막는 길은, 오직 죄악의 길을 떠나는 것밖에 없다고 하는 회개와 개혁을 경고하고 있다.

다음의 사실을 관찰해 보자.

Ⅰ. 그들이 이행해야 할 의무들.

1. 그들은 자기들의 토지에서 좋은 것을 기대하고 땅을 경작하는 것과 같이 자기들의 심령을 갈아야 한다(3절). "너희 묵은 땅을 갈고, 즉 너희 스스로를 경작하고(너희 밭을 파서 뒤지라), 가시덩굴속을 파종하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의 평안과 복리를 위해서라도 가시덩굴 속에 파종하는 자들과 같은 헛된 수고를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너희 스스로를 하나님의 자비를 받기에 합당하게 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방해하는 모든 것은 제거하라. 그리하면 자비를 기대할 수 있고 번영을 바랄 수 있으리라."

(1) 회개하지 않고 겸손하지 못한 마음은 묵은 과 같고, 경작되지 못한 땅과 같으며, 아무 곡식도 심겨지지 아니한 버려둔 땅과 같다. 그러나 그것은 이용할 수 있는 땅이다. 그것은 우리의 땅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맡겨진 것이고, 우리가 책임져야 할 땅이다. 그러나 그것은 묵은 땅이다. 울타리가 없고 아무렇게나 버려진 땅이다. 그것은 수확이 없고 주인에게 아무런 유익도 없는 밭이다(그것은 당연히 그렇게 되겠지만). 부패한 심정에는 자연적으로 돋아나는 가시덤불과 잡초가 자랄 뿐이다. 그래서 만일 그 땅이 은혜의 단비와 햇빛으로 새로와지지 않는다면, 비려지게 될 것이다(히 6:7, 8).

(2) 우리는 이 묵은 땅을 경작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

자신의 마음을 은밀히 살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게" (경작할 때와 같이)해야 한다(히 4:12).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찢어야 한다" (욜 2:12). 우리는 가시떨기와 같이 우리의 수고와 기대를 질식시키는 부패한 뿌리들을 깡그리 뜯어내어야 한다(호 10:12).

2. 그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 육체에 행했던 할례를 마음에도 해야 한다(4절).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라. 즉 육체를 잘라내는 것같이 육체의 정욕도 잘라내라. 마음에 심간 도를 온유함으로 받는 것(약 1:12)을 방해하는 넘치는 악을 제거하라. 육체의 할례를 자랑하거나 의지하려 말라. 그것은 하나의 표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 내용을 가지지 못한다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헌신의 징표이다. 할례를 행할 때 고백했던 그러한 진실함을 가지고 너희 자신을 여호와께 바쳐라. 그리하여 하나님께 선택된 백성이 되게 하라. 할례는 율법을 행해야 할 의무를 말하는 것이며, 너희 자신을 그 책임 아래 언제나 새롭게 두는 것이다. 그것은 의로운 믿음의 인장(印章)이다. 그러므로 그 의로움을 지속케 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여호와 앞에 참된 할례가 될 것이다."

Ⅱ. 그들이 위협을 받고 있으며, 또한 피하고자 하는자 하는 위험. 회개하고 돌이키라. "그렇지 아니하면,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라." 여호와로부터 내려온 불이 희생 제물을 태우고 제단 위에 탈때 아무도 그것을 끌 수 없음과 같이, 소멸할 불이 지금 준비되어 있으며 회개하지 아니하는 죄인을 향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이와 같을 것인즉, 그것은 그들이 행한 악 때문이란 것이다.

1.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더 큰 위협은 하나님의 진노라는 것을 주목하자. 왜냐하면 그것은 현재의 모든 비극의 쓰라림과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2.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게 하는 것은, 우리 행위의 악함이란 사실을 주목하자.

3. 이 진노로 우리가 당하여 멸망될 절박한 위험에 대한 사려가 우리로 하여금 모든 가능한 관심을 기울여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거룩케 하고,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될 것을 바라도록 각성케 해야 한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4:4 없음.

 

4:5

심판에 대한 경고(예레미야 4:5-18)

하나님의 일반적인 방법은, 때리시기 전에 경고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외세의 침략으로 말미암이 그들에게 곧 임할 전체적인 파멸에 관하여 유대인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이 소식은 유다의 모든 성읍들과 예루살렘의 모든 거리마다 선포되고 발표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듣고 두려워하여, 이 큰 경고로 말미암아 회개하든지 핑계치 못하게 하려 함이다. 이 재난의 예언이 여기에는 대단히 자세히 기록되어 있고, 생생한 표현으로 되어 있다. 그리하여 가장 어리석은 자들까지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Ⅰ. 전쟁은 선포되었고, 원수의 내침이 널리 전하여졌다. 그것이 이제 발표되었지만, 사실은 몇 년 전에 이미 이 예언자로 말미암아 선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시당했기 때문에 심판이 현실적으로 닥친 후에야, 다른 방법으로 발표되었다(5,6절). "나팔을 불고," "기호를 세우고," "모든 백성이 "모여서" "수온성을" 지키거나 혹은 그 성으로 말미암아 보호받기를 바라도록 하는 소환령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군대 소집령이 내리고, 모든 군대가 점호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 힘있는 사람들과 싸움에 나가기에 합당한 자들은 도성들을 방어하고 또한 수비하기 위해, 전선에 나가야 할 것이고, 유약한 자들과 준비가 덜 된 자들은 그들의 힘을 보태지도 못할 뿐 아니라, 지체하지 말고 도피해야 할 것이다.

Ⅱ. 바벨론 왕과 그의 군대들이 쳐들어온다는 급한 전갈이 왔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북방에서 끌어오리라" (1:15) 했던 그 재앙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유대 민족이 당해 보지 못한 "큰 파멸" 을 가져올 것이다.

그 원수들이 본문에서는 이렇게 비유되어 있다. 즉

1. 배가 고파서 먹이를 찾으려고 "숲에서 나온사자" 로 비유되었다(7절). (흑자들의 말대로) 절망적인 짐승들은 사자의 부르짓는 소리가 너무나 무서워서 도망도 못가고 쉽게 먹이가 되고 만다. 느부갓네살 왕이 바로 이 "울부짓는 사자" 이며, 열방을 멸하는 자" 이다. 그는 이미 많은 나라들을 황폐케 했지만, 다시 전속력으로 유다를 치러 오고 있는 "도중이다." "이방을 멸망케 하는 자" 역시 "유대민족을 멸망케 하는 자" 가 될 것이니, 이는 유대인들도 이방인들의 우상 숭배를 모방함으로써 자신들을 이방안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미 그의 처소, 곧 이 땅을 치기 위해 병력을 집결했던 집결지 바벨론은 떠났도다. 이제 그는 먹이를 눈 앞에 두고 있으니, 먹이를 약탈할 뿐 아니라, 황폐케 할 것이요, 그의 작전은 적중하여 그성에 거민들이 없도록끔 그 성이 폐허가 되며, 들과 밭이 돌로 뒤덮일 것이다(이렇게 읽을 수도 있다)."

2. "뜨거운" "폭풍" 에다 비유했다(11절). 질주해 오는 바람이요, 식물을 말려 버리는 바람이다. 땅의 열매를 결단내며, 말린다. 비를 가져오는 바람이 아니라, "북방에서 온" 바람이니, "비를 걷어가는" 바람이요(잠 25:23). 비대신 아주 못된 것을 가져오는 바람이다. 이제 이런 재앙이 북방에서부터 이 민족, 유대에게 미친다. 즉 만물을 얼어붙게 하는 "검은" 바람이 온다. 아무도 그 바람을 막거나 피할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이 어디로 가든 바람이 그들을 따라 잡을 것이다. 그들은 바람이 닥쳐왔을 때야 비로소 그 바람을 느낄 것이다.

그 바람은 "광야, 혹은 평지에 있는 산당(한글 성경과는 다름-역주)에서 불어온 바람" 이다. 그 바람은 작은 산들의 정수리를 치며, 평지에 있는 모든 것들을 친다. 평지에는 아무런 피신처도 없다. 게다가 온 땅(지표)이 합세하여 싸운다.

그 바람은 전력을 다해서 "내 열 백성에게로" 불어온다. 그런데 그 백성은 지금까지 너무 귀엽게 자라왔기 때문에 그런 바람을 견딜수가 없다. 이제 이 광풍이 그들에게 몰아치리니, 그것은 그들을 "정결케 하거나," "키질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바람은 곡식을 키질할 때 이용하는 그런 순한 바람이 아니라 "강한 바람" 이다(12절).

이 바람이 "내게로" 온다. 그러나 오히려 "나를 위하여" 온다. 그 바람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비심을 싣고 올 것이요, 바람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흑자는 "강한 바람이 그의 말씀을 이루는도다" 라고 했다.

3. 그 속도가 아주 빠르기 때문에 구름과 회오리바람에 비유되었다(13절). 갈대아 군대가 바람에 몰려오는 "구름같이 올라오리라." 그들은 구름같이 빽빽히 운집해 있고, 구름같이 빨리 행진하며, 그들을 막으려는 모든 수단은 무위로 돌아갈 것이요, 마치 구름을 잡으며 회오리바람을 저지하려는 것같이 될 것이다. 그들의 말은 먹이를 잡으려고 날아가는 "독수리보다 빠르다." 그들을 막으려하거나 전복시키려는 생각은 무익한 것이다.

4. 들(밭)을 지키는 자들에다 비유되었다(15-17절). "단, 곧 가나안의 제 성읍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는 성읍에서 소리가 선포된다." 그래서 "북에서 오는 이 재앙" 에 대한 소식을 제일 먼저 듣고는 급히 유대 인근의 이스라엘 땅인 에브라임 산에 전달한다. 악사천리(惡事千里)로다. 한편 돌이키기를 싫어하는, 뉘우칠 줄 모르는 민족이야 불길한 소식밖에 들을 게 없는 법이다. 그러면 그 소식의 내용은 무엇인가? "열방에 고하라. 열 지파의 성읍에 현재 거주하고 있는 저 잡종 제 민족들에게 고하라. 그들은 거기서 안전을 꿈꾸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소식을 예루살렘을 향해 포고하라. 그 곳이 바로 목표점이로다. 그들에게 먼 땅에서부터 지키던 (경계하던) 자들이 왔음을, 곧 깨어서 온갖 행악의 기회를 엿보던 자들, 군인들이 왔음을 알게 하라." "그들은 전속력으로 질주해 오고 있다. 오면서 유다의 제 성읍들을 공격하는 함성을 지르고 있다. 그들은 그 지역을 탐색하여 자기들의 소유지로 삼으려 하고 있다. 그들은 승리에 대한 확으로 가득 차 큰 소리를 치면서 공격해 오고 있다. 들을 지키는 자들이 들을 에워싸고 지키고 있듯이, 그들은 유다의 성읍들을 애워싸고, 완전히 장악하고 있으니, 마침내는 모든 성읍들이 무조건 항복을 하리라, 즉 그들은 유다를 둘러싸 사방에서 공격을 가한다(눅 19:43)." 이전에는 천사들, 곧 "저 지키는 자들" 과 "거룩한 자들" 이 "들이 지키는 자들" 처럼 예루살렘을 지키면서 그 성읍에 아무런 피해가 없도록 경계하고 있었으나, 이제는 그들의 원수들이 "들을 지키는 자들" 처럼 예루살렘을 애워싸고 아무도 그들을 구조하려 들어가지 못하게 지킨다.

Ⅲ. 이 심판을 애통해 해야 할 만한 이유를 찾아보자. 어찌하여 유다와 예루살렘이 이렇듯 황폐한 지경을 당하도록 버림을 받았는가? 그 이유를 보자.

1. 그들은 여호와께 대해 죄를 지었다. 그 재앙은 전적으로 그들 탓이다. "그가 나를 향하여 거역한 연고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7절).

그들의 원수들이 들을 지키는 자들처럼 그들을 애워쌌다. 이것은 그들이 군대를 모아 자기들의 정당한 주 여호와와 그의 주권에 도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폭도들처럼 사로잡히고 만 것이다. 갈대아 사람들이 그들을 침입했다. 그들이 쳐들어오도록 문을 열어 준 것은 바로 죄였다. "네 길과 네 행사가 이 일을 부르게 하였느니라" (18절). 네 악한 길과 선하지 못한 행실 때문이니라.

이러한 불행을 초래한 것은 그들의 어떤 실수, 한두 발자국의 잘못이 아니다. 그들의 생활 방식과 과정이 전체로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죄가 온갖 재난의 장본인이 됨을 주목하자. 죄를 향해 나아가는 자들은, 자기들이 한 손으로는 불행을 경계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다른 한 손은 바로 자기들의 머리 위에 불행을 쏟아 붓는다.

2. 그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노하셨다. 갈대아인들을 그렇게 광포하게 만든 것은 바로 "여호와의 맹렬한 분노" 이다. 그 맹렬한 분노가 우리를 향해 불붙었는데, "아직 우리에게서 돌아서지 아니했다" (8절).

사람들이 우리에게 분노하고 폭력을 가할 때,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분노와 전능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만일 하나님의 분노가 우리에게서 돌아섰다면, 우리는 원수들도 우리를 대적해 오지 못할 것이다.

3. 하나님은 그의 의롭고 거룩한 분노를 통해서, 이 두려운 벌을 선고하셨다. "이제 내가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리라" (12절). 그것은 실행되었다. 그러나 황급히 된 것이 아니라 엄숙히 선고된 선고에 따라서, 공정의 원리에 따라서, 그리고 충분한 심사숙고 끝에 실현된 것이다.

어떤 자들은 이렇게 해석한다. "이제 내가 그들을 처형하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내려진 선고에 따라서, 그리고 진실에 따라서 되는 심판임을 "확신한다."

Ⅳ. 이 소식이 처음으로 경고되었을 때, 그 심판이 준 비극적인 결과.

1. 마땅히 싸워야 될 사람들은 실망한 나머지, 원수들을 대적할 엄두도 못낸다(8절). "이를 인하여 너희는 베옷을 입고 애곡하라." 즉 "너는 그렇게 할 것이다. 그 소리가 전국을 휘몰아칠 때, 슬프도다.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에 빠지고 당혹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검을 차는 대신에 베옷을 두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서로 격려하여 용기를 복돋우는 대신, 슬퍼하며 서로의 의기를 저하시킬 것이다. 적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그들은 이미 모두 항복하고, 화로다, 우리가 멸망하게 되었도다고 소리칠 것이다(13절). 우리는 모두 망했도다. 약탈자들이 분명히 승리하리니, 그들을 저지하려 해 봤자 허사로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용감한 사람들이 있음으로써 유명했었다. 그러나 죄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가 보라. 죄가 사람들로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용기를 빼앗아 버린 것이다.

2. 공공의 안전을 강구해야 할 요인들이 그 지혜의 종말을 맞게 될 것이다(9절). "그날에 왕의 마음이 사라질 것이다." 즉 지혜와 용기를 잃은 것이다. 성공할 가망이 없음을 알자, 왕이 아무런 방도도강구하지 못하게 되고, 설사 그럴 생각을 한다 하더라도 뭘해야 좋을지 모르게 된다. 그리고 그를 보좌하고 지원해야 할 방백들과 고문들이 역시 그와 같이 당혹하고 실망할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가 멸망을 작정하신 민족을 얼마나 쉽사리, 그리고 얼마나 실질적으로 패망케 하는가! 단지 그들의 주요 인사들의 "마음을 빼앗음" 으로써 그들의 용기를 저하시키기만 하면 된다(욥 12:20, 24). 또 "그들의 방백들의 사기를 꺾기" 만 하면 된다(시 76:12).

제사장들의 임무를 전시에 그 백성을 격려해 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두려워 말라. 네 마음을 약하게 하지 말라" 고 권고해야 했다(신 20:2, 3). 그들은 나팔을 불어서, 전쟁의 날에 그들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기억된다" 는 사실을 확신시켜야 한다(민 10:9). 그러나 이제 "제사장들" 자신도 "겁을 집어먹고," 자기들의 직무를 수행할 엄두로 못내며, 백성들의 용기를 돋우는 일도 못하게 된다.

" 예언자들," 특히 그들에게 "평화" 를 소리치던 거짓 이야기해 주던 바로 그 검에 의해서 자기들의 피가 흘려지게 되었음을 알고는 누구보다도 더욱 두려워하리라.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면, 지금까지는 가장 안심하던 자들이 가장 크게 두려워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우리 주께서는, 예루살렘이 멸망될 때 "사람들의 마음이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된다" 는 것을 예고했다(눅 21:26). 그리고 사람들을 속여서 속된 방심을 빠지게 아첨했던 자들은 곤경이 오면 결국 그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고 좌절케 한다는 것은 통상 있는 일이다.

Ⅴ. 이 백성이 속았다고 항의하는 예언자의 원망(10절). 그 표현이 아주 이상하다. 우리의 성경은 이렇게 되어 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이 백성을 크게 속였나이다. 이르기를 너희에게 평안이 있으라 하였나이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은 아무도 속이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누구든 "시험을 받거든" 즉 유혹을 받거든, 하나님이 자기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하지 말라." 오히려,

1. 이 백성이 하나님의 일반적인 약속 때문에 스스로 속은 것이다. 하나님이 그 민족에게 은혜를 베풀겠다는 일반적인 약속과 그들에게 존귀한 특전을 주시겠다고 한 약속이다. 그들에게 이 약속이 실현되고, 그 특전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그들이 그 약속에 따른 조건을 이행해야 했으나, 그들은 거기에 무관심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 약속과는 반대로 그들에 주어진 율법 속의 경고에 대해서도 그들은 관심을 쏟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을 속였고, 그러자 즉시 하나님이 자기들을 속였다고 불평했던 것이다.

2. 거짓 예언자들은 평화를 약속함으로써 그들을 속인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말을 했다(23:17; 27:9). 정말로 하나님이 그들을 보내셨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끝내 속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보내지 않았다. 그들을 믿은 것은 그 백성들의 잘못이다. 이 점에서 그들은 또 한 번 자신들을 속인 것이다.

3. 하나님이 거짓 예언자들에게 속이는 것을 허락하셨다. 그리고 그 백성이 그들에게 기만당하도록 허락하셨다. "진리를 사랑하여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그들을 벌하기 위해서 "강한 환영" 을 가지게 만들었다. 이 점에 있어서 여호와는 의로우셨다. 그러나 이 예언자는 가장 가혹한 이 심판에 대해 불평을 하고 있다. 이것 때문에 그들은 모두 죄악 속에서 완고해졌기 때문이다.

4. 본문을 의문문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주께서 과연 이 백성을 속이셨나이까? 그들이 크게 속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평강을 기대했었으나, 칼이 그들의 영혼에 미쳤기 때문입니다. 즉 그것은 죽이는 칼입니다. 수많은 생명을 잃게 했읍니다. 또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들을 속인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은 종종 그들에게 일반적인 심판과 이 특정한 심판을 경고해 주셨다. 오히려 그들의 예언자들이 그들을 기만한 것이요, 하늘의 하나님의 평화를 선포하지 않은 자들에게 대해 평화를 소리쳤던 것이다. 사람들이 스스로 속아 자멸하고, 전쟁이 문턱에 와 있는데도 평화롭다고 꿈만 꾸던 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실로 슬픈 일이다. 선한 마음의 소유자들은 모두 애통해 할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치명적인 망상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분, 곧 하나님께 우리는 이 일을 탄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Ⅵ. 이 예언자는 그들을 속이지 않으려고 애쓴다. 백성들이 좋아하던 예언자들이 그들을 거짓으로 대할 때에, 예언자 예레미야-그는 저들이 미워하는 자이다-는 그들을 진실히 대한다.

1. 그는 그들이 입은 상처를 가르쳐 준다. 그들은 그것을 보기 싫어한다. 자기들의 상처를 조금도 알아보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잘 생각해 보다면, 자기들의 죄의 형벌을 능히 감지할 수 있었다(18절). "이것은 네 부정함이요, 그 부정함은 고통스런 것이라. 이제 너는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괴로운 일임을 알 것이요, 그 결룩의 비참함을 분명히 체험할 것이니라(2:19). 그것은 괴로움을 자아내며, 마음에 와 닿는, 신속히 저며 요는, 가장 온화한 심장부에도 가 닿는 근심을 만들어 낸다. 곧 검이 영혼을 꿰뚫으리라(10절)."

하나님은 태평을 누리고자 하는 자들의 심령에도 근심을 갖다 줄 수 있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너는 네 악이 무엇인지를, 곧 그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것을, 고난의 뿌리요, 간난고초를 심장에 퍼붓는 것임을 알게 되리라." 마음이 먼저 죄로 더러워지지 않는다면, 마음에 근심이 있더라도 불안정되거나 좌절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2. 예레미야는 또한 그들에게 처방책을 가르쳐 준다(14절). "네 악이 마음에 이르렀으니, 약을 발라야 하느니라. 오, 예루살렘이여! 네 마음을 씻어 악을 제거함으로써, 구원을 받으라."

여기서 예루살렘이란 예루살렘의 주민 각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각자가 자기의 마음을 보살펴야 하며, 공공의 질서에 필연적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각자의 회개이기 때문이다. 각자가 "자기들의 악한 길" 에서 떠나, "자기들의 마음" 을 씻어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는 이 도성의 심장 또한 깨끗게 하라. 즉 예루살렘의 주변만이 아니라 중심지까지 깨끗게 하라." 국가의 사활은 그 나라에 지도적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자들의 회개 여하에 달려 있는 법이다.

다음을 명심하자.



(1) 구원에는 회개가 필수적이다. 우리의 구원을 이제껏 방해해오던 죄를 제거하지 않고는, 심판을 막거나 돌이킬 제간이 없다.

(2) 마음에까지 이르는 회개가 아니고는 구원에 도움이 안 된다. 영혼의 오염에 원인이 되는 것은 마음속의 사악이니, 우리는 그것을 떨쳐 버려야 한다. 회개와 신앙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속의 죄책을 씻어내야 한다. 이제껏 영적 악에 의해서, 곧 마음에서 시작되어 마음속으로 끝나고 마는 그런 악으로 우리의 영혼이 죄로 물들어 왔던 것이다. 또한 고행과 경계에 의해서 우리는 이 마음의 사악을 미리 진압하고 예방해야겠다.

나무가 먼저 선해져야만 열매가 좋아질 수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은 온통 죄라는 문둥병으로 만연되어 있었다. 오늘날 의사들의 견해대로 하면, 문둥병은 그 환자 몸 속에 서식하여 혈액을 별질시키는 내부의 징후가 없어지지 않는 한 어떤 외적 처방약으로도 실효가 없다는 사실에 의견이 일치되어 있다. 이와 마찬가지를 영혼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또 국가의 사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의 회개가 없이는 행실의 실효성 있는 개혁이 불가능하다. 거기에 있는 실수는 고쳐져야 하고, 부패성은 절단되어야 하며, 악한 성질은 변경되어야 한다. "너 예루살렘이 거룩한 도성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지만, 네 자신이 마음의 악을 깨끗이 씻어버리지 않는다면, 결코 구원받지 못하리라."

본 대목의 후반부에서 예레미야는 이런 말을 한다. "네 악한 생각이 어느 때까지 네 속에 있겠느냐?" 그는 여기서 이런 탄식을 하고 있는 것이다.



[1] 그들이 개혁을 지연시키고 있는 것. "네 더러운 마음을 씻지 않고 얼마나 오래 있을 작정인가? 도대체 씻을 생각이 있는가?" 하늘의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 속에 있는 자기의 방이 찬탈되어 있는 기간을 긴 시간으로 여기시며, 자기의 권세가 반대에 부딪쳐 있는 기간을 긴 시간으로 여기신다(13:27).

[2] 그들의 타락의 뿌리, 곧 "그들 속에 있는 헛된 생각" 에 대해서. 그들은 이 헛된 생각을 씻어 버려야 한다. 부정한 생각은 곧 악한 "마음" 에서 우러나온 악한 생각이요, 다른 모든 사악한 짓들은 거기서 생겨나온 것이다(마 15:17). 또 그것은 우리 자신의 생각, 우리 자신의 정욕에 의한 생각이며(약 1:15). 그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기숙하고 있는 것, 즉 우리 마음의 손님이 되어 계속 거기에 유하는 것은 정말로 위험한 일이다.

어떤 자들은 부정한 생각을 "고난스런 생각," 즉 사람들에게 고난과 불행밖에는 가져올 것이 없는 그런 생각이라고 해석한다. 또 흑자는 여기서 말하는 헛된 생각이란, 하나님의 말씀의 견책과 부르심을 외면하고 수많용한 것으로 만들고 자기들의 악을 계속 고집하는 천박스런 변명이나 구실을 뜻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네 마음의 악을 씻으라. 그리고 우리는 부정하지 않도다(2:23)라는 말을 하지 않기로 하라(2:23)." 즉 "우리는 예루살렘이다.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다(마 3:8, 9)라는 말을 할 생각을 하지 말라."

 

4:6 없음.

 

4:7 없음.

 

4:8 없음.

 

4:9 없음.

 

4:10 없음.

 

4:11 없음.

 

4:12 없음.

 

4:13 없음.

 

4:14 없음.

 

4:15 없음.

 

4:16 없음.

 

4:17 없음.

 

4:18 없음.

 

4:19

심판의 예고(예레미야 4:19-31)

예언자 예레미야는 여기서 고뇌한다. 어떤 중병에 걸린 환자나 해산하는 여인처럼 울부짖고 있다. 그 말씨가 너무나 감동적이라서, 돌 같은 마음을 가진 자까지도 능히 녹일 수 있을 것 같다. "내 참자여, 내 창자여, 내 마음속이 아프도다." 그러나 그 자신은 아직 건강했고, 괴로울 것이 없었다. 아무리 선량한 사람이라도 이 세상과 같이 악한 세상에서 살 때는 "슬픔의 사람" 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 내 마음의 동요로 인하여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히 있을 수 없노라." 때로 근심 걱정이 너무나 심해지면, 아무리 참을성이 있는 사람이라도 탄식하지 않고는 못 베기는 수가 있다는 것을 또한 명심하자.

그러면 문제는 무엇인가? 이 선량한 사람이 그다지 소란스럽게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을 인함이든가 자기 가족 때문에 생긴 걱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순전히 공공의 문제로 인한 것이요, 그의 마음을 그토록 아프게 한 것은 바로 자기 백성의 처지였다.

Ⅰ. 그들은 심히 죄악되고도 개혁되기를 원치 않는다(22절). 이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다. 예언자는 그런 일을 백성에게 하기 위해서 선택된 사람이지, 자기 말이나 하라고 뽑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백성이 우둔하도다" 라고 했다. 하나님은 여전히 자기 백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어리석은 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차 버렸으나, 그는 저들을 저버리지 않았다(롬 11:1). "저들은 내가 언약을 맺은 내 백성이요, 나는 지금도 그들을 위해 자비를 저장해 두고 있노라. 그들이 나를 알지 못하니 실로 어리석도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 특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이라고 칭하고 있고, 그와 교제하면 많은 유익을 얻을 텐데도 그를 알지 못하는 자들, 그들이야말로 어리석은 자들임을 명심하자.

그들은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들" 이다. 그들은 참과 거짓, 선과악을 분별할 줄 모른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섭리를 듣고 보면서도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참된 이익이 어디에 있는지 분간하지 못한다. 그들은 "악행에는 지혜롭다." 즉 그들은 그 나라의 평온한 자들을 헤치는 지략이 있고, 자기들의 욕정을 충족시키는데 교묘한 안을 내며, 그리고는 그것을 숨기는데 재치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선행을 하는 데는 무지한 자들" 이다. 마음을 쏟아 궁리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규례나 섭리를 이용하고, 자기 나라의 복리를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안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결코 이런자들이 되지 말아야 한다. "나는 너희가 선에는 지혜로우나 악에는 어리석은 자가 되기를 원하노라" (롬 16:19).

Ⅱ. 그들은 지독히 비참한데도, 구제할 길이 없다.

1. 예레미야는 "자기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경보를 들었기 때문에" 소리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모두 "전쟁의 경보" 였다(19,20절). 그는 "자기의 귀가 들었다" 고 말하지 않고, 자기의 "심령" 이 들었다고 했다. 그것은 그러한 사건이 아직 미래의 사건이었고, 그 들음은 예언의 영으로 말미암음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심령" 이 그 소식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들었다. 따라서 그는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고, 자기의 육체의 귀로 들었을 때처럼 분명히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이런 깊은 근심을 말한 것은



(1) 자기가 비록 비극을 예고했지만, "재앙의 날을 바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그날은 예레미야 자신에게도 저주스런 날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은 선하기 때문에 은총으로 말미암아 "다가오는 진노에서 구출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더라도, 죄인들이 멸망으로 치닫는 것을 보면 두려워해야 한다.

(2) 백성들에게 거룩한 경외심을 일으키고, 참되고 적시에 있을 회개를 통해서 그 심판을 사전에 예방하려는 생각에서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남에게 감동을 주려는 자들은 먼저 자기들이 그 말씀에 깊이 감동되어 있음을 실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주시하자.

2. 그러면 여기서 예고되고 있는 그토록 애절한 파괴상는 무엇인가?

(1) 그 파괴는 순식간에, "잠시간에" 에 있을 파멸이다. 그 파멸은 미처 알기도 전에, 숨쉴 겨룰도 없이 유다와 예루살렘에 들이닥친다. 그들은 자기의 생각을 반성해 볼 여유도 못가지며, 더군다나 자기의 힘을 회복하기 위한 구원의 도움을 청할 기회는 더욱 갖지 못할 것이다. "패망에 패망이 연속한다" (20절). 어떤 사람이 욥의 사환들처럼, 뒤따라서 계속 비극의 소식을 가져온다고 본다. 요시야의 죽음은 얼음을 깨뜨렸고, 수문을 헐어버렸다. 그가 죽은 지 3개월도 못되어 그의 아들과 계승자 여호아하스는 애굽 왕의 손에 넘어 갔다. 2, 3년이 못되어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탈취했으며, 그후 줄곧 그는 유다 땅을 내습했다. 여호야김, 여고냐, 시드기야 왕의 통치 시대에 줄곧 그러다가 마침내는 약 19년 후에 예루살렘을 완전히 파멸시켜 버렸다. 그러나 "그들의 천막과 장막은 순식간에 탈취되었다." 비록 성읍들은 다소 바뀌었지만, 시골은 처음부터 황패해지고 만 것이다. 천막 속에 거하던 목자들과 모든 식구들은 즉시 탈취되었다. 그들과 그들의 재산은 원수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우리는 레갑의 후손들이 장막에 거하다가 제일 먼저 예루살렘으로 후퇴한 기사를 읽을 수 있다(35:11).

그리고 시골의 주민들은 더 이상 시골에 살지 않게 된다. "갑자기 천막이 탈취된다." 장막에 거하던 시민들이 먼저 희생물이 된 것이다.



(2) 이 무서운 전쟁은 당분간 계속될 것인데, 변방이 아니라 나라의 심장부(창 21)에서이다. 백성들은 너무나 고집적이라 즉시 바벨론에게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갖은 방법을 다해 그에게 항거할 것이지만, 결국 그것은 그 땅의 비극을 더욱 심화시킬 뿐이다. 결국 그들은 처음부터 항복했었더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탄식되고 있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그 기호를 보게 될꼬?" (21절) 검이 영원히 삼킬 것인가?

착한 사람들은 결코 "전쟁을 기뻐하지" 않는다. 그들은 흙탕물 속에서는 고기를 잡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평화" 를 원한다(시 120:7). 그리고 그들은 이런 기도에 진심으로 "아멘" 한다. 즉 "오 하나님, 이 시대에 평화를 주옵소서." "오, 여호와의 칼이여, 어느 때에 잠잠해지려나?"



(3) 그로 인한 황폐는 그 땅 전역에 미친다. "온 땅이 탈취를 당한다" (20절). 처음에도 그랬듯이, 마침내 그 땅은 완전 혼돈으로 돌아간 것이다. 황폐가 얼마나 심했던지, 마치 땅이 분해되었다 하겠다. 땅의 표면만이 아니라 기초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이탈되었다." 이 예언자는 환상으로 이 파멸을 생각하고는, 그 땅에서 그토록 처참한 지경을 선고받는 그 죄인들이 불안해졌을 것이고, 그래서 사전에 회개하여 예고했던 비극을 막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1]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다" (23절). 창세기와 같다. 창세기에 쓰인 단어, Tohu와 Bohu(혼돈과 공허)가 그대로 유다 땅에 사용되었다. 유다 땅은 온갖 아름다움을 잃었고, 온갖 가치를 탈취당했으며, 이제 과거의 그 땅의 모습과 비교해 볼 때는 공허하고 혼돈되어 있으며, 만물이 제 자리를 떠나 있었던 것이다. 이것보다 어 참혹한 혼돈이 세상 끝날에 있는 것이다. 그때에는 "그 안에 있던 공적(작품들)이 불에 타 버릴 것이다."

[2] "하늘" 에도 "빛" 이 없다. 마치 열매내지 못하는 땅이 된 것이다. 이것은 "깊음의 표면에" 있던 그 "어두움" 을 두고 한 말이다(창 1:2). 그리고 구주의 임종시에 있었던 태양의 실추와 같이 하나님의 분노를 나타내는 것이다. 유다를 못살게 하는 것은 땅이 아니라 하늘까지이다. 그리고 하늘을 그들의 환난 때문에 역시 캄캄해졌다. 앞을 볼 수 없었던 때문이다. 원수들이 태우는 가옥과 성읍의 연기, 그리고 그 군대들의 행진이 일으키는 먼지가 태양조차 어둡게 만들었으므로, "하늘에는 빛이 없다."

아니면 그 말을 상징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땅(즉 일반인들)은 볼모지가 되었고 혼돈되었다. 그리고 "하늘(즉 제왕들과 방백들)도 "빛을 잃었다." 즉 자기들 속에 지혜를 간직하고 있지 않을 뿐더러 백성들을 위로하거나 지준할 수 없다(마 24:29 참조).



[3] "산들이 진동하고, 작은 산들이 쉬요동하도다" (24절). 하나님의 출현이 그 백성에게는 너무나 무서웠던 것이었으므로-예전에는 그들이 보았다-" 산들이 수양같이 뛰며 작은 산들이 어린양같이 뛰었다" (시 114:4). "영원한 산들" 로 "흩어진" 것으로 보였다(합 3:6). 그들이 우상을 모셔 놓고 제사하던 산들, 자기들의 구원을 바라던 산들이 모두 떨었다. 마치 자기의 죄를 깨달은 사람들처럼, 그 산들 중에 제일이요 최고로 높아 보이고 제일 강력하고 가장 단호에 보이던 산들도 갈대아인들의 군대가 다가오자 두려워 떨었던 것이다. 작은 산들은 "죄악된 민족" 의 짐을 떨쳐 버린 듯이, 가벼이 움직였다(사 1:24).

[4] 땅만이 아니라 공기까지도 사람들을 축출하여, 거기에는 주민이 없게 되었다(25절). "내가" 성읍들을, 사람들이 들끓던 지역들을 "보았노라. 그리고 보니, 거기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느니라." 모든 주민들이 죽었거나, 도망갔거나, 포로로 잡혀갔다. 이러한 처참한 제거는 바로 죄 때문에 큰 것이다. 아니 그 위로 날아다니며 "나뭇가지에서 노래하던" "하늘의 새들도" 이제는 "도망쳐" 버렸고, 다시는 보이지 않고 그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유다 땅" 은 이제 "소돔 호수" 같이 되었다. (옛 사람들은) 그 호수 위에는 새도 날아다니지 않았다고 한다(신 29:23 참조). 원수들은 유다 땅에다 살아 있는 새 한 마리조차 남기지 않을 만큼 가혹했다.

[5] 땅과 집들이 모두 황폐해졌다(26절). "본즉, 좋은 땅이 황무지가 되었도다." 그 땅을 경작할 주민들이 모두 사라졌으며, 즉시 가지와 엉겅퀴만 자라났고, 또 군대들에게 짓밟혔기 때문이다. 그 "성읍들" 도, 그리고 성문이나 성벽도 "무너져" 내려 평지가 되었다. 2차적인 원인들만 볼 줄 아는 자들이 이 모든 일은 침략자들의 광포한 책략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제 1원인을 볼 줄 아는 이 예언자는 그것이 "여호와의 목전에," 그의 얼굴(즉 얼굴의 분노)에 있는 일이요, 심지어는 "그의 맹렬한 진노 때문이다" 라고 한다. 실상은 우리를 해칠 수 없다.

[6] 이 모든 사실의 의미는 이 나라가 완전히 몰락하리라는 것이다. 그 나라에 속한 모든 부분이 다 파멸을 당하리라는 것이다. 도시든 시골이든 예외가 없다.

첫째, "온 땅이 황폐하리라." 즉 곡물을 내는 땅이나 목초를 내는 땅이나, 개인 땅이나 공유지나 모두가 황폐해질 것이므로(27절), 시골만이 아니다. 그 나라를 정복한 자들이 이 모든 일을 해낼 기회를 가질 것이다.

둘째, 사람들만이 아니다. "온 성읍이 도망하리라" 고 했다. 마을 주민이 합의하여 자기들의 거주지를 버릴 것이니, 그것은 "궁수와 마병을 무서워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광포에 넘어가느니, 차라리 "밀림 속으로 들어가리라." 그 곳은 가시나무에 옷을 찢기고, 나아가 짐승의 밥이 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들이 "바위로 기어오르리라." 그곳은 딱딱하고 추운 곳이요, 위험한 절벽이 있는 곳이다. 우리는 집이나 성읍들을 너무 좋아하지 말자. 숲이나 바위를 더 좋아할 때가 올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닥칠 일이다. "모든 성읍이 버림받을 것이요," 아무도 감히 "그속에 가하려는 자가" 없는 것이다. 또한 정치와 상업도 끝나리라. 그리고 모든 민간 단체나 조직체도 와해될 것이다. 이러한 황폐가 다가온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우울한 생각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경고 속에도 한마디의 위안의 말씀이 있다(27절). "그러나 내가 진멸하지는 않으리라" -완전히 파괴시키지는 않으리라.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서 남은 자를 보존하실 것이요,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도 그 남은 자는 숨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또 최종적인 파괴는 아니다. 예루살렘은 다시 건설되고 그 땅에는 주민들이 다시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말씀이 여기에, 이 경고의 한 가운데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위안을 주고 있다. 또한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섭리의 가변성을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다. 섭리는 파괴시킬 때가 있듯이, 다시 일으켜 세울 때가 있다. 우리의 위안이 끝났다고 하여, 그 때마다 완전 옹말이 온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말이다.

이 말씀은 또한 하나님의 계약의 불변성을 시사해 준다. 하나님의 계약은 확고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설사 자기 백성을 가혹히 징계한다 하더라도, "그들을 멸절시켜" 버리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30:11).



(4) 그들의 처지는 절망적이었고, 처방도 없었다.

[1] 하나님은 그들을 도우려하지 않으셨다. 분명히 말해 주셨다(28절). 그리고,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도우시려 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그들의 처지를 비참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이 때문에 땅이 슬퍼하며, 위의 하늘이 어두웁도다(암담하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전망이 없다). 이는 내가 이미 말했기 때문이로다. 나는 결코 돌이킬 수 없는 말을 이미 해버렸노라. 내가 이미 그것을 의도했고(그것은 이미 포고된, 소멸이다) 후회하지 않노라. 즉 나의 길을 바꾸지 않고 계속하리라. 그리고 돌이키지 않으리라."

백성들이 자기들의 죄를 후회하거나 돌이키지 않으려 했다(2:25). 그러므로 하나님도 자기의 심판의 길을 후회하거나 돌이키지 않으려 하시는 것이다.



[2] 그들은 자기들을 도울 수 없다(30,31절). 사태가 요원하게 보이자, 그들은 단꿈을 꾸고 있었다.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지는 않았었지만 히스기야를 위해서 앗스르 군대를 물리쳐 주셨듯이, 자기들도 갈대아 군대를 물리칠 수 있는 모종의 조처를 취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예언자는, 막상 일이 닥치면 크게 당황하게 되리라고 일러주었다. "네가 탈취를 당할 때 어떻게 할 것인가? 무슨 방도를 취할 것인가? 이제 앉아서 생각하라. 늦기 전에. 예레미야는 저들이 생각하고 믿고 있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말해 준다.

첫째, 그 때에는 지금은 철석같이 믿고 있던 동맹군들에게 경멸을 당할 것이다. 그는 종종 예루살렘의 죄를 행음에다 비유했었다. 즉 그들의 우상 숭배 죄뿐이 아니라 이웃 열강을, 피조물을 신뢰하는 죄였다. 이제 여기서는 싫컷 즐기던 사내들이 버리고 간, 버림받은 창부에다 비유했다. 그녀는 남자들이 애정을 끌기 위해서 온갖 짓을 다 했다. 열방 중에 돋보이려고 예루살렘은 애썼다. 높은 대사들을 보내어 혼심을 사려했고, 이제 비참해진 자기들의 처지를 지원해 달라고 했다. 그녀는 부자인 양 "붉은 옷을 입었고." 아직도 보물을 많이 가지고 있는 양 "금 장식물을 부착했다." 또 그녀는 "화장을 하여 얼굴을 꾸몄다." 자기의 현재의 비극을 감추기 위해 최상의 화려한 색깔을 칠하여, 슬픔을 감추고, 좋은 표정을 할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치장이 당분간은 그녀의 얼굴을 아름답게 해 주나 곧 그 얼굴을 찢어버린다. 화장을 자주 하면 피부를 버리고, 주름 잡히게 하며, 거칠게 만든다. 거짓 색깔이 실제보다 아름답게 보이나, 진실이 밝혀질 때는 더욱 추해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 화장이 헛되리라. 네 이웃이 네 참상을 잘 알아 챌 것이기 때문이다. 갈대아인들은 네 붉은 옷을 벗겨 버리고, 장신구를 떼어 낸 다음은, 네 친구들도 너를 경시할 뿐 아니라, 네게 아무런 구조도 주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연합하여 네 생명을 노릴 것이니, 그렇게 부유한 나라를 노략질하는 데 한 몫 보러 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세벨의 이야기를 비유로 들어 한 말인 것 같다. 그녀는 자기를 아름답게 꾸며서 자기의 운명에 도전하려했지만 헛수고를 했던 것이다(왕하 9:30, 33). 우리가 신임하던 피조물들이 결국 어떻게 되는가를 보라. 또 그것들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것인가를 깨닫으라. 그것들은 목숨을 구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노린다. 그들은 쉬 변하여, 조만간 이전의 유익 이상으로 우리에게 해를 끼칠 것이다. 또 죄를 인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불구자가 된 자들이 아무리 재주를 부려서 세상에서 아름답게 보이려고 애써봐야 얼마나 쓸데 없는 짓인가를 깨닫으라.

둘째, 그때가 되면 그들은 절망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해산하는 여인과 같이 피할 수 없는 고난을 받는다는 것을 깨달으리라. "내가 땅 시온의 소리를 들었노라." 예레미야는 갈대아인의 나팔 소리에 반향되어 울려나오는 여인(예루살렘)의 부르짖음을 들었다(15절). 그 소리는 "해산하는 여인의 음성" 같았다. 그 고통은 예리하고, 죄와 저주의 결과이기도 하다(창 3:16). 그리고 온갖 슬픈 부르짖음을 다 내게 한다. 특히 "초산하는 여인의" 소리 같아서, 일찌기 알지 못하던 고통의 부르짖음이요, 그래서 더욱 처절하다. 이 고통은 익숙하지 못한 자에게는 더욱 어려운 것이다.

이제 시온은 곤경에 처해 있고, 그녀의 이웃들은 동정을 거부했으므로, "몹시 슬퍼하며" (문자 그대로는) "깊은 한숨을" 짓는다. 그리고 뭔가 의지할 것을 찾으려고 "자기의 손을 편다."

부르짖는 소리는 오직 한 마디, "오, 내게 화로다!" 이다. 그 선고로 말하면 이미 그녀에게 떨어졌고,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참살하는 자로 인하여 내 심령이 피곤하기" 때문이다. 갈대아 군인들은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둘러서, 그 땅에는 살인자들로 가득 찼다. 시온은 전국 각지에서 들려오는 비극의 소식과 "내게 화로다" 라는 울부짖음 때문에 피곤해 있다. 그들의 고난이 그들에게 자기들의 죄를 상기케 되었다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범한 살인 때문에 그들에게 살상이 벌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이제 예루살렘에서 흘렸던 "무죄한 자들의 피" 를 위해 심문하고 있으시기 때문이니, "여호와는 그것을 용서하지 않으신다" (왕하 24:4). 죄는 조만간 죄인을 찾아내며, 또한 고통을 믿지 않아 방심한 자들을 찾아내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4:20 없음.

 

4:21 없음.

 

4:22 없음.

 

4:23 없음.

 

4:24 없음.

 

4:25 없음.

 

4:26 없음.

 

4:27 없음.

 

4:28 없음.

 

4:29 없음.

 

4:30 없음.

 

4:31 없음.




































 


  1.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01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2.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02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3.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03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4.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04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5.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05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6.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06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7.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07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8.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08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9.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09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10.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10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11.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11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12.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12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13.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13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14.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14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15.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15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16.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16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17.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17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18.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18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19.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19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20.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20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21.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21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22.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22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23.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23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24.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24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25.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25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26.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26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27.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27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28.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28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29.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29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30.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0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31.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1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32.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2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33.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3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34.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4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35.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5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36.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6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37.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7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38.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8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39.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39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40.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40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41.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41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42.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42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43.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43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44.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44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45.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45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46.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46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47.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47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48.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48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49.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49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50. 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50장

    Category예레미야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Next
/ 2

All the Bibles, Commentaries and Dictionaries here have their own rights.
All rights are reserved for them, not for us. Thanks! Praise our great God, Christ Jesus!

HANGL Lingua Franca 한글 링구아 프랑카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