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예레미야 0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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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이스라엘의 사악성 (예레미야 3:1-5)

이 본문은 앞 장의 설교에 속한 어떤 것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우리가 앞 장에서 본 책망을 받는 자에게 새 희망의 문을 열어 주기도 한다. 하나님은 치유하시기 위해 상하게도 하신다. 이제 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자.

Ⅰ. 이 백성은 얼마나 악하게 하나님을 저버리고 음란하였는가? 그 책임은 대단히 크게 미치고 있다.

1. 그들은 우상의 수를 많게 하고 그들을 섬겼다. 그들에게는 그들에게 낯선 신을 받아들이는 것은 대단히 나쁜 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거짓 신들을 따르는 열정 속에서도 만족을 얻지 못했다. "내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였다" (1절). 그들이 행음한 그 여인은 우상들의 일반적인 매음부가 되었다. 그 어리석은 신이 모든 이웃 나라에 세워진 것도 아닌데, 오히려 유대인들이 그것을 신속히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들이 행음치 아니한 신당이 어디 있는가?(2절) 회개할 때에, 우리가 범한 구체적인 죄의 행위와 그 죄가 범해진 장소와 동반자들에 대하여 비통한 반응을 나타내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고 그 죄를 자백함으로써 우리 자신에게는 부끄러움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2. 그들은 우상 숭배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신들을 찾고자 했다. 너희는 창녀로 변장을 한 다말과 같이(창 38:14)그리고 "자기 길을 바로 가는 행객을 불러들이는 어리석은 여인과 같이" (잠 9:14, 15), 길가에 앉아 새 신들을 찾았다. 또 그들은 광야에 있는 아라비아 사람같이 - 즉 고객을 유인하거나 유리한 거래를 가지고 또 유리한 시장을 점유하기 위해 상인들을 기다리는 아라비아소 상인들과 같이 - 혹은 미끼를 기다리는 "아라비아의 도적" 같이 그들은 더 좋은 새로운 신들을 찾았고, 더욱 재미있고 유익한 신들과 그 숭배자들을 찾고자 했다. 그들은 단순한 죄인들이었을 뿐 아니라 사탄들이었다. 그들은 배반자들이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유혹하는 자들이었다.

3. 그들은 죄에 대해서 대단히 뻔뻔스럽게 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을 더럽혔을 뿐 아니라 "음란한 악행으로" (2절) 그들의 땅도 더럽혔다. 왜냐하면 그 죄는 보편적이었으나 처벌받지 않았기 때문에, 민족적인 죄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3절) "너희는 창녀의 낯 즉 철면피를 가졌다. 너희는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있다. 너희는 영원히 스스로를 수치스럽게 하였으나 스스로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얼굴을 붉히는 것은 미덕의 색조이며 적어도 미덕의 일면이다. 그러나 수치를 지나버린 자들은 소망이 지나버린 자들이다. 음란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 음란한 일에 탐닉되고 만다면 마침내 창녀의 얼굴을 가지게 되고 모든 염치와 겸양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4. 그들은 모든 죄 행위의 악습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음란으로" 땅을 더럽혔을 뿐 아니라(즉 그들의 우상 숭배로) 그들의 행악으로도 땅을 더럽혔다. 하나님께 거짓된 자들이 어찌 이웃에게 진실될 수 있겠는가? "그뿐 아니라 너희는 너희가 할 수 있는 모든 악행을 행하였고 사악한 말을 했고 너희가 방법만 알았다면 그보다 더 악한 말을 했고 너희가 방법만 알았다면 그보다 더 악한 말을 하고 더 악한 행동을 했을 것이다. 너희의 뜻은 오직 기회가 없었을 뿐이었으리라." 힘을 다해 죄를 범하고 그들이 범행을 저지르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범죄할 기회를 갖지 못하여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는 사람은 참으로 사악한 자들이다.

Ⅱ.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얼마나 부드럽게 견책하셨는가. 그들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소돔과 같이 불과 유황을 쏟으시는 대신에 다만 그들에게 단비가 그치고 늦은 비가 끊어지게 하셨다. "늦은 비" 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계속해서 의지하라고 말해 주는 수단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들에게 이른 비가 내렸을 때로 늦은 비가 없이는 안전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며 그렇지 아니하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없었다.

Ⅲ. 하나님께서 그들이 비록 돌이킨다 해도 철저히 포기하시고 다시 받아들이지 아니하시기로 한 것이 얼마나 타당한 것이었던가? 이것은 오직 이혼의 규례(1절)를 알 때만 이해될 것이다(이것은 판결된 관례, 아니 그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아주 명백하게 알려져 있고 명문화된 율법이었다. 신 24:4). 그들은 이 법에 대해서 만일 어떤 여자가 일단 간음함으로써 다른 남자와 관계되면 이 여인의 첫 남편은 어떤 구실을 내세워도 다시 자기 아내로 받아들일 수 없으며, 만일 그렇게 된다면 조만간에 결혼 규례는 무섭게 더럽혀질 것이며 크게 그 땅이 더럽혀질 것이라고 말한다.

율법이 이 경우에 말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자- 즉 그들은 모든 사람을 이 문제에 대한 율법의 공정성을 인정하리라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누구에게나 다른 사람의 아내를 받아들이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들은 하나님도 다른 신과 그들이 야합했을 뿐 아니라 많은 무리와 행음한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다시 받아들이지 아니하시리라는 예상을 가지고 있었다. 만일 우리가 범한 죄와 같은 죄를 어떤 사람이 범했다면 우리는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그와 화해하지 못할 것이다.

Ⅳ. 하나님은 그들을 초대할 뿐 아니라 그에게로 돌이키라고 말씀하시니 얼마나 은혜스러운가?

1. 하나님은 그들이 회개하면 그에게 은총을 받게 될 희망이 있다고 격려하신다. "너희가 악함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돌아 오려느냐" (1절). 이것이 그들을 영접하시리라는 약속을 암시해 주고 있다. 즉 "돌이키라, 그러면 너희는 영접되리라." 하나님은 당신이 우리에게 세우신 율법 자체에 얽매이지 아니하시고 인간과 같이 성급한 분노도 내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피해 받은 어떤 남편이 간음한 아내에게 취하는 태도보다 이스라엘에게 훨씬 더 친절하실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 때문이요, 참회하는 자들을 받아들임에 있어서도 "그는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 이시므로 어떤 것에서도 더욱 자비하시기 때문이다.

2. 그러므로 그는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당신께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그들에게 지시하신다(4절). "네가 이제부터 나에게 외치지 아니하겠는가? 너는 나와 이런 관계를 가지신 이가 누구이며 내가 이러한 의무를 누구에게 지고 있느냐고 나에게 소리치지 아니하겠는가? 비록 네가 나를 떠나 음란하였다 해도 네가 어리석음을 알 때는 언젠가는 나에게로 돌아오고자 할 것이다. 너는 이때에, 아니 이제부터 그리고 이후로 나에게 소리치지 아니하겠는가? 네가 여태까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행했든지 이제부터 나에게로 오고자 하지 아니하는가? 네가 정죄와 견책을 받은 이때부터 즉 너는 네 죄를 알게 되었고(2절) 그 죄 때문에 쓰라림도 가지게 되었으니 나는 본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낳았음이라(호 2:7)고 말하면서 죄를 버리고 나에게로 돌아오지 않겠는가?"

혹은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그렇게나 친절한 초대와 네가 영접되리라는 확신을 가지는 "이때부터" 너는 너를 압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하지 않는가? 용서가 이제 선포되었으니 돌아와서 이 은택을 받지 않겠는가? 확실히 너는 그렇게 하고자 할 것이다."



(1)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내세워 자비를 구할 것을 기대하신다. 너희는 나에게 아버지여 당신은 나의 소시의 애호자시었나이다라고 외치지 않겠는가?

[1] 그들은 확실히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나아와 자기들의 불충한 행위를 용서받기 원할 것이며(아버지여 나는 죄를 범하였나이다) 돌아온 탕자가 받았던 아버지의 부드러운 자비를 받기를 하나님에게서 희망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아버지되신 하나님께 나아와 그에게 불평을 털어놓고 그분 안에서 구원과 회복을 얻으리라는 신념을 걸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을 자기들의 아버지로 고백하고 하나님 없이는 고아와 같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자비를 얻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게 될 것이다(호 14:3).

[2] 그들은 소시의 애호자이신 그에게로 나아올 것이다. 즉 말라기 2장 4절에 기술되어 있는 바와 같이 그들의 남편과 같은 그분에게로 나아올 것이다. "비록 너희가 많은 연인들을 따라 갔지만 마침내는 네 약혼의 애정을 기억할 것이며 너희 소식의 남편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혹은 이것을 더 일반적으로 해석해서 "당신은 나의 아버지와 같이 소시의 애호자입니다" 라고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린 나이 때는 보호자가 필요하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에 하나님은 평안한 길로 인도하시는 소시의 보호자가 되어 주심을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의무를 다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안내자가 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우리는 그의 이끄심을 따라야 할 것과 어떤 의심스러운 경우가 닥칠지라도 그를 믿는 신앙으로 이기고 나갈 것을 신실하게 서약해야 한다.

(2) 하나님은, 그들이 자비를 호소하며 그 자비의 은택을 갈망하리라고 기대하신다(5절). 그리고 "노를 한없이 계속하시겠습니까? 그의 이름은 은혜와 자비가 충만하심으로 확실히 그렇지 않으실 것이다" 라는 신념을 가지고 그에게 돌아올 용기를 가지기를 기대하고

계신다. 회개한 죄인들은 바로 이러한 것을 가지고 용기를 가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꾸짖으시나 항상 꾸짖지 아니하시고 분노하시나 끝까지 노하시지 아니하시며 슬프게 하시지만 긍휼도 베푸신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화해를 호소할 수 있을 것이다. 흑자는 이것을 죄에 대한 그들의 위선과 경솔함을 기술한 것으로 이해한다. "네가 창녀의 낯을 가지고(3절) 아직 네가 할 수 있는 마음대로 행악을 계속하고 있지만(5절) 때때로 나에게 나의 아버지여라고 외치지 않겠는가?" 그렇게 외치는 그때까지도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관심과 예배드린다는 구실을 내세우면서 우상 숭배에 탐닉되어 있고 경건의 모양과 헌신의 형식은 지녔으면서도 우상에 빠져 있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악한 일을 행하고(요 8:44 에서 유대인들과 같이) 또 하나님을 "소시의 애호자" 라고 부르면서 육체를 따라 스스로 빠져 있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그들이 계속적으로 진노의 날을 기다리며 진노를 쌓아 가면서도 하나님의 노여움이 멈추기를 기다리며 아첨을 린다는 것은 인간의 가장 큰 수치가 아닐 수 없다.

 

3:2 없음.

 

3:3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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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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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우상 숭배 (예레미야 3:6-11)

이 설교의 내용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 이 설교의 시기가 관찰되어야 하겠다. 그 시기는 축복된 종교적 개혁이 발발했던 요시야왕 때였다. 이때에 요시야는 진심으로, 열정적으로 여호와를 바랐으나, 그의 백성은 그렇게 진지하지 못했다. 이것 때문에 그들을 책망하고 그들의 위선적 행위에 대해 그들을 경고하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전하라고 하신 말씀의 내용이다.

이스라엘과 유다, 두 왕국의 경우가 여기에 비교되어 있다. 이스라엘은 다윗과 예루살렘 성전에 반기를 든 열 족속으로 되어 있었고, 유다는 나머지 두 족속으로, 다윗과 예루살렘 성전이 거기에 귀속되어 있었다. 이들 두 왕국의 대요만 볼 수 있다.

Ⅰ. 여기에는 이스라엘 즉 열 지파에 관한 간략한 설명이 나타나 있다. 아마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네가 배역한 이스라엘의 행한 바를 보았느냐?" (6절)라고 말씀하셨을 그때 방금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를 문서로 읽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에 이미 이스라엘은 포로가 되어 갔으므로 문서가 아니고 역사적으로 볼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서의 역사적 사실에 나타난 것을 읽는 것은 마치 우리 자신이 목격자가 된 것과 같이 우리를 교훈해야 하고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은 교회와 국가 양면에 있어서 처음부터 신의 제도인 다윗의 왕국을 반역하고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배역한 이스라엘" 이라고 불리어지고 있다. 이제 예레미야는 그들을 다음의 몇 가지 사실에서 보고 있다.

1. 그들은 우상 숭배에 비참하게 빠져 있었다. 그들은 모든 높은산과 푸른 나무 아래서 행음하였다(6절). 즉 그들은 그들의 산당과 숲에서 다른 신들에게 예배를 드렸다. 처음부터 그들이 단과 벧엘에서 금송아지 상으로 하나님을 예배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별반 이상할 것이 없다. 우상 숭배의 길은 내리받이 길이다. 만든 형상들을 사랑하고 그것들을 가지고자 하는 자들은 곧 다른 신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고 또한 다른 신들을 가지고자 할 것이다. 첫 계명을 범한 자들이 어찌 제 2계명에 대하여 가책을 받겠는가?

2. 하나님은 자기의 예언자들을 통해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돌이키도록 초대하고 용기를 준다는 것(7절)이다. "그가 이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즉 그것만 해도 마땅히 포기되어져야 할 것이었지만 그러나 너히는 나에게로 돌아오라. 그러면 너희를 영접하리라고 나는 말했다." 비록 그들이 논의의 여지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권위를 가진 다윗의 집과 아론의 집을 저버렸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예언자들을 그들에게 보내셔서 그들로 하여금 그에게로 돌아오라고 부르시며 오직 그만을 예배하라고 부르셨다. 이것은 다윗의 집으로 그들이 돌아오기를 바랐다기보다 아론의 집으로 돌아오기를 더 강요한 것이다. 우리는 위대한 개혁자 엘리야도 그들에게 다윗의 집으로 돌아오라고 언제나 말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들이 참된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예배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열망했다. 하나님이 그가 세우신 의식에 따르는 것 이상으로 더욱 바라는 것은 진정한 경건이다.

3. 이러한 자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상 숭배를 고집했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하나님은 그것을 보셨다. 즉 하나님은 그것을 아셨고 대단히 노하셨다(7,8절). 하나님은 우리가 행하는지 행치 않는지, 그리고 그가 자주 우리를 부르셨으나 우리가 얼마나 많이 거절해 왔는가를 헤아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4.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셨고 그들을 그들의 원수들의 손에 버리셨다(7,8절). "내가 거기서 그들이 음란히 행하는 모든 행위를 보았을 때 그와 떠나야 했으며, 그에게 이혼증서를 서 주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심에서 떠나서 그들로 하여금 누구든지 그들을 헤치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쉽게 희생이 될 수 있도록 버려 두심으로, 또 그들의 모든 희당을 흩으시고 모든 선지 학교들을 흩으시며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에 대해 더 이상 어떤 주장을 내세울 수 없도록 언약을 폐기하심으로써 그들과 이혼하신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히 이혼당한 자들은 반드시 그와 대적의 관계에 서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이것의 실증을 알고 싶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행하신 사실을 보라.

Ⅱ. 두 지파의 왕국인 유다의 경우는 어떠하였는지 살펴보자. 유다는 "패역한 자매로" 불리어지고 있다. 자매로 불리어진 이유는 아브라함과 야곱이라는 같은 줄기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타락한 것과 같이 유다도 타락하였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했을 때 유다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로 고백했지만(유다는 하나님이 세우신 제사장들과 왕들을 따랐다. 그래서 유다는 하나님께 충성할 것이 기대되었다) 유다 역시 패역하고 거짓되었으며 자신의 고백과 약속에 불충하였음이 드러났다. 하나님을 반역하는 자들과 다를 바 없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유다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행하였으며 그 결과가 무엇이며 어떤 경고를 받았는가를 알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포로됨은 유다에게 충고를 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효과도 가져오지 못했다. 유다는 아무런 두려움도 가지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제사장들이 될 수 있는 레위인들이 있었고 왕이 될 수 있는 다윗의 자손들이 있으므로 스스로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심판을 보고 거룩한 경외심으로 경각심을 가지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엄청난 어리석음이 분명하다. 유다가 여기서 받는 책망이 있다.

1. 그들이 그들을 미혹케 하는 악한 왕을 세우고 오히려 그 악한 일에 왕을 진심으로 협력했다는 것이다. 유다는 그들에게 들어온 우상은 어떤 것이든 섬김으로써 음란을 행하였고 우상 숭배의 모든 관습을 따랐다. 그래서 행음함을 가볍게 여김으로(이것은 비루하고 추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혹은 행음함으로써 악명이 높게 되어, 유다는 그 땅을 더럽혔고 이것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혐오를 가지고 음란하여 하나님 앞에서 행음하였다. 므낫세와 아몬의 통치 때에 그들이 우상 숭배에 빠져 온 백성이 또한 그렇게 되었고 온 땅이 그것으로 부패하였으며 아무도 이스라엘이 이것 때문에 그들에게 임할 파멸을 두려워할 줄 몰랐다.

2. 선한 왕이 위에 올라 그들을 개혁하고자 했을 때 그들은 이 개혁에 진심으로 마음을 같이하지 않았다. 이것이 현재의 경우를 가져왔다. 하나님은 선한 통치 시대에 그들이 선하게 되는가 안 되는가를 시험하셨다. 그러나 그들 악한 본성은 여전하였다. 그들이 진심으로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고 거짓으로 할뿐이니라(10절). 요시야는 그 이전에 어떤 선조들보다도 더 철저히 우상 숭배를 파괴하였다. 그 자신으로 볼 때는 과연 그는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께로 향했다. 그의 이러한 사실을 열왕기 하 23장 25절에 기록되어 있다. 백성도 외적으로는 그와 함께 하도록 강요되었고 그와 더불어 대단히 엄격히 유월절을 지키며 하나님과의 언약을 새롭게 하라는 강요를 받았다(대하 34:32; 35:17). 그러나 그들은 이것에 대하여 진지하지 않았고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바로 그때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 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리라" (왕하 23:27)고 하셨다. 유다가 그들의 땅에서 이스라엘이 사로잡힘을 보고도 그들의 죄를 제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선적이고 아무런 실효성이 없는 개혁이란 백성에게 재앙이 될 뿐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는 척함으로써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나는 진실성이 없는 신앙이란 있을 수 없음을 안다.

Ⅲ. 이 두 왕국의 상태와 이들에게 내리시는 심판에 대하여 볼 때 두 왕국 중에서 유다가 더 나쁜 것이었다. "배역한 이스라엘은 패역한 유다보다 오히려 의로움이 나타났나니," 즉 이스라엘은 유다만큼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비교적인 의는 거의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사실상으로 선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보다는 그렇게 나쁘지 않다" 라고 말하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이러한 비교적인 의도 이스라엘에게 아무런 도움이 못되었다. 유다의 죄가 이스라엘의 죄보다 더 악한 것은 두 가지 관점에서 그러했다.

1. 이스라엘에게서 보다 유다에게서 기대한 것이 더 컸다. 그런데 유다는 패역했고 이스라엘이 행한 것보다 더욱 엄숙한 약속을 거짓되게 했던 것이다.

2. 유다는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 때문에 파멸당하는 것을 보고 충분한 경고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 자신을 회개케 하는 일의 수단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더 크게 파멸하는데 보탬이 될 것이다. 선지자 에스겔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사이에 이와 같은 비교를 하고 있고(겔 23:11) 이스라엘과 유다를 비교할 뿐 아니라 이 셋 중에 가장 나쁜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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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려의 메시지(예레미야 3:12-19)

이 본문에는 중요한 복음이 나타나 있다. 항상 복음에는 두 가지면이 있다. 즉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회개한 죄인들이 돌아올 때 영접하심이 그것이며 복음의 때를 위해 특별히 마련해 두신 축복이다.

예레미야는 "북을 향하여 이 말을 선포" 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앗수르로 포로 되어간 열 부족이다. 이 말은 이 배역한 이스라엘을 향한 부름이다.

비록 그들의 형제는 완악하여 그들을 부르는 부름을 거절하고 유다 사람들을 거역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잊지 않으셨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그는 북쪽 땅 수백 마일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부르는 것이 더 쉬웠을 것이다. 즉 그 사람들은 믿지 않고 불순종하는 이들 백성보다도 빨리 들을 것이다. 즉 배역한 이스라엘이 패역한 유다보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더 빨리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 북쪽을 향한 이 말씀의 선포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민족에게 죄사함을 얻게 하는 구원의 복음을 훨씬 앞서 본 것인지도 모른다(눅 24:47). 북쪽에 있는 나라 이스라엘을 부르심은 그땅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부르심이며, 은혜로 선택받은 많은 사람들을 부르심이다. 그리스도가 이방인 중에 흩어진 유대인들에게로 갈 때에는 그가 이방인들을 가르치리라고 생각했다(요 7:35). 이제 내용을 살펴보자.

Ⅰ. 여기에는 "배역한 이스라엘" 과 배역한 이방인들에게 그들이 반역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는 초대가 나타나 있다. 즉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12절). 그리고 다시 "배역한자식들아 돌아오라! 너희 배역을 돌이키고 너희 성실로 돌아오라. 너희가 잃어버렸고 떠나버린 선한 길로 돌아오라" 고 말씀하신다. 이 초대에 따라서

1. 그들은 돌아올 힘을 얻는다.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없이 함을 받으라(행 3:19) 너희가 하나님의 노여움을 샀으나 나에게로 돌이키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나의 노여움을 쏟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진노는 사자가 먹이에게 덮침같이 죄인들에게 덮칠 준비가 되어 있다. 아무도 무거운 무너저 내림 같은 노여움에서 구원할 자 없으면 가장 깊은 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그들을 구할 자 없다. 그러나 그들이 돌이키기만 하면 이 진노는 옮겨질 것이다(사 12:1). "나는 나의 노여움을 영원하게 하지 않을 것이며 도리어 화목할 것이니 나는 자비로움이라." 죄 범한 우리는 만일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시지 않으실 진대 영원히 구원을 못받는다. 그러나 그는 인자하심으로, 우리가 범한 죄를 돌이키기만 한다면 우리를 향해 책망하실 말씀을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신다는 소망으로 우리에게 용기를 준다.

2. 그들은 어떻게 돌이켜야 하는지 방법도 지시를 받고 있다(13절).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너희 허물을 인정하고 너희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나는 나의 노여움을 영원히 품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미리 약속된 말씀이다). 즉 너희는 계속될 하나님의 진노와 다가올 진노에서 구원될 것이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이것은 단순하며 또한 쉽고 합리적인 의미이다. "오직 너희 죄를 인정하라."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이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다" (요일 1:9). 이 사죄와 평화의 조건이 아무런 가치없이 취급된다면 죄인들의 정죄는 더 악화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 제안에 따르지 못했던 것이다. "만일 선지자가 어떤 큰 일을 하라고 너희에게 말했을지라도 너희가 그것을 행치 않았겠는가? 그런데 하물며 다만 너희 죄를 자백하라고 한 말을 어찌 하지 않겠는가?" (왕하 5:13) 죄를 자백함에 있어서



(1) 우리 자신의 본성적 타락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너희 본성의 사악성과 타락성을 인정해야 한다.

(2) 우리의 현재의 실제적 죄를 인정해야 된다.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그를 경멸하고 항거해 왔다."

(3) 우리의 범죄가 엄청나게 크고 많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네 길로 달려 푸른 나무 아래서 이방 신에게 절했다. 너희가 다니는 곳 어디나 너희는 너희의 우매의 흔적을 남겨 놓았다."

(4)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지 않고 있어 더욱 죄를 악화시키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죄가 가지고 있는 죄의 본성은 그 자체가 더욱 악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즉 그 무엇보다도 너희가 겸손하여 순종해야 한다" 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Ⅱ. 여기에는 배역한 자손들이 돌이켜 회개하면 그들에게 줄 중요한 약속이 선언되어 있다. 그 약속은 부분적으로는 열 지파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두 지파의 자손들과 연합하여 구원의 대망을 바라보면서 프로에서 돌아올 때 성취되었고 완전하게는 복음의 교회 안에서 이 예언은 성취되었고 "그리하여 사방에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임으로서 성취될 수 있다." "돌아오라. 비록 내희가 배역하였을지라도 너희는 자녀이며 비록 배역한 아내일지라도 아내이니 내가 너희와 혼인하였음이라(14절). 그러므로 인연을 끊지 아니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들의 열조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며 혼인 계약을 버리지 아니하신다. 그는 그 땅을 권고하신다" (레 26:42).

1. 그는 그들이 흩어져 있는 각처에서 그들을 모으시겠다고 약속하신다(요 11:52).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서온으로 데려오겠다" (14절). 회개하고 그들의 본래 사명에 돌아오는 모든 사람은 이전의 위로를 얻게 될 것이다. 다음의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하나님은 당신께 돌아오는 자들을 후하게 용납하신다. 하나님은 특별한 은혜로 인하여 반역의 무리 가운데서도 돌아설 때 영접하시는 분이다. 만일 하나님이 그들을 저버리신다면 파멸되고 말 것이다.

(2) 하나님을 반역한 많은 무리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는 비교적 소수로서 마치 추수한 밭에 이삭과 같이 있다- 즉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 이다. 그리스도의 무리는 소수의 무리이다. 좁은 문을 찾는 사람은 적다.

(3) 비록 그 소수의 무리가 흩어져 있지만 그들 중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한 성읍에 하나" 뿐일지라도 하나님은 그 하나를 찾아내실 것이며 무리 가운데 섞여도 잃게 되지 않을 것이며 시온으로, 하늘 나라로 안전하게 인도될 것이다. 흩어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이끌려 올 것이며 열 지파 자손들 중에 있는 자들도 두 지파 중에 있는 자들과 같이 영접을 받게 될 것이다.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선택 받은 "자손들은 복음의 교회," 시온 산, 즉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거룩한 산으로 인도될 것이다.

2. 하나님은 그들에게 모든 축복의 길로 인도할 자들을 두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내 마음에 합한 목자를 너희에게 주리니" (15절). 하나님이 다윗을 뽑아 왕으로 세우실 때 그에 대하여 언급한 말이다. 여호와께서는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였다(삼상 13:14). 여기서 다음의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교회에 모일 때는 반드시 통솔함도 있어야 한다. "내가 그들을 시온으로 데려오겠다" 라고 했다. 즉 그들은 그들의 욕망대로 살 것이 아니라 훈련을 받아야 하며 기분 내키는 대로 행하는 야생동물로서가 아니라 목자의 지시 아래 따르며 순종하는 양으로서 살도록 부름받은 것이다. 목자를 너희에게 주리니 즉 세상 지배자들과 목회자는 둘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지하기 위한 사역자들이다.

(2) 그 백성이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목자" 를 가지게 될 때 그들에게는 다행이다. 즉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세우셔서 그들을 다스리는 그러한 모습으로 다스리고 돌보는 목자이며 또 가능한 한 하나님이 행하심 같이 행하며 어느 정도 하느님이 나타내 보이신 법도대로 행하기를 애쓰는 목자를 가지게 될 때 그 백성은 복되다.

(3) 양을 먹이기 위해 임무를 다하는 목자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목자들이다. 그들 자신의 배를 채우고 "양떼를 탈취하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맡겨진 양들에게 좋은 것을 주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는 그가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목자이며 "그들은 지혜와 명철로 그들을 양육한다" (즉 이것은 지혜롭고 이해성 있게 양육함을 말한다). "다윗이 백성을 다스를 때 그 마음의 성실함으로 기르고 그 손의 공교함으로 지도하였도다" (시 78:72)라고 한것과 같다. 목자뿐 아니라 교사로서 그들은 지혜와 명철이며 우리에게 구원의 지혜가 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을 양육하여야 한다.

3. 하나님은 더 이상 언약 대하여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언약궤" 는 처음에는 희막의 큰 영광이었고 후에는 성전의 영광이었으며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임재의 징표였다. 그러나 이제는 제외될 것이고 그 이상 요구하거나 필요로 하지 아니할 것이다. 너희가 이 땅에서 무성하여 많아질 때에(16절), 즉 "메시야 왕국이 설립될 때는 이방인들이 모여들므로써" 교회는 큰 무리가 모이게 될 것이며(유대 지도자들은 여기서 말하는 메시야의 날을 인정한다), "그때에 그들은 더 이상 여호와의 언약궤를 말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 중 누구도 거기에 가치를 부여하거나 의존하지 아니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외부적인 제도를 요구할 필요가 없는 순수한 영적 예배 제도를 가지게 될 것이며 언약궤에 대한 전체적인 의식법은 철폐될 것이고 그것과 관계된 모든 제조가 제외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약 성서의 말씀과 성례전에서 우리에게 보여 준 모든 형태의 진리가 그 모든 것을 대신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유대인들이 어떠한 주장을 하든지 간에) 언약 궤성전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스 1:7) 그러나 복음의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가 언약궤이다. 즉 그가 곧 중보의 자리요 그가 곧 자비의 터이다. 우리가 지금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적 임재를 가지는 것이다. 언약 궤가 철폐되는 것에 관하여 여기에는 많은 말로 표현되어 있다. 즉 언약궤를 생각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만들지 않을 것이며, 이런 것들 중 어떤 것도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가지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참된 예배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아버지를 예배할 것이기 때문이다(요 4:24).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표현은 모세의 율법의 여러 가지 의식들은 전체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폐지되어야 하며 더 이상 사용되어서는 안 되지만 오래동안 그런것 들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 거기서 탈피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함이여 또한 그들은 그들의 거룩한 성읍과 성전들이 땅에 완전히 무너져 버릴 때까지 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4. 하나님은 여기서 "예루살렘" 이라고 불리워지는 복음의 교회가 뛰어나며 현저하게 두드러지게 될 것을 약속하신다(17절). 두 가지 사실이 교회를 유명하게 할 것이다.

(1) 교회에서의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하심과 통치이다. 그것은 "여호와의 보좌-그의 영광이 보좌" 라 일컬음이 되며, 그 보좌가 여기에 세워지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 당신이 기뻐하시는 자들을 말씀과 영으로 다스릴 것이며 모든 생각을 그분께 순종하도록 이끄실 것이다. 복음이 땅을 차지했을 때에는 사탄의 위(位)가 있는 곳에도 여호와의 보좌가 세워졌다. 그것은 특별히 그이 은혜의 보좌이다. 믿음으로 이 예루살렘에 나오는 자들은 모든 것의 재판장되시는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이며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는 것이다(히 12:22-24).

(2) 이방인들이 교회에로 모여들게 된다. 모든 열방들이 추종자가 되고 교회로 모여 거기에 세워진 여호와의 보좌 앞에서 섬길 것이며 여호와의 성호 앞에서 헌신하게 될 것이다.

5. 하나님은 교회에 모인 자들에 이루어질 놀라운 변화에 대하여 약속하신다. "다시는 그들의 악한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치 아니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원하는 대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것이다. 죄가 이끄는 것-즉 악한 마음의 강퍅함이 이끄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그것은 자기 생각과 자기 기분을 따라 가는 것이다. 그리고 은혜를 따라 사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그것은 내 자신이 생각한 대로 사는 데서 떠나서 신앙과 바른 이성으로 지도받는 것이다.

6. 유다와 이스라엘은 아름답게 하나로 합쳤다(18절). 그들은 이와 같이 하나가 되어 포로에서 돌아와 가나안에 다시 정착했다. 유다의 족속이 이스라엘 족속과 동행하여 에스겔이 예언한 것과 같이 (겔 37:16, 17), 여호와의 손에서 하나의 막대기가 될 것이다. 앗수르와 갈데아는 고레스의 수중에 들어갔고 그의 명령을 그의 통치아래 있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미쳤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스라엘의 족속들 중 많은 사람들이 유다의 족속들과 함께 북쪽 땅으로부터 돌아왔다고 생각할 근거를 가지게 된다. 비록 처음에는 불과 42,000명정도만 돌아왔지만(에스라 2장에서 이 사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세푸스(Josephus)는 몇 년 후에 다리우스 통치 때에 스룹바벨이 400만 이상을 열조에게 준 땅으로 데려왔다고 말한다(고대사 11권 4장) 우리가 이전에 본 바와 같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적대적 태도는 읽어 볼 수 없다. 이스라엘과 유다 사이에 가나안에서의 이러한 복된 연합은 복음의 교회 안에서의 유대인과 이방인의 연합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며 모든 원수가 멸망당한 뒤에 한 목자의 인도하심 아래 같은 양 우리에 모이게 될 것을 말한다.

Ⅲ. 모든 자비의 방해가 되는 어떤 어려움이 여기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도 여기에 나타나 있다.

1. 하나님은 내가 너희를 위해 어떻게 하랴고 질문하신다. 하나님은 마치 마지못해 호의를 나타내심 같은 의미가 아니고 그가 벌하시기는 할 망정 내가 어떻게 너를 버리겠느냐(호 11:8, 9)라는 의미이다. 그는 노하기는 더디하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데는 빠르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받기에는 전혀 무가치하며 호의를 기대할 아무런 근거도 없으며 또한 그런 것들을 받을 자격도 없고 그러므로 주장할 수도 없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이 오직 세상을 통치함에 있어서 그의 공의로우심과 거룩하심이 손상되지 않는 방법 안에서 어떻게 자비를 베푸시는가를 숙고하심을 의미한다. 내어쫓긴 자들이 영원히 추방되지 아니할 방책이 세워져야 했다(삼하 14:14). 내가 어떻게 하랴?

(1) 배역자들까지도 만일 돌이켜서 회개하면 자녀 중에 두실 것이다. 그러나 누가 그것을 기대할 수 있는가?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요일 3:1) 비천하고 연약하며 쓸데없고 무가치하며 분노만 자아낼 수 밖에 없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 가운데 들게 되었는고.

(2)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로 세우신 그들에게 하나님은 아름다운 땅, 가나안 땅을 주실 것이다. 이 땅은 모든 땅 중에서 영광이요 많은 민족 중에 택한 민족의 선한 유업이며 민족들과 영걸들이 갈망하는 땅이며 그들이 자기들의 땅으로 삼기를 원하고 또한 현재도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그 땅을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실 것이다.

그 땅은 영원한 기쁨이 있는 그 땅을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실 것이다. 그 땅은 영원한 기쁨이 있는 천국의 상징이었다. 자주 낙토를 멸시하며(시 106:24) 무가치하게 또 합당치 못하게 생각했던 그 땅을 누가 과연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사람들의 태도인가?

2. 하나님은 이 질문에 대하여 친히 대답하신다. "내가 다시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리라 하였노라." 하나님은 아무런 볼품없고 용서받을 수 없는 우리의 모든 반대 조건에 대하여 자신이 친히 대답하신다.

(1) 하나님은 "자녀들 가운데" 돌이키는 자들을 두시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갈 4:6)양자의 영을 그들에게 주심으로써 답하실 것이다. "너희가 나를 아버지라 하고, 즉 너희는 나에게 돌이켜서 나를 아버지로 섬길 것이며 나의 은총을 바라게 될 것이다."

(2)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름다운 땅을 주시기 위하여 또 그들이 결코 떠나지 아니하고 끝까지 인내하기 위하여 그들의 마음에 경외하는 마음을 주실 것이다.

 

3:13 없음.

 

3:14 없음.

 

3:15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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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 없음.

 

3:18 없음.

 

3:19 없음.

 

3:20

돌아오라 (예레미야 3:20-25)

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반역한 것에 대하여 책망하심(20절). 남편을 떠난 음란한 아내같이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반역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과 혼인 계약을 맺었으며 이제 그 언약을 파기하고 하나님께 거짓되게 대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그들에게 친절하고 신실하게 언약을 지키시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도 거짓으로 언약하는 것은 크게 가증한것인데 하물며 하나님께 거짓되이 행하는 것은 참으로 반역이 아닐 수 없다.

Ⅱ. 이 책망에 대한 그들의 회개와 자백(21절). 하나님이 그들의 배신을 책망했을 때 그들 중에는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하여져서 그들의 비참함과 그들의 죄악 그들이 행한 결과를 슬퍼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들의 애곡하며 간구했는 목소리가 자산 위에서 들렸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잊고 그들의 길을 악한 곳으로 돌이켰기 때문에 애통하며 슬퍼했다.

다음 사실에 주목하자.

1. 죄는 우리의 길을 탈선하는 것이다. 즉 굽은 길로 빠져서 바른 길을 떠나는 것이다.

2. 모든 죄의 근본 바탕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망각함이 있다. 만일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눈이 그들 위에 있으며 하나님에 대한 책임을 다한다면 그들은 결코 그와 같은 범죄는 하지 않을 것이다.

3. 죄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난처하게 되고 곤고한 일에 빠지게 되고 그것 때문에 이리의 길이 굽게 되는 것이다(애 3:9).

4. 양심이 그들에게 그들의 길이 굽었고 하나님을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말하는 사람들만이 간구하며 눈물을 흘릴 수 있게 된다. 사람의 어리석음이 자신의 길을 벗어나게 할 때는 그의 심령은 여호와를 원망하게 된다(잠 19:3). 그러므로 우매함이 하나님 앞에서 녹아 없어져야 한다.

Ⅲ. 하나님이 돌아오라는 부름심(22절). "패역된 자식들아 돌아오라." 하나님은 어린아이들같이 어리석고 괴퍅스러운 그들을 부르러움과 자비스러운 마음으로 자식들아라고 부르신다. 비록 철모르고 괴퍅스러워도 그의 "자식들" 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고칠지언정 내팽개치지는 않으실 것이다. 비록 그들은 앙탈부리는 아이들일지라도 자식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식들에 대해서 참으시며 인내하신다. 그들이 인정하고(21절) 죄에 대하여 겸손하면 그리스도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 을 부르심같이 영접해 주실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이 돌아올 때 주시는 약속은 "내가 너회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즉 나는 너희의 배역 때문에 당하는 비통에서 위로할 것이며 배역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당한 고통에서 구원해 낼 것이며 너희 완고함을 치료하고 배역의 본성을 고칠 것이다." 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용서하시는 자비로움과 그의 안정된 평화와 새롭게 하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배역을 고치실 것이다.

Ⅳ. 이 부름을 그들이 기쁘게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승락한다. "보로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이것은 부서진 성벽에 부딪쳐 되돌아오는 목소리와 같이, 상한 심령에서 울려오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메아리이다. 하나님은 "돌아오라" 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우리가 지금 왔나이다" 라고 대답하다. 이것은 지체함이 없는 즉각적이고 신속한 대답이다. 즉 "우리는 이후 차차 갈 것입니다" 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왔나이다. 생각할 필요가 없읍니다" 이다. "우리는 당신을 향하여 가는 중입니다" 가 아니고 "우리가 당신께 옵니다. 우리는 즉시 행동합니다" 이다. 그들은 어떻게 만장일치로 "우리가 모두 갑니다" 라고 했는지 살펴보자.

1.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것은 것과 같이 그들이 자신을 하나님의 것으로 헌신하면서 나아왔다. "당신은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이다. 우리는 당신을 리의 하나님으로 삼았으며 우리는 또한 우리 자신을 당신의 것으로 던집니다. 이제 우리가 당신이 아니고 어디로 가겠나이까? 우리가 당신을 떠난 것은 우리 죄와 어리석음입니다." 우리가 배역한 후에 하나님께 돌아갈 때에 언약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것임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과 대단히 위로가 되는 일이다.

2. 그들은 하나님 이외에 구원과 해방을 기대하는 모든 것은 포기한다.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의 떠드는 무리에게 바라는 것은 참으로 허사라. 우리는 이제 피조물을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임을 알았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스스로 속지 말라야 하겠다." 그들은 작은 산들과 큰 산들 위에서 우상을 섬겼다(6절). 그들은 그들 산들 위에 많은 우상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거기에서 어떤 것을 구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이상 더 그들에게 얼굴을 돌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좋은 것과 구원 그 자체까지 믿을 수 있음에도 헛되이 우상들 앞에서 무슨 좋은 것을 구하려고 했다.

3. 그들은 하나님만을 그들의 하나님으로 의지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 그는 "여호와" 이시다. 그러므로 그만이 구원하실 수 있다. 모든 다른 구조자들과 구원자들이 실패할 때도 그는 구원하실 수 있다. 그는 우리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뜻과 경륜의 때 안에서 우리의 구원을 행하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은 죄에서 구원하시는 위대한 역사에 대단히 적절한 것이다. 즉 바로 그것이 "여호와의 구원," 그의 "위대한 구원" 이다.

4. 그들은 자기들이 고통 중에 빠진 것에 대하여 하나님을 정당화해 드리면서 그것은 오직 저들의 죄 때문이라고 스스로들 심판한다(24.,25절).

(1) 그들은 모든 비참한 일들이 그들이 우상에게 속했기 때문이며 그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을 뿐 아니라 많은 불운만이 초래하게 된 결과가 모두 그들 자신에게 있다고 했다. "부끄러운" (우상, 즉 수치스러운 일) 그것이 "우리 열조에 산업을 삼켰다."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 주목해 보자.

[1] 참된 회개란 죄를 "수치" 라고 할 수 있어야 된다. 즉 그들이 멸시하고 부끄럽게 여기던 불명예스러운 것도 물론이려니와 그들이 기뻐하고 자랑해 온 가장 사랑하는 우상까지도 그것을 부끄러운 것이라고 부를 수 있어야 된다.

[2] 진정한 참회는 죄가 사망이며 파멸임을 알고 그들이 당하는 모든 불행이 죄의 결과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죄가 우리의 열조가 애써 우리에게 물려 준 모든 좋은 것들을 다 삼나이다. 우리는 우상 숭배가 우리의 번영을 파멸시킨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보아 왔나이다." 흔히 자식들은 부모들이 애써 이루어 놓은 것을 쾌락으로 낭비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만일 마침내 그들이 그것이 어리석다는 것을 알고 그런 악행이 그들의 재산을 낭비하고 그들의 조상의 수고를 헛되게 하는 수치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정말 아름다운 일이다. 그들의 우상들이 집어삼켜 버린 열조의 산업들 중에서도 특별히 "양떼와 소떼와 아들들과 딸들" 이라고 여기서 말하고 있다. 첫째, 그들의 우상 숭배는 하나님을 노엽게 하여 그들에게 파국적인 심판을 내리게 했다. 이 심판은 그들의 땅을 황무케 하며 가족들을 파멸케 하고 그들의 소유가 희생 제물이 되고 자식들이 원수의 손에 포로로 잡혀가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런 일들을 자기들 스스로가 만든 결과였다. 둘째, 오히려 이런것들이 그들의 우상들에게 희생으로 드려졌고 그리하여 부끄러운 일에 빠졌다(호 9:10). 그리고 우상은 그들을 몰인정하게 삼켰고 제물의 기름을 삼켰으며(신 32:28) 사람의 희생까지 먹었다.

(2) 그들은 스스로 그들의 죄의 수치와 어리석음을 자취하였다(25절). "굴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수치 중에 놓겠고 우리의 혼동이 엄습하며 즉 이것들은 우리의 형벌이요 징벌의 수치이다. 죄는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의 책망 아래 두게하며 우리를 수치로 둘러싸고 수치로 가득 채움같이 우리 자신을 양심의 가책에 눌리게 한다. 이것은 우리가 죄를 범했기 때문이며 수치가 죄와 함께 둘러싸고 수치로 가득 채움같이 우리 자신을 수치가 죄와 함께 들어왔고 더욱이 죄에 시중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태부터 죄인이며 범죄와 타락을 물려받았다. 우리와 우리 열조가 범죄하였다. 우리는 일찍부터 죄인이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죄를 범했다. 우리들이 계속 죄 속에서 살아 왔고 비록 종종 회개하고 죄를 버리기도 했으나 오늘날까지 죄를 범해왔다. 죄가 가지고 있는 부패성과 최악의 상태는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이다. 우리가 범죄했을 때 죄를 금하고 회개하라고 명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지 못했다."

이제 이 모든 말을 볼 때 이것은 포로로 잡혀갔던 자들이나 본국에 남아 있던 자들이나 열 지파인 이스라엘이 회개했다는 말로 들린다(20절). 예레미야는 유다의 사람들이 거룩한 싸움으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회개의 사실을 환기시킨다. 다윗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왕을 모시는 일에 앞섰을 때 자기 골육인 유대 장로들에게 왕을 모시는 일에 나중이 되는 것은 수치라고 말하면서 이 말을 사용했다(삼하 19:11, 12). 이와 같이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회개했으니 유다도 회개해야 된다고 외친다. 이방인들의 작은 열심이 우리로 하여금 그들 앞에서 더욱 분발하게 하고 선한 일에 그들 앞서가게 하는 것이 된다면 그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3:21 없음.

 

3:22 없음.

 

3:23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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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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