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의 첫 메시지(예레미야 2:1-8)
Ⅰ. 여기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가지고 가서 전하라는 명령이 예레미야에게 내리고 있다. 일반적인 말로 하면, 그는 가서 "그들에게 고하라" (1:17)는 책임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그들에게 가서 "이것을" 고하라는 책임을 받고 있다. 사역자들은 그들이 그들의 사업의 어떤 부분을 엄숙히 착수하고자 할 때는 새로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신앙과 기도로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약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를 조심스럽게 비교하여, 이것이 서로 일치하는가 알게 하라. 그래서 그로 하여금 "주님이 나를 보내셨다" 나는 보내셨다고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는 몇몇 친구들과 더불어 세월을 보내며(아마 그런 것 같다) 율법을 연구하며 즐겁게 은둔 생활하던 아나돗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제는 번잡하게 시끄러운 도시인 예루살렘에 자기 모습을 나타내어, 가장 진지한 사람으로, 그리고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게, 또 아무도 항변하지 못하게 큰 소리로 외치라. 그리고 듣기를 거절한 그들의 귀에 들리도록 가까이 가서 외치라" 그리고 듣기를 거절한 그들의 귀에 외치지 않으면 안 된다.
Ⅱ. 그가 전해야 할 메시지. 그는 그들에게 그렇게나 오래도록 친절하셨던 하나님을 저버린 그들의 엄청난 배은망덕을 비난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들을 부끄럽게 하여 회개하고 돌이키게 하기 위함이며, 혹은 그들에게 이제 내리시는 하나님의 진노의 손길을 정당화하기 위함이었다.
1. 여기서 하나님은 그들이 처음에 한 민족으로 형성될 때 베푸셨던 그 자비로운 마음을 기억케 한다(2절). "나는 너를 위해 기억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너에게 기억나게 하겠다. 그리고 네가 선하게 되기 위해 그 기억을 새롭게 하리라. 나는 네 소년 때에 우의와 네 결혼 때의 사랑을 잊을 수 없다" 라고 말씀하신다.(1)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 친절했다는 말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자랑할 만한 이유가 되거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여 준 은총을 강청할 만한 그런 것은 결코 못된다(왜냐하면 그들 중 많은 자들이 불순종하고 비난했으며 그들이 돌이켜 하나님께 알현할 때도 그들은 자신들을 은근히 내세웠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을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시며 그들에게 그것을 탄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왜냐하면 비록 그들이 하나님께 보인 사랑은 적은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기쁘게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여호와를 믿고 그의 종 모세를 믿었을 때, 그들이 홍해에서 하나님을 찬양했을 때, 그들이 시내산 아래서 언약했을 때, 즉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우기가 지키고 순종하겠다" 고 한 것들이 "소년 때의 우의와 결혼 때의 사랑" 인 것이다. 그들의 하나님을 향하는 것같이 보였을 때 하나님은 "실로 그들은 나의 백성이요," 나에게 충성하며 "거짓되지 아니하는 자식들이 되리라" 고 말씀하셨다. 선하게 시작하고 아름답게 약속하고는 이행치 아니하고 준행치 아니하는 자들은 마땅히 소망적이고 약속되었던 출발의 언약으로서 책망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소년 때의 우의와 결혼 때의 사랑," 즉 우리가 하나님께 한 때 가졌던 열심과 그와 언약을 맺을 때의 애정과 결코 결실하지 못한 것이긴 하지만 그 싹과 꽃을 기억하신다. 우리가 한 번 넘어졌다는 사실과 우리의 첫 사랑을 가졌었다는 사실(계 2:4, 5; 갈 4:15)을 기억하기 위해, 그런 것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하다.
다음 두 가지 점에서 "소년 때의 우의" 가 나타났다.
[1] 그들은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 기둥의 인도를 따랐다. 그들이 때로는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말도 하고 가나안을 향해 매진하기도 했으나, 그들은 애굽으로 가지도 못했고 가나안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그들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하나님을 따랐고, 비록 그곳은 "씨 뿌리지 못하는 곳" 이었지만, 그들은 그들을 위해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했다. 하나님은 이것을 친절히 받으시고, 오랜 후까지도 그들의 찬양을 유희하고 계신 것이다. 비록 그들 중 많이 상실되었지만 아직도 그들을 이끄시는 인도하심은 결코 버리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종종 제자들을 꾸짖으셨으나, 그와 더불어 계속했기 때문에 그들을 참여하는 자들로 천거했다(눅 22:28).
광야에서 완전한 신앙과 완전한 자기 포기로 하나님을 따르게 하는 것은 소년 때와 결혼 때에 가지는 강한 애정이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을 이와 같이 따르던 자들이 그를 떠나 버리고 만다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2] 그들은 하나님의 교훈을 받아서 자기를 진중에 희막을 세웠고, 거기서 섬기기 위해 나아왔었다. 그때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거룩하였다. 그들은 선민으로 계약을 맺음으로써 하나님과 연합했다. 이와 같이 그들이 영으로 시작하였으나 "육체로" 마치는 것을 부끄러워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과거의 그 사실을 상기시켜 준 것이다.
(2) 혹은 이 말씀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친절로 이해될 수 있다. 예레미야는 나중에 이것을 다시 자세히 언급했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내가 그를 사랑하였다" (호 11:1). 그때에 하나님은 청년이 처녀와 결혼할 때" (사 62:5) 가지는 온갖 애정으로 그를 대하는 그 백성과 혼인을 맺었다. 그때는 "사랑의 때" 였다(겔 16:8).
[1] 하나님은 그들을 자기를 위해 성별하셨다. 그들이 죄많은 백성이었지만 그들과 또 그들 가운데 세운 교회와 맺은 계약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여호와께 거룩하게" 되었고, 그의 영광에 헌신되었으며, 그의 특별한 보호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소산 중 처음 익은 열매들이었고, 그가 이 세상에 새우신 첫교회였다. 그들은 첫 열매들이긴 했지만, 완전한 추수는 이방인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소산은 처음 익은 열매를 그에게 드려졌다. 그리고 그는 그들로 인하여 영광을 받으셨다. 유대 백성은 이와 같았다. 하나님이 이 세상으로부터 받으신 헌물과 세금과 충성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이었던가!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주로 그들로부터 받으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위해 따로 분리되는 것은 영광이었다. 모든 성도들은 이 영광을 차지한다. 그들은 그의 피조물들 중 첫 열매들이다(약 1:18).
[2] 하나님이 그들과 혼인하셨으므로 곧 그들의 문제와도 관계를 가지신 것이요 그들의 적이 곧 그의 적이 되었다(출 23:22). 그는 하나님의 소산의 첫 열매이기 때문에, 그를 삼키는 모든 민족은(이것은 그렇게 읽혀져야 한다)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이 첫 열매를 삼키든지 여호와께 거룩한 그밖의 어떤 것을 삼키고 착복하며, 그것들을 자기 자신의 용도로 바꾸어 버리는(레 5:15) 자들을 범죄자로 간주하는 것과 같이, 이들은 범죄했으며 유죄로 선고되며, 악이 그들에게 덮칠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백성을 해치는 자는, 그와 같은 위기에 처할 것이며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의 적수에게 보복하실 채비가 되어 있다. "나의 기름부음 받는 자에게 손을 대지 말라" (시 105:14, 15; 출 27:14)고 가장 교만한 왕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는 특별한 방법으로, 그들을 타락시키려고 시도하고 여호와께 거룩한 자들로 거룩함에서 떨어지게 하며 브올의 일로 미디안 사람과 다투시는 여호와(민 25:17, 18)를 증거하는 자들을 넘어지게 하는 자들을 대적했다.
[3] 그는 "그들을" 강한 손과 크게 두려운 일로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다" (신 4:34). 하나님은 그들을 친절한 손과 크신 돌보심으로 광대한 광야를 지나 인도하셨다(6절). 그 땅은 "사막과 구덩이 땅이요, 무덤의 땅이요, 사망의 음침한 땅" 이었다. 그 땅은 그들을 먹이기 위한 땅이 아니고, 그들을 매장하기 위한 땅이요, 거기서는 아무 것도 좋은 것을 기대할 수 없는 땅이었다. 그곳은 "건조한 땅" 이었기 때문이다. 오직 기대할 것은 온갖 종류의 두려워할 악뿐이었다. 그곳은 "사망의 음침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어두운 계곡을 그들은 40년 동안 행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다" 모세의 손에 있는 "지팡이" 와 "막대기" 가 "그들을 안위했고," 거기에서까지도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상(床)을 베푸셨다" (시 23:4, 5). 그래서 그들에게 구름 가운데서 빵을 주셨고, 바위 가운데서 마실 물을 부셨다. 그곳은 모든 민족이 포기해 버린 땅이요, 길도 없고 휴식처도 없는 곳이었다. 거기에는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기 때문에 통로가 없는 곳이요, 아무도 살지 아니하기 때문에 정착할 곳이 없는 곳이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아무도 다니지 아니한 길을 걷게 하시며, 홀로 거하고 혼자 설 수 있도록 인도하실 것이다. 이 여행의 고난은 이와 같이 지속되어 모든 것을 통과하여 드디어 그들의 여행의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그들을 인도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을 크게 하셨다. 모든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은 몸에 위험이 선하심을 크게 하셨다. 모든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은 몸에 위험이 있을 때나 영혼에 위험이 있을 때라도 광야같은 이 세상을 지나 안전한 이끄심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자신들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4] 드디어 하나님은 그들을 가나안에 정착케 하셨다(7절)." 내가 너희들 인도하여 기름진 땅에 인도했다." 그들은 "건조한 땅" 에서 오랜 세월을 지난 후이므로 그 땅은 더욱 마음에 드는 땅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 땅에서 나는 "과실과 그 아름다운" 것을 먹었고 또 그렇게 하도록 허락받았다. 나는 너희를 "갈멜 땅으로" (원뜻은 이렇게 되어 있다) 인도했다. 갈멜은 특별히 풍요한 땅이었다. 가나안은 큰 결실의 밭과 같은 땅이었다(신 8:7).
[5] 하나님은 또한 그들에게 지식과 은혜의 수단을 주셨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하셨다. 이것이 8절에서 의미된 것이다. 그들은 "율법을 다루고" 그것을 낭독하며, 사람들에게 해석하는 제사장직을 가졌다. 그것이 그들의 직분의 일부분이었다(신 33:8). 그들은 그 백성을 인도하고 그들의 문제를 돌보며 관리하고 재판하는 목회자들을 가졌다. 그들은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예언했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했다.
2. 그는 그들의 엄청난 배은망덕을 책망하시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베푸신 것을 악으로 보답했음을 책망하신다. 그들 모두 나와 이 책임에 대한 답을 하게 하라(4절). 그것은 모든 이스라엘 족속을 거슬러 하나님의 이름으로 공개된 것이다. 즉 그들은 누구도 "죄없다" 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은 그들에게 무슨 불의함이나 불친절함이 있었으면 말하라고 하신다. 그가 그들에게 어떤 일에 있어서 은총을 베푸셨을 지라도 만일 그가 다른 일에 있어서 그들에게 심하게 대하셨다면 그들은 용서없이 함께 서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멀리한 원인을 드러내기 위해 분명하게 제시하신다(5절). "너희 열조가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관대 나를 멀리 하는가? 그의 계명이 너희에게 어떤 고된 것이 되었는가 혹은 너희에게 어떤 적합치 못하고 공정치 못하며 혹은 너희를 억지로 격에 맞지 않는 것을 강요한 일이 있었던가? 그의 약속이 너희를 속인 것이 있으면 너희가 어떤 것을 그에게서 기대했다가 후에 실망할 것이 있었던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너희 스스로 파기하고 그것이 너무 심한 계약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너희가 그것에 의지하여 살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다. 너희가 당한 실망은 결코 하나님 때문이 아니고 너희 자신 때문이다. 그의 재명의 멍에는 쉽고 그것을 준행하면 크나큰 상급이 있다."
하나님을 저버린 자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런 일을 하도록 어떤 자극을 부셨다고 말할 수 없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죄인들의 양심에 안전하게 고발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와 같은 탄원을 한 개으른 종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로" 심판을 받았다(눅 19:22) 비록 그가 우리를 괴롭게 할지라도 우리는 그에게 불의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는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르시지 않으신다. 여호와의 길은 의심할 바 없이 공평하고 모든 불의는 우리에게 있다.
(2) 그럼에도 그들은 그에게 대단히 불의하고 불친절하다고 비난한다.
[1] 그들은 그의 사명을 저버렸다. "그들은 나를 떠났다. 아니 그들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갔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들의 의무에서 자신들을 멀리 하는 방법과 그의 계명과 자신들의 신념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떠나는 방법을 연구했다. 신앙을 저버린 자들은 보통 그것을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들보다 더 거리가 멀고 신앙에 더 크게 반대하는 경우가 많다.
[2] 그들은 우상 숭배를 위해 신앙을 저버렸다. 이것이 하나님과 그분에 대한 예배에 더 큰 불명예가 되게 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났다. 그것이 그들을 더 낳은 상태가 되게 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신들을 속이는 결과가 되었다. 그들은 무익한 것을 따라행했다. 즉 그들은 우상을 따랐다. 우상은 헛것이요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다(고전 8:4; 신 32:21; 렘 14:22). 우상 숭배는 헛된 것이다(행 14:15). 우상 숭배자들은 헛되다. 왜냐하면 우상을 만드는 자들은 우상들과 같은즉 (시 115:8) 그들이 예배하는 상들은 나무나 돌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3] 그들은 우상 숭배를 통해 모든 악한 행위를 끌어 들였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아름다운 땅에 들어갔을 때 그들 자신을 더럽히고 스스로 하나님 섬기기에 합당치 못하게 함으로서 그들이 그 땅을 더렵혔다(7절). 그 땅은 하나님의 땅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소작인들에 불과하며 그 땅에 우거하는 자들이었다(레 25:23). 그 땅은 그의 기업이요 거룩한 땅, 임마누엘의 땅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땅을 진노하시며 이스라엘을 크게 두렵게 하시는 하나님에까지 혐오의 땅이 되게 했다.
[4] 하나님을 저버린 후 그들이 곧 악한 것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시 그에게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아니했고 발걸음을 돌리려고 하지 않았다. 백성이나 제사장들도 하나님을 관심하지 않았고 하나님에 대한 의무도 전혀 고려하지 않았으며 그의 은총을 회복하고자 하는 욕망도 전혀 나타내지 않았다.
첫째, 그 백성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6절)고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으로 그에 관한 규례 안에서 훈련받고 또 자주 그가 그에게 택한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 "애굽에서 그들을 인도해냈다" 는 말도 들었지만 그들은 결코 그에게 묻지도 않았고, 그의 길을 알려는 갈망도 가지지 않았다.
둘째, 제사장들이 여호와께서 어디 예시냐?" (8절) 말하지 않았다. 직접 그에게 봉사해야 할 직무를 가진 자들이 그를 알고 그를 칭송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으로 그 백성을 가르쳐야 할 사람들이 그분에 관한 지식얻는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율법을 다루는 서기관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그의 뜻을 알지 못했으며, 전혀 성서를 해석할 수 없고, 바르게 설명할 수 없게 되었다. 일반인들이 범죄하지 않도록 지켜야 할 사역자들이 범죄의 장본인이 되어 있었다. "그들이 나를 거역하여 범죄하였느니라."
거짓 예언자들은 바알과 그의 이름을 가지고 바알의 영광을 위해 예언했고, 여호와의 선지자들과 맞서기 위해 악한 왕들에게서 후원과 지지를 받았다. 바알의 예언자들은 바알 제사장들과 연합하여 무익한 일, 즉 예배자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우상들을 따라 행했다. 어떻게 최선의 품성이 찬탈되고 최선의 직분이 쉽게 부패하며 죄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장님이 장님을 인도할" 때에 그 백성의 파멸이 어떠한지 살펴 보라.
이스라엘에 대한 충고(1) (예레미야 2:9-13)
하나님을 저버린 그들의 악한 배은을 보인 후, 여기서는 이 예언자가 그들의 비교할 데 없는 변덕스러움과 우둔함을 보여주고 있다(9절). "그러므로 내가 여전히 너희와 다투리라. "하나님은 죄인들을 벌하시기 전에 그들이 회개케 하기 위해 그들에게 항변하신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더 나아가서 죄의 악함에 관해 많이 언급될 때에도 거기에는 더 많은 할 말이 아직 남아 있으며 한 가지 책임에 소재가 선하게 될 때에는 또 다른 것이 강요되며 우리가 많은 것을 말했을 때라도 아직 하나님을 위해서는 해야 할 말이 있다(욥 36:2). 사람들에게 그들의 죄를 드러내기 위해 죄인들을 상대하는 자들은 다양논증을 내세울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들의 열조와 다투시기 전에 왜 그들이 허탄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는지(5절) 질문하셨다.
이제 하나님은 열조들의 전통을 받아 헛된 변론을 하는 자들과 그들의 후손들과 후손들의 후손, 즉 모든 세대에서 그들의 전철을 밟아 반항하는 모든 자들과 다투신다. 하나님을 저버린 자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충분한 명분을 세우시기 위하여 그들과 기꺼이 공정하게 변론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는 우리가 스스로 변론해야 할 것을 가지고 우리와 변론하신다.
Ⅰ. 그는 그들이 모든 민족들의 관습과 반대로 행동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이웃 족속들은 그들이 참 하나님에 대한 충성보다 그들의 거짓신들에게 더욱 확고하고 충실한 충성을 나타내었다. 그들은 여러 민족들과 같이 되겠다는 야망을 가졌으나 이 점에 있어서만은 그들과 같지 못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느 민족의 그들의 신들을 바꾸었으며(10.11절), 혹은 그들의 변하기를 잘한 예가 있으면 말해 보라고 도전하신다. 그들로 하여금 옛 기록이나 현재의 깃딤, 헬라, 유럽의 여러 섬들과 나라들, 또 더 문화가 발달되고 지식 수준이 높은 나라들과 좀더 거칠고 야만적인 나라로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게달에 있는 나라들을 살피게 하라. 비록 그들이 자기들에게 그들의 신들이 어떤 호의를 보이지 못했고 또 그들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아무 것도 할 수 없어도 어느 민족도 그들의 신을 바꾼 예는 볼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신들을 위해 이러한 존경을 가졌고 그 신들에 대하여 대단히 좋은 편견을 가졌으며 그의 열조가 결정한 선택에 크나큰 존경을 나타내었다. 이 신들은 비록 나무나 돌로 만들어진 신들이었지만 그들은 그것들을 은이나 금으로 만든 신과 바꾸지도 않았고 더욱이 살아계신 참된 하나님과도 바꾸지 않았다. 우리가 이것 때문에 그들을 칭찬하겠는가? 우리는 그들을 칭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바꿀 아무런 원인도 가지지 아니한 오직 유일한 백성인 바로 그들이 하나님을 바꾼 유일한 백성이 되어버린 이스라엘을 책망하기 위해 마땅히 강요되어야 할 이야기다. 사람은 자기가 자라난 종교가 비록 대단히 불합리하고 엄청난 허위가 있어도 거기서 떠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주목하자. 우상 숭배자들의 열심과 집념은 자기 신앙에 냉담하고 일관성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마땅히 부끄럽게 할 것이다.
Ⅱ. 그는 그들이 상식과 반대로 행동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즉 그들은 신을 바꾸었을 뿐 아니라(그렇게 행하는것이 때때로 우리의 의무나 지혜가 될지 모른다) 그들은 더 나쁜 것과 바꾸었고 그들 자신에게 해로운 계약으로 바꾸었다.
1. 그들은 그들의 영광이요 참으로 그들을 영광스럽게 하시며 모든 길에서 그들에게 영예를 주시는 하나님을 떠났다. 또한 그들이 겸손한 신뢰로 자기들의 하나님으로 영광돌려야 할 분이며 그 자신 영광스러운 하나님이요 그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자들의 영광도 되시는 그분을 떠났다. 그는 특별히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었다. 그의 영광은 종종 그들의 성막에 나타났기 때문이다.2. 그들은 자기들에게 선한 일도 행할 수 없고 예배자들에게 유익도 줄 수 없는 신들을 가깝게 했다. 우상 숭배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부끄러운 것과 바꾸었고(롬 1:23) 그들 자신의 것을 따라 행한다. 그들이 하나님을 불명예스럽게 할 때에 그들은 스스로를 부끄럽게 하고 멸시하는 것이며 그들 자신이 이익에 적이 되게 한다. 하나님을 저버린 자들이 어떤 것으로 돌아가든지 그것은 그들에게 결코 어떤 유익도 행치 않을 것이고 그것이 그들에게 아첨하고 일시 즐겁게는 할지언정 유익하게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견고한 하늘이 하나님을 배신한 이 배교자들의 죄와 어리석음에 놀랐다(12, 13절). "너 하늘아 이 일을 인하여 놀랄지어다." 땅은 전체로 부패했기 때문에 이런일에 관심 가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과 하늘에 있는 것들은 이 일에 놀랄 것이다. 이러한 배은망덕한 자들을 보고 해가 붉어지며 이러한 은혜를 모르는 악인들에게 빛을 비추기를 부끄러워할 것이다. 하나님을 저버린 자들은 하늘의 무리 즉 해, 달, 별들을 예배했다. 이런 것들에게 바친 존경으로 기쁨이 되는 대신에 이런 것들은 놀라며 크게 두려움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들에게 예배하는 자들에게 어떤 근거를 주기보다 차라리 적막하게 하며 완전히 기운을 진하게 하며 그들의 빛마저 빼앗는 결과가 될 것이다. 흑자는 이것을 "하늘의 천사들" 이라고 말한다. 만일 그들의 하나님께로 영혼들이 돌아가는 것을 기뻐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번역하는 영혼들에 대해서도 놀라고 심히 두려워하리라는 것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이 백성의 행위가 하나님을 향한다는 것은 다음의 몇 가지를 의미한다.
(1) 이치를 찾아내는 척하는 사람들은 사실은 언제나 대단히 불합리한 어떤 일을 행하고 있다는 것 우리가 놀라고 이상히 생각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2) 모든 사람이 그의 영광을 갈망하는 우리의 조물주에 대해서 불경하고 경멸하는 것에 대해서 거룩한 분노를 마땅히 가지는 것을 말한다.
(3) 하나님을 반역하는 행위의 결과를 생각하고 떨지 모른다. 결국 이것의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으로부터 떠나는 사람들이 받을 댓가인 진노와 저주를 심히 두렵게 생각하라.
이제 이 모든 두려움에 대해 생각되어야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의 백성, 즉 내가 가르치고 다스려온 백성이 두 가지 큰 악을 범하였으니 은혜를 저버린 것과 우매함이라. 그들은 자기들의 의무와 자기들의 이익과 반대되는 행동을 했다" 는 것이다.
[1] 그들은 마치 하나님이 그들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처럼 그들의 등을 돌려댐으로 하나님을 경멸했다. "그들은 그 안에서 풍성하고 끊임없는 어느 위로를 받고 그들이 여러 요한 안심을 가지며 또한 그것은 값없이 받을 수 있는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렸다." 하나님은 그들의 "생명의 원천" 이다(시 36:9). 그 분 안에 은혜의 강건함의 모든 풍성함이 있다. 우리의 모든 근원은 그에게 있고 우리의 생명의 시내는 그로부터 흘러나온다. 그를 저버리는 것은 결과적으로 이것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는 은총의 선물로 흘러 넘치고 항상 흐르는 "생수의 근원" 으로서 풍성한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었다. 그러므로 그를 저버리는 것은 그의 애호를 받아들이기를 거절하는 것이요 사랑에 대한 감사와 그의 친절이 요구하는 찬양을 거절하는 것이다.
[2] 그들은 자신들을 속였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의 행운을 저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되고 무가치한 짓이다. 그들은 스스로 저수통을 파고 물을 옮기기 위해 혹은 빗물을 받기 위해 땅이나 바위에 웅덩이나 연못을 파는데 큰 수고를 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었다. 그들이 갈증을 채우려고 웅덩이를 찾아갔을 때 거기서 그들은 진흙과 수렁과 고인 우물의 더러운 쓰레기 외에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이와 같으며 하나님을 떠나 우상에게로 돌아가는 자들은 이와 같은 경험을 가지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어떤 피조물들 - 즉 부나 쾌락이나 명예나-이런 것으로 우상을 삼는다면, 만일 우리의 행복을 이런 것에 두고 또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시는 위로와 만족을 이런 것에서 찾는다면-만일 이런 우상을 우리의 기쁨과 사랑과 희망과 신념으로 삼는다면 우리가 아무리 수고하여 파고 채우려고 애써도 기껏해야 더러운 물도 거의 담을 수 없고 매마르고 바닥이 드러나며 조금 물이 있어도 곧 부패하고 더러운 물이 담긴 웅덩이만 보게 될 것이다. 아니 그것은 더운 날씨에 깨지고 틈나서 우리가 물이 가장 필요할 때 물이 없는(욥 6:15)터진 웅덩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오직 주님에게만 집착하자. 그렇지 않고 우리가 그밖에 어디로 가겠는가? 그는 영생의 말씀을 가지고 계신다.
이스라엘에 대한 충고(2) (예레미야 2:14-19)
더 나아가서 이 예언자는 하나님을 저버린 그들의 우둔함을 드러내기 위해 그들이 그렇게 행함으로 이미 그들에가 가져온 엄청난 재앙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 그들은 비싼 댓가를 치렀다. 즉 이 사실 때문에 그들의 나라에 온갖 재앙이 덮쳤고,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더 많은 더 큰 재앙이 내릴 뿐 피할 길이 없는 그런 신음에 지금 눌려 있다. 이제 그들이 자기들이 어리석음 때문에 어떤 댓가를 받는지 살펴보자.
Ⅰ. 그들의 숙적인 이웃 나라들은 그들을 쳐서 이기며 이것은 그들의 죄 때문으로 된 것이다.
1. 그들은 노예가 되었고 자유를 잃었다(14절). 이스라엘이 종이냐? 아니다.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다(출 4:22). 그들은 자녀들이다. 그들은 후사들이다. 아니, 그들의 혈통은 지체가 높다. 그들은 하나님의 친구인 아브라함의 씨요 그의 택하심을 입은 야곱의 씨다. 그는 날 때부터 노예인가? 아니다. 그는 여종의 아들이 아니고 자유한 여인의 아들이다. 그들은 섬기기 위한 사람들이 아니고 다스리도록 정해진 자들이었다. 그들의 규약에 있는 모든 것은 자유와 영예의 표지로 점철되어 있다. 그런데 왜 그는 그의 자유를 잃게 되었는가? 왜 그는 날 때부터 된 노예와 같이, 종과 같이 쓰였는가? 왜 그는 유익하게 하지 못하는 우상과(11절) 자기 정욕에 스스로 노예가 되고 말았는가? 어찌하여 이와 같은 생득권이 죽 한 그릇에 팔려야 했으며 이러한 왕관이 짓밟히어 흙 속에 묻히고 말았는가! 왜 그는 억압자의 노예가 되었는가? 하나님은 히브리인 종은 매 칠 년마다 자유케 하셨으며 그들의 노예는 이방인 중에서 취하고 형제 가운데서는 취하지 못하게 하셨다(레 25:44, 46).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백들은 그들의 신하들을 노예로 삼았다(34:11).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복되고 명예롭게 하신 그들의 나라가 비천하고 비참하게 되었다. 이웃 방패들과 힘있는 자들이 그들에게 침입해 들어와서 이들 중에서 자기 땅의 노예로 삼기까지 했고 혹은 아마도 사람들은 외국에 노예로 팔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그들은 그들의 자유를 잃게 되었는가? "오직 그들은 그들의 죄악을 인하여 팔렸다" (사 50:1). 우리는 이것을 영적인 문제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영혼은 종인가?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노예인가? 아니다. 그것은 그렇지 않다. 그러면 왜 그것은 팔렸는가? 그것은 그 자신의 자유를 팔아버렸기 때문이요 그 스스로 욕망과 정욕에 맡겨 노예가 되게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슬픈 일이요 마땅히 슬퍼할 일이다.2. 그들은 빈궁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재산을 상실하고 말았다. 하나님은 그들을 풍요의 땅으로 인도하셨다(7절). 그러나 모든 그들의 이웃들이 이 비극의 미끼가 되었다(15절). 어린 사자들이 그들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소리를 날려 그의 땅을 황무케 했다.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끊임없는 공포가 되었다. 때로는 한 강한 원수가, 또 때로는 다른 적수가, 또 때로는 많은 원수가 동맹하여 그를 향해 달려들어 그를 넘어뜨리고 이기었다. 그들은 그의 땅의 결실을 털어 갔고 그 땅을 황무케 하였으며 그의 성읍들을 불태웠다. 그들이 먼저 그 성읍들을 약탈하자 거기에는 거민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거기에는 사람이 살집도 없고 사람들은 모두 포로가 되어 끌려갔기 때문이었다.
3. 그들은 학대를 받고 욕을 당하였으며 정수리를 상하였다(16절). "군사적인 용기로 이름도 나지 아니하고 힘도 없는 비열한 백성인 놉과 다바네스의 자손들까지도 네 머리의 왕관을 부수고 그것을 모독했다. 그들과의 싸움에서는 언제나 그들이 강하였고 너는 상한 머리로 물러섰다. 예루살렘 곁 네 나라의 중요 부분이 그들에게 희생이 되어 왔고 지금도 희생이 되고 있다." 유다의 상태는 역대하 33장 11절에서 본 대로 얼마나 비참해져 있었는가? 그리고 아마 그것은 별로 회복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4. 이 모든 것이 그들의 죄 때문이었다(17절).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길로 인도할 때에 네가 나를 떠남으로 이를 자취함이 아니냐." 그들이 그 민족들과 죄된 연합을 했고 특히 그들의 우상 숭배의 규례와 규칙을 따라 일치됨으로서 먼저 신앙 고백을 했다가 후에 그것을 저버리는 모든 사람들과 같이 그들 스스로 대단히 비천하고 멸시받을 행위를 저질렀던 것이다. 이제는 그들의 율법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영예롭게 하고 두렵게 보이게 했던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노엽게 함으로서 그들을 그들의 원수는 손에 넘어가게 했고 그들에게 징계를 내려 그들을 대적하는 원수에게 승리를 주었다. "이와같이 너희는 스스로 이 비극을 야기시켰고 주 너희 하나님을 저버림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배반하였고 그의 보호하심에서 스스로 떠났다. 보호하심과 충성은 함께 있으므로 충성을 배반하면 보호하심을 받을 수 없다. "어느 때에 어떤 환난을 당하든지 우리는 그것을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일로 하나님을 저버리면 그것이 우리 머리로 돌아오는 재앙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길로 인도할 때에 너희는 하나님을 저버렸다. 즉 하나님이 너희를 축복의 평안과 안정의 길로 인도하고 너희가 복된 길에 있을 그때에 너희가 그를 저버렸다. 그러므로 이것은 너희 자신이 자신의 문에 빗장을 가로지른 것이 된 것이다."
Ⅱ. 그들의 이웃 족속들. 이들은 친구로 가장하는 자들이요, 속이는 자들이며 그들을 곤란케 하는 자들이요 그들을 돕지 않는 자들이었다. 이것도 역시 그들의 죄 때문이었다.
1. 그들은 헛되이 애굽과 앗수로에게 도움을 구했다(18절). "네가 애급 길에 있음은 어찜이뇨? 너희가 위험으로 염려할 때 도움을 바라고 애굽으로 달려갔다(사 30:1, 2; 31:1). 너희는 시흘(즉 나일 강의 신)의 물을 마시고자 했다. 너희는 그들의 무리를 의지했고 그들이 너희에게 한 아름다운 약속으로 힘을 다해 누구를 보내거나, 유프라데스 강물로 스스로 만족하게 하리라 생각하고 앗수르의 길을 행하였다. 너희는 거기서 무엇을 해야 했는가? 너희는 그들을 의뢰함으로써 무엇을 얻었는가? 그들은 도움이 되지 못했고 믿을 수 없는 자들이었으며 너희가 강과 같이 생각했던 그들이 터진 웅덩이와 같았다."2. 이것 역시 그들의 죄 때문이었다. 심판은 그들에게 불가피하게 임할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죄의 댓가이다. 이 심판을 막기 위해 도움을 청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19절) "네 악이 너를 징계하리라.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를 구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너희가 하나님을 저버린 것이 악한 것이라는 전체적인 문제를 알고 살펴라. 하나님을 저버린 것은 원수는 참으로 원수되게 하는 것이요 친구는 헛된 친구로 만드는 것이 될 뿐이다." 여기서 다음의 사실을 살펴보자.
(1) 죄의 본성. 그것은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영혼이 하나님과 소외되는 것이요 하나님을 혐오하는 상태다.
(2) 죄의 원인. 그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속에 선한 원리의 결핍 때문이요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의 결핍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배신의 근저에 깔려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그분의 못마땅해 하심에 대한 어떤 공포심도 가지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게 된다.
(3) 죄의 사악성. 그것은 악한 현상이고 가혹한 상태이다. 죄란 악한 것이요, 그 안에 선한 것은 전혀 없는 오직 악이며 모든 다른 악의 뿌리요 원인이 되는 악이다. 그것은 참으로 악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의 본성에 가장 큰 반대 현상일 뿐 아니라 인간 본성에 대해서는 가장 큰 부패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쓴 것이다. 죄의 상태는 쓴 담낭이며, 모든 죄적인 수단은 그 목적 속에 쓴 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의 값은 사망이다. 사망은 쓰다.
(4) 죄의 치명적 결과. 죄는 그 자체 안에 악과 쓴 것을 가지고 있듯이 또한 우리는 비참하게 하는 직접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네 패역이 이루어 가서 너를 파멸하고 멸망케 할 뿐 아니라, 현재의 징계와 책망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것들이 너에게 확실히 고통을 가져다 줄 것이고 죄는 그 자체가 네게 형벌이 되는 것이라고 언급된데로 형벌은 불가피하게 그 죄에 동반할 것이다. 아니, 형벌은 그것의 본성에서나 환경에 있어서 죄에 직접적인 대답이 될 것이다. 즉 너는 형벌이란 의미 안에서 죄의 논성을 읽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형벌의 공의성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에 너는 자신을 위해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네 자신의 악함이 너를 확신케 하고 너의 입을 영원히 다물게 할 것이며 여호와는 의로우시다라고 스스로 인정치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5) 이 모든 것의 용도와 소용. "그러므로 이것을 보고 알라. 그리고 네 죄를 회개하라. 그리하면 네게 징계가 되는 불의로 말미암아 네가 파멸치 않게 될지 모른다."
이스라엘에 대한 충고(3) (예레미야 2:20-28)
여기에서도 패역한 백성을 향해 예레미야는 계속해서 고발하고 있다. 여기서 다음의 사실을 관찰할 수 있다.
Ⅰ. 그들에게 고발하는 죄 자체- 즉 우상 숭배. 이것은 그들이 그렇게나 악명 높이 죄악에 빠진 가장 큰 원인이었다.
1. 그들은 우상 숭배하는 장소에 자주 모였다(20절). "모든 높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즉 이교도와 같이 높은 산과 숲 속에서 어리석은 유희와 예배를 드려, 마치 안정되지 못하고 불안하고 민족을 얻지 못한 사람과 같이 이리 저리 방황하였다. 그래서 거짓신들을 예배함으로써 음란을 행했다. 거짓 신을 예배하는 것은 영적인 매음이요, 보통 영적 간음은 육체적 음란도 동반하는 것이 상례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은 끝없이 방황하며 방탕한 욕정은 안정될 수 없음을 주목하자.2.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우상들을 만들었고 이것들에게 신적인 영예를 돌렸다(26, 27절). 일반 백성들 뿐 아니라 백성들로 하여금 이런 악한 일을 못하도록 막아야 할 왕들과 방백들 그리고 백성들에게 선한 일을 가르쳐야 할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까지도 사악하고 주정뱅이 같이 또 어리석게 되었고 오히려 이러한 잘못된 망상에 대해서는 강하게 집착되어 나무를 향하여 "너는 나의 아비라" (즉 너는 나를 지은 신이요 나는 너에게 은혜를 입고 있으며 너를 의지한다)고 말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돌을 향하여 즉 돌로 만든 우상을 향해서는 "너는 나를 낳았다. 혹은 나를 산출했다. 그러므로 너는 나를 보호하며 나에게 모든 것을 마련해 주며 나를 기른다" 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우리를 지으신 우리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이보다 더 큰 모역이 무엇이겠는가?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본래적인 관계를 의절(義絶)하는 명백한 태도이다. 그 자체가 불합리하고 불가능하겠지만 나무와 돌을 자기들의 부모로 만들고 자신들을 나무나 돌보다도 못한 위치에 두는 행위를 인정하는 것보다 자신과 자신의 이성에 대하여 더 큰 모욕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런 것들을 처음 예배의 대상으로 만들었을 때 그들은 아마도 하늘에 능력이나 영에 의해 생기가 없어졌고 우상 숭배자들은 자기들의 상상 안에서 헛되게 그렇게 했을 뿐이었다. 방백들과 제사장들까지도 바로 이 우상이 비록 나무와 돌로 만들어졌지만 그들의 아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따라서 그것들을 숭배했다.
3. 그들은 이 쓰레기더미 같은 우상들을 끝없이 증가시켰다(28절). "유다여 너의 신들이 너의 성읍 수와 같도다." 그들이 한 분이시며 모든 것에 충만하신 하나님을 저버렸을 때
(1) 그들이 가진 어떤 신들을 가지고도 만족을 얻지 못했고 오히려 더욱 갈급하였다. 그것은 우상 숭배란 탐욕과 같은 것으로 영적 우상 숭배도 마찬가지다(사람은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이 가지고자 한다). 이것이 사람이 만든 우상으로는 만족과 충만함을 얻을 수 없다는 분명한 증거이며, 숭배자들로 하여금 여기서 완전함을 얻을 수 없게 한다.
(2) 그들은 하나의 신으로 만족할 수 없다. 그들은 통일성의 중심을 떠나 버렸기 때문에, 끝없는 불일치의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한 성읍이 어떤 한 신에 몰입된 반면, 다른 성읍은 다른 신에 매혹되었다. 각각은 그들을 가깝게 있어 주는 그 자신들의 신에 열심이었고 그들 자신에 관한 특별한 관심에 따른 신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오직 한 분 하나님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을 수 많은 신들 중에서 헛되이 찾고자 했다.
Ⅱ. 이 죄의 증거. 이것은 입증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사실이 가지고 있는 불명예스러운 형적이 증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1. 그들은 죄를 부인하고자 했고, "죄없다" 라고 변호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잿물로 씻고 많은 비누로 씻음으로서 그들이 이 죄에서 면죄되어 있는 척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해서 변명하고 죄를 감소시키는 많은 구실을 내걸었다(22절). 그들은 이것들을 신들로 예배하지 않고 귀신으로 그리고 불멸의 하나님과 숙명적인 인간사이에 있는 매개자로 숭배했을 뿐이라고 했으며 그들이 이런 것들에게 바친 존경은 신에게 드리는 영예가 아니고 단순히 시민적인 존경에 불과하다고 변명했고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신념을 흐르게 하고 그의 진노의 두려움에서 자신들을 가리고자 했다. 아니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그 행위 자체를 뻔뻔스럽게 부인했다. 그들은 "나는 더럽히지 아니하였다. 바알들을 좇지 아니하였다" (23절)라고 말했다. 그들은 비밀히 그 일을 행했고 부지런히 숨겼기 때문이(겔 8:12) 아무도 그 일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놓고 그것을 부인했다. 다른 일에서와 같이 여기에서도 그들의 행위는 잠언 30장 20절에서 "음녀의 자취도 그러하니라. 그가 말하기를 내가 악을 행치 아니하였다 함과 같다."2. 그들의 이러한 모든 핑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죄는 나타났고 선고되었다. "네가 어찌 사실을 부인할 수 있으며, 나는 바알을 좇지 아니하였다 할 수 있느냐. 네가 어찌 죄가 없다 할 수 있으며 나는 더럽히지 아니하였다 할 수 있는가?"
예레미야는 그들의 뻔뻔스러움에 대하여 놀라움으로 말하기를, "그것이 분명한 사실인데도 어찌 너히는 얼굴을 들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라고 했다.
(1) "하나님의 전지(全知)하심이 너에 대하여 증거하셨다. 너의 불의가 네 앞에 나타나 있나니라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이 내게 쌓이고 내 곳간에 봉하여 있다(신 32:34; 욥 21:19; 호 13:12). 그것이 깊이 새겨져 있고 내 앞에 착색되어 있다" 라고 흑자는 해석한다. "비록 네가 살인자와 같이 살해당한자의 피의 얼룩을옷에서 지우고자 해도 그것은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안이 거기에 머물러 있고 진리를 따라 심판이 있을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2) "네 자신의 양심이 증거하고 있다. 골짜기 속에 있는 네길을 보라" (그들은 높은 산 위에서 뿐 아니라 골짜기에서도 우상들을 예배했다. 사 57:5, 6). 그들은 벧브을 맞은 편 골짜기에서 (흑자는 그렇게 읽음) 바알브올을 예배했다. 이것은 마치 예레미야가 브올의 죄악까지 멀리 되돌아보고 하는 말과 같다(신 34:6; 민 25:3). 그러나 만일 이것이 어떤 구체적인 짜기를 의미하고 있다면, 확실히 이것은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 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곳은 그들이 자기들의 자녀들을 몰록에서 바쳤고 그것 때문에 어떤 것보다도 더 그들을 쳐서 증거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골짜기 속에 있는 길을 보라. 네 행한 바를 알 것이니라."
Ⅲ. 그들이 저지른 죄의 악화. 그것은 그 행위를 엄청나게 큰 죄가 되게 했다.
1.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큰 일들을 행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거역하고 그를 향해 반기를 들었다(20절). "옛적부터 내가 네 멍에를 꺾고 네 결박을 끊었다." 이것은 그들을 애굽 땅 "속박의 집" 에서 이끌어낸 것을 말한다. 그것은 그것을 기억하지 못했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기억하고 계셨다. 하나님은 그들이 그 앞에 다른 신을 두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을 때는 언제나 이 말씀 즉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이끌어낸 여호와 하나님이라" 는 말씀을 내세우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풀어주신 이러한 굴레는 마땅히 그들을 영원토록 하나님께 묶어두는 계기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노예의 굴레를 끌어 주신 하나님에 대한 의무가 지킬 굴레를 배은망덕하게도 끌러버린 것이다.2. 그들은 쾌히 약속해 놓고 그들의 약속을 이행치 않았다. "너는 말하기를 나는 범죄치 않겠나이다라고 했다. 구원의 자비가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을 때에 너는 그것에 감사하며 네 하나님에게 계속적인 성실을 가장 거룩한 줄로 기거이 매고 결코 그를 저버리지 않니했다." 그들은 말했다. "아니니이다. 우리가 정녕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수 24:21). 얼마나 자주 범죄치 않겠노라고, 더 이상 거역치 않겠다고 말하고는 다시 거짓된 인사와 같이 옆길로 빠지며 죄를 반복하고 더해 왔던가!
3. 하나님이 처음에 그들을 한 백성으로 이루어 주셨을 때, 그들이 가졌던 모습에서 비참하게 타락되었다(21절). "내가 너를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교회와 국가 양면에 있어 그들의 다스림의 제도는 탁월하였고 그들의 율법은 의로왔으며 모든 규례는 유익한 것이었고 대단히 의미심상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처음 가나안에 정착했을 때는 그들 모두가 선한 사람의 세대였다.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사는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이 사는 날 동안 여호아를 섬겼더라" (수 24:31). 그들은 "순진한 참 종자" 였고 선택된 포도원에 심겨진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르게 나타났다. 바로 다음 세대에 가서 그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했고 그가 행하신 일도 몰랐다(삿 2:10). 그래서 그들은 점점 나쁘게 되어 마침내 낯선 포도원에 나쁜 씨종으로 심기우고 말았다. 지금 그들의 상태는 처음의 그들의 상태와는 반대가 되었다. 그들의 규례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그들에게는 행복하게 형성되었던 백성에게 기대할 수 있는 선한 어떤 것이라고 전혀없는 상태가 되었고, 그들의 조상들이 가졌던 순수함과 경건함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포도원은 소돔의 포도원과 같이 되었다(신 32:32). 이것은 인간의 본성에 합당하게 적용될지 모른다. 이것은 위대한 창조자에 의하여 귀한 포도나무 곧 참종자로 심겨졌다(하나님은 사람을 바르게 만드셨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그것은 완전히 타락했고 이방 포도나무의 타락한 씨종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것은 담낭과 쓴 열매를 맺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하나님께도 그런 존재가 되었고 극히 혐오스럽고 반역하는 씨종이 되었다.
4. 그들은 우상 숭배에 열심이 맹려 하여 그들의 우상에 망령이 들었고 새로운 우상들을 좋아했으며 하나님 말씀으로나 그의 권유하심으로도 그들의 우상에 대한 열망을 막을 수 없었다. 그들이 죄를 추구하는 욕정이 그렇게나 강했던 것이다. 그들은 발이 빠른 암약대가 그 길을 어지러이 달림에 비유되고 암컷이 찾음 같으며(23절) 광야에 익숙한 들암나귀가(24절) 노동으로 길들어지지 아니하고 대단히 원기 왕성하여 숫나귀를 보고 그 성욕이 동함으로 헐떡거림 같다. 이런 경우에 "누가 그것을 막으리요?" 누가 암나귀가 욕구에 끌려가는 길을 막겠는가? 이런 암나귀를 찾는 자들은 그것을 동경치 아니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쓸데 없는 일인 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암나귀가 새끼를 베어 커질 때까지, 또 암나귀가 만삭되는 달까지(욥 39:2) 어느 정도 인내를 가지면 될 것이다. 암나귀가 몸이 무겁고 움직이기 거북하게 될 때 그때는 그들이 그 암나귀를 찾게 되고 그들을 피해 빨리 달아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1) 열망하는 정욕은 동물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으로, 양심으로 그리고 명예로서 이런 정욕에 빠지는 데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들은 야생 짐승들로 간주될 것이며 야생 망아지와 별반 다를바 없다. 이때는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이성적 존재라고 간주하지 못하게 하자.
(2) 우상 숭배는 이상하게 도취하는 힘이 있고 그것에 몰입한 자들은 거기에서 치유되기에는 대단한 어려움이 있다. 그것에 대한 열정은 어떤 것보다도 완고하다.
(3) 그것에 대한 그들의 욕망은 대단히 강열하기 때문에 그들을 막으려는 시도는 쓸 데 없다. 그렇게 행하는 자들은 헛되이 스스로 지치고 말 것이다. "에브라임은 우상과 야합했다. 그대로 혼자 버려두라."
(4) 가장 강열한 것이 길들여지고 가장 열정적인 갈망이 제어 될 때가 올 것이다. 고통과 고뇌의 때가 그들에게 임할 것이다. 그 때 그들의 귀들은 훈련시키는 소리를 향해 열릴 것이고 그때가 그들을 찾을 달이다(시 141:5, 6).
5. 그들은 죄에 완고하였다. 그들을 죄에서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완고했으므로 개혁될 수도 없었다(28절). 여기에서 다음의 사실을 보게 된다.
(1) 이러한 악한 삵은 분명히 최후에는 파멸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정확한 경고를 그들은 마음에 새겨듣지 아니하고 과거해 버렸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확실히 비참한 포로의 재앙을 내리실 것이다.
그때는 그들의 발이 신발을 신지 못하고 맨발로 강제 여행을 하게 될 것이며 그때 그들은 억압자들로 인하여 물한 모금도 거절될 것이며 그들의 목은 갈증으로 매마를 것이다. 이것이 죄의 결과일 것이다. 이방 신들을 섬기고 낯선 예배의 방법을 따르는 자들은 마땅히 이방에서 낯선 왕에게 포로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때를 주의하라. 우상을 따르는 너희 달림이 네 발의 신을 벗길 것이며 우상을 추구하는 너의 열망이 너의 목에 갈증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맹렬한 추구에서 네 발을 조심하라. 그리고 이런 맹렬한 욕망에서 네 목을 주의하라." 우리는 죄가 최후에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죄의 생활에서 우리는 막는 효과적인 방법이 되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2) 이 아름다운 경고를 그들은 거절했다. 그들은 그들에게 죄를 회개하고 돌아서라고 말하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리라는 희망이나 기대는 없고 우리의 우상을 저버리라는 권고에 설득되리라는 기대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방인들을 사랑해 왔고 우리는 그들을 따르기로 작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상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그러므로 너희의 충고는 너희 자신들에게나 우리에게 그 이상의 어떤 문제가 되지 아니한다. 그것은 헛된 짓이다. 우리가 획득한 부패한 습관이나 성질을 우리가 파괴해야 한다는 희망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것을 제어하려고 하는 만큼 그것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자기들의 부패한 삶이 그들의 신념을 압도하고 있는 자들의 경우는 대단히 비참하다. 그들은 스스로 개혁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할 수 없다고 단정하고 나아가서는 개혁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서 절망할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비록 우리의 죄가 아무리 극악하다 할지라도 만일 우리가 회개하고 자비를 간구하기만 하면 만족한 용서를 얻을 수 있음을 믿을 수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도 실망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우리의 부패함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만일 우리가 기도하고 그 은혜를 기뻐한다면 그 부패한 죄를 극복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인간은 그가 지옥 이편에 있는 한 희망이 없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6. 그들은 죄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그들을 속이는 것을 신뢰했다가 환난날에 그들을 도울 자를 저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26-28절). 도적이 자기의 절도 행위를 숨기는 모든 기술과 재주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각되어서 벌을 받게 될 때 그 도둑이 수치를 당함같이 이스라엘 집이 수치를 당할 것이다. 이 수치는 그들이 범한 죄를 뉘우치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그들의 죄가 밝혀졌을 때 오는 실망에 대한 형벌의 수치이다. 그들은 다음의 사실을 알게 될 때 수치를 당할 것이다.
(1) 그들이 멸시한 하나님을 향해 그들이 소리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이다. 그들이 번영할 때는 하나님께 등을 돌렸고 얼굴을 향하지 않았으며 그들은 그를 경시했고 마치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과 같이 행동했고 혹은 하나님을 망각할 수 있는 것과 같이 행했으며 하나님을 향하지 않았고 다른 방을 향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가능한 한 빨리 멀리 떠났다. 그러나 고난의 때에 그를 향하지 않고는 만족이 없음을 알고 그때서야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라고 말할 것이다. 그들의 조상들은 여러 번 이런 수치를 당했다(삿 3:9; 4:3; 10:10). 그러나 그들은 고난의 때에 더 큰 신뢰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 매어달리라는 말을 듣지 아니했다.
(2) 그들이 비위를 맞추던 신들로부터 구원을 얻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될 때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신들이 자기들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들을 만드신 하나님이 그들을 돕지 아니하리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수치를 당할 것이다. 그들이 후회함으로서 이런수치에 직면케 되기 위하여 그들이 섬긴 신들에게 보내질 것이다(삿 10:14). 그들은 하나님게 외쳤다.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하나님은 우상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들로 하여금 일어나 너희를 구원케 하라. 너희는 내가 너희를 구원해 주리라는 기대를 가질 이유가 없다. 만일 그들이 고정된 장소에서 일어날 수 있다면 그들로 하여금 일어나게 하라. 그들로 하여금 너희를 구할 수 있는지 없는지 시험하게 하라. 그러나 그들이 너희를 위해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너희는 수치를 당할 것이다. 비록 너희가 도성마다 신들을 세웠을지라도 그 모든 도성은 불타서 거민이 될 것을 가지고 스스로 기뻐하고 분명히 자기들의 수치가 될 것을 가지고 자랑하는 이것이 죄인들의 어리석음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충고(4) (예레미야 2:29-37)
예레미야는 여기서도 계속해서 같은 어조로 이 백성의 파멸을 막기 위하여 죄많은 그들을 회개로 이끌고자 하고 있다.
Ⅰ. 그는 죄의 책임인 진실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반박의 여지없이 명확했다. 그것을 부인하려는 생각은 그들 중에서 상상할 수 있는 최대의 불합리였다(29절). "너희가 나와 다툼은 어찜이며 나에게 변호하려고 함이 어찜인가? 어찌하여 너희는 밤죄에 대하여 어떤 구실을 내게 붙이려고 하며 선고를 완화시키려고 하는가? 너희의 변호는 분명히 기각될 것이고 심판을 내려질 것이다. 너희는 한가지 일뿐 아니라 다른 것에도 모두 범죄했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왜 너희는 나와 다투느냐?"
Ⅱ. 그는 죄에 대한 책임을 그들의 개조할 수 없음과 망은을 고려케 함으로써 부각시키고 있다.
1. 그들은 자기들이 당하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30장). "내가 너희 자녀를 때림도 무익하다." 즉 자녀들이란 유다의 백성을 말한다. 그들은 여러 가지로 신의 징계 아래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그들은 그들을 회개케 하고자 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허사" 였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괴롭게 하실 때에 그들을 향해 가졌던 그 목적을 이루지 않았다. 그들의 양심은 일깨워지지 않았고 그들의 심정도 부드러워지거나 겸비하여지지 않았다. 그들은 징계를 통해서도 교훈을 받지 않았다. 징계를 통해서도 더 선하게 되지 않았다. 고난을 상실하는 것은 과연 큰 상실이다. 그들은 정책을 받지 않았다. 그들은 그 징계에도 복종치 않았고 또 승락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의 심정은 여호와를 거스려 혐오를 가졌다. 그러므로 그들은 헛되이 맞은 것이다. 그들 중 젊은 백성들인 자녀들까지도(이 말이 이렇게도 읽힐 수 있겠다)헛되이 맞은 것이다. 그들은 너무나 신속히 회개하는 심령과는 반대방향으로 편견을 가졌기 때문에 오랫동안 악을 행하기에 익숙해 온 나이 많은 자들과 마찬가지로 완고하게 되었다.2. 그들은 하나님의 종인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 그들에게 보내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아니 그들은 그 메시지 때문에 사자(使者)들을 죽였던 것이다. "너희 칼이 사나운 사자같이 너희 선지자들을 삼켰느니라." 너희는 그들의 신실함에 대하여 심히 격노하였고 사자가 식물을 삼킴과 같이 큰 욕심과 쾌락을 가지고 선지자들을 죽였다. 가장 큰 축복인 예언자들은 그들에게 마치 그들 세대의 염병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최고량의 죄였다(대하 36:16). 그들은 그들 자신의 예언자들을 죽였다(살전 2:15).
3.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푸신 은총에 의해서도 아무런 자극을 받지 않았다(31절). 너희 이 세대여(그는 "불실하고 패역한 세대여! 독사의 세대여" 라고 부를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부르지 아니하고 부드럽게 "너희 이 세대여" 라고 말하고 있다), 여호와의 말씀을 보라. "그것을 들을 뿐 아니라 그것을 부지런히 묵상하라. 네 마음을 말씀에 밀접하게 하라." 는 명을 받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이 분명하며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는 이 말씀을 "내가 이스라엘에게 광야가 되었느냐 흑암한 땅이 되었었느냐" 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과 교제한 자들 중에는 그 누구도 하나님을 가르쳐 "광야" 라 혹 "흑암의 땅" 이라고 불평할 만한 근거를 가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주목하자. 그는 우리에게 땅의 결실로 축복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광야가 되었고 메마르고 불모진 땅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가테이커(Gataker)씨가 표현한 바와 같이 황무지에서 방목한 가축같이 우리를 메마른 식물로 길렀다고 말할 수 없다. 아니다. 오히려 그의 양은 푸른 초장으로 인도되었다. 그는 하늘의 빛으로 우리에게 축복해 주셨고 우리에게 조금도 인색치 않으셨으므로 하나님은 흑암의 땅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는 악인과 감사치 않는 자들 위에도 비를 내리시고 햇빛을 비취게 하셨다. 이 의미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어떤 사람에게는 불유쾌하고 무익하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자기 백성을 "광야를 지나게" 하셨고 "흑암의 땅" 을 지나게 하셨다. 그러나 기분 자신은 그런 때에도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되셨다. 그는 만나로 먹이셨고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풍요한 들과 빛의 땅으로 공허하고 영혼을 괴롭히는 땅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들은 모든 길들이 그들을 기쁨의 땅으로 이끌 것이다.
4. 이런 것들로 인하여 그들이 자극을 받는 대신에 그들은 완고하게 오만 불손한 자세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우리가 주인이다. 우리는 당신께 더 이상 굽히지 않겠다" 라고 말한다. 이제 그들은 강한 나라가 되었고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서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 이것은 주제 넘는 죄인들의 언어이다. 이것은 대단히 건방지고 모독적인 말일 뿐 아니라 대단히 불합리하고 어리석은 말이다.
(1) 하나님께 부속된 자들인 "우리가 주인이다" (즉 우리가 다스리는 자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기 위해 그에게 더 이상 나아가지 않겠다라고 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옛날의 왕되신 하나님은 영원히 왕이시며 우리는 결코 그의 권위에서 벗어난 것처럼 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2) 가난뱅이들인 "우리가 주인이다," 즉 우리는 부유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치 우리가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고 그의 은혜를 입을 필요가 없는 것처럼 그의 은총을 받기 위해 나아가지 않겠다라고 말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하나님은 친히 은혜가 풍성하신 보호자로 은총을 입었던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거나 그에게 아뢰지 아니할 그것을 때 마땅히 죄로 여기신다.
Ⅲ. 그는 그들의 모든 악한 것에 대한 책망을 그들이 하나님을 잊고 있었는데 두고 있다(32절). "내 백성은 나를 잊었도다." 그들은 꾸준히 그들의 심중에서 하나님의 생각을 추방했고 그들의 우상의 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제하였으며 하나님의 마음에 두신 선한 모든 것들을 피하였다.
1. 비록 그들이 그의 백성으로서 그와의 언약과 고백으로 맺은 특별한 관계요 또 그들의 마음 중에 그분의 임재의 징표가 있고, 그들을 향한 그분의 은총의 징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분을 잊어버린 것이다.2. 그들은 "날 수를 계수할 수 없이" 즉 우리가 흔히 말하듯이 시간 의식이 없이 오랫동안 하나님에 대하여 무관심하였다. 그들은 오랜 기간 그분에 대한 어떠한 진지한 마음도 가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완전히 그분을 잊어버린 것 같았고 결코 다시는 그분을 기억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 같이 보였다. 우리가 우리 생애에 하나님을 망각한 날 수가 얼마나 많았는가! 이 헛된 날 수를 누가 계수할 수 있겠는가?
3. 그들은 처녀가 보통 아름다운 옷을 가지고 그 옷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과 같이 하나님에 대하여 그런 관심과 애정을 가지지 않았다. "처녀가 어찌 그 폐물을 잊겠느냐? 신부가 어찌 그 고운 옷을 있겠느냐?" 이들의 마음은 그런 것들에 집착해 있고 그것들에 큰 가치를 두고 있으며 그들은 항상, 그리고 다시 그런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말았다. 그들이 공중 앞에 나설 때는 폐물들 중 어떤것도 잊지 아니하고 이사야 3장 18절 이하에 기술된 것과 같은 모든 것들을 가지고 장식한다. 그러나 "내 백성은 나를 잊었다." 누구든지 하나님에 대한 사랑보다 자기들의 아름다운 옷을 더 사랑하는 것은 슬픈 일이며 자기들의 장신구들을 앞세우고 자기들의 신앙을 뒤로 하는 슬픈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장신구가 아닌가? 하나님은 "영광의 왕관" 이 아닌가?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미(美) 의 왕관" 이 아닌가? 우리는 하나님은 그러한 존재며 우리의 종교에 있어서 우리 "머리에 아름다운 관이요 우리 목의 금사슬" 이라는 생각하는가? (잠 1:9) 우리는 처녀가 폐물을 사랑함같이 혹은 신부가 고운 옷을 사랑함같이 하나님께로 향한 마음이 충만해 있어야 하며 그들이 그런 것들을 보존하고 또 그런 것들로 장식하고 나타나기를 좋아함 같이 우리도 하나님께 대하여 그러하여야 한다.
Ⅳ. 그는 그들의 죄가 타인들에게 끼치는 결과가 얼마나 나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의 죄는 그들 주위에 있는 죄의 길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 더욱 죄에 대한 힘과 용기를 주게 되고 특히 약한 자들에게 그러하게 된다(33절). "네가 어찌 사랑을 얻으려고 네 행위를 아름답게 꾸미느냐?" 이런 것은 얼굴을 꾸미고 머리를 장식한 이사벨과 같이 추파를 던지고 화려한 옷을 입음으로써 자기를 아름답게 보이려고 애쓰는 음탕한 여인들에게 유혹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함으로써 그들은 이웃들을 자기들과 더불어 죄의 공모자가 되게 했고 우상 숭배에 참여하게 했으며 자기들의 악한 행위를 가르쳤고 그들의 우상 숭배하는 관습과 규례를 하나님을 예배하는 제도와 혼합시키는 방법을 가르쳤다. 이것은 신성한 것에 대한 커다란 모독이요 타인들의 행위보다 자기들의 우상 숭배의 행위를 더 악하게 만드는 결과가 되었다. 그들은 무익한 어둠의 일을 따름으로써 악한 자들로 하여금 이전 상태보다 더 악하게 된 자들에게 엄청난 책임을 가지게 될 것이다.
Ⅴ. 그는 그들에게 우상 숭배의 죄에 참가하여 살인죄까지 그 책임을 돌리고 있다(34절). "네 옷단에 죄없는 가난한 자를 죽인 피가 묻었다." 그 피가 하늘을 향해 호소했으며 그 소리에 하나님은 이제 심문하신다. 이것은 몰록에게 희생으로 드려진 자녀들에 관련된 말이다. 혹은 이것은 더욱 일반적으로 생각해서 므낫세가 흘린 모든 무죄한 피를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며, 므낫세가 예루살렘을 가득 채운(왕하 21:16) "의인의 피" 특히 그들의 불경을 쳐서 증거한 예언자들의 피를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 피는 "은밀한 탐색" 에 의해서 나타난 것이 아니고 또 "파헤침" 으로써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일로" 드러난 것이었다. 그것은 땅위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것은 그들이 범한 이러한 죄가 혐의를 받을 만한 것이라든가 논쟁의 여지가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라 확실하고 명백하며 공공연히 선언된 것이요 뻔뻔스럽게 드러나 있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들은 이것에 대하여 수치를 느끼지도 않고 숨기려고 애쓰지도 아니하였다. 이것이 죄의 가장 큰 타락의 상태이었다.
Ⅵ. 그는 "죄가 없다" 라고 하는 그들의 주장을 말살했다. 이 문제가 그렇게도 명약관하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말하기를 "나는 무죄하기 때문에" 그의 "분노는 나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고 했다.
그리고 다시 너희는 말하기를 "나는 죄를 범히 아니하였다(35절). 그러므로 나는 당신께 호소할 것이며 당신의 오류를 확신시킬 것이다." 라고 했다. 그들이 책임을 부인하고 자기들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과 따지고 그들과 당신의 말씀과 채찍으로 다투실 것이다. 그들은 얼마나 많이 스스로를 속였는가를 알아야 한다.
1. 그들은 가장 큰 흉악범을 저질러 놓고도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았고 무죄하다고 말하고 있다.2. 그들은 회개하지 않고 돌이키지 아니하면서 하나님이 그들과 화해하시리라고 기대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어떤 징표를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무근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들의 무죄를 변호함으로서 사실 무근이 입증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이 입증됨으로써 하나님은 자신의 행위를 즉시 중단하실 것이며 그의 노여움도 들이키게 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격노케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과 다투실 것이며 자신의 분노는 정당한 것임을 확신시키실 것이다. 그들은 죄를 지었고 하나님은 그들이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태도를 떠나서 겸손해질 때까지 그들과 다투시기를 쉬지 않으실 것이며 그들을 심판하고 정죄하심을 쉬지 아니하실 것이다.
Ⅶ. 그는 그들이 당한 수치스러운 실망을 들어 그들을 책망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그들의 대적으로 삼고 피조물을 그들의 신념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36,37절). 그들이 혈육을 의지하고 그들의 마음이 여호와를 떠나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 영적 우상 숭배의 한 단편이다. 이제 여기서는 그들에게 그것이 어리석은 것임을 보여준다.
1. 그들은 그들이 선택한 것에서 휴식과 만족을 가지지 못했다. "네가 어찌하여 네 길을 바꾸어서 부지런히 돌아다니느뇨? 의심할바 없이 그것은 네가 네 자신을 만족케 할 수 있는 신념을 그들 중에서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자기의 희망으로 삼고 끊임없이 그를 신뢰하는 자들은 그 길을 바꾸어서 부지런히 돌아다닐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영혼은 그에게 돌아가서 휴식처와 같이 편히 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조물들을 의지하는 자들은 발 닿는 곳을 찾지 못하여 헤매는 노아의 비둘기 같이 영원히 안전이 없을 것이다. 그들이 신뢰하는 모든 것은 그들에게 실패를 가져다 줄 것이고 그때마다 그들은 더 낳은 것을 위해 자리를 바꾸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까지나 좌절을 당하고 말것이다. 처음에 그들은 앗수르를 의지했다. 그리고 앗수르가 부러진 갈대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들은 다시 애굽을 의지했다. 그러나 그것도 나을 것이 없었다. 피조물은 공허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의지하는 자들은 영혼의 고통을 당할 것이며 그들은 휴식을 찾으려고 헤매게 될 것이나 아무 것도 찾지 못할 것이다.2. 그들은 그들이 찾아낸 신념에서 완전히 실망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말한다. 너희는 전에 와서 돕지 아니하고 도리어 군박했던(대하 28:20) 앗수르를 의지했던 것과 같이 다시 애굽을 의지하지만 이것에도 수치를 당할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앙 고백에 있어서 특별한 백성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이웃 민족들 중에서 어느 민족도 그들을 좋아하지 않으며 진심으로 그들을 사알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아직 그들의 비위를 맞추고 그들을 신뢰하며, 그들에게 속았음에도 그들에게 잘 봉사했다. 그것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살펴 보라(37절). 너희는 하나님께 버림 받게 되고 너희의 대사들이나 사절들은 애굽에서 실망하고 되돌아설 것이며 그러므로 그들은 두 손으로 머리를 싸고 그들의 백성에 절망적인 상태를 애통하게 될 것이다. 혹은 너희는 여기서 멀리 추방되리라. 즉 너희는 "두 손으로 너희 머리를 싸고" 즉 머리가 아프기 때문에(고통이 있는 곳에 손이 간다) 머리를 싸쥐고 낯선 땅으로 포로가 되어 가게 된 것이다. 혹은 두 손으로 머리 위에 얹은 것과 같을 것이다(삼하 13:19). "그리고 너희가 의지하는 애굽도 너희를 지키지 못할 것이며 포로에서 해방하지 못할 것이다." 경건한 애통- 이것은 생명을 주는 것이다.-으로 머리를 숙이지 아니하는 자들은 세상의 애통-이것은 사망을 주는 것이다-으로 자기들의 손을 머리에 얹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돕지 않으실 때 애굽이 그들을 도울 수 없다는 것은 이상할 바 없다. 만일 여호와가 너희를 돕지 않으신다면 어디서 도움을 얻겠는가? 애굽인들은 부러진 갈대이다. 여호와께서 너희가 신뢰하는 자들을 배척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너희의 구원자로 쓰시지 않을 것이며 그들에게 결코 영예가 돌아가게 하시지 않을 것이요 너희가 그들을 신뢰하는 것도 찬성치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을 지정하여 너희에게 어떤 선한 도구가 되게도 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에게서 번영은 찾을 수 없으며 그들은 결코 너희를 붙들어 주거나 어떤 만족도 주지 못할 것이다. 여호와의 지혜를 어길 모사와 꽤가 없음같이 그분없이 승리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흑자는 이것을 "여호와께서 너희가 다른 것들을 신뢰함으로 너희를 버렸다" 다고 읽기도 한다. 왜냐하면 너희가 마땅히 그분만을 의지해야 했을 때에 그의 피조물들, 아니 그의 원수들을 의지함으로서 그분에게 불충하게 대하였기 때문에 그는 너희가 너희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파멸에 불과한 거기에 너희를 버리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번영할 수 없게 되었다. 누구든지 하나님에 대하여 완악하게 하여 그를 떠난 자가 번영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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