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론에게 경고만됨 (이사야 47:1-6)
이 구절들 속에서 하나님은 니느웨 성에 요나를 보낸 것가이 벨론에도 사신을 보내고 계시다. "바벨론이 멸망당할 때가 가까왔느니라." 바벨론이 회개함으로써 그 멸망을 방지하고 그 평온 상태를 길게 하도록 하기 위해, 정당한 경고가 이처럼 바벨론에게 내리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 볼 수 있다.
Ⅰ. 하나님께서 바벨론과 쟁론하심. 모든 재앙이 쟁론에서 시작됨으로 우리는 그것으로 시작하기로 하자. 바벨론은 하나님을 대적으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누가 그의 편을 들 수 있겠는가? 바벨론에게, 복수하시는 그 의로우신 재판장께서 "내가 보수하라" 고 말씀하신 것을 알게 하라(3절). 바벨론은 하나님을 격동시켰으므로 그 죄악의 한도가 찼을 때, 그것에 대한 벌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수하시러 오는 자들에게 화있을진저. 누가 그의 노의 능력과 그의 손에 떨어지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를 알겠는가? 우리에게 복수하는 자가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와 겨루고자 할 수 있었다. 즉 그에게로부터 피하거나 그를 이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사람으로, 사람의 동정심을 갖고 너를 만나지 않고 네게 사자처럼, 젊은 사자처럼(호 5:14) 되리라" 고 말씀하신다. 또는, 쉽게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의 힘, 또는 어떻게 해서든 저항할 수 있는 힘으로써가 아니라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렇게 하실 것이다. 매수되거나 치우치기 쉬운, 또는 어리석은 동정심에 의해 연약해지는 사람의 정의로써가 아니라, 엄격하고 냉혹하며 결코 모면될 수 없는 하나님의 정의로써 그렇게 하실 것이다.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시는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회개하지 않는 자를 벌하시는 일에 있어서도, 그는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 이시다(호 11:9).
Ⅱ. 이 쟁론의 특별한 근거. 우리는 그 쟁론에 대해 사유가 있고 또 그것은 정당한 사유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 성전의 복수" 이다(렘 50:28). 그것은 "신온에 대한 잔학" 때문이다(렘 51:35). 하나님은 그들에 대한 그의 백성의 사유를 옹호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노하시어 그의 백성을 바벨론의 손에서 건지셨음이 인정되고 있다(6절). 즉 하나님은 그의 자손들을 징계하기 위해 그들을 사용하셨고, 그들을 수단으로 "그의 기업을 욕되게" 하셨으며, 그의 고유의 백성들이 나머지 민족들과 공동으로 고통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셨고, 경원시 당해야 했던 이교도들로 하여금 "주의 기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게" 하셨다(시 79:1). 이 일에서 하나님은 의로우셨다. 그러나 바벨론 사람들은 그 문제에 있어서 너무 지나쳤으며 그들을 자기네 손아귀에 넣었을 때 (지혜와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매우 명성을 떨치던 백성이 이처럼 낮아진 것을 보고 의기양양 해서) 야비하고 비굴하게 그들을 짓밟았으며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였다." 비참한 자들에게 단지 그들의 비참함 때문에라도 주어질 수 있는 그런 인정도 조금도 발휘하지 않았다. 바벨론 사람들은 그들을 야만스럽게 다루었고 그들의 재앙을 경멸했으며, 더구나 그것을 만족스럽게 여겼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멍에 아래 놓였다. 그러나 마치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그들은 "멍에를 심히 무겁게 메우며" 고통을 가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늙은이" 들에게, 젊은 기력으로는 쉽게 감당해 낼 수 있었으나 이제는 늙어서 노동할 수도 없고 그 멍에 아래 주저앉아야 했던 노인들에게, 재판장과 장관과 제일 높은 부류에 속했던 장로들에게 메웠다. 그들은 가장 천하고 힘든 노역을 그들에게 시킴으로써 긍지를 느꼈다. 예레미야는 이것을, 즉 "장로들의 얼굴이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을 탄식하고 있다(애 5:12). 잔인함보다 더 확실하게 그리고 더 쓰라리게 어떤 백성을, 특히 하나님의 백성을 파멸시키는 것은 없는 것이다.
Ⅲ. 이 쟁론의 두려움. 바벨론은 자기와 다투시는 자가 누구인가를 들을 때 떨 만한 이유를 갖고 있다(4절). "우리 피의 복수자로서, 우리의 사유를 보호해 주시는 우리의 구속자(Goel)는, 우리를 안위해 줄뿐만 아니라 우리의 대적을 두렵게 만드는 두 가지 이름을 갖고 계신다."
1. "그는 만군의 여호와이시다. 그는 모든 피조물들을 통솔하시므로 천지의 모든 권세를 갖고 계신다." 여호와와 싸우는 자는 화있을진저. 온 피조물이 그와 더불어 싸우기 때문이다.2. "그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우리와 언약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에게 하신 모든 약속을 성실히 이행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권능과 거룩함은 바벨론을 대적하고 시온을 위하는데 사용된다.
이것은 우리의 위대한 구속자이신 그리스도께 잘 적용될 수 있다. 그는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신 것이다.
Ⅳ. 바벨론에 대한 쟁론의 결과. 바벨론은 "처녀" 라 칭해지고 있다. 비록 그것이 기생의 어머니였을지라도 그 자신을 처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처녀처럼 아름다웠고 그 주위에 있는 모두에게 구애를 받았었다. 그것은 "곱곱 아리땁다" 고(1절). 그리고 "열국의 주모" 라(5신) 칭함받았었다. 그러나 이제 경우가 달라졌다.
1. 그것의 존귀함은 사라졌고 그것은 그 모든 위엄과 작별을 고해야 한다. 세상 꼭대기에 앉아 있었던, 당당하고 편하게 앉아 있었던 그것은, 이제 매우 초라하고 깊은 슬픔에 잠겨있는 사람처럼 "내려 티끌에 앉아야" 하며 땅에 "앉아야" 한다. 왜냐하면 바벨론은 매우 텅비고 빈곤하게 되어 그것을 위해 앉을 자리가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2. 바벨론의 권세는 사라졌으며, 그 모든 주권과 작별을 고해야 한다. 그것은 더 이상 이전처럼 통치하거나 이전처럼 그 이웃에게 법도를 내리지 못할 것이다. "딸 갈대아여!" 너를 위한 "보좌가 없어졌도다." 자기의 존엄이나 권세를 남용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격동시켜, 그것을 그들에게서 박탈하시고 그들을 "내려 티끌에 앉게" 하시도록 만든다.
3. 바벨론의 평안과 즐거움은 사라진다. "그것은 다시는 이전처럼 곱고 아름답다 칭함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욕망을 채우던 이 모든 것들을 박탈당할 뿐만 아니라, 노역을 하게 되며 궁핍과 고통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이전에는 유순하고 연약하여 그 발바닥으로 땅을 밟아보지도 아니하던(신 28:56) 바벨론에게는 두 배 이상으로 비탄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우리 자신을 곱고 아리땁게 사용하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죽기 전에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혹독하게 다룰지를, 또한 우리가 어떤 곤경에 처할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4. 바벨론의 자유는 사라지고, 바벨론은 노역의 상태에 처하며 그것이 형통한 가운데 있을 때 다른 것들에게 씌웠던 괴로운 멍에를 쓰게 된다. 바벨론의 큰 자들도 그들이 정복한 자들에게 주곤했던 그러한 법도를 이제 정복자들로부터 받아야 한다. "맷돌을 취하여 가루를 갈라(2절). 일과 고된 노동에 가르치자 수하라(유치장에서 대마를 두들겨 펴는 것과 같은 일에 착수하라). 그것은 너를 땀흘리게 만들 것이므로 너는 머리 장식물을 던져버리고 면박(머리 타래)를 벗어야 한다." 그들 주인의 변덕스러운 기분에 따라 이곳에서 저곳으로 쫓겨가게 되었을 때, 그들은 "강을 건너기" 위해 "치마를 걷어 다리를 드러내고" 물 가운데로 지나가야만 했다. 그런데 그것은 당당하게 무엇을 타고 다니던 자들에게는 큰 굴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불평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이전에 그 포로된 자에게 행하곤 했었던 것에 대한 당연할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그들의 헤아렸던 그 헤아림으로" 지금 "그들이 헤아림 받고" 있는 것이다.
권력을 지닌 자는, 가장 위에 있는 바취의 살이 아래에 있게 되리라는 것을 생각하고서, 온건하고 절제있게 권력을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5. 바벨론의 모든 영광과 자랑하던 것은 사라진다. 영광대신 그것은 불명예를 얻는다(3절). "네 살이 드러나고 네 부끄러운 것이 보일 것이라." 그들이 보통 그들의 포로를 천하고 야비하게 취급한 것대로 그들이 그렇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 포로들의 옷을 탐내어 그들의 살을 덮기에 충분한 옷감을 남겨두지 않았었고, 인간의 성품에 마땅히 잊어야 할 동정심뿐만 아니라 수줍음도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랑하는 대신 "잠잠히 앉아있고 흑암으로 들어가며" (5절), 그 얼굴을 보이기를 부끄러워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체면을 완전히 상실당하여 "다시는 열국의 주모라 칭함을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하나님은 세상에서 큰 소란을 피우던 자들을 조용히 앉아 있게 만드실 수 있으며 가장 거물이었던 자들을 흑암으로 보내실 수 있었다. 그러므로 자랑하는 자는 변함이 없는 하나님 안에서 자랑하도록 하고, 변하기 쉬운듯 세상적인 재물이나 즐거움이나 명예 안에서 자랑하지 않도록 하자.
바벨론의 죄와 멸망 (이사야 47:7-15)
이제 멸망할 운명에 놓여있는 바벨론은 여기에서 그 형통한 날에 교만하고 사치스럽고 방심 상태에 있었던 것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지혜와 예상에 대해, 특히 점성가들의 예언과 권고를 신뢰한 것에 대해 마땅히 비난당하고 있다. 이 사실들은 바벨론에 이러한 심판을 내리고 굴욕스럽게 하신 하나님을 의롭게 하고, 이러한 심판 아래서 바벨론을 더욱 수치스럽게 하기 위해 언급되어 있었다. 하나님께서 복수하실 때, 영광은 그에게, 그리고 부끄러움은 죄인에게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Ⅰ. 바벨론 사람들은 교만과 오만에 대해, 그리고 재물과 권력과 거대한 주권으로 인해 큰 자만을 품고 있는 것에 대해 여기에서 비난받고 있다. 정부와 그 백성 전체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네가 마음에(그리고 모든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며 비록 그들이 마음에 품은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을지라도 그것을 그들에게 말씀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 이르기를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하는도다" (8,10절). 이 부분의 책망이 반복되어 있는 것은 그들이 자주 그렇게 말했으며 그것은 하나님을 매우 노엽게 했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하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 자신에 관해 흔히 말씀하셨던 바로 그 말로써, 그의 자존하심과 그의 무한하고도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하심과 그의 독자적인 대권을 암시한다.
바벨론은 이 모든 것을 사칭한다. 그리고 그 백성이 숭배할 남신과 여신을 자기 마음애로 만들 능력을 갖고 있는 척하는 그것이, 자기 자신을 그 신들 중에 하나로 만드는 것은 이상한 일이 못된다. 어떤 피조물에 대해, "그것뿐이라. 그것과 같은 것이 없으며, 그것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라고 말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왜냐하면 피조물들은 서로 매우 동등한 수준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피조물이 자기 자신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오만불손이며 자신을 모른다는 증거가 된다.
Ⅱ. 그들은 사치스러움과 안이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 비난당하고 있다(8절). "사치한 너는 그것의 노예이며, 그것을 네 보금자리로 삼고 있다. 그리고 방해 받음이나 중단됨이 없이 그것을 즐길 수 있기 위해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아무 걱정도 두지 않는다." 큰 재물과 풍족함은, 음탕함에 대한 큰 유혹이며, 떡이 가득한 곳에는 대게 게으름이 풍족하다. 그러나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는 자들이 "하나님이 모든 일을 심판하시리라" 라는 것을 듣기만 해도 그것은 그들의 환락에 물을 끼얹고, 그들의 즐거움을 삭감하는 것이 될 것이며, 그들이 주의해야 할 일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Ⅲ. 그들은 그들의 세속적인 방심에 대해, 그리고 그들의 화려함과 한락이 영구하리라고 생각하는 헛된 확신에 대해 비난받고 있다. 여기에서 이것이 크게 강조되고 있다.
1. 그들이 방심하는 이유. 그들은 그들 자신이 안전하며 위험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들이 모든 세상적인 즐거움의 불확실성과 개인뿐만 아니라 나라와 국가에 따르는 불가피한 운명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이 일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그것을 그들 자신에게 적용시켜 보지도 않고 잘 생각해 보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안심시켜 편하고 즐겁게 잠들게 만들었고 "내일도 오늘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 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꿈꾸지 않았다. 그들은 그 '종말도 생각지 아니하였다." 즉 꽃같이 시들어 버릴 그들의 번영의 종말도, 그들의 불의와 압제가 판단받고 처벌당하는 쓰라린 날이 될 그들의 죄악의 종말도 생각지 아니하였다. "그것은 그 종말도 생각지 아니하였다" (혹자는 그렇게 읽고있다). 바벨론은 자기의 날이 쇠망할 것이며 그 결과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잊고 있다. 예루살렘은 결국을 생각지 아니하였으므로 "놀랍게 낮아졌던" 것이다(애 1:9). 바벨론의 멸망도 역시 그러했다. 사람의 자손들은 단지 사명과 심판 그리고 그들의 미래의 상태를 결코 생각지 않는 것 때문에, 안심하고 있으며 스스로를 안전하게 생각한다.2. 그들이 방심하는 근거. 그들은 그들의 사악함과 그들의 지혜를 의지했다(10절).
(1) 그들이 기만과 압제로써 얻은 권력과 재물은 곧 그들이 신뢰하는 것이었다. "네가" 도엑처럼 "네 악을 의지하였도다" (시 52:7).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양심을 매우 더럽혔고 대담하게 악의 구덩이로 빠져 들어갔으므로, 그들은 아무 것에도 구애되지 않는다. 그들은 악을 의지하고서, 자신이 말하고 행하는 것을 자각하는 자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일들을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수행한다. 그들은 그들의 모든 대적에게 너무 가혹하다고는 의심조차하지 않는다. 그들은 대담하게 거짓을 말하고 살인하며 거짓 맹세하고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는 어떤 일도 개의치 않는 것이다. 이처럼 그들은 그들의 악이 그들을 안전케 해 주리라고 믿으며,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멸망케 될 것이다.
(2) 그들이 그들의 "지혜" 라 칭한 그들의 계략과 술책은 그들이 신뢰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온 인류보다 지혜가 나으므로 모든 적에게 도전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지혜와 지식이 그들을 유혹하고" 궤도를 벗어나게 했으며, 자신과 이후에 갖추어야 할 필요한 준비를 망각하게 했다.
3. 그들의 아심을 나타내는 표현들. 이 교만하고 오만한 왕조는 방심 상태에서 다음 세 가지를 말했다.
(1) "내가 영영히 주모가 되리라" (7절). 그녀는 명예 근원이신, 주권자 여호와께서 즐거워하실 동안이나 자기의 행실이 훌륭한 동안에만 주모가 되는 것을 자신의 명예의 특권으로 간주하지 않고, 현 세대와 그들의 후사들 그리고 그 계승자들에게까지 영원히 그렇게 되는 것을 그 특권으로 여겼다. 그녀는 그녀가 주모였다는 것을 자랑했을 뿐만 아니라 영영히 주모가 될 것을 확신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약 바벨론은,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고 말한다(계 18:7). 자기가 영영히 주모가 되리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스스로를 오해하고 있으며 자기의 결국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망이 그들의 명예를 그들과 함께 곧 티끌 속에 묻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영영히 성도가 될 것이나 군왕과 주모는 영영히 그렇게 되지 못할 것이다.
(2) "나는 고독하고 슬프게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내가 이처럼 집착하고 있는 권력과 재물을 결코 잃지도 않을 것이다. 왕조는 그것을 지지하고 보호할 그리고 그 나라의 남편이 될 군왕이 결코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98절). 그녀는 군왕으로서의 자기 위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자기 백성들의 수효가 지속될 것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고 폐위되거나 인구가 감소되는 것을 염려하지 않았다. 번영의 절정에 있는 자들은 자기 자신이 불행한 운명이 미치치 않는 곳에 있다고 상상하기 쉬운 것이다.
(3) "내가 잘못 행할 때 나를 보는 자가 없다. 그러므로 나를 문책할 자도 없을 것이다" (10절). 죄인들이 자기 자신에게 무사함을 혹신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악한 길이 은밀히 지켜질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악한 술책과 계획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 일을 매우 그럴 듯하게 수행했으므로 아무도 그들의 사악함과 교활함을 분간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4. 그들이 방심하는 것에 대한 처벌. 그것은 그들의 멸망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1) 완전한 멸망, 그들의 모든 위안과 확신들의 멸망이될 것이다. "홀연히 자녀를 잃으며 과부가 되는 이 두 일이(네가 무시했던 바로 그 두 가지 일이) 네게 임할 것이라(9절). 네 군왕과 네 백성이 끊어질 것이므로 너도 더 이상 정부도 나라도 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흔히 방심 상태에 있는 죄인들에게, 그들이 거의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그런 위험에 처하리라고는 거의 생각지 않은 바로 그 재앙을 내리신다. "이 일이 온전히, 어떤 상황에도 경감되거나 완화됨이 없이, 네게 임하리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고통은 온전한 고통이 아니다. 과부로 지내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온전한 재앙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지으신 자가 그들의 남편이라는 사실로써 스스로를 안위하기 때문이다.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온전한 재앙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에게 있어서 열 명의 아들보다 나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대적들에게는 이 일이 온전히 임한다. 과부로 지내는 것이나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은 큰 슬픔이며 이 두 가지가 함께 임하는 것은 정말 큰 슬픔이 된다. 나오미는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을" 때 마라(괴로움)라 칭함받는 것을 당연히 여겼다(룻 1:5). 그러나 그녀의 이 재앙은 온전히 임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에게 위로가 되었던 두 며느리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벨론에게는 이 일이 온전히 임한다. 즉 그것에게는 아무 위안도 남지 않는 것이다.
(2) 그것은 갑작스럽고 놀라운 멸망이 될 것이다. 그 재앙은 "한 날에," 더구나 "홀연히" 임할 것이며, 그것은 그 재앙을 훨씬 더 무섭게 할 것이고 매우 방심 상태에 있는 자들에게 특히 그러할 것이다.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11절). 그리고 너는 그것에 대비하거나 준비할 시간이나 방법을 얻지 못할 것이다. 네가 그 근본을 알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어디에 네 호위병을 세워두어야 할지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 네가 그 아침을 알지 못할 것이다" (히브리 표현은 이렇게 되어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동이 트고 해가 떠오를지는 정확히 아나, 날리 샐 때 어떤 날이 임할지, 또 언제 어디서 환난이 임할지 알지 못한다. 아마도 폭풍우는 우리가 거의 생각지 않았던 방향에서 올지 모른다. 바벨론은 큰 지혜와 지식을 갖고 있는 척했다(10절). 그러나 바벨론은 자기의 모든 지식으로 위협당하는 그 멸망을 예견할 수 없었고, 자기의 모든 지혜로 그것을 막을 수도 없었다. "파멸 할 수 없었고, 자기의 모든 지혜로 그것을 막을 수도 없었다. "파멸이 도적같이 돌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헤아리지 못할 것이니라. 즉 거의 생각지 못할 것이니라."
이 멸망에 관한 훌륭한 경고가 이사야와 여호와의 다른 선지자들에 의해 실지로 그들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그 통고를 무시하고 그것을 신용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다시는 그것을 통고하지 않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리하여 일부는 그들 자신의 방심으로 말미암아, 또 일부는 그 대적의 날렵함과 교활함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임했을 때 그것은 그들에게 온전한 놀라움이 될 것이다. 기록된 말씀의 경고를 무시하는 자들은 그밖의 다른 징후를 기대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3) 그것은 저항할 수 없는 멸망이며 그들이 막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재앙이 네게 매우 갑자기 임할 것이므로 너는 피할 시간이 없을 것이며, 매우 강하게 임하므로 너는 그것을 막아내고 제거하여 네 자신을 구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명령을 닫고 올 때, 그것을 대항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바벨론은 자기의 모든 재물과 권세와 우수함으로도, 임하는 재앙을 제거 할 수 없는 것이다.
Ⅳ. 그들은 그들의 점술에 대해 그들의 마술과 점성술에 대해 비난당하고 있다. 갈대아 사람들은 다른 민족보다 이것으로 유명했으며, 다른 민족들은 그들에게서 이러한 종류의 모든 지식을 얻어 갔다.
1. 이것은 여기에서 그들의 도발적인 죄 중에 하나로써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이 죄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할 것이다(9절). 네가 "무수한 사술과 많은 진언을 베풀지라도 너를 벌하기 위해 이 재앙이 임할 것이다. 마술은 본래 아주 극악한 죄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대적을 우리의 안내자로, 그리고 거짓이 아귀를 우리의 신탁으로 만듦으로써 하나님께만 바쳐야 하는 영광을 마귀에게 돌린다. 바벨론에서는 그것이 정부의 보호와 장려를 받고 있는 국가적인 죄였다. 확실치는 않지만 마술사들이 그들의 모사였고 나라의 수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일을 갚지 않으시겠는가? 얼마나 무수한, 얼마나 많은 사술과 진언이 그들 가운데 있었는가 살펴보자. 그것은 이처럼 정신을 홀리는 죄였으므로, 그것이 일단 허용되었을 때 그것이 산불처럼 퍼졌고 그들은 결코 그 결국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또한 속는 자와 속이는 자가 기묘하게 부어났었다.2. 점성은 여기에서 그들이 의지하는 헛된 것 중의 하나로서 언급되어 있다. 그들은 그것을 크게 의지하지만 속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장차 임할 심판을 통고해 줄 만한, 더욱이 그것을 방어해 줄 만한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1) 그들은 사술과 진언에 관해 막대한 수고를 기울인 것에 대해 여기에서 비난받고 있다. "너는 젊어서부터 그 일에 힘썼느니라" (12절). 그들은 젊었을 때 이러한 것을 훈련받았고 거기에 몰두한 자들은 그 일에, 즉 책을 읽고 관찰하고 실험하는 일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들로 하여금 이제 그들의 사술로써 대항하고, 위기 속에서 그들의 솜씨를 시험해 보게 하라. 그들로 하여금 할 수 있다면 그 침입해 오는 적에 대항하도록 하라.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나라에 봉사를 제공하게 하라. 그러나 그것이 무슨 소용있는가? "네가 이러한 종류의 많은 모략을 인하여 피곤케 되었도다(13절). 너는 그 모든 것과 의논했으나 만족을 얻지 못했다. 그들이 세운 갖가지의 계략들과 그들이 준 갖가지의 판단들은 너를 점차로 혼란하게 만들고 피곤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이와 같은 모략이 많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안전함이 없는 배우다.
(2) 그들은 그들 중에 이러한 백성들의 종류를 다양하게 가진 것에, 대해 비난받고 있다(13절). 그들은 하늘을 살피는 자 또는 천체 관측자들을 갖고 있었지만, 다윗처럼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보기 위해 그것을 살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것으로써 미래의 사건을 예언한다는 구실 아래 하늘을 관찰했고, 그것을 지으시고 "그 권능을 땅에 베푸시며" (욥 38:33) 그것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을 잊었다. 그는 하늘에 앉아 계시는 것이다. 그들은 "별을 보는 자," 즉 별의 운행과 그것의 회합(會合)과 대충(對衝)에 의해 나라와 국가의 운명을 읽는 자들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월삭에 예고하는 자," 연감을 만드는 자, 즉 매 달의 날씨가 어떠할지, 또는 어떤 일이 있을 것인지를 말해 주는 자들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것들에 관한 지식의 축척을 그들은 매우 귀중히 여겼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사기꾼이었고 그들의 술책은 허위였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여기에서 일부의 사람들이 사칭하고 있는 판단력이 있는 점성술이, 장래사에 관한 예언을 하기 위해 그들이 취하는 규정에 의해 어떻게 갈대아 사람들의 것과 구별될 수 있는지, 따라서 그것이 어떻게 본문에서의 비난과 경멸을 피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 추측에는 그들의 연감을 연구하고 성경과 거기에 있는 예언보다도 그 연감과 그들의 예언을 존중한 일부의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3) 그들은 그들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그들에게 어떤 친절을 행할 수 있는 척하는 모든 사람들의 지독한 무능력과 부족함에 대해 비난받고 있다. 그들로 하여금 그 사술의 도움으로 그들의 적을 이길 수 있는지, 또는 그들 자신을 이롭게 할 수 있는지, 자기네들의 군사의 사기를 북돋우거나 그들을 치러오는 자들의 사기를 위축시킬 수 있는지를 보게 하라(12절). 그들로 하여금 점을 치는 자들이 그들에게 어떤 봉사를 행할 수 있는지 보게 하라. "그들로 일어나 그들의 능력으로써 네게 임할 이 재앙으로부터 너를 구원하게 하거나, 그들의 선견지명으로써 그것을 미리 발견하게 하여 네가 필요로 할 예방 조치로 네 자신을 구원할 수 있게 해 보라." 엘리사는 이스라엘 왕에게 아람 군대의 동태를 통고함으로써, 그로 "방비하게 하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왕하 6:10). 이러한 점장이들의 낭패는 바벨론이 점령당하고 벨사살이 살해당한 날 밤, 그의 모든 점성가들과 예언자들과 박사들이 치명적인 처형을 예언한 벽위에 손글씨에 대해 어찌할 바를 몰랐을 때 문자 그대로 이루어졌다(단 5:8).
(4) 그들은 그 공동멸망 속에서 지혜로운 자들이 몰락하는 것에 대해 비난받고 있다(14절). 자기 자신도 안전케 할 수 없는 자들은 자기 친구를 도기에 부적당하다. 그들은 기껏해야 보잘 것 없고 쓸모없는 초개같다. 그리고 "그들은" 사르는 불 앞에 있는 "초개 같을 것이다." 바사 사람들은 그들의 현자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 바벨론의 현자들을 없앨 것이다. 그들이 "불에 타리니 그 불꽃의 세력에서 스스로 구원치 못할 것이다." 죄로 인해 자기 자신을 삼키는 불의 연료로 만드는 자들은 삼키우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을 기대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불을 당기실 때, 그것은 "덥게 할 숯불이 아니요, 그 앞에 앉을 만한 불도 아닌" 그들을 태울 숯불이 될 것이다. 또는 오히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아주 타버려 완전히 재가 될 것을,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 어떤 봉사를 행할 만한 숯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을 시사하고 있다. "하나님은 심판하실 때 이길 것이기" 때문이다.
(5) 그들은 그들의 무역하던 자들에 대해, 그리고 그들이 어려서부터 거래하던 자들에 대해 비난받고 있다(15절).
[1] 그들이 상의하던 자들. 그들은 언제나 마법을 다루는 이 점성가들과 교제하기를 즐겼고 사실상 그들은 무역하는 자들이었다. 점술은 바벨론에서 가장 흥행하던 장사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장사에 종사한 자들은 아마도 가장 부유한 상인들처럼 호화롭게 살고 그들처럼 많은 돈을 벌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가 삼키워졌을 때, 다른 사람들은 "각기 소향대로" 고향으로 달아났고 바벨론을 구원할 자가 없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파렴치한 안위자들이었던 것이다.
[2] 그들이 통상하던 자들. 그들이 수고를 기울인 그 점성가들이 그들을 버린 것과 같이 그들과 무역하던 자들도 그렇게 했다. 그들은 자기의 물건을 안전케 하는데 부심했을 뿐, 바벨론은 어떻게 되든 개의치 않았다. 그들은 "자기 소향대로 유리했느니라." 각 사람은 자기의 안전을 위해 피신했고 그 누구도 그들이 그처럼 많은 돈을 번 성읍에게 도움의 손을 뻗치려 하지 않았다. 각 사람은 자기 자신만을 위했고, 자기 친구를 위하는 자들은 거의 없었다. 신약의 바벨론을 인하여 치부한 상고들은, 바벨론이 탄식하고 있으나 그것을 구하기 위해 어떤 일을 시도하려 하지 않은 채 매우 타산적으로 멀리 서서 애통해 하기만 했다(계 18:19). 믿음과 기도에 의해 "환난 때에 즉시 도우실" 자와, 교제를 나누는 자들은 행복할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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