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엘에 내린 형벌 (이사야 29:1-8)
여기에서 "아리엘" 이라 불리우고 있는 곳은 바로 예루살렘이라는 데에 의견이 일치되고 있다. 왜냐하면 아리엘은 다윗이 거한 성읍이라 했기 때문이다. 또 그 도성의 일부가 "시온" 이라 불리웠는데, 시온은 특별한 면에서 다윗성이었고, 그 안에는 성전과 궁전이 모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아리엘이라고 불리우고 있는 이유는 확실치 않다. 아마도 이 당시에는 그 이름과 이유가 모두에게 잘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성읍들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별명과 애칭을 갖고 있었다. "아리엘" 은 "하나님의 사자" (lion) 또는 "강한 사자" 를 의미한다. 사자가 짐승들의 왕인 것과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은 성읍들의 왕으로서 그 주위의 모든 성읍에게 법을 주었다. 또 그것은 "큰 왕의 성" 이었다(시 48:1, 2). 그것은 "새끼 사자" 라 불리우고 있으며(창 49:9), 그 군호가 사자였던 유다의 중심 성읍이었다. 그리고 유다 지파의 사자인 분은 또한 유다의 영광이었다. 예루살렘은 때로 그 이웃 민족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또 의로운 성읍이었을 동안에는 사자처럼 담대했다.
혹자는 "아리엘" 은, 사자가 그 먹이를 삼키듯 제물로 바쳐진 짐승을 삼킨 "하나님의 제단" 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다윗이 거한 성읍에 있는 그 제단에 화 있으리로다라는 말이다. 그 제단은 갈대아 사람들에 의해 성전과 함께 훼파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예루살렘에 대한 재앙, 예루살렘으로 보고 싶다. 그것이 더 자각할 수도 있었으리라는 사실이 마태복음 23장 37절에서처럼 여기에서 반복되어 있다.
다음 내용을 살펴보자.
Ⅰ. 예루살렘의 환란이 예고되어 있다. 예루살렘이 사자처럼 강한 성이요, 하나님의 사자처럼 거룩한 성이긴 하지만, 거기에서 불의가 발견된다면, 거기에도 재앙이 내릴 것이다. 예루살렘은 "다윗이 진을 쳤던 성읍" 이다. 그 사실이 예루살렘을 영광스럽게 했다. 그리고 그것을 복음의 교회의 한 상징으로서,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의 임재하시는 것을 상징했다. 그러나 그 안에 이스라엘의 증거 궤와 "다윗의 집의 보좌" 가 있었다는 것은, 예루살렘의 죄를 더욱 무겁게 하는 근거로 언급되어 있다.
1. 외적인 종교적 행사가 하나님의 심판을 면제해 주는 역할을 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예루살렘으로 하여금 알게 하라(1절). "연부년 절기가 돌아오리라. 너희는 연중 잔치를 계속하고 너희 모든 남자들은 법도와 관례대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일 년에 세 번 여호와 앞에 헌신하라. 그리고 그들이 이 의식 중에 어느 것도 결코 빠뜨리지 않게 하라. 그들로 하여금 늘상 그렇게 해오던 대로 제물을 잡게 하라. 그러나 그들의 생활이 개혁되지 않고 그들의 마음이 겸비케 되지 않는 한, 그들로 하여금 이렇게 해서 노하신 하나님을 진정시키고 그의 분노를 돌리게 하려는 생각은 갖지 않게 하라."위선자들도 경건한 훈련의 궤도를 꾸준히 밟는 자의 모습으로 발견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것으로 즐거워하나, 그것이 결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으며, 그와 화목하게 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2. 예루살렘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진노하심으로 그에게 나아오신다는 것을, 곧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를 징벌하실" 것이라는 사실을(6절) 알게 하라. 그의 죄는 조사되고 처벌될 것이다. 하나님은 무서운 심판으로, 전쟁의 놀라운 경보와 비참한 황폐로써 그들에게 갚으실 것이며, 그것은 "벽력과 지진과 폭풍과 맹렬한 불꽃" 같을 것이고, 특히 "큰 소리" 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할 것이다. 외적이 국경 지대가 아니라 그 나라의 심장부에 와서 고함을 치고, 약탈하며, 모든 것을 황폐케 할 때(특히 랍사게의 처신에서 나타난 것처럼, 그 지휘자들이 매우 오만하기 때문에 그 병사들도 의심할 바 없이 더욱 더 거칠었던 그 앗수르 군대와 같은 자들은 그렇다), 그들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벽력과 폭풍으로 자기들을 징벌하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본문에 "큰 소리" 라고 되어 있는 것은 아마도 그것이 그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 이상으로 겁을 주게 되리라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는 것 같다. 세부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1) 예루살렘은 엄중하게 포위될 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아리엘을 멸하리라" 고 말씀하시지 않고, "내가 아리엘을 괴롭게 하리라" 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그 성읍은 회개하고 개혁하가도 촉구받아, 멸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 환란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너를 사면으로 둘러 진을 치리라" (3절). 그 성읍을 치려고 진을 친자들은 적의 군대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가 그 일을 행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 원수들은 바로 하나님의 손이며, 그는 그들을 이용하시어 그 일을 행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제껏 자주 그리고 오랫동안, 친구들로써 그들의 사면을 둘러 진을 치시어, 그들을 보호하시고 건지셨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들의 적이 되시어," 그들을 치신다. 예루살렘에 대한 포위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요, 그들에 대한 공격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이 우리를 친다면,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다투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2) 예루살렘은 나라가 황폐케 되고, 요새화되었던 유다의 모든 성읍들이 그 대적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슬픔에 잠길 것이라 했다. "네가 슬퍼하고 애곡하리라" (2절). "애통해 하고 탄식하리라" (때로는 이처럼 이 두 단어가 동시에 사용된다). 가장 즐겁고 유쾌한 자들이 괴로움을 당할 때는 대개 가장 큰 슬픔과 애곡을 당한다. 그 때 그들의 웃음은 울음으로 변한다. "그 때에 온 예루살렘은 내게 아리엘, 곧 그 위에 있는 불로 거기에 있는 희생 제물을 죽이는 제단과 같이 되리라. 예루살렘이 갈대아 사람들에 의해 멸망될 때 그러했던 것이다. 그리고 앗수르 사람들에게 포위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살해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모든 성읍이 제단이 되어, 죄인들은 그 때에 임하는 심판에 의해 그 제단에 떨어져 하나님의 정의의 제물이 될 것이다."
또는 이처럼 해석할 수 있다. "슬퍼하고 애곡하리라. 그들은 회개하고 개심하여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며 그 때에 그것은 내게 있어서 아리엘과 같을 것이다. 예루살렘은 본래와 같이 될 것이며 내게 다시 예루살렘, 곧 거룩한 성읍이 될 것이다." (1:26).
(3) 예루살렘은 낮아지고 굴욕을 당하며 복종하게 될 것이다(4절). "네가 도달한 그 오만과 거만의 꼭대기로부터 낮아질 것이다. 교만한 얼굴과 교만한 말투는 낮아지게 하는 연속적인 섭리에 의해 꺾일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멸시하는 자들은 그 심판에 의해 비천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가장 교만한 죄인들도 그의 앞에서 구부려지거나 꺾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허풍을 떨었고, "뿔을 높이 들었으며, 교만한 목으로 말했다" (시 75:5). 그러나 이제 "네 목소리가 신접한 자의 목소리 같이 땅에서 나며 네 말소리가 티끌에서 지꺼리리라" (4절).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암시한다.
[1] 그들은 쇠약해지고 연약해져서 큰 소리로 이야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말하고 싶어하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병들거나 기력이 다한 자들처럼, 말 소리가 낮아지고 간간이 끊길 것이다.
[2] 그들은 두려움을 느낄 것이며 그들의 대적이 엿듣고 그들을 칠 미끼를 얻는 것을 두려워하여, 간담이 서늘해져 작게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3] 그들은 나약하게 될 것이며, 그 정복자들에게 복종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히스기야가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왕이 내게 지우시는 것을 내가 당하리이다" (왕하 18:14)고 말하면서 앗수르 왕에게 굴복하였을 때, 그의 목소리는 땅(티끌)에서 나는 소리처럼 매우 낮았다. 하나님은 가장 대담했던 자들까지도 웅크리게 만드실 수 있으며, 그들의 기를 완전히 꺾으실 수 있다.
Ⅱ. 예루살렘의 대적들의 멸망이 예고되어 있다(5, 7절). 이것은 이러한 환란 속에서도 예루살렘의 친구가 되었고 또 예루살렘이 잘 되기를 바라던 모든 사람들을 안위하기 위해서이다. "네가 낮아져서(4절), 땅에서 말하리라. 그처럼 네가 비천하게 될 것이다. 그럴지라도, (그것을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 네 대적의 무리와 강포한 자의 무리 곧, 그 대적의 무수한 군대는 전혀 말할 수 없는 또는 낮은 소리로도 말할 수 없는 세미한 티끌 같겠고 (바람에)불려가는 겨 같으리라. 네가 낮아짐을 당할 것이나, 그들(원수들)은 완전히 흩어짐을 당할 것이며, 다른 방식으로 공격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다(27:7). 그들은 곧 사라질 것이다. 그 일이 경각 간에 갑자기 이루어지리라. 그 대적들은 멸망에 놀랄 것이며, 너는 구원에 놀랄 것이다." 예를 들면, 앗수르 군대는 한 천사에 의해서 현장에서 갑자기 몰살을 당했다. 복음의 예루살렘의 대적들의 멸망도 그러할 것이다. "한 시간 내에 그들의 심판이 이를 것이다" (계 18:10). 그리고 다시(6절), "여호와께서 너(한글 개역은 - "그들을")를 징벌하실 것이라. 또는(일반 번역처럼) 그녀(도성이나 나라는 여성임 - 역주)를 벽력과 큰 소리로 징벌하실 것이라. 네가 하나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면 또 하나의 두려움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7절) 아리엘을 치는 열방의 무리는 밤의 환상(꿈) 같이 되리라. 그들과 그들의 형통함이나 성공은 곧 무너질 것이다." "시온을 치는 열방의 무리는 주린 자가 꿈에 먹었을지라도," 깨면 여전히 배고픈 것같이 될 것이다.
1. 즉 그들이 예루살렘을 약탈하고 그 부유한 성읍을 노략함으로써 스스로를 부유케 하기를 원했던 것에 반하여, 그들의 소망은 헛된 꿈이었음이 드러나고 말 것이다. 그들은 그 소망으로 그들의 상상력을 즐겼고, 잠시 스스로를 위안할 수도 있으나, 마침내는 실망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예루살렘의 주인이 되리라고 상상했으나, 결코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2. 그들 자신과 그들의 모든 장엄함, 권세, 그리고 형통함은 깨어난 후의 꿈처럼 사라질 것이다. 아무런 가치도 없고 잠간만 존속하는 꿈처럼 될 것이다(시 73:20). 산헤립은 "꿈같이 지나갈 것이다" (욥 20:8). 꿈이 사람의 머리를 채우고 특히 배고픈 채로 잠자리에 든 자의 머리를 음식에 대한 꿈이 채우듯 산헤립의 군대가 비록 그 나라를 채웠을지라도, 그것은 사라질 것이며, 곧 없어질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괴롭게 하시고 포위당하게 하실 때 내릴 진노에 대한 경고의 한 부분으로 해석하고 있다.
(1) 예루살렘이 자기들의 도움으로 믿던 우방이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막강한 자들일지라도 세미한 티끌같이 될 것이며,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2) 그 원수의 무리는 자기들이 예루살렘에게 능히 해를 끼칠 수 있으리라고는 결코 생각지 못할 것이다. 꿈에 먹을지라도 계속 배가 고프고 더욱 더 먹고 싶어하는 자처럼, 그들은 열심히 삼키나 여전히 배고프리라.
유다에 대한 위협 (이사야 29:9-16)
Ⅰ. 그 예언자는 유대 민족의 대다수가 어리석음에 놀라고 있다. 그들에게는 "여호와의 선한 지식" 을 가르치며, 또 히스기야로부터 그러한 일을 하라는 격려를 받은(대하 30:22) 레위인들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메시지를 직접 그들에게 전해 주며,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원인과 그 결과는 무엇인가를 그들에게 알려 주는 예언자들이 있었다. 혹자는 하나님의 계시는 온갖 혜택을 받고 있는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리리라고" (신 4:6)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완전히 그 반대였다(9절). 그 예언자는 그들이 그 이웃들의 보편적인 경솔함을 좋아하고 있는 것에 대해 냉정하게 생각해 보고있다.
그것은 이렇게 해석될 수 있다. "그들은 회개하기를 지연시키고 미루나, 너희는 그들이 그처럼 어리석은 것에 놀라리라. 그들은 그들 자신을 기만함으로써 스스로를 희롱하고 있다. 그들은 술마시고 법석을 떤다. 그러나 너희는 부르짖으라. 그들의 어리석음을 탄식하라. 그들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께 부르짖으라. 그들을 치려는 하나님의 손을 그들이 깨닫지 못할수록 너희는 더욱 이것들을 마음에 두라."
죄인들이 안심하고 죄의 길로 행하는 사실은, 마땅히 모든 진지한 백성들에게는 탄식과 놀라움의 대상이 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도하지 않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 문제는 무엇인가? 이처럼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1. 백성들의 대부분이 마치 취한 자처럼 멍청하고 야비하며 얼빠진 상태였다는 사실에 이루가 놀랄 것은 당연하다. "그들이 취함이 포도주로 인함이 아니며" (즉 포도주를 이따금씩 마시지만, 포도주만으로 인해서는 아니었다), 그들은 "포도주로 옆걸음 쳤다" (28:7). 그들은 향락에 대한 사랑과 신앙에 대한 편견과 그들이 섭취한 부패한 교훈으로 인하여 취했다. 술취한 자들처럼, 그들은 자기들이 행하거나 말하는 것과 또 어디로 갈 바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책망을 깨닫지 못한다. 취한 자는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다" 고 말한다(잠 23:35).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꾸 반복해서 말씀하신다. 그러나 취한 자처럼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며, 이해하지 못하고, 법도를 잊어버린다. "그들은" 그 계획에 있어서 "비틀거리며" 불안정하고, 꾸준하지 못하다. 그리고 그들의 길에 놓여있는 모든 것에 걸려 넘어진다. 영적인 술취함과 같은 일도 있다.2.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그들에게 부어 주사, 그들의 눈을 감기셨다" (10절). 즉 그들에게 잠을 깨어 눈을 뜨라고 명하신 바로 그가 또한 그들을 잠들게 하고 그들의 눈을 감기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더욱 이상한 일이다. 그들은 "빛보다는 술취함을 사랑하고," 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심판은 항상 의롭다. 하나님께서 그의 예언자들을 통해 그들을 부르셨을 때, 그들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하고 말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깊은 망상 속에 빠지도록 내버려 두셨고, "이제는 자라" 하고 말씀하셨다.
이 사실은 믿지 않은 유대인들에게 적용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했고, 계속 불신앙을 고집하였다. 그래서 마침내는 극도의 진노가 그들에게 임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을 주셨다" 고 했다(롬 11:8). 복음의 빛 가운데서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러한 비참한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두려워해야 한다.
3. 지도자가 되어야 할 그들의 예언자들과 치리자들과 선견자들이었던 자들 자신이 눈멀었다는 사실은 매우 슬픈 일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어떤 치명적인 결과가 오리라는 것을 말하기는 쉬운 일이다. 이것은 유대교의 후반기에 대제사장과 서기관 그리고 백성의 장로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큰 반대자였고, 그들 자신이 재판상의 혼돈에 빠졌던 그 때에 이루어졌다.4. 그들은 회개와 지식과 은혜를 주는 모든 수단을 향유했었지만, 그것이 무효가 되고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이 바로 이 사건의 슬픈 결과이다(11, 12절). "참되고 거짓된 예언자들의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또는 글자의 말이라. 너희는 참된 묵시의 진리와 거짓된 묵시의 진리를 분별할 수 없도다." 또는 특히 이 예언자가 그들을 위해 보았고 그들에게 알린 묵시를 그들이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받은 책을 열어보지 않고 봉한채로 놓아둔 사람(비록 훌륭한 학자라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있는 묵시로 인해서 그들이 결코 더 지혜로운 자가 되지는 못했다. 어리석은 자는 그것이 책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다.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는 젼혀 모르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이사야가 말한 것이 묵시와 예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 속에 어떤 뜻이 감추어져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것은 그들에게 말소리에 불과했다. 따라서 그들은 그것에 의해 조금도 놀라지 않았고 감동되지도 않았다. 그것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묵시가 조금도 그들에게 감명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식한 자든 무식한 자든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종 예언자들을 통해 메시지를 보냈다고 해서, 더 나아가지 않았다. 또한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평민들은 학자로서의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일과는 상관이 없기라도 한 것처럼, 학식과 고등 교육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예언자들이 말한 것을 주목하지 않는 구실로 삼았다. "그것은 내게 무익하다. 나는 무식하도다." 보다 높은 지위의 사람들은 그 예언자가 자기들도 잘알지 못하고,(그들은 비록 학식있는 자들이었을지라도) 써보지 못하던 낯선 방식으로 말한다고 꾸며댔다. 그리고 Si non vis intelligi negligi - 즉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모두는 근거없는 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예언자들은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대해 신실치 못한 채무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롬 11:8).
또는, 이것을 이렇게 풀이할 수도 있다. 예언책이 그들에게 봉한채로 전해졌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에게 내린 당연한 심판의 하나로서 그것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흔히 그들에게 봉해진 채로 전달되었고, 그들은 그 말을 배우기 위해 수고하지 않았다. 그리고서 그들은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을 읽지 못한다는 핑계를 대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신으로 해서 그 마음이 눈먼 너희에게는 (하나님의)묵시가 이렇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 자체는 이해할 수 없는 게 아니다.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그렇지는 않다. 네게는 죽음에서 죽음에서 이르는 향기가 되는 바로 그 묵시가 다른 사람에게는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게 하는 향기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지식은 이해하고 있는 자에게는 쉽다.
Ⅱ. 그 예언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서, 형식적이고 위선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자들에게 경고를 가하고 있다(13, 14절). 여기서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그들이 책망받고 있는 죄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종교적 행위에서 하나님을 속인다는 것이다(13절). 인간의 마음을 알고 있으며, 외양과 가식으로 속임을 당할 수 없는 하나님은 그것으로 인해 그들의 마음이 가책을 받든 안받든 그들을 책망하신다. 마음보다 크시며 만물을 아시는 하나님은 비록 그들이 "입으로는 그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그를 존경하나", 신실된 경배자들이 아님을 알고 계신다.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그에게 다가가는 것이며, 그에게 우리의 숭앙을 바치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께 용무가 있으며, 그 예를 통해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려는 자들을 하나님께로 가까이 이끌어 간다. 입과 입술로써, 즉 하나님을 (남에게)말하고 하나님께 (우리가) 술의 (한글 - 입술을 대신하여) 수송아지를 주께 드려야 하는 것이다(호 14:2).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 풍성함을 우리의 입이 말해 줄 것이다. 그러나 그 신앙이 입 운동으로만 그치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과 그를 숭앙하는 것에 대해 말하나, 그것은 오직 겉에 붙어 있는 이빨에서 나온 것에 불과하다.
(1) 왜냐하면 그들은 마음으로는 예배에 전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는 척하면서도, 천 가지의 무례한 일을 생각한다.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기도에 전념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말씀에 가까이 하지도 못한다. 하나님을 위해 해야할 일 - 이런 일은 마음을 요구한다 - 을 땅의 목적을 바라보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그릇 행하였다.
(2)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예배의 규정으로 삼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을 자기들의 생각의 바탕으로 삼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배하되 하나님이 정하신 바대로 하지 않고, 자기들 자신의 의도, 자기들의 거짓 예언자나 우상 숭배하는 왕의 지시대로 또는 그 주변에 있는 열방들의 관례대로 했다. 장로들의 유전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율법보다 그들에게는 더욱 중요했고 또 유효했다. 또 그들이 위대한 개혁자, 히스기야 시대에는 하나님의 명령에 부합되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경배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보다는 그 왕의 계명을 더욱 주목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 구주께서는 자기 시대의 유대인들에게 적용시키시고 있다. 그들은 예배에 형식적이었고 그들이 창안해 낸 방식을 섞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이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한다는 것을 선언했다(마 15:8, 9).
2. 경고된 것은 바로 영적인 심판인데, 하나님은 그것으로써 그들의 영적인 사악함을 벌하실 것이라 했다.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라" (14절). 그들은 한 가지 이상한 일을 했다. 즉 그들은 자기들의 마음에서 신실함을 모두 제거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이 다른 한 일을 행하실 것이다. 그는 그들의 머리에서 현명함을 모두 제거하실 것이다. "그들 중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질 것이다." 그들은 위선을 행했고, 하나님을 속이려고 했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어리석은 자로 처시하며, 스스로를 속일 뿐만 아니라 그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 의해 쉽사리 속도록 허락된다. 신앙을 필요할 때에 이용하는 미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자들은, 그 정책에 있어서도 잘못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불의에 가담한 자들에게서 총명함을 빼앗으시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이러한 경고는, 유대 민족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게 되자, 비참한 혼란에 빠졌던 그 때에 이루어졌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자기들의 마음을 치워버렸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당연히 그들에게서 지혜를 제거하셨고 심지어는 그들의 현세적인 평안에 속한 것들을 그들의 눈에서 감추셨다. 이것이 기이한 일이다. 지혜로운 자가 갑자기 그 지혜를 잃고 강한 현혹에 빠진다는 것은 놀라운 일, 곧 이상한 일이다. 마음에 내리는 심판 - 비록 알아채기가 가장 어렵지만 - 은 가장 경이로운 것이다.
Ⅲ. 하나님을 떠나서 은밀히 행하려 하며,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으려는 계획을 수행하고 모든 것을 보시는 그의 눈에서 감추어질 수 있는 것을 계획하려 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밝혀 주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1. 그들의 책략이 묘사되어 있다(15절). 그들은 "자기들의 도모를 여호와께 (서 모르시게) 깊이 숨기려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들이 행하거나 계획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하려 한다. 그들은 "누가 우리를 보리요? 아무도 보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도 보시지 않는다" 고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안전을 위해서 스스로에게 상의했고 결코 하나님의 조언을 구하지 않았다. 아니,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노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한 생각을 그에게서 감출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만일 하나님이 그것을 모르신다면, 하나님이 그것을 낭패케 하거나 좌절시킬 수 없을 것이다.죄인들이 죄악된 방식으로 행하는 수고는 얼마나 어리석고 무익한가를 그들은 하늘에 앉으셔서 그들을 비웃으시는 여호와께 자기들의 계획을 깊이 숨기려 한다. 세속적인 숭배와 위선에 대한 세속적인 신뢰의 밑바탕에서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에 대한 실제적 불신앙이 깔려있다(시 94:7; 겔 8:12; 9:9).
2. 그들의 책략의 어리석음이 입증되어 있다(16절). "아래 위가 뒤바뀐 사물을 뒤바꾸려 하는 너희들(한글 개혁과는 다소 다름. 역주), 즉 너희가 원하는 모양으로 일을 만들기 위해 이렇게 저렇게 사건을 뒤바꾸어 꾸민 여러 가지 계획들, 또는 하나님의 섭리를 너희 계획에 이용하려고 생각하여 사물의 질서를 바꾸는 것은 - 그것은 사물을 완전히 전도시킨 것이요, 잘못된 끝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토기장이를 진흙같이 여겨지리라. 하나님은 토기장이가 자기 진흙으로 무엇을 만드는 것과 같이 매우 쉽게 그리고 절대적인 능력을 가지고 너희와 너희의 모든 계획을 주관하실 것이다. 하나님 없이, 특히 하나님께 도전하여 계획을 꾸미는 자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무시하는가를 보라. 그리고 우리는 그런 자들을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1) 자기의 계획을 하나님에게 감추려 하는 자들은 실상은 하나님이 자기의 창조주 되심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그것은 마치 물건이 그것을 만든 자에 대해 "그가 나를 만들지 아니하였다. 내가 나 자신을 만들었다" 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다면, 그는 시편 기자가 보여 준 것과 같이 분명 우리를 알고 계신다(시 139:1, 13-16).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기들을 모르고 있다고 말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만들지 않았다고도 당연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악인들의 대부분의 죄악이 바로 여기에서 일어난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셨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이다(신 32:18).
(2) 또는 마찬가지로, 그들은 하나님이 지혜로우신 창조자이심을 부인한다.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도다고 했다." 왜냐하면, 만일 그가 우리를 이처럼 지혜롭게, 특히 우리를 지성적인 존재로 만드시고 "마음속에 총명을 주실" (욥 38:36) 그런 총명을 갖고 계신 분이라면, 틀림없이 그는 우리 자신과 우리가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을 아실 만한 총명도 갖고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다투는 자들은 물론, 그에게 스스로를 감추려하는 자들은 사실상 하나님께 어리석게 도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시 94:9)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 (이사야 29:17-24)
자기의 의사를 여호와께 감추려 하는 자들은 사리를 그릇친다고 했다(16절). 그리고 그들은 그 의사를 하나님이 모르게 하려고 꾀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기에서 자기의 행위 방식을 완전히 뒤바꾸시겠다고 그들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는 그와 그들의 말 중 누구의 말이 설 것인가를 보자.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않는다. "잠시 기다려라" 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러면, 너희는 세상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며, 그 속에 있는 모든 변화를 그의 교회에 유익하도록 지시하시는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을 가시적(可視的)인 증거에 의해 깨닫게 될 것이다."
여기에 예고된 놀라운 혁명은 원칙적으로는 산헤립의 시도가 죄절된 후 유다와 예루살렘의 사태가 잘 해결된 사실과, 선한 백성들이 전쟁과 핍박의 칼에 대한 놀람에서 구원받게 되자 누리게 될 안정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더 나아가 복음이 처음 심겨졌을 때, 유대인의 거부(왜냐하면 그들의 위선됨과 불충실성이 13절에 예고되어 있기 때문이다)와 이방인들이 교회로 들어오게 되는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Ⅰ. 일반적으로 말하면, 여기에 예고되어 있는 것은 크고도 놀라운 변화이다(17절). 삼림이었던 "레바논이 기름진 밭으로 변하리라" 고 했다. 그리고 기름진 밭이었던 갈멜이 삼림으로 될 것이라 했다. 이것은 상호교체이다. 더 나은 것이든 더 나쁜 것이든지 간에, 큰 변화가 흔히 삽시간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땅이 보통 때 이상으로 기름지게 되리라는 것은, 산헤립이 패하리라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 주는 한 징조였다(37:30). "금년에는 스스로 난 것을 먹을 것이니라" 고 했다. 즉(짐승과 같이) 사람이 토양의 자연적인 산물을 먹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 후 실제로 레바논은 기름진 밭이 되었다. 레바논이 너무나 비옥해졌기 때문에, 보통 때는 레바논에 비교하여 기름진 밭으로 간주되곤 했던 곳이 이제는 단지 삼림처럼 보였다. 사람들이 추수되어 이방인들 중에서 그리스도께로 크게 모여 들게 되자, 광야는 기름진 밭으로 변했다. 한편 오랫동안 기름진 밭이었던 유대 교회는 황무하고 버려진 숲이 되었다(54:1).
Ⅱ. 자세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1. 무지했던 자들이 총명을 지니게 될 것이다(18절). 이 예언을 이해하지 못했던 자들(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단지 인봉된 책이었다)이 예언이 성취되면, 그 때에는 그것을 깨달을 것이며, 그 사건에 속하는 하나님의 손길이 들어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예언 속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어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 날에 귀머거리가 책의 말을 들을 것이다." 예언의 성취 자체가 그 예언에 대한 가장 훌륭한 해설이 된다.그 때에 불쌍한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흑암 가운데 앉았던 자들은 큰 빛을 볼 것이며, 소경의 눈이 어두운 데서 나와 볼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이 그들에게 보내져 "그 눈을 뜨게 하였기" 때문이다(행 26:18). 사람들을 선한 감동을 받고 선한 행동을 하도록 만들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다루는 과정은, 바로 하나님의 책에 대한 그들의 총명을 열어 주고 그들로 하여금 그 말씀을 알아듣게 하는 것임을 주목하자.
2. 그릇되었던 자들이 올바른 자들이 될 것이라 했다(24절). "마음이 혼미하던 자," 즉 그 책의 말씀과 그 의미를 오해하고 있던 자들이 총명하게 된다. 즉 그것을 바르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진리의 영이 그들의 잘못을 교정해 줄 것이며, 그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잘못을 저질렀고 속임을 당한" 자들도 총명하게 만드실 수 있고 또 자주 그렇게 만드셨다는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격려하는 것임에 분명하다. 하나님의 진리는 말하기도 어려운 것이라고 원망하고 트집을 잡아내기를 좋아하던 자들이 그 교훈의 참 뜻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 후에는 그들을 그것을 더욱 달게 받을 것이다. 공적인 일로서 하나님의 섭리에 관하여 과오를 범하고 그 시여에 원망하던 자들은 일의 결과를 보게 되면 그것을 더 잘 깨닫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모든 것 속에서 의도하고 계신 바를 알게 될 것이다(호 14:9).3. 우울했던 자들이 명랑하고 유쾌하게 될 것이다.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더하리라" (19절). 세상에서 가난하고 심령이 가난한 자들, 즉, 고통 중에 있을 때, 그 고통에 순응하며 순수하게 따르고 노하지 않던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나타나시는 것을 보면,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더하게" 되거나 그 기쁨이 "되풀이 될"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환란 속에서도 여호와를 인한 기쁨을 지켰고, 이제는 그것이 더하게 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고통 가운데 있을 때도 진실로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는 자들은 멀지않아 그를 더 크게 기뻐할 이유를 얻게 될 것이다. 세상에서의 기쁨이 감소되고 시들어갈 때,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은 증가되고 그 터를 확보한다.
스스로 빛나는 이 광명은 더욱 더 빛날 것이다. 왜냐하면 목표되고 있는 바는 "이 기쁨이 충만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 중 빈핍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며, 그들이 빈곤하다 하여 그것이 그 기쁨을 그들에게서 뺏지 못할 것이다(합 3:17, 18). 그리고 온유한 자, 겸손한 자, 인내하는 자, 그리고 노하지 않는 자에게는 이 기쁨이 불어날 것이다.
온유함이라는 은혜는 우리의 거룩한 기쁨을 증가하는 데에 매우 기여하리라는 것을 기억하자.
4. 거대했던 대적들은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 그 "강포한 자" 산헤립과 그의 큰 군대는 "소멸될" 것이며(20절), 더 이상 악을 행할 능력은 전혀 없어질 것이다. 정말로 강포한 자인 사탄의 권세는 그리스도의 보금이 전파됨에 따라 꺾일 것이다. 그리고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를 무서워하므로 종노릇하던 자들은 해방될 것이다(히 2:14, 15).5. 사람들을 괴롭히는 박해자들은 조용해질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성가시게했던 자들은 그 두려움에서 풀려나 평온케 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휴식을 완전케 하기 위해, 외부의 강포한 자들이 소멸될 뿐 아니라 그 내부의 경만한 자도 히스기야의 개혁으로 인해 소멸되고 끊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외부에 있는 강포한 대적을 쳐서 승리를 주실 때, 그들 내부의 더욱 위험한 대적인 악과 불경스러움과 핍박하는 마음의 소유자들을 막는 데에 관심을 기울이는 자들은 행복한 백성들이며 또 그렇게 될 것이다. 또는,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소멸되고 끊어질 것이며, 그 본보기로 선발된 것이다. 또는, 그들은 그들이 조롱했던 그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당황하게 되어 모르는 사이에 쇠약해질 것이다. 이 경만한 자들의 죄악이 무엇이었는가를 보라. 그들은 그것 때문에 죽임을 받아야 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과 예언자들을 박해해 왔다. 아마도 그들은 특히 예언자 이사야를 박해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처럼 절실하게 그들에 대해 그리고 그들의 교묘한 악의에 대해 원망하고 있다. 어떤 자는 밀고자와 핍박자로서 또 어떤 자는 재판자로서, 이사야의 생명을 또는 적어도 이사야의 자유를 빼앗기 위해 자기들일 할 수 있는 온갖 일을 다 행했다. 그리고 이 사실은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을 핍박했던 대제사장들과 바리세인들에게도 매우 잘 적용된다. 바로 그 죄로 인해 그들과 그 경만한 자의 민족이 소멸되고 끊어졌던 것이다.
(1) 그들은 예언자들과 엄숙한 신앙 고백을 조롱했다. 그들은 그러한 자들을 멸시했으며, 그들을 경멸하기 위해 온갖 힘을 다했다. 그들은 오만한 자들이었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았다.
(2) 그들은 그러한 자들을 칠 기회를 얻기 위해 가만히 기다렸다. 그들은 신앙인들에게서 죄악이라고 불리워질 수 있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것을 포착하기 위해 염탐꾼을 보내어 "죄악의 기회를 엿본다." 또는, 그들은 유다가 우리 주 예수를 배반하기 위해 했던 것처럼, 악을 행할 기회를 엿본다.
(3) 그들은 가장 조그마한 혀의 실수로도 그들을 칠 미끼로 삼았다. 그리고 극히 작은 말의 실수도 고발의 근거로 삼았다. 그는 평소에 지혜롭고 선한 사람이며, 하나님의 사라인데도, 그들은 그가 하는 말의 의미는 좋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잘못 선택했거나 잘못 배열한 "말 한 마디 때문에 사람을 범범자로 만들었다" (개역과는 다름)(21절).
그들은 예언자들이 경고하는 식으로 그들에게 한 말은 비록 순수하고 모욕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는 것이었지만 말마다 트집을 잡았다. 그들은 그가 말한 것을 가장 나쁘게 해석하며, 억지로 왜곡시킴으로써 그 말을 범법으로 만들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분별없이 말하기 쉽고 들은 말을 오해하기 쉬운 경향이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는 자들은 어떤 사람을 말 한 마디로 범죄자로 삼는 (한글은 송사에 사람에게 죄를 입히는 - 역주) 것은 매우 부당하고 불공정한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4) 그들은 자기들에게 성실하게 대하고 그들의 잘못을 말해주는 자들을 괴롭게 만들기 위해 온갖 일을 다 했다. "성문에서 책망(판단)하는 자들, 즉 예언자들이나 재판장들 그리고 장관들처럼 그 직무상 백성들에게 그들의 범죄를 알려 주어야 하는 책망자들을 그들은 미워했으며, 올무를 그들에게 놓았다. 그들은, 우리 구주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마 22:15), 즉 그를 그 백성에게는 증오스럽고 그 나라에게는 불쾌한 존재로 만들기 위한 고소거리를 찾으려고 보내어졌던 바리새인들의 밀사와도 같았다. "이처럼 그들이 선지자들을 핍박했다," 그리고 아무리 조심성 있는 자라도 이러한 올무를 피할 정도로 주의깊게 말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려는 선한 의지를 가진 자들에 대해 악한 의지를 품는 사악한 백성들이 얼마나 야비한가를 보라. 그리고 책망하는 자들에게는 그들의 의무를 행하기 위한 용기와 그 올무를 피하기 위한 신중성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보라.
(5) 그들은 심판을 굽게하며 정직한 자로 하여금 정직한 사유를 제시하는 일을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헛된 일로 의인을 억울케 하느니라." 그들은 아무런 증거없이, 아무런 구실이나 핑계없이 의인을 정죄하거나 그를 치기 위해 고소한다. 그들은 그들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온갖 세밀한 기술과 계교로써, 우리 구주께 행했던 것처럼 사람을 쓰러뜨리며, 그에 대해 그릇 말한다. 우리는 가장 선한 자들이 이처럼 취급받는 것을 보더라도 이상히 여겨서는 안 된다. "제자가 선생보다 크지 못하다" 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나 잠시 기다리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의를 드러내실" 뿐만 아니라, 이 경만한 자들을 소멸하시고 끊으실 것이다.
6. 그 원수들의 비방에 의해 무안당하고 그 경고로 떨었던 야곱은, 이제 그 비방이 사라지고 경고가 수포로 돌아감으로 말미암아 수치와 두려움에서 구원될 것이라 했다(22절).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구속(救贖)하신" 즉, 갈대아 우르에서 그를 불러내시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를 그의 조상의 우상 숭배에서 건지시고 "불 속에서 끄집어낸 부지갱이" 처럼 그를 끌어내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을 그의 올무의 환란에서 구속하신 자가 믿음에 의해 그의 참 후손이 된 모든 사람들을 구속하실 것이다. 아브라함을 구속하심으로써 자기의 교회를 돌보기 시작하신 그분이 - 그 때 그 교회와 구조는 그의 허리에 있었다 - 지금에 와서 그 돌보심을 끊어 버리시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가 너무도 열심히 그들을 치욕스럽게 하고 공포에 떨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야곱의 족속을 위해 나타나실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이전처럼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으로써 자기들을 비방하던 자들에게 보응할 것이며, 또한 "그들의 얼굴이 이제부터는 실색하지 아니할 것이다." 오직 그들은 용기를 찾게 될 것이며,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자기 편이시라는 이유를 갖고 있는 자들이므로, 그 원수들 앞에서도 얼굴색이 변하지 않을 것이다.
7. 야곱은 자기의 가문이 근절되고 신앙의 상속이 끊어지리라고 생각했었으나, 이제는 하나님께 헌신하는 무수한 자손을 보고 만족을 느끼게 될 것이다(23절).
(1) 그는 그의 자손들, 곧 무수한 신자들과 기도하는 백성들, 충성된 아브라함과 씨름하는 야곱의 영적 후손들을 보게 될 것이다. 야곱은 그의 화살 통에 활이 가득하기 때문에 "부끄러워 아니 하겠고" (22절),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것이다(시 127:5). 그리스도는 "부끄러워 아니할" 것이다(50:7). 왜냐하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53:10). 그리스도는 "그(그리스도) 가운데서" 교회로 모여들어 거기에 거주하는 자들이 있음을 알고 있으며, 더욱 많은 사람들을 예지하고 계신다.
(2) 야곱 자손은 하나님의 손의 작품들이다. 그에 의해 지음을 받았으므로 그들은 그를 위하여 지음 받은 것이요, "선한 일을 위해 지음 받은 것" 이다(엡 2:10). 부모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자녀가 하나님의 피조물, 곧 하나님의 섭리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는 사실이 어느 정도 위안이 된다. 그러나 그들의 자녀가 그의 새로운 피조물, 곧 그의 은혜의 손으로 지은신 것임을 알 때는 한층 더 위안이 될 것이다.
(3) 야곱과 그의 자손은 그들의 하나님, 곧 "야곱의 거룩한 자" 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다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다. 이것은 그가 부끄러워하고 실색하던 일과는 반대된다. 그가 멸시와 위험에서 벗어나자, 자기 자신을 찬미하지 않고 "야곱의 거룩한 자를 거룩하다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편을 편안하게 해 주시면, 우리는 그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부모와 자녀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일로 협력하게 될 때, 진정 서로에게 자랑과 위안이 된다. 부모들이 그 자녀를 그리고 자녀들은 스스로를 하나님께 바쳐 "그의 이름과 찬송이 되게" 할 때, 그 때에는 삼림이 곧 기름진 밭으로 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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