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에 대한 경고 (이사야 20:1-6)
하나님은 여기에서 제 민족의 왕으로서, 애굽과 구스에 쓰라린 재앙을 내리시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성도들의 왕으로서 그 재앙이 유익을 주게 한다. 다음을 주목해 보자.
Ⅰ. 이 예언의 시기를 보자. 그것은 앗수르 군대가 블레셋의 강한 성읍인 아스돗을 포위하고 탈취한 바로 그 해이다(그러나 혹자는, 히스기야가 근래에 가사에까지 블레셋 사람들을 공격했을 때, 그 성읍을 탈환한 것으로 보고 있다, 왕하 18:8). 그것이 히스기야 몇 년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 사건은 잘 알려져 있어서, 당시 살았던 사람들은 그 사건을 생각하여 그 시기를 정할 수가 있었다.
지금 앗수르 왕인 자는 사르곤이라 불리우고 있는데, 혹자는 그를 산헤립과 동일 인물로 보고 있다. 또 혹자는 산헤립의 직계 조상으로서, 살문네살을 계승한 자로 보고 있다. 이 출정에서 대장 또는 총사령관이었던 다르단은 산헤립의 부하 중의 한 사람으로서, 합사게와 협력하여 히스기야에게 도전하도록 파견되었던 자이다(왕하 18:17).
Ⅱ. 이사야는 한 표적을 보였다. 그는 거리를 걸을 때, 별난 옷차림을 했다. 얼마동안 베로 겉옷을 만들어 입고 그것으로 허리를 동여맴으로써, 그의 백성들에게 이미 임했고 또 다가오고 있는 그 어두운 시기에 대한 한 표적이 되었다. 혹자는 그가 열 지파(이스라엘)가 포로가 된 일을 슬퍼하기 위해 그런 차림을 습관했다고 본다. 또 혹자는 베옷은 그 자신이 세상에 굴욕당한 것을 보이기 위해 그리고 그가 고난을 참는 것을 배우기 위해 예언자로서 늘상 입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부드러운 옷은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는 자에게 보다는 왕궁에서 시중들고 있는 자에게(마 11:8) 더 어울린다. 엘리야는 털옷을 입었고(왕하 1:8), 세례 요한도 그러했으며(마 3:4), 예언자인 척하는 자들도 털옷을 입음으로써 자기들의 가장을 뒷받침 했다(슥 13:4).
그러나 이사야에게는 허리에서 베를 풀어내라는 명령이 내렸다. 그것은 더 나은 옷으로 갈아 입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마 단지 셔츠와 속옷과 잠방이만을 입고, 윗옷이나 겉옷, 외투 따위는 못입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발에서 신을 벗고" 맨발로 가야 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의 의복이나 평시의 그의 옷차림과 비교해 볼 때, 그는 "벗은" 채로 간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 예언자에게 큰 고역이었다. 그것은 그의 명성의 손상이었고, 수치와 조롱을 당하게 만들 소지가 있는 것이었다. 길 거리에서 소년들이 그를 야유하고 그를 칠 미끼를 구하는 자들은 "선지자가" 정말 "어리석었고 신에 감동하는 자가 미쳤도다" (호 9:7)라고 말할지도 몰랐다. 그것은 또한 그의 건강을 해칠 수도 있었다. 고열이 나는 감기에 걸려 생명을 잃을 위험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그런 일을 명하시어, 그가 매우 어려운 명령에서도 하나님께 복종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가장 쉽고 사리에 맞는 교훈에도 불복종하는 그 백성을 부끄럽게 하시고자 했다.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다하고 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명성과 안전을 지키시라고 믿어도 된다.
그 백성의 마음은 이상하게도 어리석었고, 듣는 것만으로는 감동되지 않으려 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표적을 통해 가르침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그들의 교화를 위해 그런 일을 해야만 했다. 그 옷은 비록 수치스러울지라도, 그 의도는 영광스러웠고 여호와의 예언자로서는 조금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Ⅲ. 이 표적에 대한 설명을 보자(3, 4절). 이것은, 애굽인과 구스인이 앗수르 왕에게 사로잡힌 자가 되어 끌려갈 때, 이사야처럼 벗은 몸이 되거나 아니면 누더기 옷과 매우 초라한 옷을 입게 되리라는 것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그의 "종 이사야" 라 부르시고 있다. 그것은 이 사건에서 특별히 그가 그 자신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종이요 충성되며 복종하는 종임을 입증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비웃을지도 모르는 바로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은 그를 영화롭게 하셨다. 복종하는 것이 제사보다 낫다. 복종이 하나님을 더욱 기쁘게 하고, 더 영광돌리며, 그에 의해 더 칭찬 받을 것이다.
이사야는 그 당시 예언자로서 나타날 때에는 언제나, "3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혹자는 그 3년을 그 표적이 아니라 그 상징의 내용과 관련시키고 있다. "그가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한다" 고 했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연속이 아니라 중단을 뜻한다. 그래서 그가 단 한 번 그렇게 하고도, 그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왜 그런 일을 했느냐고 묻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는, 혹자는 그가 일년에 한 번씩, 삼 년간을 그렇게 행했다고 본다. 그리고 그 3년은 삼년 동안 효력이 있는 표적과 기사를 뜻한다고 본다. 즉 삼 년 후에나 삼 년 동안 행해질 일에 대한 표적으로 보는 것이다.
앗수르 군대는 세 가지 출정을 성공적으로 해낼 것이다. 즉 애굽인과 구스인은 약탈당할 것이며, 그들은 이러한 야만스러운 모습으로 사로잡혀 끌려갈 것이다. 전장터에서 잡힌 군인들뿐만 아니라 그 거민들 곧 젊은자나 늙은자가 다 그렇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매우 불쌍한 광경이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훌륭한 차림을 하고 살았으나 이제는 벗은 몸이 되고, 그 드러낸 몸을 가리울 헝겊도 거의 없게 된 꼴을 보면, 아무리 냉정한 사람들도 연민을 갖게 될 정도의 참상이 될 것이다. 이 예언을 들은 자들의 마음을 더욱 움직이기 위해 그들이 사로잡혀가는 그 상황이 특별히 주목되어 있으며 예고되어 있다. 그것은 특히 "애굽의 수치" 로 일컬어지고 있다(4절). 왜냐하면, 애굽 사람들은 교만한 백성이었으므로 그들이 망신을 당했을 때, 그것은 그들에게 더욱 수치스러운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기를 높이던 사람들의 하락은 그들 자신이 보기에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더욱 가엾어 뵌다.
Ⅳ. 이 표적에 대한 해설이 있다(5, 6절).
1. 애굽과 구스를 의지하거나 그들과 교통한 모든 나라들은 이제 그들을 부끄러워할 것이며, 그들과 어떤 관계를 맺은 사실을 두려워할 것이다. 앗수르 사람들에 의해 침략당할 위험을 받고 있는 나라들은 구스의 왕 디르하가가 자신의 대군을 이끌고 앗수르 군대의 의양기양한 행진을 막아 주고, 그의 이웃들에게 방책이 되어 주기를 기대했다. 그리고 책략에서나 권력에서 매우 유명했던 나라 애굽이 그들의 과업을 대행해 줄 것이요, 아스돗의 포위를 해제하고, 그 적들로 황급히 물러가게 해 줄 것을 더욱 자신있게 자랑했었다. 그러나 이제 이것과는 달리 애굽과 구스는 앗수르 왕에게 대항하는 시도를 함으로써, 오히려 그들 자신을 위험하게 만들고 앗수르의 먹이로 만들 뿐이었다. 이리하여 애굽과 고스 주위에 있던 모든 나라들은, 자기들이 이처럼 약하고 비겁한 두 나라로부터 어떤 이득을 얻으리라고 기대했던 사실을 브끄러워하게 되었고, 앗수르 왕이 점점 커지는 것을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두려워했다. 앗수르 왕 앞에서 애굽과 구스는 타오르는 불을 방해하지만, 불길을 더욱 맹렬히 타오르게 만드는 찔레와 가지에 지나지 않음이 증명되었다.피조물을 자기의 기대와 자랑으로 삼고 그것을 하나님과 대치시키는 자들은 조만간에 그것을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며, 그것에 대한 그들의 실망은 그들의 두려움만 증가시킬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자(겔 29:6, 7 참조).
2. 특히 유대인들은 이처럼 상한 갈대들에 기댄 자기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될 것이며, 그들에게서 아무런 위로도 못얻고 말 것이다(6절). "해변(비록 바다로 둘러싸여 있지 않지만, 해변에 위치해 있는 유다 땅)의 거민" (난외에 있는대로)이 실망할 것이다. 사람마다 이제 눈이 열려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가 믿던 나라가 이같이 헛되고 어리석도다. 이것은 그들의 앞으로의 상태이다. 우리는 도움을 얻기 위해 애굽인과 구스인에게로 도망했으며 그들에 의해 앗수르 왕에게서 해방되기를 바랐도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이처럼 꺾어졌으니, 그들처럼 이러한 군대를 싸움터로 데리고 올 능력도 없는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요?"다음 사실들을 기억하자.
(1) 피조물을 신뢰하는 자들은 실망할 것이며, 그들의 신뢰를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사람의 도움은 허사라, 작은 산들과 큰 산들에게서 구원을 바라는 것은 허사로다" (렘 3:23).
(2) 피조물을 신뢰했다가 실망하는 것은 여기에서 처럼("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요" ?) 우리를 절망으로 몰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몰고 가는 것이라야 한다. 우리가 도움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로 도망한다면, 우리의 기대는 결코 좌절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