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사랑을 갈망하는 교회 (아가 8:1-4)
1. 신부는 주 예수님과의 항구적인 친교와 자유로움을 소원하고 있다. 그녀는 이미 그와 혼약을 맺었다. 그러나 혼례식은 아직 거행되지 않았으며 공표되지도 않았기에(어린양의 아내가 되는 신부는 그의 재림시까지는 완전한 차림이 되어 있지 못할 것이므로) 수줍어하며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은 자기가 그의 누이로 오인되었다면 차라리 좋겠다고 바라는데 그도 앞에서 그녀를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5:1). 이 여인은 누이와 오라비의 사이처럼 정숙하고 순결한 친교를 갖고자 원하였던 것이다. 그가 자기와 한 "어미의 젖을 먹은" 친오라버니였더라면 요셉이 자기 형제 베냐민을 돌보듯 자기를 심히 귀여워해 주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혹자는 이 말씀을 그리스도의 성육하심을 갈급하던 구약 성도들의 기도라고 해석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가 그를 보다 친숙히 알려고 하였고, "자녀란 것은 혈육을 함께 나누는 자들이기에" 그도 마찬가지로 동일한 부분을 나누어 가져야 하며 저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했다. 이 말씀은 오히려 그와 보다 친밀한 교제를 가지려는 모든 신자들의 소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을 받을 수"있고 그리스도는 저희 형제처럼 저희는 그의 형제같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들이 은혜로 말미암아 신적 속성을 나누어 가지게 될 때라야 그들은 그의 형제같이 되는 것이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자들은 다 한 하나님께로부터 났다"(히 2:11 이하). 동일한 부모의 자녀이고 한 젖가슴에서 양육된 형제 자매가 서로 매우 사랑하며 돌보아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배우자가 원하는 사람은 바로 그러한 사랑이다. 자기와 자기의 사랑하는 자 사이에 바로 이 남매 간과 같은 사랑이 이루어져서 그를 오라버니로 부를 수 있기를 원하였다.
2. 그리고 나자 이 여인은 그와의 관계를 고백하는 데 있어서 현재보다 더욱 공개적으로 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그 곳이 어디든, 심지어 공중 앞에서라도 나는 누이가 자기 오라버니에게 하듯, 특히 지금 그 어미의 젖을 빨고 있는 꼬마 동생에게 하듯 네 입을 맞추리라."(이렇게 이해하는 자도 있다.)"나는 흉하지 않은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가능한 모든 자유를 당신께 행사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여성의 정숙에 어울리지 않는 짓이라도 하는 듯이 업신 여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육하심 이래로 교회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자를 그토록 사랑한다고 하여 조소를 받던 때보다 그를 더 잘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형제처럼 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를 어디서 만나든 우리는 그와의 관계와 그에 대한 사랑을 인정하도록 하자. 그것으로 인해 멸시받을까봐 두려워하지도 말며 다윗이 법궤 앞에서 춤출 때 그랬던 것처럼 남의 손가락질도 유의하지 말자. "내가 이 일로 천하게 된다 하더라도 나는 더욱 미천하게 되겠노라." 우리는 혹자의 생각만큼 그렇게 업신여김을 많이 받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자.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어디서든지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밖일 수도 있고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일 수도 있다. 비록 그런 곳에서 우리가 그의 모습을 발견하더라도 우리는 그를 사랑해야 하며 그 사랑을 입증해 보여야 한다. 우리는 그러더라도 "업신여김을 받지 않을"것이며 오히려 포옹력있는 자비심 때문에 존경을 받게 될 것이다.3. 이 여인은 그와의 교분을 바라다가 얻게 되는 기회를 포착하겠다고 약속한다(2절). "나는 너를 이끌리라. 나는 당신을 나의 오라비처럼 팔을 잡고 이끌며 당신께 매달리기도 하렵니다. 나는 내집의 모든 보배로운 것들을 다 보여 드리겠고 당신을 내 어미의 집에 이끌어 들이겠습니다. 당신을 교회로, 거룩한 집회 안으로(3:4), 나의 밀실로(성도가 그리스도와 극히 친밀한 교제를 갖는 곳은 골방이기 때문에), 불러 들이렵니다. 당신은 거기서 제게 교훈을 주고자 원하십니다." (어떤 이는 이렇게 해석한다.)가르침을 받으려고 원하는 누이들에게 알려 주는 오빠처럼 거기서 그는 저들에게 교훈을 베풀어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자들은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에게서 교훈을 받기 위해 그와의 교제를 원한다. 그는 우리에게 이해력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
또 본문은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을 때에 내 어미는 나를 훈계하였으리라." 말씀과 성례를 교회의 자녀들에게 유익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은 자기 교회 안에, 자기 교회와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의 임재이며, 그 때에 그 모든 자녀는 하나님에게서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4. 이 여인은 자기가 가진 최선의 것에 그를 기꺼이 초대하겠노라고 약속한다. 그녀는 그가 "향기로운 술과 석류즙"을 마시게 하리라고 약속한다. 그녀는 그의 보다 나은 행복을 위해서 그를 이렇게 환대하고자 하였다. 은혜의 활동과 의무의 수행은 주 예수님께 있어서 향기로운 술과 같고 그가 매우 기뻐받으시는 것이며, 그의 은총에 대한 감사의 정을 표현하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를 기뻐하는 자들은 그에게 즐거움을 드릴 수 있도록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그들은 그를 기쁘게 만들기가 어렵지 않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충심으로 하는 환영을 가장 좋은 대접으로 여기신다. 그리고, 만약 그가 그런 마음에서 우러나는 환대를 받으신다면 그는 자기의 대접도 함께 가지고 다니실 것이다.5. 이 여인은 자기에게 대한 그의 친절하신 보살핌과 애정을 경험하게 됨을 믿어마지 않는다(3절). 즉 이 여인은 자기가 그의 힘에 의해 부지되며 가장 힘든 봉사와 수난 속에서 기력이 쇠하지 않도록 해주실 것("그의 왼 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할 것이고")과 그의 사랑으로 자기가 위로받으리라는 것("즉 오른손으로 나를 안았었으리라")을 의심치 않고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이 바야흐로 죽게 되었을 때 자기 오른손을 그에게 놓으셨었다(계 1:17; 단 10:10, 18 참조). 이 말씀은 2장 6절 말씀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와 같이 읽을 수 있다. 원문은 같으나 여기서는 시제가 다르다. 따라서 이 말씀은 그 여인의 기도에 대한 즉각적 응답을 표현한다. 이 여인은 "자기 영혼 속의 강한 힘"으로 응답을 받았다(시 138:3). 우리가 그리스도를 가까이 따라가는 동안 그의 "오른손은 우리를 붙들고 계신다"(시 63:8). "그 아래에는 영원하신 팔이 있다."
6. 이 여인은 자기의 즐거운 교제에 방해가 될 만한 일을 행하지 않도록 조심할 것을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있다(4절). 이런 부탁은 앞에서도 하였다. 그가 나타나심으로써 자기를 힘있게 하시고 위로하셨을 때 이와 같은 부탁을 하였던 것이다(2:7).
"오! 너희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그리고 너희에게 타이른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 왜 너희가 그를 흔들며 어째서 그를 깨우느냐?" 우리의 공동 어머니 되는 교회는 자기의 모든 자녀들에게 그리스도를 노엽게 하여 물러가시게 할만한 어떤 일도 결코 행하지 말도록 부탁하는데, 우리는 흔히 이런 짓을 저지르기가 쉬운 것이다. 왜 너희들은 그리스도께 그런 모욕을 가하는가? 왜 너희는 스스로를 그토록 적대하는가? 우리가 성령을 탄식하게 할 만한 일을 저지르도록 유혹받을 때 이와 같이 스스로 자문자답하여 설득해야 한다. "무엇이! 내가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에 싫증을 낸다고? 내가 그에게 모욕을 가하여서 그를 노엽게 하고 내게서 떠나가시게 한다고? 내가 왜 그분이 그토록 박정하게 생각하실 일을 행하며, 어째서 내가 확실히 후회하고야 말 일을 행한단 말인가?
교회의 거대한 사랑 (아가 8:5-7)
Ⅰ. 이 신부는 자기 주위 사람들에게 많은 칭송을 듣는다. 이 부분은 상업적으로 등장하고 있지만 이 안에는 이 신비로운 노래 중 어느 부분에 못지 않게 복음의 은혜가 분명히 잠복해 있으며 살아 움직이고 있다.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고?" 어떤 자들은 이 말씀을 신랑이 신부가 자기에게 의지하고 자기의 인도하는 대로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여 표현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오히려 이 여인이 말을 걸었던(4절) 예루살렘 여자들의 말인 것 같다. 그들은 이 여인을 보며 이 여인은 복되다고 한다. 하늘의 천사들과 땅 위에 있는 이 여인의 모든 친구들은 이 여인의 행복을 기쁘고 관람하고 있는 관객들이다. 유대 교회는 신의 능력과 은총으로 부축을 받으면서 광야로부터 올라왔고(신 32:10, 11), 기독교회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해 낮고 황량한 처지에서 일으켜 세워졌다(갈 4:26). 한 사람 한 사람의 신도들이 은혜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신뢰와 만족으로써 "그들의 사랑하는 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 오게 될 때, 그들은 사랑스러우며 존경할 만하고 그들 속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경탄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것은 다음 세 가지 경우에 있어서 영혼의 아름다움과 신적 은혜의 경이로움을 말해 준다.
1. 죄인의 전향에 있어서. 죄스러운 상태는 "거친 들"과 같아서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불모지이며 메마른 땅이므로 그곳에는 진정한 위로라고는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상태는 방황하고 부족한 상태를 가리킨다. 우리는 이런 거친들로부터 탈출하여 "올라오는" 데에 주력해야 한다. 그것은 진정한 회개와 그리스도의 은혜가 주시는 힘으로써만 가능하다. 우리는 사랑하는 그분을 의지하고 그의 팔에 안기워서 이 광야로부터 올라오도록 해야 한다.2. 성도의 위안에서. 죄를 확실히 깨닫고 그 때문에 참으로 겸비하게 된 영혼은 어쩔 줄 모르는 가운데 "거친 들"에 있게 된다. 이런 경우에 이 "광야"로부터 나올 수 있는 길은 믿음으로써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되시는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밖에 없다. "우리 자신의 총명에 의지" 하거나 우리 자신의 외로움이나 힘을 우리에게 충분한 것으로서 신뢰해서는 안 된다. 그 길은 여호와 하나님의 강한 힘 가운데에서 그의 의로움을, 오직 그의 의로움만을 외치며 계속 나아가는 것뿐이다. 그는 "우리의 의로우신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다.
3. 그리스도께 속하는 자들의 구원에서 우리는 하늘과 교제를 가지면서 이 세상의 광야로부터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 죽으면 우리는 그리로 이주하여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한다. 우리는 그에게 대한 믿음으로 살고 죽어야 한다. "내게는 산다는 것이 그리스도요" 죽어서 얻는 것도 그리스도이다.
Ⅱ. 이 여인은 자기의 사랑하는 자에게 말하고 있다.
1. 이 여인은 자기 및 딴 사람들이 그에게 전심하여서 위로와 성공을 경험했던 과거 사실에 대해 그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다.(1) 그녀 자신의 입장에서. "내가 그 사과나무 아래서 그대를 깨웠노라. 즉 내가 기도로 주와 씨름하여 이긴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과수원으로 물러가 사과나무(그리스도는 바로 이 나무에 비유되셨다. 2:3) 아래에서 혼자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무화과 나무 밑에 있던 나다나엘처럼(요 1:48) 신앙의 행위를 하고 있었을 때 나는, 나를 도우시고 위로해 주시도록 당신을 깨웠나이다."
이것은 제자들이 폭풍우 속에서 그리스도를 깨우며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주께서 돌아 보지 않으시나이까?" 하고 말한것과(막 4:38), 교회가 "깨소서! 어찌하여 주는 주무시나이까?"(시 44:23) 한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믿음과 기도로 간곡히 조를 때 그리스도께서는 기꺼이 항복하신다. 그리스도의 그런 즉각적인 응답에 대한 우리의 체험으로 우리는 용기를 얻고, 그에게 직접 여쭙는 일을 계속할 수 있으며, 약해지지 않고 한층 열심히 애쓰게 되는 것이다.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그가 내게 응답하셨도다"(시 34:4).
(2) 타인들 또한 다음에 나오는 것처럼 그리스도에게서 유사한 위로를 경험하였다. "저희도 나와 마찬가지로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나이다(시 34:5)." 거기서 "네 어미가 너를 낳았으니" 그것은 곧 세계 교회, 혹은 믿는 영혼으로서 이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갈 4:19). 그들은 당신에게서 얻을 유익의 위로를 위하여 고통 중에 있었고 "큰 슬픔"으로 "해산의 고통"을 당하였습니다(여기의 말씀은 그런 의미이다).
그러나 그들은 "당신을 낳았습니다." 고통은 항상 계속되지 않는 법이다. 확신 속에서 "신고"하던 자들은 드디어 위로를 "낳는다." 구주 탄생의 기쁨 때문에 "고통은 잊혀졌던 것"이다. 우리의 구주께서는 바로 이 비유로써 한 때의 슬픈 이별 후 그가 돌아오셨을 때에 얻을 그의 제자들의 기쁨을 나타내신다(요 16:21, 22). 회개의 쓰라린 아픔 뒤에 복된 위로의 탄생을 얻은 자는 부지기수이다. 그렇다면 나라고 해서 못 얻을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2. 이 여인은 그와의 결합이 공고해지고 그와의 교제가 지속되며 한층 친밀하게 되도록 그에게 요구한다(6절).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1) "나로 하여금 당신의 마음 속에 한 자리를 차지하게 하며 당신의 사랑 속에서 한 몫을 갖게 해 주소서." 이것은 자신의 행복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는지를 아는 자들이면 누구나가 다 가장 바라는 일이다.
(2) "내가 당신의 가슴 속에 차지하고 있는 나의 방을 결코 상실하지 않도록 해 주시옵소서. 날인된 문서가 취소될 수 없고 봉인된 장농이 도둑에게 털리지 않는 것같이 제게 대한 당신의 사랑도 확실하게 해 주옵소서. 그 어떤 것도 나를 당신의 사랑으로부터 격리시키거나, 그 사랑의 고통을 방해하여 당신의 사랑을 의식하고 얻는 위안을 박탈하지 못하게 하소서."
(3) "나로 하여금 언제나 당신에게 소중하고 가까운 자가 되게 하사, 그의 오른손에 끼시고 결코 빼지 않는 인장반지(렘 22:24)같게 하시며 주의 손바닥에 생긴자(사 49:16) 같게 하시고 특수한 사랑을 받는 자가 되게 하소서."
(4) "당신은 내 대제사장이 되소서.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이름이 흡사 인장에 각인하듯 아론의 흉패 위의 열 두 보석에 새겨지고, 또 에봇의 두 견대나 팔 위의 두 보석에 새겨졌던 것처럼(출 28:11, 12, 21) 내 이름이 당신의 흉패에, 당신의 심장 가까이에 기록되게 하소서."
(5) "나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로서 당신의 권능이 나를 위해 행사되도록 하시옵소서. 나로 하여금 당신의 마음에 인장이 되게 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팔에 인장이 되게 하소서. 나로 하여금 영원히 당신 품에 안겨 있게 하시며 그것을 알게 하사 나로 위안이 되게 하소서." 어떤 이는 이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자기 신부에게 내리시는 명령, 즉 "너는 언제나 나를 마음에 두고 네게 대한 나의 사랑을 잊지 말라"라는 명령으로 해석한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의 마음에 인처럼 품어 주시기를 원하고 기대한다면 정녕 우리도 그를 우리 마음에 인장같이 품지 않을 수 없다.
3. 이런 청원을 주장하기 위해 그녀는 사랑의 힘 곧 그에게 대한 자기 사랑의 힘을 호소한다. 이러한 사랑의 힘은 그녀로 하여금 그에게 그의 사랑의 증거를 요구하게 한다.
(1) 사랑은 격렬하고 세찬 정열이다.
[1]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 사랑을 잃는 자의 고통은 죽음의 고통과 같다. 아니, 사랑하는 대상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는 죽음의 고통은 보잘 것 없는 것이며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우리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셨다." 그의 사랑은 사망 그 자체를 이겨내셨던 것이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주셨다." 그리스도께 대한 신자의 참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다." 참 사랑은 그들로 하여금 사랑 이외의 모든 일에 죽도록 만드는 까닭이다. 그 사랑은 심지어 영혼이 경건한 애정의 날개를 타고 하늘을 향해 위로 솟구쳐 오르는 동안 영혼과 육체를 헤어지게까지 하며 아직까지는 육신의 옷을 입고 있으며 육의 신을 신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든다. 이 황홀한 사랑에 사로잡혔던 사도 바울은 자기가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알지 못하였다.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신자는 이 세상에 대해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
[2]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다." 음부는 모든 것을 삼켜 버린다.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들은 자기들을 그로부터 끌어가려는 것이면 무엇이나 질투하며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해 투기한다. 이는 그를 노엽게 하여 물러가게 할 어떤 일도 행하지 않기 위함이다. 그렇게 되느니 보다는 차라리 "오른쪽 눈을 빼버리고 오른손을 찍어버릴 것이다." 이보다 잔혹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약하고 겁이 많은 성도들은 자기들에게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의심하면서 그를 투기한다. 그들은 바로 그런 질투가 무덤같이 자기들에게 덮쳐서 먹이로 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투기보다 심령을 더 피폐케 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대한 투기는 그에게 대한 저희 사랑의 강도를 증명하는 것이다.
[3] "거기서 나온 숯"(우리 성경에는 없음)과 그을음, 그리고 그 불길과 광선은 매우 강하다. 그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맹렬함과 견딜 수 없을 정도의 힘으로 타오른다. 그래서 그것은 "격렬한 불길이 나오는 숯불"같으며 번갯불처럼 강력히 꿰뚫는 불길 곧 "여호와의 불"과 같다(시 29:7). 거룩한 사랑은 영혼 안에 격렬한 열을 발생하게 하는 불이다. 그 불은 영혼 속에 있는 찌꺼기와 겨를 태워버리고, 그 영혼을 밀납처럼 녹여서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서 하나님과 하늘을 향한 불꽃과 같이 위로 날려 보낸다.
(2) 사랑은 용감하고 승리하는 열정이다. 거룩한 사랑도 그러하다. 영혼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꾸준하며 굳세어서 정당한 방법이나 부정한 수단에 의해서든, "생명"이나 "사망"에 의해서든 그 사랑을 그로부터 물러가게 할 수가 없다(롬 8:38).
[1] 죽음과 그 모든 공포도 신자를 놀라게 하여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일에서 물러나게 하지는 못한다. "많은 물이" 불을 끌 수 있을 것이지만 "이 사랑은 꺼치지 못하고 홍수라도 이 사랑을 엄몰하지는 못한다"(7절). 이 물의 요란한 소리도 신자의 사랑에는 아무런 공포감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무서움을 주려고 아무리 악을 써보았자 그리스도는 여전히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분일 것이다. 이런 하수의 넘침도 이 사랑에는 한 방울의 물도 묻히지 못할 것이며 오히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환란 중에서 기뻐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결과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나를 죽인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를 사랑할 것이며 "그를 신뢰하리라." 우리에게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어떤 하수도 끌 수 없으며 어떤 홍수도 그것을 엄몰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가장 심한 어려움도 건느셨으며 심지어 피의 바다조차도 건너가셨다. 사랑은 홍수에게도 군림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일로라도 그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을 감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2] 생명과 그 모든 위안물도 신자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못하게 꾀어내지는 못할 것이다. "만약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어" 신자를 고용하고 그리스도께로부터 그의 사랑을 뺏어다가 세상과 육신에 다시 두려고 하더라도 그 신자는 최대의 경멸로써 그 제안을 거절해 버릴 것이다. 이것은 사탄이 그리스도를 그 사업으로부터 손떼시도록 매수하기 위해 이 세상 왕국과 그 모든 영화를 주겠다는 제의를 하였을 때 그가 "사탄아! 물러가라" 하신 것과 같다. 그런 제안은 전적으로 무시될 것이었다. 그런 것은 더 좋은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나 제의하라.
사랑은 세상의 찡그림으로부터 오는 유혹 못지 아니하게 세상의 미소로부터 오는 시험에 대해서도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격퇴하고 승리하게 해 줄 것이다. 어떤 자는 그 말씀에다 이런 의미를 부여한다. "사람이 만일" 사랑 대신 그에 상당하는 것으로서 그에 대한 보상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의 모든 가산"을 그리스도께 "드리고자 한다"면 그것은 멸시를 받을 것이다. 즉 그리스도는 우리의 것을 구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를 구하시며 재물을 찾으시는 게 아니라 심령을 찾으시는 것이다. "내가 가난한 자를 먹이기 위하여 내 모든 재화를 나누어 준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고전 13:1). 이와 같이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다. 그의 섭리가 주시는 여러 가지 은사들도 그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그들은 만족하지 못한다.
교회의 특권과 의무 (아가 8:8-12)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는 상호 간의 사랑을 충분히 확인하였고 쌍방의 사랑이 "죽음처럼 강하며" 깨뜨려질 수 없다는 것에 일치를 보았다. 그러므로 이제 본문에서는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처럼 그들의 일에 대해 상의하며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에 심사숙고하고 있다. 가슴을 함께 맞댄 부부(yoke - fellow:멍에를 같이 메는 자, 동역자, 부부)는 머리를 맞대고 그들의 친족과 재산에 대해 궁리를 한다. 따라서 이 행복한 한 쌍은 여기에서 한 누이와 포도원에 관해 서로 조언을 하고 있다.
Ⅰ. 그들은 여기서 그들의 누이 곧 그들의 작은 누이에 대해 상의를 하며 그를 출가시키는 일에 대해 의논하고 있다.
1. 이 신부는 동정적 관심을 갖고 그 누이의 경우를 화제에 올린다(8절).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그 누이는 아직 성숙할 만큼 다 자라지 않았다). 이 작은 누이가 청혼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녀에게 잘 해 줄 수 있도록 하려면 그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꼬?"(1) 이것은 유대 교회가 이방 세계에 대하여 한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유대인들의 교회와 혼인을 하셔서 그들은 풍부한 재산을 받았지만 "잉태치 못하고 생산치 못하는 홀로된" 여인, 곧 저 불쌍한 이방인은 어떻게 될 것인가?(사 54:1) 그들의 처지(경건한 유대인은 이렇게 말한다)는 매우 비통하며 고독하다. 그들은 같은 조상, 곧 하나님과 아담의 자손들이므로 "누이들" 이긴 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지식으로 고귀하게 되지 못하였으므로 "작은" 누이들이다. 그들에게는 "유방이 없다." 즉 그들에게는 신적 계시도, 성서도, 사역자도 없으며 빨아먹을 수 있는 위로의 유방도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약속의 언약에 대해 외인"이며 그들 자신의 자녀에게 물려서 양육할 수 있는 교훈의 유방도 없다(벧전 2:2). 그들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꼬?" 우리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주여, 당신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 주시렵니까? 솔로몬 당시의 성도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위해 자비를 쌓아 두고 계신다는 것을 다윗의 시로부터 알 수 있었기에 그의 자비가 빨리 자기들에게 오도록 간구하였다. 이제 형세는 역전되었다.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와 혼약을 맺었으므로 한 때는 유방이 있었으나 이제는 하나도 없는 가장 큰 누이, 유대인들의 재 영입을 위해 동등한 관심(유대 교회가 이방인을 위해 지녔던 것과)을 가지고 친절히 보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이르렀다. 만약 우리가 이런 의미로 해석한다면 이 경건한 유대인들의 불신앙적 후손은 저희 조상들의 이런 기도에 배치되는 행동을 한 것이다. 이방인들이 "말씀의 청혼"을 받아 그리스도께 구혼되는 날이 오자 불신 유대인들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주어야 할지 궁리하기는커녕 그들을 반대할 수 있는 온갖 음모를 꾸몄던 것이다. 이것은 저희 죄의 말(斗)을 가득히 채우는 결과가 되었다(살전 2:16).
(2) 혹은 이 말씀은 은혜의 선택에 들기는 했으나 아직 부르심을 받지는 못한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멀리서 그리스도 및 그의 교회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와 교회에게는 누이들이며, "이 우리에 들지 않는 다른 양들"이다(요 10:16; 행 18:10). 그들은 "유방이 없으며" 아직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았다(겔 16:7 참조).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에 대한 애정도, 은혜의 원리도 없다. 그러나 그들이 "청혼함을 받는 날"은 올 것이다. 신랑의 친구되는 사역자들로 말미암아 택한 자들이 부르심을 받고 그리스도와 혼인하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 날은 복된 날이 될 것이요 해방일이 될 것이다. 바로 그 날에 그 한쌍의 결합을 촉진시키고, 그들의 수줍음을 와해시키며 그들을 설득하여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정결한 처녀로서 그리스도에게 헌신하도록 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심을 받은 자들은 어떻게 하면 타인들을 그에게 나오도록 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의 복음의 위대하신 계획을 수행할 수 있을까 하고 궁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복음의 청사진은 영혼을 그리스도와 결합시키는 것이며 그리스도로부터 떠나간 죄인들을 그에게로 회심시키는 것이다.
2. 이 경우에서 그리스도는 무엇을 해야 할지 곧 결정을 내리며 신부는 그 단안에 동의한다(9절). "만일 그녀가 성벽이라면, 즉 선한 사업이 부르심을 받기로 된 영혼들인 이방인들에게 시작된다면, 또 복음으로 말미암아 청혼함을 받을 때에 만약 작은 누이가 말씀을 받아들여서 집을 이루기 위하여 벽을 세우듯 그리스도 위에 스스로 기초를 세우고 여호와께 돌이키고자 한다면, 우리는 은망대를 그녀 뒤에 세울 것이요, 그녀를 그와 같이 훌륭한 망대가 되게 세우리라. 우리는 시작된 선한 역사를 계속하여 성벽이 궁전(우리 성경에는 망대)으로 되기까지, 돌로 된 성벽이 은으로 된 궁전이 될 때까지 하겠노라." 가이사 아구스도(Augustus Caesay)는 자기가 본 벽돌을 대리석으로 바꾸어 놓았노라고 자랑하였으나 위와 같은 말은 그의 자만을 무색케 한다. 이 "작은 누이"는 일단 주님께 연결된 이상 "거룩한 성전을 이루어" 가게 될 것이며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될 것이다(엡 2:21, 22). "만약 그녀가 문일진대," 즉 성벽에 문짝을 다는 일은 맨 나중에 하는 일로써 이 궁전이 완성되고 이 성벽에 문을 세울 때가 되면(느 7:1) "우리는 백향목 판자로 두르리로다." 우리는 그녀가 어떤 손상도 입지 않도록 그녀를 세심하게 효과적으로 보호하리라. "우리는" 그 일을 "하겠노라."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다 합치하셔서 그 복되신 작업을 고안하시고 수행하셔서 때가 되면 유종의 미를 장식하실 것이다. 무엇이 부족하든지 간에 그것은 정돈될 것이며 신앙의 작업은 본능으로 성취될 것이다. 은혜의 시작은 비록 사소하더라도 그 결말은 크게 증가할 것이다. 교회는 아직까지 부르심을 입지 않은 자들에 대하여 염려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나 혼자 하는 대로 내버려두라. 그들에게 필요한 일은 내가 모두 행하겠다. 그 일은 내게 맡겨라"고 말씀하신다.3. 이 신부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자기에게 대한 그의 친절하심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인정한다(10절). 그녀는 그녀의 "작은 누이"를 아주 기꺼이 그에게 맡기려고 하는데 이는 그녀 자신도 그의 은혜를 크게 경험한 적이 있었고 그녀로서는 자기의 모든 것이 그의 덕인 까닭이다. "나는 성벽이요. 나의 유방은 망대같다." 이 여인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그 작은 누이가 유방이 없다고 힐난하는게 아니라 그 자신을 들어 작은 누이를 위로하려는 것이다. 지금의 그녀를 만드셨고 자기 위에 그녀를 건립하시고 자라게 하여 성숙시켰던 바로 그분은 그 마음에 이 일을 의지하는 자들을 위해서는 그녀에게 해 주신 것과 꼭 같은 친절을 베풀어 주실 수 있고 또 베풀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보기에 화평(혹은 총애)을 얻은 자 같구나."
여기서 다음 사실을 설펴보자.
(1) 예수 그리스도 보시기에 총애를 얻은 이 여인은 그러한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은총을 얻고 그에게 용납되는 자들은 참으로 행복한 자들이며 영원히 복된 자들이다.
(2) 이 여인은 자기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 그녀는 그것이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의지 때문이라고 그에게 치하를 돌린다. "그가 나를 성벽으로 만드셨고 내 유방을 망대같이 만드셨다. 딴 어떤 일보다도 바로 이 사례에서 나는 내게 대한 그의 사랑을 경험하였노라." "크게 은혜를 입은 자여! 기뻐하라." 이는 네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고 있음이니라.
(3) 하나님께서는 자기 손수 하시는 일을 얼마나 즐거워하시는가! 우리가 "성벽"이나 "놋 성벽"같이 되어 (렘 1:18) "포학자의 폭풍"(사 25:4)에도 견고히 서 있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뻐하사 우리에게 선을 베풀어 주신다.
(4)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우리는 큰 기쁨과 자랑을 가지고 말해야 하며, "우리가 그의 보시기에 은총(화평)을 얻은자" 같았던 특별한 시기와 때를 만족스럽게 여기며 되돌아 보아야 한다! 이러한 날들은 결코 잊을 수가 없는 날들인 것이다.
Ⅱ. 그들은 여기서 그들이 시골에 가지고 있는 "한 포도원"에 대해 상의하고 있다. 땅 위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포도원"이란 개념으로 고려된다(11, 12). "솔로몬은 바알하몬에 포도원이 있었고," 군중을 소유하는 왕국이 있었으며 무수한 백성을 소유하였다(바알하몬은 많은 사람들을 거느린 주인이란 뜻임. 역주). 솔로몬이 그리스도의 상징이듯 그의 포도원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상징이었다. 우리의 구주께서는 감사할 줄 모르는 농부에게 세 준 포도원 비유(마 21:33) 속에서 본문 말씀의 해답을 제시해 주셨다. 그 계약은 포도 넝쿨 일천 주를 심을 수 있는 만큼의 포도원을 각 소작인들에게 할당하고 각 소직인더러 매년 "은 일천 개"씩을 소작료로 바치라는 것이었다. 이런 추정의 근거는 비옥한 토양이라면 "은 일천 개"의 가치가 "포도나무 천주"에 해당한다는 데에 있다(사 7:23).
여기에서 다음 사실들을 살펴보자.
1.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의 포도원이요 즐겁고도 특유한 장소로서 많은 존귀로움으로 특권이 주어진다. 그는 사람이 자기 포도원에서 하는 것처럼 그 안을 즐겨 거니시며 그 열매를 즐거워하신다.2. 그는 그 포도원을 "지키는 자"로서 우리 각자에게 자기 포도원을 위탁해 주셨다. 교회의 특전은 그가 우리에게 맡기신 선한 일을 신성한 신탁으로 지켜나가는 것이다. 교회에 봉사하는 일은 우리의 능력대로 할 수 있는, 바로 우리의 일이다. "내 아들아, 오늘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결백하던 때의 아담은 "동산을 가꾸고 그것을 지키기"로 되어 있었다.
3. 그는 자기 포도원에 고용하여 그 포도원을 맡긴 자들에게서 소작료를 기대하신다. "그는 오셔서 열매를 구하시며," 복음의 특권을 누리는 모든 자들에게 복음의 의무를 요구하신다. 지위와 신분을 가릴 것 없이 포도원의 특권을 나누어 가진 모든 자들은 그리스도께 영광과 존귀를 돌려야 한다. 또한 그들이 즐기는 이익과 은혜가 얼마나 얼마나 큰가를 생각하고 이 세상에서의 그의 나라의 세력 신장을 위해 조금이라도 봉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4. 비록 그리스도께서 "자기 포도원을 그 지키는 자들에게 세주셨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여전히 그의 것이어서 그는 영원토록 언제나 그 포도원을 지켜 보신다. 왜냐하면 그가 만일 "주야"로 그것을 감시하지 않으신다면(사 27:3)그가 세를 주신 "파수군들"이 그것을 지킨다고 해도 그 수고가 "헛될" 뿐이기 때문이다(시 27:1).
혹자는 12절 말씀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해석한다. "내게 속한 나의 포도원이 내 앞에 있구나." 그리고 그들은 그가 자기 재산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관찰한다. 이것은 "내 포도원이라. 내게 속한 것이로구나." 그에게는 자기 교회가 너무나 소중한 것이어서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그 자신의 소유"(요 13:1)이다. 그러므로 그는 언제나 교회를 자기 보호 하에 두실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소유이기에 그는 그것을 돌보아 주실 것이다.
5. 포도원의 특권을 즐기는 교회는 그것을 항상 자기 앞에 두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포도원을 맡은 자들에게는 끊임없는 관심과 근면이 요구된다. 이 말씀은 오히려 신부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내게 속한 나의 포도원은 내 앞에 있구나." 이 여인은 그 "자신의 포도원"을 지키지 못한 자기의 과오와 어리석음을 슬퍼하였었지만(1:6) 이제는 그 잘못을 고치리라고 작정한다. 우리의 심령은 우리의 포도원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주 부지런히" 그것을 "지켜야"한다. 즉 우리는 항상 감시와 질투의 눈길을 그 포도밭에 보내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6. 우리의 큰 관심은 그리스도의 포도원에 대해 물어야 할 소작료의 지불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지불을 밀리지나 않는가, 그가 "실과를 받기 위해" 보내시는 사자들을 실망시키지는 않는가(마 21:34), 주의를 기울여 살펴 보아야 한다. "솔로몬 너는 일천을 얻겠고" 또 얻을 것이다. 이익의 주요 부분은 그리스도께 속한다. 우리의 모든 열매는 그에게 바쳐야 하며 그를 찬미하는 일에 헌납되어야 한다.
7. 우리가 만일 우리 교회의 특권에 대한 찬미를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주의를 기울인다면 우리도 그 일로 말미암아 위로와 은택을 입게 될 것이다. 만일 그 포도원의 주인이 자기 세금을 받는다면 그 포도원 지기들도 그들의 관리와 수고에 대해 충분한 댓가를 지불받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백을 얻을 것이다. 이 액수는 틀림없이 넉넉한 액수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자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고 있는 셈이며 그로 인해 말로 다할 수 없는 흑자를 얻게 될 것이다.
영광의 재림 (아가 8:13,14)
그리스도와 그의 배우자는 여기에서 잠시 이별을 고한다. 그녀는 땅 위에 있는 "동산"에 머물러 있어야만 한다. 그 동산에는 그녀가 그를 위해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그는 하늘에 있는 "향기로운 산들"로 옮겨가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 곳에는 그가 해야할 일이 있으니 곧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그녀를 돌보아 주는 일이다. 그들이 이제 어떤 사랑을 상호간에 품고서 이별하는지 살펴보자.
Ⅰ. 그는 이 여인에게서 자주 소식듣게 되기를 원한다. 이 여인은 즉각 펜을 들고 쓸 수 있도록 대기하고 있어야 하며 그에게 글을 꼭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 여인은 어디로 써야 할지도 알고 있다(13절). "아래의 동산에서 위에 있는 낙원으로 이사올 때까지 당분간은 동산을 손질하며 돌보고 있는 너 동산에 거하는 여자야!
오! 너 믿는 자야! (네가 누구이든 간에 신자이기만 하다면) 엄숙한 성례의 동산에 거하는 너, 교회의 교제와 친교의 동산에 거하는 너 믿는 자야! 동무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행복해 하니 나도 듣게 하려무나."
1. 그리스도의 친구들은 서로 연락을 잘하고 있어야 하며 친한 동무들처럼 서로 자주 말을 건네야 하고(말 3:16) 서로의 음성을 경청해야 한다. 그들은 서로 훈계하고 용기를 주며 존경해야 한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왕국과 인내하심 안에서는 서로 동무들이다. 그러므로 여행의 길동무처럼 상호간의 자유를 유지하면서도, 수줍어하거나 피차 남남인 듯 행세해서는 아니 된다. "성도의 교제"는 우리 신앙 고백의 한 조문일 뿐만 아니라 "날마다 서로 권면"하며 피차 훈계받기를 기뻐하라는 우리 언약의 한 조목이다. 교회의 소리가 그리스도의 음성과 일치하는 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그의 동무들이라면 그렇게 할 것이다.2. 우리는 성도들 상호 간의 교제 때문에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태만히 해서는 안 되며 그 교제 중에서도 그로 하여금 우리의 얼굴을 보게 하고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시게 해야 한다. 그는 여기에서 그것을 말하고 있다. 동무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구나. 그것은 저들에게 즐거움이 된다. "나로 그것을 듣게 하려무나. 너는 네게 억울한 일이 생기면 그들에게 네 불평을 얘기한다. 왜 너는 그런 일을 내게 가져오지 않으며 어찌하여 나로 듣게 하지 않느냐? 너는 그들과는 자유롭다. 그와 같이 내게도 흉허물 없이 대하도록 하여라. 네 마음을 내게 쏟아라."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자기 제자들을 떠나시면서 어떤 경우에나 자기에게로 연락해 주도록 명령하셨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얻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의 기도를 기뻐 받으시며 응답하실 뿐만 아니라 요구하시기까지 하신다. 그는 그것을 부담으로 여기시는 게 아니라 영예요 "기쁨"이라고 간주하신다(잠 15:8). 우리는 기도할 때뿐만 아니라 기도로 씨름하고 애 쓸 때에도 "그로" 우리 기도를 "듣게 한다." 억지로 졸라대는 것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예의가 아니라 그는 강요반 애걸반의 요구를 듣고 싶어 한다.
어떤 이들은 이 말을 "나로 하여금 들리게 해다오"라는 뜻으로 해독한다. "너는 네 동무들에게 얘기할 기회가 자주 있다. 그리고 네 친구들은 네 얘기에 귀를 기울이더구나. 그들에게 내 얘기도 좀 해다오. 내 이름이 그들 중에서 들리게 해 다오. 내가 너희의 담화 속에서 화제가 되게 해 주려므나."(대주교 Usher가 늘 말하던 대로) "너희는 헤어지기 전에 그리스도에 관한 한 마디씩 말씀을 나누어라." 이보다 더 어울리고 더 즐겁게 하는 얘기도 없는 것이다.
Ⅱ. 이 여인은 그의 신속한 귀환을 소원하고 있다(14절).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서둘러 다시 오셔서 나를 당신께로 받아 들이시라. 너는 향기로운 산들에서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여라. 시간을 놓치지 마십시오. 이 동산은 살기에 즐거운 곳입니다마는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이 이곳을 떠나는 것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 그것은 내가 바라고 기다리며 동경하는 일입니다. 그러하기에, 주 예수여! 오소서 속히 오시옵소서!"
1.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물러가 계시지만 다시금 돌아 오실 것이다. "즐거움의 시간이 돌아올 때까지 그는" 더 높고 "향기로운 산들" 곧 하늘 나라에 "계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때에는 올 것이며 "그 때에는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신비를 완성시키시고 그 신비로운 몸을 다 이루신 뒤, 보다 더 훌륭한 상계의 모든 권세와 화려함으로 나타나시는 그를 모든 사람은 보게 될 것이다.2. 진정한 신자들은 "주의 날"이 이르기를 기다릴 뿐만 아니라 재촉하기까지 하는데, 이는 주께서 한시 바삐 서둘러 오시도록 하고자 하는 뜻에서가 아니라 중간 계획이 전부다 성취될 수 있도록 하고 그 뒤에 즉 조만간에 종말이 오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자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가 "자기 약속에 대해 더딘 줄"로 생각하여 이토록 그와 오심을 재촉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기다림을 통해 그에게 대한 그들의 애정의 강도를 표현하는 것이요 그가 다시 오실 때에 그들이 기대하는 바가 얼마나 무한한 것인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3. 그리스도를 저희의 "사랑하는 자, 가장 사랑하는 자"라고 전심으로 부를 수 있는 자들만이 충분한 근거 아래 그가 빨리 재림해 주시도록 간절히 사모할 수 있다. 그 마음이 세상을 믿고 따르며, 그 애정을 세상 것에 두는 자들로서는 그의 나타나심을 사랑할 수가 없다. 오히려 그들은 그의 출현을 두려워해야만 된다. 왜냐하면 그 때에는 땅과, 저희가 저희 몫으로 택한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불살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참으로 사랑하는 자들은 그의 재림을 동경한다. 그 날에는 그의 영광과 저희 행복이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4. 우리는 때로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은혜로 말미암아 위로와 만족을 얻는다. 이를 맛본 우리는 영광의 나라에서 그를 직접 바라보고 그를 완전히 향유하기를 더욱 간절히 원하게 된다. 자기의 사랑하는 자와 정다운 담화를 마친 뒤 이 여인은 헤어져야 할 순간이 다가온 것을 깨닫고는 이런 행복이 미래에 완성되며 영속화하도록 해달라는 요구를 함으로써 끝을 맺는다. 이 광야에서 만나게 되는 포도송이는 우리로 하여금 가나안에서 수확하게 될 풍요로운 포도 추수를 동경하게 만든다. 그의 뜰에서의 하루가 그토록 달콤하다면 너울 속에 있는 영원은 어떠한 것이겠는가! 천국이 이러한 것이라면 내가 거기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5. 우리는 다시 나타날 영광을 기쁘게 기대하고 그를 향해 거룩하고도 겸손한 호흡을 하면서 우리 기도를 마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된다는 전망만 갖고 헤어져서는 안된다. 매 번의 안식일을 보내면서 영원한 안식일, 곧 그날 끝에 밤이 없고 그 날이 지나도 평일이 오지 않는 영원한 안식일을 생각해 보는 것이 유익하다. 성찬식을 끝낼 때마다 영원한 잔치, 곧 우리가 그의 나라의 식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앉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으며 거기 있는 새술을 마시게 될 잔치를 생각한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 시간과 날이 없어지는 "장자(長子)의 교회의 총회" 가 모였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면서 매 경건한 집회를 끝내는 것이 좋은 것이다.
복되신 예수님께서 저 복된 날을 앞당기시게 하소서! "그의 수레바퀴는 어찌 그리 오래도록 오고 있는가?" "그 수레들의 바퀴는 어찌하여 지체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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