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아름다움 (아가 7:1-9)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에게 부여하시는 칭호는 새롭다. "귀한 자의 딸아!"
이것은 시편 45편 13절과 일맥상통하는데 거기에는 "왕의 딸"이라고 지칭되어 있다. 이러한 칭호는 그녀가 새로 태어났다는 데 기인한다. 즉 위로부터 태어나고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며 그의 작업으로 출생하였고, 왕 중 왕이신 그의 형상을 띄고 있으며 그의 성령으로 인도를 받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여인은 결혼에 의해서도 귀한 자의 딸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그녀를 처음 보셨을 때 그녀는 천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이었지만 그는 친히 그녀와 혼약을 맺으셔서 "귀한 자의 딸"로 만드신 것이다. 이 여인은 귀인다운 기질과 참으로 고귀하고 관대한 점을 가지고 있다.
이 여인은 땅의 왕들의 귀한 자에게 딸이 되고 상속인이 된다. 자녀라면 상속자가 되는 법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타나 있다.
Ⅰ. 신부의 아름다움에 대한 풍부한 묘사가 나온다. 어떤 이들은 이 묘사를 한 사람들이 그녀의 동무인 처녀들과 이 여인에게 돌아오라고 부른 자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것으로 전처럼(4:1 이하; 6:5, 6)이 여인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과 이 여인에게서 얻는 자기의 기쁨을 표현하려고 하는 것 같이 보여진다.
여기 나오는 비유는 앞서 나온 것과 다른데 이는 거룩한 아름다움이란 자연 속에 있는 그 어떤 것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란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말로 거룩함의 미를 설명하더라도 그것은 부족할 것이다.
4장에 나오는 이 여인에게 대한 찬미는 이 여인의 혼인(3:11)에 직접 관계된 것이지만 여기에 나오는 찬사는 곁길에서 돌아온(6:13)이 여인과 관련되는 것이다.
그런데 후자의 찬사가 전자의 찬미를 능가함은 자기 백성에게 대한 그리스도의 항구적 사랑을 나타내 준다. 그가 저들을 "그가 보시기에 보배롭고 존귀하도록" 해 놓으신 까닭에 "그는 저들을 끝까지 사랑하신다." 이 여인은 자기가 사랑하는 자의 아름다움을 열가지 세부 조목으로 나누어 묘사하였다(5:11 이하). 그런데 그는 그에 못지않는 사례로 이 여인을 묘사하고 있으니 이는 그가 존경과 애정에 있어서 이 여인보다 뒤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존귀롭게 하는 자들을 틀림 없이 영예롭게 하실 것이며 존귀한 존재로 만들어 주실 것이다. 타락한 이스라엘의 부패를 묘사함에 있어서 선지자는 "발바닥부터 머리까지" 평가를 하고 있다(사 1:6). 이와 마찬가지로 본문에서는 교회의 아름다움이 발에서 머리까지 열거되는데 이는 사도가 본문처럼 교회를 인체에 비유하면서 말씀하듯이 "우리가 몸 가운데에서 덜 귀히 여기는, 존귀가 부족한" 지체를 "더욱 귀한 것"으로 입힐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고전 12:23, 24).
1. 본문에서 이 여인의 "발"이 칭찬되고 있다.그리스도를 받드는 사역자들의 발은 교회의 눈에 아름답게 보인다(사 52:7). 그런데 여기에서 이 여인의 발이 그리스도께서 보시기에 아름답다고 한다.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신자들이 죄의 포로상태로부터 놓여 나와(행 12:8) "그들이 해방을 얻은 그 자유 안에 굳게 서서" 저희가 자유롭게 되었다는 징표를 보존하며 "화평 복음이 마련한 것을 저희 발에 신고" 복음의 법칙을 따라 꾸준히 걸어간다면, 그 때에는 "신을 신은" 저희 "발이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도중에 부닥치는 환란들에 대비하여 잘 무장하고, 굳세게 밟으며 나아간다. 우리가 비록 선한 애정 속에서 안식을 얻고 있지 못하더라도 진지한 노력과 결의가 뒤따르고 있다면 우리 발은 "신발"로 미화되는 것이다(겔 16:10 참조).
2. "넓적다리"는 여기서 "구슬꿰미 같다"고 말해지며 그것도 "공교한 장색"이 진귀하게 만든 것처럼 생겼다고 표현된다.이 말씀은 예배소서 4장 1, 6절과 골로새서 2장 19절로 설명할 수 있다. 즉 둔부나 무릎(이들은 "넓적다리의 연결부위"이다)이 인체로 하여 큰 힘을 쓰게 하고 운동하게 하듯이 그리스도의 신비스런 몸은 "마디와 힘줄"로써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교회의 관절들이 거룩한 사랑과 단결과 성도들의 교재로 굳게 결합되어 있을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보시기에 그 교회는 아름답다. 신자들이 선량한 원칙에서 경건하게 행동하며, 그들의 전반적 교제가 꾸준하고 규칙적이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들의 의무라 생각될 때는 쉽사리 뛰어 든다면, 그 "넓적다리는 구슬꿰미와 같다"고 할 수 있다.
3. "배꼽"은 여기에서 둥근 컵이나 "잔"에 비유되고 있다.이것은 철철 넘치던 다윗의 잔처럼(시 23:5) 사람들이 그 안에서 얻기를 원하는 술 곧 기분좋은 "포도주"가 가득히 부어져 있고, 좋은 모양의 잔과 같아서 아직 배꼽 줄을 자르지 아니한 아기의 무참한 모습 같지는 아니하다(겔 16:4).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배꼽의 건강"(우리 성경에는 "네 몸에 양약")이 된다고 한다(잠 3:8).
영혼에 그 경외심이 부족하지 않을 때에는 "배꼽에도 ?은 포도주가 가득 부어져 있어 부족하지 않다."
4. "허리"(이 책에서는 "배")는 창고 안의 "밀단 같구나."아마 밀단은 과시하기 위해 쌓아 놓고 꽃으로 장식해 놓는 때도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밀"은 유용하고 "백합화"는 아름답다. 우리 몸에도 유용한 지체가 있는가 하면 장식용 지체가 있듯 교회에도 유용한 것과 장식적인 것이 모두 다 있다. 온 몸은 "배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는다. 그것은 신자의 영적 번영과 영혼의 건강한 체격, 이 모든 것이 양호한 상태에 있음을 뜻한다.
5. "두 유방(가슴)은 암사슴의 쌍태 새끼같다"(3절).교회의 배에서 태어난 자들은(사 46:3) 교회의 위로의 젖가슴을 빨고 양육되며 태중에서는 배꼽으로 영양분을 섭취하였다. 이 비유는 4장 5절에서도 나온 적이 있다.
6. "목"은 앞서 "다윗의 망대"에 비유되었는데(4:4) 여기에서는 매우 희고 귀한 "상아탑"에 비유되고 있다.성도들의 신앙은 목과 같아서 그들은 이 신앙에 의하여 그들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연결된다. 믿음으로써 활용하는 여호와의 성호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강성한 난공불락의 망대와 같은 것이다.
7. "눈"은 "헤스본에 있는 못"이나 예루살렘 또는 헤스본의 "문곁"의 양어장 같다.헤스본은 많은 여인들이란 뜻의 "바드랍빔"(Bathrabbim)이라 불리웠는데 이는 통행인이 무척 많았기 때문이다.
신자의 오성과 의도는 이들 연못처럼 깨끗하고 맑다. 죄를 보고 슬퍼하는 눈은 샘과 같으며(렘 9:1) 그리스도께 아름답게 보인다.
8. "코"는 "레바논 망대" 같고 아마 얼굴은 "부싯돌 같이"(사 50:7) 굳세어서 그 망대가 금성 철벽 같듯 두려움을 모른다. 그래서 이것은 교회의 큰 아량과 거룩한 용기를 의미하거나(딴 사람들의 견해처럼) 동물들이 신기하게도 냄새로 물건을 구별하듯이 다른 일들을 식별할 수 있는 영적 총명을 의미한다. 이 "망대는 다메섹을 향하고 있다." 다메섹은 시리아의 수도이니 이 말씀은 교회가 자기 원수들을 당면하고 있으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 담대함을 뜻한다.9. "머리"는 바다 가까이 있는 아주 높은 "갈멜산 같다"(5절). 신자의 머리는 "자기 원수들 위에 들리어져 있다"(시 27:6). 갈멜산 꼭대기가 하늘을 향해 찌를 듯이 서 있는 것처럼 낮은 지역의 폭풍우를 초월하고 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초월하면 할수록 우리는 천국으로 더 가까이 접근하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더욱 안전하게 되고 더욱 청정하게 되며 주 예수께서 보시기에도 더욱 사랑스러워지게 된다.
10. "머리털은 자주빛 같다"고 말해진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눈에 비치는 신자의 보편적 사랑스러움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눈에는 "머리털"까지도 혹은(어떤 자들의 해석대로) "머리털"에 꽂힌 머리핀까지도 귀엽게 보인다.
혹자는 "머리와 머리털"을 교회를 다스리는 자들로 이해한다. 그들이 만약 그들의 의무 수행에 마음을 기울인다면 그들은 교회의 아름다움에 많은 보탬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머리는 주홍색 같고(이렇게 해독하는 자도 있다) 머리털은 자주빛이 있다." 이 두가지 색은 위인들에게 사용되는 빛깔인 것이다.
Ⅱ. 그리스도께서 자기 교회를 받아들이실 때 얻는 만족감이 이와 같이 미화되고 장식되어 있다. 그가 보시기에 이 여인이 만약 그렇게 아름답다면 이 여인(교회)은 참으로 사랑스러운 여자이다.
그가 이 여인에게 아름다움을 입히셨듯 이 아름다움을 진실로 가치있게 만드는 것도 그의 사랑이다. 왜냐하면 그는 결코 예외를 인정치 않는 재판관이시기 때문이다.
1. 그는 자기땅의 거주지역에서 즐거워하시면서 자기 교회를 바라보기를 기뻐하셨고 자기 교회와 교제하기를 기뻐하셨다. "왕은 그 방에 갇혀서"(우리 성경에는, "그 머리털에 매여서")떠날 수가 없구나.이 말씀은 시편 132장 13, 14절과 147장 11절로 설명된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는 나의 영원한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하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을 기뻐하신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과 교제하는 방들을 그토록 기뻐하신다면 그들은 그 방들을 더욱 더 기뻐할 만하며 "천년보다 그 곳에서의 하루를 더 낫게" 여길 만하다.
2. 그는 자기 교회의 아름다움에 경탄을 금치못하였다(6절).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우며 어찌 그리 화창한지! 쾌락하게 하는구나." (이 말은 이런 뜻이다.) "너는 그토록 아름답게 태어난 것이 아니라 내가 입혀 준 아름다움으로 그렇게 아름답게 되었다." 거룩함은 표현할 길이 없는 아름다움이며 주 예수께서는 놀라우리만치 그 아름다움을 기뻐하신다. 그것의 외적인 모양은 어여쁘며 그 내적인 기질은 즐겁고 아주 유쾌한 것이어서 그가 이에서 얻는 만족감은 이루 형언할 수 없다. "나의 극히 사랑하는 자야!" 너는 "쾌락하게 하는구나."3. 그는 자기 교회와의 교제를 지속하기로 작정하였다.
(1) "종려나무 가지"를 잡듯 이 여인을 "잡겠다"는 것. 그는 이 여인의 "키"를 "종려 나무"에다 비하고 있다(7절). 완전히 균형을 잡힌 이 여인을 보면 종려나무처럼 그렇게 쭉 뻗고 굳센 것처럼 보인다. "종려나무"를 관찰해 보면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을 때 가장 무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교회도 그렇다.
교회도 고난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더 증가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가지는 승리의 상징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그 그늘을 즐기기 위하여 종려나무에 올라 가리라(8절). 그리고 그 가지를 잡고 그 아름다움을 관찰하리라."
자기 백성을 총애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하신 말씀을 실행하실 것이다. 우리는 그가 그 일을 꼭 행하실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인자하신 의도가 결코 땅에 떨어지도록 버려두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그리스도께서 자기 교회의 "가지들을 붙잡으시며" 그들이 어리고 연할 때 일찌감치 그 가지들을 잡으신다면, 그는 계속하여 그들을 잡고 놓지 않으실 것이다.
(2) 그 열매로 자기의 심신을 상쾌하게 하시겠다는 것. 그는 이 여인이 "유방"(자기를 향한 그녀의 경건한 애정)을 극히 맛난 열매인 "포도송이"(우리 성경에는 "열매송이")에 비유하고(7절), 또 그것을 반복하고 있다(8절). 그것들은 (즉 그들은 내게 있어서) "심령을 기쁘게 하는 포도송이 같을 것이다."
"내가 종려나무에 올라온 이상 네 은혜는 작동될 것이며 고조될 것이다."
자기 백성에게 대한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은 저들의 영혼 속에 거룩한 하늘의 불을 점화시키며 그렇게 되면 "유방(가슴)은 포도송이 같이 될 것이다." 그것은 저들 자신들에게는 보약이 되며 그리스도께는 기뻐 받으시는 열매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으며" 아직도 새로운 생명의 숨길을 불어 넣어 주고 계신다. 그 이후로 인간의 "콧김"은 "사과"나 귤 "냄새" 같아서 즐겁게 하는 것이요, 소생하게 하는 것이 되었다. "여호와께서는" 노아의 제물로부터 "그 달콤한 향기를 흠향하셨다"(창 8:21). 그리고 "끝으로 내 입(혹은 "입천장")은 가장 좋은 포도주 같을 것이니라"(9절). 이 여인의 영적 미각과 기호(嗜好)는 교회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하는 말씀으로서 바깥쪽의 치아로부터 나오는 게 아니라 "입 천장"으로부터 나오며 이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정직한 자의 기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그들에게 어울리도록 피차 "말할" 때에는 "여호와께서 경청하시며" 기꺼이 "들으신다"(말 3:16).
이 포도주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매우 맛이 좋고 그 맛은 기분을 좋게 한다. 이 포도주는 "미끄럽게 흘러 내린다." 그것은 "곧장 내려간다"(난의 주석은 그렇게 해독한다). 또한 그것은 올바르게(우리 성경에는 "순하게") 내려간다"(잠 23:31). 감각의 즐거움은 육체의 구미에 좋은 것 같고 미끄럽게 내려가지만 때로는 탈이 나기도 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즐거움에 비해 본다면 거칠고 조악하기 이를 데 없는 즐거움인 것이다. 은혜로운 영혼에게는 하나님의 위로의 포도주보다 더 "미끄럽게 흘러 내리는 것"은 없다.
[2] 그것은 또한 효과가 탁월한 활력제이다.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임재는 자기 백성들을 소생시키며 그들에게 활력을 불어 넣어 주신다.
즉 "자는 자(탈수증으로 거의 기절하려는 자)의 입을 움직이게"하는 강한 포도주와 같은 것이다. 회개치 않은 죄인은 자는 자이다. 성도들도 때로는 졸며 맥이 풀리고 반쯤 자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은 영혼 속에 생명과 활력을 불어 넣어 주실 것이며, 마음이 이와 같이 충만하게 되면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게" 될 것이다.
사도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자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업을 방언으로" 말하였다(행 2:10, 12). "과음으로 술취하기를" 반대하고 "성령의 충만하심"을 입은 자들은 "시와 찬송가로 화답"한다(엡 5:18, 19). 그리스도께서 자기 연인의 출현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그 사랑의 감미로움을 이처럼 칭찬하고 있을 때 이 여인은 "나의 사랑 하는 자를 위하여"란 말씀을 괄호치듯 삽입해 넣은 것 같다.
"내게 즐겁고 고귀한 점이 조금이라도 있습니까? 있다면 그것이 내 사랑하는 자에게서 유래되었듯 그것은 또 그를 위해서 존재할 뿐 입니다."
우리의 선한 애정과 봉사가 모두 그를 위하고 그의 영광을 위해 바쳐질 때에만이 그는 그것을 기뻐하신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교회의 화답 (아가 7:10-13)
이 말씀은 신부된 교회, 그리고 믿는 영혼이 앞에서 친절하게 표현된 그리스도의 사랑에 화답하여 드리는 말씀이다.
Ⅰ. 이 여인은 여기서 그리스도께 대한 자기의 관계와 그 안에서 얻는 자기의 권익을 기뻐하며 그의 이름을 종일토록이라도 할 것이다.
기쁨과 거룩한 환희에 얼마나 젖어들었으면 이 여인이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10절). 나는 내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에게 모든 것이 바쳐진 존재며 그의 소유가 되는 것이로구나" 라고 고백할까!
우리가 만약 그리스도를 우리의 "가장 사랑하는 분"이라고 진심으로 말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의 것이며 그는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신뢰할 수 있다(시 119:94).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은혜로운 발견은 우리로 하여금 그가 우리를 붙잡으심을 크게 기뻐하게 하며 우리에게 대한 그의 주권과 그의 소유를 감지덕지하게 여기도록 한다.
이것은 의무의 속박인 동시에 은혜의 샘이 된다.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교제는 그에게 대한 우리의 이익을 얻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여인은 자기가 그의 소유이며 그를 섬기기 위한 존재임을 자랑스러이 여기고 바로 그 점이 자기의 명예라고 간주하면서 "그가 나를 사모한다." 즉 그는 자신의 남편이다라는 사실로 위안을 얻고 있다. 이 말씀은 창세기 3장 16절에 나타난 부부 관계에 대한 완곡된 표현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택하신 자존자들을 찾아 구원하시려고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 오셨을 때 그는 택하신 남은 무리들에게 대해 강한 사모의 정을 품으셨던 것이다.
그리고 자기 사업을 추구하시려고 그는 어려움과 고통을 감수하셨다. 그들을 위해서 그가 받아야할 세례는 피의 세례였으며 그것을 이루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가! (눅 12:50) 그는 "시온을 거소로" 사모하셨다. 누구에게 멸시를 당하건 간에 그리스도의 사모를 받는다는 것은 신자들에게 위로가 된다. 그의 사모는 그들을 자기에게로 영접해 들이시기 위해 다시 하늘로부터 땅으로 오실 만큼이나 강렬하다. 이는 그가 저희 모두를 자기와 함께 데리고 계시기를 열망하시기 때문이다(요 17:24; 14:3).
Ⅱ. 이 여인은 그와의 교제를 겸손하게 그리고 진심으로 소원하고 있다(11, 12). "나의 사랑하는 자야! 함께 산책을 하자. 그래서 내가 그대로부터 충고와 교훈과 위로를 얻을 수 있게 하며, 나의 부족한 것과 억울한 것을 자유롭게 간섭 받지 않고 당신께 알릴 수 있게 해 다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엠마오"라고 하는 마을로 내려 가고 있던 두 제자와 함께 걸으시면서 얘기를 나누셨고 마침내 그들의 "마음이 속에서 뜨거워지게"하시기까지 동행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보자.
1. 그 사랑의 생생한 표정을 받아 그에게서 얻을 자기의 이익을 확신하게 되자 이 여인은 한걸음 더 나아가 그와의 보다 깊은 교제를 갈구하게 된다.이것은 복된 사도 바울과 흡사하니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한 지식인" 줄을 자각하고 그 지식을 더 많이 얻으려고 자꾸자꾸 원하였던 것이다(빌 3:8).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우리를 얼마나 사모하시는지 나타내 보이셨는데도 우리가 그를 사모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만저만 배은망덕한 것이 아니다.
성별하심을 입은 모든 자들이 열심히 원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와의 교제이다. 그가 자기 사랑을 그들에게 더욱 분명히 나타내면 낼수록 그들은 더욱 더 열심히 그것을 사모하게 된다.
감각적인 쾌락은 육체적인 욕심을 싫증나게 만들며 얼마 못가서 물리게 하지만, 영적인 즐거움은 욕구를 더욱 자극시키며 그 욕망은 "하나님보다 더 많은 것은 아무 것도 없으나 그에게 요구할 것은 많고 많아 끝이 없구나"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종려나무에 올라가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대해 이 여인은 "가자! 우리가 함께 가자"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와의 교제에 대해 우리에게 하신 약속은 폐기되지 않는 것이며, 그 교제를 위한 우리의 기도를 촉진시키며 격려해 주는 것이다.
2. 이 여인은 이런 교제를 누리기 위해 들과 동네로 나가기를 원한다.그리스도와 사귀기를 원하는 자들은 세상과 세상의 열락으로부터 헤어나야 하며, 마음이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사로잡혀야 마땅한 때에 그 마음을 산만하게 하거나 그 일에 방해가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분요함이 없이 주님을 섬길 수 있을지" 궁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전 7:35). 그러므로 이 여인은 여기에서 도시의 소요스러움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쓰고 있다.
"우리는 영문 밖에 계신 그에게로 나아가자"(히 13:13). 고적과 은거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므로 "이삭은 명상"하고 기도하기 위해 "들로 나갔다." "네 골방에 들어가 그 문을 닫아라."
신자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라도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때는 결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
3. 밖으로 나가 지면을 돌볼 용무가 있었기에 이 여인은 자기가 사랑하는 자와 동행하기를 원하고 있다.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우리는 자신의 잘못만 아니라면 하나님과의 교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는 항상 우리의 우편에 계시며 그의 눈은 언제나 우리를 향하고 그의 말씀과 귀는 언제든지 우리 가까이 있으시기 때문이다. 거룩하고 성스러운 마음으로 세상 일에 종사하고 경건한 생각으로 일상적 행동을 하며 우리의 눈을 항상 주께 향하도록 하면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우리는 그리스도를 함께 모시고 다닐 수 있다. 우리는 믿음으로써 그리스도께 같이 가자고 요청할 수 없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는 아니 된다.
4. 이 여인은 때 맞추어 일어나 자기의 사랑하는 자와 같이 가기를 바란다. "우리가 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자." 이것은 자기의 사랑하는 자와 사귈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려는 이 여인의 관심을 암시한다. 우리는 정해진 때가 왔을 때 그 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하며, "매우 일찍이 간" 여인(막 16:2)처럼 그곳이 "무덤"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만일 거기서 그를 만날 수 있는 희망만 있다면 시간을 지체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밖으로 나가려는 자들은 늦기 전에, 아침 일찍이 그와 함께 출발해야 한다. 또 그들은 매일을 그와 함께 시작해야 하며, 그를 일찍이, 부지런히 찾아야 한다.5. 이 여인은 동네에서 유숙하는 것을 만족해 할 것이다.
시골 사람들이 들일을 할 때 쉬기 위하여 지어 놓은 헛간이나 오두막집이라도 만족히 여길 것이다. 자기의 사랑하는 자와 함께 할 수만 있다면 이 여인은 비록 보잘 것 없는 추운 거처일 망정 기꺼이 유숙하려 한다. 그가 임재하신다면 그런 누추한 거처도 훌륭하고 즐거운 곳이 되며 궁전과 같은 것으로 바뀔 것이다. 은혜로운 영혼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곳이라면 가장 누추한 시설에도 만족할 수 있는 법이다.
6. 자기의 사랑하는 자와 함께 있지 못한다면 가장 즐겁고 기쁜 들녘도, 특히 시골의 가장 즐거운 시기인 봄철의 들녘도 이 여인에게 아무런 만족을 주지 못할 것이다. 신자가 만일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을 향유하지 못한다면 지구상의 어떤 즐거움도 그를 편안히 만들어 줄 수 없다.Ⅲ. 이 여인은 자기 자신의 영혼이 어떤 상태에 놓여 있으며 그 영혼의 현재 상태가 어떤지 좀 더 잘 알고 싶어 한다(12절). "우리는 포도움이 돋았는지 살펴보자."
우리 자신의 영혼은 우리의 포도원이다. 이 포도원에는 포도나무와 석류나무가 심어져 있고 그들은 잘 가려서 택해 놓은 유용한 나무들이며 또 그래야만 된다. 우리는 이 포도원의 관리인들이다. 그러므로 자주 관심을 가지고 조사해 보아야 하며 우리 자신의 영혼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잘 살펴보아야 한다. "포도에 움이 돋았는지." 우리의 은혜가 활동하며 역사하는지, 우리가 의로운 열매를 맺는지, 우리의 열매가 풍요로운지 어떤 지를 찾아 보아야 한다. 그리고 특히 우리는 "연한 포도가 나타나며"(우리 성서, "꽃술이 퍼졌는지," 역자주), "석류 꽃이 피었는지" 조사해 보자. 아직까지는 어리고 연하지만 우리 안에 어떤 선한 동기와 경향이 있는지 살펴봄으로써 특별한 보살핌 아래 이들이 보호되고 소중히 간직되도록 하자. 이들이 완전에 이르는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 봉오리가 절단되거나 광풍에 떨어지거나 도둑을 맞지 않게 하면서 잘 재배하도록 하자.
우리 자신의 영적 상태를 이렇게 탐문하는 데에는 그리스도를 함께 모시고 다니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그의 임재는 봄볕이 돌아오면 동산이 소생하듯 "포도에 움이 돋고 꽃술이 퍼지게 하는" 때문이며,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에게 입증하는데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포도에 움이 돋고 꽃술이 퍼지는" 것을 보신다면 ─즉 만약 우리가 "주께서는 만사를 아시나이다. 주께서는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 아시나이다"라고 그에게 하소연할 수 있다면─, 만약 그의 성령께서 우리 영혼이 형통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 심령에 증거해 주신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족하다. 따라서 우리가 만약 우리 자신을 잘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에게 우리를 탐색해 보시며 시험해 보시도록 청해야 하고 그 탐색하는 일로 우리를 도와 주시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깨닫게 해 주시도록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Ⅳ. 이 여인은 자기의 시골 집에서 자신이 줄 수 있는 최선의 응대를 해드리겠노라고 자기의 사랑하는 자에게 약속하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로 들어오셔서 우리와 더불어 잡수실 것이기 때문이다(계 3:20).
1. 이 여인은 그에게 자신의 최선의 애정을 약속하고 있다. 그녀가 그를 위해 어떤 것을 준비하고 있더라도 만약 그 마음이 전적으로 그에게 바쳐지지 않는다면 그 대접은 완전히 멸시당할 것이었다. "그러므로 거기서 내가 나의 사랑을 네게 주리라. 나는 그 사랑의 고백을 다시 되풀이할 것이며 그 사랑의 표시로써 당신을 영예롭게 하겠나이다. 애모와 사모로 인하여 당신을 향한 내 영혼의 지향이 촉진되고 확대될 것이오며 내 마음은 거룩한 불로 당신께 바쳐질 것입니다."2. 이 여인은 그에게 자기의 가장 훌륭한 양식을 약속하고 있다(13절).
"거기서 우리는 즐거운 향기를 보게 될 것이니 이는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는 때문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사랑의 꽃들," "사랑스러운 꽃들" 혹은 "사랑의 열매"이다. 이 합환채라는 것은 어느모로 보나 매우 즐거운 것이었으며 라헬과 레아가 그것 때문에 다툴 정도로 매우 귀한 것이었다(창 30:14).
"우리는 또한 보기에 즐거울 뿐더러 먹음직도 한 것, 시골에서 나는 모든 진기한 것들을 찾게 될 것이다. 우리의 문 앞에는 각양 귀한 실과가 구비되었구나."
(1) 열매와 은혜의 역사는 주 예수님께 즐거운 것이다.
(2) 이들은 그를 위해 조심스럽게 쌓아두지 않으면 안 되며 그에게 대한 봉사와 그를 존귀하게 하는 일에 바쳐져야 하고, 우리 문 앞에 쌓아둔 물건같이 필요한 때면 언제나 우리에게 즉시 입수되어야 한다. 이는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음으로써 그를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다(요 15:18).
(3) 이들 귀한 실과는 아주 다양하며 우리 영혼은 이들을 잘 저정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온갖 종류의 과일을 소유해야 하며 "새 것, 묵은 것" 할 것 없이 모든 경우에 대한 은혜를 소유해야 한다. 훌륭한 집 주인은 금년 소산물뿐만 아니라, 작년에 남은 것까지도 자기 창고에 넣어 두고 있는 것이다(마 13:52).
우리는 듣고 배우고 경험해 온 것을 그리스도께 봉사하기 위해 즉각 쓸 수 있도록 준비해 놓아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미 얻는 것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노년의 날에 대비하여 저축해 온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며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쌓아 놓은 것에다 새 것을 자꾸 보태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우리의 창고가 불어나도록 하기 위함이며 우리가 "모든 선한 일을 위하여 철저한 준비를 갖추기" 위함이다.
(4)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이들은 자기들의 모든 소유나 극히 "귀한 실과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비장해 두었던 것들도 그에게 드리기에는 너무나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기꺼이 환영하신다. 그것이 더 많고 좋은 것일수록 그것은 그를 섬기는 데에 쓰여져야 한다. 그 모든 것은 다 그에게서 온 것이므로 모두 그를 위해 드려야 마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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