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6:1

그리스도에 대한 탐문 (아가 6:1-3)

여기에 나타난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예루살렘 여자들의 그리스도께 대한 탐문(1절).

그들은 교회에 대한 그들의 높은 평가를 계속 견지하며 여전히 이 여인을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라고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진정한 거룩함은 진정으로 아름다운 까닭이다. 이제 그들은 그리스도께 대한 그들의 생각을 한층 고조시키고 있다.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그를 찾으리라." 만약 아가서를 영적으로 이해하지 않을 경우 이 말씀은 점잖치 못하고 용납할 수 없는 찬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사랑은 경쟁자에게 대해 질투를 하는 것이며 그 사랑의 대상을 독점하고자 하여 타인들이 자기가 사랑하는 자를 찾는 데에 가담하는 것을 원치 않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들은 타인들도 역시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결합되는 것을 바라는 법이다. 아니, 교회의 자녀가 그들의 어머니되는 교회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대의 의무와 존경에 대한 본보기는 그리스도를 찾는 일에 이 여인(교회)과 합세하는 일이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이 여인이 그를 그토록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데에 궁금증을 느끼고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5:9)고 물었었는데, 이제는 마음이 변하여 그들도 직접 그를 사랑하고 있다.

1. 이 신부는 그를 그림 그리듯 묘사하였고 완전한 점을 보여 주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를 보진 못했을 망정 이 말을 믿기에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를 낮게 평가하는 자들은 그를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말씀과 성 령에 의하여 자신을 영혼에게 드러내실 때에는 그 빛에 의해 그에게 대한 사랑의 불길이 점화되어 타오르게 될 것이다.

2. 이 신부는 그에게 대한 자신의 사랑과 그 사랑 안에서 누리는 자신의 평안을 표현하였고 그것을 뽐내었다.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그녀의 가슴 속에서 타오르던 그 불길이 저들의 가슴에 불똥을 튀겨 불을 붙인 것이다. 죄많은 욕정이 터져나올 때는 많은 사람들을 불결하게 오염시키지만 어떤 자의 경건한 열정은 "많은 사람을 격동"하게 하는 것이다(고후 9:2).

3. 이 신부는 자기의 사랑하는 자를 찾는 일에 그들의 조력을 요청하였으나(5:8)이제는 오히려 그들이 이 여인의 도움을 구하고 있다.

그들은 이 여인 위를 덮고 있던 구름이 흩어지기 시작하고 하늘이 맑게 개이기 시작함을 알아채렸으며 이 여인이 그들에게 자기의 사랑하는 자를 묘사해 주는 동안에 그의 안에서 얻는 그녀 자신의 위로를 다시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의기소침한 가운데 있는 크리스챤들은 딴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데에서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해 말하는 중에서도 스스로 은혜를 맛보게 되는 것이다.



(1) 이제 그들은 그에 대해 묻는다. "너의 사랑하는 자는 어디로 갔는가? 그를 찾으려면 어느 길로 우리의 진로를 정해야 할 것인가?"

그리스도의 훌륭한 점들과 그에게서 받는 유리한 위로를 알게 되는 자들은 그를 찾기 위해 캐물어 보지 않을 수 없으며 그를 어디서 만날 수 있는지 알고 싶어하게 된다.



(2) 그들은 그를 찾으러 나선 이 여인과 동행하여 이 여인에게 봉사할 것을 제의한다.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그리스도를 발견하고자 하는 자들은 그를 찾아야 하며 그것도 일찍이 찾아야 하고 부지런히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찾는 최선의 길은 그를 찾는 자들과 연합하여 모두 함께 찾는 것이다. 우리는 성도들과의 교제 속에서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하는 분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다. 그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는 "자기 아버지께로, 그리고 우리들의 아버지께"로 가신 것이다. 그는 우리가 그에게 지향할 수 있는 방법을 알도록 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셨다(요 20:17). 우리는 믿음으로써 그곳에 계신 그를 바라보아야 하며 기도로써 그곳에 계신 그를 찾아야 한다. 우리는 담대함으로 "지극히 거룩한 곳에 들어가야" 하며 거기서 "그를 찾는 존속"과 함께 참여해야 하고(시 24:6) "각처에서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과 같이 행동해야 한다(고전 1:2). 우리는 타인들과 함께 기도해야 하며 또 타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Ⅱ. 이 물음에 대한 신부의 대답(2, 3절). 이 여인은 전에 한 것 같은 호소는 더 이상 하고 있지 않다(5:6). 그 때에는 어디에서 그를 찾아야 할지 몰라서 "그는 가고 없네, 가고 없네" 하고 넋두리를 하였으며 그를 영원히 잃어버리는 게 아닌가 의심하였었다.

1. 그러나 이제 이 여인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 매우 잘 알고 있다(2절). "나의 사랑하는 자는 성 중의 길거리나 군중 속에서나 그 소란한 중에서는 찾을 수 없다. 나는 그런 곳에서 그를 찾았으나 허사였다(그의 양친이 "그들의 친척과 친지들 속에서 그를 찾았으나 찾지 못했던 것 처럼."). 그는 은밀하고 한적한 장소인 자기 동산으로 내려 가셨다." 우리가 이 세상의 소요로부터 많이 물러나면 날수록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욱 더 많이 알게 된다. 그는 자기 제자들을 동산으로 보내셔서 자기 사랑의 고뇌에 대한 증인이 되게 하셨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잠긴 동산이요 세상의 개방된 공유지로부터 격리되어 있다. 그 곳은 "그의 동산"이다. 교회는 에덴 동산과 같이 그가 세운 그의 동산이며 그곳을 돌보시고 즐거워하신다. 비록 그는 위에 있는 낙원으로 올라가 계시지만 그래도 그는 땅 위의 자기 동산에 내려 오신다. 그의 동산은 낮은 데에 있지만 그는 그곳을 방문하기 위하여 자신을 낮추시는 데 그것은 놀라우신 낮추심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실제의 행동으로 땅 위의 사람과 함께 거하실 것인가?" 그리스도를 찾아 보려고 하는 자들은 "그의 동산" 곧 교회에서 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거기에 자기 이름을 기록"해 두고 "기념"하시는 까닭이다(출 20:24). 그들은 그가 세우신 규례 속에서 그를 시중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는 그의 말씀과 성례와 기도 속에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하실 것이다. 여기 이 신부의 말은 그리스도께서 5장 1절에 "내가 내 동산에 들어가서" 라고 하신 말씀을 상기시킨다. 이것은 마치 이 여인이 그가 자기 스스로 계신 곳을 내게 말씀해 주셨는 데도 그가 계시지 않는 곳에서 그를 찾으려고 안달을 내며 기진맥진하다니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여자냐!"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우리는 가르침과 위로의 말씀을 이용할 필요가 있을 때면 왕왕 그 말씀을 멀리 하다가, 복되신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그 말씀을 기억하도록 해 주시면 비로소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하여 그토록 간과하였던가 하고 이상히 여기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동산으로 들어오시겠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를 찾으려면 그리로 가야만 한다. "꽃밭"과 더 큰 동산 안의 작은 "동산"은 개체 교회를 말하며 "땅에 있는 하나님의 회당"(시 74:8)을 가리킨다. "향기"와 "백합화"는 주께서 심으시고 그의 눈에 즐거운 개개의 신자들을 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교회에 내려 오시는 것은 다음 두 가지를 위하심이다.

(1) "동산 가운데에서 먹이시기 위하여," 즉 자기 양떼를 먹이시려고. 그는 딴 목자들처럼 야외에서 먹이시는 게 아니라 그의 동산에서 먹이신다. 따라서 그들은 매우 훌륭한 사육을 받게 된다. 그는 오셔서 자기 친구들을 먹이시며 대접해 주신다. 너는 거기에 가면 그를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진수성찬을 차려놓은 그의 식탁과 그 식탁에 진심으로 초대해 주시는 그의 환대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잡수시기 위해서도 오신다. 즉 자기 백성안에 나타내신 자기 은총의 산물을 즐기러 오신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이들에게서 즐거움을 받으시는 때문이다." 그는 많은 동산들을 소유하고 계신다. 즉 그에게는 상이한 크기와 각기 다른 형태의 교회가 많이 있다. 그러나 그 교회들이 그의 것인 한 그는 모든 교회를 먹이시며 그들 중에 나타나시고 그들을 아주 기꺼워하신다.

(2) "백합화를 꺾기 위하여." 그는 즐거이 이 백합화를 관상하며 또 그것으로 단장하기를 즐기신다. 그는 백합화를 하나씩 하나씩 따서 자기 한테로 모은다. 저 큰 날에는 그들에 대한 전반적 추수가 있을 것이다. 그 날에는 그가 자기 천사들을 보내셔서 자기의 모든 백합화를 모으시고 그는 영원히 영광과 찬미를 받으실 것이다.

2. 이 여인은 그의 안에서 얻을 자기 자신의 이익을 크게 확신하고 있다(3절).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이 관계는 상호적 관계이고 매듭으로 묶어져 있어서 절대로 풀리지 않는 관계이다. "그는 백합화 가운데서(그 양떼를)먹이시며" 그와 갖는 나의 교제는 그이 안에서 얻는 "내 이익에 대한 확실한 표징이다." 이 여인은 앞에서도 이런 말을 했었다(2:16).

(1) 그러나 여기에서 이 여인이 되풀이하는 것은 자기가 자나깨나 이 말씀을 붙들고 놓지 않겠다는 결의를 나타내 보이는 동시에 그의 안에서 얻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즐거움과 만족을 보이려는 데에 있다. 이 여인은 자기가 선택한 것을 너무나 좋아하며 바꿀 수가 없었다. 하나님과 갖는 우리의 교제는 그와 맺은 우리의 언약을 빈번히 새롭게 하고 그 언약을 기뻐함으로써 매우 잘 유지되고 계속된다.

(2) 이 여인이 이 말씀을 반복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은 그녀가 자기의 사랑하는 자에게 불친절한 행동을 했던 때문이었고 또 그녀의 그런 행동 때문에 그는 정당하게 그녀에게 물러 나셨으므로 계약을 새로이 맺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새로운 계약은 신자들의 실수와 그리스도의 찡그리심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와 신자들간에 굳게 맺어진 채 계속되어 간다(시 89:30-35). "나는 나의 의무를 행함에 있어 부주의하고 부족하였지마는 그래도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의 것입니다." 이것은 언약 안에서 저지른 모든 허물을 우리를 언약 밖으로 내동댕이 치질 않는 때문이다. "그가 내게서 그의 얼굴을 숨기시고 그의 위로를 내게 거부하신 것은 지당합니다. 그러나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나의 것입니다." 견책과 징벌은 언약의 사랑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언약의 사랑에서 유출되기 때문에 이같은 고백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3)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충분한 확신을 갖지 못하는 때에도 우리는 그에게 충실히 집착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나는 내가 줄곧 인식해 오는 위로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리스도께 속하였다는 이 사실에 집착하렵니다."



(4) 이 여인은 전에도 같은 말을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 순서를 뒤바꾸어 자기 안에서 얻는 그의 연고권을 먼저 주장하고 있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그에게 전적으로 바쳐진 것이며 봉헌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에게서와 그의 은혜 안에서 누리는 자신의 이익을 말하고 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행복합니다. 그의 안에 있으면 나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에게 속하였다는 것을 우리 자신의 마음이 우리에게 증언할 수만 있다면 그가 우리에게 속한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다. 그리스도께서 계약을 깨뜨리는 적은 없기 때문이다.

(5) 전에 처럼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자기 양떼를) 먹이신다"는 것은 이제 그녀의 위안이 되었다. 그가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우리가 우리 솥의 밥을 먹고 사는 자들과 함께 사귀듯 그가 자기의 백성들과 자유로이 교제하신다는 사실은 그녀의 위안이 되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은 그가 물러가셨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나는 내 얼굴의 건강이 되시며 내 하나님이 되신 그를 찬양하리로다."

 

6:2 없음.

 

6:3 없음.

 

6:4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 (아가 6:4-10)

이제 우리는 자기 신부에게로 은혜로이 돌아오신 그리스도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스스로 멀리하셨던 신부에게로 돌아 오셔서 그녀와 담소하고자 하시며(왜냐하면 그는 이 여인에게 말을 걸고 있고 그녀로 하여금 "기쁘고도 반가운 말을 듣게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여인에게 은총을 입히고자 하시는 것이다. 그가 이 여인의 모든 불친절을 용서하시고 다 잊어버리셨음은 그가 이 여인에게 매우 다정하게 또 매우 경의를 표시하면서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Ⅰ. 그는 이 여인을 참으로 사랑스럽다고 선언한다(4절). "오! 내 사랑아! 너의 어여쁨은 디르사 같구나." 디르사는 므낫세 지파의 한 도시로서 그 이름은 "즐겁다" "기뻐 받을 만하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그 성읍이 매우 행복한 상황에 있었음과 그 물건은 매우 아름답고 고른 수준에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너의 고움은 예루살렘 같구나." 예루살렘은 "조밀한 성읍"으로서(시 122:3) 솔로몬이 건축하고 미화시킨 도성이며 "온땅의 기쁨"이 되는 도시였다. 이 세상에 그러한 도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 세상의 명예(세상이 그렇게 생각하든 않든 간에)가 되었다. 그것은 거룩한 성이었다. 또 바로 그 점이 그 성의 아름다움 중 가장 뛰어난 아름다움이었다. 교회가 이 예루살렘에 비유되는 것은 적절하다. 교회는 예루살렘으로 표현되었고 상징되었던 것이다. 복음 교회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갈 4:26)이요, "하늘 나라의 예루살렘"이다(히 12:22). 하나님께서는 그 안에 "그의 지성소"를 두고 계시며 특별하신 모습으로 임재하신다. 그는 그곳에서 발해지는 찬미의 예물을 받으신다. 그곳은 그의 영원한 안식처이다. 따라서 그것은 "예루살렘과 같이 곱고," 그러므로 "그 엄위함이 기치를 벌인 군대 같다." 적절히 행사되는 교회의 책망은 인간의 양심에 두려움의 일격을 먹인다. 말씀(교회의 병기가 되는)은 모든 "생각들을 쳐부순다"(고후 10:5). 그래서 불신자조차 거룩한 율례의 장엄함에 의해 판단되고 심판을 받게 된다(고전 14:24, 25). 성도들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요 15:4). 아니, 그들은 야곱같이, "하나님과 더불어 힘을 가지며, 겨루어 이긴다"(창 32:28).

Ⅱ. 그는 이 여인과 사랑에 빠진 자신을 인정하고 있다(5절). 그가 비록 잠시 동안 조그마한 분노로 자기 얼굴을 가리셨었으나 이제는 "영원한 자비"의 매우 놀랄 만한 사례들로써 이 여인을 거두어 들이신다(사 54:8). "네 눈을 내게로 돌이키라"(그렇게 해석하는 이도 있다). "믿음과 사랑의 눈을 돌이켜 나를 향하라. 이는 저들이 나를 높이 쳐들음이라. 나를 쳐다보고 위로를 받으라."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의 눈을 우리에게로 돌이키시도록 그를 부를 때 그는 우리의 복종의 눈을 자기에게로 돌이키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우리가 읽는 본문은 사랑의 표현치고는 이상하다. "네 눈을 돌이켜 나를 보지 말 것은 내가 그 광채를 견딜 수 없음이라. 네 눈이 나를 아주 압도하였으니 지나간 모든 것은 간과할 수밖에 없구나."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이스라엘을 위해 중재하였을 때 그에게 "나대로 하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굴복할 수밖에 없노라"(출 32:10)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정열적인 연인의 표현을 차용하시고 즐거워하심은 오직 긍휼이 많으신 구세주의 자애로우심과, 그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자들과 그의 은혜의 역사하심 속에서 그가 얻으시는 즐거움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Ⅲ. 그는 그가 이전에 이 여인의 아름다운(4:1-3)머리털, 이, 뺨(5 - 7)에 대해 표현했던 묘사를 부분적이긴 하지만 거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반복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딴 말로나 다른 비유로써 묘사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 여인의 불친절한 행위와 그가 이 여인에게서 따나갔었던 일 뒤에도, 자기는 이 여인에게 대해 이전과 조금도 다름없는 평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비록 그가 이 여인을 완전히 차 내던져 버리진 않았으나 이 여인이 그의 진의를 오해할까봐, 즉 그가 그녀를 알고 지내는 동안 더욱 더 그녀를 나쁘게 생각하는 줄로 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는 자기가 했던 말을 이제 또 다시 이 여인에게 말해 주고 있다. "많은 것을 용서받은 자들은 더욱 많이 사랑할 것이며" 따라서 더욱 많은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사랑하는 자를 나도 사랑하노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는 자기 백성이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진심으로 회개하고 자기들이 의무를 복귀하면 그들을 즐거워하시며 그들이 마치 완전에 도달한 자들인양 그들을 칭찬하신다.

Ⅳ. 그는 이 여인을 모든 경쟁자들보다 우위에 놓고 딴 여인들의 모든 아름다움과 완전함이 이 여인에게서 합류하며 이 여인을 중심으로 모이는 것을 보게 된다(8, 9). "왕후가 육십이다(이것은 있을 수 있다). 이들은 에스더처럼 아름다움에 의하여 제왕의 신분과 위엄에까지 이르게 된 자들이다. 비빈이 팔십이다. 제왕들은 이 비빈들을 더욱 매력적인 존재로 생각하여 왕후들보다 더욱 총애하였다. 그리고 이들에게 시중을 드는 궁녀들, 즉 시녀들은 무수하다. 궁중에 무도회가 열릴 때는 이 시녀들이 휘황찬란하게 등장하는데 그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눈을 어지럽게 한다. 그러나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오직 하나뿐이니 곧 거룩한 자이다."

1. 이 여인은 그 모두를 능가한다. 온 세계를 다 돌아다니면서 스스로 현명하며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무리를 살펴 보아라. 나라, 궁정, 국회, 추밀원, 그 밖에 너희가 가치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그 어떤 단체에 가보더라도 그리스도의 교회와 짝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들의 명예와 아름다움도 교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이스라엘이여! 너와 같은 자가 누구이뇨"(신 33:29; 4:6, 7).

"무수한 시녀들"처럼 그 재능으로나 솜씨, 언어, 행동거지의 아름다움으로 뛰어난 사람들도 있으나 거룩한 아름다움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녀는 단 한 가지 아름다움만 갖고 있으니 그것은 곧 그녀가 비둘기라는 것, 더렵혀지지 않은 순결한 비둘기로서 나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 점이 그녀로 하여금 그토록 많은 왕후나 시녀를 능가하게 만든다."

2. 이 여인은 그 모두를 다 포괄한다. "딴 왕들은 많은 왕후와 비빈들과 시녀를 거느리면서 그들과의 교제를 즐기지만 내게는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가 그들을 대신하고 있다. 다른 여러 임금들이 그들의 왕후, 비빈, 시녀들에게서 얻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나는 단 하나뿐인 그에게서 얻고 있다." 혹은 "비록 많은 개체 교회들이 있어서 어떤 교회는 더 큰 위엄을 보이는가 하면 어떤 교회는 덜 엄숙하고 어떤 교회는 더 오래 서 있는가 하면 어떤 교회는 더 짧게 서 있기도 하고, 또 많은 개개 신자들 중에는 서로가 다른 은사와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더러는 보다 저명한 자들이 있는 반면에 덜 유명한 자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부가 하나의 공통된 교회(catholic church)를 구성하고 있으며 그들 모두가 전체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그것은 바로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이다." 그리스도는 단일화된 교회의 구심점이요 중심이다. 널리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을 그에 의하여 거둬 들여지며(요 11:52) 그에게서 합류되고(엡 1:10) 전부가 다 그의 비둘기들이다.

Ⅴ. 그는 이 여인이 자기에게서 뿐만 아니라 이 여인을 알고 이 여인과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자들에게서도 얼마나 존중을 받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다음과 같은 사실은 이 여인의 칭송에 보탬이 된다.

1. 이 여인은 그 어머니가 애지중지하는 딸이었다. 이 여인은 어릴 적부터 부모의 각별한 애정을 받을 만한 점이 있었다. 솔로몬 자신도 "그의 어머니가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잠 4:3)이었다고 하는데 이 여인도 그와 같이 "그 어머니의 외딸"이었다. 마치 이 여인 혼자만 있었던 것처럼 귀염을 받았고 설사 그 외에 많은 자녀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 여인은 "그 낳은 자가 귀중히 여기는(가려 뽑은)자" 였다. 즉 교회는 이 세상이 여지껏 배출해 낸 그 어떤 인간의 집단보다 더 훌륭하며 귀중한 선택 사회이다. 그리스도께서 판단하시기로는 이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모든 영광도 교회와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교회는 "온 땅의 뛰어난 자들"과 "정금에 비유할 수 있는, 시온의 귀한 아들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이웃 사람들보다 월등히 뛰어난다."

2. 이 여인은 자기를 아는 모든 자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녀보다 연소한 "딸들"(우리 성경에는 "여자들"로 번역)이 그녀를 찬미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연적으로서 질투함직도 한 "왕후와 비빈들"까지도 그녀를 칭찬하였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여인을 복되다"고 하였으며, 이 여인의 행복을 빌어 주었고 "칭찬하였으며," 이 여인에 대해 좋게 이야기하였다. "예루살렘 여자들"(딸들)은 이 여인을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여자"라고 불렀다. 모든 사람이 이 여인에게 최고 미인의 칭호를 붙이는 데에 이의가 없었으며 모든 곡식단은 이 여인의 단에게 절을 하였던 것이다.



(1) 사물에 대해 정확한 감각을 가지는 자들이라면(사람들이 무어라고 말하든지 간에) 경건한 사람들이야 말로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을 양심상 확신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찬사를 던질 것이며 그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자들은 더욱 많을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이 자기 교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며 어떤 평을 하는지를 주지하신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에게 명예를 돌려 드리는 자들은 아주 기쁘게 여기시며, 반면에 자기 교회와 백성들을 멸시하는 자들은 나쁘게 생각하신다. 특히 교회가 의심을 받고 있을 때 "그의 소자 중 하나라도 실족케 하는"자는 그의 노여움을 입는다.

Ⅵ. 그는 이 여인에게 들려 준 찬사를 끄집어 내서 자기 자신의 말로 삼고 있다(10절). "아침 빛같이 뚜렷한 이 여자는 누구인가?" 이 말씀은 이 세계의 교회에 적용할 수도 있고 심령 속의 은혜에도 적용할 수 있다.

1. 그들은 모든 가시적 사물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처럼 사랑스럽다. 크리스챤은 세상의 빛이며 또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메시야의 약속이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고 "새벽빛(여명)이 높은 데서부터" 이 흑암 세상을 찾아 오자 구약의 족장 교회는 "아침 빛 같이 뚜렷하게 되었다." 유대 교회는 "달같이 아름다왔다." 의식 율법은 불완전한 빛이었다. 그것은 반사에 의해서 빛을 비췄을 따름이다. 그것은 달과 같이 변하고 있었고 낮을 이루지 못하였다. 아직까지 의로운 태양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기독 교회는 "해처럼 뚜렷하여" "흑암 중에 앉아있던 자들에게" 큰 "빛"을 비추고 있다. 혹은 우리는 이 말씀을 은혜의 나라 즉 복음 왕국에 비할 수 있다.

(1) "복음 나라가 떠오르매 그것은 캄캄한 밤이 지난 뒤의 아침처럼 보인다." 그것은 드러나는 것이며(욥 38:12, 13), 매우 받아들일 만하고 밝은 아침처럼 즐겁게 "보인다." 그러나 시작할 때는 그것이 매우 작아서 처음에는 거의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이다.

(2) 복음의 나라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지만 "달 같이 아름답다." 달은 태양에서 빌려온 빛으로 빛나며 차고 기우는 것이 있고 월식이 있으며 또한 어두운 점도 있다. 만월이 된다해도 달은 밤으로만 다스린다.

(3) 그러나 그 나라가 영광의 나라로 완전하게 될 때는 "해처럼 밝을" 것이며, "교회는 해로 옷입을"것이고 "의로운 태양"이신 그리스도로 옷 입을 것이다(계 12:1).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그 때에 "힘차게 돋는 해 같이" 될 것이다(삿 5:31; 마 13:43). 그들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영광 중에서 빛날 것이며 완전한 것이 그 때에야 올 것이다. 그 때에는 어두움도 없을 것이요 점도 없을 것이다(사 30:26).

2. 교회와 신도의 아름다움은 사랑스럽기만 한 게 아니라 "기치를 벌인 군대 같이 엄위롭다." 이 세상에 있는 교회는 "군대 같고" 광야에 세웠던 이스라엘의 군영 같다. 교회는 교전 중인 상태에 있다. 교회는 원수들의 한 가운데에 있으며 그들과의 항구적인 투쟁에 기여하고 있다. 신도들은 이런 군대의 병사들이다. 그 군대에는 "기치"가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기호(사 11:12)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군대의 기(아 2:4)이다. 그 군대는 정렬되어 있으며 질서를 지키고 규율있게 행동한다. 그 군대는 그 대적들에게는 광야의 이스라엘이 그 주변 민족에게 공포감을 안겨 주었던 것과 같이 두려운 존재다(출 15:14). 발람이 지파를 따라 기치를 세우고 군기를 나부끼면서 포진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보았을 때 그는 "야곱이여! 네 장막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라는 말을 하였던 것이다(민 24:5). 교회가 자신의 순수성을 보존할 때는 자기의 명예와 승리도 안전하게 보장된다. 교회가 "달같이 아름답고" "해처럼 밝을" 때는 그것은 참으로 크고 두려운 존재인 것이다.

 

6:5 없음.

 

6:6 없음.

 

6:7 없음.

 

6:8 없음.

 

6:9 없음.

 

6:10 없음.

 

6:11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의 화해 (아가 6:11-14)

그리스도는 이제 자기 신부에게로 돌아 오셨고 불화는 완전히 해소되었다. 이 여인들 간의 반목은 이제 사랑을 새롭게 만들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거리감에 대해서와 화해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Ⅰ. 그가 자기의 신부된 교회로부터 물러가시는 때에도 그는 자기 동산으로서의 교회로부터 자기 눈을 떼신 적은 없었고 그 교회를 돌보셨다(11절). "나는 골짜기의 푸른 초목(혹은 열매)을 보려고, 즉 나의 소유가 되는 그들을 보려고 만족과 염려로써 호도 동산(혹은 육두구 동산)으로 내려갔노라." 그가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도 그는 동산 밖으로 멀리 나간 게 아니라, 낮고 어두운 골짜기에 있는 동산의 나무 사이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 때에 그는 "포도나무가 어떻게 순이라도 났는가"를 살피고 있었으니 이는 그가 포도나무의 발육을 촉진시키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해 주고자 함이었고, 사람이 열매 많이 열리는 정원을 즐거워하듯 주렁주렁 달린 포도나무를 통해 기쁨을 얻기 위함이었다. 그는 또한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를 알려고 갔다.

그리스도께서는 영혼 속에서 역사하는 은혜의 선한 작업이 맨 처음 어떻게 시작하는지 관찰하시며, 독실한 애정과 경건한 성향이 영혼 속에서 이른 시기에 봉오리를 맺는지를 살피시고 우리가 봄에 피는 꽃을 보고 즐거워하듯 그것을 아주 기뻐하신다.

Ⅱ.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것으로 오래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자기에게 대한 이 여인의 애도와 자기를 향한 사모 때문에 초췌해진 이 여인에게 감동되었던 것인지, 자기의 신부된 교회에게로 돌아가고픈 강렬하고도 항거할 수 없는 충동이 별안간 자기의 흉중에서 소용돌이침을 느끼게 되었다(12절). "부지 중에 내 마음이 나로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 이르게 하였구나. 나는 더 이상 멀리서 있을 수가 없었다. 후회하는 마음이 불현 듯 일어나서 나는 내 사랑, 내 비둘기의 품으로 당장 돌아가려고 작정하였노라." 요셉도 자기 형들의 이전 비정함에 대해 징벌하고 그들의 현재 성질을 시험하고자 하여 잠시 동안은 형제들에게 남인 듯 시치미 뗄 수가 있었다. 그러나 급기야는 더 이상 자신을 억제할 수가 없어 혹은 "의도적으로" 눈물을 흘리고 울음을 터뜨리면서 " 내가 요셉이요" 하고 말하였던 것이다(창 45:1, 3). 그리고 이제 이 신부는 다윗처럼(시 31:22)깨달음을 얻는다. 비록 이 여인이 "경겁 중에 말하기를" "내가 당신의 목전에서 끊어졌나이다" 하였으나 그가 즉각 "이 여인의 간구하는 소리를 듣고" 아름다움과 빠른 속력으로 유명한 ammi nadib, "즉 내 귀한 백성의 수레처럼" 되었다는 사실을 이 여인은 깨닫게 되었다. "내 마음이 나로 나의 즐거워하는 백성의 수레 가운데 이르게 하였구나(이렇게 해석하는 자도 있다). 그 수레는 저들이 나를 데려오기 위하여, 보낸 수레로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수레요 저희 소원과 기도와 기대의 수레이며 불말이 끄는 불병거와 같은 것이다."

1. 그리스도의 백성은 기꺼이 행하는 백성이며 또한 기꺼이 행하려는 백성이 되어야만 한다.

2. 그리스도께서 물러가시는 듯이 보이는 때에라도 저들이 계속하여 그를 찾으러 계속 그를 동경한다면 그는 적당한 때에 은혜로이 돌아오실 것이다. 아마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빨리 돌아오셔서 그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동시에 즐겁게 해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를 부르러 보낸 수레는 빈 수레로 돌아오는 법이 없는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은혜로운 보답은 전부가 다 그리스도께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그의 백성의 수레에 태우는 주최자는 그들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의 마음이다. 그는 자신이 은혜롭고자 원하시기 때문에 은혜로우시며 자기의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기를 바라시는 까닭에 그들을 사랑하신다. 그것은 저희들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Ⅲ. 이 여인에게로 돌아온 그는 이 여인이 실망 중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로 돌아올 것을 친절히 권유한다. 이 여인은 이런 거리감이 생기기 전에 받던 만큼 많은 위로를 얻기는 어렵다고 절망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녀는 자기 사랑이 돌아오는 위로를 받아야 한다(13절).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보자.

1. 교회는 "술람미 여자"로 지칭되고 있다. 이 술람미 여인은 상징적인 신랑, 즉 "솔로몬"을 암시해 준다. 이 여인은 그와의 관계와 그와의 연합을 표시하기 위해서 이러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마찬가지로 신자들도 "그리스도"란 이름에서 유래된 "크리스챤"이란 이름으로 불리운다). 아니면 이 "술람미"란 말은 "수넴" 여인이 "수남미"라고 불리우듯 이 여인의 출생지요 거주지이던 "살렘"을 나타내는 말일 것이다. 천국은 성도들이 태어나서 그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살렘이다. 그리스도께 속하고 하늘 나라에 속하는 자들은 "술람미 여인"으로 불리워야 할 것이다.

2. 이 여인은 돌아오도록 초대를 받고 있다. 더욱이 그 초대는 극히 간곡되게 강조되어 "돌아오고 돌아오라"를 두 번이나 반복한다. "돌아오고 돌아오라, 네가 잃어버리고 몰수당했던 평안을 회복하라. 네가 이전에 누리던 마음의 평정과 쾌활함으로 되돌아오라."

선량한 크리스챤이라 하더라도 그 위안을 교란당하고 나면 때로 진정하기 어려울 때가 있으며 그들의 평안으로 되돌아 오도록 간곡한 타이름을 받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반역하는 죄인들에게 "너는 돌이키라. 너는 돌이키라. 어찌하여 네가 죽으려느냐?" 하면서 몇번이고 부를 필요가 있듯이 동요를 일으키고 있는 성도들에게도 "너는 돌이키라. 너는 돌이키라. 어째서 네가 약해지려느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느냐?"고 재삼 재사 외칠 필요가 있다.

3. 이 여인이 돌아오고 난 뒤 그녀의 얼굴을 보여달라고 요구된다.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 더 이상 상주처럼 얼굴을 가리우고 다니지 말라." 하나님과 화해한 자들은 "흠없는 저희 얼굴을 들어라"(욥 22:26). 그들은 그의 은혜로운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의 유쾌함과 겸손한 신뢰를 기뻐하시며, 그들이 명랑한 표정을 짓기를 원하신다.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 나뿐만 아니라 거룩한 천사들도 너를 보게 하라. 거룩한 천사들은 죄인의 회개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위로도 즐거워한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여인들도 너를 보게 하라." 그리스도와 신도들은 교회의 아름다움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4. 이 여인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 짤막하게 설명되고 있다(우리 성경과 다른 표현으로 되어 있다). "너희가 술람미 여자 한테서 무엇을 보려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그것은 마치 두 개 군단의 사귐과 같다"란 대답이 나오고 있다.

(1)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이 여인의 자기 자신에 대한 설명으로 생각한다. 이 여인은 자신의 출현을 부끄러워하며 자기의 모습을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녀의 생각으로는 자기가 모양도 없고 맵시도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여인은 어떻게 말하는가! "너희가 술람미 여인에게서 무엇을 보려느냐? 너희가 볼 만한 가치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너희가 볼 수 있는 것은 실제로 전투중인 두 개의 군대 같은 것밖에 없다. 그같은 전장에서는 유혈과 살육밖에는 볼 수 없다." 이 여인은 파수군들에게 맞아 상처를 입고 그 얼굴에 부상당한 흔적을 남긴 채 돌아와 마치 전쟁이라도 한 듯이 보였었다. 이 여인은 "내가 거무스럼하다고 해서 흘겨보지 말아라"고 말했었는데(아 1:6), 여기서는 "내가 피투성이이므로 나를 쳐다보지 말아라"고 말하는 것이다.

혹은 이 말씀은 신도의 영혼 속에서 은혜와 부패케하는 것 사이에 일어나는 항구적 투쟁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들은 영혼 속에서 "두개의 군대처럼" 끊임없이 투쟁하며 소강 상태를 이루고 있어서 이 여인이 얼굴을 보이기를 부끄러워하도록 만든다.



(2) 또 딴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이 여인의 애인이 이 여인에 대해 하는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너희가 술람미 여인에게서 무엇을 볼 것인지 말해 주리라. 너희는 두 개 대군 혹은 같은 군대의 두 부대가 대오를 벌이고 있는 것과 같은 고귀한 장면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기치를 든 군대같을 뿐만 아니라 앞서 말한 것의 두 배나 되는 장엄한 두 개의 군대같기도 하다. 이 여인은 마하나임 즉 야곱이 보았던 두 군대(창 32:1, 2)같으니, 한 군대는 성도의 무리이요 또 한 군대는 성도들에게 역사하는 천사의 무리이다. 곧 전투하는 교회요, 승리하는 교회가 곧 이 여인의 모습이다."

"두 군대"를 보라. 교회는 이 두 가지에서 다 아름답게 나타난다.

 

6:12 없음.

 

6:13 없음.




































 


  1. 메튜 헨리 주석, 아가 01장

    Category아가
    Read More
  2. 메튜 헨리 주석, 아가 02장

    Category아가
    Read More
  3. 메튜 헨리 주석, 아가 03장

    Category아가
    Read More
  4. 메튜 헨리 주석, 아가 04장

    Category아가
    Read More
  5. 메튜 헨리 주석, 아가 05장

    Category아가
    Read More
  6. 메튜 헨리 주석, 아가 06장

    Category아가
    Read More
  7. 메튜 헨리 주석, 아가 07장

    Category아가
    Read More
  8. 메튜 헨리 주석, 아가 08장

    Category아가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

All the Bibles, Commentaries and Dictionaries here have their own rights.
All rights are reserved for them, not for us. Thanks! Praise our great God, Christ Jesus!

HANGL Lingua Franca 한글 링구아 프랑카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