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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교회의 아름다움 (아가 4:1-7)

Ⅰ. 교회와 은혜로운 영혼의 아름다움에 관해 전체적이면서 세부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새로워지게 하는 것들이며 거룩함의 미(美)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그는 아름다움을 판정할 수 있는 유능한 심사관이시며, 그의 "판단은 진리를 따른 것"이 확실하므로 모든 사람은 그가 내리시는 심판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분이 "보라! 너는 어여쁘구나"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여인은 그를 찬미하였고 자기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그의 영광을 주시하도록 촉구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그의 마음에 들게 되고 그의 총애를 얻는다. 또한 그는 자기에게 대한 이 여인의 경의에 답하여 자기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 이 여인의 우아함을 주목하라고 촉구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존귀하게 하는 자들을 존귀케 하실 것이다(삼상 2:30).

1. 그는 이 여인에게 아첨하지 않으며, 아첨함으로써 그녀가 자만심을 갖게 하거나 그를 찬양하도록 유도할 의도도 갖지 않는다. 그녀를 아름답다고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이것은 현재 풀이 죽어있는 그녀를 격려하기 위함이다. 딴 사람들은 이 여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자기의 눈에는 이 여인이 사랑스러웠다.

(2) 이것은 이 여인에게 무엇을 귀중한 것으로 평가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즉 외면적인 잇점은 어떤 것도 귀하게 여기지 말고(그것은 그녀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으며 설령 그런게 결여된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훌륭한 것은 하나도 박탈되지 않는다) 그가 그녀에게 입히신 은혜의 아름다움만 귀하게 여기라는 것이다.

(3) 이것은 딴 사람들도 이 여인에 대해 좋게 생각하며 그들도 친히 이 여인과 연합하도록 초대하기 위함이다. "너는 내 사랑이라. 너는 나를 사랑하고 또 내게서 사랑을 받는다. 그러므로 너는 어여쁘다." 성도의 모든 아름다움은 그리스도께로부터 유래한다. 그들은 그의 빛을 받아 반사함으로써 빛난다. "우리에게 임하는 것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아름다움"(혹은 은총)이다(시 90:17). 이 여인은 그에게 시집을 갔고 이것이 그녀를 아름답게 만들었다. Uxor fulget radiis mariti─즉 "신부는 그 남편의 빛으로 반짝인다." 이 말씀은 반복되고 있다.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이것은 그 사실의 확실성을 의미할 뿐 아니라 이 사실을 말하는 가운데 느끼는 그의 즐거움을 뜻하기도 한다.

2. 교회의 아름다움에 대해 여기서 묘사된 것을 보면, 이미지(image)는 매우 밝은 반면 음영(陰影)은 강하고 비유는 대담하여 어떤 외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데에는 실제적으로 타당하지가 않다. 그 이유는 이들이 그런 것을 그리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이 묘사하고자 하는 것은 곧 "거룩함의 아름다움," "새사람," "썩지 아니할 것으로 마음에 숨기운 속 사람" 등이다. 일곱가지 세부 사항이 다음에 상술되고 있다. 일곱은 교회가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에 의하여 다중적(多重的)인 은혜로 부유하게 되는 것처럼(계 1:4; 고전 1:5, 7)완전의 수이다.

(1) 이 여인의 "눈." 아름다운 눈은 미인이 되는 데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그 눈은 깨끗하고 정순(貞純)하며 자주 하늘을 쳐다보는 눈이다. 이것은 태양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독수리의 눈이 아니라 겸손하며 정숙하고 슬퍼하는 "비둘기의 눈"이다. 그러한 것이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며 칭찬하시는 자들의 눈이다. 목회자들은 교회의 눈이다(주의 파수꾼들은 눈을 마주하여 볼 것입니다. 사 52:8). 그들의 눈은 "비둘기의 눈"처럼 무해하고 악의가 없어야 하며(마 10:16) "소박함과 경건한 성실성으로 세상에서 교제"하여야 한다. 지혜와 지식은 새 사람의 눈이다. 그 눈은 맑아야 하며 거만해서는 안 되고 "우리에게 너무 높은 일들을 바라 봐서도 아니 된다." 우리의 의도와 목적이 진지하고 정직할 때 우리는 "비둘기 눈"을 갖는 것이며, 우리가 "우상"을 바라 보지 않고(겔 18:6) "우리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하고 있을 때(시 25:15) 우리 눈은 비둘기 같다. "비둘기의 눈은 너울 속에" 있으므로 그 너울은 그들에게 차양과 같은 것이 된다.

[1] 따라서 그들은 완전히 볼 수 없다. 우리가 여기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부분적으로 밖에 알지 못한다." 우리 눈에는 한 가닥 머리카락이 늘어뜨러져 있는 까닭이다. "어두움 때문에 우리는 우리 말을 꺼낼 수도 없다." 죽음이 이러한 머리 타래를 짧게 짤라 줄 것이며 그 때에 우리는 만사를 분명히 보게 될 것이다.

[2] 또한 그 눈들도 완전하게 보이지 않으며 엷은 구름을 통해 보이는 별처럼 희미하게 보인다. 혹자는 이것을 그녀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으로 해석한다. 이 여인은 자기 눈을 방황하지 않도록 하고 너울로 그 시야를 제한하고 있다.

(2) 이 여인의 "머리털." 그녀의 머리털은 "한 무리의 염소"에 비유되고 있다. 염소 때는 희게 보이고 산꼭대기에 있을 때는 훌륭한 머리털 같이 보인다. 그 모습은 보는 이에게 즐거움을 준다. 염소는 그 수염으로 인해 근엄한 느낌을 줄 뿐만 아니라 "그 걸음은 위풍이 있기"(잠 30:29) 때문이다. 그러나 염소가 그 소유주에게 모든 것 중 가장 즐거움이 됨은 염소 떼가 그의 큰 재산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타인들이 자기들 머리털과 같이 하찮게 여기는 교회와 신도들에게 귀한 가치를 부여하신다. 그는 자기 제자들에게 마치 사람들이 자기 가축 무리를 세심하게 헤아리듯 "그들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으니"(마 10:30), "저들의 머리털 한 오라기도 상치 아니 하리라"고 하셨다(눅 21:18). 혹자는 여기에 나오는 머리털을 신자의 외면적인 언행이라고 해석한다. 신자의 언행은 아름답고 점잖아야 하며 마음의 거룩함에 어울리는 것이어야 한다. 사도는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고백하는 이들에게 합당한 착한 행실을, "머리 땋는 일"과 대비(對比)시키고 있다(딤전 2:9, 10). 막달라 마리아가 자기 머릿털로 그리스도의 발을 씻겼 때 그녀의 머리털은 아름다왔다.

(3) 이 여인의 "이"(2절). 목회자들은 교회의 치아이다. 그들은 유아를 돌보는 여인들처럼 그리스도의 어린 애기들을 위해 음식을 씹어 준다. 갈데아 주석은 이것을 백성의 대표로서 희생 제물을 먹고 살던 제사장과 레위인들에다 적용시킨다. 우리는 믿음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먹고 살며, 명상에 의하여 말씀을 반추하고 우리가 귀로 들은 것을 소화시키기 위해 되새김질하는 것이다. 이런 믿음과 묵상은 새로운 인간의 치아이다. 이러한 치아는 본문에서 "양떼"에 비유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제자들과 사역자들을 "작은 양떼"라고 부르셨다. 이것은 이에 대한 찬사이다. 이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양과 같이" 고르고 희며 깨끗하게 보존되는 것이다. 또 그 이는 굳세며 잇몸에 잘 박혀 있어서 새끼를 조산하는 양과 같이 약하지 않다. 우리가 "새끼 없다"고 번역하는 단어는 그와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이것은 목회자에게 대한 찬사이다. 그들은 상호 사랑과 일치에 있어서 한결같고, 모든 도덕적 오염으로부터 순수하고 깨끗하며, 영혼들을 그리스도께 결실하고 어린 양들을 양육함으로써 열매를 많이 맺는 자들이다.



(4) 이 여인의 "입술." 이 여인의 입술은 "홍색 실"에 비유되고 있다(3절). 빨간 입술은 아름다우며 창백한 입술이 심약함과 약함을 나타내듯이 빨간 입술은 건강을 상징한다. 이 여인의 "입술"은 "주홍색"이었으나 그 얇다란 입술은 "홍색실과 같았다." 그 다음 말이 이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 "네 입(혹은 말)은 아름다우니" 언제나 은혜로우며 "유익"하고 "교훈에 유용"하다. 이것은 크리스챤의 아름다움에 크게 이바지한다. 우리가 "우리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입"으로 그를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게" 될 때 그것은 "홍색실"과 같다.

우리의 모든 착한 행실과 선한 말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씻겨져서" "홍색실"처럼 염색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후에라야 그들은 하나님께 열납될 것이다. 갈데아 주석은 이것을 대제사장 및 속죄일에 백성을 위해 드리는 대제사장의 기도에다 비하고 있다.



(5) 이 여인의 "관자놀이" 혹은 "뺨." 이 여인의 빰은 본문에서 "한 쪽의 석류"에 비유되고 있는데 이 석류란 과일을 두 쪽으로 쪼개보면 그 안에는 핏줄 같은 것과 작은 알맹이가 많이 들어있다. 그것은 흡사 얼굴의 홍조와 같다. 우리 얼굴을 하나님 앞에 쳐들고 낯을 붉히며 우리 죄를 기억하고 낯을 붉히고, 우리에게 입히신 명예를 받기에는 너무나 우리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임을 자각하여 낯을 붉히는 겸손과 정숙은 그리스도께서 보시기에 우리를 매우 아름답게 하는 점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부끄러워 낯을 붉히는 것은 "그녀의 너울 속"에서 이다. 이것은 [더람(Durham)선생이 말하듯이] 이 여인이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부끄러워하며, 하나님과 자기 양심 이외에는 아무도 보지 않는 점 때문에 낯을 붉힌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이 여인은 자신의 겸손을 광고하려 들지 않고 그것을 겸손히 숨기려한다는 것을 암시 하기도 한다. 그럼데도 불구하고 겸손과 수줍음의 모든 증표는(겸손과 수줍음) 사뿐 걸음으로 나타나며, 그러한 그것들은 아름다운 것이 아닐 수 없다.

(6) 이 여인의 "목." 이 여인의 목은 "다윗의 망대"에 비유되고 있다(4절). 이것은 일반적으로 믿음의 은총에 대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몸은 목을 통하여 머리와 연결되듯이 우리는 믿음이란 은총에 의하여 그리스도께 연합된다. 이것은 "다윗의 망대 같이" 우리에게 전쟁무기를 공급해 주며, 특히 군병들이 그 망대로부터 공급받았던 것처럼 온갖 방패를 제공해 준다. 왜냐하면 "믿음은" 우리의 "방패"인 까닭이다(엡 6:16). 믿음을 소유하는 자들은 "방패"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께서 "방패로써 하듯 은혜로써" 그들을 감싸시는 때문이다. 이 "목이 망대처럼" 똑 바르며 당당하고 강할 때, 크리스챤은 자기 길을 진행하며 용기와 도량을 가지고 활약하고, 믿음이 약해질 때처럼 고개를 떨구지 않는다. 본문에서는 "용사들의 방패가" "다윗의 망대"에 달려 있다고 하는데 어떤 이들은 이것을 이 방패가 다윗 휘하의 용맹한 인사들의 기념물이라고 해석한다. 그들의 방패가 보조된 것은 그 방패의 주인공들과 그들의 영웅적인 행위를 기억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성도들의 전 역사를 살펴 봄으로써 우리는 큰 고무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모든 시대를 통틀어 성도들은 믿음에 의해서 무척이나 위대한 일들을 이룩하였고 획득하여 왔다. 우리는 머리를 쳐들어 우리의 선배 성도들이 성취한 위대한 행적을 바라보고 또 그로써 크나큰 용기를 얻을 수 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우리는 달려 있는 "용사의 방패"와 신도들의 공적, 그리고 승리의 전리품을 볼 수 있다.

(7) 이 여인의 "유방." 이 여인의 젖가슴은 "쌍태 노루 새끼 같다"(5절). 교회의 젖가슴은 장식용인 동시에(겔 16:7) 유용한 것이기도 하다. 그 젖가슴은 열왕의 유방을 빨겠다고 한 그대로(사 60:16) "그녀의 위로의 젖가슴"이다(사 6:11).

혹자는 이것을 신 구약 성서 두 가지에 비하는가 하면 또 딴 이들은 은혜의 언약을 표시하는 두 가지 성찬에다 빗대기도 한다. 또 이 구절이 목회자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영적인 양육자가 된다. 그들은 "말씀의 신령한 젖"을 나눠 주어 "이로써 하나님의 자녀로 하여금 자라나게" 하며 이를 행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꼴을 먹여 주시는 "백합화 가운데서"(2:16) 그들 스스로도 "꼴을 먹는다." 그리하여 교회의 젖 먹는 애기들에게 풍만한 젖이 되는 것이다. 또 신도들의 젖가슴은 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사랑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인자한 남편이 자기 아내의 애정을 기뻐하듯 신도들의 사랑을 즐거워하신다. 그러므로 크리스챤이 그리스도께 "사랑스러운 암 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 노루 같다"고 일컬어지는 것은 "그 가슴이 항상 그를 만족시켜 주는 까닭이다"(잠 5:19). 이것은 또한 크리스챤이 타인들에게 교훈을 주며 은혜를 전달시켜 준다는 사실도 내포되며 이런 행위는 기독교인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이다.

Ⅱ. "몰약의 산"으로 몰려가 거기서 자기 거처를 잡겠다고 하는 신랑의 결심이 나타나 있다(6절).

이 "몰약산"은 모리야 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모리야 산 위에는 성전이 지어져 있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매일 분향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교회의 아름다움을 매우 기뻐하시어 교회를 자기의 영원한 안식처로 택하셨다. 그는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물러갈 때까지" 거기에 거하실 것이다. 교회의 대표가 되는 그의 제자들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고별 약속은 이 말씀과 부합된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라도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노라." 하나님의 거룩한 의식이 올바르게 베풀어지는 곳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실 것이며 우리는 그 교회의 문에서 그를 만나뵙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이들은 이 말을 신부의 말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 여인이 이러한 말을 하게 된 동기를 두 가지로 생각하고 있다. 자기에게 던져진 찬사를 겸손하게도 부끄러워하여 칭찬의 말이 들리는 곳까지 빠져 나가려고 이런 발언을 했거나, 아니면 온갖 어려움 속에 있었기 때문에 성산(聖山)으로 항진(恒進)하기를 염원하였을지도 모른다. 즉 그 곳에 이르면 자신의 모든 곤경에 대한 적절한 구조와 충분한 구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서 그 곳에 닻을 내리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곳에서 정해진 시각에 "날이 새고 그림자가 물러 갈" 날만을 바라리라고 다짐했을 것이다. 성산은(어떤 이들이 관찰하는 대로) 본문에서 맛이 쓴 "몰약의 산"과 달콤한 맛의 "유향의 작은 산"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이렇게 대조되는 두 가지 표현은 우리가 슬퍼해야 하는 경우와 기뻐해야 할 경우를 다 가지기 때문이다. 회개는 쓰고도 달콤한 것이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는 몰약은 없고 모두가 유향뿐일 것이다. 기도는 향에 비유되며 그리스도께서는 기도하는 자기 백성을 만나셔서 그들을 축복하실 것이다.

Ⅲ. 그는 자기 신부의 아름다움에 대한 칭찬을 반복하고 있다(7절).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쁘구나."

그는 1절에서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라는 말을 했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한층 더 나아가 세부적으로 검토하면서 그는 창조시에 한 말씀처럼 "모든 것이 매우 선하다"란 선언을 한다. "내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쁘다. 너는 온몸이 다 아름답고. 네게는 그릇된 것이 없으며, 너는 네 안에 모든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너는 모든 면에서 전체가 다 성별되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다(고후 5:17). 새 얼굴과 새 이름이 생기게 될 뿐만 아니라 새 인간, 새 본성이 존재하게 된다. 네가 새로워지는 한 네게는 아무 흠이 없다."

영적 제사는 흠이 없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 하나님의 자녀라는 점(點)이 박혀 있는 것 외에는 "아무 흠(점)이 없으며" 표범의 반점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영광스러운 교회를 자기에게 나아오게 하실 것이며, 그렇게 될 때 교회는 전혀 "흠이 없고 주름도 없게" 될 것이다(엡 5:27).

 

4:2 없음.

 

4:3 없음.

 

4:4 없음.

 

4:5 없음.

 

4:6 없음.

 

4:7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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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찬미와 사랑 (아가 4:8-14)

이 말씀도 여전히 그리스도께서 자기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여기에서 그는 교회에게 대한 자기의 큰 존중심과 애정를 나타내고 있다. 교회의 아름다움과 훌륭함에 대한 그의 견해가 나오는가 하면 교회의 담화와 모임에 대한 그의 원망(願望)이나 기쁨도 나온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시며 교회가 비록 약점투성이일 때도 마치 흠도 없고 잘못도 없는 것처럼 그 교회를 기꺼워하신다.

이제 다음 사실을 살펴 보기로 하자.

Ⅰ. 그가 이 여인을 부르는 데 사용하는 사랑스런 명칭과 칭호. 이들 칭호들은 그녀에게 대한 자기 사랑을 나타내고 그녀에게 그 사실을 확인시켜 주며, 그녀로 하여금 자기를 사랑하게 하고 또 그 사랑을 고조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는 본문에서 두 번씩이나 그녀를 "나의 신부"라고 부르며(8, 11절) "나의 누이, 나의 신부"라고 부르는 것은 세 번이나 된다(9, 10, 12).

"그의 혼인일"에 대한 언급은 3장 11절에 나오는데 그런 언급이 있은 뒤에야 이 여인은 그의 "신부"라고 불리우며 그 이전에는 그런 칭호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 그리스도와 모든 참 신자 간에는 결혼의 언약이 맺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기 교회를 자기의 "신부"라고 부르시며 그가 그렇게 부르심으로써 교회는 그의 신부가 된다. "나는 너를 나의 영원한 아내로 삼았으니, 신랑이 신부를 기뻐하듯 네 하나님도 너를 기뻐하리라." 그는 이런 부부의 관계를 조금도 부끄러워하시지 않고 인정하신다. 마치 친절하고 자상한 남편처럼 그는 그녀에게 자애롭게 말하시며 교회를 자기 "신부"라고 부르신다. 따라서 교회도 그리스도께 신실해질 수밖에 없게 된다. 인간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단 한가지 관계만으로는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설명하기가 충분치 못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 외에도 이 모든 것은 영적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는 인간 사회에서는 양립하지 못할 두 가지 관계, 즉 "나의 누이, 나의 신부"로 이 여인을 인정하신다. 아브라함이 사라에 대해 "그 여인은 내 누이라"고 한 말은 사라를 자기 아내가 아니라고 부인한 말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는 마태복음 12장 50절에서 "누이요, 어머니라고 하신 것처럼" 교회가 "누이"이며 "신부"이다. 그가 그 여인을 "누이"라고 부른 것은 그가 자신의 성육하심으로 친히 우리의 본성을 입으셨다는 사실과 우리로 하여금 성별을 받음으로써 그의 본성의 분담자가 되게 하셨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그는 그 자신을 "육신의 몸"으로 옷 입히시고(히 2:14), 신도들을 자기 "영"으로 옷입히신다(고전 6:17). 따라서 신도들은 그의 "누이"가 된다. 그들은 그의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들이므로(고후 6:18) 그리스도의 "자매"가 된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분에게서 낳았다(히 2:11).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자기 누이로 인정하시고 사랑하신다.

Ⅱ. 충실한 신부로서 자기와 함께 가자고 하는 그의 은혜로운 부르심. 신실한 신부라면 자기 가족과 자기 아버지 집을 잊어야 하며 그에게 집착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남겨두고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upi tu caius, ibi ergo Caia─즉 "네가 가이오인 한 나는 가이야가 되겠노라."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8절).

1. 이것은 권고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어나서 함께 가자"(2:10, 11)고 하신 말씀과 마찬가지로 이것을 받아들인다.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자는 누구나 그에게 성스런 복종을 하고 그를 따라 함께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그에게 연합되었으므로 함께 걸어가야 한다. "나의 신부야! 나와 함께 가자"고 하시는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매일 들려 주시는 그의 명령이다. "아버지되신 하나님께 나와 같이 가자. 나와 함께 앞으로, 하늘쪽으로 나아가자. 나와 함께 전진하자. 나와 함께 위로 올라가자. 레바논에서부터, 아마나 꼭대기로부터, 사자굴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이 산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1) 외견상의 즐거운 장소로서. 레바논은 아름다운 산이라고 불리운다(신 3:25). 우리는 성서에서 "레바논의 영광"(사 35:2)과 레바논의 좋은 향기(호 14:6)에 대해 읽으며, "헤르몬"의 즐거운 "이슬"(시 133:3)과 "헤르몬의 기쁨"(시 89:12)에 대해서도 읽는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 나오는 다른 산들도 즐거운 곳일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자기 신부를 오라고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소리는 이 세상과 이 세상의 모든 산물과 그 모든 쾌락으로부터 나오라고 하는 부르심이며 모든 감각적 즐거움에 무관심하라는 소명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가고자 하는 자들은 누구나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현존하는 모든 사물에 대한 애착심을 없애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비록 그들이 "아마나 꼭대기"와 "스닐 꼭대기"에, 즉 이 세상의 최고 지점에 자리잡고 있거나 피조물이 줄 수 있는 최고의 만족을 즐기고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 모든 것에서 "떠나" 지상의 최고봉보다 더 높은 곳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때에 그들은 "하늘에서 그들의 교제"를 가질 수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거룩한 산 곧 "몰약의 산"으로 가기 위해(6절) 그 산들로부터 내려오라. 우리가 비록 이들 높은 곳에 거주하고 있는 동안에라도 우리는 이 산에서 내다보지 않으면 안 되며 그 산너머 위를 쳐다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우리 눈을 들어 산을 쳐다 보리이까?" 아닙니다. 우리의 도움은 여호와께로부터 오나이다(시 121:1, 2). 우리는 이들 산너머의 (이 산들은 눈에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 곧 "영원한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스라엘은 비스가산처럼 요단 저 편에 있는 "세일과 헤르몬산 꼭대기로부터"도 가나안 복지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우리는 비록 세상에 몸담고 있지만 보다나은 땅을 바라보고 기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실제로는 위험스러운 장소로서. 이 산들은 참으로 즐거운 곳이긴 하지만 그 안에는 "사자들의 굴"이 있다. 이 산들은 비록 "영화롭고 훌륭하게" 보이지만(시 76:4) 실은 "표범의 산"이요 약탈의 산이다. 저 "우는 사자" 같은 사탄은 "이 세상의 지배자"이다. 그는 이 세상 일 속에 잠복해 있으면서 삼킬 때를 기다린다. 이들 산 꼭대기에는 그 곳을 주거지로 삼고 있는 자들에 대한 위험스런 유혹이 많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들로부터 "나와서 나와 함께 가자." 우리 마음을 이 세상에 두지 말자. 그렇게 하면 그것들은 우리에게 아무 해도 끼칠 수 없을 것이다. 우상 숭배자들의 신전과 악한 자들의 모임(어떤 분들은 그렇게 이해한다)으로부터 "나와서 나와 함께 가자." "그들로부터 나오너라. 그리하여 너희는 별개로 구별되어라." 네 욕망의 지배로부터 "뛰쳐 나오너라," 정욕은 "사자"나 "표범" 처럼 우리에게 사납게 덮치어 우리를 흉포하게 만들려 한다.

2. 이것은 하나의 약속으로 간주할 수 있다.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사자굴로부터 나와 같이 가게 될 것이다. 즉 나는 네가 나와 함께 가도록 하겠다."

(1) "모든 지점으로부터, 곧 북쪽의 레바논과 서쪽의 아마나와 동쪽의 헤르몬과 남쪽의 세일로부터, 모든 지역으로부터 많은 자들이 교회의 산 식구로서 나에게로 돌아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앉게 될 것이다"(마 8:11; 사 49:11, 12 참조). 산 "꼭대기로부터" 온 일부 사람들, 곧 이 세상의 위대한 자들은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칠 것이다.

(2) 교회는 적당한 시기가 되면 박해자들에게서 해방될 것이다. 비록 현재는 "사자들 사이에서 기거"하고 있지만(시 57:4)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사자 소굴에서 구출하여 데려 가실 것이다.

Ⅲ. 그리스도가 자기 교회와 그의 모든 신자들에게서 얻는 큰 즐거움.

1.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기뻐하는 것은 "신부의 아름다움을 크게 사모하는"(시 45:11) 남편이 "자기를 위해 단장하고 있는"(계 21:2) 보기 좋은 신부를 기뻐하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랑의 표현도 여기에 나오는 말씀보다 더 정열적일 수는 없다. 이러한 표현으로 그리스도는 자기 교회에 대한 그 애정을 나타내고 계시다. 그러나 그의 사랑에 대한 저 큰 증거 곧 그가 자기 앞에 영광스런 교회를 세우시려고 그 교회를 위해 죽으신 것은 이 모든 표현으로써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것이다. 그토록 값비싸게 지불하고 사신 신부이기에 교회는 지극한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교회를 위해 지불하신 값만큼 교회에게는 높은 가치가 부여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이 양자가 다 우리를 놀라게 함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지식을 능가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높고 깊으시며 길고 넓으심"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사랑은 바로 그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시고" 우리에게 자기를 내어 주신 사랑이다.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1) 그는 자기 신부에게 얼마나 깊은 애정을 품고 있는가!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이 빼앗는다는 단어는 오직 여기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너는 내 마음을 황홀하게 만들었구나," 혹은 "너는 내 마음을 무력하게 만들었구나"를 뜻한다. 자기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놀라우신 사랑은 표현할 길이 없다. 이 표현 불가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하여 새로운 단어가 만들어 진 것이다. 인간은 사랑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잊고 한 가지에 마음을 빼앗기는 약한 존재이다. 이러한 인간 속에 있는 약한 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강한 사랑이 설명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이 있기 전에, "그의 기쁨이 인자들에게 있을" 때에(잠 8:30, 31) 택함받은 남은 무리에게 대해 품으셨던 사랑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처음 사랑은 그로 하여금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 오시도록 만들었고, 그토록 큰 비용을 지출하시면서 그들을 "찾으시며 구원하시게" 하였다. 그뿐 아니라 이 표현에는 그가 저들을 자기에게로 데려오셨을 때에 그들에게 대해 품었던 만족감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자기 교회에 있으며, 그것은 항상 그렇게 나타났었다. 그의 보화도 교회에 있다. 교회는 그의 "특유한 보물"이다(출 19:5). 그러므로 그의 마음도 거기에 있다.

레놀드 감독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비길 사랑이 어디에 있을까? 그가 우리를 위하여 영광 중에 있는 자신을 비우시고 모든 수치와 고통을 당하셨으니 그의 사랑은 그로 하여금 자기 자신까지도 마음에 두지 않도록 만드셨던 것이다. 우리를 향한 사랑의 상처는 그가 내세로부터 자신 안에 품고 계셨던 것이기에, 그는 십자가의 모든 상처와 치욕을 가볍게 보실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우리도 그를 사랑하도록 하자.



(2) 이처럼 그의 사랑을 기쁨으로 승화시키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1] 이 여인이 그에게 대해 품는 존경. "너는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으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그 눈은 "비둘기 눈"이요 맑고 정숙한 눈이다(이것은 1절에서 던진 찬사이다). 그녀는 이런 눈으로 한 번 쳐다 보았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놀라우리만치 즐거워하시는 자들은 자기들의 구주로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들이며, 신앙의 눈을 통하여 저희 애정을 어떤 적수가 아닌 그에게로 던져 보내는 자들이고 "그 눈을 항상 그에게로 향하고 있는" 자들이다. 그는 자기께로 향하는 한 영혼의 첫 눈길을 단 번에 알아채시고 자기 은총으로써 그를 맞아 주신다.

[2] 이 여인이 그에게서 받은 장식물. 즉 그것은 이 여인이 그에게 표하는 복종심이다. 그것은 "그 목의 구슬 한 꿰미"요, 사슬이 고리로 연결되듯 연결된 교회의 영혼을 부유하게 하는 은혜이다. 교회의 언어 행실은 그 자신뿐 아니라 교회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도(금 사슬이 상류 인사들에게 장식물이 되듯) 아름답게 단장시켜 주는 데 이것은 여러 은혜가 역사하여 이루는 일련의 구슬 꿰미이다. 동시에 그의 법이 명령하는 힘과 그의 사랑이 견제하는 힘에 전적으로 복종하는 것도 교회의 아름다움이다. 우리는 "우리 목의 줄"로 이 세상에 매어 있었다. 이 줄을 풀어 버리고(사 52:2) "우리 죄의 멍에"를 벗어버려야만 우리는 "금사슬" 같은 "사랑의 밧줄"로써 예수 그리스도께 매이게 된다. 우리 목은 즐겁고도 편안한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도록 권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의 설명대로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목의 금사슬"이 되는 참 지혜이기 때문이다(잠 1:9).

[3] 이 여인이 그에 대해 품는 애정.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 그 자체뿐만 아니라 그 모든 열매와 산물, 마음 속에서의 활동과 삶 속에서 이루어 내는 일까지도 모두 아름답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일은 신자에게 어찌 그리 어울리며 그리스도는 그 일로 얼마나 즐거움을 느끼시는지! 우리를 그리스도의 마음에 들도록 하는 데에는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 네 사랑은 포도주보다 낫고" 제주에서 여호와께 부어드린 모든 포도주보다도 훨씬 더 낫다. 따라서 포도에서 내는 열매는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한다"(삿 9:13). 이 여인은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1:2)라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하였는데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그 여인의 사랑에 대해 같은 말씀을 하신다. 그리스도를 칭찬함으로써 해가 될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그는 친절함에 있어서 자기 친구들보다 뒤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4] 이 여인이 뿌린 기름과 그로 인해 풍기는 향기. 즉 성령의 은사들과 은혜로 인한 그녀의 착한 행실은 "아름다운 냄새가 나는 향기요," "기뻐 받으실 만한 재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빌 4:18).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승하구나." 즉 시바 여왕이 약대에 싣고 와서 솔로몬에게 선사한 각종 향품(왕상 10:2)이나 황금 제단 위에서 매일 분향하기 위한 그 거룩한 향의 배합에 쓰이는 모든 향료보다 그녀의 기름의 향기는 더 낫다. 하나님께 대한 복종, 사랑은 제물이나 향료보다 그리스도를 한층 즐겁게 하는 것이 된다.

"이 여인의 의복의 향기"는 곧 교회가 사람들 앞에서 신앙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하여 행하는 가시적(可視的)고백이다. 이 일로 교회는 세상에 자기 존재를 드러내며,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께 있어서 "레바논의 향기"같이 매우 즐거운 일이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신부에게 그 자신의 의로움과 "성도들의 의로움"인 "흰 옷"을 입히시며(계 3:18; 19:8)여기에다 거룩한 기쁨과 위로로 향수를 뿌리시고 그 옷을 매우 기뻐하신다.



[5]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기도에 있어서나 인간들과의 대화에 있어서 이 여인이 하는 말(11절).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방울이 떨어지는구나." 네 입술에서는 달디 단 것이 떨어지며 그것도 자유롭고 풍부하게 떨어지는 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 하시는 것이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다면"(시 19:10)우리가 기도와 찬미로 그에게 드리는 말씀도 역시 그를 즐거우시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 네 목소리가 달구나." 만일 우리가 "마음" 속에 있는 "좋은 곳간에서 좋은 물건들을 꺼낸다"면, 만약 우리의 "언사가 언제나 은혜롭고" 우리의 "입술이 지식을 올바로 사용"하여 "지식을 발산"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보시기에 "꿀방울이 떨어지는 것" 같을 것이다. "네 혀 밑에는 꿀과 젖(가나안의 두 가지 주산물임)이 있다." 즉 네 마음 속에는 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사용을 위해서도 달콤한 음식을 마련해 두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달고도 유익한 자양물이 있으니 어린 애기들을 위한 우유와 성인들을 위한 꿀이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씀으로 가득찬 이들을 매우 기뻐하신다.

2. 즐거운 동산에서와 같이 기뻐하신다. 매우 큰 즐거움이 화원에서 얻는 기쁨에 비유되는 것은 당연하다. 순결하던 때의 아담이 누리던 행복은 그를 동산 즉 즐거움의 낙원(樂園)에 두신 것으로써 표현되고 있다. 이 비유는 12절부터 14절까지 계속된다. 교회가 "동산"에 적절히 비유된다. 이 동산은 다른 동산과 같이 그 안에 "샘"을 가지고 있다. 솔로몬이 친히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었을 때 그는 "못"을 팠었다(전 5, 6). 이 수도 사업으로 호기심을 만족시키고 기분 전환을 도모하기 위해서였을 뿐만 아니라 "동산에 물주는" 데에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에덴은 물이 잘 공급되던 곳이었다(창 2:10; 13:10).

이 동산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이 동산의 독특성. 이 동산은 "잠근 동산"이요 일반 땅으로부터 격리된 낙원이다.

그 곳은 하나님께만 전용되는 곳이다. 그는 "그것을 자신을 위해 따로 떼놓으셨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몫이요 그가 유업으로 받으시는 분깃이다.

그 곳은 비밀리에 잠겨 있다. 이와 같이 성도들은 하나님의 숨기운 자들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그들을 알지 못한다."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자기 동산에서 거니신다.

그 동산은 안전을 위해 잠겨 있다. 보호의 울타리가 그 주위를 두르고 있어서 모든 흑암의 권세가 발견할 수도 없고 틈을 뚫을 수도 없다.

하나님의 포도원에는 "망대가 세워져" 있다(사 5:2). 그 동산 주위에는 담이 있으니 그것은 곧 불의 담이다. 그 곳에는 우물과 샘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다. 그 우물은 "밖으로" 넘쳐서 흐르면서도(잠 5:16) 그 자체는 어떤 해로운 손길에 의하여 혼탁해지거나 오염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물쇠로 주의 깊게 채워져 있다. 신도의 영혼은 "잠근 동산"과 같다. 그들 안에 있는 은혜는 "마음에 숨기운 속 사람"에 있는 "덮은 우물"과 같다. 거기서 그리스도가 주시는 물은 "생명수의 샘물"이다(요 4:14; 7:38). 구약 교회는 의식 율법이란 간막이 벽으로 "잠긴 동산"이었다. 그 때의 성서는 "덮은 우물"이었고 "봉한 샘"이었다. 그것은 한 민족, 한 국가에 한정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분단의 벽이 허물어졌다. 복음은 모든 민족에게 선포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헬라인도 없고 유대인도 없게 되었다."



(2) 이 동산의 산물. 이 동산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모든 나무를 자라나게 하셨던" 에덴 동산(창 2:9)과 같다. "네 식물" 혹은 농원은 "여러 아름다운 과일과 함께 석류가 열리는 과수원이다(13절)." 그 과원은 "가시와 엉겅퀴만 잔뜩 자라는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 같지 아니하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열매들" 곧 "아름다운 열매들과 각종 유향목, 온갖 귀한 향품"이 나온다(14절). 이 과원에는 과일들이 매우 풍부하고 다양하게 산출되어 부족한 것이 없다. 이들은 그 동산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하며, 그 위대하신 소유주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거나 그에게 유용하도록 한다. 이 곳에 있는 모든 것은 그 종류 중 최상품이다. 그 동산의 "귀한 향품"은 모든 꽃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보다 그 향기가 더 오래 계속되므로 한층 더 귀중하였다. 솔로몬은 다른 여러 가지 자연 과학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식물학에도 일가견을 이룬 대가였다. 그는 초목 일반에 대해 논하였었는데(왕상 4:33) 아마 여기에 구체적으로 나온 여러 실과의 특수 성질은 언급한 것처럼 보인다. 이로 인해 그것들은 그가 암시하는 목적에 매우 부합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전반적으로 관찰하고 만족을 얻어야 할 것은 교회 안의 성도들과 성도들 안의 은혜를 바로 이 "과수원"들과 "향품"에 비유하는 것이 매우 적절하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것들은 심은 것이지 저절로 자라난 것이 아니다.

"의로움의 나무"는 "여호와께서 심으신 것"이다(사 61:3). 은혜는 썩지 않는 씨앗에서 움터 나온다.



[2] 그것들은 귀중하며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시온의 귀한 아들들"과 그들의 "귀한 믿음"과 같은 것이다. 그것들은 명성의 식물"이다.

[3] 그것들은 하나님께나 사람에게나 다 즐거움을 주고 향기로운 냄새를 풍긴다. 그들은 강한 향료처럼 향기를 발산한다.

[4] 그것들은 유익하며 매우 쓸모가 있다. 성도들은 이 땅의 축복이며 그들의 은혜는 그들의 재물이다. 그들은 향료를 가지고 장사하는 동방의 상인들처럼 은혜를 팔러 다닌다.

[5] 그것들은 영구적이며, 꽃들은 시들어서 아무런 유익이 없을 때에도 그것들은 유익한 목적을 위해 보존되어 있을 것이다. 은혜는 익어서 영광에 이르게 되고 영영토록 존속할 것이다.

 

4:9 없음.

 

4:10 없음.

 

4:11 없음.

 

4:12 없음.

 

4:13 없음.

 

4:14 없음.

 

4:15

그리스도의 찬미에 대한 교회의 응답 (아가 4:15,16)

이 말씀은 신부의 말인 듯이 보인다. 신랑되신 그리스도는 교회에 대하여 아름답고 열매 많은 동산이라고 칭찬하셨는데 신부인 교회는 이 칭찬에 응답하고 있다.

교회는 과연 동산인가?

Ⅰ. 교회는 이 동산에 열매가 많이 맺히게 해 주시는 그리스도께 대해 의존하고 있음을 감사히 여기고 있다. 교회는 "동산의 샘"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주목한다(15절). 그는 저들을 심으시고 존재하도록 하신 창건자일 뿐만 아니라 저들의 샘이 되기도 하신다. 그는 저들에게 물을 대주시고 그들은 그분 덕에 존속하며 행복하게 산다. 그들은 그의 꾸준한 급수만 없다면 곧 메마르고 황무한 광야로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이므로 이 여인은 자기가 많은 열매를 맺게 된 데 대한 영광을 모두 그에게 드린다. "동산의 샘이여! 모든 선의 근원이요 모든 은혜의 샘이신 그대여! 나를 저버리지 마소서." 신자는 "오! 시온이여!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도다"(시 87:7)고 말하는가? 교회는 그리스도께 찬미를 드리며 이르기를 "나의 모든 근원은 당신께 있나이다"고 한다. 그는 "생수의 근원"(렘 2:13)이요 그 샘으로부터 "레바논의 시냇물"이 흘러나오며 레바논 산 기슭에서 발원하는 요단 강도 흘러나온다. 그는 또한 "전의 문지방 밑에서부터" 흘러 나오는 지성소의 물이시다(겔 47:1). 그리스도께 동산된 자들은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샘 근원으로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그로부터 충만한 것을 받으며 그들의 심령이 "물댄 동산"(렘 31:12) 같음은 그의 덕분이다.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도성"은 이 샘에서 흘러나오는 "강"으로 인하여 "기뻐하게" 된다(시 46:4). 그리고 새 예루살렘에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 나오는 순수한 생명수의 강"이 있다(계 22:1).

Ⅱ. 이 여인은 복되신 성령께서 이 동산을 향기롭게 해 주시기를 탄원하고 있다(16절). "북풍아! 일어나라. 너 남풍아! 오라."

1. 이것은 전체 교회를 위한 기도이다. 교회가 번영의 상태를 구가할 수 있도록 성령을 풍성하게 부어주시기를 구하는 기도이다. 목회자들의 여러 가지 은사는 "향품"이다. 성령이 쏟아질 때 이러한 것들이 분출되며 그럴 때에는 "황무지가 열매 많이 맺는 밭으로 된다"(사 32:15). 이 기도는 "오순절"에(행 2:1) "강한 바람"과 함께 성령이 쏟아져 내린 일로 응답을 얻었다(행 2:1). 그러자 이전에는 모여 있던 사도들이 흘러 나가게 되었고, 이는 하나님께 아름다운 향기가 되었다(고후 2:15).

2. 또한 개개의 신자들을 위한 기도이다.

(1) 거룩하게 구별된 영혼은 동산과 같으며 주 여호와의 동산과 같아서 그를 위해 잠겨 있다.

(2) 영혼 속에서 역사하는 은혜는 이들 동산 안의 향품과 같아서 그들 안에서 가치있고 유용한 것이 된다.

(3) 은혜의 향기가 경건하고 독실한 사랑과 거룩하고도 은혜로운 행동으로 날리어서 그로써 우리가 하나님을 존귀케 하며 우리 신앙을 단장하고 선한 사람들에게 감사할 만한 일을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4) 영혼에게 역사하시는 복되신 성령은 "불고 싶은 대로 불며" 여러 방향으로부터 불어 오는 "북풍이나 남풍"과 같다(요 3:8). 확신의 북풍이 있는가 하면 위로의 남풍이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다 바람처럼 "하나님의 곳간에서" 나와서 "그의 말씀을 성취시킨다."

(5) 은혜의 향기가 날리는 것은 성령의 강풍에 달려 있다. 성령께서는 선한 애정을 일깨우며 우리 안에 역사하셔서 선한 것을 바라도록 하시고 그것을 행하도록 하신다. 우리를 통하여 그의 지식의 향기를 밝히 나타내도록 하는 분도 바로 그이시다.

(6)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의 영이 그의 소생케 하시는 영향력을 행사해 주시도록 기다려야 하며 그런 일들을 위해 기도드려야 하고 우리의 영혼을 그 밑에 종속시켜야 마땅하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영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이에 대해 우리가 찾고 탐구하기를 바라신다.

Ⅲ. 이 여인(교회)은 그 동산이 제공할 수 있는 최상의 향연으로 그리스도를 초대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의 동산에 들어가서 그의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원하노라. 그가 이 동산이 산출하는 모든 산물의 영예를 소유하게 하며(그가 이렇게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가 이들을 기꺼이 받으시는 데서 내가 위로를 얻게 해 주소서. 왜냐하면 이것은 그러한 것들이 이용될 수 있는 것 중에 최상의 것이되는 까닭입니다."

여기서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이 여인은 그것을 "그의" 동산이라 칭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 시집간 자들은 아무 것도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부르지 아니하며, 단지 자기들이 그에게 바친 것이 그를 위해 사용되어지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그의 동산이라고 부르기 알맞은 때는 곧 향기가 날리는 때이며, 그때까지는 그의 동산이라고 칭할 수 없다. 이 동산의 과일은 그의 아름다운 실과이다. 이 과수들을 심고 물주며 풍작하게 하신 이가 바로 그분이신 까닭이다. 이미 그리스도 자신의 소유인 동산에 그를 초대하면서 그의 손에서 우리가 무슨 상을 받으려 하겠는가?

2. 이 여인은 그가 이 동산을 방문하고 거기서 산출된 것을 열납(悅納)해 주시도록 간청하고 있다. 신자는 자기 영혼이 사랑하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와 주시지 않으시고 그 동산에 맺힌 열매의 기쁨을 누리시지도 아니 하신다면 그 동산에서 아무런 즐거움을 얻지 못한다. 만약 그들이 이모저모로 그리스도의 영광에 이바지하지도 않고 또 그리스도께서도 자기가 그들에게 부여하신 모든 것을 잘 하신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실 때는 그들이 이 동산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은 거의 없는 것이다.

 

4:16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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