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아가 0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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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사랑과 찬양 (아가 2:3-7)

여기에 나오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신부는 자기가 사랑하는 자를 찬양하며 그를 딴 모든 자보다 우위에 둔다. "수풀 가운데 사과 나무 같구나."

이 나무는 딴 나무들 처럼 그렇게 높이 자라지도 않고 넓게 퍼지지도 않지만 사람한테는 유용하고 쓸모가 있다. 딴 나무들은 거의 쓸모가 없으며 백향목 같은 나무조차도 벌목되어 재목이 되기까지는 별반 소용이 없는 반면에 이 나무는 맛있고도 유익한 열매를 맺는다.

"남자들(혹은 "아들들")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이와 같구나." 이와 같이 그는 그 모든 자들보다 빼어나시니─즉 하나님의 모든 "아들들" 즉 천사들보다 월등하시며(천사들에게는 예정되지 않는 존귀가 그에게는 베풀어졌다. 히 1:4), 인간의 모든 "아들들"보다 월등하시다. 그는 모든 인간보다 "더 아름다우시며" 인간들 중에서 가장 빼어난 자보다 더 훌륭하시다(시 45:2). 너희가 너의 마음에 드는 어떤 피조물을 지적하든지 간에 그리스도께서는 그 모든 것들보다 빼어난 분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세상은 영혼에 대하여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와 같으나 그리스도는 많은 열매를 맺는 나무이다.

Ⅱ. 이 여인은 자기가 그와 교제하는 중에 얻은 풍족한 위로를 기억하고 있다. 이 여인은 목자들이 때로 나무 그늘 밑에 앉아 휴식하며 서로 담소하듯 그의 곁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다." 교회가 주 예수 가까이 앉음으로써 발견하는 혜택은 두 가지이다.

1. 원기를 회복시켜 주는 그늘로서의 혜택이 있다. "내가 그의 그늘 밑에 앉음"은 그를 피난처로 삼아 찌는 듯한 태양의 열기로부터 보호받고 시원함을 얻으며 다소의 휴식을 취하고자 함이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큰 나무 "그늘 같으며" "곤비한 땅의 큰 바위 그늘 같다"(사 32:2; 25:4). 불쌍한 영혼이 죄의 확신과 율법의 공포로 인해 다윗처럼 바싹 타들어 갈 때(시 32:4), 또 기진맥진 하여 로뎀 나무 아래 앉았던 엘리야처럼(왕상 19:4) 이 세상 환란에 지칠 때 그들은 그리스도에게서 그 그늘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메마른 불쌍한 영혼은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의 은혜와 위로 속에서 또 불쌍한 죄인을 떠맡으시는 그의 사랑 안에서 이 그늘을 발견하게 되며, 이 그늘은 저들을 소생시켜 주고 그들이 약해지지 않도록 해 준다. "피곤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휴식"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그늘"을 지나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며 우리는 이 "그늘 아래 앉아야"만 한다(여기에 내가 거할 것은 내가 그것을 사모하였음이라). 그리고 우리는 이 그늘이 요나의 박넝쿨처럼 곧 시들어버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더위를 입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나무와 같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생명의 나무의 잎사귀는 더위를 피하는 그늘이 되어줄 뿐만 아니라 만민들의 병치료에도 소용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기쁨으로 이 그늘 아래 앉지" 않으면 안 되며 그 보호를 전적으로 신뢰해야 하고(삿 9:15 처럼) 그 휴식에 매우 만족해야 한다.

2. 그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맛있고 자양분 있는 음식물이 있다. 이 나무는 "그 그늘 밑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실과를 떨어뜨려 준다. 그들은 그 열매를 마음대로 먹으며, 그 실과가 타인들에게는 어떠하든지 간에 자기들의 "입에는 달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신자들은 주 예수님의 "은혜로우심"을 맛보았다(벧전 2:3). 그의 "열매"는 모든 값진 새 언약의 특전이며 그의 피로써 얻으신 것이요 그의 성령으로 전달해 주시는 것이다. 약속은 신자들에게는 단것이며 교훈도 또한 그러하다.

"나는 속 사람을 따라 하나님의 법을 기뻐하노라." 용서해 주시는 것도 달며 양심의 평안도 달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나 성령의 기쁨이나 영생에 대한 소망도 달며, 현재의 영생에 대한 전조도 달다. 영적인 감각을 활동시키는 이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다 단 것이다. 만약 우리 입에서 죄악의 쾌락에 대한 미각을 제하여 버린다면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 입에 달 것"이며 "꿀과 꿀통보다 더 달 것"이다.

Ⅲ. 이 여인은 자기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에서 얻은 은총과 위로를 감사하고 있다(4절). "내가 사과나무 아래 앉아 기뻐하였고 그는 나를 영접하셨다. 더욱이 그는 나에게 자기와 보다 친밀한 교제를 하도록 재촉하셨다." "주 여호와께 복받은 자여! 들어오라. 어찌하여 밖에 섰느냐?" "그는 나를 인도하여 잔치집(포도주의 집이라고도 해석됨)에 들어갔다."

즉 이 잔치집은 그가 자기의 특별한 손들을 접대하는 곳으로, 그는 그들을 낮은 정도의 안락에서 고급의 안락으로 "사과나무"의 열매에서 보다 풍부한 포도나무 열매로 이끄는 것이다. 자기가 "가진" 신적 기쁨을 귀하게 여기는 "자에게는 더욱 많은 것이 주어질 것이다." 랍비 중 한 사람은 "잔치집"이란 말을 "율법의 해석이 행해진 회중의 장막"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확실하게 이 말씀을 기독교의 집회에다 적용할 수 있다. 크리스찬의 집회에서는 복음이 선포되며 복음의 의식이 거행되는데 바로 저 "포도주의 잔치"인 주의 성찬만은 특히 그러하다. 특별히 이 잔치가 복음 교회의 성례와 부합되는 것은 이 의식에서 내면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점 때문이다. 여기에서 다음 사항을 살펴보자.

1. 이 여인은 어떻게 인도되었는가. "그가 나를 인도하여, 즉 그가 내 안에 역사하사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불러 일으키시고, 나를 도와 나의 낙심을 극복하게 하시며 내 손을 붙잡고 안내하고 인도하셨다.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담대히 아버지되신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셨다"(엡 2:18).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시고 우리 안에 새로운 생명의 원천을 열어 주심으로써 우리를 인도해 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결코 잔치집에 들어갈 수도 신령한 즐거움을 알 수도 없었을 것이다.

2. 이 여인은 어떤 향응을 받는가. "그의 사랑은 내 위에 기로구나." 즉 "그는" 내게 대한 승리자(trinmph over) 로서가 아니라 나의 승리를 기뻐하는(triumph in)자로서 내 머리 위에 나부끼는 깃발로 "나를 인도해" 들이셨다. 또 그는 언제나 우리를 자기와 함께 그리고 자기 안에서 승리하게 하신다(고후 2:14).

복음은 "깃발"이나 "기호"에 비유된다(사 11:12). 그리고 이 깃발에 나타난 것, 즉 황금 글자로 깃발에 씌여진 "사랑"이며, 피로 씌어진 글자도 "사랑"이다. 그리고 이 깃발은 곧 그 "잔치집"에서 내어 놓는 대접이다. 그리스도는 "우리 구원의 대장"이시며 그는 자기의 모든 병사들을 사랑의 깃발 아래로 불러 모으신다. 그들은 그 깃발을 중심으로 모인다. 그들은 끊임없이 이 깃발에 시선을 보내고 있어야 하며 그것에 의해 활력을 얻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들을 "속박하여" 대장부답게 싸우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성읍을 빼앗으면 정복자는 자기의 군기를 새 점령지에 세운다. "그는 나를 그의 사랑으로 정복하셨고 인자하심으로써 나를 압도해 버리셨으니 그것이 곧 내 위에 기로다." 이와 같이 이 여인은 이전에 자신이 경험하였던 사실을 말하고 있고, 이제 그 체험을 기쁨으로 회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먹는 빵을 잊어서는 안 되며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만나로 먹여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기억해야만 하는 것이다.

Ⅳ. 이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강렬한 애정과 가장 정열적인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5절).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으니, 이는 그 사랑에 의해 압도되고 그 힘을 못견디어 냈기 때문이다." 다윗은 시편 110편에서 이것을 설명하고 있다. "주의 규례를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오며(20절),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내 영혼이 피곤하오니(81절), 주의 법도와 주의 구원을 확신하려는 노력과 그것이 부족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기진맥진하였나이다." 이 여인은 아마 그 때에 자기의 사랑하는 이로부터 떨어져 있으면서 그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거리와 그의 지체 때문에 슬픔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이 세상의 사랑에 대한 과식으로 탈이 나는 때보다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으로 인하여 병 나는 것이 영혼에게는 얼마나 더 나은 것인지 모른다. 이 여인은 강심제를 달라고 요구한다.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도우라. 혹은 기름이나 꽃, 그 외에 기운나게 하는 것이면 어떤 것으로든 내 힘을 도우라.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즉 사과나무 되신 그리스도의 열매로(3절) 나를 시원하게 하며, 그의 공로와 중보로 나를 위안시키고 내 영혼에 대한 그의 사랑의 감각으로 나를 위로케 하라."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으로 병이 난" 자들은 신령한 위로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도 영적 양식이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Ⅴ. 그녀는 기진맥진해 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출됨으로써 신적 은혜의 효능과 따사로움을 체험하게 된다(6절). 그는 비록 물러난 듯이 보였었지만 이런 때에는 조속한 도움을 주셨다.

1. 사랑에 병든 영혼을 부지시키고 혼절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머리를 떠받쳐 베개처럼 편히 눕게 하신다." 다윗은 "자기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랐을" 때(시 63:8) 하나님의 손이 자기를 붙들어 주시는 것을 경험하였고, 욥은 사면초가의 궁지에서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힘을 넣어 주신다"는 것을 발견하였다(욥 23:6). "모든 성도는 다 그의 수중에 있으며" 그의 손은 저들의 아픈 머리를 부드럽게 잡아 주신다.

2. 사랑에 병든 영혼을 격려하여 자기가 돌아 올 때까지 계속 기다리도록 하기 위하여. "이러는 중에 그는 오른손으로 나를 안으시는구나. 그럼으로써 그는 내게 대한 사랑의 확증을 명백하게 보여 주신다." 신자들의 모든 힘과 위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왼 손이 받쳐주시고 오른손이 안아 주시는 데서 나온다.

Ⅵ. 이 여인은 자기의 사랑하는 자가 이처럼 자기에게 가까이 계심을 보고 그와의 교제가 방해를 받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다(7절). "예루살렘 여자(딸)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우리 모두의 어머니인 예루살렘이 그의 모든 딸들에게, 교회가 그 모든 지체들에게, 믿는 영혼이 자기의 모든 능력과 기능에게, 신부가 자기와 자기 주위의 모든 자에게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도록" 부탁하고 있으니 이는 그녀가 그의 팔에 안겨 있었듯이(6절), 그가 그녀의 팔에서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노루와 들사슴으로" 그들에게 이 부탁을 하고 있다. 즉 "사랑스러운 사슴과 즐거운 노루처럼" 그들이 보기에 사랑스럽고 그들에게 소중한 모든 것으로써 부탁한다. "내 사랑은 그들 사슴과 노루가 너희에게 소중한 것보다 나에게는 더 소중하며, 매우 작은 소리에도 놀라는 노루나 사슴처럼 내 사랑도 작은 소리에 방해받을 것이다.

1.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감미롭고 그의 사랑은 인식의 범위 안에 밝히 계시되고 있다. 이 교제와 사랑을 경험하는 이들이라면 이 복된 장면과 이 복된 방문이 계속되기를 소원하지 않을 수 없다. 베드로는 거룩한 변화산상에 초막을 지었으면 하고 원하였던 것이다(마 17:4).

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원하실 때에는 이런 비상한 자기 전달도 회수해 가신다. 그는 자유로운 행위자이시며 성령은 "바람처럼" 원하시는 때에 "원하는 곳으로 분다." 그러므로 그가 원하시는 일이라면 우리는 묵묵히 따라가야 마땅한 것이다.

3. 그러나 우리는 그를 노엽게 하여 물러가시도록 만들거나 얼굴을 숨기시게 할 만한 일을 행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혼을 주의깊게 감시하여 그의 선하신 성령을 비탄에 잠기게 할 그 어떤 생각도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위로를 얻고 있는 이들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그 위로를 잃을까봐 두려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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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교회간의 사랑 (아가 2:8-13)

교회는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때 맞추어 소생한 뒤 장차 있을 그리스도와의 계속적인 교제를 생각하고 그 기쁨에 몸둘 바를 몰라 한다.

Ⅰ. 이 여인은 그가 다가옴을 기뻐하고 있다(8절).

1. 이 여인은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있다. "이것은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구나. 그가 오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목소리구나." 그리스도의 양떼 중 한 마리처럼 이 여인은 그를 보기도 전에 "그 목소리를 알며" "딴 사람의 목소리"와 쉽사리 구별할 줄 안다(요 10:4, 5).

또 이 여인은 신랑의 진실한 친구처럼 "신랑의 목소리를 듣고 크게 기뻐한다"(요 3:29). 이 여인은 얼마나 의기양양한 태도로 부르짖으며 얼마나 기쁨에 넘쳐 소리치는가를 보라. "이것은 나의 사랑하는자의 목소리로구나 이것은 다른 어떤 자의 목소리일 리가 없다. 그 이외의 어느 누가 이처럼 내 가슴에 울리는 말을 하며 내 가슴을 불타오르게 할 수 있으랴."

2. 이 여인은 그가 오심을 보며 교회는 "우리 하나님, 우리 왕"의 행차하심을 본다(시 68:24). "보라, 그가 오시느니라." 이 말씀은 구약 성도들이 그리스도께서 육을 입고 오시는 것에 대해 전망하였던 사실에다 적용하는 것이 매우 타당하다. "아브라함"은 멀리서 "자기 날을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시간이 가까이 오면 올수록 메시야 도래에 대한 사실은 더욱 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신앙의 눈으로 이스라엘의 위로를 고대하던 자들은 그가 오시는 것을 보았고 그 광경에 환희작약하였다. "보라! 그가 오시느니라." 그들은 그가 "보라! 내가 오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으며(시 40:7) 그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여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약속하셨던 대로 "오시는구나."

(1) 그는 즐거이 그리고 매우 민첩하게 오고 있다. 그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이" 달리며 넘어서 온다(9절). 이것은 자기가 하는 일을 즐거워하는 자의 태도이며, 자기 사업에 마음을 쏟고 인간의 자손과 함께 기뻐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그는 피로 세례를 받으러 오셨다. 그 피의 세례를 "다 이루시기까지 그의 답답함은 어떠 했겠는가!"(눅 12:50)

(2) 그는 도중에 가로 놓인 온갖 어려움을 경시하고 그것을 극복하면서 온다. 그는 "산에서 달리고(뛰어 넘는다는 뜻도 있음:역주)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 그의 전도(前途)에는 낙심케 할 일들이 많으나 그는 이들을 개의치 않고 질주한다. 율법의 저주와 십자가 상의 죽음을 통과하지 않으면 알 될 난관이었고, 모든 흑암 권세들은 그가 맞부딪쳐 싸우지 않으면 아니 될 강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단호한 사랑 앞에는 이러한 태산준령도 평지와 다름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구원을 베푸는 곳이지만 언제고 간에 이에는 반대가 따른다. 그러나 그 반대가 무엇이든 간에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분쇄해 버리시며 극복하실 것이다.

(3) 그는 "노루나 어린 사슴처럼" 신속하게 온다. 그들은 그가 도래하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하루가 일년이고 일각(一刻)이 여삼추(如三秋)이듯이] 생각하였으나 실제로는 그는 급히 오셨다. 이제나 그제나 마찬가지인 것은 "정녕 그가 속히 오시리라"는 것이다. "오실 그분은 꼭 오실 것이며, 그는 지체하지 않으시리라." 그가 자기 백성을 건지시기 위해 오시는 때에는 "구름을 타고 오신다." 그는 결코 자기 시간을 넘기시면서까지 머무르지 않으실 터이니 그 시간은 최상의 시간이겠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개개의 신자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가지는 위로를 거두어 들이시고 그들을 버리시는 것처럼 보이실 때조차 그것은 단지 잠시 동안만의 일이며 그가 곧 영원한 자비로써 돌아오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된다.

Ⅱ. 이 여인은 그를 흘낏 보았고 그의 은총을 순간적으로 보았을 뿐인데도 그것을 즐거워한다. "그는 우리의 벽 뒤에 서 있다. 나는 그가 거기에 있음을 안다. 왜냐하면 그는 때때로 창으로 바라보거나 들여다 보며 창살 틈으로 나타나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이 바로 구약교회가 메시야의 도래를 고대하는 동안 겪은 상황이었다. 의식 율법은 "간막이 벽"(엡 2:14)이나 "수건"(고후 3:13)이라고 칭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 벽 뒤에서 계셨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 가까이 그를 모시고 있었다. 그들은 비록 그를 똑똑하게 볼 수는 없었지만 여하튼 그를 자기들과 함께 소유하고 있었다. 실체이신 그는 그림자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아니하셨다(골 2:17). 그들은 그가 의식적(儀式的)제도라는 창을 통해 들여다 보시며 그 창살틈을 통해 웃고 계심을 보았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희생 제사와 정죄의식(罪儀式)가운데에서 자기를 그들에게 드러내셨으며 자기의 은혜에 대한 암시와 간절하신 증거를 그들에게 주셨으니 이는 두 가지를 위해서이다. 즉 자기의 도래에 대한 약속과 자기의 도래를 동경하는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시기 위해서 자신을 드러내셨다.

이러한 현재의 상태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형편과 비교된다. 우리가 지금은 "그를 거울을 통해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보며"(신체는 우리와 그 사이의 벽이며 우리는 때때로 이 벽의 창문을 통해 그를 바라 본다), 우리가 희망하는 대로 당장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그를 보지는 못한다. 성찬에서 그리스도는 우리 가까이 계시나 그가 계신 곳은 외적 상징인 "벽 뒤"이며 그가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은 바로 이 "창살 틈"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우리는 곧 "그를 원래의 모습대로 보게" 될 것이다.

혹자는 이것을 의심받고 있는 신자의 상태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아니 하시지만 그래도 멀리 계신 것은 아니다(욥 34:14 참조, 그리고 욥 23:8-10 비교). 이 여인은 자기와 자기가 사랑하는 자 사이에 개재되어 있는 벽을 "우리의 벽"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그 벽이 죄인 까닭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분리시키는 벽은 죄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게다가 그 벽은 우리 자신이 세운 것이다(사 59:1). 그는 이 벽 뒤에 서서 우리가 회개하는 즉시 "은혜를 주시고자 기다리시며" 우리와 기꺼이 화해하시려고 하신다. 그 곳에서 "그는 창으로 들여다 보시며" 우리 마음의 창틀을 살피시고 우리 영혼의 일을 관찰하신다. 그는 창문을 바라보고 계시며 그들에게 다소 위로를 베푸심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는데 이는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귀환을 끊임없이 희망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Ⅲ. 이 여인은 그의 은혜스런 초대를 되풀이하여 언급하고 있다(10 - 13).

이 여인은 그 사랑하는 자가 자신에게 한 말씀을 기억하고 있는데 이는 그 말씀이 자기에게 매우 즐겁고도 강한 인상을 남겼던 까닭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소생케 하는 말씀을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녀가 이 말씀을 하는 것은 그가 이 여인의 영혼에 대해 말씀하신 것과 "이 여인의 영혼을 위해 행하신 일을" 고함으로써(시 66:16) 타인들을 격려하기 위해서이다.

1. 그는 이 여인을 나의 사랑, 나의 어여뿐 자라고 부르고 있다. 이 여인이 타인들에게는 무엇으로 비치던 간에 그에게는 용납할 만한 여인이요 그가 보기에는 귀여운 여인이었다.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사랑하는 자로 받아들이는 자들은 그리스도께도 사랑받는 자로 인정을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께 드려진 사랑은 절대로 상실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신도들에게 사랑을 표현하심으로써 그들에게 자기를 따르도록 초대하며 격려해 주신다.

2. 그는 이 여인에게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부른다(10, 13). 그가 반복해서 촉구하는 데에서 이 여인에게 주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우리는 종종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가자고 부르심을 받을 필요가 있다.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반면에 이것은 그가 열심히 촉구하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영혼은 귀중하다. 그는 이 고귀한 영혼의 복지를 위해 그의 마음을 송두리째 바쳐서 그들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간곡히 그리고 강력하게 권하고 있다.

3. 그는 함께 가자는 한 가지 이유로서 봄철이 돌아와 날씨가 화창함을 들고 있다.

(1) 이 계절은 아주 다양한 표현으로 우아하게 묘사되어 있다.

[1] "겨울도 지났다." 겨울은 어둡고 추운 불모의 계절이다. 어렵고도 긴 겨울이 드디어 지나가 버렸다. 그와 같은 겨울은 언제나 계속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만약에 봄이 겨울 다음에 오지 않고 딴 어느 계절에 접속된다고 한다면 그 봄은 현재 만큼 즐거운 계절은 되지 못할 것이다. 즉 겨울은 봄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는 계절이다(전 7:14). 하늘의 얼굴이나 땅의 표면도 언제든지 똑같은 것은 아니다. 끊임없는 변천을 숙명으로 하여 날마다, 해마다 변동하는 것이다. "겨울은 지났으나" 그렇다고 영원히 지나가 버린 것은 아니다. 그 겨울은 다시 돌아올 것이며 우리는 그 겨울을 위해 여름철에 대비해 놓지 않으면 안 된다(잠 6:6, 8). 우리는 마치 울기만 하고 기뻐해 보지 못했던 사람처럼 겨울에는 슬퍼해야만 하고 여름에는 기쁘기만 했던 자인양 기뻐해야만 하는 것이니 이는 겨울과 여름, 이 양자가 다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2] "비도 그쳤다." 이 비는 찬 비요, 폭풍이 수반된 겨울비다. 이제 그 비가 그치고 "풀 위에 내리는 이슬같이 단비가 내린다." 세상을 다 잠기게 하였던 비도 드디어 그치고(창 8:1-3)하나님께서는 그 이상 다시는 물로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것은 은혜의 언약에 대한 상징이요 예표였다(사 54:9).

[3] "지면에는 꽃이 핀다." 겨울 내내 그들은 죽어서 뿌리속에 파묻혀 있었고 다시 꽃이 피어날 것 같은 징조는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봄이 되자 그들은 소생하여 놀라우리만치 가지 가지의 모습을 드러내며 신록을 자랑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꽃들을 만들어 내는 이슬처럼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미 5:7). 그것들은 지면에 나타나지만(핀다는 말의 뜻은 원래 나타난다는 것이다. 역주) 곧 사라질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인생은 "들의 꽃"과 같다(욥 14:2).

[4] "새가 노래할 때에 이르렀다." 작은 새들은 겨우내 그들이 칩거하는 곳에 숨어 있으면서 거의 죽은 것 같은 생활을 하다가, 봄이 돌아오면 겨울에 당하던 모든 재난을 깨끗이 잊어버리고 있는 재주를 다해 창조주께 대한 찬미의 노래를 부른다. 먹을 것이 없어서 우는 새들을 알아보시는 분께서(시 147:9)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자들을(시 104:12) 눈여겨 보시지 않을 리는 없다. 새들의 노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인색한 우리를 수치스럽게 한다. 우리는 새보다 더 잘 먹고(마 6:26) 더 좋은 교육을 받으며(욥 35:11) "많은 참새들보다 더 귀한 가치"가 있으면서도 그를 찬미하지 않을 때가 많은 것이다. 새들은 크게 보살펴 주는 일이 없는 채 살아가지만(마 6:26) 그래도 그것들은 우리가 불평하는 동안에도 노래를 부른다.

[5]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이 새는 철새 중 한 가지로 예레미야서 8장 7절에 언급되기를 돌아올 때와 노래하는 때를 지키는 새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 새는 "여호와의 심판을 알지 못하고" 그 시기를 이해하지도 못하며, "때를 따라 아름다운" 것을 행하지도 못하고 때를 알리는 노래도 부를 줄 모르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6] "무화과 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다." 이로써 "우리는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안다"(마 24:32). 이 때가 되면 푸른 무화과 열매가 익어서 사용하기에 알맞을 만큼 된다. 그리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대지는 "꽃"을 피울 뿐만 아니라(12절) "열매"도 맺는다. 열매 자체는 물론 유용하나 그 향기에 있어서도 단지 관상용의 즐거움밖에 되지 않는 꽃의 향기보다 훨씬 나은 것이다. 뱀은 소위 포도나무 향기에 도망을 간다고들 말하는데 우리는 옛뱀이 누구이며 참 포도나무가 누구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2) 이상과 같이 돌아오는 봄에 대한 묘사는 그리스도와 함께 가야할 이유로서 열거된 것인데 이것은 다음 사실에 적용될 수 있다.

[1] 구약의 율법이 지배하는 방안에 복음을 들여오는 것.

교회로 보아 구약 기간은 겨울철이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차가 왔던 것을 따뜻하게 하며 이전에는 죽고 열매 맺지 못하던 것을 생산적인 것으로 만든다. 복음은 이르는 곳마다 아름다움과 영광을 입혀 주며(고후 3:7, 8)기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봄철이 즐거운 때이듯 복음의 때도 그렇다. Aspice ventutro loetentur ut omnia seclo 즉 "동터오는 시대가 불어 넣어 주는 기쁨이 어떠한가 보라!" 로마의 시인 버질(virgil)은 예언집에서 그와 같이 말하였는데 이는 아마 그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그 때에 그리스도의 왕국 건립에 대하여 보다 많은 시사를 던져 주는 말일 것이다(시편 96:11 참조). "그런즉 일어나서" 이 봄철을 마음껏 활용하라. 이 세상과 육신으로부터 "벗어나" "그리스도와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자(고전 1:9).



[2] 혹심한 수난과 속박의 겨울이 지난 뒤 핍박하는 원수들의 세력에서 교회를 건지시고 그 자유와 평안을 회복시키는 것. 환란의 폭풍이 그치고 "반구의 소리," 즉 그리스도의 복음의 기쁜 소리가 다시 들리며 성례를 자유로이 만끽할 수 있게 될 때가 바로 이 복된 때를 활용하러 "일어나 함께 가야"할 때이다. 주 여호와의 빛에 행하고 주의 길을 노래하라. 교회가 평안을 얻었을 때에 그들은 유익한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행 9:31).

[3] 자연의 상태에서 은총의 상태로 죄인을 회심시키는 것.

이 복된 변화는 봄이 되돌아오는 것과 같아서 만물의 변화이며 아주 편안케 되는 변화이다. 그것은 새로운 창조이다. 그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겨울의 땅처럼 굳고 차갑고 얼어 붙어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하던 영혼이 봄철의 대지와 같이 다산성(多産性)을 소유하게 되며 점차로 그 열매를 완전히 여물게 한다. 이런 복된 변화는 순전히 의로운 태양의 접근과 그 영향력에 기인된 것이다. 그 의로운 태양은 하늘에서 우리에게 "일어나 함께 가자"고 부르신다. 자! 오라. 여름에 거두어 들이자.



[4] 내적인 낙심과 낙담의 상태 후에 성도들을 위로하시는 것.

의심과 불안 속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는 겨울 땅과 같다. 그 밤은 길며 그 낮은 어둡고, 따사롭던 애정은 냉기가 감돈다. 되는 일이 없고 얻는 것도 없으며 그 손은 봉해져 있다. 그러나 위로의 봄이 돌아 오리라. 새는 다시 지저귀며 꽃들은 필 것이다. 그러므로 시들어가는 불쌍한 영혼아! 일어나서 네가 사랑하는 자와 "함께 가라." "일어나 네 티끌을 떨어 버릴찌어다"(사 52:2). "일어나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음이라"(사 60:1). "그 빛에 행하라"(사 2:5).



[5] 마지막 날에 있을 몸의 부활과 나타날 영광을 나타내는 것. 무덤 속에 누워 있던 뼈들은 겨우내 땅 속에 들어 있는 식물의 뿌리와 같다. 그러나 그 날에는 뼈들이 "연한 풀의 무성함 같을 것"이다(사 66:14; 26:19). 그 날은 겨울에게 영영 작별을 고하는 날이 될 것이며 영원한 봄으로 기쁘게 들어가는 날이 될 것이다.

 

2:9 없음.

 

2:10 없음.

 

2:11 없음.

 

2:12 없음.

 

2:13 없음.

 

2:14

그리스도의 권고와 교회의 소망 (아가 2:14-17)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Ⅰ.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모든 믿는 영혼을 초대하신다. 이것은 자기와 교제하러 오라는 격려의 초대이다.

1. 이제 그의 사랑은 그의 "비둘기"가 되었다. 다윗은 교회를 하나님의 "멧 비둘기"라고 불렀다(시 74:19) 그와 같이 이 여인도 본문에서 비둘기로 호칭된다. "그 날개를 은으로 입힌 비둘기"(시 68:13)는 아름다움의 상징이며 결백과 평화의 상징이다. 은혜로운 심령은 비둘기 같은 심령이며 무해하고 정적과 청결을 사랑하며, 산비둘기가 그 짝에게 하듯 그리스도께 신실한 마음이다. 성령이 그리스도께 "비둘기 같이" 내리셨듯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크리스챤에게 내려 오셔서 그들의 "심령을 온유하고 조용하게" 만들어 주신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비둘기"이다. 그가 교회를 자기의 소유로 인정하시고 교회를 기뻐하시는 때문이다.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평안을 찾을 수 있으며 그의 방주 밖에서는 안식을 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노아의 비둘기처럼 교회는 그리스도께로 돌아온다.

2. 이 비둘기는 "바위틈과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다. 이것은 다음 두 가지 중 하나를 말해 준다.

(1) 이 여인의 찬양. 그리스도는 반석이시다. 비둘기가 맹금류의 습격을 받으면 바위구멍 속에 숨듯이(렘 48:28) 교회는 그리스도를 피난처로 삼으며 그분 안에서만이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 있고 평안을 찾을 수 있다. 모세는 바위틈에 숨어서야 하나님의 영광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었다. 만일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 광채에 견디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여인은 "낭떠러지의 은밀한 곳"으로 물러나 있는데 이는 이런 곳에서라야 그녀는 홀로, 방해를 받지 않고 자기 자신의 마음과 더 잘사귈 수 있겠기 때문이다. 선한 크리스챤은 은밀한 시간을 찾으려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때때로 "혼자 기도하시기 위하여" 산으로 물러 가셨을 것이다.

(2) 이 여인의 수치. 그녀는 공포와 수치로 인하여 "바위틈"과 "은밀한 곳"으로 기어 들어갔던 것이리라. 실의에 빠지고 낙담하여 자기가 사랑하는 자의 눈까지도 피하려고 자기 머리를 감추기 위해 어디라도 비집고 들어갔을 것이다. 그의 존재 앞에 나타나 말을 걸기에는 너무나 무자격하고 무가치한 자신을 스스로 의식하고 이 여인은 물러났을 것이며 "지혜(마음)"없는 어리석은 비둘기" 같았을 것이다(호 7:11).

3. 그리스도께서는 이 칩거하고 있는 여인을 불러내신다. 자!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해다오." 이 여인은 "비둘기처럼 슬피 울고 있었으며"(사 38:14) "골짜기의 비둘기"처럼 슬퍼하고 있었다. 그녀는 위험하게 내려 걸린 바위 틈 근처에서 "자기 죄악 까닭에 슬피 울며"(겔 7:16),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악한 양심에서 속죄하여 "흠없는 얼굴을 들라"고 이 여인을 부르시며(욥 11:15; 22:26)거기에서 위대하신 제사장을 모시고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히 4:16)그녀의 청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인지 고하라고 부르신다. 나로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가 말해야 하는 사연을 듣게 하라. "내가 네게 무엇을 해 주면 좋겠느냐?"를 자유스럽게 당당하게 말해 보아라.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꺼려하지 말고 말하여라.

4. 이 여인을 격려하기 위해 그는 그녀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자기의 그녀에 대한 선한 생각을 말해 주고 있다. "네 소리는 부드럽다." 비록 너는 "학이나 제비같이 지저귀나" 네 기도 소리는 감미롭다(사 38:14). 하나님 귀에는 네 기도 소리가 음악같이 부드럽고 아름답다. 그는 우리에게 "정직한 자의 기도 소리는 자기의 기쁨"이라고 확실히 말씀하셨다. 그는 노아의 희생 제사에서 달콤한 향기를 맡으셨고 "신령한 제사"도 그에 못지 않게 "기뻐 받으신다"(벧전 2:5). 이것은 우리의 제사를 권장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이들을 최선의 것으로 활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겸손이며 "성도들의 기도로 드려진 많은 향"의 효력을 칭찬하는 것이다(계 8:3). "네가 부끄러워하는 너의 얼굴은 비록 지금 슬퍼하는 얼굴이라고 하더라도 아름답다. 하물며 즐거워하게 될 때에는 그 얼굴이 얼마나 더 아름다우랴!" 우리가 사람 앞에 들어내 보이는 용모 즉 교제가 성스럽고 아주 아름다우며 우리의 고백과 어울리는 "때"에는, 우리의 기도 소리가 부드러우며 하나님께 열납된다. 성별된 자들은 최상의 아름다움을 지니는 자들이다.

Ⅱ. 그리스도께서 자기 종들에게 명령을 내리신다.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공포에 떨게 하며 불쌍하게도 놀란 비둘기를 바위 틈 사이로 내쫓듯 그의 교회를 내몰며, 이 세상에 있는 그의 나라의 세력에 방해가 되고 인간의 마음에 있는 그의 왕국을 좀 먹는 것이 존재한다. 이런 것들에 대항하며 눌러 이기라는 것이 바로 그가 자기 종들에게 내리시는 명령이다(15절). "우리를 위하여 여우를 잡으라"(우리를 위해 이들을 잡는 것이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위한 훌륭한 봉사이기 때문이다). 몰래 기어들어 오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그들이 비록 작더라도 큰 해를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포도원을 허는데" 이는 언제라도 허용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특히 지금은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으니 곧 포도나무에 "연한 포도"가 달리기 시작하는 때이다. 이 포도는 보존되지 않으면 안 되며 이를 보호하지 못한다면 포도의 수확은 망칠 것이다. 신자들은 연약하지만 유용한 포두나무와 같다. 그 열매는 처음에는 "연한 포도"와 같으며 이것이 완전히 익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여우를 잡으라"는 이 명령은 다음 사실을 뜻한다.

1. 각 신도들에게 그들의 부패한 마음을 정화시키며 죄스런 욕망과 정욕을 눌러 이기라는 명령. 이러한 것들은 "여우" 곧 "작은 여우"와 같은 것으로서 그들의 은혜와 위로를 파괴시키며, 선한 동기를 억누르고 선한 출발을 짓이겨 버리며, 그들이 성숙에 이르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작은 여우들"을 잡으라. 맨 처음에 일어나는 죄의 머리를 잡으며 바빌론의 어린 것들을 메어치고(시 137:9) 사소한 것같이 보이는 죄악들을 때려 눕혀라. 왜냐하면 큰 방축도 작은 개미 구멍으로 무너지는 것같이 작은 것이 흔히는 매우 큰 위험으로 판명되는 까닭이다. 선한 일에 방해가 되는 일은 무엇이든지 다 제거해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2. 모든 자들이 자기 위치에서 온갖 악한 견해와 행위의 만연을 억제하며 방지하도록 하라는 명령. 인간의 판단을 부패케하고 그들의 양심을 타락시키며 그 마음을 혼란케 하는 경향이 있는 일들, 그리고 미덕과 경건을 지향하는 마음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온갖 생각과 행위가 만연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해자들은 여우들이다(눅 13:32). 우매한 선지자도 여우이다(겔 13:4). 이단과 분열의 가라지를 뿌리는 자들, 디오트레프스처럼 교회의 평화를 어지럽히며 복음의 발전을 방해하는 자들은 "여우"요 "작은 여우"이다. 이들의 머리를 때려서는 아니 되고("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목숨을 멸하러 오신게 아니었다") 잡아야만 한다. 잡아서 길을 들이거나 적어도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억제하여야 한다.

Ⅲ. 교회는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해 믿음의 고백을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와 그와의 교제에서 얻는 이익을 만족해 한다(16절).

그는 이 여인에게 "일어나서" 자기와 "함께 가자"고 불렀고, 자기로 하여금 이 여인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듣게 하라고 요구하였다. 이 16절은 그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다. 비록 현재에는 어두움 속에 있고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이 여인은 그의 부름에 응답하고 있다.

1. 이 여인은 자기와 자기의 사랑하는 자 사이의 이해와 상호관계를 생각하고 스스로 위안을 얻고 있다. 원문에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그리고 "나는 그에게"라고 매우 강조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문장의 간결함은 그녀의 애정이 광대함을 말해 준다. "그가 내게 대해 무엇이 되며 내가 그에게는 무엇이 되는지는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머리 속에서 보다 잘 이해될 수 있다."

(1) 그리스도가 자기들의 것이라는 것은 참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특권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이것은 소유자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나는 그에게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소유권과 보유권─즉 "나는 그의 충만한 것으로부터 받는다"─을 뜻하기도 한다. 신도들은 그리스도와 분담하고 참여하는 자이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이익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를 향유기도 한다. 그들은 그와의 계약뿐만 아니라 교제까지도 얻은 자들이다. 중보자로서 그가 하시는 일은 영광에 찬 기획물이며 그 일에서 얻는 모든 혜택은 그들에게 주어졌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는 이 세상이 되어 주지도, 되어 줄 수도 없는 그러한 존재이며, 그들이 필요로 하고 소원하는 모든 것으로서 그들에게 완전한 행복이 되어 줄 것이다. 그의 존재 전체가 그들의 것이며 그가 가지신 모든 것, 그가 행하신 모든 것, 그가 하고 계신 모든 일이 그들의 것이다. 그가 복음 안에서 약속하신 모든 것, 그가 하늘 나라에서 예비하고 계신 모든 것이 다 너희 것이다.

(2) 모든 참 신도들의 의심할 여지가 없는 특성은 그들도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럴 때에라야, 그럴 때만이 그리스도도 그들의 것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을 그에게 드렸던 것이다(고후 8:5). 그들은 그의 교훈을 받고 그의 법에 복종한다. 그들은 그의 형상을 띄고 그의 이익에 영합하며, 그리스도께 속한다. 우리가 만약 그의 것이며, 그의 전부이고, 오직 그만의 것이며, 영원히 그의 것이라면, 우리는 그가 우리의 것이라는 데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2. 이 여인은 그의 은혜가 자기 백성과 갖는 교제를 생각하고 스스로 위안을 얻는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자기 양떼를)먹이시는구나." 이 여인은 자기에게 대한 그의 은총의 징표를 세부적으로 원하기 때문에 그가 전체적으로 모든 신자들과 함께 하신다는 확신에서 기뻐하고 있다. 그가 보시기에 모든 신도는 백합화 같다. 그는 백합화 가운데서 "먹이신다." 사람이 자기 식탁이나 정원을 즐거워하듯 그는 신도들을 기뻐하며 그들의 집회를 즐거워하신다. 즉 그는 "금 촛대 사이로 거니시는" 것이다. 그는 그들과 담소하시고 그들에게 선한 일을 해 주기를 즐겨 하신다.

Ⅳ. 그리스도의 내림에 대한 교회의 소망과 기대 및 이를 바탕으로 하는 교회의 기도.

1. 교회는 "날이 새서 그림자가 달아날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 마지 않는다. 복음의 날은 동틀 것이며 의식 율법의 그림자는 달아날 것이다. 저 어두운 종규(宗規)의 긴 밤이 지나면 마침내 "새벽이 높은 데서부터 찾아와 흑암 중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빛을 비춰 주신다"는 것은 구약 교회의 위안이 되었다. 태양이 떠오르면 밤의 그림자가 사라지듯, 실체가 오면 낮의 그림자(허상)도 사라진다. 돌보시지 않고 버리신 밤이 지나면 위로의 낮이 찾아 올 것이다. 혹은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들의 영원한 행복에도 비할 수도 있다. 우리가 처하고 있는 현재 상태의 그림자, 즉 우리의 어두움과 의심들, 우리의 슬픔과 억울하고 원통한 모든 일들은 사라져 버릴 것이며 영광스러운 날이 밝아 올 것이다. "의로우신 자가 다스리시는" 아침이 밝아오며 다시는 밤이 없는 낮이 올 것이다.

2. 이 여인은 조만간에 그녀의 사랑하는 자가 나타나서 자기를 도와 주고 위안해 주도록 간청하고 있다. "나의 사랑하는 자여, 돌아오라. 내게로 돌아오라. 나를 찾아 와 나를 구원하소서. 세상 끝까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소서. 나의 곤궁한 날에는 서둘러 나를 도우시며 오래 지체하지 마소서. (우리를) 나뉘게 하는 산이라도 넘어오소서. 그 시간과 날을 막는 산이 있더라도 그 빛과 사랑에 대한 은혜로운 기대로써 넘어 오소서."

3. 이 여인은 그가 현재를 위해 자기에게로 돌아오기를 바랄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을 데리러 급히 와 줄 것을 간청하고 있다.

"비록 그렇더라도 주 예수여! 오소서! 속히 오소서! 도중에 비록 산들이 있더라도 주께서는 노루나 어린 사슴처럼 그 산들을 쉬바리 넘어오실 수 있나이다. 내게 당신을 나타내시든지, 나를 당신께로 데려가소서!"

 

2:15 없음.

 

2:16 없음.

 

2:17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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