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제의 의미 (아가 1:1)
우리는 여기에서 이 책의 표제를 대하게 되는데 이것이 나타내는 바는 다음과 같다.
1. 이 책의 성격. 이것은 "노래"이다. 이것이 노래인 것은 이 책의 목적에 잘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노래는 시가와 마찬가지로 애정을 불러일으키며 그 애정을 고조시켜 주기 때문이다. 이 주제는 즐거운 것으로, 노래를 표현하기에 적당하다. 이러한 노래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로써 여호와께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드릴 수"있다.또한 이 책은 복음 전도적인 성격을 띈다. 복음 시대는 기쁨의 시대가 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복음의 은혜가 우리 입에 "새 노래"를 넣어 주기 때문이다(시 98:1).
2. 이 책의 품위. 이것은 "노래 중의 노래"이다. 즉 극히 훌륭한 노래로서 어떤 사람이 지어낸 노래보다도 우월하며 솔로몬이 지은 다른 모든 노래를 능가할 뿐만 아니라, 성서 내의 모든 딴 노래보다도 뛰어난 것이다. 이는 이 노래 안에는 그리스도께 관한 것이 더 많이 내포되고 있기 때문이다.3. 이 책의 저자. 이것은 솔로몬의 노래이다. 이 노래는 많은 사람의 노래와는 달리 어리석은 자의 노래가 아니고 인간 중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의 노래이다. 인간이 자기 지혜에 대한 증거를 제시함에 있어, 인류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찬송하고 하나님께 대한 그 자신의 사랑과 아울러 딴 사람들의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보다 더 나은 증거는 없다. 솔로몬의 노래는 일천 다섯 개이었다(왕상 4:32). 그 중 다른 제목의 노래들은 다 없어졌으나 이 청순한 사랑의 노래는 남게 되었고, 또 시간이 끝날 때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솔로몬은 그의 아버지처럼, 시가에 골몰하였다. 인간은 자기 재능이 어느 방면에 있든지 간에 그 재능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노력해야 하며 교회를 개발하는 일에 그 재능을 활용하도록 힘써야 한다. 솔로몬의 이름 중에는 "여호와의 사랑을 입는다"는 뜻의 "여디디야"라는 이름도 있었다(삼하 12:25). 여호와의 사랑을 기록하는 데에 여디디야(솔로몬)만치 적당한 인물은 없었으니, 이는 그 자신이 하나님께 직접 사랑 받음으로써 매우 큰 이득을 본 자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 직접 사랑을 받고 그의 품에 의지하고 누웠던 솔로몬보다 사랑에 관해 많이 기록한 모든 사도는 아무도 없었다. 솔로몬은 왕으로서 마음을 쓰고 다스려야 할 큰 일들이 많았다. 그런 일들은 그의 생각과 시간을 많이 차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러 가지 종교적 행사를 위해 마음과 여가를 할애하였다. 사업가들은 믿음이 독실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친교를 유지하는 일은 모든 사람의 큰 사업이기 때문에 사업가들은 자기들의 사업으로 이 큰 사업을 모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솔로몬이 이 신성한 노래를 언제 집필했는지 그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타락으로부터 정신을 차리게 된 이후에 이 노래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는 자기의 참회에 대한 증거로서 이 노래를 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많은 이방 여인들을 사랑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아마 이 때에 그는 해이하고도 헛된 사랑의 노래들을 지어서 많은 사람에게 도덕적 해로움을 끼쳤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는 자기의 재능을 올바로 발휘하여 이 노래를 지어서 많은 사람에게 선을 행함으로 속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보다 한층 유력한 견해는 이 노래의 집필 시기가 솔로몬의 통치 초기였으리라는 설이다. 이 시기는 그가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그와의 교제를 지속하던 때였다. 아마 그는 이 노래를 자기 아버지의 시편과 함께 우두머리 음악가에게 맡겨서 성전 예배에 사용하도록 했을 것이며, 이 노래의 올바른 이해를 위한 해석법도 아울러 마련해 주었으리라는 견해이다.
혹자는 이 노래가 솔로몬이 바로의 딸과 결혼한 때에 저작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불확실한 견해이다. 본서에서 언급되는 레바논 망대가(7:4)이 결혼 후 한참 지나서야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까닭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솔로몬은 번영의 절정에서 "여호와를 사랑하였다"(왕상 3:3). 그는 "모든 것이 풍성한 중에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이와 같이 "하나님을 섬겼던 것"이라고 말이다.
이 1절은 "노래 중의 노래, 곧 솔로몬에 대한 노래"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는 다윗의 아들이자 계승자로서의 왕권의 언약을 부과 받은 자이며, 또 성전의 창건 자이고, 지혜와 부귀가 빼어난 자였다. 그러한 그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으며, 자기보다 더 큰 분이신 그리스도의 표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노래인 것이다. 아가서가 "전도서" 다음에 위치하는 것은 적절한 일이다. 전도서로 인해서 우리는 피조물의 허무성에 대해 철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피조의 세계란 우리를 만족시켜 주기에는 너무나 불충분하며 우리에게 행복이란 것을 만들어 주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것이라고 깨우쳐 주었다. 이제 아가서를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행복을 찾도록 눈이 떠질 것이며, 그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초월적인 참 즐거움을 접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길에 대비하는 광야의 소리는 "모든 육체는 풀과 같다"고 소리쳤던 것이다.
사론의 수선화인 그리스도 (아가 1:1,2)
Ⅰ.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무엇에다 비유하고 싶어하시며 동시에 그가 이 비유에서 자신을 얼마나 겸손하게 낮추시는지 살펴 보라.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되시며 밝고 밝은 새벽별이신 그가 자신을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라고 부르시는데, 이것은 그가 이 세상에서 자기백성들과 함께 계시며 성도들이 자기께로 나아오기가 얼마나 용이한 일인가 하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또 이것은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아름다움과 감미로움을 표현하고 그들에게 그리스도에 의해 몸단장하도록 하라고 가르치기 위함이다. 남녀 양치기들은 즐거울 때면 수선화나 백합화로 장식하며 꽃다발과 화환으로 단장하였는데 성도들도 이처럼 그리스도로 단장하라는 것이다. "장미"는 (영어로는 사론의 장미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성서의 수선화가 덩쿨 장미의 일종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역주) 그 아름다움과 향기에 있어 꽃 중에 으뜸이며, "백합"은 우리의 구주께서 "솔로몬의 그 모든 영광"으로도 이 꽃만치 아름다운 의상을 입지 못하였다고 하신 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론의 수선화"(장미)이다. 아마 사론에는 가장 훌륭한 수선화가 자랐으며 또 가장 만발하였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들의 장미"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이는 복음에 의한 구원은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구원임을 의미한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서 아무라도 와서 은혜의 언약 안에 자라나는 특권과 위로의 장미꽃 봉오리를 따갈 수 있다. 그는 정원 안에 갇혀 있는 장미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와서 그로 인해 혜택을 받을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그는 희기로는 "백합꽃"이요 향기롭기로는 "골짜기의 백합화"이니 그 향기가 매우 강하기 때문이다. 그는 "골짜기" 혹은 "저지(低地)의 백합화"로서 매우 겸손하며 피해에 노출되어 있다. 겸손한 영혼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큰 아름다움을 본다. 그가 딴 사람들에게는 무엇이되든지 간에 "골짜기"에 있는 자들에게는 "백합화"이다. 그는 "수선화요 백합화이다." 그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 그리스도께 있는 훌륭함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그것은 오직 그에게만 있는 것이며, 더욱이 그것은 최고의 형태로 존재한다.
Ⅱ. 또한 그가 자기 교회를 무엇에다 비기고 싶어 하시는지 살펴보자(2절).
1. 그녀는 "백합화 같다." 그는 자신을 "백합화"라고 하면서(1절) 이 여인은 "백합화 같다"고 한다. 신자들의 아름다움은 저들 자신이 그리스도와 일치되려고 따르며 그를 닮아가는 데 있다. 그들은 그의 사랑이며 따라서 백합화 같으니, 이는 그리스도와 같이 만들어진 그들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뚝뚝 떨어지기" 때문이다.2. 그녀는 "가시나무가운데 백합화," 같으니, 곧 "가시나무"와 비교되는 "백합화 같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장미 꽃밭이 가시덤불을 능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다른 사회 단체를 훨씬 능가한다. 교회는 "가시"로 둘러 쌓인 "백합화 같다." 이 세상의 "여인들" 곧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갖고 있지 않은 악인들은 "가시"와 같아서 가치도 없고 쓸모도 없으며, 틈만 메꾸는 이외에 아무 데도 소용없는 존재들이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유해하고 해롭기까지 하다. 그들은 죄와 함께 왔으며 저주의 열매이기도 하다. 그들은 좋은 씨앗이 움터나오지 못하게 막으며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방해하나, 그들의 "말로는 불태움을 당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가시나무 "가운데 있는 백합화 같아서," 가시로 인해 긁히고 찢어지며 그 그늘에 가리워져 빛을 못보게 되기 마련이다. 성도들은 그리스도께 소중한 존재들이면서도 이 세상의 어려움과 고통에 노출되어 있다. 그들은 이 어려움을 예상해야만 한다. 그들이 심기운 곳은 "가시나무 가운데" 이기 때문이다(겔 2: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에게 소중한 존재들이다. 그리스도께시는 자기의 백합화 중 어느 하나라도 "가시나무 가운데"있다고 해서 간과해 버리거나 과소 평가하시는 법이 없다. 그들은 "가시 가운데" 있을 때에도 여전히 "백합화 같음"에 틀림없으며 그들의 순결과 순수성을 유지해야 한다. 비록 그들이 "가시나무 가운데"에 있다고 하더라도 "가시"로 변해서는 안 되며, "울타리에 울타리를 내어서도 안 된다." 만약 그들이 이와 같이 자기 특성을 보존한다면 그들은 여전히 그리스도와 합치되는 자로 인정될 것이다.
영혼 속의 은혜는 "가시나무 가운에 있는 백합"이다. 부패케 하는 것은 "육체 속에 있는 가시"이며(고후 12:7),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속에 있는 가나안 인들과 같다(수 23:13). 그러나 지금은 "가시나무 가운데" 있는 이 "백합"도 오래지 않아 이 광야에서 뽑혀, "찌르는 가시"도 없고 "아프게 하는 가시"도 없는(겔 28:24) 저 낙원으로 이식될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사랑 (아가 1:2-6)
이 드라마틱한 시에서는 처음에는 신랑에게 그 다음에는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말하고 있는 신부가 도입되고 있다.
Ⅰ. 신랑에게. 신랑에게는 어떤 이름이나 칭호도 붙이지 않고 돌연히 말을 시작하고 있다. "그가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이것은 막달라 마리아가 그리스도를 동산지기로 착각하여 "당신이 그분을 여기서 옮겨갔거든," 하고 말했을 때, 그리스도를 의미하면서도 그의 이름을 부르지는 않은 것과 같다(요 20:15). 마음은 이미 그에 대한 생각으로 온통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보다 마음속에 자리잡은 좋은 일이나 생각들이 선행되기 때문이다(시 45:1). 생각이 그리스도께 대한 것으로 가득히 넘치는 자들은 남들은 역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이 배우자가 간절히 바라며 또 생각하기만 해도 즐거운 일이 두가지 있다.
1. 신랑의 우정(2절). "그 입으로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즉 그로 하여금 내게 화합되도록 해 주오. 그가 나를 만족히 여긴다는 것을 알게 해주오. 나에게 그 애정의 표시를 보여 주오." 이와 같이 구약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친히 나타나시기를 간절히 소원하였다. 그들은 학교 선생님같은 율법 아래 있기를 더 이상 바라지 않았으며 속박과 공포를 배급받기 보다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교류하게 되기를 더 원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율법이 찢고 때린 것을 복음 안에서 싸매고 치료하시며 세상을 자기 자신과 화해시키신다. 이것은 마치 어머니가 꾸짖었던 어린 아이를 달래며 입맞춰 주는 것과 같다. "이 이상 더 남을 보내지는 마시고 친히 오시기를 원합니다. 이 이상 더 천사나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지 마시고 그 자신의 입에서 직접 나오는 말씀," 즉 "은혜로운 말씀"(눅 4:22)을 내게 들려 주시옵소서. 그러면 그것은 내게 "그의 입의 입맞춤" 같을 것이고 "야곱에게 행한 에서의 입맞춤같이 내게 확실한 화해의 표시가 될 것입니다." 모든 복음의 의무는 우리가 "아들"에게 입맞추는 데에(시 2:12)집약되어 있다. 모든 복음의 은혜는 탕자가 참회하고 돌아올 때 그 아버지가 그를 붙잡고 입맞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입맞추시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것은 화평의 입맞춤이다. 입맞춘다는 것은 상처입는다는 것과 대(對)가 되는 말이다(잠 27:6). 마찬가지로 은혜의 입맞춤은 율법의 상처와 상반된다. 이와 같이 진정한 신자라면 누구나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기들의 영혼에 현시될 것을 간절히 원하는 법이다. 참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은총을 확신하는 것에서 가장 큰 행복을 얻는다. 그들은 그가 그 얼굴을 들어 자기들에게 그 얼굴 빛을 비추어 주시도록 바라며(시 4, 6, 7)모든 지식을 능가하는 그의 사랑에 대한 지식을 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바라는 한 가지 일이다(시 27:4).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의 성령에 의해 자기들의 영혼에게 현시하심을 기꺼이 영접하며, 무엇보다도 그에게 대한 사랑과 만족을 겸손히 고백함으로써 그에 응답한다. "그 입술의 열매는 평강이다"(사 57:19). 레이놀즈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그가 내게 일천 번의 입맞춤을 베풀어 주기를 원하노라. 그 입맞춤의 열매는 나로 하여금 그를 더욱 사모하도록 한다. 딴 모든 즐거움은 즐길수록 싫증이 나고 시들어 버리지만 성령의 즐거움은 더욱 더 기쁘구나."본문의 신부는 자기의 이와 같은 소망에 대한 이유를 몇 가지 제시한다.
(1) 그 여자가 그의 사랑에 대해 품고 있는 큰 존중심 때문에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포도주는 "마음을 즐겁게 만들어 주며," 축 늘어진 심령을 소생시켜 주고 쾌활하게 해 준다. 반면에 은혜로운 영혼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일과 또 그리스도께 사랑받는 일 가운데에서 더욱 즐거움을 얻는다. 또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맺어 주는 열매와, 선물로 주시는 은사 속에서 또 그의 사랑의 약속과 그것에 대한 확신 속에서 즐거움을 얻는다. 그가 이런 일 속에서 얻는 즐거움은 여지껏 어떤 사람이 누릴 절묘한 감각적 쾌락보다도 큰 것이며, 그것은 실신한 사람에게 주는 강심제보다도 더 많은 활력을 은혜로운 영혼들에게 불어 넣어 준다.
[1]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자체에 있어서, 그리고 모든 성도의 이익에 있어서도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최상의 위안보다 가치있고 바람직한 것이다.
[2] 인간의 모든 쾌락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 좋아하는 자들만이 그리스도의 입맞춤을 기대할 수 있다. 또 그런 자들만이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총애하신다는 표시로 주시는 안락을 바랄 수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총애를 잃느니, 차라리 이런 세속적인 즐거움을 버릴 것이며, 그 어떤 실제적 오락보다 영적 기쁨 가운데서 더 많은 쾌락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칭의 변화를 관찰해 보자. "그가 내가 입맞추기를 원하니" 이 여인은 그가 부재 중이거나, 아니면 그에게 말 걸기가 두렵기라도 한 듯 그(3인칭)라고 칭한다. 그러나 그 다음 절에서는 그를 바로 가까이서 바라보며 말하고 있다. "당신의 사랑, 당신의 사랑들"(이 단어는 복수형이다.) 을 나는 너무나 간절히 사모하오니 이는 내가 그것을 높이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2) 널리 퍼지는 그의 사랑의 향기와 열매 때문에(3절),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주의 위로와 은혜를 올바로 이해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똑바로 이해하는 모든 자들에게는, 주의 은혜와 위로가 상쾌한 것이고 기쁜 것이다), 네 이름은 쏟아진 향기름 같구나. 당신은 바로 그러하십니다. 당신께서 자신을 알리신 모든 일이 그러합니다. 주의 바로 그 이름은 모든 성도들에게 귀중합니다. 그것은 마음을 줄겁게하는 기름이요 향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은 보배로운 기름이 담긴 옥합을 여는 것과 같아 온 방안이 그 향기로 가득차게 된다. 그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곧 "도처에서 그를 아는 향기를 나타내는 것"이다(고후 2:14). 성령은 "즐거움의 기름"이셨고, 그리스도는 이것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셨으며(히 1:9) 모든 참신자들도 그 "기름 부음"을 받는다(요 12:27). 따라서 그리스도는 신자들에게 귀중한 분이며 그들은 그리스도께 소중한 자들이고 피차 상호간에 보배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좋은 이름은 보배로운 향기름 같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은 다른 어떤 이름보다도 더 향기롭다. 지혜는 기름처럼 "얼굴을 빛나게 만든다." 그러나 구세주께서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아름답게 빛나신다. 그리스도의 이름은 밀봉된 향기름처럼 구약 시대에 오래도록 봉해져 있었다("내 이름을 묻지 말라. 이는 그것이 비밀로 숨긴 것이기 때문이다"). "쏟아진 향기름"과 같다. 이것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은혜가 자유로이 그리고 완전하게 전달됨을 의미한다.
(3) 모든 거룩한 영혼이 그에게 대해 품는 일반적 애정 때문에 "그러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우리 마음을 끌어내어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하는 것은 "우리 마음 구석구석에 점점이 떨어져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부패한 죄에 물들지 않은 모든자들, 저희 심령의 정절을 보존하며 하나님께 헌신하겠다는 자기들의 맹세에 성실한 자들, 자기들의 경건한 사랑이 더럽혀지도록 방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세상과 인간에 시달릴 정도로 많은 것을 지니지는 못하는 사람, 이런 모든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가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처녀들이다(계 14:4).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모든 자의 연인이므로, 우리는 그를 우리의 연인으로 삼고 그를 사모하며 "그의 입맞춤"을 바라도록 하자.
2. 신랑의 친교(4절). 여기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신의 은총에 대한 그녀의 청원. "나를 인도하라." 이 말씀은 그로부터의 거리감을 나타내 주며 동시에 그와 결합하고 싶어 하는 소원을 의미한다. "나를 당신께 인도하시고, 나를 더 가까이 끌어당기시며, 나를 당신 집으로 데리고 가소서." 이 여인은 앞에서도 그가 자기에게 가까이 다가오도록 기도하였었다(2절). 이것을 위해서 이제는 그가 자기를 가까이 인도해 주도록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기름의 향기가 있는 도덕적 권고로써 나를 이끄소서. 또 쏟아지는 향기름과 같은 그 이름의 매력으로 나를 이끌 뿐만 아니라 초자연적 은혜로, 사람의 줄과 사랑의 띠로 나를 인도하소서"(호 11:4).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자 이외에는 자기에게 나올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다(요 6:44). 우리는 약한 존재여서 도움을 받지 않으면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본래 뒷걸음질을 잘 치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싫어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영향력과 작용을 기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니, 성령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나아가기 싫어하던 우리가 기꺼이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시 110:3). "나를 인도하소서. 그렇지 않으면 나는 움직이지 않겠나이다. 나를 주께로부터 끌어가려는 세상과 육신을 권능으로 누르소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기에게로 몰고 가지 않으신다. 그는 이성을 가진 피조물에게 어울리는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이다.
(2) 그 은혜를 활용하겠다고 하는 이 여인의 약속. "나를 인도하라."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 가리라." 매우 특수하고 효과적인 은혜의 교리가 우리의 의무와 얼마나 빈틈없이 일치하며 그 의무를 굳게 약속 해 주고 강력하게 격려해 주는지 살펴보자. 그러면서도 은혜의 교리는 우리 안에 있는 온갖 선한 것의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만을 위하여 보유해 두고 있다는 사실도 살피자.
[1] 영혼이 그리스도를 좇아 용솟음쳐 나오며 그에게 기꺼이 순응하려는 것은 그의 은혜가 주시는 결과이다. 만약 그가 우리를 이끌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그를 따라 달려 갈 수가 없을 것이다(고후 3:5; 빌 4:13).
[2]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부지런히 활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우리를 이끄실 때 우리는 우리 심령으로 그를 따라 달려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가…행하게 할 것"이니 "너희는 행할지니라"(겔 36:27)고 말씀하시듯, 우리도 또한 "주께서 하게 하실터이니 우리는 하겠나이다. 주는 우리들 속에서 활동하사 의욕을 갖게 하시고 행동하게 하시니,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낼 것입니다"(빌 2:12, 13)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당신을 따라 걸어갈뿐만 아니라 달려가기도 할 것이다. 이것은 간절한 소원, 즉각적인 사랑, 활기찬 추구 그리고 신속한 행동을 의미한다.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오면 내가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가리이다"(시 119:32).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는 때"에는 "내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나이다"(시 63:8). 그가 우리에게 대한 인자로 우리를 인도하실 때(렘 31:3), 우리는 그에게 대한 사랑으로 그를 따라 달음박질하지 않으면 안 된다(사 40:31). 이 여인의 청원과 약속 사이의 차이를 살펴보자. "나를 인도하라. 그리하면 우리가 달려 가리라." 그리스도께서 자기 신부와 같은 일반 교회에서 그의 성령을 부으시면,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그로부터 활기있게 하고 소생시키는 영향력을 받아 더욱 즐거워하면서 그에게로 달려가게 된다(사 55:5). 혹은 "나를 이끄소서(믿는 영혼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나는 나 자신이 가능한 대로 빨리 당신을 따라갈 뿐만 아니라 모든 소유도 데리고 따라가겠나이다. 우리는 당신을 따라 달려 가겠나이다. 나와, 당신을 사랑하는 처녀들은 당신을 따라 달려 갈 것입니다(3절). 즉 나와 내 세력하에 있거나 나의 영향력 밑에 있는 모든 것, 나와 내집(수 24:15), 나와 내가 주의 길을 가르쳐 줄 죄인들이 주를 따라 달려 갈 것입니다(시 51:13)." 신의 은총에 순응하여 스스로 매진하는 자들은 그들의 "열성이 많은 자들을 일깨워 주게 됨"을 보게 될 것이다(고후 9:2). 생기가 있는 자들은 능동적으로 될 것이다. 빌립이 그리스도께로 인도받았을 때 그는 나다니엘을 인도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솔선하여 모범을 보이게 될 것이며 따라서 말씀으로 끌어오지 못한 자들도 설득하게 될 것이다.
(3) 이 기도에 대해 내려진 즉각적 응답. "왕이 나를" 이끄시며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셨도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말씀을 믿음으로써 획득한 응답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 은혜의 활동을 경험함으로써 얻게 되는 응답이다. 우리는 기도가 응답을 받는지 살펴보아야 되는데 우리는 이와 같은 관찰에서 때때로 "우리가 아직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리스도께서 들으신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사 65:24). 신랑은 왕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초대와 향응으로 보여 주는 그의 겸손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른다. 따라서 우리가 그의 초대와 향응을 기꺼이 받아 들이고 "그를 따라 달려 가야 할" 이유는 더 더욱 큰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위해 "혼인잔치"를 베푸시고(마 22:2) "가난한 자와 불구자"까지도 불러 들이시며 가장 수줍고 부끄러운 자들조차 "들어오게 시키시는" 임금이다. 그리스도께로 이끌림을 받는 자들은 그의 궁정으로, 그의 궁전으로(시 45:15) 불리워 들어갈 뿐만 아니라 그의 침방에까지도 안내된다(시 25:14). 그곳에서 그들은 그의 은밀한 일에 참여하며 그와 자유로이 만나고(요 14:21), 또 그의 장막 안에서 안전하게 된다(시 27:5; 사 26:20). "지혜의 문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들은 "지혜의 밀실로 들어가게"(이끌어 들인다는 단어는 이런 뜻도 가짐) 될 것이다. 그들은 진리와 위로 속으로 인도될 것이다.
(4) 이 배우자의 왕이 자기에게 입히는 존귀에 대한 커다란 만족.
[1] "침궁으로 이끌려 들어가게 됨"으로써 "우리는 가지고 싶어하던 것을 소유하게 된다. 우리의 소망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장식되게 된다. 우리의 모든 비탄은 사라지고 우리는 즐겁고 기쁠 것이다. 하나님 궁정에서의 하루가 다른 곳에서의 일천 일보다 더 낫다면, 그의 침전에서의 한 시간은 딴 곳에서의 일만 일보다 더욱 더 낫지 않겠는가!" 은혜를 통해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교제하게 되는 일들은 에디오피아의 내시처럼 "기뻐하며 그길을 갈"만한 이유가 있다(행 8:39). 그리고 그 기쁨은 우리 마음을 넓혀 줄 것이며 우리의 힘이 될 것이다(느 8:10).
[2] 그곳에서 우리의 모든 기쁨은 하나님께 집중될 것이다. "우리가 기뻐할 것은 향기름이나 침궁이 아니라 너를 인함이다. 우리의 지극한 기쁨이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다"(시 43:4).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기쁨 이외에는 아무 낙도 가지지 못하며, 우리는 그의 은혜 덕분으로 기쁨을 얻는 것이다. Gaudium in Domino, 즉 "주안에서 얻는 기쁨"과 Salus in Domino Sempiterna "주 안에서 얻는 영원한 구언"은 고대의 인사말이었다.
[3] "우리는 이러한 당신의 친절한 맛과 냄새를 보유하며 결코 잊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네 사랑을 포도주보다 더 기억할 것이다. 주의 사랑 그 자체는 물론(2절), 그것에 대한 기억 조차도 우리에게는 가장 강한 영혼의 강장제나 가장 구미에 맞는 음료보다 더 은혜스러울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사랑에 대한 감사를 드리는 일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주의 사랑은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더 오랜 인상을 우리에게 남길 것입니다."
(5) 은혜로운 영혼이 그리스도와의 이런 교제 속에서 가지는 뭇성도들과의 교제. 우리가 안내된 침전에서 우리는 그와 만날 뿐만 아니라 다른 자들과도 만나게 된다(요 11:7). 왜냐하면 "정직한 자들은 주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즉 회중이나 한 세대의 "정직한 자들은 주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딴 사람들이 무엇을 행하든지 간에 참 이스라엘인 된 모든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할 것이다. 다른 여러 가지 일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들 간에 이해나 애착의 차이가 얼마든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귀중한 분이시라는 이 한 가지 사실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의견이 일치한다. 여기에서 "정직한 자들"이라고 하는 것은 3절의 "처녀들"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그의 사랑을 포도주보다 더 기억하는" 자들은 가장 큰 사랑으로 그를 사랑할 것이다. "정직한 자"의 사랑은 성실한 사랑 이외에는 어떤 사랑도 그리스도께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엡 6:24).
Ⅱ. 신부는 또한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이야기한다(우리 성경에는, "여자들아"라고 되어 있다)(5, 6절). 전체로서의 교회가 수난을 당하게 되면 개체 교회는 실족할지도 모를 위기에 처하게 된다(살전 3:3). 환란 중에 있는 전체로서의 교회는 개체 교회들에게 그러한 위험에서 스스로를 지키라고 말하고 있다. 혹은 이것은 신자가 교회 안에서 신앙을 고백했으나 진정한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하는 말이거나, 그리스도 안에서 젖먹이 같은 연약한 크리스챤들에게 하는 말일 것이다. 그들은 완전한 교육을 받지 못하여 많은 무지와 약점 그리고 실수 아래서 고충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의 일을 기꺼이 배우려고 하는 자들이다. 그 여인은 이 방관자들이 자기를 검다는 이유로 멸시한다는 사실을 관찰하였다. 검다는 것은 두 가지 즉 죄와 고난에 대한 표현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들은 이 여인이 입맞춤을 기대하거나(2절) 그들 자신과 기쁨을 함께 하기를 바랄 하등의 이유도 갖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4절). 그러므로 그녀는 이 불쾌한 사실을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그녀는 자기가 "검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죄는 검게 만든다.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이단잡설과 추문과 허물은 교회를 "검게" 만든다. 가장 훌륭한 성도들에게도 약점들은 있다. 또 슬픔은 검게 만든다. 여기에서는 특별히 이 뜻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였다. 교회는 왕왕 저열(低劣)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수가 있다. 비천하고 초라하게 되어 외양은 보잘 것 없이 되고 그 아름다움은 오손(汚損)되며 그 얼굴은 울어서 얼룩이 지는 수가 있다. 교회는 "숯보다도 더 검게" 된 나사렛 사람들처럼(애 4:8) 굵은 베옷을 입고 슬픔의 상복으로 두르고 있다. 이러한 허물을 벗어버리기 위하여, 이 여인은 어떻게 하는지 살펴보자.
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강조한다(5절).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답다." 나는 "게달(Kedar)의 장막과 같이" 검다. 이 장막은 목자들이 거처하는 것으로서 매우 거칠고 절대로 희어지지 않으며 비바람과 오랜 사용으로 말미암아 낡고 바래진 것이다. 그러나 그 여인은 자신이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의 방에 있는 가구들은 그 궁전의 장려함에 비례하여 사치스럽고 호화스러운 것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교회는 종종 박해로 인하여 "검지만," 인내와 견실함과 위안으로 "아름다우며" 그리스도께서 보시기에는 그 사랑스러움이 하등 감해지지 않는다. 교회는 "인간의 생각으로는 검으나" 하나님의 중시하시는 바로는 "아름다우며," 교회에 치욕이 되는 자들에게는 "검으나" 진지하고 교회에 명예를 안겨다 주는 딴 사람에게는 "아름답다." 참된 신자들은 그들 자체로서는 "검으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아름다우니," 이는 외적으로는 "검지만" 그리스도께서 아름다움으로 옷입혀 주시는 때문이다. "세상은 그들을 알지 못하나 그 안에는 모든 영화로움이 있다"(시 45:13). 사도 바울은 "약하였으나" 약한 그 때에 그는 "강하였다"(고후 12:10). 이와 같이 교회는 "검으나"동시에 "아름답다." 믿는 자는 죄인이며 그러면서도 성도이다. 그 자신의 의는 "때묻은 넝마와 같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의로운 의복으로 옷입혀진다. 갈데아 주석은 이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이 검은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의 검음과 그들이 이에 대한 회개를 하였을 때의 아름다움에 비유하고 있다.2. 이 여인은 자기가 검게 된 이유를 설명을 하고 있다. 이 검음은 선천적인 게 아니라 후천적인 것으로 그 여인에게 가해진 혹독한 대우로 인하여 생긴 것이다. "내가 검다고 하여" 그렇게 "흘겨보지 말아라." 우리는 우리가 어떤 눈으로 교회를 바라보고 있는지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며, 특히 교회가 검을 때는 더욱 유의해야 한다. "너는 네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해서는 아니 된다"(욥 12절). 검다고 해서 속상해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나는" 나의 고생 때문에 "검게 되었다." "햇볕이 나를 쬐었다." 이 여인은 예쁘고 아름다왔으며 본래의 혈색은 희었다. 그러나 그녀는 "낮의 수고와 더위"로 인하여 이렇게 검은 빛을 띄게 되었는데, 그녀는 이를 견디어 내도록 강요당했었다. 그녀는 햇볕에 그을렸고, 환난과 박해로 탔다(마 13:6, 21). 아무리 경국지색이라 하더라도 일광에 노출되면 곧 검게 타버리는 법이다.
이 여인이 자기의 고난을 어떻게 완화시키는지 살펴 보자. 이 여인은 야곱처럼 "낮에는 더위가 나를 태워버렸다"(창 31, 40)고 말하지 않고 "일광이 나를 쬐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자기 고생을 최악의 것으로 비관하는 일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어울리지 않는 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였는가?
[1] 이 여인은 자기 가문의 사람들에게 불쾌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여워하였다." 그녀는 "거짓 형제들로 인하여 위태한 중에" 있었다. 그녀의 원수들은 "자기 집안의 식구들"이었다(마 10:36). 이들은 인간적으로는 태어날 때 부터의 형제요 신앙의 면에서는 꼭 같은 성스런 단체의 회원이니 곧 어미된 교회의 자녀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버지되신 하나님의 자녀는 아니다. 그들은 "이 여인을 노여워하였다." 유대인의 혈족으로 자처하던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의 중흥에 이바지할 일이면 무엇이든지 싫어하였다(느 2:10). 하나님의 백성이 그들 자신의 어미의 아들들에게 노여움을 당한다는 사실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곧 너요, 내 동료요, 친우로다"(시 55:12, 13). 이러한 사실은 그 고난을 더욱 진절머리나게 만들며 더욱 슬프게 만든다. 그런 자들로부터는 악의로 해석하는 일밖에 기대할 수 없으며, 그런 자들의 분노는 화해하기가 어렵다. "감정이 상한 형제는 설득하기가 어렵다."
[2] 그들은 이 여인을 매우 혹독하게 다루었다. "그들은 나를 포도원(복수형 의미로 되어있음) 지기로 삼았음이라."
첫째, "그들은 나를 유혹하여 죄를 짓게 하였고 나를 거짓 숭배에 이끌어 들여 저희 사신들을 섬기게 만들었으니, 이는 저희 포도원을 갈게 하는 행위요 소돔의 포도나무를 지키게 하는 행위와 같다. 그들은 내가 내 자신의 포도원(단수형 의미)을 지키지 못하게 하였고 내 자신의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였으며, 하나님이 내게 명하신 순결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지키며 언제나 내 자신의 소유로 인정하련다"라는 것을 뜻한다. 이런 일들은 선한 사람들이 박해를 당하는 때에 호소하는 가장 원통한 것들이다. 즉 박해시에는 그들의 양심이 억압되며 그들을 엄하게 다스리는 자들이 "그들의 영혼에게 이르기를," "엎드리라. 우리가 너희를 넘어가리라"라고 한다(사 51:23).
둘째로 "그들은 나를 고통 속으로 몰아 넣었다. 힘들고 수고스러우며 치욕적인 일을 하게 하였다"라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포도원을 지키는 일은 천한 노역이며 매우 힘드는 일이다(사 61:5). 그 어미의 아들들은 이 여인을 그 가정의 천한 일군으로 삼았다. "그들의 분노는 저주를 받을 것이며, 이는 그들의 노여움이 맹렬하였음이라." "그들의 진노가 저주를 당할 것이며, 그 진노는 잔인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심히 많은 가혹한 대우에 줄곧 시달리게 된 것이다.
(2) "나의 고난은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들이다. 이는 내가 내 포도원을 지키지 못한 때문이다. 내 형제가 나를 박해하는 데에 아무리 불의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나는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포도원을 주의깊게 지키지 못했으므로 인간들이 나를 노예와 같은 포도원지기로 삼는 것이 마땅하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게으른 자들은 자기들의 원수를 섬기게 된다고 하더라도 불공평한 것은 아니니, "이는 그들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열국의 왕들을 섬기는 일이 어떠한지 알게 하려 함이다"(대하 2:8; 신 28:47, 48; 겔 20:23, 24). "내가 고난을 받는다 하여 하나님의 길을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라. 나는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쓰라린 아픔을 당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억압을 당하고 핍박을 받을 때는 자기들의 죄가 고난을 초래하는 원인이라고 자각하는 것이 마땅하며, 특히 자기들의 무성의한 포도원 관리 때문에 그런 고난이 야기된 것이며 포도원은 "게으른 자의 밭"처럼 되었다고 인식하는 것이 온당하다.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 (아가 1:7-11)
여기에 나오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신부가 자기의 사랑하는 신랑에게, 여목자가 목자에게, 교회와 모든 신도가 그리스도에게, 보다 자유롭고 친밀한 교제를 위해 드리는 겸손한 청원. 이 여인은 자기 죄와 자기의 고생에 대해 하소연을 했던 "예루살렘의 여자들("딸들")"에게서 고개를 돌려 하늘을 향해 바라보고, 이 죄와 고생으로 벗어나 구조되기를 희망한다(7절). 여기서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이 여인은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라고 칭한다. 그 영혼(원문에서는 마음과 영혼이 동의어임)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진정한 신자의 특성임에 틀림 없다. 이것은 신자들의 사랑에 대한 성실성과 강도(强度)를 암시한다. 그들은 "저희 마음을 다하여 그를 사랑"하며, 또 그렇게 사랑하는 자들은 그에게 대담하게 나올 수 있으며 그 사실을 그리스도께 겸손히 탄원할 수가 있다.2. 이 여인은 그가 양떼의 선한 목자와 같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이 여인은 그가 "자기 양떼를 먹인다"는 것과 그 "양떼들을 오정에 쉬게 하신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은혜롭게도 자기의 양떼들을 위해 식사와 휴식을 제공해 주신다. 그리스도의 양떼는 굶주리지 않고 배를 불리며, 산등성이에 흩어져 있지 않고 함께 모여서 먹으며, "푸른 초장에서"먹는다. 한낮의 더운 때에는 "잔잔한 시냇가로 인도하심을 받아" 시원하고 원기를 돋아주는 그늘 아래 눕게 되는 것이 곧 그리스도의 양떼이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외적인 환난과 내적인 갈등이 있는 때가 오정인가?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위해 휴식처를 마련하고 계신다. 그는 "그들을 자기 팔에 안고 가신다"(사 40:11).
3. 이 여인은 자신과 그와의 교제를 용납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너의 양떼 먹이는 곳을 내게 고하라." 어떠한 일을 알려고 하고 행하려고 해야 할지에 대해 말씀을 듣고자 하며 가르침을 받고자 원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몰두하지 않으면 안 되며, 자기들을 가르쳐 달라고 그리스도께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당신을 발견할 수 있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내가 어디서 당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지, 당신이 당신의 양떼를 어디서 먹이며 어디서 돌보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시면 저는 거기서 당신의 무리와 교제할 수 있겠나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할 것은 우리 친구들 및 그들과의 교제를 사랑하는 나머지 그들이 자기 본분을 잊어버리도록 유혹하거나 재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의 업무와 상충되지 않을 정도의 범위 안에서 그들과의 교제를 즐겨야 하며 또 가급적이면 그들의 일에 함께 참여하고 그들의 일을 촉진하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당신이 어디에서 당신의 양떼를 먹이시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옵소서. 그리하면 거기서 내가 당신과 함께 앉을 것이며, 당신과 함께 걷고, 내 양떼를 당신의 양떼와 함께 먹일 것입니다. 나는 거기서 당신이나 내 자신에게 방해가 되지 않고, 내 일은 내가 처리하겠나이다." 자기 영혼이 그리스도를 간절히 사모하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고하시는 그의 말씀과 우리가 그에게 고하는 기도를 통하여 그와 교제하기를 열망하며, 그의 양떼들이 갖는 특권에 참여하기를 소원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교회를 위하여 맛난 음식과 아늑한 휴식을 마련해 주시는데, 우리는 이러한 교회에 대한 그의 보살핌으로부터 우리가 맡은 우리들 자신의 영혼을 어떻게 보살펴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다.
4. 이 여인이 자기의 이런 요구를 강요하기 위해 사용하는 탄원. "내가 네 동무 양떼 곁에서(혹은 뒤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자 같이 되랴. 이 동무들은 당신의 친구인 척하나 사실은 당신의 경쟁자들이요 당신의 적수들입니다." 딴 연인들을 찾아서 그리스도께로부터 외면한다는 것은 은혜로운 영혼들이 무엇보다도 두려워하고 타기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제가 얼굴을 가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더욱이 제가 얼굴을 가리운 자 같이 되는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저에게 고하소서. 제가 당신 가까이 있을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 제게 말씀해 주소서. 그러시면 저는 결코 주를 떠나지 않겠나이다."
(1) "어째서 저는 당신께 속하지 않는다는 혐의를 받아야 하며 딴 어떤 자에게 속하는 듯이 보여야 합니까? 왜 저는 우리 동무들의 양떼들에게 당신을 버린 자로, 딴 목자에게 속한 자로 간주되어야 합니까?" 진정한 크리스챤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기들의 신앙이나 그리스도께 대한 자기들의 사랑을 주변 사람들이 문제시하는 일이 없도록 언행을 삼가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영혼에 대해 무관심한 듯 보이거나 형제에게 자비심을 갖지 않는 듯이 보이고, 거룩한 의식(儀式)에 대해 무관심과 반감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는 일은 추호도 행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를, 자신의 의무의 길로 인도하시고 그 길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해주십사고 기도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미치지 못하는 듯이 보이는"(히 4:1)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2) "어째서 저는 주를 떠나 있는 것과 같이 얼굴을 가리우는 유혹 속에 있어야 됩니까?"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 고정된 평안을 얻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께 진지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떠돌아 다니는 부랑자 무리같이 되지 아니하고 우리 곁으로 통과하시는 이가 우리를 쉽사리 줍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Ⅱ. 이런 요청에 대해 신랑이 주는 은혜스런 응답(8절). 하나님께서는 우리 기도에 대해 얼마나 기꺼이 응답하시며 특히 교훈을 바라는 기도에 얼마나 즉각적으로 응답하시는가를 살펴 보아라. 아직 이 여인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는 듣고 응답한다.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신랑은 신부에게 얼마나 자애스럽게 말하고 있는가! "여인중에 어여쁜 자야." 주 예수께서 보시기에는 믿는 영혼은 딴 어떤 것보다도 더 아름답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보든 말든 거룩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신다. 신부는 자신을 검다고 부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이 여인을 아름답다고 하신다. 자신을 낮고 천한 자로 보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눈에는 그만큼 더 사랑스럽게 보인다. 그들이 자신의 못남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바로 그들의 아름다움 중 주요한 부분을 이루는 것이라고 더얼햄 선생은 말한다.2. 그가 그녀의 무지에 대해 얼마나 온화하게 책하고 있는지 다음 말에서 살펴보자.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이 말씀 가운데에서 그는 만약 그녀 자신의 잘못만 아니었더라면 그녀가 그것을 알수도 있었으리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너는 나와 내 양떼를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단 말이냐? 이와 비슷한 질문을 빌립이 했을 때 그리스도께서 하신 대답을 비교해 보자(요 14:9).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아직도 나를 알지 못하느냐?"
3. 그러나 여기서는 그가 얼마나 자상스럽게 자기를 찾을 수 있는 곳을 그녀에게 인지시키고 있는지 살펴보자. 사람들이 설사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더라도 "그들을 믿지 말며 따라 가지 말라"(마 24:23, 26).
(1) "선한 자의 길로 행하며"(잠 2:20), 그 자취를 따르고 선한 옛길을 구하라. "양떼의 발자취"를 살피고, 그 발자취를 "따라가라." 이것은 가만히 앉아서 "주여, 제게 그 길을 보이소서"하고 소리치지 말고 우리 스스로가 분발하여 그 길을 찾아내어야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우리는 "양떼의 발자취"가 어느쪽 길로 갔으며 경건한 백성의 행적이 어떠했는지를 살펴 봄으로써 이 길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 행적이 곧 우리의 행적으로 되게 하자(히 6:12; 고전 11:1).
(2) 좋은 사역자들의 지도 아래 있으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네 자신과 네 염소새끼를 먹일지니라. 네가 관리하는 것은 너와 함께 데리고 올지니라"(당시의 풍습은 아마 어린 양과 새끼염소를 여인들 즉 여목자의 소관으로 맡겼던 것 같다). "저들은 모두 환영을 받을 것이다. 목자들은 르우엘의 딸들에게 한 것같이(출 2:17), 네게 훼방을 놓지 아니하고 오히려 너의 조력자가 되어 줄 것이니, 너는 그들의 장막을 의지하고 살아라." 그리스도를 잘 알고자 하며 그와 교제하기를 원하는 자들은 열심히 그리고 양심적으로 거룩한 의식에 집착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백성에 가맹하여 그의 사역자들을 받들어야 한다. 가족들을 책임지고 있는 자들은 종교적인 집회에 자기와 함께 자기 가족들도 데리고 나와야 한다. 저희의 "염소새끼", 곧 저희의 자녀와 하인들도 "목자의 장막"에서 혜택을 입게 하여야 한다.
Ⅲ. 신랑이 자기 배필에게 주는 높은 찬사. 히브리 방언으로 "결혼에 의해 며느리나 사위가 된다는 것"은 "칭찬을 듣는다"는 말인데(시 78:63 난외 주석), 여기서도 이 배우자는 그런 칭찬을 받고 있다. 그 "남편"은 이 "덕행있는 여인"을 "칭찬하고 있다"(잠언 31:28). 그는 시에서와 같이 직유로써 이 여인을 찬양한다.
1. 그는 그녀를 자기 "사랑"이라고 부른다(9절). 이 말은 본서에서 흔히 사용되는 사랑스런 칭호이다. "내 친우야, 내 동무야, 내 사랑하는 자야."2. 그는 이 여인을 "바로의 병거에 매단," 강하고도 위풍 있는 한 조(組)의 "준마"에 비유한다. 애굽은 훌륭한 준마로 유명하였다. 솔로몬도 자기 말은 그 곳에서 취하였다. 물론, 바로 왕은 자기 병거를 위해 그 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준마를 골랐을 것이다. 교회는 자신의 연약함을 호소하였고, 대적들의 먹이가 되려는 자신의 위험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 하신다. "내가 너를 한 떼의 준마들같이 만들었다. 내가 말에게 힘을 준 것처럼(욥 39:19) 네게도 힘을 넣어 주노니, 너는 은혜로운 담대함으로 두려움을 조롱하게 될 것이며 사자처럼 겁이 없을 것이다(잠 28:1). 여호와께서 너를 전쟁날에 자기의 준마와 같게 하셨다(슥 10:3). 나는 너를 나의 기병대에 비유하였으니, 너는 바로의 병거를 이긴 거룩한 천사들이요 불말이로다." "주께서는 주의 말을 타시고 이긴 거룩한 천사들이요 불말이로다." "주께서는 주의 말을 타시고 바다를 통행하셨나이다"(합 3:15; 사 63:13). 우리 자신은 약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만약 우리를 말처럼 강하고 담대하게 만드신다면, 우리는 모든 암흑의 권세가 우리에게 끼칠 수 있는 그 어떤 해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3. 그는 그 여인의 아름다운 용모와 장신구에 감탄한다(10절). "네 두 빰은 보석줄로 아름답고," 머리의 치장 즉 "땋은 머리털"이나 좋아하는 물건(이렇게도 해석함)이나 리봉의 매듭으로 "아름답구나." "네 목은 물론 구슬꿰미도 아름다우며," 이는 일급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금사슬"과 같은 것들이다. 그리스도의 성례전은 교회의 장신구이다. 성령의 은혜와 은사와 위로는 모든 믿는 영혼을 치장시켜 주시며 미화시켜 주신다. 이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큰 가치"를 제공해 주는 것들이다. 성도의 장신구는 많으나 그 모두가 질서정연하게 "꿰미"와 "사슬"로 배열되어 있다. 그래서 상호간에 연결이 되어 있고 서로가 의존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어떤 사물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즉 아름다움은 목이나 뺨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그 목이나 뺨을 치장해 주는 장식물에서 나온다.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그것은 "내가 네게 입힌 아름다움이니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우리는 벌거벗고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타락한 몸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겔 16:14).
Ⅳ. 이 여인의 장식물에다 더 보태주고자 하는 그의 은혜로운 의도. 하나님께서는 참다운 은혜를 주신 곳이면 더욱 많은 은혜를 주실 것이다. "가진 자는 더욱 받을 것이다." 교회는 죄에 대해 저항함에 있어서 "바로 병거의 준마"처럼 용감한가? 교회는 은혜를 행사함에 있어 "보석 꿰미"와 "황금 사슬"처럼 "아름다운가?" 이 아름다운 여인은 항층 더 미화될 것이다(11절).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을 은정(銀釘)으로 박든지" 새겨 넣든지 "하여 만들리라." 교회와 모든 참된 신자의 "아름다움이 완전하게" 될 때가지 부족한 점은 무엇이든지 메꾸어질 것이다(겔 16:1 참조). 여기에서 이 일은 성 삼위의 일치된 능력으로 행해질 것이 약속되고 있다. "우리가" 그것을 "만들리라." 이것은 창세기 1장 26절의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란 말씀처럼" "우리가 인간을 새롭게 만들며 그 아름다움을 완성시키자"란 말씀이다. 선한 것을 만드신 바로 그분이 그 선한 일의 완성자가 되실 것이며, 그 작업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아가 1:12-17)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와 그의 배우자 간의 담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상호간에 사랑의 표현이 교환되고 있다.
Ⅰ.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크게 만족히 여기며 또한 그와의 교제도 흡족하게 여긴다. "믿는 너희에게는 그가 보배로우며"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귀하다(벧전 2:7).
1.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최고 주권자로 생각하고 그에 대해 겸손한 존경심을 갖는다. 그는 위엄과 지배권을 가진 왕이다. 그는 존귀의 면류관을 쓰고 계시며 권세의 홀을 들고 계시는데 이 두 가지는 그의 모든 백성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만족이 된다. 이 "왕"은 자기의 상(床)을 복음 안에 펼치는데, 이 안에는 "기름진 것으로 모든 민족을 위한 연회가 베풀어져 있다"(사 25:6). 지혜는 "자기의 식탁을 공급해 준다"(잠 9:1). 그는 "자기의 손을 보러 이 상에 앉는데"(마 22:11), 이는 자기의 손님들에게 적당한 것 중 빠진 게 없는가를 살피기 위함이다. 그는 "그들과 함께 마시고, 그들은 그와 함께 마신다"(계 3:20). 그는 그들과 친교를 가지며 그들을 기뻐한다. 그는 "자기 상에 앉아" 그들을 환영하며 그들에게 먹을 것을 잘게 썰어 주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떡 다섯 덩이를 쪼개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무리들에게 분배하도록 하신 것과 같다. 그는 거기에 앉아서 청원을 받기도 하는데, 이는 이하수에로왕이 "술잔치"에서 에스더의 청원을 받아들인 것과 같다. 그는 자기 성례에서 언제나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한편 신자들은 그에게 할 수 있는 모든 존귀를 드리며, 어떻게 하면 그에게 대한 존중과 감사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지 연구한다. 이것은 마리아가 "매우 값비싼 나도 향유"를 그의 머리에 부을 때 행하였던 태도와 같다. 이 나도 한 근의 가치는 "삼백 펜스"(데나리온)나 되는 것으로, "기분좋게 하는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였다"고(요 12:3) 할 정도로 매우 향기로운 것이었다. 이 기사는 마치 이 구절을 암시하기 위해 기록된 것 같이 보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때에도 "상에 앉아 계셨던" 때문이다.훌륭한 크리스챤들은 여하한 종교적 의무 속에서, 특히 왕이 우리와 함께 "그" 자신의 "상에 앉기를" 즐거워하는 주의 만찬의 성례에서는 자기들의 은혜를 다해야 한다. 즉 회개로 자기들의 심령을 깨지도록 하며, 믿음으로 그 상한 심령을 치유시키고, 그리스도께 대한 거룩한 사랑과 사모로 또한 계시될 영광에 대한 즐거운 기대로 마음이 불타오르게 해야 한다. 이럴 때가 곧 "나도 기름이 그 향기를 토하는 때"인 것이다. 이렇게 할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영예를 받으시는 것으로 간주하시며, 동방의 현자들이 한 것과 같이 자기에게 대한 경의의 표시로 기꺼이 받아들이신다. 동방의 박사들은 "유향과 몰약"을 그에게 선물로 드림으로써 새로 나신 유대인의 왕에게 충성을 바쳤던 것이다. 신도들의 마음 속에 작용하시는 성령의 은혜는 그 자체로서 매우 귀중하며 그리스도께는 즐거운 것이다. 그는 성령 가운데 임하셔서 그들을 이끌어 내어 행동하게 하시며 실행하게 하신다. 만일 그가 물러나시면 은혜는 시들어 버리며 쇠잔하고 만다. 이것은 마치 해가 없으면 식물이 시들고 메말라 버리는 것과 같다. 만약 그가 접근하시면 영혼의 얼굴은 마치 봄이 돌아온 지표면같이 새로워진다. 그리고 이 때는 우리 자신이 한 줄기 빛이나 한 차례의 강풍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분기할 때이다. 그것은 은혜가 행하는 일 외에는 기쁘게 행해져야 할 일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히 12:28).
2. 그들은 자기들이 "사랑하는 자"로서, 매우 "사랑하는 자"로서 그리스도께 대해 강렬한 애정을 품는다(13절).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영혼으로부터 "사랑받는 분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매우 사랑하는 분," 즉 가장 사랑하는 분이요 유일하게 사랑하는 분이시다. 그는 저들의 마음 속에 어떤 적수도 용납받지 못하는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나니, 곧 그 자리는 가장 안쪽의 자리요, 가장 높은 최상급의 자리이다.(1) 그리스도는 모든 신도들에게 어떤 분으로 여겨지는가? 그는 "몰약 향낭"이요 "고벨화 송이"이다. 우리는 이것이 즐거움과 기쁨을 주는 어떤 것이라고, 아니 모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그의 복음이 주는 교훈과 그의 성령이 주시는 위로는 성도들에게 매우 원기를 북돋아 주며, 신도들은 그의 사랑 안에서 휴식을 취한다. 모든 감각적 쾌락과 그 어떤 관능의 즐거움도 신도들이 그리스도를 명상하고 그를 즐기는 일에서 얻는 영적 쾌락에 필적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오는 즐거움은 복합적인 것이며 동시에 풍성한 것이다. 즉 "몰약 향낭"이요 "고벨화 송이"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충만한 그리스도 안에서 궁핍을 당하지는 않는다. (영어로)camphire라고 번역된 언어는 copber이며, "속죄"나 "보상"(propitiation)을 의미하는 단어와 동일하다. 그리스도는 모든 신도들에게 본받을 점과 의로움의 "송이"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에게 소중한 분이시다. "그는 저희 죄악에 대하여 보상해 주심으로써 화해시켜 주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 신부가 이것을 얼마나 강조하여 표현하는지 살펴보자. 그는 "내게 있어서," 그리고 또 "내게 있어서" 전부가 달콤하다. 그가 딴 사람들에게는 어떠하든 간에 "내게는" 감미롭다. 그는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위해 자기 자신까지도 내어 주신 분"이다. 그는 "나의 주요, 나의 하나님" 이시다.
(2)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신도들에게 어떤 모양으로 영접되는지 관찰하라. "그는 밤새도록 나의 품 가운데," 내 가슴 가까이에 "누울 것이라."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사랑하시는 제자들을 그 품 속에 두셨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째서 사랑하시는 주님을 자기들의 가슴 속에 두어서는 안 되겠는가? 왜 그들은 결코 놓치지 않도록 양팔로 자기들의 구주를 꼭 붙잡지 않는가? 그리스도께서는 "마음 속에 거하시지" 않으면 안 된다(엡 3:17). 이를 위해서는 "그 품 가운데에서" 음행을 제하지 않으면 안 되며(호 2:2), 영혼 속에 어떤 거짓된 것이 자리를 점유하고 있어서도 아니 된다. 그는 "내 품" 사이에서 "한 묶음의 몰약"이나 향낭 같아서 언제나 내게 사랑스러울 것이다. 혹은 서로 사랑하는 자의 관습대로 그의 축소된 회상이나 사랑의 표시물이 "내 품" 사이에 걸려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내품 속에 잠시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누울 것이며 거기서 살 것이다.
Ⅱ.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교회와 모든 진정한 신도들을 매우 만족해 하신다. 그들은 그가 보시기에 사랑스럽다(15절). "보라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다. (그리고 다시) 보라! 너는 어여쁘구나." 그가 이렇게 말함은 이 여인에게 교만심을 채워 주기 위함이 아니라(겸손은 영적 이름에 있어서 한 가지 중요한 성분이다) 다음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1. 진정한 아름다움은 거룩함에 존재하며, 성별된 모든 자는 그로 인해 아름답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하여 성화(聖火)된 자들이야 말로 참으로 아름다운 자들이다.2.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은혜가 신도들의 영혼에 작용하여 이룩해내는 그 선한 사업을 아주 기뻐하신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비록 신자들이 여러 가지 약점을 가지더라도, 또 그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세상이 그들을 어떻게 여기든지 간에,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믿는 신도들을 아름답게 생각하신다. 그는 그들을 친구라고 부르신다. "썩지 않는 것으로서 마음에 숨기운 속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값진 것이다"(벧전 3:4).
3. 자신들의 검음 때문에 낙심하는 연약한 신자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자신의 약점 때문에 의기 소침해지는 나약한 신도들을 자신이 아름다운 자라고 하는 말씀을 몇 번이고 듣도록 하라.
4. 성별된 모든 자들이 그들을 아름답게 해 준 그 은혜에 대해 매우 감사하도록 하기 위하여. 이는 태어날 때 기형적으로 생겼던 그들이 그 은혜로 인하여 아름답게 되었으며, 에디오피아인들의 피부처럼 검던 그들이 은혜로 말미암아 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배우자의 아름다움에 대한 한 가지 예가 여기에 언급되고 있으니 그것은 곧 이 여인이 "비둘기의 눈"를 가졌다는 것이다(4장 1절에도 이와 같이 표현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보시기엔 신도들의 눈은 아름답다. 신도들은 꿰뚫어 보는 듯한 독수리의 눈을 가지는 게 아니라 순결하고도 정숙한 "비둘기의 눈"을 가진다. 그 눈은 위로 솟구쳐 오를 때에도 땅 위의 먹이 위에 그 눈을 계속 고정시키는 매의 눈같이 아니하고 겸손하며 정결한 눈이다. 소박함과 경건한 성실성과 비둘기 같은 순진성을 발견하는, 그러한 눈이다. 저 복되신 "비둘기"인 "성령"에 의해 밟혀지도록 인도되는 눈이요 우는 눈이다. 나는 "비둘기처럼 슬피 울었노라"(겔 7:16).
Ⅲ. 교회는 그리스도께 대한 자기의 가치를 나타내며, 존경에 대한 존경으로 답례하고 있다(16절). "보라, 너는 어여쁘다." 그리스도와 신자들이 서로 어떻게 찬미하는지를 살펴보라.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대하여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출 15:11)라고 말하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너와 같은 자가 누구뇨?" (신 33:29)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교회는 이렇게 말한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아름다운 자라고 부르십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만약 힘에 대해 말한다면 당신께서 강하십니다(욥 9:19).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더라도 주께서 아름다우십니다. 저는 당신의 형상이 제게 찍힌 만큼만 아름답습니다. 주께서는 위대하신 원본(Original)이시고 저는 희미하고 불완전한 복사품(copy)에 불과합니다. 저는 당신의 umbra 곧 당신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요 1:16; 3:34). 당신은 원래부터 아름다우신 분이며, 더욱이 당신의 소유가 되는 모든 자에 화창한(즐거운) 분이십니다. 보기에는 아주 아름다우나 그 성질은 비뚤어져서 불쾌감을 주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어여쁘고 화창합니다." 우리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계약을 맺으신 것을 즐거워하시며 우리와의 관계를 즐기신다. "왕이 자기 상에 앉으실 때, 주께서는 즐거우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신도들에게 언제나 귀중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그는 특히 신도들에게 자기와의 교제가 허용될 때, 그들이 자기 목소리를 듣고 그 얼굴을 보며 그의 사랑을 맛보게 될 때 더욱 즐거워하신다.
"여기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까지 이 여인은 자기 남편의 인품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였는데 그 다음에는 그녀 자신에게 그토록 훌륭하게 대해준 데 대한 기쁨으로 황홀해진 사랑스런 신부답게, 신랑이 자기를 즐겁게 하기 위해 베푼 시설에 대해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다. 즉 그의 "침상," 그의 "집," 그의 "석가래," 혹은 "회랑"에 대해 찬사를 던지고 있다(16절). 이것은 거룩한 예전에 적용하기에 적합하다. 성례전에서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가지며, 그의 사랑의 표시를 받고, 신도들은 답례로 그리스도께 대한 경건하고도 독실한 애정을 보낸다. 이렇게 하여 신도들은 그를 아는 안목을 높이며 그리스도께로 말미암은 그들의 이익을 증진시킨다.
1. 이 여인은 이들을 "우리의 것"이라고 칭한다.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신도들은 이들 성례전 안에서 공동의 이익을 가지기 때문이다. 남편과 아내가 "함께 상속받는 자"이듯(벧전 3:7). 신자들도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받는 공동 상속자"이다(롬 8:17). 이러한 것들은 그의 규례인 동시에 신자들의 특권이기도 하다. 이 거룩한 의식 안에서 그리스도와 신도들은 만나는 것이다. 이 여인은 이것들을 "내 것"이라고 부르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이익을 가지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이 여인은 "네 것"이라고 하지도 않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네 것이라"(눅 15:31)고 말씀하신 까닭이다. 우리가 만약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다. 믿음으로써 그리스도께 대한 정당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의 소유가 되는 모든 것에 대해 권리를 주장할 수가 있다.2. 신랑이 마련한 시설들은 그 종류 중에서 최상의 것이다. 그 침상의 빛깔과 그것에 딸린 가구는 그 침상을 돋보이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가? "우리의 침상은 푸르다." 푸른색은 목장에서 딴 어떤 색깔보다도 우선적인데, 이것은 목자의 일과 기쁨이 있는 들판과 숲의 색이 푸르기 때문이다. 이 색은 힘을 북돋아 주는 색깔이며 눈에 좋은 색깔이다. 이 색은 또 다산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는 푸른 감람나무 같다"(시 52:8). 우리는 "그리스도께 결합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열매를 맺어드려야 마땅하다(롬 7:4).
"우리집의 들보는 백향목이로구나(17절)." 이것은 아마 솔로몬 자신이 저간에 하나님과 백성간의 교제를 위해 건립하였던 성전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이 성전은 "백향목"으로 지어졌는데, 이 백향목이란 나무는 강한 종류의 재목으로서 향내가 나며 오래가는 나무이다. 또 이 나무는 잘 썩지도 않는데, 이것은 복음의 성전인 교회의 견고함과 지속성을 상징한다. 걸어들어 가는 회랑(gallery)은 "잦나무"나 "삼나무(cypress)"로 되어 있는데 이 나무는 보기에도 좋고 냄새도 좋은 것이다. 이것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걸으며 그와 담소를 나누면서 얻는 기쁨을 암시한다. 은총의 계약 속에 있는 모든 것은(성도의 모든 약정은 은혜의 언약을 벌판으로 하고 이행된다)매우 견고하고 훌륭하며 아주 향기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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