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대함에 대한 의무 (전도서 11:1-6)
솔로몬은 본서에서 부자들에게 그들 자신의 재물이 주는 위로를 누리라고 이따금씩 강조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부자들에게 저희 부로써 타인들에게 선을 베풀며, 가난한 자들에게 아낌없이 주도록 하라고 강조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그것이 그들의 유익을 풍부하게 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Ⅰ. 의무 그 자체가 우리에게 어떤 모양으로 권장되고 있는지 살펴보자(1절).
1. "너는 네 식물(떡)을 물 위에 던지라." 이것을 "너는 너의 떡만드는 데 쓸 곡식을 낮은 장소에 던지라"고 해석하는 자들도 있다. 이때 "너"는 농부를 암시한다. 즉 농부는 "나가서 귀중한 씨앗을 거두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는 자기 식구들이 먹을 곡식을 절약하여 파종할 종자도 남긴다. 이것은 그가 다음 해에 종자가 없으면 결실을 얻지 못 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이와 같이 자비심 많은 사람은 곡식 종자를 위해 자기 식용 곡식에서 얼마를 떼는 것과 같이 자신의 허리를 줄여서 가난한 자에게 공급해 준다. 이는 그가 "모든 물가에 씨를 뿌리기"위함이니(사 32:20), 그는 심는 대로 "거둘 것"이기 때문이다(갈 6:7). 우리는 "강의 수확"에 대해 알고 있다(사 23:3). 성서에서는 하수가 다수를 표현하며(계 16:5) 그와 같이 세상에는 가난한 자들이 무수하게 있다(자비를 베풀 대상이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아니다).
물은 또한 슬퍼하는 자들을 상징한다. 가난한 자들은 슬픔을 가진 사람들이다. 우리는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식물"을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니, 좋은 말씀뿐만 아니라 "좋은 물건"도 주어야 한다(사 58:7). 그러나 "네" 식물(떡)은 정직하게 얻은 것이라야 한다. 우리 자신의 소유물이 아닌 것을 주는 것은 자선이 아니라 해를 입히는 것이다. 먼저 "의롭게 행하라." 그리고 나서 "자비를 사랑하라." "네가 자신을 위해 예정했던 너의 빵"을 욥이 그러했던 것처럼(욥 31:17), 가난한 자들과 함께 나누어 먹도록 하여라. 설사 네 빵이 물 위에 던진 것이 없어지듯, 없어지는 것처럼 여겨지더라도 가난한 자에게 거저 주라. 해로로 무역하는 상인들과 같이 모험 삼아 네 빵을 물에 던저 항해 시켜 보아라. 투기(모험)로 그것을 떠내려 보내라. "물에게" 그것을 맡겨라. 그것은 절대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2.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한 몫을 나눠 주라. 즉 자선하는 일에 관대하고 아끼지 말아라."(1) "줄 것이 많거든 많이 주어라. 소량이 아닌 한 몫을 주며, 한 입이나 두 모금이 아닌 한 그릇, 일 인분의 식사를 주라. 쥐꼬리만큼 주지 말고 큰 덩이를 떼 주라. 말을 후히 되어 주라(눅 6:38). 잔칫날에 아무 것도 준비하지 못한 자들에게 몫을, 가치 있는 몫을 나누어 준 자와 같이(느 8:10) 주는 데 아끼지 말아라."
(2) "많은 자들에게 즉 일곱, 또한 여덟에게 주라." 네가 만약 자비의 대상을 일곱 사람 만나거든 그들 모두에게 나눠 주라. 그리고 나서 네가 여덟 번째 사람을 만나더라도 또 그에게 주라. 그리고 또 여덟 사람을 더 만나더라도 그 여덟 명 모두에게도 주어라. 네가 이제까지 행한 선행을 앞으로 행해야 할 더 많은 선에 대한 변명과 구실로 삼지 말고, 계속 선을 행하여라. 가난한 자의 수효가 증가하는 곤란한 때에는 네 자비심도 그에 비례하여 확대시켜라." 우리 모두는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나 우리 모두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는 풍부하시다. 그는 "마음껏 주시며" 이전에 주신 선물을 가지고 "꾸짖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천부께서 그리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와야 한다.
Ⅱ. 이것을 우리에게 강요하는 이유.
1. 선행에 대해 우리가 받을 보상은 매우 확실하다."네가 그것을 물 위에 던질 때 그것은 없어지는 것같다. 너는 네가 그것을 던지면서 좋은 말을 보내지만, 다시는 그것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많은 날이 지난 후에 그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는 농부가 그 풍요로운 수확에서 씨앗을 발견하게 되며, 상인이 풍부한 재물을 싣고 귀항하는 배에서 자기 모험을 찾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망실된 것이 아니라 잘 투자되어 있고 잘 저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에는 풍부한 이자를 덧붙여서 돌아 오는데, 이는 하나님의 섭리가 베푸시는 현재의 선물과 은혜와 그의 성령이 주시는 위로인 것이다. 원금은 더욱 떼일 염려가 없으니 그것이 천국에 저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호와께 빌려준 것이 된다.
이방인 세네카도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Nihil magis possidere me credam, quam bene donata─즉 내가 주어 버린 것 만큼 완전하게 소유하는 것은 없다. Hoc habeo quodcunque dedi; hoe sunt divitioe certoe in quacunque sortis humanoe levitate─즉 나는 내가 나누어 준 것은 무엇이든지 다 소유하고 있다. "이 부요한 재물은 인생의 모든 영고성쇠를 통해 항상 나와 함께 남아 있다." "너는 그것을 찾으리라. 아마 신속히 찾지는 못할 터이나 여러 날 후에는 찾을 것이다. 보상은 더디게 올 것이지만 그것은 확실히 오며, 그 보상은 더 더욱 풍성할 것이다." 가장 가치있는 곡식이라고 하는 밀은 땅 속에 가장 오래 묻혀 있다. 오랜 항해는 가장 훌륭한 귀항을 가져오는 것이다.
2. 우리가 선행할 수 있는 기회는 매우 불확실하다. "너는 어떤 재앙이 땅 위에 임할지 알지 못한다. 이 재앙은 네게서 재산을 박탈해 갈지도 모르며, 선을 행할 수 있는 너의 능력을 박탈해 갈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네가 재산을 보유하고 있는 동안에 마음껏 선을 행하며 현재의 시기를 활용하여라. 농부는 서리가 오기 전에 그의 땅에 씨를 뿌리는 법이다."우리는 "재앙이 땅 위에 임할 것"이라고 예상할 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고난을 당하도록 태어났기 때문이다. 무슨 재앙이 있을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그 재앙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가 그것에 대한 준비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형통한 날이 선한 중에 있으며, 선을 행하고 있음은 우리의 지혜이다. 이 말씀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는 일에 대한 반론으로 사용하는 이들이 많은데, 이는 그들이 스스로 궁핍하게 되는 어려운 시기가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어려운 시기가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자선심을 가져야 한다. 즉 "재앙의 날이 오더라도" 능력이 있을 때 선을 행했었다는 데에서 우리는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에게서 자비를 구할 수 있는 소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긍휼을 보여야 한다. 우리가 자비심에 의해 우리의 소유물을 하나님께 신탁해 둔다면, 그것은 어떤 악화된 시기에 대하여 그 소유를 믿을 만한 손에 두는 것이다.
Ⅲ. 이 의무에 대해 야기되는 반대와 자비를 베풀지 않는 자의 변명을 그가 어떻게 제거하는지 살펴보자.
1. 어떤 자는 그들이 가진 것은 그들 자신의 소유이며, 그들 자신에게 소용되는 일을 위해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래서 "왜 우리가 그것을 이 처럼 물 위에 던져야 한단 말인가?" 어째서 "내 떡과 고기를 취하여 내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 하는 자에게 주어야 한단 말인가?" 하고 반문할 것이다. 나발도 그렇게 항변하였다(삼상 25:11). "인간이여 위를 보아라. 그리고 생각하라. 만약 네 머리 위의 구름이 물을 자기들의 소유물이라고 주장한다면, 너는 불모의 대지 위에서 금방 굶어 죽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네가 보듯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그들은 대지로 하여금 열매 맺게 하기 위하여, 물 뿌리는 것으로 지치고 다 소모될 때까지 땅에 쏟아지는 것이다"(욥 37:11). 이와 같이 하늘은 그토록 까마득한 아래에 있는 땅에게도 풍성하게 혜택을 내리는데, 너는 "네 뼈중의 뼈"인 너의 가난한 형제에게 혜택주는 일을 아까와 하려느냐?혹은 이렇게 말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비록 가난한 자에게 조금밖에 주지 못할망정, 우리는 감사하게도 어느 누구 못지 않은 자비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솔로몬은 "만일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그들은 스스로를 비운다"고 말한다. 만일 심중에 자비심이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약 2:15, 16). "자기 영혼을 배고픈 이에게 빼내어 주는 자"는 능력이 있는데도, 굶주린 자들에게 자기 손을 내어 밀 것이다.
2. 어떤이는 자기들의 유용성의 한계가 낮고도 좁다고 말할 것이다.타인들이 선을 행하는 것을 보면, 그들은 공적인 입장에 있으므로 선을 행할 수 있으나 자기와 같은 신분은 선을 행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 앉아서 보기만 할 뿐 아무 것도 행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솔로몬은 "나무가 쓰러진 곳에(우연히 쓰러졌다고 해도) 그대로 있는 것은" 그 나무 임자의 이익을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다. 즉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가 자기를 던져 준 곳이면 그곳이 어디가 되든 그 장소가 복되도록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지 간에 행하려는 마음만 있다면 행할 만한 좋은 일을 언제든지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자는 또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자신이 자선을 받아야 할 변변찮은 자라고 자처하는 이가 너무 많아서, 나는 누구에게 자선을 베풀어야 마땅한지 알지 못한다." 이에 대해 솔로몬은 다음과 같이 이른다. "그 일에 대해서는 곤란해 할 것 없다. 할 수 있는 데까지 분별해서 주어라. 그리고 나서는 비록 그 사람이 네 자선을 받을 만큼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판명되더라도 네가 정직한 마음으로 자선을 베푼다면 결코 그 보상을 잃지 않으리라는 것에 만족하여라. 네 자선이 "남이든 북이든" 어느 쪽을 향해 행해지든 간에 너는 그 자선이 가져오는 이익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은 흔히 죽음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을 행하고, 좋은 나무와 같이 "의로움의 열매를 맺자." 이는 죽음이 곧 임해서 우리를 찍어 넘어뜨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육신이 행한 것을 따라 행, 불행이 결정되어 변하지 않는 상태에 있게 되기 때문이다. 나무가 죽으면 쓰러지듯이, 몸도 죽으면 영원토록 누워있게 될 것이다.
3. 혹자는 자선을 행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많은 실망을 들어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그들은 자선을 행함으로 해서 교만하다거나 바리새적이란 비난을 받았던 것이다. 그들은 줄 것이 거의 없어서 타인들과 같이 주지 못하는 경우에는 없신여김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궁핍하게 될 수도 있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차라리 자녀들을 위해 저축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는 자들이다. 그들에게는 납부해야 할 세금이 있고 구입해야 할 물건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자비심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알지 못하며 자선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변명들과 그외 수백 가지의 유사한 반대에 대해 솔로몬은 단 한 마디로 대답하고 있다(4절). "풍세를 살펴 보는 자는 파종하지 않을 것이요(이 말은 선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름을 바라 보는 자는 거두지 아니하리라"(이것은 선한 것을 얻음을 뜻한다).우리가 모든 사소한 어려움을 크게 받아 들이고, 하찮은 문제를 큰 일이나 난 듯 떠들어대면서 이의를 달기 시작하고,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는 곤란과 위험을 상상하려 든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결코 우리 일을 추진할 수 없을 것이며, 더우기 우리 일을 완성 시킨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을 것이고 그 일에서 아무 것도 이루어낼 수 없을 것이다. 만일 농부가 떠다니는 구름에 일일이 얽매어 파종하기를 거절하거나 그만두어 버리며 세차게 부는 모든 바람 때문에 거두려 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 해에 흉작밖에는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신앙 생활에서 우리가 해야할 의무는 씨 뿌리는 일이나 거두는 일처럼 필수적인 것이며, 그 농사 행위 만치 우리에게 유익한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우리가 이런 의무들을 수행하면서 부딪치게 되는 방해하는 바람이나 구름과 같아서 우리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도 못할 것이며, 조그만 용기와 결심만 가진 자라면 이를 개의하지 않고 쉽사리 돌파할 수 있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작은 어려움 때문에 크고도 실질적인 의무를 포기하거나 그 의무에서 물러서는 자들은 신앙 생활상의 어떤 일도 결코 성사시키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최소한 우리의 상상 속에서라도 우리를 낙심케 하는 바람이 언제나 일어날 것이며 이런 저런 구름이 항상 피어 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람과 구름도 하나님의 수중에 들어 있으며, 그들은 우리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 기독교는 어려움을 참는 것이 우리 의무라고 한다.
4. 혹자는 이렇게도 말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자선에서 소비한 비용이 어떤 모습으로든지 보상되는 것을 보지 못한다. 우리는 점점 더 부자가 되지도 못한다. 만약 우리가 자선의 효험을 기대할 수 있는 어떤 방법도 발견하지 못한다면, 어째서 우리는 자비로운 자에게 축복이 내릴 것이라고 하는 일반적인 약속에 의존해야 하는가?" 이런 반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알지 못 하며 네가 그것을 안다는 것도 합당치가 못하다. 너는 비록 그가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약속을 지킬실지 네게 일러 주시지 않고, 꿰뚫어 볼 수 없는 지혜의 계획대로 역사하시며 자기 혼자만의 방법으로 일하신다고 하더라도, 그가 자기의 약속 말씀은 실행하시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일하실 것이고, 아무도 그를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축복은 서서히 올 것이지만 꼭 올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그것을 알든 모르든 간에 틀림없이 그의 말씀대로 행해질 것이다." 그는 두 가지 사례로 하나님의 일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지적하고 있다.(1) 우리는 "성령의 길이 어떠한지(어떤 사본은 "바람의 길이 어떠한지"로 되어 있다)알지 못하며 그것이 어디로부터 오며, 어디로 가는지," 언제 그것이 돌아 가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뱃 사람은 바람이 순풍으로 바뀔 때까지 준비하고 기다린다. 그와 같이 우리도 축복이 예정된 그 시간을 기대하면서 우리 의무를 행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혹은 이 말씀을 인간의 영혼에 대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으며 우리의 영혼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영혼들이 어떻게 육체 속으로 들어가서 몸과 연합하고, 그 몸에 어떤 방법으로 활기를 부여하며 작용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영혼 그 자체는 신비이다. 즉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일" 보다 더 경이로운 것은 없는 것이다.
(2) 우리는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신체가 형성되는 모습이나, 신체에 영혼이 불어 넣어진 방법을 기술할 수가 없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이 두 가지는 다 "하나님의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일에 묵묵히 따르기는 하나 양자 중 어느 것도 그 작용 과정을 추적할 수는 없다. 우리는 비록 태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는 알지 못하나 밴 아이가 태어난다는 사실은 의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비록 여러 가지 일들이 약속의 성취를 향해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약속이 이행된다는 사실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걱정과 불안을 떨쳐 버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편한 것을 제공해 주시며, 우리의 자선에 대해 보상해 주시리라는 것을 신뢰해야 한다. 이는 우리 몸이 신비스럽도록 기묘하게 작용하며 우리 영혼이 그 안에 깃들어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어떤 지식이나 예고가 없이도 가능한 까닭이다. 그래서 논증은 동일한 데로 귀결되며 우리의 구주가 말씀하신 의도와 동일하게 주장한다(마 6:25).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산 영혼, 곧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만들어 주신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그러므로 작은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보다 큰 일을 행하신 자에게 즐거이 의존해야 한다.
5.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여지껏 자비심을 발휘해 왔고, 가난한 자들에게 아주 많은 것을 주어왔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어떤 보답도 받아 보지 못했다. 많은 시일이 경과했으나 우리는 그것을 다시는 찾지 못 하였다."이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6절). "그렇더라도 너희는 계속하여 자선을 베풀며 꿋꿋하고 꾸준하게 선행을 하여라. 어떤 기회도 빠뜨리지 말고 착한 일을 행하여라." "아침에" 즉 일찍이 눈에 띄는 자선의 대상들에게 "너는 네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네가 피로하다는 구실로 "네 손을 거두지 말아라," 기회가 있는 대로 많은 선을 계속 행하며, 농부가 아침부터 밤까지 밭고랑을 일듯 하루 온종일 자선을 베풀어라.
청춘의 "아침 나절에는" 선을 행하는 데 자신을 바쳐라. 이 세상에 첫 발을 딛고 출발할 때, 너는 네가 가진 것이 적을지라도 나누어 주어라. 그리고 노년의 "저녁에는" 나이 많은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유혹, 곧 인색의 유혹에 지지 말아라. 인생의 황혼기에라도 "네 손을 거두지 말며," 유언서에서 자선을 베풀 것이라는 작정 아래 지금은 자선 행위를 안해도 된다고 생각지 말고 끝까지 선을 행하여라.
"왜냐하면 너는" 타인들과 네자신에게 자선과 경건의 일 중 어느 것이 "잘 될지 알지 못할뿐더러, 둘 다가 같이 잘 되기를" 바랄 만한 이유도 가지기 때문이다.
"선을 행하기에 피곤해 하지 말라. 이는 때가 이르면 너희가 거둘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는 하나님의 때인 동시에 가장 좋은 때이다"(갈 6:9). 이것은 영적 자선을 말한다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타인들의 영혼에 유익을 주기 위해 기울이는 경건한 노력을 의미한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선행을 계속해야 한다. 비록 오랫동안 헛수고를 하였어도 결국은 성공을 보고야 말 것이다. 사역자들은 저희 씨뿌림의 날에 아침 저녁으로 씨를 뿌려야 할 것이다. "어느 것이 잘 될지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젊은이에 대한 경고 (전도서 11:7-10)
여기에는 늙은이들과 청년들 모두는 죽을 것을 생각하고 그에 대비하도록 하라는 훈계의 말씀이 나온다. 전도자는 이제까지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는가 하는 방법을 많은 훌륭한 교훈으로써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는데, 이제 자기 담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우리에게 잘 죽을 수 있는 방법과 우리의 종국을 염두에 둘 것을 가르치게 된다.
Ⅰ. 그는 부로(父老)격인 노년층에게 눈길을 돌리고, 그들에게 이글을 써서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깨우쳐 주고 있다(7, 8).
1. 인생의 감미로움에 대한 합리적 양보. 노인들은 경험에 의해서 인생에 즐거운 단면이 있음을 아는데 그는 이에 수긍하고 있다.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태양" 광선이 그러하며,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로다." 빛은 이 큰 세계의 창조시 제일 먼저 만들어진 것이며, 눈은 소 세계인 육신의 창조에서 맨먼저 만들어진 것 중 하나다.빛을 보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이방인들은 그 즐거움에 너무나 매혹되어서 태양을 숭배하기까지 했다. 또한 그 빛으로 말미암아 딴 사물을 보게 되고, 이 세계가 우리에게 주는 무수한 유쾌한 광경을 볼 수 있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생명의 빛도 그러하다. 빛은 생명을 상징한다(욥 3:20, 23). 생명이 즐거운 것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악인들에게 있어서 조차 생명이 감미로운 것이니, 그들도 "이 생에서 저희 몫"을 가지기 때문이다. 착한 사람들에게 생명이 즐거운 것은 그들이 보다 나은 생명에 대한 준비 기간으로써 이 생명을 소유하는 까닭이다. 생명은 모든 사람에게 즐거운 것이다. 자연도 그렇게 말하며 여기에는 논란이 있을 수 없다. 죽음이 현세의 악에 대한 종지부나 미래의 선에 대한 관문이라고 생각지 않는다면, 죽음 그 자체를 바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며 죽음은 공포의 대상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생명은 즐거운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생을 너무 사랑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 자신에 대한 경비를 배가해야 할 필요가 있다.
2. 인생의 한창 시절에 조차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해보며, 생이 매우 감미롭고 우리가 죽음을 아주 망각하기 쉬운 때에도 생명에 대한 생각을 하라는 경고. "설령 사람이 많은 해를 산다고 하더라도 그는" 다가오고 있는 "어두움의 날을 생각할지어다."여기에 나타나 있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
(1) 여름 낮은 즐길 수 있는 날로 생각된다. 즉 인생은 오래 오래 계속되며 많은 해를 살 수도 있으며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생은 안락한 것이 될 수 있고 사람은 "그 모든 해를 기뻐"할 수도 있다. 이 세상에는 "많은 해를 사는"자들이 있다. 그들은 많은 위기를 모면하고 구사일생의 많은 자비로운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떤 낙도 자기들에게 부족하지 않을 것이며, 어떤 해도 자기들에게는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한다. 그래서 그들은 꼬리가 길어도 밟히지 않을 것이며, 그토록 빈번하게 우물에 가도 하나도 상하지 않고 안전하던 쪽박은 결코 깨지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 올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많은 해를 살면서 그 모든 세월을 하나같이 기뻐할 자"가 그 누구이냐? 슬프게도 그런 자는 아무도 없다. 우리는 단 몇 시간의 기쁨을 가질 뿐이지만 슬픔의 시간은 달포가 넘는다. 그러나 어떤 자는 자기들이 누리는 세월 즉 많은 해를 딴 사람들보다 더 기뻐하는 것이다. 만약 순풍에 돛을 단 것같이 형통하는 상태와 즐거워하는 심령, 이 두가지가 구비된다면, 한 인간이 그 모든 세월을 능히 즐거워하도록 하는 데에 참으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가장 형통하는 상태라 하더라도 그 안에 불순물이 섞여 있기 마련이고, 가장 쾌활한 마음에도 실망의 그림자는 끼여 있다. 희희낙낙하는 죄인들에게도 우울하면서 꺼림직한 가책이 있고, 명랑한 성도들에게도 은혜로운 슬픔이 있다. 따라서 한 사람이 "여러 해를 살고 그 모든 세월을 늘 즐거워한다는" 것은 하나의 가정에 불과하며 실제로 존재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2) 이 여름낮이 지나면 겨울 밤이 오리라는 것을 예상해야 한다. 그러나 이 건장한 노인은 "캄캄한 날들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날들은 많은 것이기 때문이다."
[1] 캄캄한 날들이 오고 있으니 그것은 우리가 무덤에 눕는 날들이다. 거기에서는 우리 몸이 어두움 속에 누워있게 될 것이다. 거기에서는 눈이 보지 못하며 태양이 빛나지 않는다. 죽음의 암흑은 생명의 빛에 대적(對敵)된다. 음부는 "흑암의 땅"이다(욥 10:21).
[2] 그 "캄캄한 날들은 많을" 것이다.
우리가 지하에 누워 있는 날들은 우리가 지상에서 살아 있는 날들보다 많을 것이다. 그 어둠의 날들은 많기는 하나 무한하지는 않다. 비록 그 캄캄한 날들은 많을지라도 그 날은 헤아린 바 되었으며, "하늘이 더 이상 있지 아니 하는" 때면 끝이 날 것이다(욥 14:12). 가장 긴 낮도 밤이 있는 법이며, 가장 긴 밤이라도 그 새벽은 오는 법이다.
[3] 우리가 자만으로 우쭐대고 세상의 안전 속에서 잠자거나, 헛된 환락으로 인해 방탕 생활에 젖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종종 그 "캄캄한 날들을" 기억해 보는 것이 유익하다.
[4] 생이 오래 계속되고 많은 위안물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캄캄한 날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날들은 반드시 올 것이며, 만약 우리가 미리 그 날을 생각해 본다면 그 날이 올 때에 우리의 두려움은 훨씬 덜 할 것이기 때문이다.
Ⅱ. 그는 또한 자녀와 같은 청년층에게 눈을 돌리고, 그들에게 이 글을 써서 죽음을 생각해 보도록 깨우쳐 준다(9, 10).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아이러니칼하게도 청춘의 허영과 쾌락을 용인하고 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 하라." 혹자는 이것을 무신론자와 쾌락주의자가 청년에게 주는 권고요 독약과 같은 제안이며, 솔로몬은 이 절의 끝부분에서 이 맹독에 대한 강력한 해독제를 처방해 주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흔히 이해되는 바와 같이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에게 한 말이나("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임이니라"), 미가야가 아합 왕에게 한 말이나("라못 길르앗으로 올라 가소서. 그리하면 승리하리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처럼("이제는 자라") 이 부분을 반어법으로 해석한다면, 이 말은 더욱 강조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젊은이들아! 네 청춘을 기뻐하고 즐거운 삶을 살아라. 네 유희를 쫓고 네 쾌락을 취하라.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고, 청춘의 공상과 헛된 희망으로 네 가슴을 부풀케 하라. 너의 즐거운 꿈으로 자신을 흥겹게 하라. 네 마음이 원하는 길로 행하라. 네가 할 마음이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다 해봐라. 그리고 육욕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일이면 서슴치 말고 해보아라.Quicquid libet, licet━즉 네 의지를 네 법으로 삼아라. 네 마음의 길로 행하라. 그리고 네 마음으로 하여금 네 눈을 따라 걷게 하라. 산만하고 한가한 마음은 배회하는 눈을 좇아간다. 네 눈에 즐거운 것이면 그것이 하나님의 눈에 드는 것이든 들지 않는 것이든 간에 행하여라."
솔로몬이 청년들에게 이처럼 반어적으로 말하는 것은 다음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1) 이와 같은 일은 그가 과거에는 행하고 싶어하던 일이었고 행해도 좋다는 허락을 얻었으면 하고 무척이나 탐내던 일이었으며, 자기 행복의 기준을 두었고 자기 마음을 두었던 일이었다.
(2) 그는 자기 주변의 모든 자가 이런 권고를 해 주고, 이와같이 멋있는 일들을 예언해 주었으면 하고 바랬었다. 그는 이에 상반되는 어떤 충고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며, 자기더러 건실하고 진실하라는 권고를 하는 자는 원수로 간주했을 것이다.
(3) 이런 자기가 얼마나 어리석었으며, 육욕에 빠진 그릇된 인생 여정이 얼마나 불합리한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준다. 본문에 나온 이야기는 만약 사리를 전체적으로 보고 공평하게 판단한다면, 그런 삶을 영위하는 것이 이성에 얼마나 배치된 행위인가 하는 것을 단 번에 알 수 있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쾌락주의적 주장의 벽두부터 이런 결론은 충분히 나오는 것이며 이론의 여지가 없다.
(4) 만약 사람들이 이와 같은 인생 향락에 탐닉한다면, 설사 하나님께서 그들을 육욕대로 살게 내버려 두시며, 그들의 마음의 욕망에 그들을 송두리째 내어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의사대로 행하도록"(호 4:7) 하신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는 것을 말해 준다.
2. 이런 헛된 일들과 쾌락에 대해 강력히 견제하고 있다. "너는 이 모든 일로 인하여 하나님이 너를 심판하실 줄로 알라. 이 사실을 충분히 참작하라. 그러고도 만일 네가 할 수 있다면, 감히 할수만 있다면 그런 호사스런 생활을 영위하여라."
이것은 앞에서 양보하고 용인하는 것처럼 말했던 것에 대한 콜라스테리온(kolasthrion), 즉 교정물(矯正物)이며, 청년의 욕망의 목에 걸어둔 고삐를 세차게 잡아 당기는 말씀이다. "그러나 만일 네가 이와 같은 자유, 아니 방종을 취한다면, 그것은 너의 영원한 파멸이 되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라. 하나님께서는 그런 행위를 벌하지 않고 지나치시지는 않으시며 너는 그런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것에 주목해야 한다.
(1) 장차 심판이 올 것이다.
(2) 지금은 우리가 아무리 그 혹독한 날을 우리로부터 멀리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누구든지 모두 심판에 회부되지 않으면 안 된다.
(3) 그 날에는 우리의 모든 육체적 환락과 감각적 쾌락에 대해 우리는 추궁받게 될 것이다.
(4) 이 점을 알고 명심하는 것이 모든 자에게 유익하며 특히 청년들에게 유익하다. 이는 그들이 청춘의 욕망에 방종함으로써 어린 양에 대한 진노, 곧 "저 진노하심의 날에 대비해서 자신들에게 노를 쌓아두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3. 이 모든 사실에서 경고와 훈계의 말씀이 유도된다(10절). 젊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에게 주의를 기울여서 자기 영혼과 육체, 마음과 신체를 모두 잘 관리해야 한다.
(1) 청춘 남녀는 그들의 마음이 자만심으로 우쭐대거나, 노여움이나 어떤 죄스러운 격정으로 동요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네 마음으로부터 근심"이나 분노를 "떠나게 하라." 이 말(슬픔, 혹은 근심, 분노)은 마음의 혼란과 동요를 의미한다. 젊은 사람들은 억제와 단속을 참지 못하는 경향이 있으며, 자기들의 자존심을 꺾거나 굴욕을 주는 일이라면 화를 내고 초조해 하기 쉽다. 청년의 도도한 마음은 자기들을 방해하고 반박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딛고 올라 서려 한다. 그들은 감각을 유쾌하게 하는 것에는 너무나 애착심을 갖기 때문에 불쾌하게 하는 것은 참지 못하며, 그것은 그들의 마음에 근심을 동반해 오기까지 한다. 저들의 자존심은 흔히 그들을 동요시키고 불안하게 만든다. "그런 점을 떼내어 버리고 세상에 대한 애착심을 제거해 버려라. 그리고 피조물에 대한 네 기대를 낮게 두라. 그러면 너를 실망시키는 일들 때문에 슬픔(근심)을 느끼거나 분노를 경험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근심이란 말을 9절에 나오는 육체적 환락과 동일하게 해석하는데, 환락의 끝은 쓰라린 괴로움과 슬픔이기 때문이다. 슬픔을 반사할 모든 일로부터 청년은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
(2) 그들은 무절제와 불결, 혹은 그 외의 어떤 육체적 욕망에 의해서도 몸을 더럽히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악이 네 몸에서 떠나게 하며, 네 몸의 지체들로 하여금 불의의 도구가 되지 않게 하라.
죄의 폐해는 형벌을 수반하는 폐해이다.
육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때문에 육체에 유익한 것이라고 좋아하는 것도 폐해로 판명될 것이며 해로운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러므로 네게서 그것을 멀리 하여라. 그 악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더 좋은 것이다.
Ⅲ. 전도자는 노년층에게나 청년층에게 자기의 훈계를 역설하기 위한 효과적인 논거(論據)로써 자기 담화 중 대전제가 되는 것을 등장시키는데, 그것은 곧 현존하는 모든 것은 헛되다고 하는 것과 불확실하고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1. 그는 노인층에게 이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8절). "장래 일은 다 헛되도다." "사람이 많은 해를 살며 그 모든 해를 항상 즐거워할"지라도 "장래 일은 다 헛되다." 사람들이 그 마지막 장면에서 무엇을 학수고대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지난 모든 일과 장차 올 모든 것은 전부가 "헛되다." 이미 있었던 것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장차 되어질 일도 인간을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할 것이다. 세상에 "들어오는 모든 것은 헛된 것" 이다. 그것들은 최상의 상태에 있을 때일지라도 전혀 "헛된" 것이다.2. 그는 젊은층에게도 이 사실에 대해 상기시켜 주고 있다.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 어린 아이의 기질과 청년의 행동에는 아주 많은 주제넘음과 비행과 죄스런 허영이 깃들이 있는데, 젊은 사람들은 이에 대해 경계하고 이를 교정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소년기와 청년기의 즐거움이나 잇점도 결국 어떤 확실성이나 만족도 갖지 못하며 영속성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한 즐거움은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꽃들은 꼭 시들게 되고 꽃송이는 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꽃들은 좋은 열매를 맺어서 그것이 오래 계속되고 중요한 가치를 갖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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