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이 초래하는 불행 (전도서 6:1-6)
솔로몬은 앞 장(5장) 마지막에서 하나님의 섭리가 주시는 선물을 편안하게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선한 일인지 보여 주었다.
이제 여기에서는 그와 반대되는 일의 폐단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용하지 않는 일이며, 현재의 극히 위급한 경우에는 투자하지 않으면서 앞으로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위급한 일을 위해 저축하는 일이다. 이것은 솔로몬이 "해 아래에서" 친히 본 "폐단이다"(1절). "해 아래에는" 아주 많은 악이 있다. 해 위에는 악이 없는 세상이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 께서는 "자기의 태양으로 하여금 선한 것" 위에도 비취게 하시고 "악한 것 위에도 비취게 하시는데" 이것은 악을 더욱 가중시킨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종들이 일할 수 있도록 촛불을 켜 두셨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의 재능(달란트)을 게으름과 무익함 속에 묻어두고 그 불빛을 낭비해 버리기 때문에, 그 불빛을 받을 가치가 없다.
솔로몬은 왕으로서 자기 신복(臣服)들의 태도를 주시하여 이러한 폐단이 공중(公衆)에게 해를 끼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일반 대중은 이런 자들의 낭비벽 때문에 피해를 입기도 하고 이들의 인색함 때문에 피해를 입기도 한다는 것이다.
몸 안의 혈액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재물이 유통되지 않고 정체(停滯)되면 나쁜 결과가 일어날 것이다. 솔로몬은 전도자로서 폐단이 행해지는 것을 관찰하였는데, 이는 그것을 견책하고 사람들에게 경고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폐단은 그 당시에 "흔하였다." 은과 금은 매우 풍부하여 사람들이 재물에 대한 애착은 덜 가질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시대도 또한 평화로운 때였고 어떤 어려움도 엿보이지 않는 때였는데, 어떤이들에게는 이것이 오히려 축재에 대한 유혹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같이 역사하지 않는다면 어떤 섭리도 부패한 애착심 즉 세상과 세상의 일에 대한 육욕적 마음을 치유시킬 수 없을 것이다. "재물이 증가하면" 우리는 "거기에 마음을 쏟기 쉽다." 이제 이 인색한 자들에 대해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Ⅰ. 수전노라도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얼마나 잘 해 주셨는가 살펴보라.
1. 하나님은 그에게 "재물과 부요함과 존귀를 주셨다"(2절).(1) "재물"과 "부요함"은 흔히 세상에서 "명예"를 얻게 해준다. 그것이 설사 하나의 형상에 불과하더라도 "금으로 만든 상(像)" 이라면 "모든 민족과 국가와 언어들이 그것에서 엎드려 경배" 할 것이다.
(2) "부와 재산과 명예"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의 섭리가 주시는 선물이다. 이러한 선물은 하나님께서 비와 햇빛을 주시는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 다 같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적합하다고 생각하시는 일부 사람에게만 주시는 것이다.
(3) 그러나 이런 부귀는 그것을 선용하지 않는 많은 사람에게도 주어진다. 그것을 편안히 사용하고 그 부귀로써 하나님을 섬길 만한 지혜와 은혜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못한 많은 사람에게도 주어진다. 평범한 섭리가 베푸시는 선물은 특별하신 은총이 거부된 많은 자에게 수여되는데, 이 특별하신 은총이 주어지지 않으면 섭리가 베풀어 주시는 선물도 흔히 이익이 되기 보다는 해가 되는 것이다.
2. "그는 자기 심령의 모든 소원에 대해 부족함이 없다." 섭리는 그에게 너무나 관대하셔서 그는 "마음이 원하는" 만큼이나, 또는 그보다도 더 "소유하게 된다"(시 73:7). 그러나 그는 더 중요한 자기의 영혼을 위해서는 은혜를 바라지 않는다. 그가 소원하는 전부는 육욕의 충족이며, 또 그는 그것을 얻는다. 그의 "배"는 이들 "감춰진 보물로 꽉 채워진다"(시 17:14).
3. 그는 수 많은 자녀를 갖도록 되어 있다. 즉 그는 "일백 명의 자녀를 낳을 것이다." 그 자녀들은 그에게는 "전통에 가득히 들어 있는 화살"과 같아서 그의 가문을 유지시키는 힘이 되며, 자기 집의 명예요 신망이다. 그는 자녀들로부터 자기 이름을 남길 수 있고, 이 세상이 자기에게 줄 수 있는 모든 불멸성을 그들에게서 얻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하나님의 백성 중 많은 자들이 자녀가 없으며, 있는 자녀도 모두 빼앗긴다고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그들은 "자녀로 가득하다"(시 17:14).
4. 그의 행복을 더욱 완전하게 하기 위해 그는 "많은 해(年)를 살도록" 되어 있다. 아니 오히려 "사는 날이 많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은 햇수(年數)로 계산되기 보다는 날수로 계산되기 때문이다. "그가 사는 해의 날수는 않다." 따라서 그의 체격은 강건하며 나이는 매우 느리게 다가오기 때문에 그가 누리는 날은 더욱 더 많은 것처럼 보인다. 그는 "천 년을 산다고" 되어 있는데(우리가 아는 바로는 어떤 사람도 여지껏 그렇게 살지 못하였다), 아니 "천 년의 갑절을 산다고" 되어 있는데, 2 천 년은 고사하고 그 중 조그만 기간만 하여도 사람들은 자기 경험을 통하여, 이 세상 재물로부터 모든 선을 찾을 줄로 기대하는 자의 어리석음과 그 재물을 사용하지 않고도 선을 발견하겠다고 기대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충분히 깨달을 수 있다.
Ⅱ.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재물을 주신 목적과 의도를 위해서 그 재물을 사용할 마음은 거의 없다. 이것은 그의 잘못과 어리석음이니, 그는 "자기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대로 다시 갚지 않으며 모든 것이 풍부한 중에 있으면서도 심령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자기 은인인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 번영의 날에도 그는 기쁘지 않다. Tristis es, etfelix?─너는 행복한데도 슬퍼하는가? 다음과 같은 그의 어리석음을 볼 수 있다.
1. 그는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에서 위안을 받을 마음을 가질 수가 없다. 그는 자기 앞에 고량진미를 두고 있어,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을 편안히 먹여 살릴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먹을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옹졸하고 인색하여 자기 자신이나 자신에게 극히 필요한 일에 대해서조차 투자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런 불합리성을 파악할 능력도 없으며, 자기의 욕심 많은 기질을 극복할 힘도 없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시는 것을 사용할 능력이 없는 자는 참으로 약한 자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 "능력을 주지 않으시고", 그가 재산을 달리 남용한 데 대한 벌로서 그 능력을 빼앗아 버리시기 때문이다. 그가 하나님게 봉사하고자 하는 뜻을 갖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에게 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주지 않으신다.2. 그는 자기가 부양할 의무도 없는 자들로부터 착취당하는 괴로움을 갖는다. "다른 사람이 그것을 누린다." 이것은 인색한 자들이 겪는 공통된 운명이다. 그들은 아마 자기들의 자녀는 신뢰하지 않고 추종자들이나 기식객들을 신뢰할 것이다. 그러한 자들은 감언이설에 능하며 인색한 자들의 환심을 사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집어삼키거나 아니면 그들 스스로가 자의로 물려 주도록 유일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명령하신 것은 "낯선 이가 그것을 먹고" "이방인들이 그의 힘을 삼키게"(호 7:9; 잠 5:10) 하기 위해서다.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성미는 확실히 아주 불행한 병이다. 우리가 앓는 병 중 최악의 병은 우리 자신의 마음의 부패로부터 생기는 병이다.
3. 그는 자기의 세상 소유물로부터 누릴 수 있는 낙을 스스로 박탈당한다. 자기가 누릴 낙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강탈하고 팽개쳐버린다. "그 심령에 낙이 족하지 못하다"(3절). 그는 계속 만족하지 못하고 불안하다. 그의 손은 부로 가득 채워져 있으며 그의 곳간과 주머니도 풍족하지만 "그 심령에 낙이 족하지 못하다." 그 이유는 그의 마음이 계속 갈망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낙을 보지도, 누리지도 못하였다"(6절). 그런 자의 눈은 더 멀리 내다보고 더 많이 가진 자를 부러워하며 바라보기 때문에 즐거울 수가 없다. 그는 재산의 감각적 낙까지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사물 이면에 있는 것을 못보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눈에 보이는 사물조차 진정한 즐거움을 보지 못한다.
4. "그는 매장되지 못한다." 그 매장은 자기 신분에 전혀 어울리지 않으며 떳떳한 장례도 아니고 "나귀의 매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성미가 옹졸하여 훌륭한 장례를 허락하지 않고 금할 것이다. 혹은 그를 야금야금 먹어들어간 낯선 자들이 끝내는 그를 너무나 가난하게 만들어 버려서 장례지낼 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아니면, 그가 가진 소유를 넘겨 받은 자들이 그에 대한 추모를 중히 여기지 않고 자기들에게 돌아 올 몫을 너무 욕심내는 나머지, 훌륭하게 장례지낼 비용을 부담하지 않으려고 하여 그렇게 된 것이다. 만약 그가 자기 자신의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 주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들은 자기 부친에게 그토록 인색하지 않을 것이다.
Ⅲ. 전도자는 이런 사람보다는 낙태된 자가 더 낫다고 본다. "낙태된 자 즉 모태로부터 무덤으로 옮겨지는 아이가 "그 보다 낫다." 썩을 때까지 매달려 남아 있는 과일보다 익기 전에 나무에서 떨어지는 과일이 더 낫다. 수난 중의 욥은 역경 속에 있는 자기보다 "낙태된 자"의 형편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욥 3:16). 그러나 솔로몬은 여기에서 이 세상의 호의를 베푸는 최대의 번영 하에 있는 속인의 상태보다 출생하기 전에 죽은자가 더 낫다고 선언한다.
1. 그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낙태된 자"의 형편이 매우 슬프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다(4, 5). "낙태된 자는 헛되이 왔다가(왜냐하면 이 세상에 대해 말하자면 태어나자 곧 죽어버리는 자는 헛되이 태어났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두운 중에 가버린다." 아무도 그를 눈치채지 못하고 거의 주목하지도 않는다. 유산되기 때문에 그는 "이름"도 없으며, 설사 이름이 있더라도 곧 잊혀질 것이며 망각 속에 매장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신체가 흙에 덮이듯 그의 이름도 "어두움으로 뒤덮힐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햇빛을 보지 못하고"(5절) 태중의 암흑으로부터 무덤의 어두움으로 곧장 가버린다. 이것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는 것보다 더 좋지 않은 일이다. 그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최대의 즐거움과 존귀함이 되는 것을 가져보지도 못한다. 고의로 무지하게 하는 자들이나 일부러 아무 것도 알지 않는 자들은 "햇빛을 보지 못하고 아무 것도 모른채 낙태되는"자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2. 그럼에도 전도자는 낙태자의 처지를 욕심 많은 수전노의 형편보다 우위에 놓고 있다. "이 낙태자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안식이 있다." 왜냐하면 "전자"에게는 안식이 다소 있으나 "후자"에게는 안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전자는 곤란과 불안이 없지만, "후자"는 끊임없는 동요 속에 있고 곤란밖에 가지고 있지 않으며 이 곤란도 스스로 만든 자작지얼(自作之)인 것이다. 생명이 짧으면 짧을수록 안식은 더욱 더 길어진다. 우리가 사는 날이 적어지면 적어질수록 이 험난한 세상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도 더욱 줄어들며 우리가 아는 고난도 더욱 적어진다. 살다가 八十이 되어 죽는 것보다 네 살 어린 아이로 죽는 게 더욱 좋다. 왜 "전자가 더욱 많은 안식을 누리는지"에 대해 그가 제시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이 한 곳으로 돌아가 휴식하게 된다는 점과 또 전자가 더 빨리 휴식을 취하게 된다는 점 때문이다(6절). "천 년을 사는" 자도 한 시간밖에 살지 못하는 어린 애기와 같은 장소로 돌아간다"(3:20). 무덤은 우리 모두가 만나게 되는 장소이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처해있는 형편이 각기 다르더라도 그들은 모두 죽어야 하는, 동일한 판결 아래 있고, 외견상으로는 동일한 죽음을 당하는 것이다. 묘지는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로 침묵의 땅이며, 암흑지대이고 산 자에게서 분리되는 곳이며, 잠자는 땅이다. 그곳은 빈자와 부자, 귀한자와 천한 자, 식자와 무식한 자가 공동으로 모이는 집결지이다. 요절하는 자와 장수하는 자는 무덤에서 만나며, 다만 전자는 무덤으로 급행하고 후자는 더 느린 차로 갈 따름이다. 이 양자의 티끌은 섞여서 구별되지 않고 누워있게 되는 것이다.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 (전도서 6:7-10)
전도자는 여기에서 세상 재물을 쌓고 거기에서 행복을 기대하는 일이 헛되고 어리석은 것임을 더욱 상세히 보여 주고 있다.
Ⅰ. 세상에 대한 수고를 제 아무리 많이 하고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얻어 내려고 하더라도 우리가 자신을 위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다만 먹고 사는 생계를 위한 것에 불과하다(7절). "인간의 수고는 다 그 입을 위한 것"이며, 입은 "인간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간청하고 있다"(잠 16:26). 그것은 단지 "음식과 의복에" 불과하며 항상 타인들이 우리보다 더 많이 소유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전부가 "입을 위한 것"이다. "음식물은 배를 위해서"만 존재할 뿐이며 "배는 음식물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머리나 가슴을 위한 것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고 영혼에게 양분을 주고 부유하게 해 줄 것은 조금도 없다. 우리를 편안히 부양시키는 데에는 적은 양으로도 족할 것이며, 아주 많은 것이라도 우리를 그보다 더 이상 편안하게 해 주지는 못할 것이다.
Ⅱ. 아무리 많이 소유하는 자라도 여전히 갈망한다. 사람이 "자기 입을 위해" 아무리 수고하더라도 그의 "식욕은 차지 않는다."
1. 생리적 욕구는 여전히 되돌아오며 계속 요구한다. 인간은 오늘 잔치에서 포식하더라도 내일은 또 배가 고픈 존재인 것이다.2. 세상의 죄많은 욕구는 만족함이 없다(5:10). 속물의 재산은 수종(水腫)걸린 자가 찾는 물과 같아서 아무리 마셔도 갈증은 점점 더해 갈 뿐이다. 이 귀절 전체를 이와 같이 해석하는 자도 있다. "비록 인간의 모든 수고가" "자기 의사대로" [─자기 기대에 부응할 만큼, 쥬버널(1세기경 로마의 풍자가)] 결실을 보더라도 그의 욕구는 충족되지 않으며" 그는 여전히 보다 많은 것을 원하게 된다.
3. 영혼의 욕구는 이 세상 재물 안에서는 만족을 줄 만한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영혼은 채워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요구한 것을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던" 것이다(시 106:15). 자기 곳간이 가득찼다고 해서 "영혼아! 네 평안을 취하리라"고 말한 자는 어리석은 자였다.
Ⅲ. 어리석은 자도 지혜로운 자만큼 많은 세상 재산을 소유할 수 있으며 그 만치 세상 재물이 주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그는 번민도 별로 느끼지 않을 것이다.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이뇨?"(8절) 아마 지혜자는 우매자만큼 좋은 재산도 훌륭한 직업도 못가지고, 그만치 출세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만일 그들이 동등하게 소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지혜로운 자, 즉 재사(才士)나 학자나 정치가가 자기 재산에게 꼭 필요한 공급물 이외에 무엇을 더 쥐어짜낼 수 있는가? 좀 모자라는 자라도 이런 것쯤은 할 수 있다. 우매자라도 행복하게 될 수 있으며 인생을 음미할 수 있고, 현자(賢者)에 못지 않게 잘 입을 수 있으며 훌륭한 외모를 갖출 수도 있다. 따라서 만일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더 많이 갖고 있다"고 하는 지성의 특유한 즐거움과 명예가 없다면 이 세상에 관한 한 지혜자는 우매자와 동등한 수준에 있는 것이다.
Ⅳ. 가난한 사업을 하는 자라도 분별력이 있고 근면하며 사업관리에 재간이 있으면 거대한 재산의 더미 위에 올라 앉은 부자 못지 않게 이 세상을 편안히 살 수 있다. 가난한 자라도 인생 앞에서 행할 줄을 알고 점잖게 처신할 줄 알며, 모든 자들에게 대한 자기 의무를 행할 줄 알고, 자기 수고로써 정직한 생계를 유지하는 것과 시간을 올바르게 사용하고 기회를 잘 활용하는 법을 알기만 한다면 "빈자가" 부자보다 적게 가지는 것이 무었이겠는가? 그는 "무엇을 가지는가?" 라고 하지만 그는 악착같고 거만한 다수의 부자보다 더 많은 이웃의 사랑을 받고 존경받으며, 더 세력이 있다. 빈자가 가지는 것이 무엇인가? 그는 이 생의 많은 안락을 누리며, "음식과 의복"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에 만족"하기 때문에 그는 풍부하게 지닌 자에 못지않는 참된 부자인 것이다.
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즐기는 일은 탐욕스럽게 더 많은 것을 붙잡으려는 것보다 한층 합리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9절). "눈으로 보는 것이 심령의 공상(욕망의 배회) 보다 더 낫다." 즉 현재 있는 것을 가장 잘 선용하는 것이 멀리 있는 것을 붙잡으려고 영혼이 불안하게 걷는 것보다 낫고 공상으로 여러 가지 만족을 얻고 싶어하는 것보다 낫다. 아주 적게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늘 만족하는 자는 엄청나게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항시 욕구불만에 빠져 있는 자보다 더 행복하다. 그러나 우리는 "욕망"을 하나님께 고정시키고 그 안에서 우리 영혼이 안식하는 것보다 "눈으로 보는 것이 더 낫다"고는 말할 수 없다. 현재 것에만 안주하는 감각대로 사는 것보다 장차 올것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이 더 낫다. 그러나 세상과 세상의 일을 추구하여 "욕구"가 방황하는 것보다는 "눈으로 보는 것이 더 낫다." 이 세상 일보다 더 불확실하고 불만족스러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 욕망의 배회(공상)는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다(심령의 번민이다)." 이것은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헛된 것"이다. 설사 소원하던 것이 획득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기대하던 것이 되지 않으며, 공상은 흔히 실제와 어긋나서 우리를 실망시킨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심령을 괴롭히는 것"이 될 뿐이다.
Ⅵ. 우리 몫이 무엇이건 간에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우리에게 지정된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변경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가 그것과 조화를 이루며 즐거이 그것에 묵종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10절). 이미 "있어 왔던 일", 혹은(어떤 이들이 해독하는대로) "현재 있는 것"과, "앞으로 있을 것"도 "이미 명명(命名)되어 있다." 과거, 현재, 미래사는 신의 예지로 이미 결정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염려와 고통은 달리 변경될 수 없다. Jcta est alea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러므로 꼭 그대로 되어질 일에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을 하고도 공을 인정받는 자는 현명하다. 우리는 하나님을 즐겁게 만드는 일을 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즐겁게 해야 할 것이다.
Ⅶ.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목표에 달성하든 우리는 여전히 인간에 불과하며, 우리가 아무리 큰 소유물을 가지게 되고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더라도 그것으로 우리가 인생살이에서 다반사로 일어나는 사건을 초월할 수는 없다. "이미 있던 것" 과 현재 있는 것, 즉 세상에서 크게 평판을 불러 일으키고 떠들썩하게 하는 분주한 동물은 "이미 그 이름이 칭한 바되었다." 인간을 지으신 그에게 이름을 부여하셨다. "그래서 그것은 인간이라고 알려져 있다." 인간은 이 이름으로써 자신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겸손하게 하는 이름이다(창 5:2). "그는 저들의 이름을 아담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저들이 가진 모든 것은 동일한 성격 즉 "붉은 흙"의 성격을 가진다. 인간이 비록 열왕들의 보물을 점유하고 여러 지방을 지배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인간인 것이며, 비천하고 가변적이며 죽어야 하는 인간에 불과하다. 또 그는 "사람들에게 공통"된 재난에 언제라도 휩쓸려 들어갈 가능성도 가진다. 부자와 위인들은 자기들이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중요시하는 것이 좋다(시 9:20). 그들이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다." 애굽인들이 그 사실 위에 어떤 호도(糊塗)와 분장을 하더라도, 또 두로의 왕처럼 "저희 이상을 하나님의 마음처럼 정하더라도" 그들은 신이 아니고 인간이며 또 그들이 그렇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Ⅷ. 우리의 욕구가 아무리 광범위하게 방황하고 우리 노력이 아무리 열심히 그 욕구를 뒤좇아 가더라도, 우리는 신의 섭리와 다툴 수는 없다. 바라든 바라지 않든 그 처분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그가 인간이라면 자기보다 강한 자와 능히 다툴 수가 없다." 하나님의 처사를 비난하고 그가 어리석다거나 불의하다고 흠잡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하나님께 대해 불평하는 것은 아무 소용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는 한 마음을 가지고 계시니 누가 그의 마음을 바꿀 수 있겠는가?"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인간보다 더 크신 분"이라는 명백한 원칙을 가지고 욥을 진정시킨다(욥 33:12). 그러므로 "인간은 그와 다툴 수가 없고" 임무를 띄고 오는 그의 심판에 항거할 수도 없다. 인간은 아무리 큰 재산을 가지더라도 질병이나 죽음을 면할 수가 없고 자기 운명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의 허무함 (전도서 6:11,12)
1. 솔로몬은 여기에 자기가 증명하고자 시도했던 결론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앞의 설교에서도 충분히 확증된 것이다. "헛됨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이 있다." 인간의 생명은 아무리 최선의 상태에 있다해도 헛된 것이며, 그 허무성을 한층 높이게 하는 사건은 부지기수이다. 부유함과 즐거움을 한층 촉진한다고 하는 것들 조차, 헛됨을 가증시키고 더욱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일 따름이다.2. 그는 이 사실로부터 몇 가지 결론을 이끌어 내는데 이런 결론은 이것이 참되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에 한결 도움이 된다.
(1) 인간은 이 세상에서 풍부하게 소유한다고 하여 참 행복에 더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재산과 쾌락, 명예와 지위를 가진다고 해서 "더 유익한게 무엇이냐?" 무엇이 인간에게 남는가? 인간이 자기의 손익을 결산해 볼 때 그는 어떤 잉여가치를 가지며, 어떤 여분과 실질 이익을 갖는가? 인간에게 유익을주고 활용할 수 있는 흑자는 조금도 없다.
(2) 우리가 가장 만족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이 흔히 우리에게 가장 성가신 것으로 판명되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소유해야 될지 모른다. 모든 것이 헛되며 우리가 가장 탐내는 것조차 우리에게 화(禍)로 판명되는 " 이 생에서 사람에게 무엇이 낙이 되는지 누가 알랴?" 만일 이 점을 아는 사려깊은 사람들이라면 모든 일에서 최선의 결과를 얻도록 하기 위해 주의깊게 행할 것이다. 그러나 손가락을 벨 칼을 달라고 우는 어린 아이들처럼, 실제로는 해로운 것을 좋은 것인 줄 알고 원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우리 마음의 부패스러움에 대한 본보기이다. 또한 모든 가능한 추측에 따르면 가장 좋은 것으로 보여지는 것도 흔히는 그렇지 못한 것으로 판명된다는 사실도 이 세상의 헛됨에 대한 본보기인 것이다. 사물의 결과와 사건에 대한 우리의 시야는 이렇게 근시안적이다. 그리고 피조물에 대한 우리의 모든 신뢰도 이처럼 상한 갈대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딴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결과를 얻도록 충고해 주는 방법을 모르며 우리 스스로도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건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 복리(福利)에 기여할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우리 함정으로 되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3) 그러므로 땅 위에서의 우리 삶은 크게 안심할 만한 것도 못되며 더 계속되리라고 믿을 만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날"로 계산되어야 할 것이며 "헛된 생명"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을 "그림자처럼" 보내며, 우리의 일생도 그림자와 같이 본질적 실체는 거의 없고 너무나 빨리 질주하며 불확실하다. 또 그것은 너무나 무상하여 그 안에 애착하거나 의존할 만한 것이 거의 없다. 만일 인생의 모든 위로가 헛된 것이라면 삶, 그 자체도 우리에게 행복이 될만한 어떤 훌륭한 실체를 가질 수 없다.
(4) 이 세상으로부터 오는 우리의 기대도 우리의 향락이 그러한 것처럼 불확실하고 헛된 것이다. 만사가 헛되다고 할 것 같으면 "사람이 죽은 후에 해 아래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인가를 누가 능히 그 사람에게 말하겠는가? 그는 자기 뒤에 그 자녀들과 가족들에게 "어떤 일이있으리라" 는 희망 때문에 기뻐할 수도 없거니와, 자기에게 어떤 일이 있으리라는 기미를 엿보고 즐거워할 처지도 못된다. 왜냐하면 그는 장래를 예견할 수도 없고, "자기 뒤에 무슨 일이 있을지" 아무도 예언해 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떠나는 날에도 그것에 관한 어떤 정보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의 아들들이 와서 예를 표하더라도 그는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느 쪽을 둘러보아도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Previous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