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전도서 0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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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예배에 대한 경고 (전도서 5:1-3)

우리에게 이 세상의 허구성을 폭로시킴으로써 우리를 이 세상에서부터 몰아 내려는 솔로몬의 의도는, 곧 우리를 하나님과 우리의 의무로 이끌기 위함이다. 이것은 곧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의 길을 걷지 아니하고 종교적 규칙을 따라 행하게 하며, 세상의 재물에 의존하지 아니하고 종교적 이익에 의존하게 하려는 것이다.

Ⅰ. 그가 여기에서 우리를 보내는 곳은 곧 하나님의 전(殿)이며 공중 예배 장소이고 성전인데, 이 성전은 그가 막대한 경비를 들여 친히 지은 것이다. 그는 자기가 했던 다른 모든 사업은 유감스럽게 생각하면서도(전 2:4) 이 성전 건축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일을 회상하고 즐거워하였다. 그러면서도 그 일을 언급하지 아니함은 자기가 그 일을 자만심을 가지고 돌이켜 보는 것처럼 여겨질까봐서였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세상의 헛됨을 더 많이 알고자 하는 자들과 피조물 속에서 쓸데없이 행복을 구하려고 하는 자들을 성전으로 보내고 있다. 다윗은 그가 곤란을 당하여 어쩔줄 모르게 됐을 때 "하나님의 지성소로 들어갔던 것"이다(시 73:17). 우리가 피조물에게서 실망을 당하게 될 때 우리의 눈을 창조주께로 돌리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스런 말씀에 의지하고 그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그 말씀과 상의를 하며 간청하자. 말씀과 기도에는 모든 상처를 낫게 하는 향유(香油)가 있다.

Ⅱ.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전으로 들어갈 때에, 목표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잘 처신해야 한다고 훈계한다. 종교적 행사는 무익한 일이 아니지만, 우리가 잘못 취급하면 우리에게 헛된 일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일을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1. 우리가 그러한 일을 할 때,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진지하고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네 발을 삼가며 하나님의 전으로부터 네 발을 피하여 돌이키지 말고(잠 25:17 처럼, 우리 성경과 다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를 싫어하는 자와 같이 느릿느릿 걸어가지 말며, 네가 헛걸음을 딛지 않도록 네 보행을 잘 보고 네 발이 닿는 길을 숙고하라. 너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시작하기 전에 엄숙하게 멈추고 마음을 가라 앉혀야 하며 성급하게 착수하지 말아야 한다. 잠언 19장 2절에는 이것을 "발이 급하다"고 칭하고 있다. 이 일을 행할 때, 네 생각도 배회하거나 방황하지 못하도록 지켜라. 네 애착이 그릇된 대상을 향해 달려 나가지 못하도록 지켜라. 왜냐하면 하나님의 전에는 전체 인간에게 줄 만큼 충분한 일이 있으며 모든 사람을 다 고용한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그 수가 모자랄 정도이다." 혹자는 이 귀절이 복종과 경외의 상징으로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신을 벗으라"고 하신 명령(출 3:5; 수 5:15)을 암시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네 발을 깨끗이 하라"(출 30:19)는 표현도 있다.

2. 우리는 우리가 가져가는 희생 제사가 우매자의 희생 제사, 즉 악인의 제사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왜냐하면 악인은 어리석은 자이기 때문이고, 그들이 드리는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잠 15:8). 또 우리는 "찢긴 것과 저는 것과 병든 것"을 희생 제사에 가져오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런 제물을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이고, 따라서 그런 것을 가져간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는 그 일의 진정한 의의와 참 의미를 중요시하지 않고 표시(表示)와 의식(儀式)과 외면적 행위에만 머물러 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그렇게 하는 제사는 "바보들의 제사밖에는 안 될 것이다. 만약 그것이 신체적인 행사 뿐이라면 웃음꺼리에 지나지 않는다. 바보들 이외에는 아무도 그와 같은 제사가 영(Spirit)이시며, 심령을 요구하시는 그분께 즐거움을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성실성의 결여로 인하여 자기들이 드린 많은 수고가 아무 의미를 얻지 못하게 됨을 알게 될 때야,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가 우행(愚行)인 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은 우매한 자들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위선적인 헌신으로써 실제로는 하나님께 큰 모욕을 끼쳐 드리고 자신들의 영혼에게는 크나큰 기만을 행하면서도, 하나님과 자기 자신들에게 좋은 봉사를 하는 줄로 착각하고 있다. 인간은 선을 행하겠다고 고백하는 때 조차 악을 행하고, 그것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는 때조차도 악을 행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악을 행하는 일밖에 알지 못한다"고 어떤 이들은 해독한다. 사악한 마음들은 예배 행위 속에서 까지도 죄악을 택하지 않을 수 없다. 혹은 그들은 "악을 행하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생각없이 되는 대로 행동하며, 그것이 옳든 그르든간에, 하나님께 즐거움이 되든 안 되든 간에, 그들에게 있어서는 매한가지인 것이다.

3. 우리가 "우매자의 제사"를 드리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는, 우리 의무를 알고 행하리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전에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즉시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1) 우리는 봉독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부지런히 "주의"를 기울여야만 된다. "제사장들이 제사에 대해 해설하는 것과 제사의 의도와 의미를 선언해 줄 때" 그것을 "신속히 듣고" 그들이 행하는 일을 응시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지 말아라.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온당한 제사"임에 틀림없으며,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어리석은 자의 제사이다."

(2) 우리는 우리에게 알려진 대로의 하나님 뜻에 부합되도록 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듣는 것은" 흔히 "순종"으로 통하며, 그것은 "제사보다 나은 것"이다(삼상 15:22; 사 1:15, 16). 우리가 "여호와여! 말씀하소서, 당신의 종이 듣겠나이다"라는 마음 자세를 갖고 나올 때에는 거룩한 의무에 대해 올바른 짜임새로 나오는 셈이 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여! 오소서. 그리하면 내가 목이 600개라도 모두 굽혀 절하여 그 권위에 복종하겠나이다"(라고 한 선한 사람을 말했다).

4.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일에서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말에 있어서 조심하고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2절). 기도할 때나 항의할 때나 약속할 때에 "함부로 입을 열지 말라." "하나님 앞에서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1) 우리가 경건한 예배를 위해 하나님의 전과 엄숙한 회중 가운데에 있을 때에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와 그의 존전에 있는 때라고 볼 수 있다. 그 곳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만나겠다고 약속하신 장소이며, 거기는 하나님의 눈이 우리를 향하시고 우리 눈은 그를 향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2) 우리가 거룩한 의무 중에서 "하나님 가까이 나아갈" 때,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말할 것이 있고 그 앞에 아뢸 일이 있다. 그는 우리가 "관계를 맺고 있는 분이"시며, 무한히 중대한 사업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분이시다. 만약 우리가 어떠한 사명도 없이 그분께 나아간다면 우리는 아무런 이익을 얻지 못한 채 물러 나오게 될 것이다.

(3)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아뢰는 일"은 "심중"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면 안 되며, 따라서 우리는 입으로 경솔히 말해서도 안되고, 예배시에 우리 혀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우리 입의 말"은 언제나 "우리 마음의 명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면 아니된다. 생각은 하나님께 드리는 말이라서, 만약 말이 생각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 아니라면 그 말은 바람에 불과하다. 종교에 있어서 입술이 하는 수고는, 그것이 아무리 잘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입술이 하는 일에 지나지 않을 때, 쓸모없는 헛수고인 것이다(마 15:8, 9).

(4)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하는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급작스런 열기나 격정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침착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라야 한다. 입이 경솔해서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도 성급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설교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하는 말이든, 기도로 하나님게 드리는 말이든 말하기 전에 한 번 뿐만 아니라, 두 번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되며 점잖지 못한 말이나 소화하지 못할 말을 해서도 아니된다(고전 14:15). 우리는 하나님 존전에서 말할 때에 말을 아끼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우리는 공손하고 신중해야 되며, 우리끼리 말할 때처럼 대담하게 말하거나 조심성없이 말해서는 안 된다. 또한 생각나는 대로 말하거나 우리가 하는 말이 이해되고 기억되며 인상에 남도록 하기 위해 같은 말을 몇 번이고 중언부언해도 안 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드릴 때에는 다음과 같은 점을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1)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무한한 거리가 있다. "하나님은 하늘게 계시며" 그는 거기서 영광 중에 우리와 모든 인간의 자손들을 다스리시고, 그는 거기에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천사와 무리에게 시중을 받고 계시며 "우리의 모든 송축과 찬양을 받으시기에는 너무나 멀고 높으시다." "우리"는 그의 보좌의 발판인 "땅 위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과는 달리 비열하고 천해서, 그에게서 은총을 받거나 그와 교제하기에 전혀 가치가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보다 훨씬 높은 위인들에게 말을 걸 때처럼 하나님께 여쭐 때에는 엄숙하고 겸손하며 진지하고 경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 대한 표시로 우리는 우리 말이 "잘 선택" 되도록 하기 위하여 "말 수를 적게" 해야 한다(욥 9:14). 이 말은 기도가 길다고 해서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긴 기도가 좋지 않았다면 바리새인들이 기도가 긴 것을 구실로 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밤새도록 기도를 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 기도"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조심없이 마음에도 없는 기도를 하고, "헛되이 증언부언"하며(마 6:7) 진부한 고담을 외듯 "주기도문(Pater-nosters)을 반복하는 것은 타기할 일이다. 우리는 성서가 가르치는 말로써, 즉 하나님 자신의 말로 그에게 아뢰며 그에 대해 얘기하자. 그리고 규칙대로 말하지 않음으로써 잘못 실언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의 말 즉 우리가 날조해 낸 말은 되도록 적게 하도록 하자.

(2) 우리의 기도에서 말이 많으면 많아질수록 그것은 우리 예배를 "우매자의 제사"로 만든자는 점이다(3절). 잠을 설치게 방해할 정도로 무섭고 당황하게 하는 혼돈된 꿈이, 우리 머리를 꽉 메운 다난한 세상 사업에 대한 증거인 것과 마찬가지로, 기도시에 많은 말을 사용하고 성급하게 하는 것은 우리 심중을 지배하는 어리석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한 무지와 생소함을 증거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대한 저급한 사고와 우리 자신의 영혼에 대한 무사려를 밝혀 나타내주는 것이다. 통상 대화에서 조차 "어리석은 자는 말이 많은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다." 특히 기도에 있어서는 가장 적게 아는 자가 가장 많이 말하는 법이다(10:11 절). "재잘거리는 바보"는 틀림 없이 "넘어질 것이며"(10:8, 10), 용납받지 못할 것이다. "말을 많이 함으로써 자기들의 기도가 상달될 줄"로 생각하는 자들은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이다.

 

5:2 없음.

 

5:3 없음.

 

5:4

맹세에 대한 의무 (전도서 5:4-8)

이 귀절들에서 우리가 받는 훈계는 네 가지이다.

Ⅰ. 우리가 맹세를 할 때에는 양심적이어야 한다.

1. 맹세는 영혼에 주워진 제약이다(민 30:2). 이를 따라 우리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미 하기로 되어 있는 일을 엄숙히 행해야 하는 의무를 가질 뿐만 아니라, 어떤 구체적인 경우에 있어서 이전에 의무로 지워져 있지 않던 일도 행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존귀하게 하는 일이든,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세력을 확장하는 일이 든지간에 맹세에 따라 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네가 어떠한 고난을 의식하거나(시 66:14), 어떤 자비를 추구하여(삼상 1:11). "하나님께" 이와 같은 맹세를 하였을 때, "너는 네 입을 여호와께 열었기 때문에 취소할 수 없음"을 알아라.

(1) 그러므로 그 맹세를 갚아라. 네가 약속한 모든 것을 실행하라. 네가 봉헌하고 헌신하겠다고 한 것을 하나님께 가져오라. "네가 서약한 것을 갚으라." 그 서원을 완전히 갚고 "그 가격의 일부라도 떼 먹지 말라." 같은 것으로 갚을 것이며, 그것을 "변개" 하거나 "바꾸지" 말라(레 27:10). 우리는 "자신을 여호와께 드리겠다"고 맹세하였던가?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말에 충실하여 그를 봉사하고, 그의 영광이 되도록하며, 그를 모독하여 우리 스스로가 그에게서 소원(疎遠)해 지는 일이 없도록 하자.

(2) "갚기를 더디게 말라." 서원한 것을 갚을 능력이 오늘 네 수중에 있거든 그것을 내일로 미루지 말아라. "하루만 더하고" 구걸하지 말며 더 좋은 시기를 바라 연기하지도 말라. 의무감은 지체로 말미암아 이완(弛緩)되며, 냉각되고 마멸되어 없어질 위험에 빠진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맹세를 실행하기를 회피하고 뒷걸음질치게 된다. 그러므로 gui non est bodie cras minus aptns erit─즉 오늘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자는 내일도 하기 싫어할 것이다. 미루는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우리에게 행할 마음이 생기기는 더욱 더 어려워질 것이다. 죽음이 지불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맹세를 깼다는 죄목으로 그대를 심판 자리에 데리고 갈 것이다(시 76:11).

2. 왜 우리가 신속하고 즐겁게 우리 맹세를 갚아야 하는지 그 이유가 두 가지 주어지고 있다.

(1)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가 하나님을 희롱하려고 꾀한 것처럼 그를 속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않으신다." 여기에서 표현된 것보다 더 많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 의미는 그가 그런 어리석은 자와 어리석은 행위를 크게 미워하신다는 뜻이다. "그가 어리석은 자를 필요로 하는가?" 아니다. "속지 말아라. 하니님께서는 조롱당하시지 않는다." 그는 자기에게 이랬다 저랬다 하는 자를 틀림없이 그리고 엄격하게 평가하실 것이다.

(2) 또한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 스스로에게도 잘못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원"하는 이익을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그 맹세를 위반한 데 대한 벌금을 물게 된다. "따라서 서원하고 갚지 않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고 유익할 것이다. "서원"하지 않는 것은 태만에 불과할 것이지만 "서원하고도 갚지 않는 것"은 반역과 파약의 죄명을 입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거짓말"이기 때문이다(행 5:4).

Ⅱ. 우리가 서원을 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서원할 때 양심적이기 위해서 필요하다(6절).

1. 우리는 죄된 일을 맹세하지 않고 그 맹세가 범죄의 기회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런 서원은 잘못된 것이어서 깨뜨려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헤롯의 성급한 약속이 세례 요한의 머리를 베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 같이 그런맹세로 "네 입이 네 육체를 범죄하도록 하지 말라."

2. 우리는 단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맹세하고서도 그 맹세를 어떻게 지켜야 할지 알지 못하는 자들같이 육체의 취약성 때문에 실행하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할 만한 이유가 있는 일을 맹세해서는 아니된다.

(1) 이로써 그들은 수치를 자취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천사 앞에서 그것은 실수였습니다." 그들이 했던 말은 본의가 아니며 잘 살펴 보고 한 말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그것이 아주 약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네가 서원을 하였거든 회피하려고 애쓰지 말며, 그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변명을 찾지도 말라. 만군의 주 여호와의 천사나 사자라고 불리는 제사장 앞에서 네가 재삼 생각해 보고 마음을 달리 먹게 되었고 네가 행하겠다고 맹세한 의무에서 해방되었으면 좋다고 말하지 말아라. 오히려 그 맹세에 집착하고 그 맹세에서 기어 나올 구멍을 찾지 말아야 한다." 혹자는 이 "천사"라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따라 다니면서 그 행하는 모든 일을 감시하는 수호의 천사라고 이해한다. 다른 이들은 이 말을, "언약의 천사"인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말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그리스도는 회중 가운데에서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시며 그 심령을 감찰하시고 속임을 당하지도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를 노엽게 하지 말 것이니, 하나님의 이름이 그에게 있기 때문"이며 그는 엄격하시고 질투하시는 분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출 23:20, 21).

(2) 그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노출하는 셈이다. 그는 이와 같이 "자기에게 입으로 거짓말을 하며 혀로 아첨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노하시며" 그들의 허위 선전을 불쾌히 여기시고, "그들의 손으로 한 일을 멸하시기" 때문이다. 곧 그는 그들의 사업을 주시하시며, 그들이 서원하면서 하나님께 성공시켜 달라고 구하는 목적들을 좌절시켜 버리고 말 것이다. 우리가 표리부동하게도 우리 입으로 한 말을 취소하거나 우리가 한 맹세를 폐하여 버린다면, 하나님이 우리 계획을 뒤집어 버리신다고 해도 그것은 정당한 일이 될 것이며, 모든 투기에 있어서 이처럼 정반대로 걷는 자들에게는 당연히 그 모든 모험이 정반대로 되도록 행하실 것이다. "맹세 후에" 그것을 "탐문해 본다"는 것은 인간에게 "덫," 즉 실패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Ⅲ.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유지해야 한다(7절). 옛부터 "꿈"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많이 있었으며, 그들은 온통 꿈으로 차 있어서 그들의 "꿈"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의 망각하게 할 정도였다(렘 23:25, 26). 많은 사람들이 몽사(夢事)가 이런 저런 재난을 예고하기라도 하는 듯이 자기들이 꾼 무서운 꿈과 괴상한 꿈뿐만 아니라, 딴 사람들이 꾼 꿈을 갖고도 불안해 한다. 꿈에 신경을 쓰는 자들에게는 그들의 머리를 가득 채울 만큼 무수한 꿈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꿈에는 "많은 헛된 것이 있으니," 이는 말이 많으면 많을수록 헛된 것이 많은 것과 같으며, 우리가 꿈을 중시하면 할수록 헛된 것도 더 많아지게 된다. "꿈은 어린 아이들이나 우매한 자들이 지나가는 말로 아무렇게나 내뱉는 한가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런 것에 신경 쓰지 말고 잊어버려야 한다. 꿈은 되풀이해서 이야기하거나 꿈을 강조하거나 꿈에서 불안한 결론을 얻어내는 대신 "너는 하나님을 경외하라." 그의 지고(至高)한 통치권을 눈여겨 보며, 그를 네 앞에 모시고 그의 사랑 안에 네 자신을 간직하며 그를 노엽게 하지 말아라. 그러면 너는 어리석은 꿈으로 방해받는 일이 없을 것이다." 하늘의 징조에 놀라지 않고, 또 "이방인에게는 우상이 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길은 "열방의 왕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렘 10:2, 5, 7).

Ⅳ. 그럼으로써 인간의 두려움을 억제할 수 있다(8절). 하나님을 네 앞에 모시라. 그리하면 비록 네가 빈자의 학대를 보더라도 그 일을 이상히 여기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섭리를 탓하지도 않을 것이다. 네가 사법제도의 목적이 왜곡되는 것을 보는 때에도 그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종교가 인간이 부당한 학대를 받지 못하도록 보호해 주지 못하는 것을 목격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나쁘게 생각지 않게 될 것이다.

1. 땅 위에서 일어나는 우울한 광경 중 하나는 가난해서 자기를 방어하지 못함으로써 당하는 "빈자의 학대"를 보는 일과, 권력을 등에 업고 법을 구실로 하여 "한 지역에서" 자행되는 억압, 곧 "판결과 정의의 심한 왜곡"을 보는 일이다. 그것은 정의감과 인류에 대해 관심을 갖는 모든 선량한 자들에게는 고통이 아닐 수 없다. 일반적으로 나라 전체는 좋은 통치를 할지 모르나, 어떤 특정 지방은 악인의 통치 하에 들어서 그의 악정으로 정의가 왜곡될 수도 있다. 가장 현명한 군주라도 사람을 등용하는 일을 빈틈없이 한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그들은 일이 잘못된 것으로 나타날 때에야 불편의 원인을 교정할 수 있을 뿐이다.

2. 그러나 하늘에는 안락한 광경이 있다. 모든 것이 이렇게 음울하게 보일 때라도 우리는 다음 사실로 만족할 수 있다.

(1) 아무리 학대하는 자들이 "높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들보다 위해" 계시다. "그들이 교만히 행" 하는 일에 있어서도(출 18:11) "그들보다 위"에 계신다. 하나님은 피조물 중 "최고의 것보다 더 높으시며," 최고의 제왕보다 높으시고, "아각보다 높은"왕 보다도 더 높으시며(민 24:7), 최고의 천사들이나 상계의 "보좌들과 주권자들" 보다도 높으시다. 하나님은 "모든 땅 위에서 가장 높으신 분이"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 위에 있다." 왕들도 그 앞에서는 벌레에 지나지 않고 가장 빛나는 자라도 그 앞에서는 개똥벌레에 지나지 않는다.

(2) 비록 압제자들이 안전한 줄로 여기고 있으나, 하나님은 그들을 보고 계시며 주목하고 계셔서 그들이 판결을 심하게 왜곡시키는 것을 모두 다 눈여겨 두실 것이다. 그는 "감찰"하시나니 그것을 보고 계실 뿐만 아니라 자세히 살피시고 계속 기록하셔서 다시 점호할 수 있게 하신다. "그의 눈은 그들의 길 위에 있다"(욥 24:23).

(3) 또한 천사의 세계도 있다.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이 있으니, 곧 신성한 정의에 의해 해를 입는 자들을 보호하며 해를 입히는 자들을 벌하는 자들이다. 산헤립은 자기의 유력한 군대를 자랑하였지만, 그와 그의 모든 군대가 천사 하나도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혹자는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이란 말을 국가 최고 평의회로 해독한다. 즉, "지방 방백들의 책임을 추궁"하는 총리들(단 6:2)이나, 지방 총독에 대한 불평을 접수하는 원로원, 하급 법원으로부터 항고를 받아들이는 상급 법원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이들은 국가의 선정을 위해 필요한 존재들인 것이다. 땅위의 상급자들이 그들을 불러 문책함으로써 압제하는 이들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지고자(至高者) 하나님께서 결국 모든 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5:5 없음.

 

5:6 없음.

 

5:7 없음.

 

5:8 없음.

 

5:9

부(富)의 헛됨 (전도서 5:9-17)

솔로몬은 쾌락과 환락과 훌륭한 사업이 헛되다는 것과 명예, 권세, 그리고 제왕의 위엄도 허무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었었다. 탐욕스런 많은 속물들도,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솔로몬과 견해를 같이 하며 또 가볍게 여기겠지만, 그들은 돈만은 실속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돈만 충분히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솔로몬이 여기에서 공격하고 교정시키려고 하는 점이다. 그는 "육체의 욕망과 생의 교만"에 허무가 존재해 있듯이, 큰 재산과 큰 재물에 대한 "눈의 욕망"에도 마찬가지의 허무가 존재함을 제시해 주며, 인간은 재산을 축적함으로써도 행복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재물을 사용함으로도 행복할 수 없음을 보여 주고 있다.

Ⅰ. 그는 땅의 소산이 인간의 삶을 유지시키고 위로해 주는 데에는 귀중하다는 것을 인정한다(9절). "땅의 이익은 뭇 사람을 위해 있느니라." 인간의 몸은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흙에서 생명을 유지하여 주는 것을 얻는다(욥 28:5). 인간이 흙으로부터 먹을 것을 얻으며 "그의 거처가 불모의 땅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반역한 사실로 보아서는 마땅히 그래야 하겠지만, 시 68:6) 인간에게 대한 하나님의 크나큰 은혜의 한 예이다. "땅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으며 그 "이익은" 모든 사람을 위해 있다. 모든 사람은 땅에서 나오는 이익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뭇 사람을 위해 예정되어 있다. 땅에는 모든 사람에게 다 돌아갈 만큼 충분한 것이 있다. 또한 땅의 이익은 모든 사람을 위해 존재할 뿐만 아니라 모든 하등 동물을 위해서도 존재한다. "인간에게 식물로 봉사"하는 바로 그 땅이 동시에 "가축들에게는 풀"을 제공해 준다. 이스라엘은 "천사들의 음식, 곧 하늘로 부터 오는 떡"을 받았다. 그러나 땅은 우리의 곳간이며(이것은 겸손한 생각이다) 짐승들은 우리와 함께 그 창고를 공동으로 사용한다. "왕도 밭에서 나는 것으로 공급을 받는다." 그래서 만약 밭의 소산이 없다면 임금도 제대로 공궤를 받지 못하여 굶어 죽고 말 것이다. 이 사실은 농부라는 천직에 큰 명예를 부여하는 것으로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데에는 농사가 무엇보다 필요한 것임을 말해준다. 많은 사람들이 그 혜택을 입으며 가장 강한 자라도 땅의 소산이 없으면 생존할 수가 없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그것은 "임금 자신을 위해서도 존재한다. 땅의 열매를 풍족히 소유하는 자들은 "그 소산이 모든 자를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되며, 따라서 그들은 자신을 단지 풍부한 것의 청지기로 간주해야 하고,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주지 않으면 안 된다. 고량진미와 금의미복(錦衣美服)은 단지 "일부 사람을 위한 것"이지만 "땅의 소산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바다의 풍부한 것을 흡수" 하는 자들조차도(신 33:19), 땅에서 나는 소산이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다. 그래서 "땅의 열매를 풍부히 갖고 있는 자들"은 바다의 풍요로운 것을 경시하게 되는 것이다.

Ⅱ. 그는 이보다 더한 재산도 쌓아 놓기만 하고 사용하지 않는 것은 "헛 것"이며,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거나 행복하게 만들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솔로몬이 여기에서 여러 가지 논증으로 증명하고자 시도하는 것은, 우리의 구주께서 "인간의 생명이 그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의 풍부한 대에 있지 않다"고 말씀하신 바로 그것이다(눅 12:15).

1. 인간은 그 소유가 많아지면 질수록 더욱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한다(10절). 단지 소량의 은을 갖고도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이 충분하며 더 이상 탐욕을 부리지 않는 때를 알 것이다. "경건함과 아울러 만족한다는 것은 큰 소득이다." 야곱은 "내가 가진 것이 족하나이다"고 말하며, 사도 바울은 "내가 모든 것을 가졌으며 풍족하다"고 말한다.

(1) 그러나 "은을 사랑하고" 자기 마음을 그 은에 두는 자는 결코 자기가 가진 것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그는 자기 "욕심을 음부같이 넓히고"(합 2:5), "가옥에 가옥을 연하게 하고 전토에 전토를 더하며"(사 5:8), "말거머리의 딸들"처럼 "계속 달라! 달라"고 부르짖는다. 자연스러운 욕망은 소원하던 것이 얻어지게 되면 휴식하나 부패한 욕망은 충족되지 않는다. 자연은 적은 것으로 만족하며 은혜는 더 적은 것에도 만족하나, 탐욕은 그 어떤 것에도 만족을 느끼지 않는다.

(2) 은을 풍부하게 소유하며 게다가 그 은을 더욱 불려 나가면서 거기에 매달려 있는 자는, 그것이 자기 영혼에게 어떤 확고한 만족도 주지 못함을 발견하지 못한다. 신체적 욕망은 은으로 충족시킬 수 없다. 사람이 배고플 때는 은덩이라 하더라도 그 허기를 채우는 데에 있어서 흙덩이보다 나을 것이 없다. 하물며 세상의 풍부함으로써 영적인 소원을 충족시킬 수 있겠는가! 아무리 많은 은을 소유하고 있는 자라도 더 많은 것을 욕심내게 마련이며, 그 은뿐만 아니라 또 다른 것, 즉 다른 성질의 것을 가지고 싶어한다. 스스로 세상에 대해 악착같이 하는 자들은 "만족시키지 못할 것을 위해" 그들의 "수고"를 허비하며(사 55:2), 배는 채우나 심령은 채우지 못할 것을 위해 수고하는 것이다(겔 7:19).

2. 인간은 가지는 게 많아지면 질수록 그에 대한 필요성도 더욱 많아지며, 그에 따라 해야할 일도 더욱 늘어난다. 따라서 그 소유는 그만큼 길고도 넓은 것이다. "재산이 더하면 먹는자도 더하나니"(11절), "고기가 많으면 많을수록 입도 더 많아진다." 재산이 불어나는가? 그러는 동시에 식구는 그 수가 늘어나며 아이들은 자라서 더 많은 것을 필요로하지 않는가? 인간의 소유가 많아지면 질수록 그는 더 좋은 집을 가져야 하고, 더 많은 하인들을 부려야 하며, 더 많은 손님을 대접해야 되고, 가난한 자에게 더 많이 나눠주지 않으면 안 된다. 또 그들에게 매달리는 자들도 더 많아질 것이니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음식과 의복 이외에 가지고 있는 것은 결국 "타인들을 위해"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소유주" 자신에게는 "저희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그것은 하찮은 즐거움에 불과하다. 소유자와 분배자에 대한 모든 구별도 헛공론에 지나지 않는다. 소유하는 주인은 자기 주변에 있는 자들이 자기 소유물의 실질적인 혜택을 자기만큼이나 많이 향유하게 됨을 보게 된다. 소유주는 타인에게 선을 베푸는 만족만 소유할 따름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되다"고 말씀하신 것을 믿는 자에게는 진정한 만족이 된다. 그러나 자기 곁을 떠나는 것이면 무엇이든 잃는 줄로 생각하는 탐욕스런 인간에게 있어서는, 자기가 늘리는 것을 타인이 먹는 것을 보는 일이 부단한 괴로움이 아닐 수 없다

3. 인간은 소유하는 게 많아지면 질수록 그것에 대한 염려도 더욱 많이 가지게 되어서, 곤란을 당하고 그들의 휴식도 방해당하게 된다(12절). 새로운 원기를 북돋아 주는 수면은 음식에 못지 아니하게 이 삶을 지탱시켜주며 위안해 주는 것이 된다.

(1) 일반적으로 고되게 일하고 자기가 일한 데 대한 것만 소유하는 자들은 잠을 잘 잔다. "수고하는 자의 잠은 달다." 그는 자기 노동으로 인한 피로 때문에 잠을 더욱 반가히 여기고 깊이 잠들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그의 잠을 방해하는 머리를 가득 채울 염려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비록 먹는것도, 먹을것도 적지만, 그의 피곤함이 그를 잠재워 준다. 그가 먹는게 설사 많다고 하더라도 그가 잘잘 수 있는 것은 그의 노동으로 인하여 소화가 잘 되기 때문이다. 근면한 크리스챤의 잠과 그의 오랜 수면은 달콤하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과 자기 시간을 하나님께 대한 봉사에 바쳤으므로, 하나님께 즐거이 돌아와서 하나님 안에서 편안히 쉴 수 있기 때문이다.

(2) 그러나 모든 것을 소유하는 자들은 하루 밤의 단잠을 잘수가 없을 때가 많다. 그들의 눈이 계속 깨어있거나 그들의 잠이 불안하기 때문에 잠을 자도 새로운 원기를 얻을 수 없다. 그들이 잠을 파괴하고 방해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풍족함이다. 이 풍족함에 대한 염려와(자기 땅이 풍부한 소출을 내었을 때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어떻게 할까?"라고 한 부자처럼, 눅 12:17) 먹고 마실 것의 풍족함이 그들의 심장에 과도한 부담을 주며, 그들을 병들게 하고 따라서 안면을 방해하는 것이다. 아하수에로왕은 주연이 파한 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인간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획득하고 사용하는 데에 대한 죄의식은 어느 무엇보다도 잠을 더 방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신다."

4. 사람은 많이 가지게 되면 될 수록 화를 불러 일으키며 자신들에게 해를 끼칠 위험성이 더욱 커진다(13절). "해 아래에는 한 가지 악, 즉 쓰라린 폐단이 있으니" 솔로몬은 죄와 비애의 극장인 이 하계(下界)에서 이 "큰 폐단"을 친히 "목격"하였다─곧 "소유주가"(재물을 축재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재산을 안전하게 간직하기 위해서 부지런한) "이 세상에서 지킨 재물이" 도리어 "그들에게 해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차라리 그 재물이 없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1) 저희 재물은 "저들을 해치며" 교만하고 안도감을 갖게 만들며, 이 세상을 사랑하도록 하나님과 의무로부터 저희 마음을 끌어 당겨서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매우 어렵게 만든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저들을 내쫓아버리는 데 이바지하는 것이다.

(2) 그들은 "그들이 재물로 해를 끼친다." 재물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육욕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해주며 사치스럽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해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타인을 억압하고 가혹하게 취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3) 그들은 종종 "자기들의 재물로 인하여 피해"를 입는다. 만일 그들이 부자가 아니라면 시기받는 일도 없을 것이고 도둑맞는 일도 없을 것이다. 맨 먼저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은 살찐 짐승이다. 매우 부유한 사람은(우리가 관찰하는 대로) 때때로 자기의 거대한 재산과 과도하게 모은 재물 때문에, 생명과 재산에 대해 일반적으로 누구에게나 베풀어지는 사면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수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재물은 "가끔 소유자의 생명을 빼앗아 가버린다"(잠 1:19).

5. 사람이 소유하는게 많아지면 질수록 상실하는 것 또한 더 많아지며, 아마 그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14절). 모으기 위해 매우 힘든 수고를 들였고 지키기 위해 많은 염려 걱정을 기울였던 재물이 "악한 노고"로 인하여 (우리 성경과 다름), 즉 그 재물을 안전히 지키고 더 많이 늘리기 위한 수고와 염려 때문에 "사라져 버린다."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늘리고 불리기 위해 과도한 걱정을 하던 나머지 자기 재산을 날려 버렸으며, 모든 것을 잡으려다가 놓쳐버렸다. 재물은 소멸하는 것이며 우리가 아무리 염려를 해도 그것을 막을 수는 없다.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만들어 가지고 날아가 버린다." 자기 아들을 신사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자가 그 아들을 거지로 만들고 만다. 즉 그는 "한 아들을 낳는다." 그 아들에게 재산을 주리라고 예상하면서 그를 양육한다. 그러나 그가 죽을 때는 그 재산만큼의 부채를 남겨 놓음으로써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게 된다." 이런 사례는 흔하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고 하듯이, 굉장하게 보이던 재산도 겉으로 나타난 것과는 달리 그 상속자를 속이게 되는 것이다.

6.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게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죽을 때는 그 모든 것을 다 남겨 두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15, 16).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 즉, 그 나온 데로 돌아갈 것이다." 그가 세상에 벌거벗고 나왔을 때 그의 친지들이 그를 딱하게 여기고 강보에 싸주었듯이, 그가 떠나 갈 때도 그들은 그에게 수의를 입혀준다. 그것이 전부인 것이다(욥 1:21; 시 49:17 참조). 이 점은 우리가 왜 현재 가지고 있는 것들로 만족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로서 강조되고 있다(딤전 6:7). 신체적인 면에 있어서도 우리는 왔던 그대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티끌은 본래 있던 곳인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만약 영혼이 원래 오던 것같이 돌아간다면 우리의 형편은 비참할 것이니, 그것은 우리가 죄 가운데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성별받지 못한 채 죄 가운데서 죽고 만다면 우리는 오히려 태어나지 않았던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속인의 경우가 바로 이와 같은 것처럼 보이는데, 그 이유는 그가 "모든 점에서 올 때와 마찬가지로," 혹은 그보다도 죄많고 비참한 채 "돌아간다고"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쓰라린 폐단"이다. 그 마음이 세상에 고착되어 있는 자는 "자기가 수고하여 얻은 아무 것도 손에 들고 가지 못한다는 것을" 폐단으로 생각한다. 그의 재물은 그와 함께 저 세상에까지 동행하지 못할 것이며, 설사 따라 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서는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신앙 생활로 수고를 한다면 우리는 그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은혜와 위로를 마음 속에 가지고 갈 수 있고, 그것들로 인해 영원히 유리할 것이다. 바로 그것이 고통의 낙이 된다. 그렇지만 만일 우리가 이 세상에 있어서 우리 손만을 채우려고 수고한다면, 우리는 그 수고한 것을 우리와 함께 가져갈 수가 없다. 우리는 우리 손을 꽉 쥔 채로 태어났지만, 죽을 때는 단단히 붙들고 있던 것도 놓아 버리고 손을 편 채 죽게 된다. 그래서 전체로 보아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가 저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라고 반문하는 것은 당연하다.

세상을 위해 수고하는 자들은 바람을 잡으려고 수고하는 자들이다. 바람은 실체는 보이지 않고 소리만 많이 나며 불확실하고 언제나 그 방향을 바꾸어, 만족을 모르고 종종 해를 끼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세상 것을 꽉 잡을 수가 없으며 설령 우리 몫으로 잡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바람을 먹고 살 수가 없는 것처럼 그것은 우리를 먹여 살리지 못할 것이다(호 12:1). 인간은 임종시에 수고한 모든 이익이 바람과 같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을 발견하고 어디로 가는지조차 알지 못하게 될 때에야, 자기들이 "바람을 잡으려고 수고"한 줄을 깨닫게 될 것이다.

7. 그 소유가 많은 자들이 만약 자기들의 마음을 그 소유물에 두고 있다면 그들은 안락한 죽음을 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안락한 삶도 누리지 못한다(17절). 이런 탐욕스런 속물은 재산을 늘리는 일에 너무 열중하다 보니 "일평생을 어두움과 많은 근심 속에서 먹고 지내며 그것은 그의 질병이 되고 분노가 된다." 그는 자기 재산에서 즐거움을 얻지 못하며 스스로 즐기지 못한다. 이는 그가 근심의 떡을 먹기 때문이고(시 127:2), 더구나 타인들이 자기 것을 먹는 것을 보면 아주 큰 괴로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꼭 필요한 비용의 지출도 그에게 있어서는 짜증스럽고 속상한 일이 된다. 그는 자기 자신과 자기 주변의 사람들이 음식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조차 분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의 마지막 귀절은 이런 욕심 많은 속물들이 인생이면 누구나가 피할 수 없이 공통으로 겪는 재난도 얼마나 못견디어 하는지를 보여 준다. 그는 건강할 때면 어두운 데에서 먹으며,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한 염려나 두려움으로 항상 활발치 못하고, 만약 병이 나면 "자기 병에 대해 많은 비애와 분노를 느낀다." 그는 자기 병으로 인해 사업을 돌보지 못하는 것과 세상 것을 추구하는 일이 방해받게 됨을 속상해 하고, 자기의 모든 재산도 아무런 편안과 구원을 베풀어 주지 않는 것을 화낸다. 그러나 그는 특히 죽음에 대한 염려나(그의 질병은 죽음을 예고하는 사자이다), 자기가 애착심을 품고 있는 이 세상과 이 세상의 여러 가지 물건들을 남겨두고 떠나게 될지도 모르며, 아무 준비도 해놓지 않은 세계로 이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으로 무서워한다. 그는 "경건하게 번뇌" 하지도 않고 "회개하기 위해 한탄"하지도 않는다. 그는 "번뇌와 분노"를 느끼며, 하나님의 섭리에 성을 내고, 자기 병에 화를 내며, 자기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노여워한다. 그는 초조해지고 역정을 내는데 이것은 그의 고난을 배가시킨다. 선한 사람은 병 중에서라도 자기 고난을 인내와 기쁨으로 감소시키며 가볍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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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기쁨 (전도서 5:18-20)

솔로몬은 재물의 축재가 허무하다는 사실로부터 다음과 같이 추론하고 있다. 즉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선용하는 것이다. 즉 그 재물로 하나님을 섬기고, 선을 행하며, 우리 자신과 우리 가족을 안락하게 하는 데에 쓰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앞에서도 강조하였다(2:24; 3:22).

1. 여기에서 우리에게 권장하는 것은 육체의 욕구에 탐닉하거나 현세의 쾌락이나 이익을 우리 분복으로 삼지 말고,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편안히 통과할 수 있도록 할당해 주신 것을 건전하게, 적당하게 사용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좋은 음식을 공급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탐욕스러움으로 인하여 스스로 굶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고, 이 세상 일의 추구에 대한 열심으로 인해서, 또한 과도한 염려와 지나친 비탄으로 인해 굶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일에 봉사할 수 있도록 우리 신체를 좋은 상태로 유지시키기 위하여는 "먹고 마셔야"한다. 우리는 죽도록 "수고"만 하고 그 수고의 "이익"을 타인들이 "즐기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 손이 수고한 것은 우리가 그 위로를 받아야 하며, 때때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우리 평생의 모든 날 동안," 수고한 일의 대가인 위안을 취해야 한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며, 그는 우리 생명의 "날수"(日數)를 지정해 주셨다(욥 14:15).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 데에 이 모든 날을 사용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소명을 받아 행하는 일을 귀찮게 여겨서는 안 되며, 우리를 소명받은 일의 노예로 삼아서도 안 된다. 우리는 "우리가 수고하는 일을 기뻐해야" 하고 난처한 일과 동요됨이 없이 지낼 수 있으면 그 이상의 많은 사업을 붙잡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소명을 기뻐해야 하며 유쾌하게 그 사업을 수행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스불론이 나감을 기뻐하고 잇사갈이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한 것" 같이(신 33:18) 그 수고가 어떤 것이든 간에 "우리의 수고를 기뻐하는 것"이다.

2. 우리에게 권장하기 위해 우리에게 강조하는 것은 무엇인가?

(1) "이렇게 행하는 것이 선하고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좋으며 보기에도 좋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즐겁게 사용하는 자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주신 분에게 명예를 돌리며, 그 선물의 목적에 부응하고, 합리적이고 관대하게 행동하며, 세상에서 선을 행하고 자기들의 가진 소유물을 가장 잘 선용하는 자들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그들의 명예가 되며 위로가 된다. "그것은 선하고 아름답다." 그 일에는 의무가 있으며 단정함이 있다.

(2)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 것에서 얻어 낼 수 있는 모든 선이다. "그것은 우리의 분복이다." 우리는 이렇게 행하는 가운데에서 우리의 분복을 취하게 되며 나쁜 것을 가장 잘 선용하는 셈이 된다. 이것은 우리의 세상 소유물 중에서 얻는 우리 몫이다. 하나님도 당신의 몫을 가지셔야 하며 가난한 자에게도 그 몫은 있고, 우리 가족들도 자기들의 몫을 가지는데 우리의 몫은 바로 이것인 것이다.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세상 모든 것 중 우리의 분깃으로 떨어지는 전부인 것이다.

(3) 이와 같이 행할 수 있는 마음은 하나님의 섭리가 주시는 모든 은사 중에서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재물과 부를 주시고" 그와 더불어 "그것을 먹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시며" 그것에서 유익한 것을 취할 수 있는 지혜와 은혜를 주시고, 또 그것으로써 선을 행할 수 있도록 해주신다면 그의 은총은 완전하다. 만약 이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향락 중 "최선의 선물"로서 이것을 "간절히 탐내지" 않으면 안 된다.

(4) 이것은 우리 삶을 편안하게 하는 길이며, 땅 위에서의 삶이 당하기 쉬운 많은 노고와 곤란에서 우리를 구제하는 길이다(20절). "그는 그 생명의 날을 많이 기억치 아니할 것이니," 그의 슬프고 쓰라린 고통의 날과 작업하는 날과 통곡하는 날들을 기억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그 날들을 잊거나 아니면 흘러가 버리는 물처럼 기억할 것이다. 그는 자기의 수난을 마음에 깊이 새기지는 않을 것이며, 그 역경에 대한 쓰라린 경험을 오래도록 보유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심중의 기쁨으로 그에게 응하시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그가 수고하면서 당한 모든 비탄을 그 수고의 기쁨으로 상쇄시키시며 "자기 손의 수고를 먹도록" 해주심으로써, 그 수고에 대한 보상을 해 주신다. 설령 하나님께서 문자 그대로의 그의 욕구와 기대에 응하지 않으시더라도 그는 "그의 마음의 기쁨으로" 그들이 기대하고 바라던 것 이상으로 그들에게 응답하시는 것이다. 즐거운 심령은 큰 축복이다. 쾌활한 마음은 우리 직업의 멍에를 편안하게 해 주며 고난의 짐을 가볍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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